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19 주일
오늘 미사의 말씀들은 모두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어떻게 다가오시는지 알려 줍니다.
제1독서는 엘리야 예언자와 바알 예언자들의 대결 뒷이야기입니다. 엘리야 예언자는 카르멜 산 위(지금의 ‘무흐라카’)에서 바알 신을 섬기던 450명의 거짓 예언자들과 겨루어 놀라운 승리를 거두고 그들을 키손 천으로 데려가 모두 죽입니다(1열왕 18,20-40). 그러자 바알 신을 섬기던 이제벨 왕후가 복수심에 가득 차 엘리야 예언자를 잡아 죽이려 하자, 겁에 질린 그는 이제벨의 박해를 피해 광야로 도망칩니다. 바로 이때 엘리야가 하느님을 새롭게 체험합니다.
하느님은 한때의 승리로 오만해질 뻔한 엘리야를 그분 없이는 초라할 수밖에 없는 인간이라는 사실을 깊이 깨닫게 하시면서 ‘조용하고 여린 소리’로 당신을 드러내십니다. 하느님께서는 ‘크고 강한 바람’이나 산을 뒤흔드는 ‘지진’, 삼킬 듯 활활 타오르는 ‘불’ 속에 계시지 않고, 조용하고 부드러운 소리로 다가오십니다. 이것은 우리의 마음이 내ㆍ외적인 요소들로 인해 혼란하고 소란스러운 가운데서는 하느님을 만날 수 없다는 것을 상징합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시편 저자를 통해 하느님께서는 우리 신앙인들에게 권고하십니다. “너희는 멈추고 내가 하느님임을 알아라. 나는 민족들 위에 드높이 있노라, 세상 위에 드높이 있노라!”(시편 46,11) 그러므로 우리는 일상의 분주함 속에서도 자주 멈추어 주님을 만나는 가운데 우리 자신의 참모습을 발견하고 우리 삶의 방향을 확인해야 합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는 “우리가 주님의 목소리를 듣기 위하여 멈추지 않는다면, 그분으로부터 멀어져서 도리어 다른 소리를 듣게 됩니다. 결국, 그분의 목소리를 듣지 않는 이들은 자기 자신만으로 가득 차게 되어, 무신론자가 되거나 냉담자로 떨어집니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오늘 복음에서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장정만 오천 명을 먹이신 ‘오병이어의 기적’을 행하신 예수님께서는 군중의 열광과 인기에 영합하지 않고, 하느님과의 만남의 시간을 갖기 위해 홀로 산에 오르시어 기도하십니다.
예수님께서 호수 위를 걸어 파도에 시달리는 배 안에 있는 제자들을 향해 가신 시간은 새벽 3시-6시 사이입니다. ‘동틀 녘’은 빛이 없어 사물이 뚜렷하게 보이지 않는 불확실한 시기이지만 동시에 시간이 지나면 동이 트리라는 믿음을 가지고 기다리는 시기이기도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동틀 녘’을, 하느님이 어려움에 빠져 있는 자신들을 구원하러 오시는 때라고 체험했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의 피신처와 힘이 되시어 어려울 때마다 늘 도우셨기에 우리는 두려워하지 않네. … 하느님께서 동틀 녘에 구해 주시네.”(시편 46,26) 모세의 인도를 따라 이스라엘 자손이 바다 가운데로 마른 땅을 걸어 들어갔을 때, 뒤따라온 이집트 군대를 혼란에 빠트려 구해 주신 시간도 ‘동틀 녘’입니다.(탈출 14,24; 이사 17,14 참조) 이 시간에 예수님은 자주 일어나 외딴곳으로 가서 기도하셨습니다(마르 1,35 참조).
욥은 고백합니다. “(하느님) 당신 홀로 하늘을 펼치시고, 바다의 등을 밟으시는 분.”(욥 9,8) 그러므로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폭풍을 잠재우고 물 위를 걸으셨다는 사건은 예수님도 하느님처럼 이러한 의미의 바다를 지배하는 권능을 지니셨다는 것입니다. “당신께서는 오만한 바다를 다스리시고 파도가 솟구칠 때 그것을 잠잠케 하십니다.”(시편 89,10)
오늘 복음을 문자적 의미(sensus litteralis)가 아니라 성경 말씀의 ‘더 충만한 의미’(sensus plenior) 가운데 하나인 유비론적(analogical) 관점에서 해석하면, 제자들이 타고 있는 ‘배’는 ‘구원의 방주’로서의 ‘교회 공동체’를, 그 배가 맞닥뜨린 ‘맞바람과 파도’는 교회 공동체에 닥친 박해와 고난 또는 교회 공동체의 구성원들인 제자들이 예수님께서 그들 곁에 계시지 않는 상황에서 느끼는 불안감과 두려움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교회 공동체의 모습에서 우리는 시편 23편의 말씀을 연상하게 됩니다. “제가 비록 어둠의 골짜기를 간다 하여도 재앙을 두려워하지 않으리니 당신께서 저와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당신의 막대와 지팡이가 저에게 위안을 줍니다.”(시편 23,4)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θαρσεῖτε, ἐγώ εἰμι· μὴ φοβεῖσθε.”: 마태 14,27)
예수님의 신원과 정체는 “나다.”(‘ἐγώ εἰμι’) 라는 말 한마디에 드러납니다. 당신의 산 호렙에서 430년 동안 이집트 종살이를 하는 당신 백성 이스라엘을 구원하시기 위해 모세를 부르실 때 하느님께서 “나는 있는 나다.”(“אֶהְיֶה אֲשֶׁר אֶהְיֶה”, “ἐγώ εἰμι ὁ ὤν”: 탈출 3,14)라고 말씀하시며 다신 자신을 드러내셨듯이, 이제 예수님께서도 당신 제자들에게 “나다”라고 말씀하심으로써 당신께서 죽음에서 생명으로 건너가게 하시는 살아계신 구원자이심을 드러내십니다.
우리의 인생이라는 바다에는 때로 사나운 바람과 성난 물결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시련이 닥쳐올 때라도 우리는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마태 14,27) 하시는 주님의 목소리를 들으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십자가의 성 요한의 말씀으로 오늘의 강론을 갈무리합니다.
어둠 속에 있어도 믿음과 희망 안에 사십시오. 어둠 속에서도 하느님은 당신을 지켜 주시니 말입니다. 모든 걱정은 하느님께 떠맡기십시오, 당신은 그분의 것이고 그분은 당신을 잊지 않으십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