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설(傳說)의 고장 홍천(洪川)·정선(旌善)
2. 3둔(三屯) 4가리(四耕)와 십승지지(十勝之地)
조선 시대에 유행한 정감록(鄭鑑錄)에 ‘난을 피해 편히 살만한 곳이 3둔(三屯) 4가리(四耕)’라는 말이 있고, 또 십승지지(十勝之地)라고 하여 난(亂-전쟁)을 피할 수 있는 장소 10곳을 지정하기도 하였다.
조선 시대에 들어 왜구의 노략질로 골머리를 앓았는데 마침내 선조(1592년)에 이르러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엄청난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되고, 전쟁이 끝나는가 싶더니 5년 후 또다시 쳐들어오니 정유재란(丁酉再亂, 1597)이다.
이 일제(日帝)의 침략으로 잔인하기 이를 데 없는 왜놈들의 만행에 치를 떨게 되는데 난을 피할 수 있는 곳으로 정감록(鄭鑑錄)에서 명시(明示)한 곳이 삼둔(三屯) 사가리(四耕)와 십승지지(十勝之地)이다. 정감록(鄭鑑錄)은 조선 시대에 민간에 널리 유포되었던 도참서(圖讖書)인데 이 책의 내용은 도참설(圖讖說)을 구체적으로 명시한 기록으로, 도참(圖讖)이라고 하는 것은 운명이나 미래를 예언한다는 의미이다. 어찌 보면 황당무계한 내용인 이 정감록(鄭鑑錄)은 당시 무식한 일반 백성들에게 엄청난 파장(波長)을 일으키기도 했는데 신선(神仙) 사상이 주류를 이루는 중국의 도교(道敎)와 일맥상통하는 점도 있다고도 하겠다.
우리나라 대표적인 예언서이기도 했던 이 정감록은 여러 가지 감결류(鑑訣類)와 비결서(秘訣書)의 집성(集成)이며 이본(異本)이 많은 것이 특징인데 저자가 불명확한 것도 특징이라고 한다.
정감록에서 지명(指名)한 3둔(三屯) 4가리(四耕)의 3둔은 강원도 홍천군의 살(生)둔, 월(月)둔, 달(達)둔이고 4가리는 강원도 인제군(麟蹄郡)의 아침가리, 적가리, 연가리와 홍천군(洪川郡)의 명지가리였다.
둔(屯)은 농사짓기 좋은 펑퍼짐한 산기슭을 말하는데 살둔(生屯)은 내린천(內隣川) 상류의 깊은 계곡으로 임진왜란과 한국전쟁 때에도 희생자가 한 명도 없었다고 한다.
이 살둔(生屯)은 조선조, 세조(世祖, 首陽大君)가 단종을 폐위시키고 정권을 왕권을 잡은 후 단종의 복위를 모의하던 사육신(死六臣) 등을 대상으로 엄청난 피의 회오리가 휩쓸게 되는데 이후 사육신의 후손들이 이곳 홍천 살둔(生屯)으로 피해 와서 숨어 살아 무사했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근처의 월(月)둔, 달(達)둔은 현재 사람이 살지 않는 오지이지만 예전 사람이 살았던 마을 흔적은 있다. 4가리(四耕)도 농사지으며(耕) 난을 피해 평화롭게 살 수 있다고 꼽은 네 곳인데 삼척 무장공비 침투로 환난을 겪은 후 정부에서 이곳에 살던 주민들을 모두 대피시켜서 현재 두어 가구만 남아있다.
십승지지(十勝之地) 또한 3둔4가리와 비슷한 의미인데 3둔4가리가 강원도에 집약(集約)되어 있는데 십승지지(十勝之地)는 넓은 지역을 가리키는 말로 강원 영월(寧越), 경북 풍기의 금계촌(金鷄村), 경남 합천 가야산 만수동(萬壽洞), 전북 부안(扶安) 호암(壺巖) 마을, 충북 보은 속리산 증항(甑項), 전북 남원 운봉 동점촌(銅店村), 경북 안동 화곡(華谷: 봉화), 충북 단양의 영춘(永春), 전북 무주(茂朱)의 무풍(茂風) 여덟 곳을 가리킨다.
3. 달변가(達辯家) 우리 고모부(姑母夫)
용인(龍仁)의 탄천(炭川) / 저승사자(西洋) / 염라대왕 / 동방삭(東方朔)
내가 어렸을 때 이웃에 살던 우리 고모부는 당신 말씀으로 ‘학교 문턱에도 못 가 보았고, 낫놓고 기역자도 모르는 판무식(判無識)’이셨지만 말을 시작하면 청산유수(靑山流水)요 세상에 모르는 것이 없는 달변가(達辯家)셨다. 어쩌다 한가한 시간이 있어 한 번 입이 열리면 동년배 어르신들은 물론이려니와 우리 또래의 어린아이들을 앉혀 놓고도 이야기가 한도 끝도 없이 이어지곤 했다.
후일 보니 주요 내용이 정감록(鄭鑑錄)이었는데 3둔은 어디 어디이고, 4가리는 어디 어디가 틀림없다는 둥, 난을 피할 수 있는 십승지지(十勝之地)는 어디 어디라는 둥, 조선이 망하면 정도령(鄭道令)이 계룡산에 새로운 나라를 세우리라는 예언이 있는데 지금 현대의 정주영이 틀림없다는 둥...
또, 어디서 들었는지 60년을 3천 번, 즉 1만 8천 년을 살았다는 ‘삼천갑자 동방삭(三千甲子東方朔)’ 이야기며, ‘도참설(圖讖說)’과 ‘정감록(鄭鑑錄)’ 등은 말할 것도 없고 어찌 보면 황당무계한 이야기들인데 얼마나 확신에 차서 설명을 해대는지 엄청나게 신기할뿐더러 모두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너희들 삼천갑자 동방삭을 들어봤나? 아, 저승사자의 실수로 젊은 동방삭이 염라대왕 앞에 끌려왔는데 염라대왕이 명부(名簿)를 보니 잘못 데려왔거든. 그래서 얼른 돌려보내라고 호통을 쳤지. 그런데 동방삭이 염라대왕이 한눈을 파는 사이 명부를 슬쩍 드려다 보니 자기 이름 밑에 수(壽) 일갑자(一甲子/60년)라 쓰여 있거든. 아, 그래 이놈이 몰래 붓을 들고 한일(一)자를 삼천(三千/1만 8천 년)으로 바꾸어 썼대. 그리고는 돌아와서 냅다 도망 다니며 저승사자를 피한 거여.
노한 염라대왕이 숨어다니는 동방삭을 당장 잡아오라고 하였는데 저승사자가 수소문하여보니 동방삭이 마침 조선(朝鮮) 땅에 있는 것을 알고 우리나라로 와서 시냇가에서 시치미를 뚝 떼고 앉아서 숯을 씻고 있었거든.
마침 동방삭이 지나가다가 이상하여 물어보았더니 저승사자가 시치미를 뚝 떼고 ‘숱이 검어 더러워서 씻고 있다.’고 하자 동방삭이 ‘내가 삼천갑자(三千甲子)를 살았지만, 숯이 검다고 씻는 놈은 첨 봤다.’고 하자 저승사자가 냉큼 잡아갔다는 거여. 그 숯을 씻던 냇물이 바로 용인(龍仁) 땅 탄천(炭川)이여.’
*현재 용인에는 강바닥이 검은 탄천(炭川)이 실제로 흐르고 있다.
4. 정선(旌善)에 전승되는 설화(說話)들
정선에는 전해오는 설화(說話)가 많은데 주로 지명(地名)과 풍수(風水)에 얽힌 것이 많다.
그중에서 서너 가지를 골라 소개해 본다.
<1> 계룡잠(鷄龍岑) 비장지(秘藏地)
정선군 북면 상원산(上元山) 부근의 지명이 옛날에는 도원(桃源)이었다고 하는데 이곳 어느 곳에 계룡잠(鷄龍岑)이 감추어져 있다는 전설이 있다.
옛날 포수(捕手)가 사슴을 쫓는데 사슴은 보이지 않고 암벽(岩壁)에 구멍이 보였다고 한다.
무심코 바위굴 속을 들어가 보니 꽃이 피고 따사로운 햇살이 비치는 별천지여서 집으로 돌아와 가족을 데리고 그곳에서 살려고 찾아갔으나 아무리 헤매어도 찾을 수가 없었다는 설화이다.
※ 계룡잠(鷄龍岑)은 낙원(樂園), 무릉도원(武陵桃源)과 같은 의미의 낱말이다.
<2> 문영소(文寧沼) 전설(傳說)
옛날 정선에 신문영(辛文寧)이라는 선비가 살았는데 벼슬을 하고 싶어 고을 원님을 찾아다녔지만 뜻을 이루지 못하자 마을 앞 산자락의 못(沼)에 스스로 뛰어들어 자살했다고 한다.
그 후 밤마다 원님의 꿈에 나타나 원망을 하자 원님은 죽은 신문영을 좌수(座首)에 추증(追贈)하고 위령제(慰靈祭)를 지내주었더니 다시는 꿈에 나타나지 않았다고 한다.
원래는 소(沼)의 이름이 문영소(文寧沼)였는데 와전(訛傳)되어 구영소라고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3> 왕(王)바위 전설
정선읍에 황씨 성(姓)을 가진 부자(富者)가 살았는데 어느 날 스님이 와서 시주(施主)를 청하자 하인을 시켜 쇠똥을 한 바가지 퍼주며 내쫓았다. 스님이 돌아서며 이 집안은 곧 망할 것이라고 뇌까리자 화가 난 황부자는 머슴 왕바우를 시켜 중놈을 잡아 오라고 하였다.
스님을 쫓아가던 왕바우는 조양강(朝陽江) 가에서 돌(바우/왕바위)이 되어버렸고 황부자도 얼마 지나지 않아 망해버렸다는 전설이다.
<4> 영천(靈泉) 설화
가리왕산과 마주보며 우뚝 솟아있는 바위봉우리를 암봉(巖峰)이라고 하는데 이 바위봉우리가 흰색을 띠고 있어 백석봉(白石峰)이라고도 부른다.
그런데 이 암봉이 검은색으로 변하면 며칠 안에 큰비가 내렸다고 전해지며, 암봉 아래에는 영천(靈泉)이라는 샘이 있었는데 부정한 사람이 마시면 샘이 말라버렸다는 설화(說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