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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과 신앙] (21) 세균과 인간
1999년 프랑스 신문사 르 몽드가 선정한 ‘세기의 도서 100권’ 목록에는 영국 작가 H.G.웰스가 1898년 집필한 공상과학 소설(SF) 「우주전쟁」이 있다. 웰스는 「타임머신」 「투명인간」 같은 유명한 SF 소설을 남겼으며, 그의 과학적 식견과 인류 문명의 지향점에 대한 깊은 고민은 오늘날에도 많은 교훈을 준다.
「우주전쟁」은 지구 문명보다 앞선 화성인들이 지구를 침공한 이야기다. 화성인들의 무자비한 공격에 속수무책으로 당하는 인간들의 무기력한 모습이 나온다. 인간만이 유일한 지적 존재라는 오만함을 꼬집고 당시 제국주의 영국의 잔악한 식민 지배를 고발한 이 작품은 여러 번 영화나 TV 시리즈로 제작됐다. 소설은 지구의 세균에 면역력이 없는 화성인들이 세균 감염으로 자멸한다는, 조금은 허무한 엔딩으로 마무리된다.
소설이 쓰인 1890년대는 프랑스의 파스퇴르가 탄저균을, 독일의 코흐가 결핵균과 콜레라균을 발견해 질병의 원인인 세균연구에 새로운 획을 긋는 시기였다. 세균(細菌, bacteria)의 크기는 0.5㎛(마이크로미터)부터 0.5㎜ 정도로 매우 작아 맨눈으로는 볼 수 없다. 세균은 중세 유럽 인구의 30~50%를 죽음에 이르게 한 페스트균이나 폐렴균처럼 질병을 일으키는 종류부터 유산균처럼 인간에게 이롭거나 인체에서 공생하는 비병원성 대장균 등 그 종류가 매우 다양하다.
이 세균들도 각자 생존 방식에 따라 살아가는 하느님의 또 다른 창조물이다. 세균은 보이지 않을 뿐 생물의 몸, 공기, 물, 휴대폰 표면 같은 사물 등 세상 어느 곳에나 존재한다. 질병을 일으키는 병원성 세균에 대처하는 방법이 없던 시절에는 단순한 세균감염이 치명적 합병증을 유발해 사망하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1928년 영국의 플레밍이 푸른 곰팡이가 세균 증식을 억제하는 것을 우연히 발견한 이후 인간은 항생제를 개발해 세균을 정복하기 시작한다. 항생제 사용은 제2차 세계대전 때 많은 군인의 생명을 살리는 데 큰 역할을 했다. 그러나 인간만이 다른 생물보다 우월하다는 생각을 비웃듯 세균은 항생제 내성 유전자 변이를 통해 진화하여 살아남아 지금은 어떤 항생제에도 견디는 슈퍼박테리아가 출현했다.
과학자들은 46억 년 지구 역사에서 원시적인 세균의 출현을 38억 년 전으로 추정한다. 인류가 지구에 등장하기 수십억 년 전부터 열악한 원시 지구 환경에 적응한 세균은 다른 생명체들과 함께 지구 생태계를 이루고 있다. 알베르 카뮈는 그의 소설 「페스트」에서 “내가 확실하게 알고 있는 것은 사람은 저마다 자신 속에 페스트를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 병균은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했다. 인간은 좋든 싫든 세균과 공존할 수밖에 없는 운명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문학적 표현이다.
세균이나 바이러스에 감염되어 호흡기에 염증이 발생하는 대표적 질환이 폐렴인데 증상이 심할 경우 호흡부전과 사망에 이르게 된다. 폐렴은 60대 이상에서는 치사율이 30% 정도이며, 80대 이상에서는 50%나 된다. 현재 88세로 고령인 프란치스코 교황이 양쪽 폐에 폐렴 진단을 받고 아직도 병원에서 치료 중이다. 전 세계 신자들이 마음을 모아 교황의 쾌유를 기도하고 있는 지금, 프란치스코 교황이 부디 세균과의 힘든 싸움을 이겨낼 수 있도록 하느님께 청해본다.
[과학과 신앙] (22) 정의의 저울
물리학과 화학에서 무게(weight)는 중력에 의해 물체에 작용하는 힘이며, 질량(mass)은 물질이 갖는 고유의 양으로 정의한다. 무게의 단위는 N(뉴턴), 질량의 단위는 g(그램)이나 ㎏(킬로그램)을 사용한다. 무게는 장소에 따라 변하는 상대적인 값이라 달에서 몸무게를 측정하면 지구에서보다 1/6 작게 나오지만 질량은 우주 어디에서나 변하지 않는 불변의 값이다.일상생활에서 이 두 용어는 구분 없이 사용되어 흔히 ‘내 몸무게가 70kg이다’와 같이 표현하는데, 과학적으로 이 표현은 오류이며 ‘내 몸의 질량이 70kg이다’가 정확한 표현이다. 또는 ‘무게=질량×중력가속도 상숫값(지구의 경우 약 9.8)’이므로 ‘내 몸무게가 686N(뉴턴)이다’라고 해야 한다.
고대부터 현재까지 상업과 교역에서는 거래 대상이 되는 물질의 실질적 양이 중시되어 무게가 아니라 불변의 값인 질량을 표준으로 사용한다. 고기 600g(한 근), 금 3.75g(한 돈)으로 사용하는 것이 그 예다. 질량은 저울로 측정하는데 성경에 “아브라함은 (⋯) 은 사백 세켈을 상인들 사이에 통용되는 무게로 달아내어 주었다”(창세 23,16)고 쓰여있듯 인류는 예부터 저울을 사용했다.
기원전 수천 년 전 고대 이집트 시대에도 저울 사용의 기록을 볼 수 있다. 고대 이집트인들이 관 속에 미라와 함께 매장한 사후 세계의 안내서인 ‘사자의 서(死者의 書)’에는 죽은 자를 인도하는 신 아누비스가 양팔저울을 이용해 한쪽에는 죽은 자의 심장을, 다른 쪽에는 정의의 여신 마아트의 깃털을 올려놓고 무게를 재는 그림이 있다. 죄가 많은 자의 심장은 무거워 저울이 심장 쪽으로 기울어져 지옥으로 쫓겨나고 반대로 저울이 깃털 쪽으로 기울면 영생의 세계로 간다고 한다.
대한민국 법원은 저울을 들고 있는 정의의 여신을 현대적으로 형상화한 그림을 로고로 사용하고 있다. 대법원 앞에 있는 정의의 여신상도 저울과 법전을 들고 있는데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정의의 여신’ 디케는 왼손에 저울을, 오른손에 칼을 들고 있다. 저울은 공평하고 엄정한 법의 기준, 칼은 법 집행의 엄격함과 강력한 권위를 상징한다.
요즘 뉴스에서는 거의 매일같이 유명 인사들에 대한 법원의 판단과 거기에 따른 여론 반응이 보도되고 있다. “너희는 재판할 때 불의를 저질러서는 안 된다. 너희는 가난한 이라고 두둔해서도 안 되고, 세력 있는 이라고 우대해서도 안 된다. 너희 동족을 정의에 따라 재판해야 한다”(레위 19,15)는 성경 말씀처럼 절차적 공정성과 정의로운 판결이 나오기를 바란다.
인간이라면 삶이 다하는 날 누구나 한번은 서야 할 법정이 있다. 그 어떤 법정보다도 상위에 있는 그곳의 재판관은 하느님이다. 우리 또한 자신에게 주어진 삶 동안 제대로 살아왔는지, 자신의 의무를 다했는지 그곳에서 간단한 셈법으로 정의의 저울을 마주할 것이다.
윤동주 시인은 ‘서시’에서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소망했고 칸트는 「실천이성비판」에서 “생각할수록 점점 더 새롭고 큰 경외감으로 마음을 채우는 두 가지가 있다. 그것은 밤하늘에 빛나는 별과 내 마음속의 도덕률”이라고 했다. 윤동주 시인과 칸트가 숭고한 가치로 여긴 인간으로서의 도덕성이 지금 이 시대에 가장 절실한 덕목이 아닐까 싶다.
[과학과 신앙] (24) 사람 눈이 두 개인 이유
사람의 눈은 왜 두 개일까? 과학책에서는 이 질문에 원근감과 입체감을 더 잘 느끼기 위해서라고 답한다. 하지만 이것은 눈이 두 개인 이유에 대한 설명이 아니라 눈이 두 개이기 때문에 나타나는 결과다. 누가 또는 무엇이 사람의 눈을 두 개로 만들었는지에 대한 근원적 물음에 과학은 아직 답하지 못한다. 눈이 두 개이기 때문에 나타나는 장점은 명확하다. 두 눈과 물체 사이에서 형성되는 각도를 광각(光角)이라 하는데 광각의 크기에 따라 뇌에서는 물체가 멀리 있는지 가까이 있는지를 인지한다. 눈과 물체의 양 끝에서 형성되는 각도는 시각(視角)이라 하는데 물체의 크기를 입체적으로 느낄 수 있게 한다. 눈은 빛 자극을 받아들이는 감각기로서 사물의 형태나 색을 감지하고 사물의 위치를 파악하게 하지만, 모든 동물의 눈이 사람 눈처럼 다양한 기능을 수행하지는 못한다.
예를 들어 물속에서는 멀리 있는 물체가 잘 안 보여 대부분 어류는 가까운 물체만 식별할 수 있는 근시(近視)이며 눈에 색을 감지하는 세포가 없다. 양서류인 개구리나 파충류인 뱀의 경우도 불완전한 눈의 기능으로 인해 다른 감각기의 도움을 받아야 먹이를 식별하며 색 구별을 못 한다. 조류의 경우는 사람보다 5∼10배 정도 멀리 볼 수 있는데 하늘을 날며 높은 곳에서 먹이를 찾아야 하는 생존 조건과 관련 있다.
포유류인 개의 경우는 빨간색을 구별하지 못해 사람의 적록색맹과 유사한 시각을 갖고 있으나 뛰어난 코의 후각과 귀의 청각이 눈의 불완전함을 보완한다. 오직 인간과 침팬지 같은 일부 영장류만이 자연에 존재하는 많은 색을 볼 수 있으며 앞을 향한 두 눈으로 원근(遠近)감을 인지하고 사물의 크기를 파악한다.
그러나 인간은 다른 동물보다 발달한 눈을 가지고 있음에도 세상과 타인에 대한 본질적인 원근 조절에 종종 실패한다. 세상에는 멀리서 봐야 제대로 보이는 것이 있으며 반대로 가까이 클로즈업해야지만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 있다. 자신의 내면으로는 최대한 가까이 다가가 구석구석 성찰하고, 타인의 잘못이나 세상 일들에 대해서는 조금 떨어져서 전체적인 윤곽을 봐야 한다.
인터넷에 악플을 올리는 사람들, 남의 잘못에 쉽게 분노하는 사람들이 정작 자신의 내면에 대해서는 가까이 다가간 적 있을까? 매주 한 번 수채화 수업에 간다. 스케치북에 지금 내가 그리고 있는 그림이 제대로 채색되는지 고개를 갸우뚱할 때 미술 선생님께서는 자주 “가까이서만 보면 안 보여요. 조금 멀리 두고서 보세요”라고 말씀하신다. 요즘 이 말의 의미를 자주 되새김한다. 세상일과 타인에 대한 원근 조절이, 정신의 시력이 필요하다.
이번 주 사순 제5주일 복음에서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죄지은 여자를 돌을 던져 죽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리스도께서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저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요한 8,7)라고 하시자 “이 말씀을 듣고 나이 많은 자들부터 시작하여 하나씩 떠나갔다.”(요한 8,9) 타인의 잘못을 가까이 들여다보고 비난하기 전에 자신에 대해 가까이 보는 내면의 원근 조절이 필요하다. 우리는 언제부터인가 마음의 시력을 잃고 멀리서 봐야 할 것은 너무 가까이서 크게 보고, 가까이서 봐야 할 것은 너무 멀리서 보고 있는 것은 아닐까?
[과학과 신앙] (25) 새벽 닭이 울기 전에
‘은하 밝은 고요한 밤에는 새벽을 알기 어렵고(星河夜靜難知曉), 바람은 약해 종소리가 밤을 알리지 못하는데(鐘漏風微未報更)⋯ 첫 닭의 꼬끼오 소리 무척이나 듣기 좋구나(喜聽嘐嘐第一聲).’
이 글은 조선 전기 대학자이며 문인인 용재 성현 선생의 시 일부다. 그는 음악에도 조예가 깊어 성종의 명을 받아 1493년에 유자광·신말평과 함께 조선 음악의 교과서라 불리는 「악학궤범」을 편찬했다. 문학과 음악에 뛰어난 재능을 지녔던 그는 새벽의 고요함을 깨우는 닭의 울음소리를 시를 통해 낭만적으로 묘사했다. 그렇다면 왜 닭은 동틀 무렵인 새벽에 우는 걸까? 척추 동물의 경우 뇌 중심부에 솔방울을 닮은 호르몬 분비 조직인 송과선(松果腺)이 있다. 여기에서는 멜라토닌 호르몬이 합성·분비되는데 멜라토닌은 낮과 밤의 일주기(日週期)에 따른 생리적·행동적 활동의 일상 리듬을 만드는 생체시계 역할을 한다. 멜라토닌은 빛이 약한 밤에는 분비가 촉진되어 수면을 유도하고, 빛이 강한 낮에는 분비가 억제되어 수면에서 깬 상태를 유지하게 한다. 밤에 방의 전등을 끄지 않으면 잠을 자기 힘든 건 이 때문이다.
포유류는 눈을 통해 빛을 받아들이지만, 조류는 머리의 피부를 통해서도 직접적으로 빛을 받아들여 송과선을 자극하기 때문에 다른 동물보다 훨씬 빛에 민감한 생활 주기를 갖는다. 이 때문에 새벽 동틀 무렵 희미한 빛에도 조류는 멜라토닌 분비 감소로 잠에서 일찍 깨어나 이른 아침부터 부지런히 지저귄다. 닭 또한 이런 이유로 사람들에게 아침을 알리는 알람 역할을 하는 것이다. 성현 선생의 귀에는 새벽 첫 닭의 울음소리가 듣기 좋았겠지만, 베드로 성인에게는 그 소리가 가슴 철렁한 천둥소리처럼 들렸을 것이다.
이번주 주님 수난 성지 주일 복음에는 베드로가 최후의 만찬 자리에서 “주님, 저는 주님과 함께라면 감옥에 갈 준비도 되어있고 죽을 준비도 되어 있습니다”(루카 22,33)라고 하자, 예수님께서 “베드로야, 내가 너에게 말한다. 오늘 닭이 울기 전에 너는 세 번이나 나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22,34)라고 하시는 장면이 있다. 실제 베드로는 새벽 첫 닭이 울기 전 예수님께서 끌려가실 때 세 번이나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정했다. 베드로는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생각나 ‘밖으로 나가 슬피 울었다.’(22,62)
그리스도를 박해하던 권력에 대한 두려움과 굴종, 자신에 대한 비굴함에 괴로워하던 베드로 성인의 인간적인 나약함은 첫 닭의 울음소리와 함께 변모되고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죽을 때까지 교회의 반석으로서 역할을 다한다. 생명파 시인 청마 유치환은 1953년 그의 수상록 「예루살렘의 닭」에서 ‘위선이 선(善)을 능욕하는 그 부정 앞에 오히려 외면하며 회피하므로서 악에 가담하지 않았는가. 새벽이면 새벽마다 먼 예루살렘 성에 닭은 제 울음을 기일게 홰쳐 울고 (⋯) 사모치는 분함과 죄스럼과 그 자책에 눈물로서 베개 적시우노니’라며 스스로를 반성했다.
사순 시기는 깊은 성찰을 통해 세상과 자신에 대한 행동의 변모를 실천해야 할 회심(回心)의 시간이다. 어디선가 닭 울음소리가 들리기 전에 세상의 부정과 위선 그리고 자신에 비굴함에 대해서 외면하지는 않았는지 살펴야겠다.
[과학과 신앙] (26) 넛지(nudge)
2017년 노벨 경제학 수상자 리처드 세일러(Richard H. Thaler)는 경제와 인간의 행동 심리학을 접목한 행동경제학으로 주목을 받았다. 그의 저서 「넛지(nudge)」에서는 인간 행동 심리의 예로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공항 남자화장실 소변기에 파리 스티커를 붙여놓은 후 소변기 밖으로 새는 소변량이 무려 80%나 감소한 사례를 들었다. 2018년 브라질의 한 자동차 회사는 국민 대다수가 택시 뒷좌석 안전벨트를 착용하지 않는 현실을 개선하기 위해 안전벨트를 착용할 시 와이파이를 제공하는 실험을 하였다. 결과는 놀랍게도 피실험자 4500명 승객 전원이 뒷좌석에서 안전벨트를 착용했다.
이처럼 대놓고 지시하지 않더라도 상대방이 나의 의도대로 행동하게 하는 것을 ‘넛지’라 하는데, 넛지의 사전적 의미는 ‘옆구리를 슬쩍 찌르다’이다.
인간의 행동을 유도하는 동기에는 내재적 동기와 외재적 동기가 있다. 내재적 동기는 행위자가 내면의 만족을 위해 행동하는 것이며 외재적 동기는 보상을 원하거나 벌을 피하기 위해 행동하는 것이다. 뇌과학 관점에서 동기는 신경전달물질인 도파민·세로토닌 분비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특히 도파민은 동기나 충동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중뇌에서 분비되는 도파민의 양이 많아지면 뇌 신경망은 인간을 즉각적인 행동을 하기 쉬운 상태로 만든다. 간뇌의 시상하부 중추와 중뇌에서 분비되는 세로토닌은 도파민 과다 분비 시 나타나는 내적 스트레스를 완화시키고 충동을 조절한다.
하지만 이처럼 복잡한 호르몬 메커니즘을 모르더라도 우리는 인간의 행동이 ‘옆구리를 슬쩍 찌르기(넛지)’를 통해 유도될 수 있음을 경험적으로 알고 있다. 또 그 결과로 선택된 행동과 그로 인한 결과는 미국 시인 로버트 프로스트가 「가지 않은 길」에서 ‘나는 사람이 적게 간 길을 택하였다, 그리고 그것 때문에 모든 것이 달라졌다’고 노래했던 것처럼 한 인간의 모든 것을 바꿀 수 있다.
옆구리를 내어준 이가 옆구리를 찌른 이의 행동을 변화시키는 주객전도(主客顚倒)의 넛지도 있다. 십자가에 매달린 그리스도의 옆구리를 창으로 찌른 로마군 백인대장 론지누스의 경우다. 그가 그리스도의 옆구리를 창으로 찔렀을 때 ‘피와 물이 흘러나왔다’.(요한 19,34) 그 후 그가 병이 들었을 때 창에 묻은 주님의 피를 자기 눈에 갖다 대자 병이 나았고 로마군에서 나와 사도들의 제자가 되었다. 그는 카파도키아에서 수도생활을 하다가 박해를 받았고 참수당한 후에 성인으로 추대된다.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옆구리를 창으로 찌른 론지누스에게 성인으로서 길을 걷도록 하신 것이다.
또 부활을 의심하는 토마스에게는 자신의 옆구리를 보여주시며 부활을 믿도록 하셨다. 한 개인의 행위가 누군가에 의해 또는 어떤 것에 의해 동기부여가 되었든 간에 인생은 자신의 행동에 대한 선택의 연속이다. 또 그 선택은 실존주의 철학에서 강조하는 것처럼 책임을 요구한다.
오늘도 그리스도께서는 우리 앞에 당신의 상처 입은 옆구리를 보여주고 계신다. 그 상처를 바라보며 나는 어떤 행동을 선택하고 오늘을 살아야 하는가? 또 그 행동에 어떻게 책임을 질 것인가? 부활 시기는 상처 입은 옆구리를 보여주시는 그분께 답변해야 할 시간이다.
[과학과 신앙] (27) 삼손 옵션
1928년 국제천문연맹(IAU)은 나라별로 다르게 사용하고 있는 별자리를 라틴어 이름으로 통일하고 88개로 확정했다. 여기에는 탄생 별자리라고 부르는 황도 12궁이 포함되어 있다. B.C. 4000년 무렵 시작된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바빌로니아인들은 지구를 중심으로 한 천구(天球) 상의 태양 궤도인 황도(黃道) 개념을 최초로 도입했으며 황도 주변 12개의 별자리를 황도 12궁으로 하여 1년을 이루는 12개월과 일치시켰다. 탄생 별자리는 태어난 날에 태양이 그 별자리를 지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에 생일에는 그 별자리를 볼 수 없으며 그 별자리가 태양의 위치와 정반대인 곳에 위치하는 6개월 전후에나 볼 수 있다. 4월 중순 밤 9시쯤에는 황도 12궁 중 봄철 별자리인 처녀자리(Virgo)가 동쪽 지평선에서 올라오며, 남쪽에는 사자자리(Leo)가 높이 떠 있고 서쪽에는 지평선을 향해 내려가는 겨울철 별자리인 게자리(Cancer)가 있다. 게자리 중심부에는 갈릴레이가 1609년에 망원경으로 최초로 관찰한 벌집 성단이 있다. 벌떼가 모인 벌집 모양을 닮은 이 성단은 최소 1000개 정도의 별들이 모인 산개성단으로 지구로부터 577광년 떨어져 있다.
밤하늘의 사자자리와 벌집 성단을 보고 있으면 구약 성경에 등장하는 괴력의 인물 삼손이 떠오른다. 삼손은 포도밭에서 만난 힘센 사자를 맨손으로 죽인 후 얼마 뒤 그 사자 사체에서 벌떼와 꿀을 발견하고는 그 꿀을 부모에게 갖다 준다.(판관 14,5-9) 삼손은 후에 필리스티아인들의 사주를 받은 들릴라에게 자기 힘의 원천이 머리카락에 있음을 털어놓았다가 필리스타인들에게 붙잡힌다. 그들은 삼손의 눈을 멀게 한 후 청동 사슬로 묶어 감옥에서 연자방아를 돌리게 하지만(판관 16,17-21) 삼손은 수많은 필리스타인들이 모인 자리에서 신전의 기둥을 무너뜨리고 결국 그들과 함께 죽는다.(판관 16,29-30)
이 이야기는 많은 예술가들에게 영감을 주어 렘브란트와 루벤스에 의해 그림으로, 영국 시인 존 밀턴에 의해 비극적 장편 희곡으로 극화되었다. 프랑스 작곡가 카미유 생상스는 1877년 ‘삼손과 들릴라’라는 오페라를 작곡했는데 특히 2막 들릴라의 아리아 ‘그대 음성에 내 마음 열리고’는 세계적인 성악가들이 애창할 정도로 아름다운 선율의 곡이다. 여행용 가방 브랜드인 쌤소나이트(Samsonite)도 삼손 이름에서 영감을 얻은 경우다.
1991년 미국 언론인 시모어 허쉬는 「삼손 옵션(The Samson Option)」이란 책에서 이스라엘이 아랍 국가들과의 전쟁에서 패할 경우 자체 핵무기를 동원해 아랍 국가들과 공멸한다는 전략을 소개했는데, 이는 삼손이 성전의 기둥을 부수고 지붕을 무너뜨려 자신과 수천 명의 필리스티아인들을 죽인 것과 같은 맥락이다.
삼손 이야기의 교훈은 무엇일까? 삼손은 어떤 부정한 것도 먹지 말라는 하느님과의 약속을 어기고 사자 사체에서 나온 꿀을 먹었으며 자신의 힘의 근원이 하느님으로부터가 아니라 자신에게서 나온 것인 양 교만했다. 약속을 어기지 않고 교만해지지 않는 것, 단순하지만 이것이 삼손 이야기의 교훈이다. 특히 오늘날 우리 사회의 권력자들은 힘의 근원이 자신에게서 나오는 줄 아는 교만함에서 깨어나 공멸(共滅)의 삼손 옵션을 택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과학과 신앙] (28) 어른의 머리, 어린이의 눈, 어린이의 마음
5월 5일은 24절기 중 여름의 시작을 의미하는 입하(立夏)이며 어린이날이다. 어린이의 어원은 ‘어리다’이며 훈민정음에 ‘어린 백성이 니르고져’라 표현했듯이 중세 국어에서는 ‘아직 깨우치지 못하다’란 뜻이었다. 그 후 ‘어린 사람’의 의미로 바뀌고 아동 문학가인 소파 방정환 선생이 어린 사람을 높여 ‘어린이’란 단어를 새롭게 만들었고 1923년에는 최초의 어린이날이 생겨났다. 방정환 선생은 “어린이는 어른보다 한 시대 더 새로운 사람입니다. 어린이의 뜻을 가볍게 보지 마십시오”라며 어린이를 존중했다.
그리스도께서도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회개하여 어린이처럼 되지 않으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이처럼 자신을 낮추는 이가 하늘나라에서 가장 큰 사람이다.”(마태 18,3-4)라고 말씀하셨다.
어린이와 어른은 무엇이 다를까? 우선 생물학적으로 몸의 크기가 다르다. 이것은 몸을 이루는 세포의 수, 뼈의 개수 및 크기가 다르기 때문이다. 2023년 독일 막스플랑크 과학수학연구소가 중심이 된 독일·미국·영국·캐나다·스페인 국제 공동 연구진은 성인 남녀와 어린이의 세포 크기·수·질량을 비교 분석한 결과를 국제학술지인 「미국 국립과학원회보」(PNAS)에 발표했다.
이에 따르면 몸무게 70㎏ 기준 성인 남자의 평균 세포 수는 36조 개, 몸무게 60㎏인 성인 여자는 28조 개, 몸무게 32㎏인 10살 어린이는 17조 개였다. 뼈의 개수도 달라 해부학적으로 20대 성인 은 평균 206개이지만 갓 태어난 신생아는 305개 정도이며 성장하면서 100여 개의 뼈가 합쳐져 단단해지며 그 수가 줄어든다.
우리말에 ‘잔뼈가 굵어지다’란 표현과 딱 들어맞는다. 이 표현은 여러 사전적 의미가 있지만 ‘어린아이가 자라서 어른이 됨’을 의미하기도 한다. 잔뼈가 굵어진 만큼 어른의 경험과 지식, 그리고 지혜는 어린이보다 많다.
따라서 어른은 아이들에게 올바르고 건전한 지식을 교육할 의무가 있다. “마땅히 걸어야 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쳐라. 그러면 늙어서도 그 길에서 벗어나지 않는다”(잠언 22,6)라는 말씀처럼 어른은 어린이들의 지식이 경험을 통해 상식이 되고 올바른 인생을 살아가는 삶의 지혜가 되도록 이끌어야 한다. 또 사회적 책무를 다하며 어린이들에게 모범을 보여야 한다.
영국의 낭만파 시인 윌리엄 워즈워스가 그의 시 ‘무지개’에서 “어린이는 어른의 아버지”라고 했던 것처럼 어른이 어린이에게 배울 점도 있다. 세상을 대하는 아이들의 순수한 태도, 거짓 없이 타인과 소통하는 맑은 마음은 세속의 때가 묻은 어른이 배워야 할 점이다.
어른으로서 지금 나에게 필요한 것은 옳고 그름을 구별하는 지혜로운 어른의 머리, 계산하지 않고 순수하게 세상을 바라보는 어린이의 눈, 그리고 꾸밈없이 타인을 대하는 어린이의 마음이다. “형제 여러분, 생각하는 데에는 어린아이가 되지 마십시오. 악에는 아이가 되고 생각하는 데에는 어른이 되십시오.”(1코린 14,20)
[과학과 신앙] (29) 흰 연기, 검은 연기
그리스 신화 속 프로메테우스는 제우스로부터 불을 훔쳐 인간에게 전해주었다. 불을 이용하게 된 인간은 문명을 발달시켰으며 사상과 예술을 발전시켰다. 인간이 실제 프로메테우스에게 불을 전해 받은 것은 아니지만, 불의 사용은 인간을 이전과는 확실히 다른 존재로 끌어올렸다.
그렇다면 인간이 최초로 불을 사용하게 된 것은 언제부터일까? 학자들은 약 140만 년 전 호모 에렉투스가 살던 구석기 시대에 번개나 화산에 의해 자연 발화된 불을 인간이 최초로 사용했을 것으로 추정한다. 불은 자연에 지배받던 원시 시대의 인류가 자연을 극복하고 다른 동물들과의 경쟁에서 우위를 차지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불의 사용은 밤의 어둠을 몰아내 인간의 활동 시간을 늘리고, 사냥감을 익혀 소화에 필요한 신체 에너지 소비를 줄여주는 등 삶의 방식뿐 아니라 문명의 진보에 큰 역할을 했다.
유발 하라리는 「사피엔스」에서 “인간은 불을 길들임으로써 무한한 잠재력을 통제할 수 있게 되었다”고 했다. 18세기 증기기관에 의한 산업혁명은 인간이 불을 길들임으로써 이룩한 대표적 사건으로 증기기관에는 석탄의 연소 반응이 이용되었다. 연소란 물질이 산소와 빠르게 결합하며 빛과 열을 내는 화학반응이다. 인간이 빛과 열을 얻기 위해 사용한 전통적 연료는 나무나 짚으로 탄소·수소·산소로 구성된 유기물이며 석탄은 탄소로만 이루어져 있다.
현대적 연료인 석유나 천연가스(LNG), 액화 석유가스(LPG)는 탄소와 수소로 이루어져 있다. 연소 과정에서 충분한 양의 산소가 공급되면 완전 연소가 일어나 연료 속 원소들은 이산화탄소와 물(수증기)을 생성해 거의 투명하거나 흰색인 연기가 발생한다. 하지만 산소의 양이 충분하지 않거나 연소 시 온도가 낮은 경우에는 불완전 연소가 일어나 일산화탄소가 발생하고 연료 속 탄소가 미세한 입자 상태로 공기 중으로 나와 그을음과 검은색 연기가 발생한다.
연기는 멀리서도 눈에 잘 보이기에 유·무선 통신이 발달하기 이전 시대에는 메시지를 전달하는 데 사용되었다. 적의 침입 같은 국가적 큰 사변이 있을 때 연기나 불빛으로 멀리 있는 곳까지 신호를 전달했는데 이를 봉화(烽火)라 한다. 사마천의 사기(史記)에 의하면 봉화의 사용은 기원전 중국 주나라 시절로 거슬러 올라가며 우리의 경우에는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기록되어 있다.
옛사람들이 봉화대에서 피어오르는 연기에 주목한 것처럼 콘클라베 직후 바티칸 시스티나 경당 굴뚝에서 나오는 연기의 색에 전 세계 사람들이 주목한다. 연기 발생법은 비공개이지만 과거 교황 선출 시 흰색 연기는 난로 속에서 투표용지를 완전 연소시켜 만들고, 미선출 시 검은색 연기는 축축한 짚을 함께 태워 불완전 연소시켜 만든 것으로 알려져 있다. 2005년 베네딕토 16세 교황 선출 때부터는 화학약품을 사용해 연기 색을 더 명확히 하고 있다.
콘클라베 직후 흰 연기를 내듯 우리는 일상에서 마음속 양심의 난로를 지피고 자신의 위선·불경·태만 그리고 타인에 대한 불신과 미움을 모두 완전히 연소시켜 흰 연기를 내야 한다. 그릇된 생각과 행동들이 내 속에서 불완전 연소하여 검은색 연기가 나오지 않도록 하느님께 청해야 할 것이다.
[과학과 신앙] (30) 시티 라이트
오래전 예술영화 전용 극장에서 찰리 채플린 주연의 ‘시티 라이트(city lights, 1931)’라는 영화를 본 적이 있다. 가난한 떠돌이 주인공이 거리에서 꽃을 파는 눈먼 소녀를 우연히 만난 후 그녀의 눈을 뜨게 하기 위해 병원비를 마련할 목적으로 고군분투하는 내용의 흑백 무성영화였다.
눈먼 소녀는 그의 도움으로 세상을 보게 되었고 가난하지만 따뜻한 마음을 갖고 있는 주인공을 결국에는 알아본다는 내용으로 영화는 마무리된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그를 알아본 소녀를 향한 찰리 채플린의 수줍은 미소는 영화사에 길이 남을 명장면이다.
영화 제목 ‘시티 라이트’는 밤의 어둠을 밝히는 도시 가로등을 의미하지만, 세상의 어둠을 밝히는 따뜻한 빛은 결국 가난한 떠돌이 주인공이었음을 영화를 보는 관객들은 깨닫게 된다. 도시의 가로등은 어둠을 밝혀 사람들에게 가야 할 길을 보여주고 혹시 있을 주변의 위험으로부터 안전하게 해준다.
역사적으로 최초의 가로등은 로마 시대에 공공장소와 주요 도로에 설치되었던 횃불이다. 18세기에 이르러 런던·파리·암스테르담 등 유럽의 주요 도시에는 고래기름을 사용한 가로등이 도시의 밤을 밝혔으며, 1807년에는 런던의 팔 몰(Pall Mall) 거리에 세계 최초의 가스등이 설치되어 19세기 초까지 밤거리를 밝혔다.
에디슨의 백열전구 발명 이후 1878년 파리 샹젤리제 거리에는 세계 최초의 전기 가로등이 설치되었다. 전기를 이용한 가로등은 현재에도 사용되고 있으며 과학기술의 발전과 함께 지금은 백열전구 대신 LED가 가로등에 사용되고 있다. 몇 년 전만 해도 가로등 불빛은 노란색이 많이 사용되었다. 노란색 빛은 나트륨 가스를 방전시켜 빛을 내는 나트륨등에서 발생한다. 빨간색 다음으로 파장이 길어 멀리까지 빛이 전달되므로 안개나 스모그·먼지가 많은 기상 상황에서도 눈에 잘 띄는 장점이 있다. 자동차의 안개등이나 방향 지시등이 노란색인 것도 그 때문이다.
물체의 색을 잘 식별하게 해주는 백색등과 달리 노란색 가로등 빛의 단점은 물체의 색 구별이 어렵다는 것이다. 하지만 야간 운전 시 반대편에서 오는 차의 색깔보다는 안전을 위해 차의 크기와 모양만 확인하면 되므로 문제가 되지는 않는다.
요즘은 전력 소모가 적은 백색 LED 등으로 교체되고 있다. 2025년 5월 8일 콘클라베에서 선출된 새 교황 레오 14세는 9일 첫 미사에서 강론을 통해 “교회가 이 세상의 어두운 밤을 밝힐 수 있길 바란다”라는 메시지를 전했다.
아직 세상에는 가난과 굶주림, 빈부격차, 인권 문제, 전쟁, 각종 범죄 등 어둠이 많이 존재한다. 새 교황의 메시지처럼 가톨릭교회가 그러한 어둠을 몰아내고 세상을 밝히는 빛이 되기를, 세상의 시티 라이트가 되기를 소망한다. 또 가톨릭 신자 한 명 한 명이 세상의 어둠을 밝히는 빛이 되도록, 교회가 밝힌 빛이 꺼지지 않게 하는 광원(光源)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마태 5,1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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