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이 주신 ‘약속의 땅’. 가나안은 아프리카, 유럽, 아시아 세 대륙이 만나는 곳에 위치했다. 가나안 땅에 터했던 고대 이스라엘은 여러 제국들(이집트, 메소포타미아, 아시리아, 바빌론, 메대, 페르시아, 마케도니아(그리스), 로마)의 힘의 각축장이 되는 운명을 띠고 있었다.
성경의 핵심 맥을 공부하는 네 번째 시간에는 인류 역사가 어떤 과정을 통해 경쟁과 폭력을 바탕으로 하는 힘의 논리를 따라 갔는지.. 힘이 곧 구원이 되는 믿음 속에서 힘을 얻기 위해 하나님의 것인 ‘공公’의 영역(토지, 물, 공기 등등)을 아무렇지 않게 사유화하기 시작했는지.. 그런 착취와 억압 속에서 해방을 꿈꾸며 ‘묵시운동’이 하나의 사조 또는 의식성향으로 출현했음을 짚어보았다.
신석기 혁명 이후로 인류는 힘 있는 자가 힘없는 자의 잉여생산물을 빼앗아 차지하기 시작했고, 이에 따라 힘을 추구하고 숭배해왔다. 그 힘은 주로 군사력을 뜻했지만 시대에 따라 경제력, 기술력, 정보력 등으로 그 모습을 달리하기도 했다. 제국의 힘은 군사, 경제, 정치, 이념 전반에 걸쳐 통제하는 막강하고 복합적인 힘을 갖게 되었다. 그만큼 사람들은 절망적이었을 것이고 그런 지배논리는 피지배자들에게도 내면화되고 있었을 것이다.
‘묵시’는 그리스어에서 나온 단어로 ‘밝힘’, ‘폭로’. ‘계시’를 뜻한다.
묵시론 적 세계관의 핵심은 1) 현재 질서에 대한 극심한 환멸 2) 상황을 개선하기 위해 무슨 일도 할 수 없다는 무력감 3) 이 무익한 시대는 곧 막을 내리리라는 확신으로 이루어져 있다.
종말론은 이스라엘의 ‘제국 경험’과 깊이 연관되어 있다. 여러 제국에게 끊임없이 침략당하면서 신앙과 현실의 부조화를 경험했고 무엇보다 낙원(평등공동체)를 잃게 되면서 제국의 끝을 소망하게 된다.
이렇듯 종말론은 세상의 종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이 땅에서 이루어지는 것”을 뜻한다. 악의 종말, 불의의 종말, 억압의 종말, 착취의 종말, 폭력의 종말, 즉 제국의 종말인 것이다.
4강을 통해 요한의 세례운동(묵시적 종말론)과 예수의 밥상공동체(협력적 종말론)의 차이에 대해 듣고 ‘아! 그렇구나’하고 무릎을 탁! 쳤다. 예수님을 따르고자 하는 삶이 설득력을 갖고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근원적인 힘을 깨닫는 순간이었다!
세례자 요한은 사람들의 죄 때문에 하나님의 변혁적인 개입이 늦어지고 있다고 믿었다. 그래서 세례운동을 통해 거듭난 이들의 수가 차면 하나님의 심판이 이루어질 것이라 했다.
처음에 예수는 요한의 세례운동에 동참했다. 그에게 세례를 받고, 그에게 배웠다. 그런데 예수는 그의 견해만 배운 것이 아니라, 그의 실패로부터도 배웠다. 예수는 요한의 ‘금식’을 선택하기 보다 사람들과 함께 ‘잔치’를 벌였다. ‘열린밥상공동체’를 통해 ‘지금 여기서’ 누구나 하나님 나라를 ‘체험’하게 했다. 예수가 전하는 하나님나라 운동의 핵심은 ‘비폭력’이었다. 심판과 함께 언젠가 도래할 하나님나라가 아니라 하나님의 것(공公)은 하나님에게 돌려드리고 그 나머지 안에서 평화롭게 나누며 사는 지금 여기의 하나님나라였다.
‘이미’와 ‘아직’ 사이에 심판이 아니라 예수의 생명 평화를 배우고 실천할 동역자로서의 몫이 남아있음을 깨닫는다.
오늘, 여기에서의 구원, 해방사건을 지어가야겠다.
온누리 생명평화 길벗들과 함께^^
첫댓글 마을밥상에 관계하셔서 밥상공동체가 더 큰 의미로 느끼신 것 같습니다. 사실 밥상공동체는 다음 과의 주제입니다. 그 때 그 해방적 의미와 힘을 더욱 느껴보세요. 감사합니다. ^^
성경에 대해 새로이 눈떠가는 과정이야말로 구원에 다가가는 길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배움길 정성껏 이끌어주시는 수고에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