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회양懷讓 선사의 제3세 ②
앞의 지주池州 남전南泉 보원普願 선사의 법손
호남湖南 장사長沙 경잠景岑 초현招賢 대사
처음에는 녹원鹿苑에서 제1세世의 주지로 있었다.
나중에는 일정한 장소가 없이 살면서 인연에 따라 중생을 제접하고 요청에 따라 법을 설해 주니,
당시 사람들이 그를 장사長沙 화상이라 하였다.
상당上堂하여 말했다.
“내가 만일 한결같이 종지의 가르침만을 고양하면 법당 앞에 풀이 한 길이나 자라게 된다.
그러므로 나는 어찌할 수 없어서 그대들에게 말하나니, 온 시방세계가 사문의 눈[眼]이요,
온 시방세계가 사문의 전신全身이요, 온 시방세계가 자기 광명自己光明이요,
온 시방세계가 자기 광명 속에 존재하며, 온 시방세계의 단 한 사람도 자기 아님이 없다.
내가 항상 그대들에게 말하기를 ‘3세의 모든 부처가 온 법계의 중생들과 더불어
마하반야摩訶般若의 광명이다’라고 하였는데, 광명이 발하지 않았을 때
그대들은 어디에 있었는가?
광명이 아직 발하지 않았을 때는 부처도 없고
중생의 징조도 없거늘, 산하와 국토는 어디서 오겠는가?”
그때에 어떤 스님이 물었다.
“어떤 것이 사문의 눈입니까?”
대사가 대답했다.
“영원히 드러낼 수 없느니라.”
또 말하였다.
“부처를 이루고 조사를 이루어도 드러낼 수 없고,
여섯 세계[六道]에 윤회하여도 드러낼 수 없느니라.”
“드러낼 수 없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낮에는 해를 보고, 밤에는 별을 보는 것이다.”
“학인은 잘 모르겠습니다.”
“묘고산妙高山의 빛깔이 푸르고 또 푸르니라.”
어떤 스님이 물었다.
“가르침 중에서 말씀하시기를
‘항상 이 보리의 자리[菩提座]에 처한다’고 하는데,
어떤 것이 이 자리입니까?”
“노승老僧이 바로 앉았는데, 대덕은 바로 섰구먼.”
어떤 스님이 물었다.
“어떤 것이 대도大道입니까?”
“그대를 아주 없애 버려라.”
어떤 스님이 물었다.
“모든 부처님의 스승은 누구입니까?”
“비롯함이 없는 겁 이래로 누가 음덕을 덮어 주었는가?”
“부처님들이 나시기 전에는 어떠합니까?”
“노조(魯祖:보운 선사)가 법당을 열었을 때에도 사승師僧과 더불어
횡설수설하였었다.”
노조가 교화를 시작할 때에 어떤 스님이 나와서
“부처님들의 스승이 누구냐?”고 물으니,
노조가 말하기를
“머리 위에 보배관을 쓴 분이 아니고 무엇이랴”라고 하였다.
어떤 스님이 물었다.
“학인이 지위[地]에 의거하지 않을 때는 어떠합니까?”
“그대는 어느 곳을 향하여 안신입명安身立命하겠는가?”
“지위에 의거할 때는 어떠합니까?”
“저 송장을 끌어내라.”
어떤 스님이 물었다.
“어떤 것이 이류異類 중생을 교화하기 위하여
인간 이외의 몸을 받아 난 것을 말한다.
“자[尺]는 짧고, 치[寸]는 길구나.”
어떤 스님이 물었다.
“어떤 것이 모든 부처님의 스승입니까?”
“곧은 것을 다시 휘어서 굽게 만들지 말라.”
“화상에게 향상向上의 설법을 청합니다.”
“그대[闍梨]는 눈이 멀었는데, 귀까지 먹으면 어찌하려고?”
대사가 같이 참구하는 회會 화상에게
어떤 스님을 보내 이렇게 말하게 하였다.
“화상께서 남전南泉을 뵙고 난 뒤에는 어떠했습니까?”
회 화상이 잠자코 있으니, 그 스님이 다시 물었다
“화상께서 남전을 뵙기 전에는 어떠하셨습니까?”
회 화상이 대답했다.
“다시 다른 것이 있을 수 없다.”
그 스님이 돌아와서 대사에게 이야기하니,
대사가 게송 하나를 지어서 보였다.
백 길 장대 끝에서도 동요하지 않는 사람을
비록 깨달았다고 하지만 아직 참되지는 않나니
백 길 장대 끝에서 모름지기 걸어 나가야
비로소 시방세계가 온몸[全身]이리라.
百丈竿頭不動人 雖然得入未爲眞
百丈竿頭須進步 十方世界是全身
그 스님이 물었다.
“어떤 것이 백 길 장대 끝에서 걸어 나가는 것입니까?”
“낭주朗州의 산이요, 예주澧州의 물이니라.”
“화상께서 설명해 주십시오.”
“사해四海와 오호五湖가 모두 황제의 덕화德化 속에 있느니라.”
어떤 나그네가 와서 알현하니,
대사가 불렀다.
“상서尙書여.”
그 사람이 대답을 하자,
대사가 말했다.
“이것이 상서의 본명本命 사람의 생명을 맡은 별,
타고난 운명을 가리키는 말이다.
이 아니겠는가?”
“바로 지금 대답한 것을 여의고 따로 제2의 주인이 있지 않습니다.”
“상서를 지존至尊이라 하면 되겠는가?”
“이렇듯 전혀 대답하지 않을 때가 제자의 주인공이 아니겠습니까?”
“단지 대답할 때만이 아니라 대답하지 않을 때도
비롯함이 없는 겁 이래로 그것이 생사의 근본이었다.”
그리고는 게송을 말했다.
도를 배우는 자가 진리를 인식하지 못함은
다만 본래부터 식신識神을 인정하기 때문이니
비롯함이 없는 이래로 생사의 근본을
어리석은 사람들은 본래의 몸이라 부른다네.
學道之人不識眞 只爲從來認識神
無始劫來生死本 癡人喚作本來身
어떤 수재秀才가 불명경佛名經을 보다가 물었다.
“백천 부처님께서 다만 이름만 보일 뿐
어느 국토에 살았다는 말은 없으니, 그들도 중생을 제도하였습니까?”
대사가 말했다.
“황학루黃鶴樓란 시의 제호題號를
최호崔顥가 지은 뒤에 수재도 지은 적이 있는가?”
“지은 적이 없습니다.”
“한가해지거든 한 편 지어보는 것이 어떠한가?”
어떤 스님이 물었다.
“남전 화상이 천화遷化한 뒤에 어디로 가셨습니까?”
“동쪽 집에서는 나귀가 되고, 서쪽 집에서는 말이 된다.”
“그 뜻이 무엇입니까?”
“타야 하면 타고, 내려야 하면 내린다.”
호월皓月이라는 스님이 물었다.
“천하의 선지식들은 3덕德의 열반涅槃을 증득하셨습니까?”
“대덕은 과위果位 위의 열반을 묻는가, 인위因位 안의 열반을 묻는가?”
“과위 위의 열반을 묻습니다.”
“그렇다면 천하의 선지식은 증득하지 못했다.”
“어찌하여 증득하지 못했습니까?”
“공功이 아직 성현들과 가지런하지 못하기 때문이니라.”
“공이 성인들과 가지런하지 않은데,
어찌 선지식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불성佛性을 분명히 보는 것도
또한 선지식이라는 이름을 얻을 수 있다.”
“그러면 공이 어느 도와 가지런해야
대열반大涅槃을 증득했다고 합니까?”
대사가 게송을 지어서 보였다.
마하반야摩訶般若가 비추는
해탈의 깊고 깊은 법은
법신의 적멸체寂滅體이니
셋이 하나인 이치가 원만하고 항상하다네.
공功이 가지런한 곳을 알고 싶은가?
이것을 이름하여 항상 적멸한 광명이라 한다네.
摩訶般若照 解脫甚深法
法身寂滅體 三一理圓常
欲識功齊處 此名常寂光
그 스님이 다시 물었다.
“과위 위의 3덕 열반은 이미 알려 주셨습니다만,
어떤 것이 인위因位 안의 열반입니까?”
“대덕大德이 바로 그것이다.”
그 스님이 다시 물었다.
“가르침 속에서 말씀하신 환幻의 뜻이 있습니까?”
“대덕이여, 그게 무슨 말인가?”
“그러면 환幻의 뜻이 없습니까?”
“대덕이여, 그게 무슨 말인가?”
“그렇다면 환의 뜻은 있지도 않고 없지도 않습니까?”
“대덕이여, 그게 무슨 말인가?”
“제가 세 차례나 밝혔으나 모두 환의 뜻과 계합하지 못했으니,
화상께서는 가르침 속에서 말한 환의 뜻을 어떻게 밝히겠습니까?”
“대덕은 일체법의 부사의不思議함을 믿는가?”
“부처님의 진실한 말씀을 어찌 믿지 않겠습니까?”
“대덕이 믿음을 말했는데, 두 가지 믿음[二信] 연신緣信과 증신證信.
연신은 처음으로 불법을 믿는 믿음이요, 증신은 맨 나중에 믿는
믿음이다.중에서 어느 것인가?”
“제가 말한 것은 두 가지 믿음 가운데서 연신緣信에 해당합니다.”
“어떤 교문敎門에 의거하여 연신을 내었는가?”
“화엄경에 말하기를 ‘보살마하살은 막힘도 걸림도 없는 지혜로써
일체 세간의 경계가 여래의 경계임을 믿는다’고 하였고,
또 화엄경에서 말하기를
‘모든 불세존께서는 세간의 법과
모든 불법의 성품이 차별이 없어서 결단코 둘이 없음을 잘 아신다’고 하였으며,
또 화엄경에서 말하기를 ‘불법과 세간법에서
그 진실을 본다면 일체가 차별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대덕이 열거한 연신緣信의 교문敎門은 상당히 근거가 있구나.
노승이 대덕을 위해 가르침 중에서 말한 환幻의 뜻을 밝혀 주겠으니
잘 들어라. 만일 어떤 사람이 환幻이 본래 참[眞]임을 보면,
그렇다면 이름하여 부처를 본 사람이라 한다.
원만히 통하는[圓通] 법과 법은 생멸이 없나니,
멸함도 없고 생함도 없는 것이 부처님 몸[佛身]이니라.”
그 스님이 또 물었다.
“지렁이를 두 토막으로 끊으면 두 토막이 모두 움직이는데,
불성은 어느 쪽에 있습니까?”
“움직임과 움직이지 않음이 어떤 경계인가?”
“그 말씀은 경전과 관련이 없으니, 지혜로운 이의 말이라 할 수 없습니다.
화상께서 말씀하시기를 ‘움직임과 움직이지 않음이 어떤 경계인가?’라고 하셨는데,
어느 경전에서 나온 말입니까?”
“과연 그렇다. 말이 경전에 관계치 않는 것은 지혜로운 이의
말이 아니다. 그러나 대덕은 어찌하여 보지 못했는가?
수능엄경首楞嚴經에 말하기를 ‘반드시 알아야 한다.
시방의 끝없고 움직이지 않는 허공과 아울러 요동하는
땅․물․불․바람을 똑같이 6대大라 하나니,
성품이 참되고 원융하여 모두가 여래장如來藏이라서
본래 생멸이 없다’고 하였다.”이어서 게송을 말했다.
가장 깊고도 심히 깊구나.
법계와 사람의 몸이 문득 마음일세.
미혹한 이는 본래 마음을 잃고 온갖 경계[色]를 짓지만
깨닫고 나면 찰토刹土의 경계가 바로 참 마음[眞心]이로다.
몸과 계界의 두 티끌이 실다운 모습이 없으니
분명히 이를 요달하는 것을 지음知音이라 부른다네.
最甚深 最甚深 法界人身便是心
迷者迷心爲衆色 悟時刹境是眞心
身界二塵無實相 分明達此號知音
그 스님이 또 물었다.
“어떤 것이 다라니陀羅尼입니까?”
대사가 선상禪床의 오른쪽 끝[右邊]을 가리키면서 말했다.
“저 사승師僧이 외울 줄 안다.”
“그밖에도 외우는 이가 있습니까?”
대사가 다시 선상의 왼쪽 끝을 가리키면서 말했다.
“저 사승도 외울 줄 안다.”
“저에게는 어찌하여 들리지 않습니까?”
“대덕은 어찌하여 참된 외움에는 메아리가 없고,
참된 들음에는 들은 바가 없다는 것을 모르는가?”
“그렇다면 음성은 법계의 성품에 들어가지 않습니까?”
“빛깔을 여의고서 보려는 것은 올바른 봄[正見]이 아니고,
소리를 여의고서 들으려는 것은 삿된 들음이다.”
“어찌하여 빛깔을 여의지 않는 것이 올바로 보는 것이며,
소리를 여의지 않는 것이 올바로 듣는 것입니까?”
대사가 게송을 지어 보였다.
눈에 가득한 것은 본래 빛깔이 아니고
귀에 가득한 것도 본래 소리가 아니니
문수는 항상 눈에 접촉하고
관음觀音이 이근耳根을 채웠다.
滿眼本非色 滿耳本非聲
文殊常觸目 觀音塞耳根
셋을 알면 원래 한 바탕[一體]이고넷을 요달하면 본래 동일한 진眞이니
당당한 법계의 성품에는 부처도 없고 또한 사람도 없다.
會三元一體 達四本同眞 堂堂法界性 無佛亦無人
어떤 스님이 남전南泉에게 물었다.
“살쾡이와 흰 염소는 있는 줄 알겠으나 3세의 모든 부처님은 있는 줄
모르겠다고 하셨으니, 어찌하여 3세의 부처님께서 있는줄을모르십니까?”
“녹원鹿苑에 들어가지 않았을 때에는 그래도 비슷하였다.”
“살쾡이와 흰 염소는 어찌하여 있는 줄 압니까?”
“그대는 어찌하여 그것을 괴이하게 여기는가?”
“화상께서는 누구의 대를 이었습니까?”
“나는 누구의 대도 잇지 않았다.”
“물어서 배우기는 하였습니까?”
“나 스스로 묻고 배웠느니라.”
“스님의 뜻은 무엇입니까?”
대사가 게송을 지어 보였다.
허공이 만상萬象에게 묻고 만상이 허공에게 답하는 것을
어느 누가 친히 듣겠느냐. 나무로 만든 인형 아이로다.
虛空問萬象 萬象答虛空 誰人親得聞 木叉丱角童
스님이 물었다.
“어떤 것이 평상한 마음[平常心]입니까?”
“자고 싶으면 자고, 앉고 싶으면 앉는 것이니라.”
“학인은 잘 모르겠습니다.”
“더우면 서늘하게 하고, 추우면 불을 쪼인다.”
“위로 향하는 외가닥 길[向上一路]을 말씀해 주십시오.”
“한 개의 바늘에 석 자의 실이다.”
“어찌 알아야 하겠습니까?”
“익주益州의 베와 양주揚州의 비단이다.”
어떤 스님이 물었다.
“움직임[動]은 법왕法王의 싹이고,
고요함[寂]은 법왕의 뿌리라 하니, 어떤 것이 법왕입니까?”
대사가 노주露柱를 가리키면서 말했다.
“왜 저 대사에게 묻지 않는가?”
대사가 뜰 앞에서 볕을 쪼이는데, 앙산仰山이 말했다.
“사람마다 다 저런 일이 있건만 다만 수용하지를 못하는구나.”
대사가 말했다.
“마치 그대에게 수용하기를 청하는 것 같구나.”
“어떻게 수용하겠습니까?”
대사가 앙산을 차서 쓰러뜨리니, 앙산이 말했다.
“곧바로 호랑이[大蟲]같이 되었구나.
[장경長慶이 말하기를 “먼저는 둘 다 작가作家이더니 나중에는
둘 다 작가가 아니로구나”라고 하였다. 그리고 이어 따로 말하기를
“삿된 법을 조복시키기 어렵구나”라고 하였다.]
이로부터 모든 곳에서 그를 경잠의 호랑이라 불렀다.
어떤 스님이 물었다.
“본래의 사람[本來人]도 부처를 이룹니까?”
“그대는 대당의 천자天子가 손수 씨를 심고 벼를 베는 것을 보았는가?”
“그러면 어떤 사람이 부처를 이룹니까?”
“그대가 부처를 이룬다.”
그 스님이 말이 없으니, 대사가 말했다.
“알겠는가?”
“모르겠습니다.”
“가령 사람이 땅으로 인하여 넘어졌으면
다시 땅을 인하여 일어나야 하는데, 땅이 무어라 하더냐?”
삼성三聖이 수秀 상좌上座를 시켜서 물었다.
“남전이 천화한 뒤에 어디로 갔습니까?”
대사가 대답했다.
“석두石頭가 사미로 있을 때에 6조를 뵈었느니라.”
수 상좌가 말했다.
“석두가 6조를 뵌 일을 묻는 것이 아닙니다. 남전이 천화한 뒤에 어디로 갔습니까?”
“그[伊]로 하여금 잘 생각해서 가게 하라.”
수 상좌가 말했다.
“화상께는 비록 천 자나 되는 겨울 소나무는 있으나,
가지를 추출한 석순石筍은 없군요.”
대사가 잠자코 있으니, 수 상좌가 말했다.
“화상께서 대답해 주신 것을 감사드립니다.”
대사는 여전히 잠자코 있었다.
수 상좌가 삼성에게 가서 이야기하니,
삼성이 말했다.
“만일 진실로 그렇다면,
오히려 임제臨濟의 일곱 걸음보다 훌륭하다.
그러나 설사 그렇더라도 내가 다시 점검해 봐야 하겠다.”
이튿날 삼성이 올라와서 물었다.
“화상께서 어제 남전이 천화한 뒤에 어디로 갔느냐는 말에
대답하셨다고 들었는데, 광전절후光前絶後 전무후무前無後無하다는
뜻의 광전절후曠前絶後의 오기인 듯하다.
의 고금에 듣기 어려운 법문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대사가 여전히 잠자코 있었다.
어떤 스님이 물었다.
“어떤 것이 문수文殊입니까?”
“담장 위의 기왓장이니라.”
“어떤 것이 관음觀音입니까?”
“소리와 말이니라.”
“어떤 것이 보현普賢입니까?”
“중생의 마음이다.”
“어떤 것이 부처입니까?”
“중생의 색신色身이니라.”
“항하의 모래알같이 많은 부처님의 본체는 모두 동일하거늘,
어찌하여 갖가지 명호가 있습니까?”
“안근眼根으로부터 근원을 돌이킨 것을 이름하여 문수라 하고,
이근耳根으로부터 근원을 돌이킨 것을 이름하여 관음이라 하고,
마음으로부터 근원을 돌이킨 것을 이름하여 보현이라 한다.
문수는 부처님의 묘하게 관찰하는 지혜[妙觀察智]요,
관음은 부처님의 반연 없는 큰 자비[無緣大慈]요,
보현은 부처님의 함이 없는 묘한 행[無爲妙行]이니,
세 성인은 부처님의 묘한 작용이고 부처님은 세 성인의 참된 체體이다.
작용을 하면 항하의 모래알같이 많은 거짓 이름이 있으나,
본체는 통틀어 박가범薄伽梵 하나뿐이다.”
어떤 스님이 물었다.
“색色이 곧 공空이요, 공이 곧 색이라 하는데,
이 이치가 어떠합니까?”
대사가 게송을 말했다.
막힌 곳이 장벽이 아니니 통한 곳을 허공이라 하지 말라.
만약 사람이 이렇게 이해하면 마음과 경계는 본래 같으니라.
礙處非牆壁 通處勿虛空 若人如是解 心色本來同
또 게송을 말했다.
불성이 훤하게 드러나 있는데성품에 머물고 정情을 두면 보기 어려우니
중생에 내가 없음을 깨달으면 내 얼굴과 부처의 얼굴이 무엇이 다르랴?
佛性堂堂顯現 住性有情難見 若悟衆生無我 我面何殊佛面
스님이 물었다.
“제6식識과 제7식과 제8식은 필경 본체가 없거늘, 어찌하여
제8식을 굴려서 대원경지大圓鏡智를 이룬다고 하는 것입니까?”
대사가 게송으로 대답했다.
7식의 생겨남은 하나의 멸함에 의지하고
하나의 멸함은 7식의 생겨남을 유지한다.
하나의 멸함은 멸함도 멸한 것이니
6식과 7식은 영원히 변천치 않네.
七生依一滅 一滅持七生
一滅滅亦滅 六七永無遷
또 어떤 스님이 물었다.
“지렁이를 두 토막으로 끊을 때에 두 토막이 모두 움직이는데,
불성은 어느 쪽에 있습니까?”
“망상은 해서 무엇 하겠는가?”
“그러나 꿈틀거리는데 어찌하겠습니까?”
“그대는 어찌하여 불과 바람이 아직 흩어지지 않았음을 모르는가?”
“어찌해야 산하와 국토를 굴려서 자기로 귀의하게 하겠습니까?”
대사가 도리어 물었다.
“어찌해야 자기를 굴려서 산하와 국토를 이루게 하겠는가?”
“알지 못하겠습니다.”
“호남성湖南城 밑은 백성을 부양하기 좋으니,
쌀값이 싸고 땔감이 많아서 사방의 이웃을 만족시키느니라.”
그 스님이 말이 없으니, 대사가 게송을 말했다.
산하를 굴린다고 누가 묻는가?
산하가 구르면 어디를 향하는가?
원통圓通에는 두 둔덕이 없으니 법성은 본래 돌아감이 없다.
誰問山河轉 山河轉向誰 圓通無兩畔 法性本無歸
화엄경을 강론하는 어떤 대덕이 물었다.
“허공은 실제 있는 것입니까, 아니면 없는 것입니까?”대사가 말했다.
“있다 말해도 되고, 없다 말해도 된다. 허공이 있을 때에는 다만
거짓 있음만이 있고, 허공이 없을 때에는 다만 거짓 없음만이 없다.”
“화상께서 말씀하시는 바는 어떤 경전에 있는 말씀입니까?”
“대덕은 어찌 듣지 못했는가? 수능엄경에 말하기를 ‘시방의 허공이
그대의 마음 안에 생겨난 것이 마치 조각구름이 푸른 하늘에 떠 있는
것과 같다’고 하였으니, 이 어찌 허공이 생겨날 때에 거짓 이름만이
생겨나는 것이 아니겠는가?
또 말하기를 ‘너희들 한 사람이
참[眞]을 일으켜서 근원[元]에 돌아가면,
시방 허공이 모두 무너진다’고 하였으니,
이 어찌 허공이 사라질 때에
거짓 이름만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므로 내가 말하기를
‘있음은 거짓 있음뿐이요,
없음은 거짓 없음뿐이다’라고 하는 것이다.”
다시 물었다.
“경에 말하기를 ‘마치 맑은 유리 안에 순금의 상像이 나타난 것과 같다’고 하는데,
이 뜻이 어떤 것입니까?”
“깨끗한 유리로써 법계의 체體를 삼고,
순금의 상像으로 무루지無漏智의 체를 삼으면,
체가 능히 지혜를 낳고 지혜가 능히 체를 요달하나니,
이 때문에 ‘맑은 유리 안에 순금의 상이 나타난 것과 같다’고 말한 것이니라.”
“어떤 것이 상상인上上人의 행할 곳입니까?”
“죽은 사람의 눈동자와 같다.”
“상상인이 서로 볼 때에는 어떠합니까?”
“죽은 사람의 손과 같으니라.” 쓸데없다는 뜻이다.
“선재동자善財童子는 어찌하여 한량없는 겁 동안
보현의 몸 안에 있는 세계를 돌아다녔는데도 두루하지 못했습니까?”
“그대는 한량없는 겁 이래로 돌아다녔는데 두루하였는가?”
다시 물었다.
“어떤 것이 보현普賢의 몸입니까?”
“함원전含元殿 서울인 장안 안에 있는 대궐이다.
안에서 다시 장안長安을 찾는구나.”
“어떤 것이 학인學人의 마음입니까?”
“온 시방세계가 그대의 마음이니라.”
“그렇다면 학인은 몸을 붙일 곳이 없겠습니다.”
“이것이 그대의 몸 붙일 곳이니라.”
“어떤 것이 몸 붙일 곳입니까?”
“바닷물이 깊고 또 깊으니라.”
“학인은 잘 모르겠습니다.”
“물고기와 용의 출입이 멋대로 오르락내리락 하느니라.”
“어떤 사람이 물으면 화상께서는 인연 따라서 대답해 주시겠지만,
전혀 아무도 묻지 않을 때에는 어찌하시겠습니까?”
“피곤하면 잠을 자고, 피로가 풀리면 일어난다.”
“학인이 어떻게 이해하라고 하시는 것입니까?”
“여름에는 벌거벗고 있으나, 겨울에는 옷을 입어야 하느니라.”
“죽은 스님이 어디로 갔습니까?”
대사가 게송으로 대답했다.
금강 같은 몸임을 모르고서 도리어 인연 따라 생겼다고 하는구나.
시방의 참다운 적멸은 어디엔 있고 또 어디엔 없으랴.
不識金剛體 却喚作緣生 十方眞寂滅 誰在復誰行
남전의 초상화에 찬讚을 부쳤다.
당당한 남전이여,3세의 근원이니 금강으로 항상 머물러서
시방에 끝이 없네.중생과 부처가 다함이 없으니
나타났다가는 곧 되돌아가네.
堂堂南泉 三世之源 金剛常住
十方無邊 生佛無盡 現已却還
남전이 오래도록 막혀 있다가 깨닫고는 게송을 지었다.
오늘에야 고향에 돌아와 대문에 들어가니
남전이 친히 건곤乾坤에 두루했다고 말하네.
법과 법이 분명하여 모두가 조부祖父이니
돌이켜 뒤를 보면 후손들에게 부끄럽네.
今日還鄕入大門 南泉親道遍乾坤
法法分明皆祖父 迴頭慚愧好兒孫
대사가 이에 화답하였다.
오늘날 깨달은 일을 논하지 말지니
남전은 건곤에 두루했다고 말하지 않네.
고향에 돌아오면 모두가 후손의 일이니
조부祖父는 본래 문에 들어가지 않았네.
조부祖父란 본분本分이요, 후손들이란 신훈新薰이다.
今日投機事莫論 南泉不道遍乾坤 還鄕盡是兒孫事 祖父從來不入門
대사가 또 배움을 권하는 게송을 지어 보였다.
만 길 장대 끝에서 아직 쉬지를 못하고
당당한 길이 있건만 노니는 이 별로 없네.
선사들아, 바라건대 남전을 통달하면
눈에 가득한 청산이 온통 가을이구나.
萬丈竿頭未得休 堂堂有路少人遊
禪師願達南泉去 滿目靑山萬萬秋
임제臨濟 화상이 “붉은 살덩이 위에 지위 없는 참 사람[無位眞人]이
있다”고 한 말을 인하여 대사가 게송을 지어 보였다.
만법이 한결같아서 가려낼 필요가 없나니
한결같다면 무엇을 가리고 무엇을 가리지 않으랴.
바로 지금의 생사가 본래 보리이니
3세의 여래와 똑같은 눈을 갖추었네.
萬法一如不用揀 一如誰揀誰不揀
卽今生死本菩提 三世如來同箇眼
대사가 사람들이 솔[松]과 대[竹]를 꺾는 짓을 경계하는 게송을 지었다.
천년 묵은 대와 만년 묵은 솔이여, 지마다 잎사귀마다 모두가동일하네.
사방의 수도하는 학인들에게 말하나니을 옴쭉하면 모두가 조사의몸이다.
千年竹 萬年松 枝枝葉葉盡皆同 報四方玄學者 動手無非觸祖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