|
역사는 과거 현재 미래이다
- 길 위의 인문학 홍성의 숨겨진 문인과 문학 이야기 수강 후기 -
이 윤 자
길 위의 인문학 「홍성의 숨겨진 문인과 문학 이야기」라는 주제로 우리 홍성도서관에서는 3가지 주제로 강연과 현지답사를 하였으며 후속 모임으로 일정을 마무리 지었다. 강의 내내 숨겨진 문인과 문학 이야기에 고무적이고 신선한 감동을 받았다. 요즈음의 흐름은 인문학보다는 자연과학 쪽으로 젊은이들이 기우는 모습에 한편으로는 매우 걱정되기도 한다. 자연과학이 물론 발달해야 되겠지만 인문학도 균형 발전하여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무엇이든 부족하지 않고 넘치지 않아야 균형을 이룰 수 있기 때문이다. 간단히 말하여 인문학은 사람의 성정을 다스리는 학문이기 때문이다.
첫 번째 시간에는 우리 고장 갈산면 오두리의 김성달, 이옥재부부의 사랑과 문학에 관하여 문희순(충남대 충청문화연구소 연구원) 박사의 강의가 있었다.「안동세고」에 실려 있는 일상생활에서 부부간의 사랑과 삶의 모습을 남편 김성달의 시에 이옥재부인의 회답하는 형식으로 실려 있는 글들은 너무나 큰 충격이다. 이름 없이 누구부인, 누구의 어머니, 어느 가문의 며느리 등으로 불리며 가부장 제도속의 조선시대 여성이 대등한 부부 생활과 문학은 우리에게 큰 충격과 감동을 주었다. 또 현재의 사회상과 내 삶을 돌아보게 하였다. 후손 몇 대 지난 후손 또 사돈의 손길로 정성스럽게 모아든 흔적으로 우리들에게 까지 전해 온다는 것은 아름다운 꿈을 꾸고 있는 것 같다. 시의 흐름이 시냇물 흐르듯 자연스럽고, 생성하며 소멸 되는 모습처럼 감미롭다.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르고, 낮은 곳에서 높은 곳으로 거슬리지 않는다. 그 중에서 몇 편을 소개한다.
부인 이옥재의 ‘일편단심’ 고백에 남편 김성달은 한 술 더 떠서 ‘저승에서라도 만나자’ 답시를 보냈다.
〈원시〉 - 이옥재
청주옹과 옥주의 즐거움은 바다와 산에 맹서하여 단심 고치지 않네. 백년가약 중한 인연 하루와 같이 백발에 마주해도 함께 평안할 것을
<답시>
〈아내의 회음시에 차하여〉 - 김성달
끝없는 정 있음에 한없이 기쁘니 백발 꺼려 않고 단심 함께 나누고져 다시 모름지기 세세토록 부부되어 저승에서도 복록 누리며 절로 편안하기를
이 두 사람은 한마디로 ‘백년이 되어도 서로 마주하고 평안하며 죽어서도 복록을 함께 하자’의 뜻이다. 구구절절한 사랑이다. 부인 이옥재 사후에 남편 김성달의 시를 한편 더 소개 해보면
〈생각이 나서〉 - 김성달
구름 같이 짙은 머리 눈같이 흰 피부 예쁘고 예쁜 얼굴 짐짓 절로 뛰어났었지. 왜 갑자리 죽었으며 왜 그리 급히 떠나갔소? 그리움에 날마다 슬퍼 탄식 하도다.
아내 이옥재에 대한 그리움이 깊어 고통스러워하는 김성달의 모습을 만날 수 있다. 김성재 부부는 만남, 권면, 사랑, 취미 사별로 나누어 살펴보며 몇 백 년 후의 우리 후손에게 커다란 귀감이 되고 있다. 시 뿐만 아니라 많은 감동을 주는 삶의 모습은 무한하지만 여기에 자세히 쓰기란 역부족이다. 강의 다음 주에 그 분들의 흔적을 찾아 갈산면 오두리를 답사하였는데 실제 현장에서 더 큰 감명을 받았다.
다음 주에는 비운의 방랑시인 손곡 이달 선생에 대하여 김정헌(동화작가. 구항초등학교장) 선생님께서 강의를 하셨다. 비운의 방랑 시인 손곡 이달은 충남 홍성군 구항면 황곡리 하대마을에서 태어난 조선 중기의 유명한 시인이다. 주인공 손곡(蓀谷) 이달, 고죽(孤竹) 최경창, 옥봉(玉峰) 백광훈과 함께 삼당시인이다. 손곡 이달은 홍길동전을 지은 허균과 여류시인 허난설현 남매에게 시를 가르쳤던 스승이다. 손곡 이달의 시는 많이 남겨지지 않았지만 제자 허균에 의하여 그의 문집 『손곡집』이 남겨졌으며 살아생전 일화들이 단편적으로 전하고 있다. 손곡 이달은 서얼 태생으로 사회의 냉대와 한을 시로 승화시키며 자유분방한 생활로 평생을 보냈으니 한 많은 삶을 살았으리라고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현재 홍성지역에 남아있는 그의 흔적은 아쉽게도 별로 남아있는 자료들이 없다. 결성현지 등 옛 문헌에 구항면 하대마을 출신이라는 내용과 1983년에 전국시가비동호회에서 홍주읍성 서쪽 성벽 옆에 세운 손곡 이달 시비와 손곡 이달의 탄생에 관련한 설화 몇 편이 남아 있을 뿐이다.
손곡 이달 시비에 실려 있는 ‘보리 베는 노래 刈麥謠이다.
시골집의 젊은 아낙은 저녁거리가 없어서 빗속에 나가 보리를 베어 숲속으로 돌아오네 생나무는 촉촉해서 불길도 일지 않는데 문에 들어서니 어린애들은 옷자락을 잡으며 우는구나
손곡 이달은 서얼 태생으로 한계를 느끼며 뼈저리게 살았지만, 그의 빼어난 글 솜씨는 신분을 뛰어넘어 많은 문인들로부터 사랑과 찬사를 받았다. 삼당시인 중 손곡 이달은 서얼출신으로 벼슬길에 오를 수 없었지만, 최경창은 증광문과에, 백광훈은 진사시에 급제하여 벼슬을 역임하였어도 평생 손곡 이달의 지기였다. 최경창이 영광군수로 부임하여 갔을 때였다. 호방한 손곡 이달이 기생과 시장 구경을 하고 있는데 중국에서 온 비단장수가 있었다. 아름다운 기생은 그 비단을 사고 싶어 했으나 손곡 이달의 주머니는 빈털터리 일 뿐이다. 이달은 이때의 심경은 최경창에게 시로 지어서 보냈다. 이달의 시를 받아든 최경창은 손곡의 시에 한 글자씩 천금씩이나 값을 쳐서 보내주어 이달은 비단을 사서 기생에게 선물을 하였다는 일화는 얼마나 두터운 우정과 신뢰를 하고 있는지 미루어 짐작이 간다. 그 후 이달의 시는 더욱 유명해졌다고 제자 허균은 『학산초담』에 기록하였다. 이달은 양사언과도 교류를 하며 시를 보내고 답시를 하기도 하였다.
부사 양사언에게 올리다
나그네가 길 떠나고 머무는 것은 집주인의 얼굴빛에 달려 있다오 오늘 아침에 보니 훤한 빛이 없어졌길 래 오래지 않아 푸른 산을 생각해냈지 노나라에서는 거위를 대접했고 남쪽에서 돌아오던 날 마원은 율무를 가져 왔었네 가을바람이 부니 떠돌이 소진은 또 나서노라, 목릉의 관문을
이 시는 양사언이 주위 여건 때문에 이달에게 소홀히 대접함을 느끼고 떠나며 빗대어 보낸 시이다. 이시를 받은 양사언은 깜짝 놀라서 하늘에서 내려온 선인이라고 말하였다.
화려한 날개옷 입고 청도에 살던 신선이 푸른 바다로 삼천년 귀양 왔구나 오늘 아침에 봉소곡을 배워서 부니 만 리 넒은 하늘에 붉은 노을 올라탔네
양사언은 이렇게 답시를 하였으며 이달도 양사언을 높이 평가하였다.
떠돌이 집안의 원망
늙은이는 솥을 지고 숲속으로 사라졌는데 할미는 어린애 끌고 따라가질 못하는구나 사람들 만날 때마다 집 떠난 괴로움을 하소연하는데 여섯 해 동안 종군하느라고 애비 자식마저 헤어졌다네
제자 허균은 백성을 다스리는 사람들이 이 시를 보고 깜짝 놀라 가슴 아파하며 깨닫고 정치를 잘 하는 교화에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고 말하였다. 허균이 지은 홍길동전은 모르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홍길동전은 당시의 신분 제도와 시대상을 비판하면서 새로운 세상 건설의 열망이 나타나 있다. 그의 스승 이달의 직, 간적으로 영향을 받은 때문일 것이다 이달은 평생 떠돌이 생활로 부인과 자녀를 돌보지 못 하여 괴로웠을 것이다. 부인의 죽음에 슬퍼하는 시를 옯겨 본다.
아내의 죽음을 슬퍼하다
화장대엔 거미줄, 거울엔 먼지 문 닫힌 뜨락 복사꽃, 봄 더욱 쓸쓸해라 작은 다락 옛 그대로 달빛 속에 있건만 주렴 걷는 이 누구인지 모르겠구나
이달의 호 손곡(蓀谷)은 강원도 부론면 손곡리에서 한 동안 살았던 곳으로 손곡이라고 호를 지었다. 손곡리 마을 입구에는 손곡 이달의 시비와 손곡시비 쉼터가 조성되어 있다. 손곡저수지 입구 솔숲에는 작은 솔숲공원이 조성되어 있고 손곡 이달의 시 다섯 편이 여러 모양의 바위에 새겨져 있다. 여기 출생지에서도 많은 자취가 남아 후손들이 기리면 얼마나 우리 지역이 자랑스러울까? 그렇지 못 하여 마음이 공허하다. 손곡 이달의 시는 물 흐르듯 자연스럽고 마음을 흔드는 듯하여 아련하다. 지면 관계로 다 못 싣는 것이 못내 아쉽다.
셋째 과목은 소금강이라고 부르는 용봉산를 중심으로 숨겨진 문학과 전설 이야기를 한건택(충남문화재 전문위원) 선생의 강의와 안내로 답사를 하였다. 용봉산은 홍성군 홍북면과 예산군 덕산면 삽교읍에 걸쳐 솟아 있는 해발 381m이며 기암괴석이 아름답고 오르고 내리기 아지자기 한 산이다. 용봉사를 비롯하여 여기저기 절터가 남아있으며 보물 55호 지정된 신경리 마애석불을 비롯한 유적이 산재해 있다. 용봉산은 고려시대에는 북산으로 불리었고, 그 후 조선시대에는 팔봉산이라고 근래에 와서 용봉산이라고 불려진 것으로 보인다. 전설로는 노새악시바위, 하산마을 빈절골(빈대절골), ‘싸래기내’ 전설이 있다. 용봉산 골짜기에는 큰 사찰이 있었고 용봉산 주변에는 99암자가 있어 절에서 밥을 할 때마다 용봉산 아래 싸래기가 산 아래 개천으로 하얗게 휩쓸려 내려가므로 충청도의 모든 쥐들이 먹을 것이 풍부한 이곳으로 모여들었다는 전설이 있다. 용봉산은 고려시대 이래 문인들이 자주 찾던 명승지로 고려 말 조선 초의 영의정 이서(李舒), 「지봉유설芝峯類說』의 지봉 이수광, 동악 이안눌, 학주 김홍옥, 「죽음선생집竹陰先生慹』의 조희일 등 문인들의 많은 문집에는 용봉산의 절경과 용봉사에 대항 글이 남아있다. 홍주목사였던 지봉 이수광은 죽은 지 5년 후에 두 아들 성구와 민구가 유고집으로「지봉집』이 간행하였다.
억용봉사 차전운
이끼 낀 길을 걸어 영봉 최상층에 올랐네 소나무도 추우니 학도 살지 못하는데 어두운 숲속에 중이 가노라 낙엽은 바람에 실려 가고 빈 마당은 달이 등불이로다 맑은 마음은 언제나 보는 것일 뿐 등나무에 기대어 읊어 보노라
다산 정약용은 신해 사옥 시 정조의 배려로 금정찰방에 부임하여 아래와 같은 시를 남겼다.
용봉사에 들러
서해의 지역이라 명산은 적고 기름진 넓은 들만 깔리었는데 뜻밖에도 본질을 탈바꿈하여 머리 빗고 몸 씻어 평지에 나와 뭇 봉오리 드높이 솟아오르니 가팔라 투박한 살 털어버렸네 가녀린 꼴 금 새 곧 소멸할 것만 험난하여 또 다시 삼엄한 느낌 놀란 기러기 고개를 높이 쳐들고
하략
이번 길 위의 인문학 강좌는 양적으로도 대성황을 이루고 질적으로도 많은 성공을 이루었다고 본다. 그 동안 역사적으로 알려져 있는 인물들은 많이 접할 기회가 있었지만, 이번 같이 숨겨진 인물에 대한 접근 기회는 적어기 때문에 신선하고 매우 고무적이었다. 숨겨진 인물들이 지역 인사의 노력으로 조명되고 강의를 하며 지역 주민들의 많은 호응을 받아 더욱 보람 있었다. 홍성에 숨겨진 인물은 아직 많이 남아 있어 지속적으로 찾아내어 조명을 받게 되리라 생각한다. 홍성은 예로부터 충신이 많다. 최영 장군, 한용운 선생, 김좌진 장군, 성삼문 사육신 등 그래서 홍성 주민들의 긍지와 자긍심은 대단하고 자랑거리이다. 이번 길 위의 인문학 주제를 성의 있게 선정한 홍성도서관측의 큰 성과라고 본다. 김성달 부부를 강의한 문희순 박사와 손곡 이달을 강의한 김정현 교장은 홍성 지역의 향토문화에 관한 많은 저서가 있다. 용봉산 전설과 문학 이야기를 강의한 한건택 충남문화재 전문위원도 한결같이 숨겨진 자료를 발굴 하는데 많은 세월을 보낸 분으로 찬사를 받고 계시다. 조그만 단서라도 찾고자 밤낮을 가리지 않고 사람들을 만나며, 풀밭과 땅속을 파고, 수 없이 뒤지고 다닌다고 한다. 무엇보다도 「은하의 뜰」 을 쓴 중견 시인 최충식 선생께서도 열심히 참여하며 고언을 아끼지 않아 참석자들로부터 호평을 받았다.. 참여한 수강생들의 표정은 아주 진지하고 성향 또한 다양하였다. 교육자 부부, 대학생, 역사해설가, 한국으로 시집 온 일본어 강사. 팔십 넘은 시인 지망생, 칠십 넘은 한국방송통신대학교 국어 국문학과에 재학 중인 작가 지망생 등 다양하였다. 마무리 시간에는 일본어 강사에게는 태어난 일본 고향 언어와 문화와 지금 살고 있는 홍성의 언어와 문화를 비교 연구하면 좋겠다고 조언을 하는 등 개개인에게 맞춤형 조언을 해줌으로서 수강생들 삶의 질도 높이고 지역의 인문학 발전에도 크게 기여를 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