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충구님 페북 글)
시대 착오적 기독교
1.
간혹 신실한 기독교 신자를 만나면 독선의 깊이가 소름이 돋을 정도로 깊다는 것을 느낀다. 국민의 힘당 지지자에 이런 기독교 신자가 더 많다.
2.
이들의 내면에는 많은 것이 겹겹이 쌓여있다. 다른 종교에 대한 근거 없는 우월성과 오만, 반인권적 무례함, 비과학적 신념, 윤리 없는 정치적 판단, 삶의 독립성 상실, 교회와 하나님에 대한 비차별적 인식, 전근대적 질서 의식과 권위 의식 유통, 여성 차별적 직제, 철 지난 반공 의식의 신앙화, 신화적 사탄 개념의 일상화, 하나님의 말씀과 뜻에 대한 아전인수적 주장… 등등의 문제가 아무런 비판적 논의 없이 유통되고 있다. 따라서 합리성 담론, 도덕 담론, 인권 담론, 비판 담론이 살아있지 않아 독선적인 “죽은 정신의 사회 구성원”으로 전락한 지 오래다.
비판 정신이 살아날 것을 우려하는 교권주의 세력에 의한 감시 체제만 작동하고 있다. 이따금 마녀사냥 하듯 허위 조작 주장으로 신학자를 잡는 이유다. 개혁, 변혁, 변화를 외치지 않는다. 인본주의를 반대하고 신본주의를 외치는 본의는 하나님께 급진적인 복종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라, 현대 비판 담론을 거부하고 과거로 돌아가자는 데 있다. 과거로 돌아갈수록 거긴 시대착오밖에 없다. 집단 퇴행성 정신병에 걸려 있는 것이다.
3.
이성의 사족을 묶어두면 거기엔 무비판 영역이 조장되어 교회 공동체의 크고 작은 범죄가 거침없이 유통된다. 교단장 선거, 각종 선거에서 금권이 판을 친다. 금권 선거의 자금은 신자가 하나님께 드린 헌금을 목사가 오남용, 유용하는 것이다. 그런데도 목사 장로들이 합작하여 이를 상식화하고 있다. 거대 자금을 만들어 금권 선거에 투입할 능력을 갖춘 집단은 작은 교회가 아니라 대형 교회들뿐이다. 그래서 대형 교회 목사가 교단장 직을 우선 독식하고 있다.
이런 범죄가 한국 기독교의 상식이 된 까닭은 교회의 준 사유화 현상 때문이다. 특히 대형 교회는 소수에게 장악, 사유화되어 교단의 행정 및 감시체계가 먹혀들지 못한다. 심지어 대형 교회의 돈이 교단이나 에큐메니컬 기관 운영 자금의 주요 자원이 되므로, 돈에 의한 지배가 교회 정치의 주된 흐름이 되고 있다. KNCC의 존재 위기도 돈의 지배에 끌려들어 갔기 때문이다.
여기서 일어나는 비리는 돈 많은 교회의 목사가 교회 돈의 주인 행세를 하며 그 지배력으로 교권 경쟁력을 휩쓸고 쉽게 교회 대표직을 장악하는 것이다. 설령 간혹 작은 교회 목사가 교권을 담당해도 여전히 대형 교회의 돈에 의한 영향력을 벗어나지 못하게 된다. 한국교회는 근본적으로 거룩한 영성에 의해 이끌려지는 것이 아니라, 돈의 지배하에 놓여있다. ‘영성적이다’라는 말과 돈의 지배가 같은 의미로 사용된다.
3.
대형 교회가 가진 권력은 정형화되어 있지 않으나 막강하다. 정부 각 부처의 고관, 군 장성, 판검사, 경찰, 시장, 구청장, 등등의 인맥이 거미줄처럼 쳐져 있는 곳이 대형 교회다. 그들은 목사의 발밑에 무릎을 꿇고 산다. 목사가 무서워서가 아니라, 대형 교회가 생산해 내는 친소 관계의 위력이 사회 각 분야 인사에 영향을 끼칠 수 있기 때문이다. 철없는 사람 제외하고 그 어느 사람도 목사를 비판하거나 그에게 반기를 들지 못한다. 그 목사가 붙박이처럼 평생 교회를 지배할 수 있는 이유도 바로 이런 기이한 관계망의 위력 때문이다. 이 관계망안에서는 권력이 친소관계를 통해 작동한다.
관계망을 통해 일이 잘 되면, 하나님의 은혜요 축복이라고 여긴다. 그러니, 목사가 설교에서 정의와 평화, 정직과 성실에 기반한 하나님 나라를 선포할 수 없다. 성실하게 살지 않아도, 수고하지 않아도, 무능해도 관계망을 통해 축복하시는 눈먼 하나님은 은혜로우신 하나님으로 포장되어 선포된다. 이 하나님은 환경위기, 경제위기, 정치 위기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는다. 기껏해야 공동의 적으로 투사된 반공주의, 반북 적개심만 불태워도 정치적 소임을 다하는 것으로 대신한다.
평화에 대한 책임, 하다못해 평등과 인권에 대한 설교, 사회적 약자에 대한 설교도 하지 못한다. 목사의 성분과 사상이 의심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 대신 부유한 자들이 재산을 불려 자식에게 부를 대물림할 권리가 보장되듯, 교회를 성장시켜 제 자식에게 물려주는 것을 이상하다고 여기지 않는다. 낯선 자가 나타나 기존의 질서를 뒤흔들 것을 우려하기 때문이다. 이들의 세계에서 경제적 정의란 없다. 그것은 가진 자가 착취당함을 의미할 뿐, 소유의 권리가 정의에 우선한다.
4.
그래서 강남의 대형 교회 신자들은 집단으로 가치 판단을 한다. “이대로! 그대로!”를 외치는 것이다. 서구 교회가 복지 사회 건설의 대가로 구복 신앙을 포기하는 길을 택한 것을 이들은 실패라고 주장한다. 삼박자 축복과 구원에 목마른 가난한 자, 병든 자, 삶의 의미가 박탈된 자들이 많을수록 교회가 번성하고, 축복을 무한대로 열어 놓은 자유 사회가 되어야 신자들이 24시간 주님만 바라볼 수 있기 때문이다. 요람에서 무덤까지 사회복지가 베풀어지는 사회에서는 삼박자 구원이란 경쟁적으로 탐욕스러운 자들의 게걸스러움이 된다.
서구 기독교 세계에서 사회주의적인 인간애적 가치 실현 이후 신자들은 삶의 궁핍과 결핍을 채워주는 하나님 축복에 목말라하지 않는다. 오히려 축복으로 포장된 물적 탐욕을 버리고 저마다 인간의 얼굴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을 더 소중히 여긴다. 이런 이들을 비난하면서 한국의 대형교회 목사들은 “왜 저들의 교회는 텅 비어 있는가?“라고 묻고 ”서구 기독교의 몰락”의 현실이라고 주장한다. 이어 그들은 분노하면서, “누가 저들을 교회의 노예 상태에서 해방했는가?” 라고 물음을 던지고 “현대 신학, 자유와 해방을 가르친 신학” 때문이라고 답한다.
이들은 신자들이 영원히 목사의 후견이 필요한 하수, 목사가 주인인 교회의 노예이기를 바라는 셈이다. 이들은 교권이 하늘을 찌르던 중세기를 그리워하며 신자들이 무비판적으로 십일조와 각종 헌금을 교회에 바치던 그런 노예로 살아야 한다고 여긴다. 서구 기독교 세계에서는 오래전에 사라진 풍경이다. 보수적일수록 목사들은 중세기를 그리워한다. 몸은 물질적 풍요가 넘치는 현대 강남 같은 곳에서 살지만, 정신은 여전히 중세기적이다. 그런데도 그 교회에서는 아무도 딴지를 걸지 않는다. 집단으로 세뇌된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