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헌(休軒) 간호윤(簡鎬允)의 「참(站)」 179
이 시절, 사마천의 천도시비(天道是非)를 다시 소환하는 이유들
“남을 아프게도 가렵게도 못하고, 구절마다 너저분하고 데면데면하여 우유부단하다면 이런 글을 어디에 쓰겠는가(言不痛不癢 句節汗漫優柔不斷 將焉用哉)?” 연암 선생의 말이다. 글이란 아픈 곳을 찌르고 가려운 곳을 긁어야 한다는 글쓰기의 나침반이다. 책상 옆에 붙여 놓은 이 글귀를 보면 늘 등골이 서늘하다.
세상 참 요지경 속이다. 세칭 언론(言論)이란 걸 보노라면, 남의 것을 빼앗고도 떵떵거리는 자가 있는가 하면, 평생 남에게 해코지 한 번 하지 않고도 가난을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 거짓말을 밥 먹듯 하는 자는 권좌에 앉고 정직한 사람은 일자리 하나 지키기 어렵다. 착하게 살면 복을 받는다더니, 부도수표(不渡手票)임이 분명하다.
사마천(司馬遷)은 『사기』 「백이열전(伯夷列傳)」에서 백이와 숙제가 굶어 죽은 일을 적고 묻는다. “천도시야비야(天道是邪非邪, 하늘의 도는 옳은가, 그른가)!” 충신의 상징인 백이와 숙제는 수양산에서 굶어 죽었다. 반면 도척(盜跖)은 무고한 사람을 해치고 포악한 짓을 일삼고도 천수를 누렸다. 하늘이 선한 사람에게 복을 내린다더니, 이 무슨 심술궂은 셈법인가.
이천 년이 넘도록 달라진 것이 무엇인가. 백이와 숙제는 여전히 굶주리고 도척은 여전히 배불리 먹는다. 도척이 옷을 갈아입고 권력자와 재력가가 되었을 뿐이다. 이름은 바뀌어도 세상의 셈법은 그대로다.
왜 그런가. 세상이 선악을 가려 돈과 권력을 나누어주지 않기 때문이다. 아니, 때로는 양심을 버린 자에게 더 많은 기회를 내준다. 남을 밟지 못하는 사람은 주저하지만 남을 밟고 올라서는 자는 망설이지 않는다. 거짓말이 이익이 되면 서슴지 않고 남의 눈물을 닦아줄 시간에 제 주머니부터 채운다. 세상은 그 차이를 인격이 아니라 능력으로 평가한다. 참으로 고약한 경쟁이다.
더욱 기막힌 것은 그다음이다. 돈은 돈을 부르고 권력은 권력을 지킨다. 높은 자리에 오르면 잘못을 덮어줄 사람도, 제 편을 들어줄 무리도 생긴다. 어제의 거짓말은 오늘의 업적이 되고 어제의 횡포는 오늘의 결단력으로 둔갑한다. 권력이란 요술 방망이인가. 사람의 허물까지 번듯한 훈장으로 바꾸어놓는다.
공자는 『논어』 「술이」에서 “불의이부차귀 어아여부운(不義而富且貴 於我如浮雲, 의롭지 못하게 얻은 부귀는 내게 뜬구름과 같다)”이라 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 뜬구름을 황금 덩어리인 양 떠받든다. 부자는 능력이 뛰어나다 하고 가난한 사람은 노력이 부족하다 한다. 돈이 언제부터 인격의 증명서가 되었는가. 그러니 모두 ‘일체향전간(一切向錢看, 모두들 돈을 보아라)!’ 다섯 글자를 하느님처럼 섬긴다.
맹자는 『맹자』 「양혜왕 상」에서 “왕하필왈리 역유인의이이의(王何必曰利 亦有仁義而已矣, 왕께서는 어찌 이익만 말씀하십니까. 인의가 있을 따름입니다)”라 했다. 위에서 이익만 좇으면 아래에서도 저마다 이익을 다투다가 끝내 서로 목숨을 빼앗는 지경에 이른다는 경고다. 오늘의 정치판과 삶판을 미리 들여다본 듯하다.
정작 무서운 것은 악인보다 그를 떠받드는 세상이다. 돈이 많으면 지혜롭다 하고 권력이 크면 능력이 출중하다 한다. 가난한 사람의 허물에는 눈을 부릅뜨면서 권력자의 잘못에는 사정이 있었으리라 한다. 도둑질도 크게 하면 경영 수완이고 거짓말도 크게 하면 정치적 전략이란다. 참으로 희한한 도덕 교과서다.
사람들은 정의를 사랑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정의가 제 밥그릇을 건드리면 뒷걸음친다. 남의 특권은 부당하다더니 제 특권은 정당한 보상이라 우긴다. 약자일 때 평등을 외치다가 강자가 되면 차별에도 이유를 붙인다. 정의가 신념인 줄 알았더니 처지에 따라 갈아입는 옷이었다.
기업과 대학, 관공서도 다르지 않다. 정규직과 비정규직을 갈라 한쪽에는 안정을, 다른 쪽에는 불안을 안긴다. 강단에서는 존엄과 평등을 가르치면서 곁의 강사가 겪는 고용불안에는 무심하다. 상아탑에 책은 쌓였으되 염치는 쌓이지 않았으니, 배움이 많다고 사람됨까지 깊어지는 것은 아닌 모양이다.
물론 악인이 모두 성공하고 선인이 모두 실패하는 것은 아니다. 노력과 재능, 우연과 시대가 뒤엉켜 운명을 가른다. 그렇기에 성공은 도덕성의 증거가 아니며 가난은 인격의 결함이 아니다. 정의 또한 저절로 찾아오지 않는다. 법과 제도, 권력을 감시하는 눈과 부당함에 맞서는 목숨 건 투쟁이 있어야 겨우 지탱된다. 그마저 허물어지면 힘센 자의 잔치다. 잔칫상은 소수가 차지하고 설거지는 다수가 맡는다. 그러고는 모두가 이룬 번영이라 떠든다.
12·3 비상계엄 사태가 발생한 지 2년이 다 되어가지만, 정치권을 보면 고소를 금치 못한다. 사마천의 ‘천도시비’는 아직 요원한 일이다. 그러나 이제 하늘만 탓할 일이 아니다. 왜 우리는 악인이 잘되도록 내버려두는가. 왜 성공했다는 이유로 그에게 머리를 조아리는가를 생각해 보아야 하지 않을까. 악인이 잘사는 세상보다 더 끔찍한 것은 악인이 잘살도록 대접해주는 세상이다.
그런 세상을 만들어놓고 아이들에게 착하게 살라고 가르친다. 벙거지 시울 만지는 소리다. 참으로 낯 뜨거운 일이다. 아이들이 묻는다면 무어라 대답할 셈인가. “착하게 살아라. 다만 성공하려면 착한 마음은 잠시 접어두어라.” 설마 이것이 우리가 다음 세대에 물려줄 삶의 교훈은 아니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