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째날
딸아이와 사위는 둘 다 젊고 건강하다. 활동적이다. 8개월된 아이를 데리고 2박3일 여행을 계획하였으니 말이다. 젖병이며 이유식이며 기저귀는 기본이고 아이의 의자와 이불도 준비하였다. 뒷 트렁크와 카시트가 있는 한쪽 의자까지 차 안은 짐으로 가득이었다. 콘도에 들어가 여행가방 두 개를 열어놓은 것을 보았는데 오오! 내 딸이지만 참으로 꼼꼼하고 질서정연하게 짐을 챙겨왔다. 자식 도율을 위한 어미의 마음을 가득가득 챙겨왔다.
반면에 우리는 룰루랄라!다. 가벼운 여행이다. 두 끼 아침을 준비하기는 했지만, 그 정도야 쉽다. 홀가분하다. 손자와 함께 가는 첫 여행이 아닌가. 흥이 일어난다. 얼씨구 절씨구 지화자 좋다. 손자가 귀여운 것은 책임을 맡지 않아도 되어서 라고 누군가가 우스개 소리로 말하였지만, 맞는 말이다. 우리는 손자를 안아주고 놀아주고 귀여워만 해 주면 된다. 얼마나 쉬운가.
일요일 이른 시간이라서인지 고속도로가 시원하게 뚫려있다. 빠른 속도로 가평 휴개소를 지나 홍천을 지나 내림천 휴개소에서 딸네와 만났다. 손자가 이유식을 먹을 시간에 맞추기 위해서다. 분유 먹는 시간과 자는 시간과 이유식 먹는 시간을 딱딱 맞추어 규칙적으로 아이를 돌보는 딸아이다. 이번 여행은 뭐니뭐니해도 손자의 일과표에 맞춰 움직이게 될 것이다.
매운 해물순두부와 황태찜으로 점심을 먹었다. 제 작은 의자에 앉은 도율은 쌀과자 한 개를 고 작은 손에 꼭 쥐고서 맛있고 얌전하게 먹었다. 기특한지고. 설악산으로 향했다. 케이블카를 타기 위해서다. 손자와 함께 케이블카를 타다니, 그 어느 때보다 흥분되고 신이 난다. 넓고 푸르고 높은 세상 설악을 도율에게 보여줄 수 있다는게 가장 기쁘다. 그래서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이리저리 고개를 돌리는 손자가 우리를 더욱 신나게 한다. 저기 봐라 울산바위가 우뚝 서 있다 저기 봐라. 파란 하늘이 가까워지는구나. 권금성에서 찍은 사진을 보면 손자보다 우리가 더 신이나 있다. 딸과 사위는 권금성까지 뛰어올라갔다 내려왔다. 젊음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재산이다.
손자가 분유를 먹고 자는 시간과 우리의 저녁밥 시간이 겹쳐져서 회를 포장해서 집에서 먹기로 하였다. 자연산만 취급하는 횟집이라는데, 가격이 좀 비싸기는 했지만 쫄깃한 식감이 자연산 답다. 맥주와 소주를 곁들이니 이야기꽃과 웃음꽃이 만발하였다. 웃음꽃은 얼마나 보기좋고 듣기좋고 향기로운가.
둘째날
바람이 불고 비가 내린다. 시원하다. 햇볕이 쨍하는 날보다 마음이 편안하다.느긋하게 아침을 먹고 낙산사로 향한다. 제 남편과 자식을 위해 해수관음상 앞에서 기도를 하고 싶다고 딸아이는 여행을 떠나기 며칠전부터 말했다. 딸아이가 결혼을 하기 전에 가족 여행을 왔었고 그때는 내가 가족을 위해 리본에 기도문을 썼었다. 그때와는 방법이 바뀌었는데, 촛대에 종이를 감아놓았고 딸아이는 그 종이에 기도문을 쓰고 촛불을 밝혀 눈을 감고 간절히 기도하였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그 기도문에는 도율뿐만 아니
라 앞으로 태어나게 될, 아직 임신도 안한, 지율이까지 넣어서 기도문을 올렸단다. 둘째아이를 가질 계획이라는 말이니, 기특하다. 애국자다.
남편은 낙산사에 동종 앞으로 손자를 안고 다가선다. 손자를 위한 종을 울리고 싶은 모양이다. 나도 기회다 싶어 얼른 곁에 서서 함께 종을 울렸다. 웅장하고 묵직하고 그윽한 종소리가 널리 널리 울려퍼졌다.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마음이 산과 바다와 하늘로 전해졌다. 손자를 위해 무언가 했다는 뿌듯함이 종소리처럼 내게 가득 들어찼다.
비는 그치지 않고 억수같이 쏟아진다. 낙산사를 돌고 난 후 홍예문 문루에서 잠시 쉬는 동안 남편 품에서 손자가 천사처럼 잠들었다. 충분히 자고 깨어나기를 차 안에서 기다리기로 했다. 아이들은 만족스럽게 잠을 자야 기분이 좋은 법이다. 남편은 만점짜리 할아버지다. 사랑으로 손자를 꼭 끌어안았으니 하루종일이라도 마다하지 않을 자세다. 덕분에 나는 옆에서 느긋하게 비 내리는 바깥 풍경을 오래도록 바라볼 수 있었다.
바다뷰제빵소 라는 찻집이 유명하단다. 바다가 훤히 바라다보이는 언덕배기에 세워진 3층 건물인데, 천장도 높고 실내가 유럽 어디인 것처럼 멋지게 꾸며져있다. 창가에 앉으니 푸르고 드넓은 바다가 한눈에 들어온다. 손자를 창가에 세우고 바다를 자꾸만 가리켰다. 바다 좀 봐라 바다 좀 봐라 아주 넓지 아주 멋지지. 바다를 바라보고 있는 도율의 뒷모습을 찍었는데, 의젓하게 생각에 젖은 폼이다. 뒷모습도 바다를 바라보는 눈빛도 귀엽다 귀여워. 안 귀여운 구석이 없다.
비는 계속 내린다. 점심에 무엇을 먹을까 찾아보더니 유명한 칼국수집이 있단다. 주차는 다섯 대만 가능하단다. 가까이에 유료 주차장이 있어 그곳에 차를 대고 주차비를 내면서까지 사람들이 주말이면 몰려드는 곳이란다. 맛집이란다. 연예인들의 사인이 벽면 가득이다. 감자옹심이와 얼큰한 칼국수를 먹었다. 우산을 써도 세찬 비에 옷이 젖어 축축하고 마음도 눅눅하던 차이니, 뜨끈한 칼국수는 제격이었다.
도율을 낳고 8개월 동안 저녁에 둘이 나가서 데이트를 한번도 해보지 못하였단다. 이번 여행동안에 그 일을 꼭 해보고 싶다고 딸아이는 말했다. 그래라 그래라 나갔다 오렴. 그 정도 내가 못하겠니. 어미인 나는 딸아이가 숨통을 틀 수 있는 시간을 자주 가져야한다고 생각한다. 내가 아이를 기를때는 지방에 살아 잠시 도와줄 사람이 아무도 없어서 답답하였다. 아이와 하루종일 지내는 일은 지루하고 힘이 들어 자칫하면 우울증이 생길 수 있다. 도율이 분유 먹을 양과 시간과 잠자는 시간을 꼼꼼하게 나에게 알려주고 딸과 사위가 외출을 하였다.
도율 뭐해? 도율 분유 먹었어? 얼마 먹었어? 응가 했어? 밖에 있는 동안에 수십번은 카톡을 한다. 제 자식이지만 끔찍하게 위한다. 편안하게 자유롭게 놀다가 와 이쪽 관심 꺼. 나는 카톡을 보냈다. 둘이서 오랜만에 싱싱한 조개구이를 먹고 즐거웠는데 아무래도 우리가 신경이 쓰였던 모양이다. 밥 간단히 드시고 계셔 치킨 한 마리 사갈게 함께 맥주 마셔요 카톡이 왔다. 9시도 되기 전에 고소한 치킨냄새를 풍기며 흥분된 얼굴로 딸과 사위가 돌아왔다. 따끈따끈한 후라이드 치킨, 부모를 헤아리는 딸과 사위의 따스한 마음이 들어있는 치킨이라 더 맛있다. 지금 이 시간이 치킨보다 감칠나게 맛있다.
셋째날
어제 비가 내려서인가보다. 환하고 환한 아침이다. 하늘에는 새털구름이 가득하고 공기는 청량하고 맑고 시원하다. 짐을 싸서 차에 싣고 바닷가로 향했다. 바닷가에서 도율을 앉혀놓고 사진을 찍어주고 싶단다. 바다를 가까이서 도율에게 보여주고 싶단다. 날씨가 좋으니 바닷물은 햇살에 반짝이고 흰 파도가 밀려갔다 밀려오는 풍경도 경쾌하다. 전체적인 풍경이 화사하고 환해서 기분이 붕 떠오르는 느낌이다. 철썩 철썩 바닷물 소리도 기쁘게 들려온다.
손자를 바닷물 가까이 앉혀놓고 사진을 찍었다. 여덟달 아이에게는 얼마나 신기하고 놀라운 풍경이겠는가. 고개를 이쪽으로 저쪽으로 돌리며 놀란 표정이다. 울고 있는 사진도 있다. 쏴아쏴아 밀려오는 파도가 무서웠을 것이다. 두려웠을 것이다. 손자를 가운데 두고 사진을 찍었다. 바다와 하늘과 어른들과 아기는 완벽한 피사체다. 손자 도율이 없다면 이만큼 완벽한 사진은 불가능이리라.
딸과 사위가 마주보며 찍은 사진을 보거나 도율과 함께 셋이서 찍은 사진을 보면 흐믓한 미소가 절로 나온다. 아이를 봐주는 일이든 목욕을 시키는 일이든 딸과 사위가 나누고 도와가는 모습을 볼 때도 그렇다. 이번 여행은 손자와 함께여서 특별하고 좋았지만 더 좋았던 것은 딸과 사위가 서로를 존중하고 배려하고 사랑하는 모습을 볼 수 있어서다. 한 공간에서 함께 이틀 밤을 자는 동안 딸과 사위의 태도나 모습 그리고 말 하나하나가 더 사랑스럽고 믿음직스러워졌다.
남편은 손자 도율을 하늘땅땅만큼 좋아한다. 안아주는 것을 특히 좋아한다. 도율은 편안하게 할아버지 품에 안겨 할아버지와 눈을 맞추는 것을 좋아한다. 할아버지가 자신을 얼마나 좋아하는지를 알고 있는 눈빛이다. 남편과 내가 동시에 두 손을 내밀어 이리와 이리와 하면 곧장 할아버지의 손에 제 작은 손을 얹는다. 아이들 가슴은 투명해서 상대방의 사랑의 농도를 금시 알아챈다. 할아버지가 하도 잘 안아주고 도율과 놀아주니 사위가 이렇게까지 말하였다. 함께 살면 더 좋겠어요.
손자 도율이 있어 특별한 여행이었다. 딸과 사위가 있어 즐거운 여행이었다. 두고두고 감사하고 감사할 여행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