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도 봉기리 삼층석탑(보물 제113호) /경북 청도군 풍각면 봉기리
이중기단 위에 세워진 8세기 통일신라시대의 석탑, 높이 5.47m이다.
이곳에 천정사(天井寺)란 절이 있었다고 한다. 탑도 쌍탑이었지만 동탑은 광복의 혼란기에 붕괴하였다.
상륜부는 잃어버렸으나 기단부와 탑신은 잘 보존, 한국 석탑의 초기 양식이다.
석등 연화대좌는 천정사 유물로 추정한다.
덕양리 삼층석탑(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116호) /경북 청도군 풍각면 덕양리
통일신라시대 석탑, 단층기단에 탑신이 올려져 있다. 높이 3.2m.
인근 절터에 무너져 있던 것을 마을 주민들이 현 위치에 세웠다.
다행스러운 것은 무너진 상태에서 자재들이 없어지지않았던 모양이다. 다만 단층인지 이중기단인지 알 수는 없다.
비슬산 용천사(琵瑟山湧泉寺)/전통사찰
- 경북 청도군 각북면 오산리
신라 문무왕 10년(670년) 의상대사가 창건한 화엄(華嚴) 10대 사찰 중 한 곳이다.
의상대사를 흠모한 선묘낭자는 서해의 용이 되었고 그 용이 이곳 용천(湧泉)에 살고 있다는 전설이 있다.
창건 당시 사명은 옥천사(玉泉寺)였으나 고려 원종 때 일연(1206~1289)이 불일사로 하였다가 용천사로 바꾸었다고 한다.
일연의 고향은 경북 경산이 그의 수도생활 중 37년을 비슬산에서 보냈으며 마지막으로 용천사에 머물렀다.
1277년 청도 운문사로 옮겨 삼국유사를 편찬, 용천사에서 삼국유사를 저술하지 않았을까 추정한다.
용천사 전성기 때는 부속 암자가 47개소, 승려 1,000여명이 머물렀다고 한다.
24인의 도인이 나왔고 앞으로 104인의 도인이 나온다는 예언이 전해지고 있다.
임진왜란 때 모두 불에 타버렸고 문하재는 약탕 당했다. 고려초기 석탑과 석조물 등 역사적 증명을 하고 있다.
(용천사 입구 안내문 정리)
화엄 10찰, 어떤 이는 딱 10곳이 아니란 주장도 한다.
화엄 10찰의 '옥천사'는 경남 고성의 '옥천사'를 비정하고 있다.
삼국유사는 청도 운문사에서 자료 수집, 편찬하고 군위 인각사에서 탈고하였다고 한다.(운문사와 인각사 안내문)
선묘낭자가 용이 되어 이곳 용천에 살고 있다는 전설은 누군가가 지어낸 말이 아닐까? 그리 신빙성이 없다.
이러나 저러나 용천사에서 주장하니 그게 맞다고 할 수밖에 없다. 시비를 가린 듯 무엇이 달라질까?
헐티재, 완만한 고개길, 봄날의 오전, 운전하기 좋다.
용천사 앞에 주차하고 내려다 본 경치, 각남면 면소재지 방면이다.
비슬산 산 중턱, 그리 험한 곳이 아닌 곳, 따뜻하게 햇빛이 잘 드는 곳에 절이 있다.
일주문, 사천왕문, 누각 등은 없다. 차라리 시야가 확보되기 때문에 시원한 느낌을 준다.
대웅전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295호
670년 의상대사가 창건, 1267년(고려 원종 8) 일연대사가 중창, 1631년(조선 인조 9) 조영대사가 보수.
1895년(순조 5) 의열화주가 크게 중수하였다.
용천사 영산회상도 /보물 제1956호
화면의 높이가 4미터에 가까운 대형 후불탱화이다.
1749년(영조 25)에 조성하였으며, 2000년 5월 30일 경 용천사에서 도난, 2014년 8월 회수.
17세기 중엽 기림사, 통도사, 석남사 등 경상도에서 활동한 화승 임한(任閑)의 화풍과 매우 유사하다.
개산조 의상대사 진영
응진전
삼층석탑
자연석 위에 이층기단, 3층석탑이다. 보니 이 자리에 있었는지 모르겠다. 문화재 표시는 없다.
명부전
범종각
요사채와 용천, 물 맛은 참 좋다.
산신각
대웅전 앞에 여러 석부재를 놓았다.
배롱나무일까? 꽃이 피면 예쁘겠다.
용천에서 산길이 있다. 100m쯤 왔나? 부도 1기가 있다. 이곳서 조금 더 가면 부도전이 나온다. 5기의 부도가 있다.
용천사 부도군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478호, 아래 3기, 위 2기. 석종형으로 조선시대 부도 같다.
사송당만 보이고 나머지는 모르겠다.
경내에서 조금 벗어난 곳에 물을 받을 수 있게 하였다.
사람들은 기이한 현상을 좋아 한다. 나는 아무리 봐도 용의 형상인지 모르겠다.
현재 모습으로 크게 중창하였던 주지 지거의 시비이다.
대산사(臺山寺) /전통사찰
- 경상북도 청도군 각남면 옥산리 산
신라 흥덕왕 5년(830)에 원효대사가 창건하였다고 확실치는 않다.
목지국(目支國)에서 남해상에 표류해온 천수관음 불상 3구가 있었는데 이중 1구는 청도 운문사에 봉안,
1구는 간 곳을 알 수 없으며, 나머지 1구를 대산사에 봉안하여 '용봉사(龍鳳寺)'라 하였다고 한다.
임진왜란 때 화재로 법당이 소실, 왜적은 천수관음 불상을 도적질하는 게 두려워 땅 속에 묻었다.
이를 아는 자가 불상을 팔려고 파내던 도중 피를 토하고 죽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임란 후에 불상을 법당에 다시 봉안, 고종 13년(1876) 왕후가 부처를 현몽하는 꿈을 꾼 후 크게 시주를 하여 절을 중건하였다.
의문화상(義文和尙)이 중수하여 '대산사'라 개칭하였다.
1930년, 도적들의 방화로 법당은 사라지고 불상은 반소한 것을 봉안하다가 주변 땅에 묻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2000년 여름 경내 밭에서 발견한 천수관음불상 수인이 전설을 대변하고 있다.
(다음-대한민국구석구석 발췌, 수정. 대산사 안내문 참조)
목지국은 마한에 속한 54국 중 하나이며 월지국이라도 한다.
대한민국구석구석에서 쓴 원효대사(617~686) 창건을 들먹인 것은 우스운 일이다. 사실 확인이 필요하다.
대산사 안내문엔 흥덕왕 5년(850)에 창건하였다고 나왔다. 누가 창건한 것인지 모른다는 이야기이다.
대산사 가는 길은 좁은 산길이지만 차량 통행량이 미미하기에 큰 어려움은 없다.
정상 부위에 절이 있지만 길이 아주 가파르지는 않지만 주의하여야 한다.
규모가 크지 않으나 주변이 깨끗한 게 주지의 부지런함이 느껴진다.
원통전이다.
원통전 안
건물의 이름은 없다. 종무소이다.
무애당, 요사인가?
이층석탑
1960년대 초(또는 1950년대) 제작한 석탑이라 한다.
자연석인 지대석 위에 이중기단에 2층석탑, 지대석에 재미난 조각이 있다.
월은산은 풍수지리상 제비가 알을 품고 있는 형상으로 새들이 많은 곳이다.
풍각면 덕양리에서 대산사로 오르는 산길은 뱀의 모양과 흡사하다. 이런 산의 형상으로 제비알을 훔쳐가는 뱀이 많았다.
이 뱀을 쫓기 위해 대산사 경내에는탑의 지대석에 멧돼지 형상을 조각하였다.
(이런 이야기는 주지에게 들었고 인터넷 검색으로 확인하였다.)
모서리 밑부분은 돼지코이며 좌우로 눈이 그려져 있다. 기단석 전체가 멧돼지 몸통이다.
칠성각과 산령각
이 절에 다니는 여신도가 자식을 얻지 못 하였다.
이 절에 와서 지성으로 불공을 드린 후 아들을 보게 되었다.
칠성각에 이런 사연을 그림으로 표현하였다. (주지의 말씀)
용왕단과 요사채
요즘 제비를 잘 볼 수 없다.
대산사에 제비가 오기를 바라는 마음에 제비집을 그렸다. 이층석탑 기단석의 멧돼지 형상과 이어지는 이야기다.
절 주차장에서 본 맞은편 산능선이다.
절에서 나오면 찍었다. '대산사 도로 불사 공덕비'이다.
저수지 둑길을 지나야 한다. 사진 가운데 봉우리가 월은산인 모양이다.
흔쾌히 구경하라고 허락을 하신다. 사진도 마음껏.
원통전에 앉아 있을 때 커피(아메리카노)을 주신다. 고마운 마음에 커피값 정도 시주를 하였다. 내 생애 두번 째이다.
갈 때 인사를 하면서 20분 정도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층탑에 대한 이야기며 칠성각 외벽 그림, 종무소 제비집과 제비 그림 등.
조계종 조사부에서 있다가 9년 전 이곳에 와서 현재 모습의 사찰을 만들었다고 한다.
처음 왔을 때는 허름한 집이었다고 한다. 여러 인맥의 도움을 받았고, 사람이 많이 찾는 곳이 아니지만 경내가 깔끔하다.
마을 신도들이 부르면 승합차로 모시고 온다고. 주로 오시는 신도분들의 평균 연령이 74세라 한다.
불교계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종교계 전체의 문제이다. 인구 감소에 따른 신도 급감이나 승려, 목사, 신부 부족 등.
그나마 베이비 부머 세대와 그 윗세대가 받치고 있기에 현상유지는 하고 있다.
종교도 시대에 맞게 변화하여야 법맥을 이어갈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