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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대 노인 Slomo의 다큐멘터리를 보며 마음을 챙기다."/ 스텔라 박
지난 3월 31일, NY Times 홈페이지의 비디오 오피니언(Opinion)에는 흥미진진한 한 남자의 이야기, Slomo라는 동영상이 실렸다. Joshua Izenberg가 프로듀싱 하고 감독한 16분짜리 다큐멘터리로 Big Young films에서 제작했다. Joshua Izenberg는 University of Michigan에서 Screenwriting으로 학위를 받은 후 카피라이터, 택시운전사, 목수 등 여러 직업을 전전해왔던 인물. Slomo는 그의 다큐멘터리 데뷔작이다.
(링크, http://www.nytimes.com/video/opinion/100000002796999/slomo.html)
제작에 참여한 또 다른 프로듀서는Amanda Micheli.오스카상을 수상한 바 있는 영화제작자이자 촬영감독으로 “Thin”, “Cat Dancers”, “30 Days”, “My Flesh and Blood”을연출했다.
이 작품은 Sheffield Doc/Fest과 Ashland Independent Film Festival에서는 최우수 단편 다큐멘터리 상과 함께 관객들이 선정한 최우수 다큐멘터리 상을 받았다. 보스톤 독립 영화제에서는 심사의원 특별상을 수상했고 Conscious Media 영화제, Indy 영화제, RiverRun영화제, Big Sky Documentary Film Festival, 오스트레일리아 Flickerfest, 이란의 Cinema Vérité영화제 등 여러 영화제에서 최우수 단편 다큐멘터리상을 받았다. 또한 International Documentary Association에서도 Slomo를 최우수 단편 다큐멘터리로 선정했으며 이 리스트는 계속 해서 이어진다.
다큐멘터리의 주인공은 Dr. John Kitchin이라는 70대의 노인이다. 한때 신경과 전문의였던 그는 어느날 문득,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것만 하고 살아도 남아 있는 삶이 그리 길지 않다는 자각을 하게 된다. 남들은 그런 자각이 들더라도 습관 때문에, 인연들 때문에, 업장 때문에 이를 박차고 다른 인생의 트랙을 잡아 타지 못한다.
하지만 그는 달랐다. 그는 가슴을 쫓아 샌디에고의 Pacific Beach로 이주해, 그가 그렇게도 좋아하는 롤러블레이드를 매일 타고 있다. 다큐멘터리는 그의 독백으로 시작된다.
“저는 전형적이고 일상화된 서구 교육을 받은 남자입니다. 만약 의식 혁명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저 역시 하루 종일일하고, 세금을내면서 다른 사람들처럼 그냥 그렇게 살다가 늙어 죽었겠지요. 그게 사실은 우리들 삶의 정해진 시나리오입니다. 매일매일, 내일은 뭔가 좀 달라질 거라는 환상에 빠진 채, 하나도 변화되는 것 없이 그렇게 살아가는 거죠. 하지만지금, 나는 전혀 다른 삶을 살고 있어요. 이제는 의식이라는 거대한 빙산의 일각인 나 자신을 매 순간, 체험합니다. (But now I experience myself like the tip of a great iceberg of consciousness.)”
바닷가에는 많은 사람들이 온다. JoshaIzenberg 감독은 퍼시픽 비치를 찾아온 이들이 Slomo, 즉 John Kitchin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를 묻는다.
“뮤지션 아닌가요? 아니면 배우?”
“베테랑(전몰군인)일지도 몰라요.”
“혹시 노숙자 아니에요?”
“뭐 하는 사람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는 여기서 매일 하루 종일 롤러블레이드를 타며 시간을 보내요.”
“아, 롤러블레이드 타는 할아버지요. 우리는 모두 그를 Slomo라고 부릅니다.”
바닷가에서 하루 종일 롤러블레이드를 타며 시간을 보내는 팔자 좋은 할아버지, Dr. John Kitchin. Kitchin 가문은 노스 캐롤라이나에서 가장 유명한 집안 가운데 하나다. 1900년대 초, 주지사를 지냈던 William Walton Kitchin과 미국 의회의 리더였던 Claude Kitchin은 둘 다 John Kitchin의 작은 할아버지들. 친할아버지인 Thurman Kitchin은 Wake Forest College의 총장이었다. 그의 집안에 대해 언급을 하는 것은, 그만큼 그가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살겠다고 결정을 내리기가 힘들 수 있었음을 말하기 위해서다.
John Kitchin은 노스 캐롤라이나의 West Forest의 농장에서 전형적인 남부 중산층 소년으로 자라났다. Wake Forest High School을 거쳐 Duke University를 졸업할 때까지도 병들어 고통받는 인류를 구하겠다는, 슈바이처 식의 원대한 포부 같은 건 없었다. 하지만 어찌 하다 보니Bowman Gray School of Medicine에 진학하게 됐다. 신경정신학과 심리학을 전공했고 메티컬 스쿨을 졸업 후에는 여러 병원에서 성공적으로 일을 해왔다.
“의사로 일하고 있던 어느날, 병원의 카페테리아에서 한 노인을 봤어요. 축축 늘어진 피부와 주름이 가득한 93세의 노인이었습니다. 그가 음식 트레이를 가져다가 자신의 앞에 놓은 후 저를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갑자기 영문도 없이 한 마디를 던지더군요. ‘Do what you want to do! (네가 하고 싶은 일을 해.)’뜨악하게 이게 웬 말인가, 싶기도 했지만 그 한 마디가제 가슴을 내려쳤습니다.”
그는 자신이 지난 20년 동안 살아도 산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I was lost in a good world for 20 years.”라는 고백이 어디 그만의 것일까? 세상의 기준으로 볼 때, 그는 상당히 괜찮은 삶을 살았다. 물론 결혼 후 1년만에 이혼을 했으니 결혼생활에는 실패했지만, 돈 잘 버는 의사가 돌싱이 되었다는 것은 모든 남자들의 로망일 수도 있겠다. 높은 연봉을 받으며 그는 오직 물질적인 것에만 탐닉했다. 페라리를 몰고, 맨션에 살면서 이국적인 애완동물도 키웠다고 한다.
그렇게 매일 매일의 삶을, 아무런 각성 없이 살아가던 그가 다람쥐 쳇바퀴 돌고 있는 스스로의 모습을 본 것이다. 1988년의 일이었다. “저, 정말 재수 없는 인간(Asshole)이었더라고요.” 하는 그의 고백이 메아리가 되어 내면을 울린다. 당시 50대에 들어선 그는 잘못 살아왔다는 후회감, 좌절감에 사로잡힌 위기의 중년이었다. 이는 신경쇠약으로까지 발전되었다.
단 한 발자국도 앞으로 나가지 못하고 똑같은 점을 쳇바퀴 돌고 있는 모습을 보았을 때, 그것도 머리가 아니라 가슴으로 진정으로 깨달았을 때, 우리는 단 한 가지 선택밖에 내릴 수 없게 된다. 과감하게 그 트랙을 빠져나오는 것이다. 내가 이제까지 살아온 방식을 180도 바꾸는 것밖에 도대체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그때 난 난생 처음, 나와 내 주변의 세계를 의심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처음으로 ‘내가 태어나 얼마나 영적으로 진화했나?’ 하는 의문을 갖게 됐습니다.”
그는 그 각성의 순간 이후, 삶을 완전히 재창조하기 시작한다. “과연 내가 어떤 일을 하길 좋아하지?” 하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진 그는 병원을 떠나기로 결심한다.
“전 바닷가에서 롤러블레이드를 타는 걸 정말 좋아합니다. 그래서 매일 롤러블레이드를 탈 수 있도록 샌디에고 인근 퍼시픽 비치로 이사를 했습니다. 제 은퇴연금 IRA를 털었어요. 그 돈으로 이주비용을 커버했고 가장 좋은 롤러블레이드를 구입했죠. 그리고 매일 아침 일어나서는, 탈 수 있는 만큼 스케이트를 탑니다. 난 롤러블레이드를 탈 때의해방감을 너무 좋아합니다.”
다큐멘터리는 태양에 그을린 구릿빛 피부의 그가 한쪽 발을 들고 롤러블레이드를 타는 모습을 다각도로 보여준다. 슬로우 모션으로 잡힌 그의 표정은 인간이 가질 수 있는 행복의 최대치를 보여주는 것 같다. “롤러블레이드를 타면서, 너무 좋아 미쳐버릴 것 같았다.”고 말하는 그의 얼굴은 섹스로 얻을 수 있는 오르가즘으로도 설명될 수 없는 표정이다.
그가 롤러블레이드를 타는 모습은 도저히 70대 노인이라고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날쌔다. 한쪽 다리만으로도 완벽하게 밸런스를 잡고 주유하듯, 해안가를 활보하는 그는 온 존재로 ‘자유’를 보여준다.
“저는 제가 하고 있는 것을 일종의 비행(Flight)이라고 생각합니다. 바람에 온 몸을 맡기고 지구의 중심과 연결되어 균형을 잡는 것이죠. 이것은 서핑에도, 명상에도 이용할 수 있어요.”
낮에 햇살을 즐기며 롤러블레이드를 탔던 그는 밤이 되면, 종교적인 시(Spiritual poem)를 암송하듯 명상을 행한다고 말한다. 그가 살아가는 소박한 스튜디오 아파트를 보니, 무소유의 삶을 실천했던 법정스님이 자연스레 떠오른다.
“세상은 우리에게 좋은 차와 은행의 여유자금, 호화로운 맨션을 가져야 한다고 말합니다. 전 아주 작은 아파트에서 정말 심플하게 살아갑니다. 제가 가진 가장 값비싼 자산은 롤러블레이드 하나밖에 없어요. 이 롤러블레이드를 타면서 저는 바닷가에서 진정으로삶을 즐깁니다. 사람들은 저를 보면 ‘Hey, Slomo!’하면서 박수를 치고 응원을 해줘요. 그들은 제가 용감하게 쳇바퀴를 벗어났다는 사실 때문에 박수를 치는 것이지요.
우리들은 만족을 모릅니다. 먹어도 먹어도 배가 고프고 마셔도 마셔도 목이 마르죠. 절대성을 경험하기 전까지 우리들은 늘 결핍상태입니다. 그런데 저는 절대성을 경험하는, 멋진 기회를 가진 것입니다.
하지만 저만 그럴까요? 우리 모두 안에 가능성이 있습니다. 우리들이 계속적인 수련을 통해 이루지 못할 것은 없습니다. 우리는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 거죠. 롤러블레이드를 타며 행복한 저는 제가 그렇게 믿고자 하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입니다. 자, 오늘이라는 시간은 온전히 당신 것입니다.(This is your good all day.)”
Slomo, John Kitchin은 그저 바닷가에서 매일 롤러블레이드를 타는 70대 노인으로 끝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시절인연은 그를 그렇게 놔두지 않았다. 그의 살아온 이야기와 회심, 각성은 영화제작자에 의해 다큐멘터리로 만들어져 뉴욕타임즈에까지 실리게 되며 수많은 이들에게도 삶을 돌아볼 기회를 창조하고 있다.
John Kitchin과 함께 1969년도에 의과대학을 다녔던 절친, Paul Izenberg은 어느날 아내와 딸로부터 Slomo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 된다. 그는 지금 잘 나가는 성형외과 의사다.
“제 아내와 딸이, 바닷가에서 천천히 롤러블레이드를 타고 오르내리는 남자를 봤다고 말하더라고요. 처음엔 그를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돌아가는 길에 그가 서있는 모습을 보게 되었어요. 알고 보니, 저의 오랜 친구인 John Kitchin이더라고요.”
그들이 의과대학을 다녔던 때는 클래스 전체가 100명도 되지 않았다. Paul과 John은 도서관에서 공부도 함께 하고 축구와 다른 운동도 함께 하던 단짝 친구였다. Paul은 John이 학교 다닐 때부터 눈부신 금발에 치열이 고르고, 오페라와 클래식 음악도 좋아하는, 아주 매력적인 캐릭터였다고 회고한다.
“그는 아주 독특하고 열정이 있었죠. 모든 사람들이 좋아했어요. 저는 학창시절로부터 40년이 지난 후, John이 샌디에고 해변에서 하루 종일 롤러블레이드를 타는, 젊은이들의 우상Slomo가 되었다는 것이 조금도 이상하지 않아요. 그에게는 그런 가능성과 끼가 있었거든요.”
Paul은 아들과 전화를 하면서 오랜 친구, John을 만났다는 이야기를 했다. 30대 초, 젊은 필름페이커인 Joshua Izenberg는 곧 아버지의 친구, John Kitchin과 통화를 한다.
“그의 말투와 남부 액센트가 전화를 끊고도 계속해서 귀에 남았어요. 정직하고 마음이 열려져 있는 사람이라는 느낌을 주더군요. 뭔가 철학자 같은 일면도 있었구요.”
극적인 삶을 살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그런 사람 모두의 삶이 다큐멘터리로 만들어져 많은 이들에게 영감을 주지는 않는다. John Kitchin의 삶이 약 두 달 넘는 시간 동안 그렇게도 SNS를 통해 전 세계로 알려진 것은 이런 인연 때문이었다.
샌디에고 인근 퍼시픽 비치로 이주를 했지만 John Kitchin은 아직도 서너 달 만에 한 번씩, 노스 캐롤라이나를 방문한다. 그곳에 남아 있는가족들을 만나고 세상 떠난 가족들의 무덤을 찾아가기 위해서다. John처럼 그의 아버지 역시 보다 심플한 삶을 살아가기 위해 법조계의 커리어를 접기도 했다니, 각성과 견성도 DNA 속에 심겨진 유전이라는 생각이 든다.
“선불교에 대해 더 많은 것을 알아갈수록 나는 아버지가 그저 살아 있다는 것을 감사해하셨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또한 그는 아버지로서, 가족들에게 빵을 공급하는 역할을 약간 비껴나가셨었다고 생각해요.이는 노스 캐롤라이나라는 전통과 규범이 모든 것인 세상에서는 정말 이례적인 것입니다.”
그는 스스로가 각성의 순간을 잡아 타고 롤러블레이드를 타며 진정으로 깨어 살아가기 시작한 것은 한 개인의 행복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한 개인의 행복은 인류를 행복하게, 그리고 이 우주를 더욱 아름다운 곳으로 만드는 첫걸음이다. 내 한 존재가 영혼의 노래를 부르는 순간, 온 인류는 더욱 아름다운 하모니를 갖게 되는 것이다.
“사람들이 내가 원하는 것을 했을 때보다, 내가 원하는 바로 그것을 시작했을 때, 나를 더 좋아하는 것 같네요. 바로 지금, 당신이 원하는 것을 하세요.”
그가 왼쪽 다리를 들고 새처럼 바람으로 화한 모습의 동영상을 보고 있자니 가슴이 뜨거워진다. 지금 나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나는 이 몸을 갖고 있는 기간 동안, 진정으로 내가 원하는 것을 하고 있는 것일까? 우선은 미주현대불교의 칼럼부터 마감해야 한다. 발등에 떨어진 불부터 꺼야 하니까. 그순간 깨닫는다. 이 역시 세상 사람들에게 영감을 주며 행복해 하는 나의 디자인에 꼭 맞는 일이라고. 이 순간을 즐겨라. Carpe die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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