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로사 로사 (의정부교구 인창본당)
지난 겨울, 취업에 필요한 영어 성적을 얻기 위해 자신 있게 휴학을 신청했다. 원하는 점수를 얻는 데 두 달 걸리리라 예상했다. 2년 전 묵주기도를 바칠 때 주님께 도움을 청하며 공부했는데 두 달 만에 꽤 높은 점수를 받았기 때문이다. 어려서부터 기도를 꾸준히 해왔고 크고 작은 바람을 청할 때마다 거의 다 이뤄졌다. 한결같으신 주님이 아닌가. 이번에도 청하면 반드시 도와주시리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이 고통의 시작일 줄은 전혀 몰랐다.
그동안 해왔던 공부들을 다 접고 오로지 영어에만 매진했는데도 성적은 예상보다 더디게 올랐다. 하루 종일 학원에서 수업 듣고 공부를 해도 마찬가지였다. 이전보다 낮은 점수가 나온 적도 있었다. 두 달이 네 달이 되고 여섯 달이 되려고 했다. 시간은 가는데 원하는 점수가 나오지 않으니 점점 불안해졌다. 나중엔 매일 60단씩 하던 기도를 20단 이하로 대폭 줄이고 공부했다.
그렇게 무작정 하니 점수가 오르긴 했다. 그런데 이번엔 몸이 아프기 시작했다. 위가 아파서 밥도 잘 못 먹고 입 안에 염증이 나서 수술까지 받았다. 오래 앉아 있어서 그런지 허리에 통증이 심해져 물리치료도 받았다. 아침에 정형외과에 갔다가 바로 이비인후과에 들러서 진료를 받고 학원에 갔다. 점점 기운이 처지고 우울해졌다. 이런 상태로 계속 가다간 정말 우울증에 걸리겠다싶어 본능적으로 묵주를 다시 잡았다.
'이제 기도를 다시 시작했으니 점수도 올려주시겠지'라고 믿었지만 내 성적은 여전히 비슷한 자리에 머물러 있었다. 불과 몇 개월 전의 자신감은 풍선에 바람 빠지듯 줄어들었다. 주위에서 넘치게 공부한다는 소리를 들을 정도였는데도 안 되니까 분했다. 꼭 누군가 내가 공부하는 걸 방해하는 것만 같았다. 하느님이 원망스러워졌다. 도대체 내가 뭘 잘못했냐고, 남들 다 무난하게 얻는 점수 하나를 안 주시냐고 했다. 그러다 잘못을 빌고 용서 청하기를 여러 번 반복했다. 너무 힘드니까 성체조배실을 자주 찾았다. 그곳에 가면 내 안에서 터져 나오는 불안감을 있는 그대로 받아주는 듯했다. 허리에 통증이 심해지고 무기력함이 자주 찾아와 공부를 제대로 못해도 묵주만은 놓지 않았다. 성모송을 마냥 되뇌다 보면 아파도 견딜 수는 있었다. 이제는 살기 위해서 묵주기도를 바쳤다.
봄이 오기 전에 끝내겠다던 영어공부와 함께 여름을 맞이했다. 여느 때처럼 성체조배실에서 묵주기도를 드리는데 갑자기 마음속에서 '저는 당신 없인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하는 고백이 튀어나왔다. 그러면서 지난날들이 떠올랐다. 나는 그간 사람들에게서 받은 인정과 칭찬을 '내 것'으로 갖고 있었다. 그 모든 것이 하느님에게 받은 선물인데, 내 공로로 돌려놓고 살았던 것이다. 내 안의 굳건한 자신감은 교만이었다. 하느님께서는 이 자만심을 꺾기 위해 뿌리부터 송두리째 흔드셨던 것이다. 나는 하느님의 도우심 없이는 제대로 앉지도 서지도 못한 존재였다. 이토록 내가 보잘것없음을 알게 되니 이상하게도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 내 몫이라고 여겼던 부분들이 주님의 몫으로 넘어가면서 부담감이 사라졌다.
고작 영어공부만 하는데도 기도와 함께하니까 주님께서 더 좋은 것을 마련해주셨다. 하느님은 단순히 내 바람보다 더 큰 깨달음을 주시기 위해 이 모든 일을 허락하셨음을 알았다. 묵주기도는 고통을 감내하는 힘도 주고, 하느님께서 나에게 무엇을 원하시는지도 일깨워줬다. 묵주기도만 했는데 피정에 다녀온 것보다 더 가까이 주님을 느낄 수 있었다. 아직도 나의 목표점수는 안 나왔지만 더 이상 버겁지 않다. 이 세상을 살기 위해 필요한 조건을 얻기보다, 세상을 만드신 하느님이 보시기에 좋은 삶을 살려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먼저 배웠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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