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아가서 안에서 성을 인간에게 허락된 선물로서 바라봅니다. 물론 선물이라고 하는 것은 결혼 관계라는 틀 안에서 누려야 될 선물입니다. 사랑이라는 것은 계약을 지키고자 하는 신실함입니다. 저는 젊은 남녀가 결혼을 해서 가정을 꾸린다고 했을 때 이것은 엄청난 결단이라고 봅니다. 왜 엄청난 결단이냐면 결혼이라는 것은 내가 배우자로 선택한 이 사람에게 평생 동안 배타적인 사랑을 쏟겠다는 다짐과 결단 아닙니까. 이것이 어떻게 보면 우리 인간 안에 있는 성적인 욕망, 이것을 절제하겠다는 겁니다. 다른 사람에게 한눈팔지 않겠다는 겁니다. 이 사람과 내가 약속했던 언약의 신실함을 죽을 때까지 지켜내겠다는 겁니다. 그래서 어떻게 보면 인간이 결단할 수 있는 최고의 결단이 한 사람에게 평생 사랑을 배타적으로 쏟겠다고 하는 결혼의 서약이라고 봅니다. 엄청난 겁니다.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결혼이라는 관계 안에서 허락하신 선물로서의 성은 굉장히 중요한 겁니다. 우리가 어떻게 인생의 배필, 짝을 만날 것인가 하는 것은 정말 중요한 과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인간의 성에 대한 이야기를 나눌 때 또는 배필을 만나는 이야기를 나눌 때 꼭 기억해야 될 것이 창세기 2장 18절의 말씀입니다. 모든 배필은 돕는 배필이 되어야 합니다. 남편이 아내에게, 아내가 남편에게 돕는 배필이 되어야 합니다. 이 돕는 배필이라는 것이 무조건 상대방이 원하는 바를 지지해주고 격려해주고 응원해주고 힘 실어주고 그런 것이 아닙니다. 보통 목사님들이 주례하실 때 우리 아내는 남편의 돕는 배필이라고 이렇게 얘기할 때 이 돕는 배필을 무조건 힘을 실어주고 위로하고 응원하고 지지하는 것으로만 생각하기 쉬운데 히브리어 원어로 ‘에제르 크네그도’라는 말입니다. 첫 번째 의미가 뭐냐면 ‘반대하며 돕는다’는 겁니다. 대등한 관계에서 돕는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을 대신 한다는 겁니다. 쉽게 얘기하자면 A라는 존재에게 하나님이 도우시고자 하는 바가 있습니다. 그것을 하나님을 대신해서 도와주는 겁니다. 그런데 첫 번째 의미가 너무 중요한 겁니다. 돕는 배필의 첫 번째 의미는 반대하며 돕는다는 겁니다. 여기 뭐가 전제되어 있는 거냐면 인간이 실수할 수 있는 존재라는 겁니다. 사람이 생각하는 것이 늘 올바르다, 사람이 행하는 것이 늘 올바르다 그러면 이 사람을 돕는다는 것은 그가 생각하는 것이 현실이 될 수 있도록 그가 행하는 것을 더 열심히 할 수 있도록 힘을 실어주고 지지하는 것이 그를 돕는거겠죠. 그런데 반대하는 것이 그를 돕는거라는 겁니다. 이 말 속에는 뭐가 전제되어 있는 거냐면 사람이 실수할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이 전제되어 있는 겁니다. 어떤 사람이 잘못된 생각을 합니다. 이때 이 사람을 어떻게 하는 것이 진짜 돕는 겁니까? 그 잘못된 생각을 지지해주고 응원해주고 그것이 현실이 될 수 있도록 행하는 것이 돕는겁니까? 아닙니다. 그 잘못된 생각을 반대함을 통해서 그 생각이 현실이 되지 않도록 만드는 것이 진짜 돕는거죠. 누군가가 잘못된 행동을 합니다. 이때 이 사람을 진짜 돕는 것은 어떤 거죠? 이 사람의 잘못된 행동이 지속되지 못하도록 반대하는 것이 이 사람을 진짜 돕는 겁니다. 사도행전 5장에 보면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 이야기가 나옵니다. 아나니아 삽비라 부부가 땅을 팔았습니다. 돈이 생겼습니다. 그런데 그 가운데 한 사람이 먼저 누군가에게 이런 얘기를 했겠죠. ‘여보 우리가 땅 판거 다 바치기는 아깝지 않아, 그냥 일부만 바칩시다, 그리고 사도 베드로가 이것이 땅을 판 가격의 전부냐고 물어보면 가격 전부라고 말합시다’ 라고 누군가가 먼저 제안했을 겁니다. 그런데 상대방이 진짜 돕는 배필이 되고자 했다면 반대해야죠. 이 잘못된 생각이 현실이 되지 않을 수 있도록 반대해야죠. 이것이 진짜 돕는 배필인 겁니다. 그래서 저는 결혼이라는 것은 내 인생에 스승을 맞이하는 의식이라고 생각합니다. 내가 때로는 분별력이 없을 때 나로 하여금 올바른 분별력으로 깨우쳐 줄 수 있는 사람, 하나님의 뜻이 어디에 있는가를 나에게 알려줄 수 있는 사람, 내가 잘못된 생각과 행동을 할 때 반대함을 통해서 나를 도와줄 수 있는 사람, 이런 인생의 스승을 맞이하는 것이 결혼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결혼이라고 하는 것은 정말 중요합니다. 배우자를 잘 선택하는 것, 결혼이라는 관계 안에서 하나님이 주신 선물을 잘 향유하는 것이 너무나 중요합니다.
이 아가서에는 몇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성경이 있으시다면 아가서를 펼쳐 보십시오. 아가서 1장부터 8장까지 쭉 한번 보시면서 다른 성경 본문과 구별되는 중요한 차별성을 찾아 보십시오. 아가서만의 특징이 좀 있는데 아가서를 1~8장까지 넘겨 보시고 그리고 바로 다음에 나오는 이사야를 보십시오. 아가서와 이사야의 어떤 중요한 차이가 있습니까? 아가서는 단락에 소제목이 없습니다. 예를 들어 아가서 8장과 이사야 1장을 비교해보시고 아가서 8장 전체에 소제목이 없죠. 그런데 이사야 1장 2절 위에 보시면 ‘여호와의 말씀’이라는 소제목이 있죠. 그런데 아가서에는 1~8장까지 이 단락의 소제목이 없습니다. 단락의 소제목이 없다는 말은 어디부터 어디까지를 끊어야 할지가 애매하다는 겁니다. 그리고 소제목을 뭐라고 붙여야 할지 애매한 겁니다. 그런데 성경의 모든 본문을 보시면 다 단락이 있습니다. 그 단락의 가장 중요한 내용을 소제목으로 뽑고 있습니다. 그런데 아가서는 어디부터 어디를 끊어야할지 애매모호 하고 뭐라고 소제목을 붙여야 할지 애매모호하기 때문에 그래서 아예 어떤 소제목도 없는 본문이 바로 아가서입니다. 그래서 아가서를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는 것 가운데 하나는 이 아가서를 하나의 드라마나 연극 대본으로 이해하시면 됩니다. 그런데 학자들이 이 아가서를 설명할 때 굉장히 좀 난감해하는 것 가운데 하나가 뭐냐면 이것이 하나의 연극 대본 같은 것인데 여기 핵심적인 주인공이 2명인지 3명인지를 정확하게 말하기 어렵습니다. 쉽게 얘기하자면 솔로몬이라는 왕과 술람미라는 시골 여인의 사랑 이야기인지 아니면 솔로몬이라는 왕과 술람미 여인이 있는데 이 술람미 여인이 원래 사랑했던 남자가 있는 겁니다. 그런데 솔로몬이 이 여인을 자기의 궁녀로 선택함을 통해서 이 여인이 남자와의 사랑을 이어가지 못하고 솔로몬에게 온 겁니다. 그런데 이 여인은 이 남자를 잊지 못합니다. 그래서 솔로몬과 술람미 여인 사이의 두 사람의 사랑 이야기인 것인지 아니면 솔로몬 왕과 술람미 여인과 술람미 여인이 원래 사랑했던 남자 간의 사랑 이야기인지 이것조차도 명확하게 규명할 수 없는 것이 아가서입니다. 아가서에 대한 주석서를 보시면 대부분 저자가 먼저 이것을 명확하게 하고 시작합니다. 나는 아가서를 솔로몬 왕과 술람미 여인과의 사랑 이야기로 이해한다 그러면 그 관점에서 아가서를 쭉 푸는 겁니다. 그런데 또 어떤 사람은 나는 아가서를 솔로몬과 술람미 여인, 그리고 술람미 여인이 원래 사랑했던 한 남성 그리고 왕에 의해서 이 사랑이 지속되지 못하고 끊겼다가 이 여인이 남성과의 사랑을 잊지 못하고 결국 왕을 거부하고 다시 이 남성과 결합하는 이야기 이렇게 또 해석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아가서는 어렵습니다. 그래서 아가서가 성의 아름다움, 남녀 간의 뜨거운 사랑이 얼마나 아름다운가 이것을 우리에게 알려주기는 하지만 아가서는 어디부터 어디까지를 끊어야 될지도 난해하고 소제목을 뭐라고 잡아야 할지도 난해합니다. 성경 66권 가운데 소제목이 없는 유일한 본문입니다. 단락을 끊어내지 못하는 유일한 본문이 아가서이다, 그러면 아가서를 어떻게 읽어야 할 것인가 하나의 연극 대본으로 아가서를 읽을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도 전제를 하고 들어가야 됩니다. 솔로몬 왕과 시골 술람미 여인의 사랑 이야기로 읽을 것인지 아니면 솔로몬과 술람미 여인과 술람미 여인이 원래 사랑했던 한 남성의 관계에서 읽어야 될 것인지를 전제하고 이 아가서를 바라봐야 된다, 여기까지 해서 시가서를 마무리 하고 마지막으로 욥기부터 아가를 짧게 정리하도록 하겠습니다.
욥기는 욥과 세 친구의 논쟁이 주이다, 전통적인 이스라엘 신학, 신명기 신학에 대한 주장과 신명기 신학이 말하는 인과응보를 받아들일 수 없는 새로운 세대 간의 패러다임 충돌 그다음 이방의 압제 가운데에서 승승장구했던 사람들이 인과응보의 논리로 자신을 정당화했는데 도리어 이방의 압제 가운데 신음하던 의인들의 항변을 모아놓은 것이 욥기입니다. 그다음에 시편은 찬양 모음집이다 그래서 예루살렘 성소와 지방 성소에서 불려지던 찬양들을 모아놓은 것이 시편이고 찬양은 곡조가 있는 기도이다, 그리고 매 안식일마다 회당에서 하나님 말씀인 율법을 선포하고 그 하나님이 주신 말씀에 대한 인간의 응답으로 시편을 낭독했습니다. 그래서 토라가 5권인 것처럼 시편도 5권이고 토라를 153개로 나눈 것처럼 시편도 150편으로 나누어서 3년 주기로 낭독했습니다. 그다음에 잠언은 지혜의 책입니다. 잠언이 말하고 있는 지혜는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내딛는 삶입니다. 그래서 많은 지식을 축적한 결과 지혜를 얻게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인생의 한 걸음, 한 걸음을 내딛는 것을 성경은 지혜라고 말한다, 그리고 잠언도 저자가 다양합니다. 표제가 7개가 있습니다. 그 가운데 3개가 솔로몬의 잠언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전도서는 우리가 잠언, 전도서, 아가를 솔로몬 3부작이라고 하는데 잠언도 솔로몬의 잠언이다, 아가도 솔로몬의 아가다 라고 명시되어 있지만 전도서에는 솔로몬이라는
이름이 나오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1장 1절에 “다윗의 아들, 예루살렘 왕, 전도자의 말씀이다” 이것 때문에 여기 나오는 전도자가 솔로몬이 아닐까 생각하는데 여기 다윗의 아들이라는 것이 꼭 아들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후손일 수도 있고 다윗의 통치를 받는 백성일 수도 있습니다. 또한 왕이라는 것이 꼭 왕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지도자를 말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그 전도자가 누구인지를 명확하게 규정하기 어렵다, 1장 12절과 1장 16절을 보면 과거에는 지도자였는데 지금은 아닌 것처럼 말하고 있고 선대에 많은 왕이 있었다는 전제를 하는데 솔로몬 앞의 선대는 사울과 다윗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공동체 안의 불의한 재판들, 관료들의 타락과 부패 이런 비판을 제3자적 관점으로 하는 것을 보면 솔로몬으로 보기는 조금 어렵습니다. 그리고 전도서는 사색적 지혜를 말하고 있다, 잠언이 인과응보에 근거해서 말하는 실천적 지혜라면 욥기나 전도서는 이 인과응보에 대한 문제 제기 이것을 사색적 지혜라 말합니다. 잠언과 전도서가 다 난해하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잠언이 난해한 이유는 이 짧은 지혜의 말씀이 나오게 된 배경, 사건을 정확하게 알 수 없기 때문에 아무데나 잠언의 말씀을 적용하게 되면 위험해 질 수 있다, 전도서가 어려운 이유는 이것이 헬레니즘에 대한 반박인 것인데 이 헬레니즘을 반박하기 위해 인용하는데 인용 표시가 없다 보니까 이것이 인용을 한 것인지 아니면 전도자의 주장인지 정확히 알기 어렵다, 그래서 사실 성경만 봐서 알 길이 없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헤브라이즘에 대한 공부를 따로 해야 되는 겁니다. 그래야만 전도서 안에서 이것은 헤브라이즘의 주장인데 그리고 이것은 헬레니즘의 주장인데 라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이지 전도서만 봐서 이것이 헬레니즘의 주장인 것인지 헬레니즘을 반박하기 위한 헤브라이즘의 주장인지를 정확히 알 길이 없습니다. 마지막으로 아가를 보았습니다. 아가는 노래 중의 노래, 가장 아름다운 노래라는 것인데 하나님이 인간에게 결혼 관계 안에서 허락하신 성에 대한 찬미입니다. 한 남성과 한 여성의 뜨거운 사랑 이야기입니다. 아가서 안에 굉장히 노골적인 육체에 대한 묘사도 많이 있기 때문에 미성년이 읽기에는 조금 부적절하고 문자 그대로 읽을 때 성인들조차도 부담스러운 겁니다. 그래서 오랜 시간 동안 풍유적으로 아가서를 많이 해석했는데 이 풍유적인 해석은 큰 틀에서는 설명할 수는 있지만 모든 등장 인물에 대해 누구를 가리키는지를 설명하는 것이 쉽지 않다, 그리고 풍유적 해석이라는 것은 결국 그가 차지하고 있는 지도력의 위치에 따라서 권위가 부여되는 문제가 발생합니다. 아가서만의 특징이라고 하는 것은 소단락이 없다, 소제목이 없다 그 다음에 아가서 해석을 난해하게 여기는 이유는 이것을 하나의 연극 대본으로 이해할 수 있는데 여기 핵심적 주인공이 솔로몬 왕과 술람미 여인인 것인지 아니면 솔로몬 왕과 술람미 여인과 술람미 여인이 사랑했던 남성인것인지 이것조차 명확하지 않기 때문에 아가서를 해석하는 것이 굉장히 난해하다 여기까지 우리가 살펴보았습니다. 여러분 8주 동안 시가서 강의 열심히 경청해주셔서 감사드리고 이후에 다시 좋은 강의로 찾아뵙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