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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근 명동엔 하이해리엇(왼쪽) 같은 10층 넘는 빌딩이 속속 들어서고 있다. |
대형 쇼핑몰이 잇따라 세워지고 낡은 건물이 재건축되면서 명동은 잔뜩 들뜬 분위기다. 하루 40만~50만명 선으로 추산되는 유동(流動)인구가 더욱 늘어나고 시장도 더 활성화할 것이라는 기대감 때문이다. 지난해 말 청계천 복원 이후, 주말에 명동을 찾는 사람 수는 이미 증가 추세에 있다. 지난 2월 건설교통부가 밝힌 표준지 공시지가에 따르면 대한민국에서 최고로 비싼 땅 열 곳을 모두 명동의 상가 건물이 차지했다.
활기를 더해가는 것은 명동의 겉모습뿐이 아니다. 명동의 속살도 조금씩 달라지고 있다. 10~20대 젊은층이 명동의 주요 소비계층으로 자리잡으면서 명동은 모습부터 회춘(回春)하고 있다. 1970~1980년대 명동은 패션에 민감한 멋쟁이들이나, 명동성당과 YWCA 강당(현 서울 YWCA빌딩)을 중심으로 민주화 운동을 벌인 대학생의 주요 활동 무대였다.
▲ 명동 중앙로 거리 |
지난 3월 28일 명동역에 도착하니 밀리오레 옆의 하이해리엇 건물이 개장 준비를 하고 있었다. 평당 가격이 1억6000만원이 넘어 대한민국에서 가장 비싼 땅이라는 ‘파스쿠치’를 지나 중앙로에 들어섰다. 명동 상권의 최고 핵심지라는 이곳을 젊은층을 타깃으로 한 캐주얼 브랜드들이 점령하고 있었다. ‘에뛰드 하우스’ ‘아모레 스타’ ‘더 페이스 숍’ ‘스킨 푸드’ 등 중저가 화장품 브랜드를 비롯해 ‘푸마’ ‘아디다스’ 같은 스포츠웨어와 속옷 브랜드 가게가 다닥다닥 붙어있었다.
‘에뛰드 하우스’ 앞엔 핑크빛 공주옷 차림의 점원이 바삐 움직이고 있었다. 교복을 입은 여고생들은 거울 앞에서 아이섀도와 립글로스를 직접 발라보고 있었다. 태평양 ‘아모레 스타’ 2층에 가면 3000원에 눈썹 정리 같은 간단한 화장 손질을 받을 수 있다.
▲ 아바타몰(옛 코스모스 백화점)의 코즈니 매장은 요즘 만남의 장소로 유명하다. |
대한민국의 금싸라기 땅에서 몇 천 원 하는 화장품을 팔아서 수지타산이 맞을까 싶다. 하지만 화장품은 의류보다 마진이 높고 이곳 명동에선 가게당 하루 방문객이 1000명에서 많게는 2000명에 이른다고 한다. 더 페이스 숍 명동1호점의 경우, 월세가 7500만원 선이지만 월 매출은 2억원을 웃돈다.
오후 4시가 넘으니 중앙로 부근은 더욱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스피커에서 쾅쾅거리는 음악이 흘러나오는 곳이 있기에 돌아보니 화장품업체 ‘이니스프리’였다. “자, 어서들 들어오세요. 2만원 넘게 사면 접시를, 3만원 넘게 사시면 시계를 드립니다.” 젊은 여성 세 명이 가게 앞에서 지나가는 사람들을 향해 외치고 있었다. 탤런트 현빈의 광고 사진을 내건 ‘뷰티 크레딧’ 앞에선 점원이 다이어트용 비스킷을 무료로 나눠주고 있었다.
여성만 명동을 활보하라는 법은 없다. 요즘 명동엔 젊은 남성을 타깃으로 한 대형 스포츠브랜드 업체들이 눈에 많이 띈다. ‘푸마’ ‘아디다스’ 등 스포츠웨어 업체들은 지난해 100평 넘는 규모의 초대형 매장을 이곳에 잇따라 오픈했다. 명동의 한 부동산 업자는 “이곳에선 매출을 얼마 올리느냐보다 얼마나 사람 눈에 많이 띄는지가 관심사”라며 “이렇게 생겨난 ‘안테나숍’들이 지난해부터 스포츠웨어, 화장품 쪽으로 물갈이되고 있다”고 했다.
아바타 패션몰의 ‘코즈니’라는 생활용품 가게는 요즘 만남의 장소가 되고 있다. 인형과 쿠션을 비롯해 신발, 티셔츠 등 팔지않는 제품이 없다. 요즘 지하 1층과 지상 1층 두 개 층을 통틀어 하루 매출액이 7000만원에 이른다. 8~9층에 있는 CGV 영화관에서 표를 예매한 뒤 이곳에 와서 한 시간 넘게 쇼핑하고 수다를 떠는 젊은이들이 많다. 코즈니의 홍보담당 권병준 팀장은 “신촌이나 강남 쪽으로 한 시간 내 이동이 가능하고 쇼핑, 먹거리, 영화 시설이 마련돼 있어 주말엔 하루 방문객이 2만명에 달한다”고 했다.
오후 4시 반이 지나면 중앙로와 명동길엔 진풍경이 펼쳐진다. 어디서 나왔는지, 노점상이 리어커를 이끌고 끝도 없이 거리 한복판으로 나왔다. 중앙로 길은 어느새 스카프, 안경, 시계, 액세서리 등을 파는 노점상으로 가득 메워졌다. 한 노점상은 “단속이 심했던 1~2년 전만 해도 이렇게 길거리에 노점상이 많지 않았다”며 “선거철이 오니 앞으로도 한동안 단속은 없을 것”이라고 귀띔했다.
▲ `에뛰드 하우스`처럼 명동 중앙로에는 요즘 10~20대를 겨냥한 화장품 매장이 많다. |
명동엔 ‘명동 돈가스’나 ‘명동교자’(옛 명동 칼국수) 등 40~50년 역사를 자랑하는 맛집이 많다. 전국에서 최고 땅값을 자랑하는 중앙로에는 식당이라곤 패스트푸드점인 ‘맥도날드’ 정도만 있을 뿐이다. 하지만 조금만 걸어가면 곳곳에 먹자골목이 이어진다.
아바타몰에서 명동성당으로 이어지는 명동길을 중심으로, 먹거리 식당도 성격이 갈린다. 금융가인 북쪽엔 삼겹살 식당 등 ‘넥타이 부대’를 대상으로 한 음식점과 아웃백스테이크 같은 외국 패스트푸드 체인점이 늘어서 있다. 반면 아래쪽엔 떡볶이나 순대 등 간단한 스낵을 파는 분식집과 오래된 다방 분위기를 내는 커피숍이 몰려 있다.
지난 3월 29일 오후 6시 반, 지하철 2호선 을지로입구역 6번 출구로 나오니 패밀리 레스토랑인 아웃백스테이크와 TGIF가 보였다. 캐주얼 차림의 젊은이들이 입구에 모여 있었다. 빨간 앞치마를 두른 TGIF의 직원은 “40분 넘게 기다려야 한다”며 “대기자 명단에 이름을 올려주겠다”고 했다.
그 주변으론 ‘명낙지’ ‘남원추어탕’ ‘명동순두부’ ‘민속촌’ ‘곰솥집’ 같은 식당이 늘어서 있었다. 파시미나를 두른 멋쟁이 여성도 보였지만 와이셔츠 차림의 샐러리맨들이 무리를 지어 도착했다. 식당에서 마주친 사람들은 “우리 회사 구내식당 같다”며 껄껄거리고 웃었다.
▲ 지난해부터 명동 중앙로엔 젊은 남성을 타깃으로 한 대형 스포츠웨어 매장이 들어서고 있다. |
‘명동 항아리 수제비집’의 수제비는 한 그릇에 5000원. 한 테이블당 음식값이 1만~2만원밖에 안된다. 하지만 손님이 몰리는 시간엔 테이블 한 개 당 회전율이 30번에 이를 정도다. 로얄호텔 근처의 ‘홍탁’에선 회사원들이 넥타이를 헐겁게 매고 홍합요리를 먹으며 소주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명동 일대의 식당 주인들은 한결 같이 “주변에 대형 건물이 들어서면 아무래도 식당 손님 수도 늘어나지 않겠느냐”며 대형 건물이 들어서는 걸 반겼다.
‘백제 삼계탕’이나 ‘전주 중앙회관’은 일본 관광객에게 특히 인기 있는 식당이다. 하루 평균 이곳을 찾는 손님 수가 250~300명 된다는 백제 삼계탕의 입구에 가면 관광 책자를 들고 서성이는 관광객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백제 삼계탕에선 일본어 등 간단한 외국어를 할 줄 아는 직원들이 서빙을 하고 있다.
명동은 과거 1970년대 ‘다방 거리’로 유명했던 곳이다. 아바타몰 옆 국민은행으로 이어진 골목엔 커피숍이 늘어서 있다. 1층엔 캐주얼 브랜드 숍이고 2~4층만 커피숍으로 운영한다. ‘소호’ ‘아로마’ ‘수다’ ‘가무’ ‘이슈’ ‘PATIO’란 간판이 눈에 들어온다. 커피뿐 아니라 오므라이스나 돈가스 같은 식사류도 제공한다. 강남 지역의 커피숍처럼 분위기 좋고 고급스럽진 않지만 명동만의 맛이 남아 있다.
30년 넘게 이 자리를 지켜온 커피숍 ‘가무’의 이희수 사장은 “수십 년 전 명동 증권가에서 일했던 분들이 과거 추억을 되살리며 주로 찾아온다”며 “60~70대 손님은 2층으로, 20대 젊은층은 3~4층으로 안내한다”고 한다. ‘콩가콩가’라는 커피숍에 가서 커피를 시켰더니 베이글과 아이스크림이 함께 나왔다. 찻값은 한 잔에 5000원 정도로 강남 지역에 비해 싼 편이다.
커피숍 골목을 걷다 보면 세마헤어, 준오헤어 등 미용실도 눈에 띈다. 하지만 때 빼고 광 내는 미용산업이 번창했던 명동의 미용실은 성형외과 병원에 그 자리를 내준 것 같다. 중앙로 한복판에 서서 사방을 둘러보면, 성형외과 간판이 열 개쯤 시야에 들어온다.
몇 년 전부터 명동의 성형외과나 피부과를 찾는 외국인이 늘어나고 있다. 로얄호텔 홍보실의 최영조 실장은 “명동에 숙소를 정한 뒤 이곳의 성형외과에서 수술하고 명동에서 쇼핑하는 관광객도 꽤 된다”고 했다. 밀리오레에 있는 ‘아름다운 나라 피부과’의 관계자는 “매년 주기적으로 찾아오는 일본인도 있다”며 “관광이 목적인 일본인은 몇 십 만원 정도의 피부관리를 받고 가는 반면, 300만~400만원 하는 수술을 받는 외국인 중엔 중국인이 많다”고 했다
▲ 명동 중앙로의 파스쿠치가 있는 명동빌딩 자리가 대한민국에서 가장 비싼 땅이다. |
건설교통부가 2월 말에 밝힌 표준지(48만1000필지 기준) 공시지가에 따르면, 파스쿠치가 있는 명동빌딩 부지는 1㎡당 5100만원으로, 평당 가격이 1억6869만원에 달한다. 이곳은 1㎡당 4190만원(2004년), 4200만원(2005년)에 이어 3년째 최고의 땅 값 자리를 지켜오고 있다.
1989년 개별 공시지가제가 도입된 뒤 15년간 전국에서 땅값이 가장 비싼 곳은 서울시 중구 명동 2가 33-2에 있는 우리은행 명동지점이었다. 하지만 2004년부터 이곳은 1위 자리를 명동빌딩에 내주고 비싼 땅 순위에서 3~5위로 밀려났다.
전문가들은 가장 비싼 땅의 위치가 바뀐 것은 명동 상권의 변화 때문이라고 분석한다. 명동 상권의 핵심이 과거 ‘명동길’(아바타몰→우리은행 명동지점→명동성당)이었다면 최근에는 명동역 주변의 밀리오레 쇼핑몰에서 구 국립극장으로 이어지는 ‘중앙로’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상가114의 유영상 소장은 “명동길엔 가게보다는 업무용 오피스텔이 많다”면서 “명동의 주요 소비계층이 10~20대로 자리잡으면서 쇼핑몰이 몰린 명동역 주변이 활성화됐고 그래서 비싼 땅의 위치도 바뀐 것”이라고 말했다.
파스쿠치가 있는 명동빌딩뿐 아니라 명동은 전국에서 최고로 비싼 땅이 모여있는 곳이다. 건설교통부가 2월 말 밝힌 표준지 공시지가에 따르면 전국의 가장 비싼 땅 상위 10곳이 명동에 위치해 있다. 이렇다 보니 명동에선 비싼 땅 값을 감당하지 못해 점포를 이전하고 철수하는 사례가 다른 지역에 비해 유난히 많다. 최근 스타벅스가 파스쿠치에 자리를 내줬고, 파스쿠치 바로 옆 자리를 이랜드의 의류브랜드 후아유가 아디다스에 내준 것도 그 때문이다. 명동의 한 부동산 업자는 “명동은 ‘일단 문을 열면 장사가 되는 곳’으로 알려져 있다”면서 “하지만 브랜드 홍보 효과를 노려 적자를 감수하면서도 이곳에 문을 여는 곳도 있다”고 했다
종로가 조선조 이래 1990년대까지 정치 1번지로 자리매김했다면 명동은 일제 강점기 이래 경제의 중심지였다. 일제 강점기 때 명동은 명치정(明治町)으로 불렸다. 조선식산은행, 조선은행, 미스코시 백화점 경성지점(신세계 백화점 자리)이 밀집해 있었다.
1960년대 들어서면서 명동을 중심으로 사채시장이 몸집을 키웠다. 1970년대 사채자금을 양성화한다는 조치로 등장한 게 단자회사(투자금융사)였다. 명동에 투자금융사가 우후죽순 들어선 것은 이 때문이다. 현재 여의도에 있는 증권회사도 1980년대 중반까지 명동에 모두 본점을 두고 있었다. 은행도 명동과 남대문로에 본점을 두고 있었다.
경제의 중심지로 자리잡으면서 양장점, 살롱, 양화점 등이 명동에 하나둘씩 모여들었다. 지금이야 청담동의 로데오 거리 등이 있지만 광복 이후 1990년대 초반까지 명동은 패션과 유행, 문화의 발원지로 통했다. 앙드레 김, 설윤형씨 등 거물급 패션디자이너 대부분이 초기엔 명동에서 의상실을 운영했다.
명동은 한때 ‘다방 거리’로도 유명했었다. ‘오비스 캐빈’(OB’s Cabin)은 명동을 1970년대 청바지 문화와 통기타 문화의 발상지로 자리잡게 했다. 오비스 캐빈이 있던 명동장 건물엔 이 밖에도 코스모스 살롱, 코스모스홀, 마음과 마음, 심지 다방 등이 있었다.
서울 YMCA빌딩(옛 YMCA 강당)은 마주보고 자리한 명동성당과 함께 한국 민주화 운동에서 빼놓을 수 없는 곳이다. 1975년 2월 26일엔 ‘3·1절 기념 나라 위한 기도회’가, 1979년 10·26 직후엔 ‘위장결혼집회 사건’이 열렸던 역사적 장소다.
현재 아바타몰(옛 코스모스백화점) 옆에서 시작된 작은 골목은 중국대사관(공사 중) 앞에서 직각으로 꺾여 서울 중앙우체국(공사 중) 정문까지 이어지는데 이 ㄱ자 골목이 서울 최대의 차이나타운이었다. 과거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