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에서 로마로 왔다. 로마에서는 무엇을 볼 것인가? 먼저 팔라티노 언덕에 오르면 천년 로마의 흥망성쇠를 볼 수 있다. 포로 로마노에 있는 신전, 개선문, 원로원, 공회당, 그리고 유대인 노예들의 한이 서린 콜로세움이 보인다. 바티칸으로 가면 하늘을 찌르는 베드로 성당의 돔, 세상을 향해 팔을 벌리고 있는 베드로 광장, 베르니니가 설계한 정교한 설교단을 볼 수 있다. 그리고 바티칸 미술관으로 가면 미켈란젤로의 천지창조와 최후의 심판이 우리를 압도한다.
로마는 그 자체로 거대한 역사박물관이다. 그러나 또 하나의 로마가 있다. 카타콤이다. 지하 12m로 내려가면 우리 앞에 거대한 지하도시가 반지의 제왕처럼 펼쳐진다. 그 지하도시는 화려한 지상도시와 다른 또 하나의 로마다.
로마 안에 있는 이 두 도시를 우리는 어떻게 보아야 할까? 로마에 올 때마다 필자는 그 기막힌 대조에 혼란스러웠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이 도시들이 모두 기독교의 자녀들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마음이 편해지기 시작했다. 또한 이 도시들은 과거 기독교 역사 속에서 생겨난 도시일 뿐 아니라 현재 기독교 안에도 존재하는 또 하나의 도시들이라고 믿어졌다.
카타콤은 안내인 없이는 갈 수 없다. 혼자 들어갈 수도 없지만 거기서 길을 잃으면 억지로 순교할 수 있기 때문에 조심해야 한다. 카타콤은 기독교인이 처음 만든 것이 아니다. 그것은 사람이 죽을 때 돌로 된 지하 굴에 매장하던 고대의 관습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지중해 권의 어느 지역에서도 카타콤을 발견할 수 있고 이스라엘도 마찬가지다. 로마의 카타콤도 기독교인들의 무덤만 있는 것이 아니라 여러 시대의 무덤들이 복합적으로 모여 있다.
크게 세 시대다. 1세기에서 3세기 중반까지는 주로 이교도들의 무덤이다. 3세기 중반에서 4세기 중반 곧 핍박의 시기가 바로 기독교 시대의 무덤이다. 그리고 그 이후 현대에 이르는 무덤이 있다. 현재의 카타콤은 1892년 독일의 안톤 데 발이 발굴했다고 한다. 안내인과 함께 돌아본 카타콤은 단순한 무덤이 아니었다. 그것은 죽은 공간이라기보다는 산 공간이었다. 살아 있는 자는 죽은 자들과 함께 살았으며 죽은 자들은 또한 산 자들과 함께 살았다. 그곳에 오래 살면 누가 죽고 누가 살았는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안내인의 인도를 받아 먼저 성 세바스티안의 무덤에 갔다. 성 세바스티안은 디오클레티안(Diocletian) 황제 때 순교했기 때문에 3세기 순교자다. 그는 본래 귀족 출신으로 기원전 283년경에는 프레토리안 경비대에 근무한 로마군 장교였다. 그가 어느 날 우연히 예수님을 알게 되고 비밀리에 그를 믿게 되었다. 그러다가 그의 동료들이 발각돼 잔인하게 처형되는 것을 보고 용기를 내 자신의 믿음을 공개적으로 고백했다.
그리고 사형장 앞에 섰다. 사형장 앞에서 그는 두려워하지 않고 당당하게 자신의 믿음을 선포했다. 많은 사람들이 감명을 받아 마음으로 기독교를 받아들였다. 분개한 황제는 세바스티안을 결박해 숨이 끊어질 때까지 화살을 쏘도록 했다. 그러나 세바스티안은 수많은 화살을 맞고도 죽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살아남아 더 열심히 복음을 전하는 자가 되었다. 화가 치민 황제는 세바스티안을 몽둥이로 죽을 때까지 때리도록 했고 시신은 로마의 하수구에 버리도록 했다.
그가 죽자 몇몇 사람들이 하수구에서 그의 시신을 찾아 성 베드로와 성 바울이 핍박당한 장소 부근에 묻어 주었다. 오늘날의 아피아 길이었다. 그래서 성 세바스티안 교회는 오늘날 로마의 아피아 길에 우뚝 서 있다. 그 후에 그는 로마시대 순교의 표상이 되었다. 그가 귀족, 군인 출신이면서 예수를 믿었다는 점, 심문을 당하면서도 담대하게 복음을 전했다는 점, 화살을 맞아도 죽지 않았다는 점 등이 그를 그 시대의 대표적인 순교자로 추앙받게 했다.
카타콤에서 순교한 사람이 어찌 세바스티안 한 사람뿐이겠는가. 순교는 기독교 복음에 있어서 필연적인 존재론적 구성요소다. 외적 환경 때문에 순교가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믿음이 가진 본래적 속성 때문에 순교가 일어난다는 말이다. 유대-크리스천 신앙의 본질은 유일하신 하나님 신앙이다. 하나님이 유일하다면 다른 신이 있을 수 없다. 순교의 불가피성은 여기서 일어난다.
전형적인 순교가 일곱 아들을 둔 유대인 어머니의 순교다. 주전 167년 시리아의 안티우쿠스 3세가 예루살렘을 짓밟을 때 일곱 아들과 어머니가 있었다. 황제는 성전에 돼지고기를 올려놓고 유대인들에게 절하라고 명했다. 어머니 앞에서 여섯 아들이 차례로 순교했는데 일곱째가 몹시 두려워했다. 이때 어머니가 말했다. “아들아, 이 어미를 불쌍히 생각하라. 나는 너를 아홉 달 동안 뱃속에 품었고 너에게 삼년간 젖을 먹였다. 아들아, 이 어미의 마지막 부탁을 들어다오. 이 도살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네 형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죽음을 맞이하거라.” 결국 일곱 아들은 순교했고 어머니도 그 뒤를 따랐다(마카비하 6:18∼7:41).
유일신 하나님에 대한 신앙 고백은 주님을 향한 제자도의 신앙으로 이어졌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마 16:24) 제자도는 스승에 대한 철저한 자기 부정과 순종을 전제로 한다. 카타콤의 순교는 로마인들에게 기독교인이 무신론자, 인육을 먹는 자, 근친상간자로 오해를 받아 일어났다.
그러나 그것이 순교의 근본적 이유는 아니다. 순교의 근본적인 이유는 복음 자체에서 왔다. 순교는 주님을 따르는 제자도의 당연한 귀결이었다. 복음은 세상과 타협할 수 없고 주님은 다른 신과 같지 않았다. 초대교회 순교를 가장 가까운 시대에 증거한 사람이 있었다. 가이사랴 감독 유세비우스다. 그는 그의 책 ‘교회사’에서 4세기까지의 주요한 순교의 역사를 기록으로 남겼다.
사도 야고보의 순교, 주의 형제 야고보의 순교, 네로의 박해와 바울의 순교, 도미치안 치하의 순교, 예루살렘 감독 시므온의 순교, 서머나 감독 이그나티우스, 폴리캅의 순교, 저스틴의 순교. 이 모든 순교를 기록하면서 그는 이렇게 결론을 맺는다. “그들은 모두 그리스도의 모방자들이었다. 그들은 자신을 순교자라고 선언하지도 않았고 자신들이 순교자로 알려지기를 허락하지도 않았다. 그들은 이교도들에게는 큰 담대함과 인내와 용기를 보여준 반면, 믿음의 형제들에게는 하나님에 대한 경외의 마음으로 충만하여 자신들에게 순교의 칭호를 붙이는 것을 부인했다. 그들은 하나님의 손에 자신을 굴복시켰을 뿐이며 그것을 통해 주님만이 존귀히 되기를 원했다. 그들은 자신을 고소한 사람들 앞에서 변증했지만 누구도 고소하지 않았다. 그들은 그들에게 고통을 준 사람들을 위해 스데반처럼 기도했다.”
오늘날 한국교회는 자신에게 고통을 준 사람을 위해 기도하는가? 순교는 자기를 죽여 세상을 살린 제자도의 아름다운 열매이다. 한국교회여, 다투기를 그치고 카타콤으로 가자. 위에 보이는 영광의 도시에 연연하지 말고 도시 아래에 있는 또 하나의 도시로 가자. 거기서 다시 시작하자. 카타콤이 우리를 부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