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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 때부터 이어온 오래된 지혜(1-3)
우리 자신이 악에 대해 경각심을 갖되 다른 사람의 고난을 이러한 잣대로 함부로 판단하지 않도록 조심하는 신중함이 필요합니다. 우리의 마음을 악에서 지키기 위한 방법 중 하나는 악인들이 맞이한 비참한 결말을 마음에 기억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깨어 있을 때 하나님은 우리가 의로운 삶을 선택하도록 지혜를 주시고, 하나님께 합당한 자로 살아가게 하실 것입니다.
1나아마 사람 소발이 대답하여 이르되 2그러므로 내 초조한 마음이 나로 하여금 대답하게 하나니 이는 내 중심이 조급함이니라 3내가 나를 부끄럽게 하는 책망을 들었으므로 나의 슬기로운 마음이 나로 하여금 대답하게 하는구나(1-3)
소발의 마지막 발언의 시작은 세 친구의 전형적인 도입부의 형식을 따릅니다. 욥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을 수가 없어서 발언을 해야 하는 자신의 입장을 설명합니다(4:2; 8:2; 11:3; 15:2-6; 18:2-4). 왜냐하면 욥의 말은 지혜의 말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또한 욥의 주장이 세 친구의 말이 지혜의 말이 아니라고 반박하기 때문입니다.
15장의 엘리바스처럼 소발 역시도 욥과의 대화를 ‘지혜의 대결’로 인식하고 있습니다. 빌닷이 욥의 말을 자신들을 “짐승으로 여기며 부정하게 보느냐”(18:3)라고 이해한 것처럼, 소발 역시도 욥의 말을 자신을 “부끄럽게 하는 책망”으로 이해합니다. 그런데 욥은 단지 자신의 무죄를 주장했을 뿐이고, 자신을 죄인으로 몰아가지 말고 불쌍히 여겨달라고 부탁했을 뿐입니다. 소발은 자신의 지혜가 오래된 지혜라는 사실을 강조합니다(4). 전통적인 규범적 지혜가 천지 창조 때부터 정해진 규범을 아는 것이기 때문에 “사람이 이 세상에 생긴 때로부터”를 강조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엘리바스와 빌닷이 조상들로부터 지혜를 물려받았음을 강조하며(8:8; 15:18-19), 욥에게 “네가 제일 먼저 난 사람이냐”고 질책하는 것(15:7)과 일맥상통합니다. 욥은 자신의 지혜가 오래된 지혜라고 주장한 적이 없다. 그러므로 “땅의 기초를 놓을 때에 네가 어디 있었느냐”(38:4)라는 질책은 욥에게는 해당 사항이 없습니다. 오히려 “사람이 세상에 생긴 때로부터” 인과응보의 원리가 불변의 진리라고 주장하는 친구들이 하나님의 질문에 답해야 합니다.
소발의 지혜(1): 악인의 승리는 잠깐이다(4-11)
하나님께서는 악한 자들의 악행을 기억하시고 그에 상응하는 심판을 준비하십니다. 그들이 세상에서 잠시 평안하고 강성해 보인다할지라도 언젠가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설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세상에서 보이는 것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고 오로지 하나님이 주신 사명에 최선을 다하는 자들이 되어야합니다. 영원한 가치에 헌신자들에게 영원한 상급이 있습니다.
4네가 알지 못하느냐 예로부터 사람이 이 세상에 생긴 때로부터 5악인이 이긴다는 자랑도 잠시요 경건하지 못한 자의 즐거움도 잠깐이니라 6그 존귀함이 하늘에 닿고 그 머리가 구름에 미칠지라도 7자기의 똥처럼 영원히 망할 것이라 그를 본 자가 이르기를 그가 어디 있느냐 하리라 8그는 꿈 같이 지나가니 다시 찾을 수 없을 것이요 밤에 보이는 환상처럼 사라지리라 9그를 본 눈이 다시 그를 보지 못할 것이요 그의 처소도 다시 그를 보지 못할 것이며 10그의 아들들은 가난한 자에게 은혜를 구하겠고 그도 얻은 재물을 자기 손으로 도로 줄 것이며 11그의 기골이 청년 같이 강장하나 그 기세가 그와 함께 흙에 누우리라(4-11)
소발이 말하는 지혜의 첫 번째 핵심은 ‘악인의 승리는 잠깐이다’라는 규범적 지혜의 익숙한 표현입니다. 시편의 탄원시에 주로 등장하는 주제이기도 하고(시 37, 73편), 엘리바스와 빌닷도 동일한 주제를 말했습니다(8:11-13; 15:29-33). 악인, 즉 하나님을 모르는 자(“경건하지 못한 자”)의 승리와 기쁨의 함성은 그 소리가 공간적으로 멀리 가지 못하며(미까로브), 그의 행복은 시간적으로도 잠깐일 뿐입니다(5). 잠시나마 그의 ‘키’(개역개정의 “존귀함”)가 하늘에 닿아서 구름을 만질 수 있다 해도 그는 “똥”이나 “꿈”, “환상”처럼 사라지고 말 것입니다(7-8). 기세등등하던 악인들이 사라져 사람들의 눈에 보이지 않게 된다는 소발의 말(7,9)은 주위에 아무도 없음을 한탄하는 욥의 말(19:7, 13-15)과 좋은 대비를 이룹니다. 악인은 사람들의 눈에서 사라지기 때문에 욥의 주위에 사람이 없는 이유는 그가 악인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욥을 떠나거나 멀리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사람들의 눈에서 욥이 안 보이도록 하신 것입니다. 그것이 악인의 결말이기 때문입니다. 참고로, 개역개정의 “그의 처소도 다시 그를 보지 못할 것이며”(9)는 ‘메꼬모’를 주어로 해석한 것인데, ‘마꼼’은 남성명사로서 이 문장의 여성 단수 동사 ‘테슈렌누’와 성이 일치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주어는 여성명사인 상반절의 ‘아인’으로 보는 것이 적절합니다. ‘메꼬모’는 부사적으로 덧붙여진 말로 보입니다. 이렇게 9b절을 다시 해석하면, ‘(그를 쳐다보던 눈은) 그가 원래 있던 곳에서 더 이상 그를 발견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가 됩니다. 악인이 당하는 재앙은 악인 한 사람에게만 한정되지 않고 그 자녀들에게까지 영향을 미칩니다. 악인의 자녀들은 가난한 자의 비위를 맞춰가며 그들에게 구걸을 해야만 하는 지경에 이르게 됩니다. 여기서 “가난한 자”로 번역된 ‘달림’은 구체적으로는 ‘얇고 가느다란’ 비쩍 마른 사람을 가리키는 단어이고, 여기서 파생된 의미로 ‘낮은’, ‘가난한’, ‘힘없는’, ‘하찮은’ 등의 의미로 사용됩니다. 먹을 것이 없어 비쩍 마른 사람에게까지 음식을 구걸해야 하는 처참한 상황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11절의 “기골이 청년 같이 강장하나”는 악인이 한때 잘나가던 시절을 나타내는 표현으로 5절의 승리의 함성과 6절의 키(머리)가 하늘에 닿을 정도라는 구절, 그리고 10절의 “얻은 재물”과 동일한 의미의 연장선에 있습니다. 11절의 “기세”는 번역자의 첨가입니다. 주어는 상반절의 ‘그의 뼈들’로 보는 것이 타당합니다. 젊음이 가득했던 악인의 뼈들도 머지않아 무덤에 묻히게 됩니다.
소발의 지혜(2): 악인은 독을 스스로 삼킨다(12-22)
사람의 분노는 결코 의를 이루지 못합니다. 많은 사람이 인과응보의 법칙을 진리라고 믿고 싶어 하지만 현실은 다르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성도는 항상 하나님께서 주관하시는 이 세상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때에 순종해 나가야 합니다.
12○그는 비록 악을 달게 여겨 혀 밑에 감추며 13아껴서 버리지 아니하고 입천장에 물고 있을지라도 14그의 음식이 창자 속에서 변하며 뱃속에서 독사의 쓸개가 되느니라 15그가 재물을 삼켰을지라도 토할 것은 하나님이 그의 배에서 도로 나오게 하심이니 16그는 독사의 독을 빨며 뱀의 혀에 죽을 것이라 17그는 강 곧 꿀과 엉긴 젖이 흐르는 강을 보지 못할 것이요 18수고하여 얻은 것을 삼키지 못하고 돌려 주며 매매하여 얻은 재물로 즐거움을 삼지 못하리니 19이는 그가 가난한 자를 학대하고 버렸음이요 자기가 세우지 않은 집을 빼앗음이니라 20○그는 마음에 평안을 알지 못하니 그가 기뻐하는 것을 하나도 보존하지 못하겠고 21남기는 것이 없이 모두 먹으니 그런즉 그 행복이 오래 가지 못할 것이라 22풍족할 때에도 괴로움이 이르리니 모든 재난을 주는 자의 손이 그에게 임하리라(12-22)
18장에서 빌닷은 악인이 자신의 꾀에 스스로 넘어가는 것을 “그물”과 “올가미”(8), “덫”과 “올무”(9), “덫”과 “합정”(10)의 비유로 표현했습니다. 동일한 내용을 소발은 음식과 먹는 것에 비유한다. 악인은 악을 달게 여깁니다. 악을 달게 여긴다는 표현은 잠언 9:17(“도둑질한 물이 달고 몰래 먹는 떡이 맛이 있다 하는도다”)에도 나옵니다. 그 악이 너무 달콤해서 악인은 입 속에 넣고 천천히 아껴 먹습니다(13). 그러나 식도를 타고 넘어간 악은 뱃속에서 뱀의 독이 됩니다(14). 악을 입 속에 넣고 천천히 먹는 것은 악인이 부유해서 재물을 가진 것을 비유하는 표현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뱃속에서 그가 삼킨 재물을 토해내게 만드십니다(15). 15절 마지막의 ‘요리쉔누’는 개역개정처럼 “도로 나오게 하심”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상반절의 ‘토하다’라는 말과 동의적 평행어가 됩니다. 그러나 동사 야라쉬)는 ‘상속받다’라는 뜻으로, 히필형(사역형)은 ‘(다른 이에게 넘겨주다’, ‘(다른 이에게 주기 위해) 빼앗다’라는 의미로 쓰이기도 합니다(참조. 삿 1:19;11:24). 만약 이 경우라면, 악인이 입에 넣었던 재물을 토해내면 하나님께서 그 재물을 다른 이에게 주신다는 의미가 됩니다. 5:5의 엘리바스의 말(“그가 추수한 것은 주린 자가 먹되”)과 유사한 진술입니다.
18-19절의 빌닷이 악을 설명하는 방식이 흥미롭습니다. “수고하여 얻은 것을 삼키지 못하고”는 일견 인과응보의 원리에 맞지 않는 것으로 보입니다. 수고한 열매를 자신이 누려야 뿌린 대로 거두는 것이 완성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악인이 “수고하여 얻은 것”을 빼앗기는 것은 악인 스스로 남의 것을 빼앗았기 때문입니다(19). 가난한 자를 착취하고 자신의 것이 아닌 집을 빼앗은 사람의 재물을 악인이 누리지 못하는 것은 인과응보의 원리가 정확히 적용되는 것입니다. 20-22절에서 계속해서 악인이 잠시 풍족할 수 있고 잠시 재물을 소유할 수는 있지만 그 행복이 오래가지 못하고 곧 재앙이 임할 것이라는 주제를 반복합니다.
소발의 지혜(3): 악인에게 임하는 하나님의 심판(23-29)
많은 성도들이 소발과 같은 잘못을 범합니다. 자기주장을 인정받으려고 하나님의 권위에 기대는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을 잘 모를 때 나타나는 교만과 어리석음입니다. 진정으로 하나님과 깊이 교제하여 남에게 쉽게 충고하기를 주의하고, 조용히 혼자 기도하는 성숙한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23그가 배를 불리려 할 때에 하나님이 맹렬한 진노를 내리시리니 음식을 먹을 때에 그의 위에 비 같이 쏟으시리라 24그가 철 병기를 피할 때에는 놋화살을 쏘아 꿰뚫을 것이요 25몸에서 그의 화살을 빼낸즉 번쩍번쩍하는 촉이 그의 쓸개에서 나오고 큰 두려움이 그에게 닥치느니라 26큰 어둠이 그를 위하여 예비되어 있고 사람이 피우지 않은 불이 그를 멸하며 그 장막에 남은 것을 해치리라 27하늘이 그의 죄악을 드러낼 것이요 땅이 그를 대항하여 일어날 것인즉 28그의 가산이 떠나가며 하나님의 진노의 날에 끌려가리라 29이는 악인이 하나님께 받을 분깃이요 하나님이 그에게 정하신 기업이니라(23-29)
소발의 음식 비유의 결말은 이렇습니다: 악인이 자신의 음식을 먹으려 해도 하나님의 재앙이 그에게 임하는데 마치 그의 밥그릇에 비가 쏟아지는 것과 같습니다(23). 그가 혹시나 하나님의 재앙을 한 번 피할 수 있을지라도 또 다른 재앙이 그를 맞이할 것입니다(24). 철제 무기와 구리 화살 중 어느 것이 더 치명적인지 우열을 가릴 수 없습니다. 레위기 26:19과 신명기 28:23에 따르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 악인들에게 철과 놋의 재앙이 임합니다. 악인이 혹시 자신의 몸을 꿰뚫은 놋화살을 빼내는 데 성공한다 해도 그 독으로 인한 끔찍한 고통이 그에게 임하게 될 것입니다(25). 하나님의 화살을 맞아 고통스럽다고 탄식한 욥의 외침(욥 6:4; 16:13)에 대한 ‘친구’ 소발의 대답이라 할 수 있습니다. 악인에게 지정되고 악인이 받아야 할 몫과 유산(29)은 다음과 같습니다: 그가 꽁꽁 숨겨둔 것(쩨푸나브)에까지 온통 어둠이 임할 것이며, 아무도 피우지 않은 불, 즉 하나님의 불이 그가 감추어둔 것과 그의 거처를 모두 불태워(26) 그가 가진 것은 모두 휩쓸려 떠내려갈 것입니다(28). 누군가 굳이 나서지 않아도 하늘과 땅이 그의 악을 세상에 폭로할 것입니다(28). 악인은 결국 자신이 뿌린 악을 스스로 삼키게 될 것입니다.
인간의 삶은 복잡다단하여 한 가지 이론이나 주장으로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없습니다. 한마디로 삶은 신비입니다. 평소에는 은혜롭게 들리던 설교나 말들이 갑자기 이해 불가 또는 언어도단이 됩니다. 따라서 역사의 주관자이신 하나님의 신비 앞에서 겸손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