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후 쇠락했다가 1211년(고려 희종 7년)에 원묘국사 요세(1163~1245) 스님에 의해 옛터에 중창되었고, 백련결사를 맺어 수행하면서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고려 후기 무시정권 시기에 정치와 종교는 제 기능을 상실했고, 몽고와 왜구의 침략으로 민중의 삶이 살육과 눈물로 점철된 고난의 시대에 요세 스님은 어둠의 한가운데에서 희망을 열어 가고자 했고, 현세의 인간에 대한 무한한 신뢰를 보여주는 결사운동을 벌였습니다. 이러한 백련결사는 개경에서 멀리 떨어진 남도 땅 끝에서 민중들과 함께 참회와 염불수행을 통해 정토세계를 염원하는 민간 결사운동이었습니다.
당시 요세 스님을 필두로 한 변혁적 열망을 서원했던 스님들과 그 뜻에 공감한 개경의 국자감 유생들(23명), 그리고 지역의 토호 세력들이 주축이었고, 불교적 진리에 가까이 하고자 한 광범위한 대중들의 참여가 있었습니다. 백련결사는 그로부터 120여 년간 크게 번창하였습니다. 세상이 어지럽고 국권이 흔들리던 무렵, 승려들을 비롯한 당대의 수많은 유생들을 비롯한 지식인들과 수령방백들, 불교적 진리로 새로운 세상을 열어가고자 했던 백성들이 그 주역이었습니다.
그 힘이 전국에 퍼져 당시 경상도 상주 등 각지에 백련결사가 분포되었습니다.
또 국교가 불교였던 고려 조정에서는 결사를 이끈 8분(원묘국사, 정명국사, 진정국사, 원조국사, 원혜국사, 진감국사, 목암국사)을 국사로 모셨습니다. 이 시기 고려사기를 보면 공민왕자가 1351년(충정3년)에 백련사에서 살았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로 크게 흥했으나 이내 나라가 혼란해지고 왜구가 세 차례나 사찰에 침입하여 폐허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이후 조선조가 성립된 뒤인 1430년(세종12년)에 행호대사가 효령대군의 후원으로 동원 20동과 서원 4동을 건립하고 왜구의 침입에 맞서 행호토성을 쌓고 사찰의 기틀을 다시 세웠습니다.
세종의 둘째 형인 효령대군은 불교에 귀의하고 백련사에 입산하여 8년간 큰 법회를 여는 등 다양한 종교 활동을 하며 불/법/승(佛/法/僧) 삼보에 기원하는 수륙제를 지내기도 했습니다.
조선시대 말기에도 백련사는 청허 휴정선사의 의발을 전수 받은 8명의 종사(소요대사, 해운대사, 취여대사, 화악대사, 설봉대사, 송파대사, 정암대사, 연파대사)를 배출하며 법맥을 이어왔습니다. 백련사가 참 세상을 염원하는 상징으로 자리했던 것입니다. 일설에 의하면 ‘백련사에서 8국사와 12종사가 나온다’고 하였는데 8국사는 고려 때 나왔고, 조선시대 8종사가 배출되었으니 이로 볼 때 앞으로 4종사가 배출될 것이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다산 정약용(1762~1836)이 강진에 유배 내려와 백련사 인근 다산초당에서 여유당전서 500권을 찬술했을 때에는 대흥사 12대 강백을 지낸 아암 혜장선사(1772~1811)가 백련사 주지로 계시면서 다산과 종교와 나이를 초월한 애틋한 우정을 교유한 사찰로 유명합니다.
백련사에는 다산 정약용이 기거하며 저술활동을 펼쳤던 다산초당과 넓은 차밭, 천연기념물 제 151호 동백나무 숲 등이 그런 역사의 숨결을 간직한 채 여전히 오롯하게 남아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