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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중에 간구하는 자의 복]는 말씀을 이루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고후1:1-11
주신 말씀 고후1:11절을 중심으로 [간구함으로 고난을 이기는 자의 복]이란 제목으로 선포되는 멧세지를 통해 은혜가 충만한 시간 되길 기도합니다.
본서는 바울 사도가 자신의 사도직과 사도적 권위를 변호함으로써 고린도 교회 성도들과의 완전한 화목을 도모하면서 동시에 교회의 질서를 확립하고자 기록한 서신입니다.
바울이 AD51년경 고린도 교회를 세우고 1년6개월동안 목회하다가 안디옥 교회로 귀환한 후 3차 전도여행을 마치고 55년까지 에베소에서 사역을 하는 중 고린도 교회에서 많은 문제에 봉착해 있으며 고린도 교회에서 질문한 여러 가지 에 대해 답변을 기록한 고린도전서를 보냈지요.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은 유대에서부터 온 거짓 사도들에 미혹되어 바울의 권면은 받아들이지 않을뿐더러 사도권을 의심하는 등 오해와 불신이 점점 더 커가고 있어 고린도를 근심의 방문을 하게 되었으나 고린도 교회의 배척으로 실패한 후 다시금 눈물의 편지를 쓰게 되었고 이 편지를 본 고린도 교인들이 대부분 회개하였다는 소식을 들은 바울이 그들을 격려하고 그때까지 남아 있던 거짓 선지자들의 선동으로 남아 있던 오해를 불식시키기 위해 자신의 사도권 변호를 주로 한 편지를 마게도냐에서 56년경 기록하여 디도에게 보낸 것이 본 서신 고린도후서인 것입니다.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보낸 편지는 3차에 걸쳐 보냈으나 소위 눈물의 편지는 실전되고 전, 후서만 우리에게 전해지고 있지요.
교회가 완전한 화목을 도모하고 교회의 질서를 확립하기 위해서 무엇보다 성도들의 간절한 기도가 요구된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와 관계가 회복되기는 하였지만 아직도 잔존하고 있는 불신을 떨쳐버리고 완전한 화목을 도모하고자 고린도 교회에 간구함으로 우리를 도우라고 말할 수 있었을까요?
[간구함으로 고난을 이기는 자의 복]을 이루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할까?
첫째로 삼위 하나님께서 사역자를 위로해 주시길 기도하라(1-7)
바울은 자신이 하나님의 뜻에 의해 사도가 된 자로 언급하고 있습니다.
여러 차례 방문 계획 변경으로 바울과 고린도교인들 사이에 형성된 오해와 갈등의 고리를 끊기 위해 고린도 교회 2차 방문 때 바울을 배척한 성도들을 용서하를 표명함과 동시에 고린도 성도들 역시 바울을 용서하라고 함으로써 진정한 화해를 호소하고 있습니다.
목회자들의 기본적인 자세는 인간적인 생각과 판단에 따라 행동하기 보다는
하나님을 섬기는 일꾼으로써 하나님의 뜻 의도 목적 계획을 이루고자 하는데 우선을 둔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겉으로 드러난 상황만 가지고 목회자를 판단하고 비난하기에 앞서 시간을 가지고 지켜 보면서 오래참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목회자 역시 하나님 앞에 늘 신실하고 진실되게 행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신을 따르는 자들을 사랑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지만, 자기를 배척하고 비난하는 사람을 용서하고 포용하는것이 리더쉽입니다.
성도는 목회자를 믿어주고 목회자는 진실하고 겸손하게 성도들에게 사실을 해명하는 아름다운 풍토가 절실히 요청되고 있는 때입니다.
1-2절을 통해 바울 사도는 고린도 교인들에게 축도를 하면서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임을 명백하게 밝히는 것입니다.
당시는 자천서와 타천서가 교회 지도자로써 권위를 인정할 때 중요하게 여겼기에 12 사도의 추천서 없이 스스로 사도라고 천명하는 바울 사도의 사도직을 의심하고 있었기에 , 자신의 사도된 것이 사람들의 추천으로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으로 된 것임을 명시적으로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
뜻이란 말 θελήματος(델레마토스)는 θέλημα가 원형으로 바라는 것, 이루기로 작정한 것, 기뻐하는 상황, 성취하고자 하는 욕구등의 의미를 지닌 단어로써 바울의 사도됨이 하나님의 경륜 안에 있는 목적을 따라 된 것임을 분명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특히 고린도 교회에서 디모데의 사역이 성공적이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본 서신의 서두에 언급한 것은 교회 지도자로써 권위를 여전히 지지 하고 있음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당시 고린도 교회에는 추천장을 가지고 와서 자신들의 권위를 주장하는거짓 선지자들이 바울을 모함하고 디모데를 배척하는등 교회는 문란하게 하는 행위가 빈번했었던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의 사도권을 방어하고 고린도 교회를 하나님의 교회로 선포하도록 함으로써 교회는 인간이 좌지 우지 할 수 있는 곳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께 속한 교회임을 명백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좋은 교회는 목회자의 권위를 인정하고 돕고 협력하여 선을 이루어감으로써 하나님 나라를 확장해 나가는 것입니다.
바울은 축도를 하면서 파벌과 분쟁에 휩싸여 있던 고린도 교회에 화해의 열매인 은혜와 평강이 절실히 요구되는 상황에서 하나님 아버지와 우리 주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오는 것임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3-7절에서는 위로의 하나님께 대한 찬양과 감사의 고백이 나옵니다.
찬송하리로다는 Εύλογητος(율로게토스)는 히브리어 바룩에서 나온 번역어로써 바울 자신이 찬양하는 하나님을 다양하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찬양 받으실 하나님은 천지창조의 하나님 출애굽의 하나님에서 이제 그리스도인들에게 성육신 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로 알려진 것입니다.
찬양 받으실 하나님은 자비의 아버지시다는 것은 유대인들의 회당예배에서 사용되던 예전적 기도문에서 “오, 우리 아버지, 자비로우시며 관대하신 아버지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에서 사용하던 히브리어 라하밈의 번역어로써 내장을 지칭하는 단어로써 불쌍한 자를 보면 내장까지 뒤틀릴 정도로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생긴다고 해서 불쌍히 여김, 동정, 긍휼이라는 의미가 여기에서 파생되었습니다. (스프랑크니조마이)
찬양 받으실 하나님은 위로의 하나님이시다. ‘위로의’로 번역된 παράκλησις(파라클레시스)는 곁에서 부름이란 뜻이며, 하나님의 내적 속성인 자비가 외적 행위로 구체화됨을 나타냅니다. 바울이 환난 가운데서 단순히 위로 받았을 뿐 아니라 그 화난으로부터 건짐 받았음을 말합니다. 특히 파라클레시스는 성령의 속성 즉 παράκλητος(파라클레토스)다른 보혜사라는 뜻을 가지고 있어 제3위 성령 하나님이 역사하심을 통해 하나님이 주시는 위로를 경험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위로의 궁극적인 원천이 되시므로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 너무 당연하고 감사하는 이유가 된다는 것입니다.
목회자와 성도가 하나가 되어 이교도들의 핍박뿐 아니라 교회내의 율법주의 자들과의 갈등이나 환난을 잘 극복하도록 하심으로 자기가 약할 때 그리스도를 의지함으로써 오히려 강해질 수 있고, 또 그로 인해 고난에 처한 타인을 위로할 수 있는 성도가 되어야 될줄 믿습니다.
5-7절에서 바울은 자신이 겪는 고난과 위로가 그리스도와 직접적으로 관계 있음을 말하고 있는데 자신이 겪는 고난을 통해 예수님의 고난을 체험한다는 것입니다.
산이 높으면 골이 깊듯이 고난이 큰 만큼 위로 역시 커서 고난 받는 자들을 덮어 그 고난을 너끈이 이기게 하실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영광에 참여하기 위해 당연히 받아야 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위로가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것이기에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수난 뒤에 부활과 승천 및 그 후의 영광에 들어간 것처럼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성도마다 그 고난에 비교할 수 엇는 영광을 받을 것 이라는 소망을 주고계신 것입니다. 이러한 소망이 극심한 고난 속에서 넘치는 위로가 되는 것입니다.
지금 당하는 고난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장차 나타날 영광을 바라보는 것만으로 현재 당하는 고난을 이길 수 있는 성도 여러분 되시기를 원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사귐이라는 성도의 교제를 통해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한 자마다 위로에도 반드시 참여하게 될줄 믿습니다.
사순절 기간에 경건한 활동과 기도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을 체험하는 기간이기도 합니다.
기독교 교회사에서 사순절을 교회의 주요 절기로 지키기로 한 것은 AD 325년 니케아 종교회의에서였다. 이후 엄격히 지켜오면서 지금까지 이어져 왔다.
한국교회도 매년 사순절이면 묵상집 등을 펴낸 성도들이 말씀 안에서 지내도록 독려하는가 하면 교회 별로 특별새벽기도회, 금식기도 기간을 선포해 주님의 고난에 동참했다.
또 성도의 불필요한 소비는 없는지 점검하고 구원 및 부활과 관련한 묵상을 하면서 하나님과의 만남을 도왔다.
TV 시청하지 않기 등 문화금식 운동, 사랑의 헌혈과 장기기증, 소외이웃 돌봄행사를 진행하기도 한다.
성도들은 사순절을 어떻게 보내야 할까. 목회자들은 각별히 구별되는 생활을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무엇보다 내면을 살피는 시간, 받은 은혜에 감사하는 시간,
그리하여 하나님과 이웃과 화해하는 시간이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가족과 함께 가까운 교회의 새벽기도나 금식기도, 심야 기도회에 참석할 것을 권면했다. 또한 성경읽기나 성경쓰기, 성경 암송 등을 시도해 보는 것도 좋은 신앙자세라고 말했다.
- 국민일보 14. 3. 4. 25면 출처
사순절은 로마교회가 미신적으로 지키는 것을 종교개혁자 루터가 폐지하였으며, 1999년 84차 총회에서 사순절은 기도와 경건하게 그 정신을 계승하면서 마지막 고난주간에 동참한다고 하였습니다.
다시 말해 사순절 기간에 어떤 행사위주보다는 예수님의 고난에 참여하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에 참여하는 경건한 절기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간구함으로 고난을 이기는 자의 복]을 이루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할까?
둘째로 부활 신앙으로 당당히 고난 앞에 서라 (8-10)
8-9절에서 고난에 대한 바울의 생각과 태도를 배울 수 있습니다.
살 소망까지 완전히 사라진 극한 상황에 몰려 있을때 왜 나에게 이런 고난을 주느냐고 하나님을 원망하고 부모탓을 하고 다른 사람을 비난하시겠습니까? 아니면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며 자포자기하고 절망의 늪으로 들어가시겠습니까? 대한민국이 세계에서 자살율 1위를 수년채 기록하고 있습니다.
눈부신 경제성장의 그늘이 엄청난 빈부격차가 부정과 부패와 기회의 공정성이 사라지니 소망을 잃고 극단적인 방법을 택합니다.
우리사회에서 없어져야 할 것은 부정과 부패, 특권층의 권력남용, 저출산, 자살, 부의집중현상과 일확천금을 노린 무노동(무위도식)입니다.
기독교 신자가 자살하는 것은 죄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죽인 살인죄입니다. 그러나 우울증등 정신병을 앓고 있는 환자를 치료하는 것이 우선입니다.
인간은 형통하거나 혹은 자기의 능력이 뛰어나다고 생각될 때, 하나님 보다 자기를 의지하기 쉽습니다.
그렇게 볼 때 혈통이나 신분, 능력 면에서 뛰어난 바울은 분명 자기를 의지할 만한 소지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자기 힘으로 어쩔 수 없는 극한 상황을 주시므로 자기를 의지하려는 마음을 버리고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광야로 인도하시어 40년 동안 먹을 것도 없고 물도 없고 도가와 뜨거운 태양과 추위로 극한 상황을 주시면서 하나님만 의지하는 믿음의 훈련을 하신 것입니다.
신8:3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너로 알게 하려 하심이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토라가 기초입니다. 토라는(모세오경) 율법으로 613가지를 제시하는데 하라는 말씀은 사람의 뼈마디 수와 같은 248개와 하지 말라는 365개의 말씀으로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면 골수가 윤택하게 될 것이며, 365일 동안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라 합니다.
성경에서 역사서는 (수, 삿, 삼상하,역상하.왕상하....)는 토라에 적용된 삶을 말하며, 시가서등 성문서는(시,욥. 잠, 전, 아)는 토라의 신앙고백이며, 계시적 예언을 이사야서나 예레미서등에 포함하고 있습니다.
신약 성경 복음서는 살아있는 토라가 이 땅에 오시어 토라를 재해석해 주신 것이며, 사도행전은 기록된 토라와 살아있는 토라가 하나를 이루어 짧은 시간에 세상을 변화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서신서는 토라의 삶에 대한 해석이며 계시록은 토라의 완성이라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르시되, 여호와께서 가라사대라는 토라 즉 하나님의 말씀이 성경의 기초이므로 이 토라를 허물지 말고 오늘 우리에게 성령의 감동을 통해 주시는 시대마다 가장 적절한 해석을 주시는 성령님을 의지해야 합니다.
환난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 인도해 주실 줄 믿기 때문에 찬양하며 기다려야 합니다.
환난 중에서도 즐거워해야 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성령님의 인도하심이 있고 예수님이 나의 주님이 되어 주시어 동행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고난 중에 눈물로 밤을 새우며 환난 중에 주님을 의지하는 법을 배웁니다.
극한 상황은 절망의 순간도 아니며 더욱이 원망의 이유가 될 수 없지요.
성도는 환난 중에서도 즐거워해야 합니다. 고난 속에서 주님을 의지하는 법을 배우고 환난 속에서 기도를 배우는 기회로 삼아야 합니다.
10절 말씀처럼 부활 신앙은 고난 앞에 선 성도를 당당히 설수 있게 하는 힘이 되고 원동력이 됩니다.
인간적으로 볼 때 살 소망까지 끊어진 상황에서 자신을 포기하고 하나님만 의지하며 하나님만 바라는 것이 승리의 비결입니다.
상황은 최악이지만 최고의 신앙고백을 할 때 하나님께서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능력으로 우리를 다시 살려 주실 줄 믿습니다.
고난 중에 가장 큰 고난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죽음일 것입니다.
죽음 자체는 공포입니다. 부당하게 죽음을 맞이한다는 것은 공포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믿는 다는 죄목으로 순교한 스데반 집사는 그 얼굴이 천사와 같았다 합니다.
뿐만 아니라 자기를 향해 돌을 던지는 성난 군중을 위해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간구한 후 하나님 품에 안깁니다.
초대교회 스데반 집사뿐 아니라 12사도의 순교 그리고 폴리갑처럼 속사도들이 죽음의 고통 앞에서도 당당할 수 있었던 것은 죽음 후에 하나님의 품속으로 다시 말해 예수님과 함께 부활할 것을 확실히 믿었기 때문입니다.
잠자는 자의 첫 열매가 되신 주님께서 죽은 자들을 다시 살리실 것을 확실히 믿기에,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실 때 내가 죽고 예수님이 무덤에서 부활하실 때 다시 살아 예수 안에서 살게 되었음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한 말씀처럼 죽음이 성도를 가둘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잠에서 깰 것이며 썩지 아니할 몸을 입고 다시 살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부활신앙으로 무장하여 죽음조차 두려워하지 않고 당당히 맞설 수 있는 귀한 성도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 합니다.
[간구함으로 고난을 이기는 자의 복]을 이루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할까?
셋째로 중보기도 즉 이웃을 위한 기도를 해야 합니다.(10)
11절에서 “너희도 우리를 위하여 간구함으로 도우라” 라 합니다.
바울은 복음을 위해서 죽을 각오를 한 사람이며, 복음 전파를 위해서 전 인생을 건 사람이며, 무엇이든 유익한 것은 그리스도를 위해 배설물처럼 여긴 사람입니다.
바울은 선교 사역을 위해서 전도를 위해서 기도를 부탁합니다.
해외에서 인종 문화언어 기후등 낳선 땅 풍토 속에서 죽음의 위험을 무릎쓰고 헌신한 선교사들을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심한 박해를 받기도 하고 질병으로 온몸이 상하기도 하고, 문화적 사상적인 이질감으로 인해 오직 복음을 전하는 이들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와 직접적으로 관계가 없는 해외2만5천 선교사들을 위해 기도해야 하며 이 순간에도 북한 순교를 위해 목숨 걸고 선교하는 선교사님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농어촌에서 수고하는 목회자들과 30명 미만의 교회에서 수고하는 수많은 개척/ 미자립교회 목회자들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교회에서 상처받고 떠난 심령들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자살 충동에 시달리고 있는 자들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이 시간도 나라를 지키는 국군장병과 경찰과 공직자들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정치인들을 위해 그리고 경제인들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나라의 통일과 대통령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상한 음식은 심한 고통을 줍니다. 상한 심령은 사회에 악이 됩니다.
상한 심령은 말씀과 기도로 치료 받아 영육간에 강건한 성도가 되는 것입니다. 바르고 정의가 하수와 같이 흐르는 정의 사회는 예수님의 법이 다스리는 아름다운 나라를 만들어 주시길 기도하기 원합니다.
이제 말씀을 맺으려 합니다.
[간구함으로 고난을 이기는 자의 복]을 을 이루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첫째로 삼위 하나님께서 사역자를 위로해 주시길 기도하라(1-7)
둘째로 부활 신앙으로 당당히 고난 앞에 서라 (8-10)
셋째로 중보기도 즉 이웃을 위한 기도를 해야 합니다.(10)
간구함으로 하나님의 일군 사역자를 돕는 자를 반드시 기억하고 상주실 줄 믿고 사역자를 위해 기도하며 이웃을 위해 기도하며 부활신앙으로 당당히 고난을 이기고 승리자가 되어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하는 성도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 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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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감사 합니다.
샬롬!
좋은 설교 올려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감사합니다!!!!!!!!!!!!!!
좋은 주일 되세요 감사합니다.
은혜의 설교 감사합니다.
설교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