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사 명장면] 49. 도성 출입금지 해제와 의의 〈끝〉
일본불교 여러 종파 앞 다퉈 조선 진출 계기
일련종 스님 사노 내각총리 김홍집에게 청원
개화 추진 조선 정부 악법철폐 차원서 ‘허용’
조선조 오래 동안 존속했던 승니도성출입금지는 1895년 4월 일본 일련종 스님 사노젠레이(佐野前勵)의 주선에 의해 해제되었다. 그러나 당시 사회적인 분위기나 조선정부의 개혁적 성향으로 살펴볼 때 해금은 일본스님의 전격적인 활동이 아니더라도 해결될 수 있었던 분위기가 조성되어 있었다.
개항과 해금논의
먼저 우리가 생각해 볼 수 있는 여건은 서구 열강과 조약을 체결한 이후 그들의 왕성한 활동력에 놀란 위정자들은 서학(西學)의 전교활동을 견제할 수 있는 방안으로 지금까지 억압하였던 불교를 다소 완화하여 서학에 대한 견제정책으로 삼고자 했다는 점이다. 그것은 불교가 재래종교로서 친밀감을 가지고 있으며, 민중들에게 내세적 신앙을 줄 수 있는 종교였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생각할 수 있는 것이 갑신정변 이후 나타난 신분타파의 경향이다. 이는 근대시민의식의 성장으로 인한 시대적 가치관의 변화이며, 이 같은 시대적 변화 속에서 당연히 스님들의 신분도 변화했으리라는 것을 추측하기는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이러한 개혁을 국가적인 차원에서 추진했던 것이 갑오개혁이다. 갑오개혁은 1894년 7월부터 1896년 2월까지 계속된 조선정부의 제도개혁운동이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7월 27일 개혁을 담당할 기관으로 군국기무처가 설치되었다. 이곳에서 즉시 실시해야 하는 주요사항 가운데 스님이 도성에 들어오는 것을 금지하고 있는 법의 폐지를 건의하였다. 이 건의가 수록된 자료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외교보고서’(1885~1913)이다. 이 보고서에 의하면 1894년 9월 13일 동경발로 보고한 것으로 8월 16일자 조선의 개혁을 다루고 있다. 보고서는 군국기무처가 즉시 실시해야 하는 주요 개선사항으로 18가지를 열거하고 있는데 14번째가 앞에서 말한 승니(僧尼)의 도성출입금지에 대한 해제이다. 이 보고서는 그밖에도 다른 조치들을 거론하고 있으면서 아직 군국기무처가 그 일을 끝내지 않은 것으로 보고하고 있다.
이 같은 내용으로 유추해 볼 때 당시 내외에 여러 가지 좋은 조건이 있었기 때문에 도성출입금지는 해제될 수 있었고 1894년 각의에 상정되어 거의 통과를 보려는 순간 대원군의 간섭 때문에 그만 거부를 당하였다고 하는 내용은 바로 군국기무처에서 제안한 개혁안이 바로 일본에 의해 재집권한 대원군에 의해 부결된 사실을 말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도성출입금지의 해제과정
이처럼 스님의 도성출입금지에 대한 해제가 우리 스스로 해결할 수 있었던 분위기가 조성되었지만 이루어지지 못하고 그런 분위기를 이어 실제로 해제된 것은 1895년 3월 29일(양력 4월 23일)이었다.
당시의 상황을 기록하고 있는 이능화의<조선불교통사>에 의하면 일본 일련종 스님인 사노가 건너와 내각총리대신 김홍집에게 글을 올려 스님의 도성출입금지를 해제해 줄 것을 청하자 김홍집이 이를 고종에게 아뢰어 윤허를 받았다고 전해지고 있다.
이처럼 조선불교계의 문제가 스스로의 힘으로 해결되지 못하고 일본스님의 힘에 의해서 이루어졌다는 사실은 이후 불교계의 흐름이 일본불교와 밀접한 관련 속에서 이루어질 수밖에 없음을 시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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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님의 도성출입금지 해제를 김홍집에게 건의한 일본인 사노스님. 사진출처=<한국불교 100년>
사노는 조선에 포교를 시작하면서 많은 일 가운데에서 스님의 도성출입금지에 대한 문제를 우선적으로 해결하고자 했을까? 표면적으로 나타난 이유는 일본의 스님처럼 조선의 스님도 도성 안을 자유롭게 출입할 수 있도록 하자는 바램이었다. 당시 우리나라의 스님은 도성출입이 금지되어 있었으나 일본스님은 경성에 포교소를 설치하고 자신들의 포교를 실행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사노는 조선의 스님은 출입하지 못하는데 남의 나라 스님은 자유로이 출입하는 모순을 없애기 위하여 입성을 허락해 줄 것을 요청한 데서 해금이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표면적인 이유에 불과하다. 그들이 도성출입금지를 해제하고자 한 의도는 다음에 있었음을 추측할 수 있다. 그것은 일본불교 가운데 일련종이 조선에서 활동하는데 용이하게 하고자 하는 의도와 함께 조선포교의 우세를 점하고자 한 정책이었다.
사노의 역할도 있었지만 도성출입금지에 관한 문제가 쉽게 해결될 수 있었던 것은 당시 내각을 주도하던 인물들의 불교신앙도 크게 작용하였다. 당시 조선을 둘러싼 국제정세는 일본이 청일전쟁에서 승리하면서 조선에 대한 지배력이 강화되었다. 이에 따라 일본에 대해 우호적인 성향을 지닌 내각이 형성되어 일본과 친밀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일본 공사관의 양해 아래 행해지는 일본인 유력자의 활동은 큰 모순이 없는 한 성공하기가 쉬운 때였다.
당시 유력한 각료이던 외무대신 김윤식은 불교내전에도 이해가 깊어 사노의 건의를 충심으로 찬성하고 많은 후원을 아끼지 않았다. 내무대신이었던 박영효는 물론이고 개화당의 주역으로 갑신정변을 도모했던 서광범이 법무대신으로 등용된 것도 그러한 분위기에 놓이게 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 이외에도 개화기 유대치의 신앙심에 크게 영향을 받고 있었던 이종원과 이정환 그리고 김영문 등이 내각에 포함되어 있었던 것도 문제를 풀어나가기가 수월한 점으로 작용하였다. 이들은 내각의 실무담당자로 있어 개인적 신앙과 함께 현실적으로 일본의 영향을 크게 받을 수밖에 없는 위치에 있었다. 이런 여러 가지 상황이 합쳐져 사노가 요구한 스님의 도성출입에 대한 해금은 쉽게 이루어질 수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해금 후 불교계의 동향
도성출입금지가 해제된 것은 1894년 조선정부가 개화정책의 일환으로 반사회적인 악법의 철폐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입안되었지만 실행되지 못하자 이런 분위기를 틈타 일본불교 가운데 일련종에 소속된 사노가 주도한 결과이다. 조선 수백 년간 행해진 배불정책의 하나인 도성출입금지는 불교계의 사회적 신분제한이라는 엄청난 결과를 야기한 정책이었다. 이같이 조선스님에게 있어서 상당히 중요한 문제가 일본스님의 노력에 의해 일시에 철회됨은 일본스님에 대한 경외감과 함께 일본불교에 대한 기대감을 불러일으키는 결과를 초래하게 되었다.
그 대표적인 예로써 1895년 4월 도성출입금지가 해제되자 사노에게 감사의 글을 올리고 있는 용주사 상순스님의 표현에서 그러한 분위기를 읽을 수 있다.
“대조선국 수원 화산 용주사 스님 석상순은 삼가 대일본대존사(大尊師)각하에게 축하의 절을 올립니다. 우리의 도(道)는 이 나라에서는 천박하고 신분이 낮아 시경에 들어갈 수 없었던 것이 500여 년이나 되어 항상 울적하였습니다. 다행히 교린의 조약이 이루어져 대존사 각하께서 널리 만 리 밖에까지 자비의 큰 은혜를 베푸시어 우리나라의 스님들로 하여금 500년 이래의 원통함과 비굴함에서 쾌히 일어서게 하시어 오늘 비로소 왕궁을 볼 수 있게 하였습니다. 이것은 실로 우리나라의 스님 모두가 한결같은 마음으로 감사드리는 바입니다. 입성에 즈음하여 대존사 각하에게 절을 올립니다.”
<사진설명> 도성출입금지 해제이후인 1900년대 초 부처님오신날 경축법회.
이 글의 내용으로 미루어 조선의 모든 스님이 공감할 수 있는 내용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글의 내용이 너무나 친일적이며 사노를 대존사 각하라 하여 극에 이르는 칭호를 사용하여 오히려 조선의 일반스님에게는 오히려 반감을 불러일으키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마저 들게 한다. 그렇지만 도성출입금지가 해제된 후 조선 불교계에 나타난 일본불교에 대한 시각의 한 단면을 보여주기에는 충분하다.
사노는 도성출입금지가 해제되자 이번에는 조선의 국왕과 정부관료 그리고 당시 사회적 저명인사들에게 불교를 알릴 수 있는 법회를 계획하였다. 표면적으로 조선국왕의 성수와 중흥유신의 성업을 축하하는 대법회였지만 이면에는 일본불교의 위세를 나타내고자 하는 의도가 숨어있었다.
그는 도성출입금지가 해제된 후 얼마 되지 않아 군무대신과 교섭하여 북일영(北一營)의 사용을 허가받았다. 그리고 5월 2일부터는 광고지를 도성 안의 요소에 게시하는 한편 정부 고위관리들에게 안내장을 보내 5월 5일 법회를 거행하였다. 이때 조선 불교계에서는 남북한산승대장, 화계사, 백련사, 용주사 및 금강산 승도(僧徒) 약 300여 명이 참석하였다. 사회인사로서는 총리대신 김홍집과 외무대신 김윤식을 비롯하여 학부대신, 농공상부대신 경무사 등 정부고관 20여 명과 일본인 저명인사가 40여 명, 그리고 일반 참석자를 합쳐 모두 1만 4000여 명에 달하는 군중이 모여 법회가 대성황에 이르렀다.
도성출입금지가 해제된 후에 나타난 특징 가운데 두드러진 것은 일본불교의 여러 종파가 앞을 다투어 조선에 진출하였다는 점이다. 1895년 이전까지 조선에 별원이나 포교소를 개설한 종파는 진종본원사, 대곡파본원사, 서본원사, 일련종에 불과하였다. 그러나 스님들의 도성출입이 자유롭게 되고, 법회를 통해 불교에 대한 인식이 높아진 점을 계기로 기존의 종파들은 물론이고 새로운 종파들이 앞을 다투어 조선으로 진출하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이들 각 종파는 표면상으로 조선에 사는 일본인에 대한 포교에 본뜻을 두었다고 하지만 그보다는 조선인에 대한 포교에 주력하였다. 또한 조선사찰의 스님과의 교류를 밀접하게 하려는 목적을 지니고 있었다. 일본정부의 적극적인 도움을 받은 일본불교는 급진적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그 결과 한일합방이 이루어지던 시기에 이르면 조선 내에서 일본불교의 별원과 포교소가 전국적으로 분포하게 되었다.
김 경 집 / 진각대 교수
[출처 : 불교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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