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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민족 역사회복 스크랩 흑산도 주민 김이수 어떻게 정조임금을 움직였나?
天風道人 추천 0 조회 59 14.04.27 21:40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역사추적]

 

물샐틈없는 삼엄한 경호, 국가 최고 지도자가 밖으로 나서는 순간 모든 이동경로는 통제된다. 경호원의 허락 없이는 접근조차 할 수 없다. 1791년 정월 18일, 그날도 기마대의 엄중한 경호 속에 임금의 어가 행렬이 거리로 나섰다. 완전무장한 호위병의 경호는 행렬의 중앙으로 갈수록 더욱 철통같다. 펄럭이는 깃발을 앞세운 정조임금의 어가가 마침내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이었다. 바로 그때 정조의 어가를 멈추게 하는 사건이 일어난다. 이날 정조의 행차를 멈추게 한 주인공, 그는 흑산도에 사는 평범한 주민 김이수였다. 흑산도의 험난한 바닷길을 건너와 정조임금을 만난 김이수. 그는 어떻게 정조를 움직인 것일까?

 

▶ 흑산도 주민 김이수 어떻게 정조임금을 움직였나?

 

200년 전 한 섬마을 주민이 국가 최고지도자를 움직였다. 이것이 만일 사실이라면 우리 역사상 전무후무한 가장 극적인 만남임이 틀림없습니다. 흑산도는 어디 있는 섬일까요. 보이시는 것처럼 흑산도는 전라남도 신안군 우리나라 서남단 끝에 위치한 망망대해의 섬입니다. 김이수는 이름난 학자도 아니었고요. 높은 관직생활을 했던 정치인도 역시 아니었습니다. 흑산도에서 올라 온 그저 평범한 섬마을 주민이라 했습니다. 과연 절의 고도라 불렸던 흑산도의 주민이 어떻게 정조임금을 움직일 수 있었을까요. 지금부터 그 수수께끼를 풀어보겠습니다.

 

 

지금도 흑산도는 목포에서 배를 타고 두 시간 정도 바닷길을 달려야 올 갈 수 있는 곳이다. 흑산도 주민 김이수는 어떤 사람일까. 김이수의 행적부터 찾아보기로 했다. 흑산도에서 김이수의 후손을 만난 것은 한식을 하루 앞둔 4월 4일.

 

김윤인씨

“저희 6대 할아버지 입니다. 6대손이죠. 제가”

 

 

김이수의 6대손은 취재진을 대둔도라는 섬으로 안내했다. 흑산도 본섬에서 북쪽으로 3.2㎞. 대둔도는 200여 가구 남짓한 작은 부속 섬이다. 김이수는 이곳에서 나고 자랐다고 한다. 때마침 김이수를 기리는 시제준비로 작은 섬마을이 북적였다. 마지막 배가 도착할 때까지 후손들의 발길이 이어졌다. 바로 잡아 올린 싱싱한 해산물로 제사음식을 준비하는 정성스러운 손길, 우리에겐 기록 속의 낯선 인물이지만 200여년이 지난 지금도 김이수는 뭍으로 나가있는 후손들까지 해마다 대둔도로 불러들이는 존재였다.

 

 

대둔도의 김해김씨 족보상으로 1756년생인 김이수는 줄곧 이 섬에서 농사짓고 고기 잡으며 살다간 토박이 섬 주민이다. 그런데 대둔도 일대에는 평범한 섬 주민들과는 다른 예사롭지 않는 김이수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몇 해 전까지 후손들이 관리하며 살았던 김이수의 생가다.

 

“토담하고, 이 나무 서까래, 중도리 나무 몇 가지는 그 자재가 흔적이 아직도 남아있는 것 같습니다.” 김사준 : 김이수 6대손.

 

 

주민들이 김이수에게 준 섬도 있다. 김이수가 정조임금을 만나 흑산도의 민원을 해결하자 그 보답으로 중죽도의 해산물 수확권을 주었다는 것이다.

 

“중죽도 전체에서 생산되는 해산물, 예를 들어서 건각이라든가 파래라든가 미역이라든가 여러 가지 나오지 않겠습니까, 그러한 것을 전체적으로 수확권을 받은 겁니다.”

 

 

한식날 아침 김이수의 묘소로 가기 위해 후손들이 부둣가로 나왔다. 바리바리 준비한 음식들을 배에 싣는 후손들, 김이수를 기리는 시제를 지낼 때마다 벌어지는 풍경이다. 후손들이 향한 곳은 흑산도. 생가는 대둔도에 있지만 김이수가 묻힌 곳은 대흑산도 본 섬. 흑산도 앞바다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위치다. 후손들로선 배를 타고 오가야 하는 번거로운 곳에 김이수의 묘소가 조성된 것은 특별한 이유가 있었다. 김이수가 세상을 떠났을 때 흑산도 섬 주민들 모두가 기리고자 하여 이곳에 주민 장으로 모셨다는 것이다.

 

흑산도와 그 부속 섬에 전설처럼 내려오는 김이수의 행적들. 해산물에 의지하면 살았던 섬 주민들에게 김이수는 흑산도의 절박한 문제를 바로 잡은 민원해결사로 기억되고 있었다. 후손들은 험난한 바다를 건너 한양까지 올라가 임금을 만난 자랑스러운 조상이었다.

 

김유언

“목숨을 걸고 가신 건데, 우리가 지금 상상해서 생각할 때 이 먼 거리를 가서 또 가서, 서울까지 가서 임금 행차하시는데 그 앞을 가로막고 살려달라고 하신 건 대단한 분이라고 생각하죠.”

 

 

주요 국정문서를 기록해 둔 승정원일기도 후손들의 증언을 뒷받침한다. 김이수는 분명 정조임금을 만났던 것이다.

 

 

조선시대 백성들이 억울한 사정을 임금에게 호소할 수 있는 방법이라고 하면은 신문고를 떠올리는 분들이 많이 계실 겁니다. 그런데 신문고를 울리려면 어디로 가야 했을까요. 바로 이곳 의금부입니다. 대역죄인들을 잡아다가 신문하던 이 의금부 마당 한가운데에 신문고가 설치돼 있었습니다. 포졸들이 지키고 있고 높은 담장이 둘러싸고 있는 보입니다. 실제로 신문고를 이용한 사람들은 양반들뿐이었고요. 일반백성들은 감히 접근조차 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나마 유명무실해진 신문고도 연산군 때 이르러서는 아예 폐지되고 말았습니다. 그렇다면 김이수는 어떻게 정조임금을 만날 수가 있었을까요.

 

목포의 국립해양유물전시관. 이곳엔 당시 흑산도 앞바다를 오가던 돛배 한척이 원형 그대로 제작돼 있다. 김이수는 이런 돛배를 타고 험난한 바닷길을 건너 뭍으로 나온 것으로 추정된다.

 

이철한 목포해양유물전시관

“특히 목포 앞바다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물이 세기로 유명한 곳입니다. 그래서 아마도 그 때 흑산도 도서 지방 사람들은 가다가 바람이 많이 분다든가 기상이 악화일 경우에는 어느 섬에 정박해서 며칠이라도 있었겠죠. 그래서 지금처럼 시간을 정해놓고 항해를 한다든지 이런 것은 아니었겠죠.”

 

변덕스러운 바다날씨에 운명을 맡겨야 하는 목숨을 건 험난한 여정이었다.

 

“뱃길이 험해 물에 빠져 죽는 사람이 고을의 절반 이상에 이르니 심히 불쌍하다”

 

고석규 교수 목포대학교 역사문화학부

“흑산도로 가는 배를 타면 사람들이 형극의 일이다, 즉 가시밭길이다. 그런 식으로 목 놓아 울고 그런 기록들이 조선왕조실록 같은 정사 기록에도 나옵니다. 그 만큼 옛날에는 큰 바다로 나가는 것이 대단히 위험한 것이었죠.”

 

구사일생으로 뭍에 올라도 목포에서 한양까지의 거리는 414㎞. 그는 당시 한양과 삼남지방을 잇던 영로를 이용해 상경했을 가능성이 크다. 정조임금을 만나기 위해 김이수는 오로지 발품을 팔아 그 먼 길을 걷고 또 걸었다. 묻고 또 물어서 찾아가는 낯선 한양 길. 그렇게 해서 도착한 한양이지만 임금은 아무나 만날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흑산도 주민 김이수는 언제 어디서 정조임금을 만난 것일까. 김이수의 5대손이 우리의 의문을 풀어줄 귀한 유물을 간직하고 있었다. 장롱 깊숙이 보관해 온 것은 김이수의 유품이었다.

 

 

카메라 앞에 처음으로 공개된 김이수의 유품 함. 후손이 유품 함에서 커낸 것은 집안 대대로 내려온 희귀본 고문서다. 고문서는 김이수와 함께 흑산도 문제를 해결하려고 관청을 오갔던 동료들이 쓴 김이수 전기였다. 문서엔 김이수 행적을 밝혀줄 중요한 단서가 들어있었다. 김이수가 정조를 만난 날짜가 기록돼 있던 것이다. 김이수가 한양으로 출발한 것은 1790년 가을인데 이듬해 정월에야 정조를 만난 것이다. 김이수 전에는 그가 정조임금을 만나기 위해 한동안 한양에 머무는 것으로 돼 있다. 김이수는 한양에 머물다가 해가 바뀐 다음에야 정조임금을 만남 셈이다. 그런데 김이수 전기에서는 어디서 어떤 방법으로 정조를 만나는지에 대한 기록을 찾을 수가 없었다.

 

우린 1791년 정월 18일을 전후로 한 공식기록을 모두 찾아보기로 했다. 특히 우리가 주목한 것은 일성록. 정조의 지시로 임금의 행적을 일기 형식으로 상세히 적기 시작한 공식 기록이다. 일성록을 살피던 중 김이수가 정조를 만나기 5일 전의 기사에서 흥미로운 단서가 발견됐다. 1791년 정월 13일. 이날 정조는 수원의 사도세자 무덤을 참배하기 위한 행차 일정을 점검하고 신하들에게 특별지시를 내린다. 한글(諺書) 공고문을 내걸어 백성들에게 야간통행금지 해제를 널리 알리라는 당부도 덧붙였다. 한양에 머물던 김이수도 이 한글 공고문을 보고 정조의 행차를 알았을 가능성이 높다. 정조의 행차 장면을 8폭 병풍에 담아 놓은 정조대왕능행도의 그 실마리가 들어있다.

 

서준 국립고궁박물관

“이 배를 각각 한 척 씩 한 척 씩 이어가지고 지금의 군사 훈련을 하는 것처럼 똑같은 형태로 그 때도 한강 도하를 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그런 그림입니다.”

 

 

정조의 행차가 한강을 건너는 모습을 담은 장면이다. 한강 남북 단에 400여척의 배를 연결해 만든 거대한 배다리가 놓여 있다. 정조의 행차가 지나가는 배다리 주변엔 수많은 백성들의 모습이 보인다. 이렇게 많은 백성들이 모인 것은 단순히 정조의 행차를 구경하기 위한 것만은 아니었다. 김이수가 정조를 만나기 4일 전 <일성록>에는 정조가 주요 담당관을 다시 만난 자리에서 특별한 관심을 보인 기사가 나온다.

 

“한강을 건널 배다리를 미리 보니 그 모양이 아주 장대하였사옵니다. 또한 다리마다 관청을 차려놓아 매우 아름답기까지 하였나이다.” : 담당신하

“한강민들이 미리 와서 많이 기다리고 있다는데 과연 그러한가?” : 정조

“예, 그렇사옵니다.” : 담당신하

 

한상권 교수 덕성여대 사학과

“정조는 자기의 행차를 백성들과 만남의 계기로 삼기 때문에 가능하면 백성들이 자기의 움직임에 많은 백성들이 나와서 관람하고 또 그걸 관광이라고 표현할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와서 봅니다. 그러면 또 심지어는 백성들이 자기 행차에 와서 보는 것을 금지하지 말라. 구중궁궐 속에서 있던 국왕이 밖으로 나온 거죠. 백성들 속으로 들어가는 거죠.”

 

 

정조가 궁궐을 나선 것은 정월 16일. 그렇다면 김이수가 임금을 만난 것은 정조가 사도세자 무덤을 오가는 참배길이 아니었을까? 일성록에 따르면 정조는 남대문을 거쳐 한강대교 북단에 놓인 배다리를 건넜다. 그리고 과천에서 휴식을 취하고 곧장 사도세자 무덤이 있는 수원으로 향한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백성들을 접촉한 기록은 없다. 수원에 도착한 정조의 첫 공식 일정은 활쏘기를 한 것으로 되어 있었다. 이날 정조는 친히 화살을 쏘아 3발을 명중시켰다고 기록은 전한다.

 

 

사건 하루 전인 17일. 정조는 현륭원을 참배한다. 현륭원은 뒤주에 갇혀 억울한 죽음을 당한 정조의 아버지 사도세자의 무덤이다. 현륭원 참배를 마친 뒤 수원부의 거주하는 사람들을 위한 특별 과거시험을 실시했다. 그런 다음 즉시 환궁하겠다고 밝힌 정조는 또 하나의 중요한 지시를 내린다.

 

‘현륭원 입구에서 숭례문까지 상언을 받아라.’

 

환궁 길에 백성들의 민원을 받겠다는 지시였다. 글을 아는 사람들은 상소를 올리고 글을 모르는 백성들은 꽹과리를 올려 擊錚(격쟁)을 하라고 허락한 것이다.

 

한상권 교수 덕성여대 사학과

“격쟁, 소리를 내는 거죠. 격쟁이라는 것은 꽹과리를 두들긴다는 것인데 그렇게 함으로써 소리를 내게 되고 그러면서 왕이 도대체 무슨 소리냐 왜 저런 소리를 내냐 관심을 갖게 되죠. 그러면 그런 것들을 방법으로 해서 자기의 억울함을 호소하는 방법인데.......”

 

자신의 민원을 호소할 길 없던 백성들이 궁궐의 담장 너머로 꽹과리를 쳐서 왕의 주위를 끌기 시작했다. 정조는 즉위하자마자 궐내에서는 물론 자신의 행차 길에 꽹과리를 울리는 것을 적극적으로 허용했다. 사건당일인 정월 18일. 일성록에 따르면 환궁 길에 오른 정조의 행차는 과천에 도착해 휴식을 취한다. 정조가 머문 곳은 과천 관아의 객사인 온온사. 정조가 현륭원을 오가는 참배 길에 편안하게 휴식을 취한 곳이라 해서 온온사라는 이름이 붙었다. 그렇다면 흑산도 주민 김이수는 온온사에서 정조의 행차를 만난 것일까. 꽹과리를 울려 민원을 호소하는 격쟁은 왕의 행렬이 멈춰 쉬어가던 주정소에서 주로 벌어지는 일이었다.

 

 

하지만 김이수전에는 정조를 만난 곳이 한양이라고 돼 있어 과천온온사에서 정조와 김이수가 만났을 가능성은 크지 않다. 온온사를 출발한 정조의 다음 행선지는 용양봉저정. 한강대교 남단에 자리한 용양봉저정은 정조가 한강을 건널 때 이용하기 위해 1791년에 지은 행궁이다. 사건 당일 용양봉저정에 도착한 정조는 한강을 건너기에 앞서 식사를 한다. 주교도를 보면 용양봉저정 주변은 물론 한강 변에 이르는 길까지 구경나온 백성들의 행렬이 빼곡히 들어차 있다. 임금에게 민원을 호소할 수 있는 기회가 보장된 정조의 행차는 백성들에겐 축제와도 같았다. 사람들이 몰린 용양봉저정 주변엔 엿장수까지 등장해 대목을 맞은 듯 활기가 넘치는 분위기다.

 

정조의 행차가 두 번째로 멈춘 이곳 또한 꽹과리를 울리기에 적합한 장소였다. 김이수는 정조가 한강을 건너기 직전 마지막 휴식을 취하던 용양봉저정 일대에서 격쟁을 했을 가능성이 높다. 정조에게 흑산도의 민원을 호소할 수 있는 더없이 좋은 기회였던 것이다.

 

한상권 교수

“도성 밖이라고 하면 아마 노량진을 건너기 전에 용양봉저정이 아니었을까 이렇게 생각하는데 격쟁을 받는 방법은 두 가지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주정소에서 쉴 때 왕이 여러 소리가 나면 상언격쟁을 받아라. 이렇게 하기도 하고 특이한 경우는 행차 도중에 격쟁을 받기도 합니다.”

 

 

또 다른 후보지는 한강을 건넌 정조행차가 숭례문으로 가는 도로변이다. 정조대왕 능행도의 한 장면을 보자. 어가가 지나가는 길목을 지키다 민원을 적은 상소를 올리는 사람이 있다. 임금의 행차를 지켜보는 백성들의 모습은 거리낌 없이 자유분방하다. 정조임금의 어가가 지나는 바로 옆에도 한 무리의 백성들이 이것을 지켜보고 있다. 김이수가 행차 도중에 꽹과리를 울려 정조의 행렬을 멈추게 했을 가능성도 있다.

 

그러니까 흑산도 주민 김이수는 백성들이 직접 민원을 호소할 수 있는 격쟁제도를 통해서 정조를 만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조정대신들은 이런 정조의 뜻과는 달리 격쟁제도를 못마땅하게 여겼습니다. 백성들이 관리의 비리나 잘못된 관행을 왕에게 고하는 것을 원치 않았던 거겠죠. 그렇다면 흑산도와 같은 오지 주민들에게 관리들이 일부러 나서서 격쟁제도라는 것을 일러주지는 않았을 것 같습니다. 과연 김이수는 어떻게 격쟁제도를 알게 됐을까요?

 

지금의 흑산도는 도시가 부럽지 않다. 천해의 앞바다에서 키우는 우럭 양식으로 높은 소득을 올리는 주민들도 있다. 그러나 김이수가 살았던 시대의 흑산도는 끼니 걱정을 해야 하는 가난한 섬이었다.

 

“우리 할아버지 선친 때는 솔직히 흑산에서 1년에 쌀 서 말에 먹기가 힘들었어요. 보리 아니면 뿌리로 연명했어요.”

“흑산도 양식이 우럭하고 전복이 되면서 생활이 나아졌지.”

 

관청에 호소한 김이수의 탄원서 초안인 당시 흑산도의 고통이 절절하게 묘사돼 있다.

 

‘저희들이 사는 섬은 絶海孤島(절해고도)로 토지는 척박해서 사람이 살 수 없을 정도의 곳인데도 불구하고 부역은 많고 세금은 무거워 도저히 저희 주민들이 힘으로는 감당할 수 없습니다. 일 년에 한번 고등어를 잡는 일이 있는데 고등어는 성격상 그물에는 잡히지 아니하니 낚싯대 하나로 건져 올리는 고등어가 얼마나 큰 이익을 줄 수 있겠습니까? 이미 어장새를 내고 있는데 전에 없던 고등어세까지 내라하니 어찌 살겠습니까?’ : 김이수의 탄원서 1772년

 

지방 관리들에 의해 갖가지 이름으로 부과된 세금은 먹고 살기도 버거운 가난한 섬마을 주민들을 괴롭혔다.

 

‘저희 섬은 본래 논은 없고 산기슭을 일구어 자갈 틈에 씨를 뿌렸으나 지맥이 점점 쇠하여져 흙은 없이 바위만 앙상하게 남으니 소출도 해마다 줄어들고 있습니다.’

 

“전에는 보리, 고구마를 주식으로 많이 했어요. 쌀은 조금씩 팔아다가 위에다 조금씩 놔서 어른들만 떠 드리고......”

 

‘매년 보리를 추수한 후에 그 땅에 콩을 심어 조금이나마 생활에 보태고자 하였으나 탐관오리들이 보리로 세곡을 받고도 또 콩을 세금으로 받으니 세금 때문에 집집마다 울부짖는 것을 하늘도 알고 땅도 알게 되었습니다.’ : 김이수의 탄원서 1783년

 

당시 흑산도를 관할한 최고의 행정관청은 전라감영이다. 지금의 도청에 해당하는 전라감영아래 나주목이 있고 흑산진은 나주 목 소속이었다. 고역을 견디다 못한 김이수는 관청을 찾아다니며 흑산도의 세금문제를 호소했다. 가장 먼저 달려간 곳이 흑산면 사무소 자리에 있던 흑산진이다. 하지만 흑산진 관리는 김이수의 탄원을 제대로 접수조차 하지 않았다.

 

“여태 아무런 말이 없다가 이제 감히 그리 말하는가 네 뜻대로 해 보아라 네가 날뛴다고 내가 두려워 할 줄 아는가”

 

김응식씨 김이수 5대손

“할아버지가 그걸 일일이 관에 보고하고 시정을 해달라고 하는데도 말을 안 들어주고 그러니까 늘 관하고 할아버지는 등져 있는 상태거든. 그러니 우리 수리에 가면 우리 밭이 있는데 우리 밭 위쪽으로 그 양반들이 가마를 타고 왔다 갔다 했던 것 같아요. 그러니 이 땅이 누구 밭이냐고 하니까 김이수 밭이라고 하니까 원님이 내려와서 콩을 문지르고 그랬다는 거예요.”

 

섬주민들을 더욱 고통스럽게 만든 것은 종이세금이었다. 닥나무는 종이를 만드는 주원료다. 당시 흑산도 성인남자 한 사람이 바쳐야 하는 세금은 닥나무 마흔 근에 해당하는 종이. 남자가 많은 집은 생업까지 포기하고 닥나무를 캐다가 종이를 만들어도 세금을 충당할 수 없는 형편이었다. 심지어 어른아이와 노인들에게까지 종이 세를 부과하는 바람에 아예 섬을 버리고 도망가는 주민들이 생겨나는 지경이었다.

 

이정용씨 흑산도 주민

“닥나무를 베어다가 지금은 차도 있고 경운기도 있지만 옛날에는 지게에다가 져서 통에 삶아서 다시 벗겨서 또 그걸 말립니다. 그걸 말려서 또 물에 담궈서 칼질을 하죠.”

 

 

계속 닥나무를 베어다가 종이를 만드니 땅은 척박해지고 닥나무도 바닥이 났다. 하지만 관에서는 이런 사정은 아랑곳없이 여전히 닥나무 세금을 거둬들였다. 가혹한 고통을 더 이상 볼 수 없었던 김이수는 나주 목으로 향했다. 닥나무 세의 폐단을 바로 잡아 흑산도의 고통을 해결하겠다는 희망을 품고 찾아온 나주 목. 김이수는 나주목사를 만나 흑산도의 딱한 사정을 호소했다. 몇 번이고 찾아가 주민들의 연명으로 작성한 탄원서까지 제출했다. 하지만 돌아온 답변은 한결같았다. 나라에서 정한 오래된 세금제도를 함부로 고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포기하고 돌아설 수도 없었다. 흑산도의 운명이 걸린 절박한 문제였다.

 

김이수의 발길은 전라감영까지 이어졌다. 해결의 실마리가 보이는 것 같았다. 김이수의 탄원을 접수한 전라감사가 흑산도 현지실태를 조사하라고 지시한 것이다. 하지만 권력을 지닌 자들은 서로의 비리를 눈감아 주고는 형식적인 조사를 마무리했다. 아마도 관청을 찾아다니는 과정에서 김이수는 임금에게 직접 민원을 호소하는 격쟁제도가 있다는 정보를 얻었을지도 모른다.

 

한상권 교수

“흑산 도민 전체의 공통적인 관심사란 말입니다. 그 사람들이 매번 모여서 논의를 했을 것 아닙니까. 소장을 올릴 때도 논의했고 계속 논의하면서 서로 머리를 짜냈겠죠. 우리가 이 민원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했을 때 누군가가 지식이 있는 사람이 있겠죠. 나주에 왔다 갔다 하고 그런 사람들이 왕한테 알리면 된 다더라.”

 

 

김이수가 격쟁제도를 알게 된 또 다른 가능성은 흑산도 사리마을에서 확인할 수 있다. 주민들이 복원해 놓은 사촌서당은 귀양 온 정약전이 유배생활을 하던 곳이다. 이곳에서 유배생활을 하는 동안 정약전은 흑산도 주민들과 후학들을 가르쳤다. 정약전이 흑산도에서 집필한 자산어보 서문엔 도움을 받은 섬주민의 이름이 등장한다. 이는 귀양 온 지식인들과 섬 주민들 사이에서 활발한 교류가 이루어졌다는 뜻이다.

 

고석규 교수

“유배 인이 많이 오게 되면 그 유배 인에 대한 뒤치다꺼리를 섬주민이 해야 한다는 부담이 있습니다. 그래서 적정한 수준을 넘어서 유배 인이 오면 섬 주민들이 민소를 하게 됩니다. 못 견디겠다고 또 하나의 세금처럼......”

 

유배 온 지식인들을 부양하는 부담은 컸지만 섬 주민들에겐 이것이 한양의 고급 정보와 지식을 얻을 수 있는 창구이기도 했다. 김이수는 유배생활을 하던 지식인들을 통해 격쟁제도를 알게 됐을 수도 있다. 김이수가 닥나무 세 폐단을 바로잡기 위해 이리저리 뛰어다닌 것만 2년. 그 시기에 정조는 사도세자의 능을 옮기고 배다리를 놓았으며 행차 길에 격쟁을 합법화 시켰다. 한양으로 가는 먼 길을 떠나기 전 김이수는 주민들을 모아 놓고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지금 다행히 성군이 위에 계시니 둔민의 어려운 사정을 아뢴다면 아무리 멀리 있어도 은혜를 입을 것입니다.”

 

김이수가 말한 성군은 정조임금을 가르칩니다. 이는 흑산도 주민들의 등골을 휘게 만들었던 닥나무 세금의 폐단을 해결할 유일한 방법이 격쟁밖에 없다고 판단하고 떠났다는 얘기가 되겠습니다. 김이수의 꽹과리 소리를 들은 정조가 흑산도의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 또한 매우 흥미로운데요. 지금부터 그 과정을 따라가 보겠습니다.

 

김이수가 꽹과리를 울려 정조에게 흑산도의 닥나무 세의 폐단을 호소한 것이 정월 18일. 행차 중에 접수한 격쟁 내용은 3일 이내로 조처하는 것이 정조의 원칙이었다. 사건처리가 지연돼 격쟁한 사람이 피해를 보는 사람이 없도록 하려는 배려였다.

 

한상권 교수

“정조가 예를 들면 현륭원에 갔다 오면 제일 먼저 밤늦게 창덕궁에 도착하죠. 도착하면 격쟁 상언을 가지고 와라 그걸 지시합니다. 그걸 먼저 처리하고 잠을 잡니다. 그만큼 그걸 중요시 했다는 의미이고 결국 능행의 목적 중에 하나였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죠.”

 

김이수의 격쟁을 접수한 18일 밤. 창덕궁에 돌아온 정조는 격쟁문서를 검토한다. 격쟁은 구중궁궐에서는 알 수 없었던 지방정치 실태를 파악하는 방법이자 여론을 수렴하는 과정이었다. 이번 행차에서 접수한 격쟁은 107건, 개인적인 억울함을 호소하는 내용도 있었지만 잘못된 사회 폐단과 관리의 비리를 고발하는 내용도 많았다. 격쟁내용을 검토는 정조는 현지조사가 필요하다고 판단한 사건은 암행어사나 감사를 파견했다. 김이수가 닥나무세 민원을 호소한 흑산도도 그 대상이었다. 문제는 조정대신들의 반발이었다. 격쟁의 남발로 신분질서가 사라지고 사회 기강이 무너진다며 격쟁제도를 폐지하라고 맞섰다.

 

“백성이 상언하고 격쟁을 올리는 것이 근래에 매우 외람되고 잡스러워지고 있나이다. 폐단이 많은 제도는 없애는 것이 나을 줄로 사료되옵니다.”

“그럴 수 없다. 불쌍한 저 고할 데 없는 백성들이 가슴에 깊은 원한을 품고 분주히 와서 호소하는 것이니 이것은 마치 어린아이가 부모에게 하소연하는 것과 같다. 저들은 실로 죄가 없다. 그렇게 만든 자들이 죄인이다.” : 홍재전서 1794년

 

격쟁에 대한 정조의 의지는 확고했다. 사건 발생 4개월 후인 5월 22일. 이른 새벽 정조는 김이수가 격쟁한 흑산도 문제에 대한 현장조사를 보고 받고 최종결정을 내린다.

 

“흑산도의 양민 김이수가 꽹과리를 울려서 호소한 사건이옵니다. 근래의 닥나무가 절정 되어 실물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집집마다 수납하게 하니 섬 주민들은 어쩔 수 없이 다른 지방에서 사다가 바치고 있다고 하옵니다. 흑산도의 종이 세를 영원히 폐지하는 것이 옳은 일이라 사료 되옵니다. 그런데 이렇게 된다면 해당관청은 없어진 세금 때문에 상당한 어려움이 있을 것이오니 백성의 폐단을 제거하다보면 윗사람에게는 손해가 날 때가 많사옵니다.”

“아래에서 이익이 된다면 좋은 것이 아닌가. 위에서 조금 손해가 나더라도 어찌 그것을 꺼리길 것인가.”

 

 

손상익하는 정조가 추구한 왕도정치의 철학이었다. 한상권 교수의 말을 들어보자.

 

“정조는 자기 정치이념을 손상익하라고 표현합니다. 손상익하라는 것은 위의 것을 덜어서 없는 사람에게 더 해준다는 얘기인데 결국 그랬을 때 그런 일을 하는 주체가 누가 되어야 하는가, 국가가 되어야 한다는 얘기죠. 닥나무 문제를 종이 문제를 해결해 줄 때 부족한 비용을 어디에서 마련 하냐 할 때 그것을 국가재정에서 충당하라고 말합니다. 신하들이 국가재정을 자꾸만 축내는 것을 어떻게 합니까 그랬더니 국가가 하는 게 그런 거다.”

“지금 나는 한 나라의 임금으로서 가까이는 도성과 경지지역으로부터 멀리는 아득한 바다와 변방 지대에 이르기까지 노약자나 부녀자, 절름발이, 귀머거리, 벙어리 할 것 없이 다 내가 돌봐야 할 백성 아닌 이가 없다.” : 정조대왕 행장

“이런 일을 처리하지 못하고서 어찌 사람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말하기가 어려운 것이 아니라 듣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제가 한번 해볼 테니 되고 안 되고는 아직 말하지 마십시오.” : 김이수 전기

 

국토의 서남단 끝에서 달려온 평범한 섬 주민이 국왕을 움직인 것은 소통의 힘이었다.

 

고석규 교수

“그런 점에서 항상 소통이라는 하는 것, 이것은 발전의 동력인 것이고 소통이 끊기면 항상 나라는 위기를 맞게 되는 거죠. 그것은 조선 후기만이 아니라 어느 시대건 마찬가지입니다.”

 

흑산도 주민 김이수와 정조 임금의 만남은 가혹한 닥나무 세금 때문에 고향을 등져야 했던 수많은 섬 주민들을 돌아오게 만들었습니다. 정조 임금의 능행도의 그려진 수많은 백성들의 모습을 보면 제이, 제삼의 김이수가 정조의 능행차를 기다리고 만났다는 것을 잘 알 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백성들 속으로 들어가 백성들의 목소리를 기울이는 여론 수렴에 정치는 안타깝게도 정조가 세상을 떠나자 막을 내리고 말았습니다. 결국 소통이 길이 막혀버린 백성들이 그 뜻을 분출하기 위해 선택한 것은 19C의 민란이었습니다. 어쩌면 흑산도 주민 김이수와 정조 이 두 사람의 극적인 만남은 여론을 수렴하는 것이 정치의 요체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역사의 메시지가 아닐까요.

 

 

※ 저작권은 KBS <역사추적>에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상업적인 용도로는 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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