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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평양교회의 부흥이 가능할까요? / 이광희 목사
오늘날 현대교회, 특히 외형적으로 놀랍게 성장한 한국교회는 ‘어느새 서구 유럽의 교회들처럼 쇠퇴기에 접어든 것이 아닌가’ 하고 자체 진단을 하며 다시 과거 100년 전의 평양의 부흥을 재현하자고 하며 재 부흥의 열의를 보이고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교회의 부흥이 과연 무슨 운동을 통해서 가능한 것인지와, 과거 평양에서의 교회의 부흥은 특히 교회지도자들이 자신의 죄를 회개함은 물론이고, 지도자들이 교회의 감투나 세상적 권세나 물질 등을 포기하면서 오로지 주님 한 분만을 제일로 삼고 나간 모본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인데 지금의 부흥운동을 하는 분들의 면면을 보면 대부분 여전히 교회에서 권세를 부리고, 속에는 여전히 영웅성과 허풍성이 가득한 채 세상적 누림을 즐기고, 교회나 물질을 ‘더 크게, 더 크게’ 주의로 해 나가고 있으면서 과거의 평양의 대 부흥을 재현하자고 외친다면 그게 과연 가능할 것인가 하는 점입니다.
아닌 말로 교인들은 월세방에서 목숨까지 걸면서 번 돈으로 교회에 헌금을 하면(하나님께 헌금을 하면) 목사님은 그 돈으로 최고급 주택을 사서 살고, 최고급 자가용을 타고 다니면서 과거 평양의 부흥을 이루자고 한다면 과연 과거의 평양의 부흥 때의 신앙정신과, 지금의 평양의 부흥을 재현하자고 외치는 분의 신앙정신이 같은 것이겠습니까? 정신 사상이 세상의 요소로 가득한 채 말로만 회개를 외치며 교회의 부흥을 주장한다면 성령님께서 그런 외침에 역사를 해 주시겠으며, 교인들도 그런 분들의 말에 수긍을 하겠습니까?
과거 이스라엘의 아사랴가 왕이 되어 부친 아마샤의 가르침대로 하나님 앞에 바로 행했으나 산당을 제하지 않아 백성들로 하여금 우상을 섬기게 한고로 여호와 하나님으로부터 징계를 받아 문둥병자가 되어 왕권도 행사하지 못하고 아들에 의해 갇혀 지내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오늘날에도 교회와 교인들, 특별히 교회 지도자들이 하나님 앞에 자칭 사명자도 많고, 세상적 부요를 포기한 채 오로지 하나님 한 분만을 위해 몸 바쳐 충성을 하는 분들이 많지만 그런 분들 중에 큰 과오가 있습니다
그게 무엇이냐 하면
☛그 첫째로 ‘어떻게 하면 큰 교회를 짓고 가느냐, 어떻게 하면 교인수를 늘려볼까’ 하는 그 면에 모두 함몰이 되어 그 일을 하는 것이 교회의 일이요, 그 일을 잘 하는 것이 신앙의 표준이요 척도가 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이런 마음은 교역자나, 일반성도들이나, 소위 사명자요 사역자라고 하는 사람들이나 모두가 공감대로 형성이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이것이 바로 ‘산당’ 이라고 말씀을 하는 것입니다.
산당은 숲 속에 있는데 사람들이 그 곳에서 가서 아무도 모르게(정신과 사상을 의미함) 자기가 소원하는 기도를 하는 곳입니다. 먹고 살기도 바쁜데 모든 일을 제쳐두고 깊은 산속에 들어가서 기도를 하니 그 얼마나 신앙에 열심이 있는 것입니까? 그렇지만 그 산당에서 기도하는 내용이나 정신을 보면 모두가 세상이요, 육신의 것이요, 물질이니 그게 어찌 옳은 신앙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까? 진실로 하나님의 뜻을 찾고, 그 뜻을 따라 살겠다는 마음이라면 성전으로 나와야지 왜 남이 못 보는 산당에 들어가서 기도를 하겠습니까? 즉 산당이란 세상적 소원 목적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교인이 몇 명 안 되는데 헌금이 많이 쏟아져 나오는 것은 신기하기도 하지만 놀라운 일입니다. 그러니까 이것도 일종의 이적입니다. 안수해서 병 낫고 하는 그것만이 이적이 아니라 깜짝 놀랄만한 일이 일어나는 것은 다 이적이라고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도들은 ‘하나님의 영원적이고 영적이고 천국적이고 신령적인 정신과 사상을 가진 사람으로 만들어지느냐’가 신앙의 핵심이어야 하는 건데 이것에는 관심도 없고, 모른 채 과거 예수님 당시에 유대주의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오늘날의 현대교회가 그저 가견적이고 가식적이고 종교적인 것이 나타나고 이루어지는 것만을 최고로 보고, 그것을 신앙이요 축복으로 알고 나가고 있으니 이는 마치 과거 아사랴 왕이 외형적으로는 하나님을 잘 섬기고 있었지만 그 속에는 산당의 정신과 사상을 가지고 있었기에 하나님으로부터 저주를 받았던 신앙과 다름이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둘째로, 현대교회의 또 하나의 흐름은 하나님을 찾지 않는 사람을 하나님과 연결을 시켜 놓는 일을 하는 것을 교회의 최대의 사명으로 알고 그 일을 한다는 점입니다.
이게 무슨 말인가 하니 ‘전 군인의 신자화 운동’ 이나 ‘전 민족의 신자화 운동’ 이나 ‘전 수원시민의 신자화 운동’ 등등을 부르짖으면서 이를 위해 여러 수단을 써서 하나님을 믿게 하는데, 어떻게 믿게 하느냐 하면 그 방편을 성경에서 발췌해 내고, 그 다음에는 신자들의 경험에서 발췌를 해 내는 것입니다. 신자들의 경험에는 간증이 많이 있지요.
성경에서 발췌를 한다는 것은 성경 액면적인 면에서 문자적으로 있는 것, 그러니까 성경에 보면 죽은 자가 살아나는 거라든지, 육신의 병을 고침 받는 거라든지, 가난한 자가 부자가 된 거라든지, 또는 하나님을 믿는 자가 큰 영웅이 된 거라든지, 종이 국무총리가 된다든지, 아니면 홍해바다가 갈라지는 거나, 사막의 반석에서 물이 나오는 거나, 고아가 왕비가 되는 것 등 누가 보아도 영광스럽고, 누구나 ‘와’ 할 수 있는 사건들이 많이 있는데 그런 걸 총 동원해서 예수를 믿으면 그렇게 된다고 하면서 교회에 나오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 식으로 예수를 믿게 한다는 말입니다.
그렇게 되니 예수를 믿는다면 믿는 모든 사람의 소원과 목적이 주님께서 인간에게 향한 단일의 그 소원 목적으로 되어야 할 텐데 그렇지를 못하고, 앞에서 말한 그런 소리를 듣고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기는 믿는데 예수 믿는 목적이 사람마다 각자 다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누구는 부자가 되기 위해서 예수를 믿고, 누구는 병을 낫기 위해서 예수를 믿고, 누구는 세상에서 뭐가 되기 위해서 예수를 믿는 등등으로 한 분의 예수를 믿는데 각 사람의 소원 목적이 다 다르다는 말입니다.
무슨 말을 하건 성경구절을 들어서 사람들을 예수만 믿게 하면, 즉 무슨 수를 쓰던지 사람들을 교회 안으로 끌어 모으기만 하면 그게 다 성경적이고, 하나님의 뜻에 맞는 것입니까? 그렇다면 이단자들은 성경구절을 말을 하지 않습니까? 그들은 우리들보다 성경구절을 더 잘 댑니다.
또 다른 면을 본다면 ‘만 교회 운동이니, 전 군인의 신자화니, 전 수원시민의 신자화니’ 등을 하는 그게 뭐가 나쁩니까? 세상이 천국처럼 되는 그게 뭐가 나쁘냐 그 말이요? 안 그렇습니까? 인간이 세상을 천국처럼 만들어 놓는다면 나중에 예수님이 오셨을 때 보니 세상이 천국처럼 됐거든요. 그러니 오신 그 예수님이 이제는 세상을 조금만 고치면 신령천국이 되지 않겠느냐는 식으로 하는 게 뭐가 나쁘냐는 말입니다. 과연 우리가 소망하는 신앙의 결국이 그런 것입니까?
그런데 문제는 그런 운동을 하는 것을 온 교회가 무시하기는커녕 모든 교회들이 그런 일을 하지 못해서 안달이라는 것입니다. 그런 운동을 하는 사람을 온 교회가 알아주니 그 일을 하는 사람은 자신은 성경대로 정당하게 한 것으로 알고, 하나님 앞에 굉장히 떳떳하고, 영웅성에 구름을 타고 다니는 기분이 되는 것입니다. 자기는 성경구절을 들고 성경적으로 진실하게 했고, 실지로 자기가 한 일의 효력과 효과를 많이 보았으니 하나도 부끄러움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일을 하는 사람들의 마음에서 지옥에 갈 자를 자기가 예수를 믿게 해서 천국에 가도록 했다고 생각을 한다면 그 일을 한 자기는 메시아가 되고 구원자가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자연히 그 자는 하나님 앞에 자칭 큰 공로자가 되는 것입니다.
지옥에 갈 자를 지옥이 아닌 천국에 가게 했고, 또 예수를 믿게 해서 그 자를 부자가 되게 했다고 한다면 이래저래 양면적 혜택이 됩니다. 즉 이 세상에서도 많은 혜택을 받고, 천국에 가서도 많은 혜택을 받고 하니 이게 얼마나 좋습니까?
이런 식의 신앙운동을 하는 사람은 신학적으로나 교리적으로 자신이 아무리 하나님의 절대예정을 믿는다고 해도 실은 그걸 믿지 않는 것입니다. 지옥에 갈 자는 지옥에 가고, 천국에 갈 자는 천국에 가는 것은 하나님의 절대 예정에 달린 것이 분명하다면 현재 예수님을 믿지 않아도 그 자가 천국에 갈 자로 하나님으로부터 예정이 됐다면 그 사람은 누구의 전도를 통해서나, 어떤 방편을 통해서건 예수를 믿고 천국에 가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예정에 속한 자라면 한 사람도 잃지 않고 천국에 다 가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절대 예정을 믿는 사람은 ‘저 사람이 지금은 예수님을 믿지 않지만 천국에 갈 사람이라면 하나님께서 나를 저 사람에게 심부름을 보내서 복음을 전하게 해서 천국에 가게 하시겠지’라는 마음으로 전도를 하는데, 그렇지를 않고 ‘내가 저 사람을 천국에 가게 해야지’ 하는 마음으로 전도를 한다면 이런 사람은 실질적으로 하나님의 절대 예정을 믿지 않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교인들 중에도 개인적으로 그런 교인도 있지만 교파 중에도 그런 교파가 있습니다.
전도라는 것은 하나님의 그 예정 면에 자신은 심부름을 하는 것뿐인데 그런 마음자세가 아닌 채(하나님의 예정을 믿지 않고) ‘내가 저 사람에게 예수를 전하지 않으면 저 사람은 필연적으로 지옥에 가게 되니 내가 구원해 내야지’ 라는 마음으로 전도를 한다면 그 사람은 하나님의 절대 예정을 믿지 않는 셈이며, 자신이 하나님 자리에 앉아있는 셈이 되는 것입니다. ‘전 군인의 신자화니, 전 민족의 신자화니, 전 수원시민의 신자화니’ 하는 운동을 하는 사람들의 정신 사상이 지금 말한 여기에 속한다고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성경 어디에 어느 지역의 전체를 다 믿게 한다고 말을 합니까? 성경에 그런 말이 없는데 인간 자기가 전체를 다 믿게 하겠다고 외친다면 그 자는 하나님의 예정을 둘러엎고 자기 뜻대로 모두를 구원하겠다는 말이 아닙니까?
☛그 다음에 세 번째로 현대교회에 어떤 사람들이 있는가 하니 이미 교회에 나와서 하나님을 찾은 사람들로 하여금 종교운동, 종교활동을 더 열심히 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운동은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에게 10대 외식을 지적을 하면서 화를 선언하셨던 그 외식 죄에 해당되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기준에서 자기를 들여다보고, 자기를 그렇게 고쳐가야 하겠는데 그 면은 전혀 없고 성경 구구절절이 전부를 사역에 갖다 붙이는 거지요. 종교업적, 종교사역, 종교활동에 성경구절을 붙여서 하는 겁니다. 소위 사명자요, 사역자라고 하는 사람들이 무엇입니까? 오늘날 이런 외식운동이 상당히 많습니다. 오늘날 현대교회가 이렇게 흐르고 있다는 말입니다.
오늘날 현대교회가 하나님께 향한 열심도 많고, 충성심도 많은데 이렇게 이질적으로 흐르게 된 것은 아사랴 왕, 즉 웃시야 왕의 실수를 재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아사랴의 최대 실수는 타와 비교를 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북조 이스라엘은 이방인들과 비교를 했고, 또 남조유다는 북조 이스라엘과 비교를 했으니 남조 유다사람들은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들이나 북조 이스라엘보다 자신들이 더 낫다고 생각을 하는 겁니다. 즉 지금으로 말을 한다면 ‘저 교회보다 우리 교회가 조금 더 낫다’ 하며 조금 더 나은 것을 찾은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기준점을 찾지는 않고 비교를 해서 더 나은 쪽으로 나간 것입니다. 이게 웃시야 왕의 실수요, 그 실수를 수없이 읽고 들은 현대교회의 실수입니다.
우리가 기준을 찾지 않고 타와 비교를 하게 되면 신앙이 행위 면으로 자꾸 나가게 되는 것입니다. 무화과나무로 말한다면 열매는 없고 자꾸 잎사귀만 커진다는 말입니다. 활동만 자꾸 커진다는 말입니다. 결국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가 저주를 받았듯이 그런 신앙은 저주를 받게 됩니다. 열매가 열려야 할 나무라면 잎사귀가 문제가 아니고 열매의 맛과 질을 좌우하는 원 둥치, 즉 기준이 중요한 것입니다.
웃시야 왕이나 현대교회의 실수는 이 기준점, 즉 알맹이를 버렸다는 것입니다. 척도, 기준점만 바로 찾고 그 길로 매진하면 되는 건데 웃시야 왕은 그러지를 못한 채 종교활동은 활발했으나 하나님의 척도에서 어그러졌고, 저주와 심판을 받았던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신앙은 ‘이 교회보다 저 교회가 조금 낫고, 저 교회보다 우리 교회가 조금 낫고’ 하는 식의 비교급으로 가지 말고 항상 하나님의 본질을 찾아야 됩니다.
그 다음에 교회의 척도를 알아야 되겠습니다.
두 가지가 있는데 두 가지는 결국 하나입니다. 두 가지 중에 그 하나는 광야교회이고, 또 하나는 가나안교회입니다. 이게 무슨 말인가 하니 광야교회는 광야에서 애굽을 탈색하고 애굽사상을 뽑아내면서 시내산에서 받은 하나님의 말씀성을 자꾸 집어넣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정신과 사상으로 염색을 해 들어가는 것입니다. 이게 광야교회에서 하는 일이고, 그 다음에 가나안교회는 요단강을 놓고 동편에서 서편으로 들어가는 거란 말입니다. 즉 동편 이편(애굽 쪽)에 있는 동안에 서편(가나안 쪽)의 것으로 전환을 시키는 것입니다. 서편의 가나안을 계시적으로 보면 천국을 말하는 것이니 동편인 애굽에 있는 동안에 천국의 사상으로 바꾸어 나간다 그 말이요. 요단강을 죽음의 선이라고 한다면 죽음 이편에서 죽음 저편의 것으로 바꾼다는 말입니다. 이게 교회(성도)가 재세기간 중에 할 일입니다.
제사장들이 법궤를 메고 요단강에 들어서니 물이 갈라졌는데 이는 성도가 법궤(말씀성)를 메고 나가면 사망이 중단이 된다는, 죽음이 중단이 된다는 것을 말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으니, 산 그것을 가지고 건너는 거기에는 죽음의 강이 침범치 못하고, 죽음이라고 하는 것이 침범치 못한다는 말입니다. 이걸 다른 말로 하면 요단강 이편(동편-애굽)에 있는 동안에 살아있는 것, 생명적인 것으로 바꾼 것은 하나도 없어지지 않고 그대로 요단강 저편(서편-가나안)으로, 즉 하늘나라로 직결이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참 교회는 이적이 있든지 없든지 그건 상관할 것 없고(이적은 자기가 일으키는 게 아니고 하나님 당신이 알아서 하는 거니까), 나의 정신과 사상과 소원과 목적을 진리와 영감으로 전환하는 운동을 하는 것입니다. 이 교훈으로 나가는 교회가 하나님의 본질적인 면으로 볼 때 옳은 교회입니다.
이렇게 나와 기독교인들 모두는 하나님께서 구원을 위해 주시는 세상의 모든 것을 이용을 하고 활용을 하며 대내전과 대외전의 양면의 싸움을 하며 정복해 들어가고, 하나님의 것으로 전환을 하며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앞에서 말한 현대교회의 잘못된 신앙사상과, 참 교회가 가는 진로와는 얼마나 큰 차이가 나는지를 쉽게 알 수가 있습니다. 질적으로 엄청난 차이가 나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잘못된 교회라고 하면 모두가 외식으로 나가는 것이며, 그러니 사람의 속을 주님의 것으로 전환하는 것이 아닌 종교적 사역이요 활동이요, 그 면의 강조요, 또 그 일을 잘 하면 하늘나라에서 상급이 크다고 하는 식으로 나가게 되는 것입니다.
교회가 이런 식으로 나가면 그런 일을 해서 아무리 사람들이 교회에 많이 모이고, 이적기사가 나타나고, 세상에서 성공 출세를 해도 사람이 하나님의 사람으로는 만들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일은 성공리에 잘 이룰는지는 모르지만 사람이 하나도 안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이런 일은 우리가 예수를 믿어온 경험을 봐서라도 얼마든지 알 수 있고, 또 그렇게 예수 믿어나가는 교인들을 보면 사람이 하나도 안 만들어지고, 성경을 깨달은 거는 하나도 없이 여전히 영웅성 허풍성 세상성 물질성이 속에 가득한 채 열심을 내는 것을 흔히 볼 수가 있습니다.
한국교회는 과거 평양의 부흥을 그리워하고, 그것을 재현하려고 하기보다는 현재 교회들의 신앙의 정신과 사상이 질적인 면에서 과연 하나님의 본질과 본성에 정확히 맞는 것인지를 먼저 살펴보는 것이 우선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없이 하는 그 모든 종교운동과 활동으로는 과거 평양에서의 신앙회복은 턱도 없는 소리일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