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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을 남긴 책임분담
1972.10.22 (일), 한국 전본부교회
[기 도]
승리와 영광과 존귀가 당신에게만 미쳐지는 것을 알고 있는 저희들, 저희들도 당신의 협조 없이는 승리와 영광과 존귀의 자리를 차지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당신이 동으로 가면 저희들도 동으로 갈 수 있고 서로 가면 서로 따라갈 수 있는, 당신은 완전한 주체요 저희들은 당신의 형상을 닮아야 할 상대적 입장에 있는 것을 잘 아옵니다.
저희의 손이 저희들만의 손이 되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저희의 몸이 저희들만의 몸이 되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저희 자신들의 지체가 당신을 대신할 수 있는 지체로서 당신의 손을 대신하고, 당신의 눈을 대신하고, 당신의 입을 대신할 수 있는 모습이 되기를 바라고 있사옵니다.
아버님이여! 부족한 저희들은 선할 수 있는 힘의 인연을 갖지 못하고 있습니다. 능동적인 요인을 차지하지 못한 타락의 후손이라는 것을 알고있는 저희들이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시간에도 다시 창조의 힘, 혹은 재창조의 힘을 가하여 주지 않는 한 당신의 성상을 따를 수도 없사오며, 당신의 상대적 가치도 추구할 수 없다는 사실을 생각하게 되옵니다. 저희 자신들을 잘 아시는 아버지시여, 저희 자신을 잘 아는 저희들은 당신의 자비와 당신의 능력의 손길이 이 시간에 다시 찾아 주기를 진심으로 진심으로 바라고 있습니다.
저희를 찾아오신 아버지의 수고의 발걸음이 이 아침에 한하여서 찾아오는 발걸음이 아닌 것을 저희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한많은 역사의 고빗길에서 수난과 죽음이 엇갈리는 길도 참으시고 홀로 넘어오신 아버지시여! 고독이 넘쳐흐르는 그 자리에서도 소망의 자녀를 꿈속같이 그리 면서 참고 오신 아버지시여! 슬픔이 다가오는 장면을 직시할 수 없어서 눈을 감고 넘지 않을 수 없었던 수많은 비참했던 고개를 극복하여 오신 아버지시여! 그 아버지는 저희들을 지극히 사랑하고, 저희들을 찾기 위하여 또한 험난한 생활의 원한을 품고 오셨는데도 불구하고, 그 아버지를 앞에 모시고도 느낄 줄 모르고 화답할 줄 모르는, 그런 기가 막힌 정경을 대하여야 할 아버지의 처지는 비참 그 자체인 것을 저희들이 느끼게 되옵니다.
또다시 만나거들랑 천만 한스러웠고 애달픈 마음을 가지고 저희의 정경을 바라보시며 한마디 한마디로 새로운 복귀의 갈림길을 갈라내기 위한 수고의 역사를 다시 하지 않으면 안 될 기막힌 아버지의 성상을 저희들이 느껴야만 되겠습니다.
그가 오른손을 들면 저희들은 오른손을 들어야 되겠고, 그가 동으로 가면 저희들도 동으로 가야 되겠습니다. 그가 좌정하면 저희들도 좌정해야 되겠습니다. 당신이 원하시는 내용을 본받고 당신이 원하시는 뜻을 따라서 당신이 원하시는 곳에 끝까지 따라가야 할 사명이 부자의 인연이 었기 때문에, 저희들은 당신을 사모하고, 당신의 그리운 마음을 알아 드릴 수 있는 아들딸이 되어야만 되겠습니다.
당신이 저희들을 불러 줄 때 그 음성을 듣고, 당신이 저희들을 향하여 손짓할 때 그것을 바라보고 달음질쳐 갈 수 있는 눈을 가진 아들딸이 되어야 되겠고, 귀를 가진 아들딸이 되어야 되겠습니다. 당신이 아무리 부르더라도 듣지 못하고 보지 못하는 귀머거리와 봉사가 되어서는 안되겠습니다. 그런 자리에 있거들랑, 능력이 많으신 아버지시여, 저희들의 눈이 열리고 귀가 열리기를 진정으로 바라고 있사오니, 당신을 볼 수 있고 당신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그 귀와 눈을 주시옵소서. 그 귀와 그 눈을 갖지 않고는 당신의 아들이 될 수 있는 인연을 맺을 수 없다는 것을 생각하게 될 때, 부족한 것들, 이 나라의 부패한 것들을, 아버지여, 긍휼히 보시옵소서.
하늘의 마음을 가지고 찾아와 주시어 당신이 다시 한 번 거룩하신 창조의 손길을 가하여 주기를 바라는 부족한 것들이오니, 버리지 말아 주시옵기를, 아버지,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당신 앞에 저희들이 나올 적마다 부정해야 될 자신인 것을 스스로 깨달아야 되겠습니다. 미비하고 불급된 자기 자신을 놓고 열심히 기도해야 되겠습니다. 그리하여 직고하는 심정을 가지고 '나는 이러한 길을 걸어 왔고, 나는 이러한 자'라고 스스로 적나라하게 비판하여 당신 앞에 세워 놓고, 옳지 않은 요건들을 제거시켜서 당신이 합당하다 할 수 있는 본성의 요인들을 다시 품을 수 있게 해 달라고 간곡히 부탁드리는 당신의 자녀들이 되어야 되겠습니다.
생명을 가하여 당신이 원하는 뜻 앞에 이것을 가중시켜 가지고 당신이 가고자 하는 목적지를 향하여 전진할 수 있는 소망의 무리들이 되어야만 될 것을 확실히 깨닫고 있사오니, 아버지여, 저희 손길을 붙드신 바에는 놓지 마시옵고, 저희들을 이끄시옵소서. 당신이 원하시는 소원의 터전 앞에 서고야 말고, 승리의 결실체로서 아버지의 사랑의 마음을 일으킬 수 있는 아들의 모습과 딸의 모습을 완성하고야 말겠다고 몸부림 치는 당신의 자녀들이 되지 않으면 안 될 것을 확실히 깨달았사오니, 이 아침 찾아오시어서 저희들을 버리지 마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아버님이여, 이 나라 이 민족을 기억하여 주시옵소서. 불쌍한 이 나라 이 민족을, 아버지, 지켜 주시옵소서. 아무리 적진에 포위되었다 하더라도 당신을 사모하고 당신을 위해 있는 자들 앞에는 모든 것이 문제가 되지 않는 것을 저희들은 확신해야 되겠습니다. 전국에 널려 있는 통일의 무리들은 이 나라를 붙안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당신이 살아 계신 것을 알고 모시고 나오고 있사옵니다. 이 나라의 갈 길이 어려운 것을 바라볼적마다 저희 책임이 가중되는 것을 절감함과 동시에, 저희들이 책임을 다하지 못하게 될 때에, 이 나라의 운명이 어떻게 되느냐 하는 것을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진정한 의미에서 저희들이 제물의 사명을 다할 것을 이 시간 다시 한 번 다짐하게 허락하여 주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삼천만 민중을 이끌 수 있는 것도, 남북의 오천만 백성을 당신 앞에 품을 수 있게 하는 것도 당신만이 확실히 알고 있습니다. 이 나라 이 민족을 아버지의 장중에 쥐시어서, 원하는 무리들을 세우시어 당신의 뜻 앞에 가누시사 승리한 하늘의 나라를 건국할 수 있는 그날이 어서 속히 오게 허락하여 주옵기를 간절히 바라옵니다. 통일된 소원의 날이 저희 민족 앞에 어서 속히 오게 허락하여 주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이 나라의 주인은 그 누구도 아닌 것을 알고 있사오니, 아버지께서 주인이 되시어서 하나님이 직접 주관하시는 이 나라가 되기를 바라옵니다. 사람의 그 어떠한 힘 가지고는 이것을 수습하지 못한다는 것을 저희들도 알고 있사오니, 당신의 마음에 기억되는 이 나라가 되게 하시옵고, 당신의 뜻을 받들 수 있는 이 민족이 되게 하시옵소서. 당신이 원하시는 소원의 나라 앞에 하나될 수 있는, 상하가 일치될 수 있는 민족으로서 남아지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통일의 제단을, 아버지, 이 나라 가운데 불러 주시어서 다년간 훈련시켜 왔습니다. 때로는 저희들이 원치 않은 자리에 몰아내신 아버지여! 그것은 저희들을 남기기 위한 뜻이 있기 때문이었음을 저희들이 알았습니다. 남이 아니라는 수난의 길에서 극복하라고 다짐하던 것은 끝날에 당신이 책임을 부과하시려는 크나큰 뜻이 있었기 때문이란 것을 알았사옵니다.
아버님, 이제 당신의 명령하신 뜻 앞에 생명, 재산, 모든 것을 바치고 다시 한 번 전체가 움직여 나갈 수 있는 새로운 결의와 다짐이 있지 않고는 안 될 때가 목전에 다가오고 있사옵니다. 알고 행치 않는 데는 화가 있을 것을 저희들이 알고 있기 때문에, 기필코 저희들은 아는 길을 향하여 지금까지 달려 왔습니다. 지금도 달리고 있습니다. 아버지, 불충의 모습을 가지고 달렸사오면 다시 한 번 용납하여 주시옵소서.
내일이 당신의 희망과 더불어 남아져 있을진대 이제라도, 아버지여, 회개하고 나설 수 있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나라를 망각하는 무리가 되지 말게 허락하여 주시옵고, 자신을 세우기 위해 하늘을 배반하는 무리들이 되지 말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전세계에 널려 있는 통일의 무리들을 이 시간 기억하여 주시옵소서. 그들이 누구를 의지하고 누구를 바라보고 살아갈 것이며, 누구를 따라갈 것이겠습니까?당신의 뜻과 당신을 바라보고 살고 가야 할 그 무리들인 것을 알게 될 때에, 그 누구도 지도할 수 없는 것을 알고 있사오니, 금후에 세계에 널려 있는 통일의 무리를 올바른 길로 인도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부탁하고 원하옵니다.
더우기 일선에 나가 있는 기동대들을, 이 평화의 십자군을 아버지께서 지키시옵소서. 가는 곳곳마다 당신의 모습을 드러내고, 당신이 살아 계신 것을 직고할 수 있는 무리들이 되게 허락하여 주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아버지, 금후에 저희들이 계획하는 일이 많사오니 살피시옵소서. 일본에서 지금 저희 어린 자녀들이 리틀엔젤스를 중심삼고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사오니 그 자리에 당신의 가중한 은사가 임하시옵소서. 이들은 이 무용단을 위한 것이 아니었사옵니다. 나라를 넘어, 아시아를 넘어, 세계 복귀의 뜻을 이루기 위해, 그 길을 넓히기 위한 것이옵니다. 어린 것들을 내세워 금후에 계획하는 모든 것이 당신의 마음 가운데 기억되고, 늘쌍 살피시어 당신이 가려 줄 수 있는 이번 활동의 기간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1972년의 종말을 장식하는 거룩한 당신의 뜻이 이들 가운데 나타나게 하시옵고, 일본을 통해 세계에 제시하려는 당신의 고귀한 뜻을 부디부디 남김없이 드러낼 수 있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금후에 맞아지는 저희의 모든 어려움이나 슬픔이나 고통이 있을지라도 감수하면서, 어린양에게 남기신 사명을 감당할 수 있는 무리들로서 책임 다하는 자녀들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부탁하고 원하옵니다.
엎드린 자녀들을 기억하여 주시옵고, 사랑의 심정으로 품으시어 당신의 소원의 터전 앞에 한 생명이라도 빠짐이 없이 동참할 수 있는 거룩한 축복을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부탁하면서, 모든 말씀 참부모님의 이름으로써 아뢰었사옵나이다. 아멘.
말 씀
우리 통일교회 교인들은 책임분담이라는 말을 합니다. 인간이 보다 가치 있는 내용을 지닐 수 있는 것도 이 책임분담이 있기 때문이라는 것을 우리는 원리를 통해서 배우고 있는 것입니다. 만일 아담 해와가 책임분담을 완수했더라면 우리에게는 한(恨)이라는 말이 남아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책임분담을 다하지 못한 연고로 우리의 역사과정 에는 한스러운 이런 길이 남아 있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만일에 책임분 담을 완수했더라면 인간과 천사세계, 전피조세계는 기쁨과 영광 가운데서 하나님의 주관을 받게 되었을 것입니다. 이것이 원칙이었다는 것도 알고 있는 것입니다.
책임분담 미완성으로 말미암아 사탄세계가 형성되었고, 이 땅이 사탄 주관권내에 남아졌다는 것을 알고 있는 것입니다. 이 책임분담 미완성으로 말미암아 하나님도 수고의 길을 지금까지 가려 나오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는 것입니다.
책임분담이 전체를 좌우할 수 있는 중심적 요인
이 책임분담이라는 것은 어느 시대나 어떠한 개인이나 혹은 어떠한 민족이면 민족, 어떠한 세계에도 남아져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되겠습니다. 한 개인을 중심삼고 볼 때, 이 책임분담이라는 과제가 자기 생애를 중심삼고 언제나 앞에서 이미 추구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책임분담을 완수하면 개인으로서의 길을 갈 수 있는 것이요. 책임분담을 완수하지 못하면 아무리 잘난 사람이라 할지라도 개인으로서의 인생길을 완전히 갈래야 갈 수 없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 책임분담은 물론 생애 노정에 전개되어 있지만, 우리 하루하루의 생활 가운데서도, 여러분이 보고 듣고 혹은 느끼는 일체의 생활 가운데서도 책임분담을 해야 할 인연이나 환경을 벗어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듣는 것도 책임분담을 완수하고 나서 들어야 되는 것이요. 보는 것도 책임분담을 완수하고 나서 보아야 되는 것이요. 느끼는 것도 책임분담을 완수하고 나서 느껴야 되는 겁니다.
만일 책임분담을 완수하지 못한 자리에서 보고 듣고 느낀다면 그 모든것은 책임분담 완수에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책임분담을 다하지 못한 자리에서 내가 듣고 기뻐한 그 기쁨이 책임분담을 완성한 이후의 기쁨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책임분담을 다하지 못한 그 자리에서 느끼는 그 느낌이 책임분담을 다한 자리에서의 느낌으로 통할 수 없는 겁니다. 즉 나라는 사람이 책임분담을 다하지 못한 자리에서 살고 있는 것이 책임분담을 완수하고 난 후의 삶과 통할 수 없다는 사실을 미루어 볼 때에, 우리는 자나깨나 가나오나, 혹은 우리의 일체의 생활을 통해서 이 책임분담이라는 명제가 전체를 좌우할 수 있는 중심적인 요인이 되어 있다는 것을 알아야만 되겠습니다.
내가 진정한 의미에서 기쁠 수 있는 한 날을 맞이했다면, 그것이 책임 분담을 완성한 자리에 있어서의 기쁨이냐? 혹은 내가 보고 좋아할 수 있는 그 무엇을 봤다면, 그것이 책임분담을 완수한 자리에서 보고 좋아하는 것이냐? 내가 뜻있는 걸음을 걷는다면 그것이 책임분담을 완수한 자리, 하늘과 땅, 온 우주가 바라볼 수 있고, 혹은 희망의 조건으로 남아질 수 있는 그 자리에서 가고 있느냐, 혹은 그런 자리에서 살고 있느냐 하는 문제를 두고 볼 때, 이것은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전진하는 과정에서도 책임분담이 남아 있는 것이요. 혹은 쉬는 그 자리에서도 책임분담을 추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청춘시대에도 책임분담의 짐을 짊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만일 이것을 청춘시대에서 해결 못 하면 장년시대, 노년시대의 생애를 통해서 책임분담 추구의 요건은 남아지는 것입니다.
만일 살아생전에 이 책임분담 완성을 하지 못하게 될 때는, 이것은 영원한 참소의 조건으로 남아집니다. 저세계에 가서도 이 책임분담의 요인은 남아진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입장에서의 책임분담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이것은 한많은 요인을 갖고 있는 책임분담이라는 것을 우리는 생각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아담 가정에서도 이것을 완수하지 못했기 때문에 타락했고, 아벨을 중심삼은 복귀의 역사도 책임분담을 하는 입장은 달랐지만, 그 사명을 감당하지 못했기 때문에 아벨이 희생을 당한 것입니다.
노아 가정에서도 역시 이 책임분담 때문에 그렇게 됐고, 아브라함도 역시 생애노정의 수난길에서 최후로 다짐지어야 할 입장인데도, 책임분담을 다하지 못함으로 말미암아 역사는 불신의 역사로 남아진 것입니다. 모세도 역시 처한 환경은 달랐지만, 모세가 해야 할 책임분담을 완수하지 못했기 때문에 이스라엘이 비참한 운명에 놓여진 것을 알고 있는 것입니다.
세례 요한도 마찬가지입니다. 유대교의 4천년 역사를 종결짓고 이스라엘의 소망의 한 때를 맞이하는 전체의 책임을 대신하여 다짐지어야 할 사명을 짊어진 세례 요한이 민족을 대표한 책임분담, 교단을 대표한 책임분담을 완수할 수 있는 한 날을 맞지 못했기 때문에, 오늘날 이스라엘 민족은 비참한 민족이 되었고, 유대교회는 하늘의 복귀역사에 한의 요인을 남긴 교단이 됐다는 것을 알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책임을 다하지 못함으로 말미암아 그 사명이 예수 앞에 옮겨지게 되었고 그로 말미암아 예수가 이스라엘 나라와 유대교가 책임 못한것을 짊어지고, 그 시대의 사명을 앞에 놓고 몸부림친 것도 이 책임분담을 완수하기 위한 목적에서 그랬던 것이 틀림없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게 되는 것입니다. 혹은 베드로, 야고보, 요한을 중심한 열두 제자도 스승을 맞아 스승 앞에 하여야 할 제자로서의 맡겨진 책임분담이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이 책임분담을 완수하지 못함으로 말미암아 역사적인 비운을 자아냈다는 사실을 우리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책임분담을 완수해야 할 세계사적인 책임을 짊어진 미국
이러한 역사적인 한의 구렁텅이가 생겨났기 때문에 이것을 청산하기 위한 재차의 노정이 바로 기독교의 역사인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기독교 역사를 통해서 볼 때, 개인의 책임분담을 통해서 다시 탕감노정을 개척해 왔습니다. 다시 말하면, 개인적인 탕감노정과 개인적인 책임분담은 언제나 문제가 되어 왔었습니다. 개인적인 책임분담을 완수한 터전을 이어받아 가지고 가정적인 책임분담을 완수해야 되고, 종족적인 책임 분담과 민족적이요 국가적이요 세계적인 책임분담을 완수하기 위해 발전해 나온 역사가 지금까지의 기독교 역사인 것을 우리는 알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전세계 기독교의 역사를 전체적으로 책임진 선진국의 입장에 선 미국을 보면, 미국은 자기 나라 2백년 역사를 대표한 미국이 아니라 수천 년의 하나님의 복귀섭리를 대표한 역사 전체를 탕감복귀해서 책임분담을 완수해야 할 세계사적인 책임을 짊어진 미국이라는 것입니다. 이 미국이 책임분담을 완수하지 못하게 될 때는, 이 세계의 말로는 암담한 말로로 귀결되지 않을 수 없다는 사실을 우리들은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나라가 책임 못하게 될 때 대신 책임할 수 있는 어떤 교단이라도 있다면 이 책임분담을 완수할 때까지 그 나라가 망할 수 있는 인연을 기다릴 수 있는 길이 있으되, 하늘을 대표한 어떠한 교단이 그 나라가 책임을 다하지 않으면 망할 수 있는 그런 책임분담을 대신 인계받고 나서지 않는 한 그 나라와 그 교단은 망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것은 마치 이스라엘 나라와 유대교를 앞에 놓은 예수와 마찬가지의 입장입니다. 예수를 중심삼고 이스라엘 민족과 유대교가 완전히 하나되어야 할 입장에서 이스라엘 나라와 유대교가 하나되어 예수를 배반하게 될 때에, 만일에 예수가 이것을 도맡아 가지고 '망할 수 있는 이 운세를 내가 맡겠사오니, 하늘이여, 이 길을 나에게 넘겨 주시옵소서' 하고 연장 시키겠다는 결심을 하지 않았던들 그 이스라엘 나라, 그 유대교는 영영 망해 버렸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망할 수 있는 입장에서 홀로 예수가 유대교와 이스라엘 나라를 대신한 사명을 짊어지는 자리에 있었기 때문에 예수로 말미암아 망할 수 있는 이스라엘 민족이 속죄의 미래를 남길 수 있는 것이요. 망할 수 있는 유대교가 미래의 속죄의 한 때를 남길 수 있었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라와 혹은 교회를 대표해서 책임질 수 있는 한 사람 예수로 말미암아 망할 수 있는 역사적인 운세를 연장시킬 수 있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오늘날 세계적인 종말시대에 있어서 미국이면 미국, 미국을 대표한 교회면 교회가 하늘 앞에 뜻을 대하여 탕감복귀, 혹은 책임분 담을 완수하겠다고 하며 나서야 합니다. 그런 나라와 그 나라를 대표한 교단이 없는 한, 이 미국, 혹은 미국의 교회는 망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입장에 있는 세계를 대표하고 미국을 대표하고, 혹은 자유세계를 대표하고, 미국 안에 있는 교파를 대신해서 미국국민이면 미국국민이, 혹은 어떠한 개인이라도 메시아와 마찬가지로 나라의 운명을 대신해서 자기 생명을 다 바쳐 가지고 '내가 있사오니 나로 말미암아, 나를 희생시켜서라도 이것을 남겨 주옵소서'라고 호소할 수 있는 개인이나 종족이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될 때는, 그 종족과 개인으로 말미암아 미국이, 혹은 미국의 교회가 망할 수 있는 길을 연장시킬 수 있는 가능한 길이 있을 수 있으되, 그것이 없게 될 때는 망하는 세계밖에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탕감복귀 혹은 책임분담 완수라는 과제를 두고 볼 때 이렇게 결론짓지 않을 수 없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망하는 국가의 운세를 연장시킬 수 있는 교회가 돼야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오늘날 대한민국을 중심삼고 보면, 대한민국이 금후에 갈 수 있는 방향은 어떠한 것이냐?대한민국은 그야 말로 혼란된 입장에 있습니다. 대한민국 안에 있는 수많은 종교단체 혹은 수많은 교회는 어떻게 가야 되느냐?여기에서 확정적으로 '이렇게 가야 된다'는 그런 길을 찾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이렇게 해야 된다. 책임분담을 완수해야 되겠다' 해 가지고 그 국민이 결속하고, 그 국민의 사상의 중심이 되는 종교가 결속되어 가지고 책임분담을 완수해 나가는 과정에 있게 될 때는 망할래야 망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책임분담을 완수하지 못하는 자리에 서게 되면 이것은 망하게 마련입니다.
아담 해와가 책임분담을 하지 못함으로 말미암아 에덴에서 쫓겨나 하나님과의 관계를 맺을래야 맺을 수 없는 자리에 떨어진 것과 마찬가지로, 오늘날 대한민국에 있어서, 혹은 대한민국을 대표해 가지고 책임분담을 완수하는 사명을 하겠다고 몸부림치고 지성을 다하는 특정한 교단이나 혹은 특정한 개인들이 있다면, 이들이 포기하지 않는 한, 대한민국이 망할 수 있는 운세, 혹은 대한민국을 대표한 교계가 망할 수 있는 운세의 자리에 섰더라도, 하나님은 이것을 방어하고 연장시킬 수 있는 길을 마련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연장시키기 위한 어떠한 특정한 개인이 있다면, 그 개인은 대한민국이 책임 못다 하여 맞이하여야 할 탕감의 내용을 책임져야 되는 것입니다. 혹은 교단이 책임 못 하여서 망할 수밖에 없는 이 탕감의 내용을 책임져야 되는 것입니다. 이 책임을 감수하고 나설 수 있는 특정한 개인이 있으면, 그 개인이 책임분담을 완수하겠다는 신념을 버리지 않는 한 그 개인으로 말미암아 이것을 연장시킬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우리는 복귀섭리를 미루어 보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관점에서 볼 때 과연 자유세계에 그러한 책임완수를 위해서 책임분담을 할 것을 다짐하고 있는 특정한 교단이 있느냐 할 때, 우리는 없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혹은 대한민국에 그런 특정한 교단이 있느냐? 없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면 세계가 망해야 되고 대한민국이 망해야 될 것이냐?그것은 그럴 수 없습니다. 그럴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에 있어서 마치 망할 수밖에 없는 이스라엘 나라를 앞에 놓고 유대교를 앞에 놓고, 바라보는 예수와 마찬가지의 심정을 지닌 하나님을 위한 아들이 있고 딸이 있다면 어떻게 될 것이냐?그 아들이 그 나라를 붙들고 그 나라와 더불어 죽으려고 하고, 그 나라와 더불어 끝까지 싸우려고 하는 한,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수 있는 아들이 있는 한, 그 아들을 쳐 가지고 그 나라를 망하게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입장에서 탕감복귀해야 할 사명을 앞에 놓고 하늘이 지금까지 섭리역사노정을 연장시켜 나온 것을 우리는 알아야만 되겠습니다. 다시 말하면 탕감복귀 완성하여 책임분담을 완수할 수 있는 그 한 날이 오기를 바라서 한많은 역사시대에서 하나님은 극복의 역사노정을 다짐지어 나왔다는 것을 알아야만 되겠습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오늘날 우리 통일교회는 무엇을 하는 교단이 되어야 되겠느냐?교회를 통합할 수 있는 교단이 되어야 되겠습니다. 교회를 통일할 수 있는 교회가 되어야 되겠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통합시키고 하나 만들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되겠느냐 하는 문제를 두고 볼 때에, 먼저 하나님 앞에 책임분담을 완수할 수 있다는 신념을 갖고 나서야 되겠습니다. 그러하지 않고는 통일교회의 이름을 가진 통일교회로서의 사명을 할 길이 없는 것입니다.'
하늘 앞에 책임을 다하는 자리에 섬과 동시에 대한민국이면 대한민국을 대표해 가지고 오천만 민족이면 오천만 민족을 대신하여 다짐하는 자리에 서야 되겠습니다. 만일에 이렇게 하지 않으면 망한다고, 이렇게 해야만 산다고 전체 앞에 예고, 혹은 통고할 수 있는 무리가 되어야 될 것입니다. '우리는, 혹은 나는 오천만 국민을 위해 있노라, 내가 망하기 전에는 전체가 망할 수 없노라' 할 수 있는 신념을 지닌 한 사람이 문제요. 그러한 사람을 가진 하나의 교회가 문제가 될 것입니다.
그러한 교회만 있다면 아무리 하늘의 버림을 받아 망할 수 있는 자리에 섰다 하더라도 그 교회로 말미암아 망할 수 있는 운세를 연장시킬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복귀섭리의 전통적인 내용임을 우리는 알아야 되겠습니다.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남아진 한스러운 책임분담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오늘 국가 민족을 중심삼은 탕감복귀의 사명을 완결지어서 국가 민족을 대신하여 책임분담을 완수할 수 있는 무리가 진정한 의미에서 있느냐?이것이 문제입니다. 오늘날 통일교회 교인들 중에 이 민족적 책임분담을 완수하기 위하여 나섰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까?그런 사람이 있다면 그는 개인적인 탕감을 거쳐 가지고, 개인적인 책임분담을 완수해야 되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는 가정적인 책임분담을 완수해야 하는 것입니다. 민족적인 책임분담을 완수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고 나서 국가적인 책임분담을 완수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원리가 가르쳐 주는 순차적인 노정이 아니냐?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과연 나 자신이 민족적 책임분담을 완수한 자리에 섰느냐 할 때, 여러분은 '그렇다' 할 수 있는 자신을 가지고 있느냐? 여러분이 원리를 배워서 알다시피 개인의 십자가의 노정, 즉 개인이 탕감복귀 완성하기 위해서는 제물이 되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 제물 되는 것이 7년노정이라면, 그 7년노정에 승리한 자리, 즉 책임분담을 완수한 자리에 서서 또다시 가정의 책임분담을 완수하기 위해서 희생의 길을 가야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개인 책임분담 완수보다 배가의 힘이 드는 것입니다.
내 하나의 몸과 마음을 가지고도 마음대로 할 수 없는데, 하나의 남자 하나의 여자가 자녀를 거느린 하나의 가정을 중심삼고 책임분담을 완수한다는 것은 간단한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의 개인이 책임분담을 완수하는 것보다 몇십 배 몇백 배 힘든 것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개인이 책임분담 완수한 터전 위에 가정 책임분담을 추구하고, 가정 책임분담을 완수한 터전 위에 씨족 책임분담을, 씨족 책임분담을 완수한 터전 위에 민족 책임분담을, 민족 책임분담을 완수한 터전 위에 국가 책임분담을 완수해야 할 것이 원리가 가르쳐 주는 전진적인 발전 노정이라고 할진대는 과연 이 문제가 얼마나 어려우냐?얼마나 어려우냐 이것입니다. 그런 것을 직시한 예수님은 그것을 너무나 잘 알기 때문에 살고자 하는 자는 죽는다고 했습니다. 이것을 탕감복귀하기 위해서는 당초에 죽는 것을 각오하지 않고는 갈 수 없다 하는 것을 말씀드리지 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몸과 마음의 싸우는 그 삼팔선을 타개하기 위해서 지금까지 역사가 동원되었지만 그것을 해결한 그 누가 있었느냐?없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나는 인간으로서 승리했노라'고 만천하 앞에 제시한 사람이 있었느냐?없는 것입니다. 인간으로 태어났지만 절망으로 태어났고 절망으로 살고 절망으로 죽어가는 것이 인생인데, '이 절망의 함정을 초월해서 나만은 승리하겠다'고 할 수 있는 자리에서 '나는 하늘이 제시한 책임분담의 요인을 전부 다 탕감해 버렸다'고 할 수 있는 사람을 만나 봤느냐? 일시에는 그럴 수 있어요. 일시에는.
석가 같은 분은 '천상천하 유아독존'이라는 말을 했습니다. 홀로 천상천하에 제일 높다고 할 수 있는 그 자리라는 것은 일시 한 때에는 있을 수 있지만 장구하게도 있을 수 있느냐?그것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왜 그러냐?개인이 책임분담을 완수했더라도 가정적 탕감복귀노정을 중심삼은 책임완수 노정에 떨어져 내려가게 마련이기 때문입니다. 자기 개인을 붙들고는 근근히 끌고 갈 수 있는 길이 있을는지 모르지만, 가정적 책임완수 노정이 인생이 가야 할 길 앞에는 완전히 막혀 있기 때문에, 이것을 앞에 놓고는 아무리 유아독존이라고 말했던 석가도 떨어져 내려가야 되는 것입니다.
가정이 책임완수한 그 기준에 섰다면 그 기준을 중심삼아 가지고 거기서 승리의 권한을 자랑할 수 있을는지 모르지만, 그 가정이 책임분담을 완수했더라도 그 가정은 또 내려가야 되는 것입니다. 종족을 구하기 위해서는 높은 권위의 자리를 주장할 수 없습니다. 내려가야 됩니다. 희생 해야 되는 것입니다. 종족이 책임분담을 완수했더라도 그 종족은 민족을 대해서 또 내려가야 되는 것입니다. 민족이 책임분담을 완수했다면 거기에서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세계를 향하여 또 내려가야 되는 것이 아니냐, 세계는 천주를 향하여, 천주는 하나님을 향하여, 하나님의 사랑을 향하여 굴복해 가지고 희생의 대가를 완전히 치르지 않고는 책임분담 완수라는 것은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원리가 확실히 가르쳐 주는 노정인 것을 알게 될 때, 책임분담의 노정을 가야한다는 말은 그야말로 인생길에 남겨진 한스러운 길이 아닐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한많은 책임분담이라는 것입니다. 역사시대에 있어서 아담 해와가 망한 것도 책임분담 때문이요. 가인과 아벨이 망한 것도 책임분담 때문이요. 노아 가정이 또다시 꺼꾸러진 것도 책임분담 때문이요. 아브라함이 수난길을 벗어나지 못한 것도 책임분담 때문이요. 모세가 광야에서 쓰러지게 된 것도 책임분담 때문이요. 이스라엘 민족이 가나안 복지에 들어가서 이상적인 메시아를 맞을 수 있는 성전 건축을 못한 것도 책임분담 때문입니다. 세례 요한도 역시 그랬고, 이스라엘 민족도 역시 그랬고, 유대교도 역시 그랬습니다. 예수님이 한을 남긴 것도 결국은 책임분담 때문이 아니었더냐?하나님이 한을 품고 오는 것도 책임분담을 완수하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냐?이렇게 볼 때 한많은 책임분담이라는 것입니다.
오늘날 통일교회 교인들이 탕감복귀라는 말을 하고 있지만 탕감복귀를 해서는 뭘하느냐?탕감복귀해 가지고는 타락 전 아담 해와의 자리까지밖에 넘어갈 수 없습니다. 탕감복귀로 수습할 수 있는 그 한계점을 타락전 아담 해와 그 이상의 자리는 못 올라간다 이거예요. 여러분이 그걸 알아야 돼요. 결국 탕감복귀라는 것은 타락이 있었기 때문에 필요한 것이지, 타락이 없었으면 탕감복귀라는 말이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탕감해가지고 복귀한다는 그 복귀의 한계점이 어디냐?타락하지 않은 아담 해와의 자리, 그 이상은 못 가는 것입니다.
책임분담이라는 말은 타락하기 전부터 있는 것이다
그러면 탕감복귀된 개인은 어떻게 되느냐?여기에서 책임분담이 남아지는 것입니다. 그래야 될 것 아니예요?그래야 타락하지 않은 아담이 5퍼센트의 사명을 완수할 것이 아니냐?그렇기 때문에 탕감복귀라는 것은, 복귀는 돌아가는 것인데, 탕감해서 다시 돌아가는 것은 타락 전 아담 해와의 입장을 찾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탕감복귀된 후에는 어떻게 해야 되느냐?5퍼센트의 책임, 미완성한 아담으로서의 완성단계를 넘어가 하나님 앞에 효와 충의 도리를 세워야 할 책임분담이 남아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소생, 장성, 완성, 이 원리결과주관권내에 있어서는 어디까지나 최후까지 책임분담이 추구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개인으로, 가정으로, 종족, 민족, 국가, 세계 전체가 또 타락의 인연을 가진 수많은 피조세계가 이 책임분담의 과정을 벗어날 수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이걸 알아야 됩니다.
오늘날 통일교회 교인들 앞에 이 사상이 희박해졌기 때문에, 이 사상이 확실하지 않기 때문에 낙오자가 되고, 지치고 주저하게 됩니다. 이런 무리가 점점 많아진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인생의 필연의 길입니다. 백번 죽어서라도 또다시 부활하여 가지 않으면 안 될 길입니다. 이것을 아는 한 내가 한번 태어난 일생을 깨끗이 바쳐 가지고 탕감복귀의 한계선을 넘어야 되겠습니다.
아담 해와는 개인이로되 개인이 아닌 것입니다. 이들은 인류의 시조가 되기 때문에 우리가 탕감복귀 완수하기 위해서는 개인만 그 자리에 가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내 개인만 가면 나에게 달린 타락한 세계가 남아있게 됩니다. 이래 가지고는 탕감복귀 완수한 아담의 자리가 못 되는 것입니다.
아담이 탕감복귀했으면 그 꽁무니에는 세계라든가 혹은 나라라든가 혹은 가정이라든가 혹은 그 무엇이 달려 있지 않다 이겁니다. 그러나 우리 타락한 인간에게 있어서는 내가 개인적인 탕감복귀를 완수했다 하더라도 내 꽁무니에는 그 나라 민족이 달려 있고, 세계가 달려 있다 이거예요. 그 뿐만 아니라 영계가 달려 있고 낙원세계가 달려 있더라 이거예요.
이걸 생각하게 될 때, 책임분담 완수, 탕감복귀 완수는 영원히 불가능에 가까운 길을 남기고 있기 때문에 능력이 많으신 하나님도 이 책임분담이라는 조건에 걸려서 지금까지 복귀의 완성을 하지 못한 것이지, 이것만 없었더라면 일시에 다 해 버렸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개인으로 탕감복귀를 완수했다고 해서 끝난 것이 아닙니다. 아담의 본연의 자리에 돌아간 그러한 가치의 내용을 지녀야 되는 것입니다. 왜?아담은 조상이기 때문에…. 개인 탕감복귀 완성은 가정 탕감복귀 완성의 출발인 동시에 국가 세계 탕감복귀 완성의 기반이 되는 것입니다. 안 그래요?그러나 타락한 우리에게 있어서는 아무리 개인 탕감복귀를 완수했다 하더라도 세계가 꽁무니에 달려있다구요. 천주가 꽁무니에 달려 있다구요. 사탄이 얼마든지 내 뒤를 통하여 왕래할 수 있는 길이 훤히 트여 있다는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개인으로만 갈 것이 아니라 이걸 수습해 가지고 꺼꾸로 올라가야 되겠다는 것입니다. 가정을 수습하자, 민족을 수습하자, 국가를 수습하자, 세계를 수습하자, 그래 가지고 사탄이 참소하는 길을 막아 놓고 나서야만 타락하지 않은 아담 해와의 기준을 탕감복귀할 수 있는 것이 아니냐, 그렇게 돌아서 나왔다 하더하도 그 자리에서 해야 할 것은, 그 전체가 하나되어 가지고 복귀의 자리에 선 그 세계에 또 다시 남아지는 것은 뭐냐 하면 책임분담입니다. 책임분담이 남아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책임분담이라는 말은 타락하기 전부터 있는 것입니다. 안 그래요? 타락하고 생겨난 말이 아니라구요. 이러한 엄청난 내용이 복귀역사라는 것을 여러분이 똑똑히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래서 한많은 복귀역사, 이러한 길을 가야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우리 통일교회에서 말하기를, 개인복귀, 가정복귀, 국가복귀, 세계복귀, 천주복귀 완성하자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개인으로부터 가정으로, 가정에서 종족으로, 종족에서 민족으로 찾아 올라가는데, 이렇게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점점점점 어렵다는 것입니다. 개인이 가정을 수습하고 나면 더 큰 무대로 올라가야 된다는 것입니다.
끝날에는 반드시 전체를 탕감할 수 있는 한 사람이 나와야 한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기독교 역사는 지금까지 영육을 중심삼고 꺼꾸로 올라가는 놀음을 했다는 거예요. 꺼꾸로 올라가기 때문에 세계 전부가 원수라는 거예요. 전부 다 내리친다는 거예요. 네 맘대로 올라오지 마라 이거예요. 쳐도 쳐도 맞지 않으니까, 상대가 되지 않으면 쳤던 것은 마냥 떨어지는 것입니다. 만일 여기서 맞지 않으려고 반항하게 되면 반작용으로 여기로 남아지는 것입니다. 이런 역사를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종교인들은 지금까지 맞으면서 희생해 나오는 것입니다. 거기에 반항을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반항하는 날에는 남아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내려가면 내려갈수록 이것은 올라갑니다. 그렇지 않아요? 그래서 지금까지는 영적으로 싸워 올라왔습니다. 이렇게 된 것이 기독교 역사입니다. 영적인 탕감노정을 세계형으로 벌여 놓은 것입니다. 수백 대의 수많은 사람들이 올라가 희생되어 가지고 연결시켜 놓았습니다. 횡적으로 세계형으로 벌여 놓았다 이거예요. 세계형으로 벌여 놓은 것을 횡적으로 탕감복귀하려는 것입니다. 통일교회 원리가 그렇지 않아요?종적으로 올라간 것을 횡적으로 탕감시키자는 거예요.
개인, 가정, 민족, 국가, 세계로 올라간 것을 왜 이렇게 전개시키는 것이냐?이거 왜 이렇게 해야 되느냐?이러한 길이 없으면 개인으로서 어느 역사시대의 세계를 대표한 탕감복귀라는 말은 절대 성립이 안 되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담은 개인이되 세계적 대표요. 국가적 대표요. 가정적 대표요. 개인적 대표라는 것입니다. 그런 탕감복귀의 본연의 원칙을 인간 세계의 그 누가 세계를 한 무대에 품고 한꺼번에 연결시켰느냐?요 개인은 가정을 대표하고 민족을 대표하고 국가를 대표하고 세계를 대표하고 천주를 대표한 개인입니다.
그 한 사람은 여기 있지만 (칠판 가리키시며) 여기에서도 환영받고, 여기에서도 환영받고, 여기에서도 환영받고, 여기에서도 환영받고, 여기에서도 환영받습니다. 여기에 있지만 여기의 대표요. 여기의 대표요. 여기의 대표요. 여기의 대표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탕감복귀의 역사적인 과정을 통하여 바라보게 될 때, 끝날에는 반드시 전체를 탕감할 수 있는 한 사람이 나오지 않으면 안 됩니다. 타락의 인연을 갖지 않은 한 사람이 나와야 됩니다. 가정을 대표하고, 국가를 대표하고, 세계를 대표하고, 천주를 대표하고, 하나님의 아들의 심정을 대표해서 나타나기에 부족함이 없는 한 사람이 나와야 되는 것입니다. 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저끄러진 역사이기 때문입니다.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보다 가치적인 기준을 결정할 수 있는 끝날이 되지 않고는, 우리 인류의 소망의 세계, 이상적인 세계는 나타나지 않습니다. 이것이 이론적인 결과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러한 사명을 가지고 오시는 그분은 누구냐 하면 재림주라는 분입니다. 만일에 그 한 분이 오시어 이것을 연결시켜 놓으면 이 전체는 일시에 개인이자-개인은 어디에나 통하는 거예요. 개인은 세계의 기본도 되는 것입니다. 또 가정은 어디나 통하는 것입니다. 종족의 기본도 되고, 국가의 기본도 되고, 세계의 기본도 되고, 하늘땅의 기본도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개인과 가정을 위주로 하고 싸워 나온 것입니다.
탕감복귀의 과정을 거치지 않고는 책임분담을 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기독교의 사상은 개인완성 터전 위에서 가정을 소망하고 나오는 것입니다. 신랑 신부의 이념이 바로 그것입니다. 이렇게 되는 거라구요. 그 신랑 신부는 어떠한 사람들이냐?내 아들딸만을 사랑하는 신랑 신부가 아닙니다. 자기만을 위하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세계를 대표 하고, 국가를 대표하고, 민족을 대표하고, 종족을 대표하고, 가정을 대표하고 나선 공적인 입장에 선 신랑이요 신부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오늘날 기독교의 신앙이 얼마나 원칙에 어긋난 자리에 섰느냐 하는 것을 자각해야 된다구요. 내가 믿고 천당 가겠다고? 그렇게 돼 있어요?천당은 나중이라구요. 탕감복귀 완수해 가지고 책임분담 완수하고 난 후에 천당이지, 먼저 해야 할 것이 책임분담이라구요. 먼저 해야 할 것이 탕감복귀라구요. 그러고 난 후에 천당이지, '아, 책임분담은 나하고 관계없고 탕감복귀는 나하고 관계가 없어, 그것은 다 이방 사람 앞에….' 그렇다면 하나님이 6천년간 수고할 필요도 없다는 거예요. 여러분이 그걸 알아야 됩니다. 오늘날 통일교회 식구는 이걸 알아야 됩니다.
오늘날 통일교인 각자는 세계적인 자각을 하라고 가르쳐 왔습니다. 천주적인 자각을 하라고 가르쳐 왔습니다. 내 속에 국가가 있느냐?그 국가는 망할 수 있는 국가가 아녜요. 흥할 수 있는 국가관을 가져야 됩니다. 그가 생각하는 이상세계라는 것은 망할 수 있는 세계가 아니라, 망하지 않는, 책임분담을 완성한, 하늘의 영광을 당당히 대신할 수 있는 세계 입니다. 그런 세계관, 사상을 통한 세계관을 추구하라고 가르쳐 왔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과연 여러분들이 탕감복귀의 과정을 거치지 않고는 책임분담을 할 수 있다는 생각도 할 수 있다? 「없다」 없습니다. 이걸 확실히 알아야 되겠다구요.
탕감복귀의 소원의 한계점이 어디냐? 어디예요? 개인을 중심삼고 복귀하는 거예요? 개인복귀예요? 개인복귀 했더라도 가정을 못 넘으면 망하는 거라구요. 그것은 이스라엘 역사가 여실히 증명하는 사실입니다. 120년 동안 수고한 노아도 일시에 걸려 넘어갔어요. 안 넘어갔어요?걸려 넘어갔다구요. 아브라함도 일생 동안 수난의 국경을 넘으면서 집시의 조상이 된 입장에 섰지만, 한번 잘못함으로 말미암아 걸려 넘어갔어요. 안 넘어갔어요? 넘어갔다구요. 모세가 반석을 잘못 침으로 말미암아 걸려 넘어갔어요. 안 넘어갔어요? 그걸 탕감복귀하기 위해서는…. 세례 요한도 마찬가지요. 예수님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것은 알지 못해도 걸리는 것이요. 알고도 행치 못하면?걸려요. 안 걸려요? 「걸려요」 알고 행치 못해도 걸리는 것이요. 알지 못하고 행치 못해도 걸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알고 행치 못해서 걸리는 것보다도 모르고 행치 못해서 걸리는 것이 못하다? 「낫다」 그건 아는구만, 그러니 '차라리 원리를 몰랐으면 좋을 뻔했다' 는 거예요. 행치 못할 때는,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을 만난 후에는 죽을 각오를 해야 된다는 거라구요. 그래서 성경에 '죽고자 하는 자는 산다'고 했습니다. '나를 따르려면 자기를 이기고, 십자가를 짊어지고 나를 따르지 않으면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자기를 이기라는 것이 뭐예요?뭐 밥 먹는 것을 이기라는 거예요?고통의 길을 이기라는 거예요?아닙니다. 아니예요. 생명을 이기고 나서라는 거예요. 알겠어요?타락한 세계에서 이어받은 생명을 이기고 나서라는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이 생명을 죽이는 자리에 들어가는 사람은 새로운 생명의 출발을 볼 수 있는 거라구요. 그거라구요. 그거라구, 그러지않고는 가지 못한다구요. 그런 진정한 의미의 내용에 입각한 참다운 신앙자를 하나님이 지금까지 만나지 못했기 때문에 수천 년의 한스러운 역사를 연장시켜 나왔던 것이 아니냐?
이런 관점에서 볼 때, 4천년 역사를 중심삼고 오직 예수님 한 분만이 그러한 사상을 갖고, 그러한 심정과 일치된 사상을 가지고 실천하면서 당당코 자신있게 갔기 때문에, 여기서부터 영적이나마 하나님의 세계를 수습할 수 있는 개인의 길, 가정의 길, 국가의 길, 세계의 길을 맞이하였던 것이 아니냐, 그것이 영육을 중심삼고 완전히 완결짓지 못했기 때문에 재림이라는 내용을 중심삼고 재차 전개해 가지고 이것을 탕감복귀하고 책임분담을 하라고 세계 완성을 표준해서 보낸 것이 재림주님입니다. 이것이 사명이 아니겠느냐?
이런 관점에서 볼 때, 한많은 책임분담의 노정을…. 통일교회를 믿는 여러분들이 '아! 책임분담을 완수하겠다. 우리 통일교회에서 말하는 것처럼, '5퍼센트의 책임완성이다' 하는 생각을 하루에 몇 번이나 해요?5퍼센트의 책임 완수하겠다 하는 생각을 하기 전에 그것을 하려면 반드시 탕감복귀를 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탕감복귀하는 데는 어떻게 해야 되느냐?제물이 필요합니다. 이것은 문선생이 지어낸 말이 아니라 역사적인 내용이 그렇게 돼 있으니 틀림없는 사실이 아니냐는 거예요?
자, 이 나라가 망하게 될 때, 망하는 나라를 구하기 위해서 나라를 위하여 희생하는 무리가 없어 가지고는 망하는 나라가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길이 생겨날 수 있어요?절대 없다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망하는 인간이 다시 희생되기 위해서는, 탕감복귀하기 위해서는 제물의 과정을 기어이 거쳐 나가야 된다는 거예요. 눈물을 흘리고 땀을 흘리고 피를 흘리는 그런 역사가 없어 가지고는 되짚어 나올 수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자연법도라구요. 물에 빠진 자가 나오려면 빠질 때의 힘 이상의 힘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렇지요?그러려면 누군가 대신 죽는 이상의 힘을 투입 하지 않는 한 살릴 수 있는 길은 없는 것입니다.
탕감복귀는 정성이 있어야
오늘날 통일교회 교인으로서 탕감복귀라는 말을 아는 사람은 손들어 봐요. 하나도 없나?툭하면 탕감복귀예요?그런 시시한 탕감복귀가 아닙니다. 그저 허허 웃으면서 하는 탕감복귀가 아니라구요. 눈을 부릅뜨고 생명을 가름하는 여기서 죽느냐 사느냐, 칼을 받느냐 안 받느냐 하는 입장에서의 탕감복귀입니다.
보라구요. 아브라함을 중심삼고 보더라도 이삭이 칼을 받는 자리에서 탕감복귀의 제물이 되었지요? 전부 그랬다구요. 양도 제물 되기 위해서는 칼을 받는 자리에서 탕감복귀했지요? 그렇지요?
예수님도 인류를 대신해서 속죄의 탕감복귀의 역사를 남기려니 십자가의 피흘리는 자리에서…. 그렇기 때문에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아바 아버지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라고 한 그게 뭐예요? 품는 거야, 버리는 거야? 「버리는 것입니다」 버리는 데는 어디에서 버리느냐? 뭐, 길가다가 버리는 것이 아니라구요. 피 흘리는 자리에서 버리는 거예요. 원수도 그 이상의 원수가 없는 거예요. 아무리 가깝던 친구라도 죽을 자리에서 차 버리고 도망을 가게 되면 그것이 친구요. 원수요? 그러면 당장에 원수가 되는 거라구요.
하나님은 그런 자리에서 예수님을 버렸습니다. 죽을 자리에서 버렸으니 하나님과 예수님은 원수지요? 원수 중에서도 용서하지 못할 원수인데도 불구하고 거기에서 부활이 생겨났습니다. 그 원수를 원수시 않고, 죽을 자리에서 버리는 데도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하며 그것을 붙들었습니다. 그것을 붙듦으로 말미암아, 세상 같으면 원수로서 끝날 것인데 불구하고 붙들었기 때문에 거기에서 원수가 아닌 새로운 차원의 길이 개척된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됩니다.
오늘날 통일교회를 믿는 사람들 중에는 조금만 어려우면 교회 불평하고, 협회장이 어떻고, 누가 어떻고 어떻고…. 그렇게 입을 벌려 가지고 지껄이는 이런 아가리를 가진 사람은 사람이 아니라구요. 통일교회 교인도 아니라구요. 그런 것들은 통일교회 교인도 못 된다구요. 탕감복귀를 하는데 남을 비방해 가지고 탕감복귀의 길이 있어요?남을 잡아 죽여 가지고 탕감복귀의 길이 있어요? 없다는 거라구요. 내가 하나에서 백까지 희생해야….그래서 어린양, 어린양, … 예수님은 어린양을 상징합니다. 양은 털을 깎더라도 가만히 있다구요. 딴 짐승 잡아다가 털 깎아 봐요. 가만히 있나, 그놈은 털 깎더라도 가만히 있다는 거예요. 그 다음에는 목을 자르더라도 '음매' 하고 죽는다 이거예요. 내가 보지는 못했으니 확실히는 모르겠어요. 뭐, 다리야 버둥거리겠지요. 그렇지만 '날 왜 잡아!'하며 물겠다고 덤벼들지는 않는다는 거예요. 동물 중에 순하기로 대표적인 동물이기 때문에 예수님을 어린양으로 상징한 것입니다. 알겠어요?
탕감복귀는 제물 없이도 된다? 「안 된다」 왜 안 돼? 왜? 죄를 지었기때문에, 무슨 죄?본연의 아버지 어머니를 잡아먹은 죄다. 그런 죄를 지었다는 거예요. 알겠어요? 그 다음에는 본연의 아버지 어머니의 살림살이할 수 있는 그 집을 파탄시킨 죄다. 사탄이 그랬다구요. 본연의 인류의 참다운 조상의 살림살이를 전부 다 근본적으로 파탄시킨 죄다. 그 다음에는 그 후손, 그 나라를 파탄시킨, 본연의 나라를 망하게 만든 죄다. 그 다음에는 본연의 세계를 파탄시킨 죄다. 그뿐만이 아니라 하나님까지도 고생하게 만든 건 둘째치고 하나님의 사랑까지도 전부 다 유린해 버린 죄다. 그게 누구라구요? 타락한 천사장입니다. 그러면 우리 인간은 타락한 천사장의 후손입니다.
늑대의 후손은 무엇이 된다구요? 「늑대 새끼요」 새끼 늑대가 크면 늑대가 되지요. 새끼 늑대나 늑대나 마찬가지라구요. 그러니 자, 이놈들을 잡아다가 제사를 드리려면 어떻게 하여야 되느냐? 나라를 대신해서 제사를 드리려면 나라를 전부 다 잡아 죽여야 됩니다. 세계를 대신해서 탕감 하려면 세계를 전부 다 잡아죽여야 됩니다. 전부 다 잡아죽이면 어떻게 되느냐? 사람 종자가 없어집니다. 없어지면 어떻게 되느냐? 뜻이고 뭐고 못 이룹니다. 그렇기 때문에 할수없이 탕감조건이라는 것이 필요한 것입니다. 조건물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 조건물을 만드는 데 있어서는, 그냥, '아, 하나님! 이것을 오늘의 탕감조건으로 드립니다' 해서는 안 된다구요. 조건물을 드릴 때에는 조건은 작지만 대등한 가치 이상이 되어야만 조건이 되지 그렇지 않으면 사탄이 참소합니다. 제물도 함부로 드리게 되면 지고지성(至高至聖) 하신 하나님이 받을 수 없습니다. 그러니 제물을 드리는 사람의 생명보다 더 정성을 들여야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제물은….
여러분, 세상에도 그렇잖아요. 서낭당에 제사할 때에도 소를 사러 간다면 목욕재계하고 말이예요. 여러분은 그런 것 모르겠지만…. 그 소는 무슨 소? 황소보다는 암소를, 암소도 새끼 낳지 않은 암소, 그것도 흠이 있으면 안 되는 거라구요. 또 아무리 모양이 좋더라도 설사한 소는 안 되는 거라구요. 암만 잘생겼다 하더라도 병이 있어서는 안 된다 이것입니다. 소 사러 간다 하게 되면 동네 방네 전체의 사람이 다 기억이라도 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래야 정성이 남아진다는 것입니다.
한국 민족이 옛날 서낭당에서 제사하는 풍습이 옛날 이스라엘 민족이 하나님 앞에 제사 드리는 것과 딱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이래 가지고 소를 잡아 가지고 제사를 드릴 때에는 전동네가 하나되어서 정성을 모아야…. 사탄한테 제사를 바치는데도…. 탕감법이 그렇게 돼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조건이라는 것은 그냥 그대로 함부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알겠어요? 노아가 방주를 조건물로 세우기 위해 120년 동안 정성을 들인 것입니다. 그걸 알아야 됩니다. 아브라함도 3대 제물을 드리기 위해서는 유랑의 집시 생활을 수십 년 동안 했습니다. 나그네 생활 방랑객의 생활을 한 것입니다. 모세가 이스라엘 민족을 대표해서 제물되는 노정을 실천해 나가기 위해서는 40년 동안 애급 궁중에서 생활을 했으며, 그것이 실패함으로 말미암아 미디안 광야에서 또 40년 동안 정성을 들이면서 오로지 민족만을 생각하고 민족을 위해서 밤이나 낮이나 이스라엘 민족을 대표한 자리에서 제물된 입장에서 살았습니다. 그러고 나서야 조건물로서 등장하게 된 것입니다. 그렇게 돼 있다구요.
생명을 바치는 조건물이 제일 귀한 것
여러분이 통일교회에 들어와서 탕감복귀라는 말을 배웠습니다. 탕감복귀하기 위해서는 제물적인 조건이 필요한데, 제물을 드리기 위해서 얼마나 정성들였어요? 정성들인 생각 나요? 생각 나? 엉터리들만 모여 있다는 거라구요. 생각대로 하면 얼마나 좋겠어요?생각대로 한다고 하나님이 받아 줄 수 있나 이거예요. 어림도 없다는 거라구요.
그렇기 때문에 조건물은 내 생명 대신입니다. 나 대신 죽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 조건물과는 완전히 하나 되어야 되고 완전히 사랑해야 됩니다. 사랑의 대상으로 대해 가지고 그것이 죽음을 당할 때, 같이 아픔을 느껴 가지고 속으로 울면서 제사를 드려야 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자식을 잡아 제사 드리던 것과 마찬가지로, 심정적으로 끊을래야 끊을 수 없는 인연을 갖춘 자리에서 끊어야 되는 것입니다. 이런 자리에서 제물을 바쳐야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기에게 있어서 제일 귀한 것을 제물로 바쳐야 되는 것입니다. 알겠어요. 무슨 말인지? 물질을 바치게 될 때에는 여러분이 쓰고 남은 찌꺼기를 바치면 벌을 받습니다. 그런 건 차라리 안 바치는 것이 낫습니다.
여러분이 십일조를 할 때, 정성들여 십일조만 해보라구요. 절대 굶어죽지 않는다구요. 그 후손이 물질에 대한 궁핍을 당하지 않는다 하는 것이 원칙이라구요. 십일조 드리기 위해서는 정성을 들여라, 그렇게 돼 있다구요. 그것이 신앙의 본질입니다. 적당히 하면 되겠거니…. 그것은 통하지 않는다구요. 제물은 내 생명 대신으로 바치는 것입니다. 그러니 제일 귀한 것을 바쳐야 됩니다. 옷을 바칠 땐 자기에게 몇백 가지 옷이 있더라도 그 중에 제일 귀한 것을 바쳐야 됩니다. 여러분은 그걸 알아야합니다.
사람에게 제일 귀한 것이 무엇이냐? 생명입니다. 이런 거예요. 알겠어요?그러니 내 생명을 바치는 것입니다. 이것이 탕감복귀의 제물을 통해서 죄를 씻는 놀음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런 관점에서 죽고자 하는 자는 용서를 받는다고 했습니다. 제물을 드리는 데 있어서 자기를 완전히 희생시켜서 드리는 자는 완전히 구원받을 수 없다? 「있다」 그렇기 때문에 생명을 나 때문에 함부로 희생시켜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나라를 대표하고 세계를 대표한 자리에서 하나님 앞에 바쳐져야만 세계, 혹은 하늘을 대표한 자리에서 부활할 수 있는 기준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역사시대에 세계를 대표해 가지고 이런 일을 하러 왔다가 그 일을 행하고 갔기 때문에 예수님이 죽은 그 터전 밑에서부터 세계가 부활되어 나오는 것입니다. 이래서 외적으로나마 기독교의 문화권이 세계를 지배할 수 있는 역사시대로 발전하게 된 것입니다. 맞지요?그렇게 돼 있지요?왜 희생해야 되느냐 하는 문제가 그거라구요.
탕감복귀는 그냥 되지 않습니다. 알겠어요? 탕감복귀 하려면 (판서하시면서) 무엇이 절대로 필요하다구요? 제물이 절대 필요합니다. 여러분이 이것을 확실히 알아야 되겠습니다. 통일교회 영신들, 어쩌다가 그렇게 되었는지 아는 것 같으면서도 모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탕감복귀는 주먹구구식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구요. 탕감복귀는 그냥 되는 것이 아닙니다. 제물을 통해서 되는 것입니다.
제물을 드리는 데는 그냥 드릴 수 없는 것입니다. 이 제물과 나는 반드시 하나되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 제물은 조건물입니다. 탕감을 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제물을 드려야 되고, 제물은 조건물이 되고, 조건물을 드리려면 아담 대신자가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불효하였던 아담 대신 나는 효도하는 아담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망하게 한 남편이 되었기 때문에 망하게 하는 남편이 아니라 구해 주는 남편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망하게 만든 오빠가 되었다면 나는 망하게 만드는 오빠가 안 돼야 하는 것입니다. 여자측에서도 마찬가지라구요. 여자가 남편을 망하게 만들었기 때문에 남편을 망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흥하게 하는 여자가 돼야 하는 것입니다. 누이 동생의 입장에서 오빠를 망하게 했으니 오빠를 흥하게 만들어야 되고, 하나님 아버지를 망하게 만들었으니 하나님 아버지를 흥하게 만들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거라구요.
타락으로 말미암아 쓸데없는, 타락된 후손인 아들딸을 낳아 버렸으니, 그런 아들딸을 절대 안 낳고 하나님이 기뻐하고, 만민이 기뻐할 수 있는 아들딸을 다시 낳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려면 죽음을 각오해야 되는 것입니다.
자기 생명을 끊어 버리더라도 메시아는 남겨야 된다
탕감복귀가 되었다면 어느 자리까지 가요? 「장성기 완성급요」 장성기 완성급에 올라서는 것입니다. 원리로 말하면 소생, 장성, 완성이 있지요? 타락은 여기에서 했기 때문에 탕감복귀 하면 요 자리에 가는 것입니다.
탕감복귀하는 그 자리는 혼자만 가느냐? 혼자만이 아니라구요. 세계적 사명을 짊어진 자가 와야 합니다. 그 대표자로 오시는 분이 메시아라는 분입니다. 그 분은 마음대로 이 자리를 마음대로 넘나들어 가지고 책임분담을 완수할 수 있는 내용까지 다 알고 오시는 분입니다. 아담은 모르고 타락을 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분은 어떻게 가야 되는지를 알고 온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다른 것입니다.
요 자리까지 올라가기 위해서는 제물이 필요합니다. 제물은 어떻게 어떻게 거쳐야 되느냐? 혼자 절대로 뛸 수 없다구요.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개인적인 제물시대가 있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가정을 가졌으면 부부 둘이 합해 가지고 제물을 드려야 되는 것입니다. 부부끼리 탕감복귀 하기 위해서는 제물을 드려야 되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아들딸이 제물을 드려야 되는 겁니다. 이래 가지고 완전히 하나되어 가지고 하나님이, '아, 내 가정이다' 할 수 있는 가정이 되어야만, 그 가정을 내세워 '이는 내 가정인 동시에 세계의 중심 가정이다' 하는 공인을 받을 수 있고 그래야만 본연의 아담 가정으로서 여기에 올라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 길이 복귀의 길이기 때문에 그런 길을 다 갔다 할 수 있는 사람이 세상에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망할 수밖에 없는 인간이 되어진 것입니다. 이걸 망하지 않게 하려니 이러한 내용을 갖추어 가지고 다 갈 수 있게 하는 책임자로 오시는 분이 메시아라는 분입니다. 그 메시아와 접붙이면 나는 따라갈 수 있는 것입니다. 이거라구요. 통일교회로 말하면 믿음의 기대를 세워 가지고 실체기대를 완성하게 되면 메시아를 위한 기대를 이루게 된다는 말이 있지요?그것이 그 말이라구요.
메시아를 위한 기대는 무엇이냐? 메시아하고 완전히 하나되는 기대를 말하는 것입니다. 왜 메시아와 하나되는 것이 필요하냐? 내 개인탕감복귀, 가정탕감복귀, 종족탕감복귀, 민족탕감복귀, 국가탕감복귀, 세계탕감 복귀, 천주탕감복귀, 하나님의 심정탕감복귀까지 인간은 일생 동안 갈 수 없겠기 때문에 이런 역사적인 승리의 모든 내용을 총 수습해 가지고 하나의 결실체로서 대표로 나타난 것이 메시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메시아에게만 달라붙게 되면 나는 개인완성한 노력 가지고 천주완성한 자리에 설 수 있다. 없다? 「있다」 있다는 거예요. 그래서 메시아는 절대 필요하다. 자기 생명을 끊어 버리더라도 메시아는 남겨야 된다 이거예요. 이것을 열두 제자가 해야 할 것인데도 불구하고 그걸 못 했기 때문에 오늘날 타락의 역사가 다시 연장되어 내려온 것입니다. 이 말은 선생님의 말이 아니라구요. 문선생이 꾸며 가지고 얘기하는 말이 아니라 그렇게 되어 있다는 거라구요.
사위기대를 완성하려면
자 여러분, 탕감복귀라는 말을 알았지요? 「예」 탕감복귀의 내용을 알았어요. 몰랐어요?탕감복귀를 하려면 제물을 드려야 돼요. 제물을 드리려면 조건물이 필요합니다. 조건물을 바쳐 가지고 제물을 드리려면 아담 대신자가 있어야 됩니다. 아담 대신 존재, 그건 타락한 아담이 아니라구요. 타락의 한을 넘어서려고 하는 아담이 있어야 됩니다. 그런 사람이 있으면 그 다음에는 기간이 필요합니다. 어떠한 기간이냐? 원리적인 수, 3수 아니면 4수, 7수 아니면 12수의 기간이 필요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7수 아니면 21수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통일교회에는 40일 전도 기간이 있는 것입니다. 7년노정이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잘못되면 삼칠은 이십 일(3×7= 21)로 연장되는 것입니다.
1960년도부터 21년노정이 끝나는 1981년까지는 세계가 전부 다 뒤넘이치는 것입니다. 금년이 13년째로 넘어가는 해입니다. 12수를 넘어가기 때문에 복잡한 역사가 벌어지는 것입니다. 앞으로 21년노정 동안에 세계는 하나님의 탕감복귀역사로 전부 다 떨어져 내려가고 난데없는 패들이 등장할 것입니다. 전부 다 그렇게 내려온다구요.
단, 거기에 남아지는 것은 뭐냐? 7수를 기반으로 해서 남아질 수 있는것, 3수를 수습해서 남아질 수 있는 것, 12수를 수습해서 남아질 수 있는것, 21수를 대표해서 남아질 수 있는 것은 뭐냐 하면 사위기대입니다. 사위기대 가운데는 3수도 있지요. 3단계? 사위기대를 보게 되면 (칠판에 판서하시며) 이걸 갈라 놓은 거라구요. 그렇지요?요걸 합치면 3단계가 되는 것입니다. 3수가 나온다구요. 그렇지요? 「예」 이것을 벌여 놓으면 수가 하나, 둘, 셋, 넷, 다섯, 여섯이 되는 것입니다. 요걸 제하면 전부 다 나오는 것입니다.
사위기대가 되어 가지고 뭘하느냐? 중심을 얻기 위한 것이 아니라구요. 중심을 중심삼고 사위기대가 되지요? 평면이 7수를 맞이함으로 말미암아 입체의 출발을 보는 것입니다. 전부 다 그렇게 돼 있다구요. 이것은 5수도 됩니다. 전체를 보게 되면 말이지, 뭐 오행이라는, 말이 나온다구요. 이것은 4수도 되고 3단계도 됩니다.
또 이 3단계는 뭐냐 하면 7수의 완성수인 21수도 되는 것입니다. 삼칠은 이십 일(3×7=21), 21수도 되는 것입니다. 사위기대를 중심삼고 볼때 이것은 12수도 되는 것입니다. 3대상 목적이라는 것을 여러분이 배웠지요?여기에 하나, 둘, 셋이 합해서 삼사 십이(3×4=12), 12수가 나오는 것입니다. 이것을 상대수로 하면 24절기가 나옵니다. 전부 다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이게 기본수라는 거예요. 거기에 남아질 수 있는 단 하나의 중심기대가 뭐냐? 사위기대입니다. 사위기대 속에는 다 들어가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위기대를 완성한 심정 기반만 갖추게 되면 천지의 모든 주관권의 핵심이 여기에 전부 다 집약되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하나님의 사랑, 부부의 사랑, 자녀의 사랑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것이 가정입니다. 이것이 실현될 수 있는 기반만 되면, 그것을 횡적으로 세계화 시킨 것이 지상천국입니다. 전부 다 거기에서 벌어지는 거라구요.
그러므로 사위기대를 완성하려면 어떻게 되어야 되느냐? 타락의 인연을 벗어난 참다운 남자가 되고 참다운 여자가 되어야 됩니다. 참다운 남자가 되고 참다운 여자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되느냐? 탕감복귀노정을 거쳐야 됩니다. 탕감복귀노정을 거치려면 남자로서 세계 제일 가는 제물을 바쳐야 되고, 여자로서 세계 제일 가는 제물을 바쳐야 됩니다. 세계에서 제일 가는 제물은 무엇이냐? 예수보다 더 나은 제물이다 이거예요. 안 그래요? 예수님은 영육을 중심삼고 영적 제물을 바쳤지만 우리는 영적 제물은 물론이요 육적 제물까지 바쳐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등등의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제물을 바치기 위해서는 그냥 안 되는 것입니다.
제물을 드릴 때는 고비를 끝까지 참고 견디는 자가 구원을 받는다
오늘날 통일교회 교인인 여러분들이 탕감노정을 간다 하게 되면 제물을 바쳐야 할 입장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자신들이 바칠 수 없습니다. '내가 이것을 했다'고 해서 그것이 제물이 아닙니다. 제물의 규약이 있는 것입니다. 그 규약을 통일교회 원리를 통해서 가르쳐 주는 거라구요. 그 다음에 여러분이 지금 제물을 바칠 수 있는 나라 할 때에는 어떻게 되느냐? 선생님 대신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선생님과 접붙인 나뭇가지가 되어 가지고 지방이면 그 한 지방의 분성전의 제사장의 입장에 서는 겁니다. 선생님을 대신한 자리에 서는 것입니다. 대신한 자리에서 선생님이 바치던 전통적 사상을 따라 제물적 조건을 갖추어야 됩니다. 그렇게 해서 기간을 맞추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여러분은 통일교회 문선생을 절대 저버릴 수 없습니다. 통일교회에서 가르쳐 준 탕감복귀의 길을 가려면 통일교회 문선생이 절대 필요합니다. 그것은 내 말이 아니라구요. 그것은 원리가 주제로 삼는 말이다 이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은 선생님을 필요로 하는 것입니다. 죽을 때에도 필요하고, 살 때에도 필요하고…. 난 것도 선생님을 위해서 났다는 것입니다. 통일교회 문선생은 뭐 자기 마음대로 났나?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났다구.
제물을 드리기 위해서는 아담 대신 존재가 필요하지요? 그 존재는 어떤 인물이냐? 승리한 아벨형의 인물입니다. 그 아벨형의 인물이 승리적 입장에 서 가지고 승리적 조건물을 반드시 제물로 드리고야 나는 넘어가는 것입니다.
개인에서 가정으로 넘어가려면 개인적인 제물을 바치고야 넘어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슨 말이냐 하면, 가정을 위해서 희생하는 자가 없어 가지고 가정의 구원의 도리는 절대 없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절대 안 해줍니다.
종족을 구하려면 종족을 위해서 희생하는 가정이 없어 가지고는 안 됩니다. 그래서 통일교회에서 축복받은 가정의 부인들이 아들딸과 남편을 다 버리고 나가서 야단하고 있다구요. 왜 그러는 줄 알아요?가정을 희생시킴으로써 그것을 본으로 삼아 민족과 종족을 구하기 위해서입니다. 이렇게 가정을 희생시키는 운동이 없어 가지고는 탕감복귀 승리의 역사 한국이면 한국의 통일교회 역사가 가운데 있을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통일교회에서는 가정을 파괴해 가지고….
축복을 해준 것은 가정을 이루라고 해준 것인데 가정을 이루게 해 놓고 또 깨뜨려 버리다니 그런 법이 어디 있어요? 무슨 선생님이 그래? 변덕장이라고 볼 수 있겠지만 변덕장이가 아니라구요. 차원높은 개인복귀 승리의 터전을 결실로 맞은 것이 가정이면 그 가정이 종족을 복귀하기 위해서는 맞아야 되는 것입니다. 그 종족권의 통일교회가 민족을 복귀하기 위해서는 맞으면서 희생되는 것입니다. 가정을 희생시켜 민족을 구하려니 끝까지 정성 들여라 이거예요.
예수님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십자가를 앞에 놓고 기도했던 것과 같이 나가 전도하는 전도대원들은 밤을 새워 가면서 '아버지여, 할 수만 있으면 이 잔을 내게서 피하게 하시옵소서. 그러나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시옵소서' 해서 전도를 아무리 해도 전도가 안 된다구요? 안 되어도, '나를 버리시나이까' 하는 입장에 서더라도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시옵소서. 나는 끝까지 정한 길을 가겠나이다' 하며 참고 넘어가야 된다구요. 전도가 안 된다구요. 전도가 되면 안 된다구요. 알겠어요? 안 되는 거예요. 내 살이 여위고 뼈가 앙상하게 드러나게끔 되어야 되는 겁니다. 그럴수록 때가 가까이 온 것을 알라는 거예요. 통일교회가 아무리 전도해 보라구요. 전도가 안 되는 현상이 벌어진다구요. 제물을 놓고 제사 드릴 때 거기에서 무슨 전도가 벌어지나? 번식이 벌어져요? 제물이 다 되고 난 후에야 비로소…제사를 받고 난 후에야 그 제관들이 '어! 잘 받았구만' 하고 하늘 앞에 감사하고 기쁜 일이 벌어 지든가, 슬픈 일이 벌어지든가 하지, 제물도 안 드렸는데 뭐?앙상한 비참밖에 없다구요. 옛날 60년대와는 다르다구요. 왜 지금은 그렇게 되느냐? 제물을 드릴 때라는 것입니다. 제물로 드리게 될 때에는 제물된 자 외에는 비명을 지르는 사람이 없지요? 통일교회 교인들은 비명을 질러야 될 입장에 몰릴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될수록 마지막이 아니고, 마지막이긴 마지막인데 내 때가 가까와지는 것입니다. 그걸 알고 이 고비를 잘 참고 끝까지 견디는 자가 구원을 받는다구요. 생명이 진(盡)하더라도 참아야 됩니다. 발길로 주인을 차 버리면 안 되는 것입니다. 지금 때가 그런 때라는 것입니다.
1970년도부터 1974년까지의 이 기간은 세계가 뒤넘이치는 때입니다. 자리를 못 잡고 뒤넘이칠 때라는 거예요. 이렇게 볼 때 통일교회 원리는 그야말로 세계사적인 사명을 짊어진 것입니다.
하나님만 믿는 운동이 벌어지는 날 대한민국은 새로이 부활한다
그러면 이 길은 어떻게 가려 갈 것이냐?문제는 간단하다구요. 불평하지 말고 세상 사람과 손잡지 말고, 하나님만 붙들라는 거예요. 지금 대한민국을 볼 때, 대한민국 백성 누구를 믿을 수 없다구요. 전부 다 믿을 수 없는 자리에 들어 간다구요. 나라를 믿을 수 있어요. 나라를 지도하는 지도자를 믿을 수 있어요? 뭘할지 모르는 이런 입장에서는 믿을 수 없습니다. 어느 당도 못 믿고, 교회도 못 믿고, 다 믿을 수 없습니다. 이북의 공산당도 못 믿고 이남도 믿을 수 없습니다.
딱 그렇게 되었을 때는 어떻게 할 테냐? 신의(神意)의 길을 가야 됩니다. 신의의 길을 가지 않고는 이 나라가 살 길이 없는데, 신의의 길을 어떻게 모색하느냐? 인간을 믿어 봤지만 낙망과 절망에 부딪쳤으니 하나님을 믿어 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만 생명을 다해 가지고 믿는 운동이 적극적으로 벌어지는 날에는 대한민국은 새로이 부활할 것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일면 비참하고 일면 혼란된 환경이지만 여기에서 확실히 새로이 하는 날에는 단결할 수 있는 하나의 종대가 우리 앞에 다가온다고 보는 것입니다. 망할 줄 알았더니, 망하는 것으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흥할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보라구요. 역적이면 그 역적이 회개하면 역적 칭호를 벗어버릴 수 있다는 거예요. 왜 그러냐 하면, 역적들이 전국에 퍼져있다고 할 때, 이 역적이 자기 혼자 죽는 것는 억울하지 않지만 자기 죽은 후에까지라도 이 도당들을 남겨 놓으면 그야말로 억만 년 존속해야 할 이 나라가 망할 것을 알고 자기의 도당들의 마음을 나랏님 앞에 회개하도록 바꿔 놓게 되는 날에는 용서받을 수 있는 길이 있다는 겁니다. 알겠어요?
그런 관점에서 볼 때, 오늘날 통일교회도 그와 마찬가지로 망할 수 있는 입장에 있고 배신받을 수 있는 입장에 있지만, 하늘을 망하게 하는 이런 모든 사연들을 하나님 앞에 통고하고 그것을 밝혀 달라고 호소하는 마음을 대신 갖고 몸부림치고 회개하면서 그들을 대표하여 매를 맞을 수 있는 길이 있다면, 만약에 '나 혼자에게 역적의 죄를 전부 다 책임지우고 저 사람들을 용서해 줄 수 있으면 용서해 주십시오' 이렇게 한다면, 그는 역적 중에서 그래도 쓸 만한 녀석이라구요. 그렇지요? 응? 그러한 심정을 가지고 이 나라 이 민족을 대신하여 우리가 책임지자 하는 것이 통일교회의 신자인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알겠어요? 「예」 통일교회는 탕감복귀해야 합니다. 탕감복귀하지 않고는 책임분담을 완성할 수 없다구요.
여러분들은 혼돈하고 있다구요. 여러분들에게 지금 나라를 위해서 나가 싸워라 해서 싸운다면 여러분이 나라를 위하여 싸울 수 있는 그러한 자격자들이 되었다고 봐요? 어림도 없다는 거예요. 전부 다 그냥 그대로 사탄 새끼라구요. 이런 사람들이 여기에 와 가지고 하는 말이, '그래도 나는 나라를 위해 싸우는 공신이다'고 합니다. 공신이 될 게 뭐예요? 여러분들은 그 자리에 나타날 수도 없고, 그 자리에 참석할 수 있는 자격도 없다는 거예요?
그 자리에 참석할 수 있는 것은 선생님이 가담을 시켜 주었기 때문입니다. 선생님이 '너 이렇게 해라, 선생님의 말을 믿고 해라, 아담이 하나님을 불신하여 타락했기 때문에 너희는 아담보다 나은 자리에서 신임받아라, 아담이 하나님과 일체가 못 되어 망했기 때문에 너희는 하나되어 가지고 나가 싸워 봐라' 할 때는 탕감복귀되는 거라구요.
한많은 역사를 청산하기 위해 책임분담을 해야 한다
그걸 생각하게 될 때, 여러분들이 그 꼬락서니 가지고, 그런 입장에서 하늘나라의 건국 도상에 있어서 민족을 대표하여 제물적인 자리에 설 수 있다는 것은 자기가 당당해서 그런 거예요? 어림도 없다구요. 그 주제에 뭐 머리 들고 통일교회를 비판해? 어림도 없다구요. 그런 녀석은 영영 모가지가 걸린다구요. 그런 사람을 데리고 하나님이 복귀섭리를 안 하십니다. 어림도 없다구요.
그런 퇴폐적인 사상은 전부 버려요. 그래 가지고도 통일교회 식구라고? 선생님이 알고 있는 통일교회 식구는 그런 사람들이 아니라구요. 뼈가 부러지도록 몽둥이로 모듬매를 맞더라도 당연히 참석해야지요. '나 같은 것은 이 자리에 설 수도 없고, 섰더라도 거룩한 제단을 더럽힐 수밖에 없는데, 오늘 특별히 하늘의 잔칫날에 초청해 주어 왔기 때문에 그 은혜를 보답하겠습니다' 해야 됩니다. 그래야 떡이라도 얻어먹든지 주인이 볼때, '그 녀석 부르기는 불렀지만 섭섭하지는 않다'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 주제에 뭐 머리를 들고 바람을 피워? 그런 사람이 망하는가, 망하지 않는가 두고 보라구요. 그건 통일교회에 남아지지 못하는 거라구요. 그런 무리를 수습하는 통일교회 선생님이 아니라구요. 그러한 무리를 데리고 탕감복귀역사는 불가능하기 때문에 그것은 자동적으로 떨어져 나가는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들은 교회의 뜻을 알고 민족복귀니 세계복귀니 이런 입장에 가담할 수 있는 놀라운 영광에…. 역사이래 한 번밖에 없는 내 짧은 생애에 반짝하는 이 시기, 언제나 그것이 지루하게 남아지는 것이 아니라구요. 지나가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때가 여러분을 기다리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때를 기다려 가지고 때를 맞추어야지, 때가 여러분을 찾아와서 여러분에게 맞추는 것이 아니라구요. 그러니 때가 왔으면 거기에 온갖 정성을 투입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걸 알고도 허송세월을 했다가는 그건 누가 책임을 안 진다구요. 선생님이 책임질 줄 알아? 그걸 여러분이 알아야 됩니다.
여러분을 지도하는 선생님은 어영부영하는 적당한 선생님이 아니라구요. 심각한 사나이라구요. 때가 찾아온 것을 알 때에는 죽을지 살지 모른다구요. 그것을 놓치는 날에는 천지가 망한다는 심각한 심정에서, 힘줄이 오그라드는 심정을 가지고 이 일을 타개해 나가는데도 불구하고 쳐 가지고 비난하고 비판해요? 그래 가지고 남아지나 보라구요. 그 사람들은 춘하추동이 자기도 모르게 교차되듯이 자기도 모르게 풍화작용에 의해 가지고 소식도 없이 다 굴러떨어지는 거라구요. 그러한 곳이 통일교회입니다.
탕감복귀하기 위해서는 제물이 필요하고, 제물을 드리기 위해서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여러분은 조건물을 가지고 있어요? 가정을 위해서 드렸느냐, 나라를 위해 드렸느냐, 세계를 위해 드렸느냐에 따라 조건물이 달라진다구요. 즉, 개인복귀의 제물 조건이냐, 가정복귀의 제물 조건이냐, 종족복귀의 제물 조건이냐, 민족복귀의 제물 조건이냐, 국가복귀의 제물 조건이냐, 세계복귀의 제물 조건이냐에 따라 조건이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같은 사람인데 조건이 달라지는 거라구요. 기간도 달라지는 겁니다. 제물의 역사성을 초월할 수 없고 비약할 수 없는 운명권에 있는 타락한 조상의 후손인 것을 확실히 자각해야 되겠습니다.
탕감복귀하여 해원성사한 후에야 비로소 책임분담이 벌어집니다. 한을 남긴 책임분담, 이것 때문에 하나님도 녹아났고, 지금까지 우리 인류가 이 책임분담을 할 수 있는 세계적인 한 때를 맞이하지 못했기 때문에 한의 역사는 거듭되어 내려온 것을 알아야 됩니다. 한 많은 책임분담의 고개를 어떻게 넘을 것이냐 하는 것을 여러분이 확실히 알아야 되겠어요. 알겠어요? 「예」
탕감복귀는 왜 해야 되느냐? 책임분담하기 위해서 해야 되는 겁니다. 책임분담은 왜 해야 되느냐? 한많은 역사를 해제하기 위해서입니다. 책임분담을 완수하는 날에는 하나님의 한이 풀리나요. 안 풀리나요? 「풀립니다」 또 인류의 한이 풀리나요. 안 풀리나요? 「풀립니다」 그뿐만이 아니라 시대적인 한, 미래의 한까지 다 풀린다는 거라구요.
3차 7년노정까지 책임 못 하면 대한민국 백성은 종이 된다
한많은 책임분담의 역사가 남아 있기 때문에 그 한을 풀 수 있는 책임완수의 한 날을 그리워해야 합니다. 그것이 그리워야 합니다. 그것을 그 누구를 그리워하는 것 보다 그리워해야 합니다. 부부가 서로서로 자기의 아내를 사랑하고 자기의 남편을 사랑하고 자식을 사랑하는 것보다 더 그리워야 합니다. 그것을 해결지어 놓고 그_터전 위에 아내가 필요한 것이요. 남편이 필요한 것이요. 자식이 필요한 것이요. 가정이 필요한 것이요. 민족 국가가 필요한 것이 아니냐, 이걸 여러분이 알고 그 길을 다시 한번 냉정히 비판해 볼 때, 과거의 나 자신을 중심삼고 탕감복귀의 길을 걸어왔느냐?
나는 개인복귀의 자리에 허덕이고 있거들랑, '가정복귀의 날을 맞기 위하여 메시아를 맞는 것이 내 최고의 희망이 아니냐, 나에게 가정복귀할 수 있는 기준이 바로 그 기준이기 때문에 이 목숨을 다 바치더라도 한이 없겠다'는 마음을 가져야 됩니다. 개인탕감복귀의 책임을 완수하였거든 가정적인 탕감복귀의 길을 갈 수 있게 가르쳐 주는 사람이 있고, 가정탕감복귀 완수해 가지고 책임분담 완수하였거든 나에게 종족탕감복귀의 길을 갈 수 있게 가르쳐 주는 사람이 있고, 혹은 종족탕감복귀 완수해 가지고 책임분담 완수했거든 민족, 혹은 국가, 세계로 발전할 수 있는 길을 열어 줄 수 있는 분이 있다면, 이런 전체의 한의 구렁텅이를 한꺼번에 가르쳐 주어 가지고 한꺼번에 비약시킬 수 있게 되면 내 손이야, 내 발이야, 내 뼈살, 무엇을 아끼고 싶을 것이뇨. 일시 투입하는 것이 내 소원 중의 소원이요, 보람 중의 보람이라고 각오할 수 있는 내 자신이 되어야 될 것이 아니냐.
그야말로 통일교회를 통해서 여러분이 일시에 이것을 횡적으로 탕감복 귀하려는 역사적 사명을 여러분은 가져야 된다는 것입니다. 7년이라는이 기간에 한 많은 7천년의 역사를 탕감하고 인류가 지금까지 한의 구렁텅이에 있던 것을 일시에 비약해 가지고 이걸 초월하자는 것이 오늘날의 통일교회의 가르침이 아니냐? 이 7년이야말로 우리에게 복된 기간입니다. 이 7년을 놓치면 우리는 망하는 것이요. 우리의 뜻은 설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7년 기간은 모든 생명의 권한을 해결할 수 있는 기간입니다.
내가 바라던 이 7년이라는 기간이 나에게서 사라지는 날에는 우리는 한의 사나이요. 한의 아낙네밖에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이 7년이라는 기간을 거치지 않고는 여러분 앞에 책임분담은 있을 수 없습니다. 이 7년 기간을 거치지 않고는 지금까지의 하나님의 한과 인류의 한을 해원 할 수 없습니다. 이 7년 기간을 여러분이 완수하는 데서만이 나라와 민족을 해방시킬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1차 7년노정에 못 하게 되면 2차 7년노정, 3차 7년노정으로 연장되어 나가는 것입니다. 3차 7년노정까지 안 되게 될 때에는 이 뜻은, 이 복은 대한민국 복이 아니고 여러분의 복이 아니라 이방의 복으로 넘어갈 것입니다. 왜? 예수님의 뜻이, 기독교의 뜻이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는 날에는 대한민국의 백성은 종이 될 것입니다.
보라구요. 노아의 아들 함이 축복받은 아벨의 자리에 있었지만 책임을 못함으로 말미암아 종이 된 것과 같이 틀림없이 그렇게 될 것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예수님의 영육을 중심삼고 죽였다면 그 민족은 희생할 길이 없지만 영적인 기준이 남아 있기 때문에 희생할 수 있으되, 한국 민족은 그렇지 않습니다. 제 3이스라엘은 영육을 침범할 수 있는 조건적인 입장에 섰기 때문에 이 민족은 종새끼와 같이 됩니다. 그것이 원리의 결론이라구요. 함의 역사를 여러분이 알아야 됩니다. 선생님을 모시고 사는 통일교회 간부들이여, 정신 차려라 이겁니다. 그대들이 지금까지 선생님을 모시고 뜻을 대하여 나온 그것으로써 일방통행이 안 됩니다. 여기서 비판을 받아야 합니다. 원리적인 비판을 다시 적나라하게 받아야 될 것입니다.
그대들이 살고 있는 그 삶이 민족을 위하고 세계를 대표한 삶이냐? 나는 책임 안 집니다. 아무리 가깝던 사람도 나는 책임을 안 집니다. 아무리 지금까지 수십 년 선생님을 받들고 나왔던 36가정의 그 누구라 하더라도 나는 책임을 못 집니다. 민족을 위함에 있어서, 세계를 위함에 있어서 탕감복귀노정을 단축시키기 위한 그 길의 십자가를 대신 짊어지기 위한 수난길을 자처해서 가는 책임자가 아니고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걸 여러분이 알아야 돼요.
잘못된 것은 영계에 가기 전에 청산해 주어야 한다
선생님이 뭘 하고 다니는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왜 그런 말을 하는지 모를 것입니다. 요즘에는 내가 한국에서 한다 하는 사람들을 만나고 있습니다. 꼭대기 몇몇 사람을 만나 봐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탕감복귀 원칙에 있어서….기독교를 위해서 지금까지 내가 하나님 앞에 기도했고 기독교를 구해야 할 책임이 있기 때문에 기독교의 몇몇 사람을 만나고서는 영계의 사람을 만날 것입니다. 각 종교의 사람을 만날 것입니다. 이들은 하늘의 법도를 알고 있다구요. 통일교회 문선생님을 어떻게 모셔야 하고 어떻게 받들어 나가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구요. 여러분이 앞으로 그런 사람들에게 교육 받을 때가 올 것입니다. 교육하게 되면 교육 받아야 할 것입니다. 선생님을 마음대로 만나지 못할 때가 올 것입니다. 그런 것이 있을 성싶다는 거라구요.
탕감복귀의 원칙은 선생님 자신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탕감복귀 원칙의 길을 가기 전에는 하나님 앞에 나타나고자 하는 생각을 안 했습니다. 제물의 과정을 가지 못한 사람은 후원이 필요없다구요. 제물을 동정하는 입장에 서면 진정한 제물은 못 바치는 것이 아니냐, 그런 의미에서 선생님이 감옥에 들어갈 때, '하나님이여, 나를 보호해 주소서' 절대 그런 시시한 기도는 안 했습니다. 그러면 제물의 뜻에 위배됩니다. 깨끗이 희생하고 깨끗이 피를 흘려야 됩니다. 동정을 바라는 제사장이 되어 가지고는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이 된다 이겁니다. 어려운 일이 있다고 '하나님!' 난 그러지 못한다구요. '하나님, 나는 나 자신을 책임지겠습니다. 동정은 필요없습니다' 하는 사상을 가지고 나오는 사나이인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여러분이 탕감복귀를 하지 않고는 책임을 완수할 수 없습니다. 민족적 탕감복귀를 시키려니 통일교회 교인들을 들이 고생시키는 거라구요. 죽을 자리에 내모는 거라구요. 가라 이거예요. 그 방향과 여러분이 가는 방향이 엇갈리게 될 때에는 엇갈리는 각도만큼 여기에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차라리 몰랐으면 좋을 뻔했어요. 가룟 유다와 같은 사람은 몰랐으면 얼마나 좋았겠어요? 차라리 나지 않았으면 좋을 뻔하였도다. 차라리 통일교를 믿지 않았으면, 차라리 문선생님을 몰랐으면 좋을 뻔 하였도다.
그러면 여러분 일대만 걸리는 것이 아니라, 잘못하면 여러분의 70대 선조까지 걸려 버리는 것입니다. 선한 공적이 있으면 전부 다 빼앗아 가지고 이방 사람들에게 나누어 준다는 거라구요. 말만 그러는 것이 아니예요. 여러분에게 신앙적으로 공갈 협박하는 것이 아니라 내용이 그렇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까지 말을 했는데도 하지 못하게 되면 나는 모른다구요. 알겠어요? 탕감복귀하기 전에는 책임분담을 할 수 있다? 「없다」 없습니다.
선생님이 지금까지 탕감복귀의 노정을 가는 것을 언제 생각해 봤어요? 제 탕감복귀노정을 뒤넘이쳐 넘는 것을 느껴 보고 동정해 봤느냐 이것입니다. 한 마을에서 소를 잡아 제사를 드려도 동네 제삿날로 기억하거늘, 제물에 대하여 긍휼의 마음을 가지는데, 선생님을 내세워 가지고 여러분이 얼마나 마음으로 동정했어요? 이것들이 선생님을 이용해 먹으려고 하고 뜯어 먹으려고 하고 전부 다…. 앞으로 내가 샅샅이 들이칠 거라구요. 만약에 뜻이 이루어지는 날에는 소문난 시시한 사내들은 전부 서류로 꾸며 가지고 공판에 붙여서 해결하고 넘어갈 거라구요. 잘못한 것 전부 들춰내 가지고 해결하고 넘어갈 것입니다. 왜 그러냐? 심판은 역사적인 것이기 때문입니다.
과거에서부터 현재 미래까지 누가 잘못을 했는지 꼬리에 꼬리를 물어서 조서를 꾸미고, 그 족속까지 전부 다 들춰 가지고 청산짓고 가게 돼 있다구요. 통일교회를 반대한 목사면 목사도 전부 다 걸릴 것입니다. 그러한 길을 가야 할 입장에 선 사나이가 통일교회 문선생이라는 사람입니다. 어물어물 적당히 넘어가지 않는다구요.
내 마음에 충격을 준 말, 내가 하지 않은 말, 이런 것은 어디서부터 나왔는지 뿌리를 전부 깨끗이 정리해 놓고 가야 된다는 겁니다. 만일 이땅에서 그걸 못 하게 되면 영계에 가서라도 깨끗이 청산지어야 할 것입니다. 영계에 가서 청산지을 때에는 영영 그들을 용서할 길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건 왜 그러냐? 용서해 주지 않으니…. 여러분이 그걸 알아야 된다구요. 한을 남긴 책임분담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겠어요.
신앙의 주체국으로서의 책임을 다하라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은 이 손이 책임분담을 완수했더냐, 이 손이 얼마나 책임분담을 완수하기 위해서 노력했더냐 그렇게 볼 때 이놈이 밉살스러워야 된다구요. 이놈의 손아! 이놈의 눈깔아! 이놈의 아가리야! 뭘 먹겠다고 입을 벌려? 이놈의 입아? 도끼를 들고 이빨을 콱 부숴 버리고 싶다는 마음을 가져야 된다는 겁니다. 손가락은 전부 다 방망이로 뱀대가리 찍듯이 해 가지고 없애 버리자고 다짐하더라도 아깝지 않다는 생각을 가져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 고기 덩어리를 들색거렸다고 힘들다고? 그래 가지고는 탕감복귀할 수 없다는 거예요.
자, 여러분이 그렇게 알고, 한을 남긴 책임분담의 길은 어떻게 올라가 가지고 풀 것이냐 하는 문제가 새로운 과제입니다. 이제 1974년도까지 2년 몇 개월밖에 남지 않은 이 기간에 어떻게 이걸 밀고 나가느냐? 이 기간이 지나가게 되면 민족적 사명 시대는 지나간다 이거예요. 알겠어요. 무슨 말인지? 통일교회 문선생이 여러분에 대해서 '뭘 해라, 해라, 야, 전도해라' 절대 그러지 않는다구요. 하겠으면 하고 말겠으면 말고…. 나는 관계없습니다. 그때에는 통일교회 문선생을 여러분이 볼래야 볼 수 없는 곳에 가 있을지도 모릅니다. 내가 얘기하는 거라고 내 말이 아닙니다.
젊은 처녀 총각들도 마찬가지요. 나이 많은 늙은이들도 마찬가지예요. 탕감복귀의 길은 다 가야 됩니다. 낮이나 밤이나 세계를 붙들고 통곡을 하고 씨름을 해야 할 운명을 책임진 것이 통일교회 교인이기 때문에, 한을 남긴 탕감복귀의 해원성사를 이루어 한을 남긴 책임분담 완수의 고개를 넘기 위한 것이 우리가 출발한 길이기 때문에, 이 길을 완전히 승리적으로 넘지 않으면 이 통일교회의 운명은 불쌍한 운명이 될 것입니다. 결박해 들어오는 공산세계의 마수는 지금 세계를 풍미하고 있지 않느냐 이것입니다.
여러분이 이런 것을 알고 확실히 이것을 가려 가지고 남은 1974년도까지 2차 7년노정은 여러분이 책임지고 가야 할 기간이라구요. 자그마치 가정으로 가야 할 책임을 민족으로 전개시켜 가지고 책임을 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계를 대해 가지고 777가정을 연결시켜 가지고, 그 가정들은 전부 다 여러분과 마찬가지로 보조를 맞추고 있는 거라구요.
그들에게 지는 여러분이 되면 주체국으로서 책임을 못다하는 입장에 선다는 거예요.
기 도
아버님! 여기에 서 있는 이 아들은 뜻을 알고 난 그날부터, 아득한 천리길 복귀의 길이라는 것을 생각하면서 결심에 결심을 다짐하던 그 옛날 한때 한때를 다시 한 번 회상하게 되옵니다. 그 누구에 게도 말을 할 수 없는 서글픈 아버지의 내정을 안 그날부터 깊은 심정을 품고 하늘의 때가 오기를 지금까지 기다려 왔사옵니다.
그런 기간에 저의 젊은 시대도 지냈고 청년 시대도 지내고 인생의 한 고개를 넘고, 석양길을 향하지 않으면 안 될 지금에 와 있습니다. 이제 민족과 세계가 엉망진창이 되어 가는 것을 직시하면서 때가 다가오고 환경이 어지러워질수록 하나님과 나만의 사정이 같이하는 역사성을 짊어진 것을 느끼게 됩니다. 그럴 적마다 죄스러움을 느끼고, 하루의 생활을 출발하면 출발한 그날 이 민족과 세계를 대한 염려의 마음이 부풀어 있는 것을 바라보게 될 때, 하늘의 때가 가까운 것을 느끼지 않을 수 없나이다.
그렇지만 하늘이여! 이 불쌍한 한민족을 기억하여 주시옵소서. 반만년의 역사를 지나온 이 민족, 서글픈 고아와 같은 자리에서 살아오던 이 민족, 헐벗고 굶주린 거지의 자식과 같은 자리에서 천대를 받아 나오던 이 민족, 그래도 하나님이 있다는 것을 믿고 추울 때에는 부모를 그리워하는 마음을 돌이켜 '우리 부모는 죽었지만, 하나님이여 우리를 도와 주옵소서' 기도하던 역사의 인연을 남겨 왔던 한민족인 것을 아시기에 당신은 이 민족을 찾아왔고, 이 민족을 축복하기 위하여 수많은 어려운 역경 가운데서도 남아질 수 있는 하나의 복을 주려 했지만 이 민족은 당신을 배반했습니다.
아버지여! 이스라엘 민족을 용서하신 아버지의 마음이 있는 것을 알았고, 유대교를 멸하지 않고 지금까지 남겨 온 당신의 억울한 뜻이 남아있는 것을 바라보면서, 이것을 배후에 놓고 아버지 앞에 기도하지 않으면 안 될 오늘이 얼마나 원통한가 하는 것을 느끼게 되옵니다. 그러나 할수없는 복귀의 길, 번번이 그럴 수 있는 길을 남기고 있는 저희들이 죽기 전에 이 사명을 감당해야 하는 이 뜻이 저희들의 뜻이 아니요. 당신의 뜻인 것을 생각하게 될 때, 다시 수습하여 당신 앞에 공인받을 수 있는 승리적인 때를 바랄 수 있는 마음을 가져야 할 것이 이 나라 민족으로 태어난 민족적인 사상이요 긍지인 것을 아시는 아버지여,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아버지, 통일교회는 해방 이후 지금까지 역경 가운데서 수난의 노정을 걸어왔습니다. 그 누구한테 말할 수 없는 억울함도 참아 왔습니다. 이가 갈리고 혹은 힘줄이 당기는 그런 자리에서도 하나님의 서글픈 나날을 생각하면서 참아 나왔습니다. 당신이 영원히 자랑할 수 있는 저희들이 되지 않으면 안 될 것을 아는 저희들이었기에 이 나라 이 민족을 사랑하시옵고 품에 품어 주시옵기를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엇갈린 남북의 통일은 누가 나서서 하겠습니까? 하나님만이 이걸 책임 질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저희들은 부족하기 때문에 정성을 다하여 이 서러운 운명을 가로막고, 십자가의 죽음길을 각오할 수 있는 비참한 무리가 되지 않으면 안 될 것을 생각할 적마다. 저희는 고요히 당신의 품을 그리워하면서 당신이 승리의 한날을 세우는 결과를 바라면서 이 난국을 돌파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 현재 통일교회의 사명인 것을 그 누구의 가슴에도 확실히 믿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아버지, 금년은 1972년입니다. 이해는 역사적인 비참을 대표할 수 있는 해입니다. 이해에 벌어지는 일은 비단 한국 민족의 역사뿐만이 아니라 세계사를 대표한 일이라는 사실들을 알았습니다.
10월을 맞이하여 이 나라 이 민족은 비상계엄령을 발표했습니다. 이때에 저희들은 무엇을 바라보아야 되겠습니까? 이러면 이럴수록 하나님의 깊은 사랑의 심정에 파고들어가야 되겠습니다.
하늘이여! 이 민족을 버리지 마시옵고, 이 나라 이 백성을 사랑해 주시옵소서. 우리가 희생하더라도 이 뜻만은 남기고 가야 되겠다는 무리가 있어야 될 것을 알고 있습니다. 오늘 여기에 모인 당신의 자녀들, 한많은 책임분담노정이 어떻다는 걸 알았사오니, 이것을 완성하기 위해서는 탕감복귀의 길을 가지 않으면 안 될 것을 확실히 깨닫는 무리가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이 시간 아버지 앞에 새로이 충성을 다짐하고 맹세하는 시간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부탁하고 원하옵니다.
아버지, 1974년도까지 가야 할 이 길 앞에 최후의 막바지를 치닫는 이 발걸음이 지치고 쓰러지고 노곤한 자리에 서더라도 생명을 걸고 정상을 한 발자국이라도 넘고 나서 쉬지 않으면 안 되겠습니다. 어려우면 어려울수록 정상이 가까와 오는 것을 알고 극복에 극복을 다짐할 줄 아는 용사다운 모습들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고, 사탄세계에 하늘의 아들딸이 끈기 있고 강인한 그 모습을 보게 하시고 당신이 사랑하기에 부족함이 없는 통일의 역군들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이 시간 심신을 가다듬어 내일의 소망을 바라보며 아버지 앞에 엄숙히 맹세하고 자각하는 각자들을 아버지여 긍휼히 받아 주시옵기를 간절히 부탁하면서, 모든 말씀 참부모님의 이름으로 아이뢰었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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