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계 박세당고택과 묘소
2017.5.12 경기 의정부시 장암동19
지하철 7호선 종점인 장암역 1번 출구로 나와 공영주차장을 지나 큰길 건널목을 건너면 서계 박세당사랑채 등을 알리는 표지판이 보인다.
본관 반남. 자 계긍(季肯). 호 서계(西溪) · 잠수(潛叟). 시호 문정(文貞). 참판 정(炡)의 아들. 1660년(현종 1) 증광문과에 장원, 1664년 부수찬(副修撰)으로 황해도 암행어사로 나갔다.
영진각
서계 박세당 묘역
앞 언덕을 넘으면 그의 둘째아들 박태보와 후손들의 무덤이 있다.
박세당신도비
박세당 신도비
소재지 : 장암동 산 146-1번지
규모 : 비개 105×62×16㎝, 비신 60×29×155㎝, 비좌 110×42×69㎝
내용 : 학문은 미언대의를 드러내어 밝히기에 족하고, 지조는 퇴폐한 풍속을 격려하기에 족하며, 문은 고인과 나란하기에 족하다. 이 세가지 중에서 하나만 가지고 있어도 참으로 군계일학이라 아니할 수 없거늘, 하물며 그걸 모두 겸한 자에 있어서랴. 근세부터 구이지학이 성하고, 문기는 날마다 비약으로 치달렸으며, 선비들은 또 녹을 위하여 벼슬하는 것만을 다급함으로 삼았다. 이러한 때를 당하여 선생은 홀로 온갖 영직을 사야하여 산수자연을 벗삼았고, 그 저술은 모두 옛 성현의 유지를 연구한 것이었으며, 그 문장은 또 말하고 싶은 바를 다 발로하기에 족하였다. 그렇다면, 오호라, 선생을 호결지사라 아니랄 수 있겠는가.
선생은 성 박씨, 휘 세당, 자 계긍, 반남 사람이다. 10대조 상충이 고려말에 출사하여 정을 부축하고, 사를 물리쳐 포은 정몽주 등의 제현과 명성을 나란히 하였다. 그 아들 은은 우리 태종을 보좌하여 명상으로 불렸으며, 증시는 평도이다. 그 5대 손 치천공 소는 정학과 직도로써 사승에서 빛나고 있으며, 시호는 문강이다. 그 2대 손 사재감 정 휘 응천은 증좌찬성이며, 선생의 증조이다. 조 휘동선은 의정부 좌찬참 증영의정이며, 시호는 정헌이다. 고 휘 정은 이조참판 금주군 증이조판서 이며, 시호는 충숙이다. 비 정부인 양주 윤씨는 관찰사 안국의 여식이다.
선생은 기사년(1629년 인조 7) 8월 19일에 남원부에서 태어났다. 어려서 부친 충숙공을 여윈데다 또 병난으로 해서 10세가 넘어서야 비로소 중형 승지공에게서 글을 배웠는데, 견해가 투철한 것이 많았다. 기축년(1649년 인조 27)에 모친 윤부인의 상을 당하였는데, 자식으로서의 슬픔과 예를 다하였다.
현종 경자년(1660년)에 사마시에 합격하였으며, 거푸 증광시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전례를 따라서 성균관 전적에 제수되었다. 예조와 병조의 랑을 거쳐서 사간원 정언으로 옮겨갔는데, 거기서 대사성 이은상을 논하여 위인이 경박하여 사유의 장에 맞지 않는다 하였고, 또 김좌명을 논하여 발탁해서는 안된다 하였는데, 판서 서필원이 선생에게 서신을 보내어 이르기를, "쇠퇴한 세상에 이런 의론이 있으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훗날 역사책에 '나라에 인재가 있었다'고 기록되리라." 하였다.
계묘년(1663년 현종 3년)에 사헌부 지평에 제수되었다. 거기서 또 도승지 임의백의 잘잘못을 논하니, 요로에 있는 고간 대작들이 공을 더욱더 질시하였다. 갑진년(1664년 현종 4)에 옥당에 선입되어 연거푸 수찬과 교리에 제수되었다. 겨울에 왕명을 받들어 해서 지방의 민정을 살펴보았다. 돌아와서는 다시 옥당으로 들어가서 지제교가 되었다.
상이 전조(이조)에서 상의 뜻을 거스른 것에 노하여 이조판서 김수항을 파면하니, 간관과 유신들이 줄줄이 반대의 상소를 올렸고, 또 줄줄이 배척되었다. 이 때를 당하여 선생은 "이 일에 대해 말하는 자들이 다만 견책 당한 사람을 변호할 줄만 알 뿐, 상께서 잘못하신 것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는지라, 이와 같이 분분한 지경에 이르렀다."하고, 차자를 올려 이일에 대해 논하니 상의 노여움이 가시었다. 이 때에 교리 김만균이 북사를 회피해야 한다고 상소하니 쟁단이 크게 일어났는데, 선생이 옥당에 있으면서 ㅇ머호하니, 선생에 대한 비방의 의론이 비등하였다.
병오년(1666년 현종 7)에 상이 온천으로 행차하면서 길에서 치달리니, 시위 군졸 중에 쓰러진 자들이 많았고, 심지어는 죽는 자까지 발생하였다. 이에 선생이 차자를 올려 경계의 말을 아뢰니, 상이 가납하였다. 가을에 북도의 병마평사가 되었고, 이듬해 수찬으로 조정에 돌아왔다. 상이 가뭄을 근심하여 구언하니, 선생이 응하여 상소를 하였는데, 거의 오천여언에 이르렀다. 침린침족의 법을 혁파하고 천역을 균평하게 하며, 훈국을 혁파하여 어영에 합칠 것을 청하고, 그 네가지 좋은 점과 네가지 좋지 않은 점을 갖추어 아뢰었다. 그 외에 또 "재용을 넉넉하게 하려면 씀씀이를 줄여야 하고, 씀씀이를 줄이려면 낭비를 끊어야 한다. 낭비를 끊으려면 마땅히 궁중부터 솔선수범해야 한다." 하였다. 그 말이 명명백백하고 적절하여, 식자들이 옳게 여겼으며, 또한 그가 세상에 크게 쓰이지 못함을 한스럽게 여겼다.
동궁이 <소학>을 배우려고 하였는데, 상이 언해와 구두가 대단히 어려운데다 바르지 못하다 하여, 옥당에 명하여 개정하게 하였는데, 다른 여러 동료들은 불감당이라 하며 꺼려 하였으나, 선생은 언해의 잘못은 주설의 잘못에서 비롯되었다 하고, 드디어 여러 주설들을 모아서 변박하여 올리니, 상이 유신에게 명하여 우재 송시열에게 질정하게 했는데, 우재는 그 논한바의 정확함에 감탄해 마지 않았다. 지금 통행되고 있는 신본 언해는 선생이 개정한 것이다.
무신년(1668년 현종 9)에 석천동으로 돌아갔다. 집을 짓고 나무를 심어서 거기에서 여생을 보내려 하였다. 연달아 삼사와 춘방으이 벼슬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나아가지 않았다.
가을에 이조좌랑에 제수되었다. 선생은 출사하라는 조정의 명을 오래도록 듣지 않았기 때문에, 조정에서는 추고하라는 특별한 명을 내렸다. 연경으로 가는 서장관에 차정되었다. 산천과 도리 지명에 대해 우리나라 사람들이 잘못 전하고 있는 것이 많았기에 선생이 옛 기록을 살피고 현지 거주민의 말을 참고로 삼아 많은 것을 정정하였다. 때마침 상원절이라서 밤에 정사 부사와 함께 거리로 나가 불꽃 놀이를 구경했는데, 귀국했을 때 대관 중에서 정사에게 오래전부터 유감을 갖고 있던 자가 이일을 빌미로 삼아 탄핵하였다. 이일이 해결되고 난 뒤 연거푸 교리와 헌납 전랑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취임하지 않았다.
외직으로 나가서 통진현의 현감이 되었다. 이 해에 기근이 들어서 온 정성을 다하여 구휼하고 있었는데, 조정에서는 백성들 중에서 토착하고 있는 자들만 진휼하고, 유리걸식하는 자들에게는 음식을 주지 말라고 하였다. 그러나 선생은 "백성들을 살리는 것이 급하니, 어찌 구별하리오."하고 두루 구휼하니, 경내에서 굶어죽은 자가 없었다. 관사가 좁고 누추하여 자신의 봉록으로 수선하고 백성들을 조금도 번거롭게 하지 않으니, 백성들이 크게 기뻐하였다.
신해년(1671년 현종12)에 헌납이 되었으나, 석천동으로 돌아왔다. 연달아 사간, 응교, 사복정, 보덕, 집의 등의 벼슬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취임하지 않았다.
계축년(1673년 현종 14) 가을에 봉상시 정에 제수되었다. 이 때에 봉령릉을 옮기게 되었는데, 도청으로서 장인들을 감독하라는 명을 받아서 열심히 일에 임했으나, 병으로 교체되었다. 이로부터 7년 사이에 누차 사사에 제수되고 그 사이에 종부시 정, 밀양부사에 제수되기도 하였으나, 모두 나아가지 않았다.
경신년(1680년 숙종 6)에 응교가 되었는데, 선생이 사양하는 소를 올리니, 상이 별지를 내리기를, "그대의 염퇴와 청고의 절개는 근자에 드물기에 내 일찍이부터 아름답게 여겼었다. 조정으로 부를 때마다 간곡히 사양하여 나오지 않았는데, 그대 마음을 돌리지 못하는 것이 나에겐 한이었다. 이번에 다시 벼슬을 내리고, 그댈 기다리고 기다리니, 그대는 절대 사양하지 말고 속히 출사하라." 하였다. 이에 선생은 상소하여 사양하며 이르기를, "병으로 해서 염퇴의 칭찬을 받았고, 가난으로 해서 청고의 칭찬을 입었습니다."하고 끝내 나아가지 않았다. 겨울에 자급이 올라서 승정원 동부승지에 제수되었다. 인경왕후가 승하함에 선생이 조정으로 들어가서 이전의 은명에 사례하였으며, 교체되어 돌아왔다. 이후로부터 선생의 발자취는 디디어 도성에서 끊어졌다.
신유년(1681년 숙종 7) 이후로 공충청도 관찰사, 사간원 대사헌, 홍문관 부제학, 이조참의에 제수되었는데, 어떤 것은 혹 두번 혹 세번 제수되기도 하였으나, 모두 사양하여 다른 사람으로 교체되었다.
기사년(1689년 숙종 15)에 중궁이 폐위되자, 아들 응교공(박태보)이 항소를 올렸다가 모진 고문을 받고 섬으로 유배되는 명을 받았다. 선생이 이에 감옥으로 달려갔다가 응교 공을 따라서 노량진에 이르렀을 때 그 상처가 혹심한 것을 보고 영결하여 이르기를 "저번에는 혹간 너의 회생을 희망하기도 하였지만, 지금 네 상처를 보니 그럴 가망성이 없을 것 같구나. 죽고 사는 사이에서는 ㅗ름지기 조용히 죽음을 기다려야 한다." 하니, 응교 공이 " 네, 알겠습니다."라고 공경히 대답하였다. 응교 공이 죽었을 때 선생은 소거에다 싣고 동강에 반장하였다.
이후로 조정의 명이 오래도록 이르지 않다가, 갑술년(1694년 숙종 20) 여름에 연신의 말을 인하여 음식물이 하사되었고, 얼마 안 있어 특명으로 호조 참판에 발탁되었다. 을해년(1695년 숙종 21)에는 또 공조판서에 발탁되었는데, 상국 윤지완이 천거한 것이었다. 누차 참찬, 대사헌, 한성부 판윤 겸 지경연사, 홍문관 제학에 제수되었다.
무인년(1698년 숙종 24)에 기사에 들어갔다. 기묘년(1699년 숙종 25)에 연신의 말을 인하여 숭정의 자급이 더해졌다. 선생이 두번이나 상소하여 간절히 사양하였거늘, 또 예조판서, 중추부사에 제수되었다. 선생의 선고 충숙공이 전례를 따라서 마땅히 증직되어야 했기에, 자제들이 조정에 청하고자 하니, 선생은 "선자께서는 이미 공훈으로 증직이 있었으니, 어찌 내 노직으로 허질을 더하여 조정의 기적의 영광을 가리리요."하고불허하였다. 경진년(1700년 숙종 26)에 이조판서가 되었으나, 여섯번 소를 올려서 교체되었다.
임오년(1702년 숙종 28)에 백헌 이상국(이경석)의 비문을 지었는데, 우재 송시열을 바로 배척하여 조금도 비호하지 않았다. 이에 중노가 불같이 일어나서 상소하려 했으나, 임금의 마음을 움직이기에 부족하다 하여, 선생이 지은 <사변록>을 들어서 일찍이 주자를 능멸하였기에 주자를 존봉하는 사람을 먼저 배척했다하여, 그 사람에게 죄를 주고 그 책을 불태울 것을 청했다. 그러자 상은 과연 그 청을 받아들여 삭관과 문출을 명했으며, 대각에서 계를 올려 멀리 귀양을 보내야 한다고 하여 호남지방의 옥과현으로 귀양가게 되었다. 선생이 병든 몸을 이끌고 길을 오르려 할 때, 이인업 공이 소를 올려 이르기를, "아무개의 고상한 풍채와 높은 절의는 쇠퇴한 풍속을 진작하기에 족하며, 하물며 아들 태보가 세운 수립한 것이 저와 같이 탁월함에랴. 전에 이르기를, 자문의 후손들도 그 십대까지 잘못이 있어도 용서를 받았다 하였는데, 어째 태보의 절의로 그 아버지마저 지킬 수 없는 것입니까." 하니, 상이 명을 거두어 드였다.
선생이 집으로 귀가하여서는 병이 더욱 심해졌다. 임종하던 날에 좌우의 사람들에게 이르기를, "내가 곧 죽을 것 같으니, 어찌 자리를 펴고서 죽음을 기다리지 않으리오." 하고, 부축을 받아 나와서 청사로 옮겨가서 졸하셨으니, 계미년(1703년 숙종 29) 8월 21일이다. 이해 시월에 집 뒤로 백여보 쯤 떨어진 을좌의 자리에 묻혔다. 두 부인이 합장되었다.
선생은 돈후하고 정확하여 조금의 허위도 없었다. 공부는 한결같이 충신을 근본으로 삼았으니, 일찍이 이르시길 "충신은 사람이 사람이 되는 까닭이다. 만약에 충신하지 못하다면 사람이 될 수 없을 것이니, 한시라도 염두에 두지 않아서야 되겠는가." 하셨다.
성현의 글을 읽을 때에는 구로써 장을 헤아리고, 장으로써 그 전체를 헤아렸다. 그 뜻을 터득했더라도 반복해서 읽어 반드시 글 전체를 꿰뚫고자 하였다. 그러므로 글에 착간이 있거나 자구의 오탈이 있으면, 선생의 눈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선생이 저술한 <사변록>은 비록 앞사람들이 밝히지 못한 것들을 밝힌 것이 많지만, 그 서술이 평이박실하며 기이함을 추구하지 않았다.
일찍이 이르시길, "회암(주자)은 용의가 주도면밀하여 애초에 미처 알지 못했던 것이 아니다. 지금의 학자가 그가 의심을 일으킨 것을 인하여 회암이 그 뜻을 미처 알지 못했다고 말한다면, 이는 회암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자이다." 하였다.
또 이르시길, "나의 저술에는 참으로 선유의 견해와 다른 것이 혹 있기도 하지만, 그러나 이는 다행히도 정주(정자와 주자)의 뒤에 태어났기 때문이다. 만약에 정주가 내 앞에 있지 않았더라면, 내가 무얼 알 수 있었겠는가." 하였다.
또 이르시길, "자로 같은 공자의 둘도 없는 제자도 오히려 공자에게 '선생님의 우활하심이여!'라 하였다. 옛사람들은 제 뜻에 합치되지 않는 것이 있으면 변론을 마다하지 않았다. 그러나 후세의 사람들은 의리가 어떠한가는 따져보지도 않고 단지 말 끝만 살펴서 괴이하다 하니, 이는 엣사람들과 크게 다른 것이라 아니할 수 없겠다." 하였다.
또 일찍이 이르시기를, "칠원(장자)은 도를 본 것이 가장 정밀하므로 제자들이 거기에 미치지 못한다. 그 해석은 갈수록 절묘하여 혹 한글자라도 놓칠까 두렵다. 그 이치는 참으로 지고하다. 그러나 맹자를 보면 한마디 말로 그것을 다 드러내었다. 인성에 대해 논한 것들은 번쇄함을 면치 못하지만, 이것이 바로 <맹자>와 <장자>의 차이이다." 하였다.
또 이르시기를, "<논어>와 <맹자> 속의 말들은 일상의 살 속에서 절실하지 않은 것이 없다. 사람이 그것을 읽되 취하여 실용하지 않거늘, 오히려 학문한다 하면, 나는 그 사람을 학문한다고 도저히 말할 수 없겠다." 하였다.
또 문인들에게 이르기를, "문예를 자기의 일로 삼고자 하는 자는, 독서할 때 반드시 머저 그 의리를 탐구하지 않으면 안된다. 의리를 터득했다면, 그 문예는 나아감을 별도로 구하지 않아도 절로 나아갈 것이다. 만약 암송에만 제 마음을 오로지 한다면, 비록 문예라 한지라도 성취를 볼 수 없을 것이다." 하였다.
또 일찍이 이르시길, "하늘이 이 백성을 내었을 때 모두 제 직업이 있었다. 일반 백성들 중 제일을 게을리하여 제 힘으로 먹지 못하는 자와 사대부 중 제할일 하지 않고 노는 것을 고상한 운치로 여기는 자들은 모두 하늘이 버린 사람들이다." 하였다.
또 이르시길, "흉덕으로는 두가지가 있으니, 오만함과 게으름이다. 오만함은 다른 사람을 거스르는 것이며, 게으름은 자신에게 해가 되는 것이다." 하였다.
또 일찍이 노장의 글을 취하여, 거기서 말한 도리가 왕왕 정밀하고 지극하다 하여 주석을 하였다. <노자>를 풀이 하였을 때에는, 그 풀이가 설고공의 집해에서 벗어나지 아니했는데, 선생이 미처 그 글을 보지 못했는데도 그 합치됨이 이와 같았다. <남화경>에 대한 풀이는 전무후무할 정도로 빼어났는데, 하늘이 준 신해로 평할 수 있을 것이다.
선생의 문장은 간결하고 아건하였으며, 특히 논변에 뛰어났다. 선생은 다른 사람의 글에 대한 감별이 귀신 같았으니, 일찍이 "다른 사람의 글을 보고서 그 글이 당의 것인지 송의 것인지 명의 것인지 근세의 것인지를 분별할 수 없다면, 그 사람을 일러 무목이라 하여도 괜찮다." 하였다.
거처하신 석천동은 토지가 척박하여, 봄 여름이면 선생도 직접 농부들과 힘든 일을 함께 하였으며, 농사로 부족하면 땔나무를 해서 팔고, 그것으로도 부족하면 배 밤 살구 복숭아를 심어서 가계를 도왔다.
일찍이 스스로 서계 초수 묘문을 지어서 이런 일들을 기록했다.
남부인은 두 아들을 두었다. 장남은 태유, 문과 출신이며 지평이다. 집에서는 효제하였으며, 조정에서는 강방하여 끝내는 머나먼 곳으로 귀양가서 거기서 죽었다. 초취는 참봉 김하진의 여식이며, 1녀를 낳았다. 승지 이덕부에게 출가했다. 후취는 사인 정조의 여식이다. 두 아들을 낳았으니 필기와 필모이다.
차남은 태보이다. 문과에서 장원급제하였으며, 홍문관 부응교이다. 문학과 재식이 있었으며, 포부가 매우 컸다. 기사년(1689년 숙종 15)에 항언으로 죽었다. 부인은 우의정 완남 부원군 이후원의 여식이다. 1녀를 낳았다. 진사 이덕해에게 출가하였다. 선생은 필모에게 명하여 후사가 되게 하였다.
정부인은 1남2녀를 두었다. 아들은 태한, 현감이다. 초취는 이희중의 여식이다. 2남 1녀를 낳았다. 아들은 필손이며, 나머지는 어리다. 후취는 황식의 여식이다. 장녀는 현감 이렴에게 출가하여 1남 2녀를 두었다. 아들은 현필이며 첨정이다. 나머지는 어리다. 차녀는 교리 김홍석에게 출가하여 3남1녀를 낳았다. 측출의 여식은 여필건의 아내가 되었다.
선생은 일찍이 삼년 상식은 비례라하여, 사후에 속습을 따라서 행하지 말며, 다만 삭망 때에 은전 만을 행하여 고례를 회복하라 하였으니, 선생께서는 "장례를 끝내고 졸곡하였으며, 정설의 전 마저도 치워졌다면, 삼년 상식 할 이유가 어디에 있겠는가. 장례를 아직 치루지 않았다면 살아계실 때처럼 하고 장례를 이미 치렀다면 그렇게 하지 않는 것, 이것이 바로 성인이 정하신 법이니, 지금 그걸 어지럽게 하는 것이 옳겠는가." 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선생이 돌아가셨을 때 자손들이 선생의 뜻을 따라서 상식을 행하지 않았다. 그러나 정호 등이 이는 예속을 어긴 것이라 하여, 끝끝내 선생과 그 자손들을 죄로 얽으려 하였으니, 이는 해도 해도 너무한 처사가 아니랴.
나 덕수는 약관의 나이에 선생 밑에서 공부를 하였는데, 선생의 가르침은 지극하신 것이었다. 지금 어느덧 40여년, 백수가 되도록 아무 이룬 것도 없으니, 그저 송구스러울 뿐이다. 지금 필기가 비문을 청하는데, 회고해봄에 개연히 탄식을 금할 수 없다. 선생의 관벌과 세차를 기술하고, 평소에 하신 마씀들을 부기한다. 세행의 경우는 일일이 다 기록할 수 없다. 명왈
맹자는 "부귀와 빈천과 위무에도 도의를 꿋꿋이 지켜나가야 대장부라 할 수 있다." 하였다. 지금에 와서 그런 자를 구해본다면 선생을 놓아두고 어디에서 찾을 수 있겠는가. 선생은 <맹자>를 아주 좋아하였는데, 읽고 있노라면 자신도 모르게 춤을 출 정도라고 하였으니, 그 의기투합을 상상하고도 남음이 있겠다. 성현의 오묘한 뜻을 궁구하여 그걸 평이하게 설명함과 문장의 단아함 등으로 말해 볼것 같으면, 참으로 선생 같은 이가 드물다. 나는 앞에서 <장자>에 대한 선생의 주석을 두고 이는 신해라고 할 수 있다 하였는데, 그 어떤 이가 그 잘못을 찾아낼 수 있을까. 아아! 사람은 백순과 같아야 되니, 경전에 대한 해석이 다르다 하여 그 설을 비난하는 것이 옳겠는가. 그런 일은 이제 그만두어야 할 것이다. 수락산의 언덕, 그 하늘이 상스럽도다. 어찌 예를 표하지 않으리오. 선생이 여기에 묻혀 계시도다.
<숭정대부 판중추부사 행이조판서 예조판서 공조판서 한성ㅂ판윤 대사헌 홍문관제학 겸동지경연사 시 문정 박공 신도비명 병서>
<자헌대부 홍문관 예문관 대제학 겸이조판서 전의 후인 서당 이덕수 근찬>
<십대손 정재공 후예 정서 근서>
추기
아서계공께서 하세하신지 어언286년이 지났다 공의 신도비명을 이덕수 선생이 찬하신지도 이미 오래이나 주손들의 불민한 탓으로 석물수립이 지연되었으니 자손된 도리로 오직 송구하고 심히 부끄러울 따름이다 이에 후손들의 협조와 9대손 승진 승슨 11대종손 찬호 등이 갈력하여 이 비를 세운다
1989년 기사 10월 9일 근서
박태보(1654~1689) 무덤
박태보는 조선시대 후기의 문신으로, 자는 사원(士元), 호는 정재(定齋), 본관은 반남(潘南)이다. 박세당의 둘째 아들로 박세후에게 입양되었다.
숙종때 문과에 급제하여 전적을 지냈다. 예조좌랑으로 있을 때 남인의 모함을 받아 선천에 귀양갔다가 복직되었다. 성품이 결백하여 아부를 하지 않았으므로 시기하는 자가 많았으나, 왕의 총애를 받았다. 이조좌랑으로 암행어사가 되어 호남 지방을 시찰할 때 폐단을 시정하여 백성들로부터 존경을 받았다.1689년 기사환국때에 서인으로 인현왕후의 폐위를 반대하다가 숙종의 노여움을 사 심한 고문을 받고 진도로 귀양가는 도중 노량진에서 죽었다. 숙종은 후회를 하고 이조판서에 추증하였다. 그 뒤 다시 영의정으로 가증되고 문열(文烈)이라 시호가 내려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