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언(證言) - [23] 이봉운(李鳳雲) - 축복 4. 문 선생님과의 만남과 헌신 생활 - 2
14 우리는 당시 부산에 있던 다른 몇 곳의 신앙 단체와 함께 이단이라는 말을 들었고, 전도도 되지 않고 내왕하는 자도 없었다. 또 세대 조직으로 보나 집회하는 것을 보나 가정도 아니요 또한 교회 같지도 아니 하니, 이상하고 수상한 사람들이라고 주목을 받았다.
15 뜻을 이루어야 할 선생님은 오가는 사람도 없이 부녀자 몇 명을 모아 놓고 “나는 고생해서는 안 될 사람인데” “식구가 천 명은 되어야겠는데” “한 끼에 쌀 한 가마니 씩은 밥을 지어야 할 텐데” 하고 탄식하셨다.
16 생활은 원필씨가 미군부대에 취직하여 생활비를 대고 있었다. 나는 고향에서 제분공장을 경영한 경험밖에 없어 경제를 책임질 능력은 없으나 그때 유행한 과자를 만들어 보려는 생각을 해냈다.
17 선생님은 승낙하셨고 명칭은 무엇으로 하는 것이 좋겠느냐 하니 ‘成和糖’이라 하셨다. 성화탕은 성공하지 못했으나 성화라는 이름만은 오늘날까지 남게 되었다. 그 후 수경이가 부두 노조에 식품 납입을 하고 내가 미군부대의 쓰레기 목재를 모아 재목상도 해 보았으나 휴전으로 부대가 철수하자 모두 중지되고 말았다. 18 1953년 7월 어느 날 선생님은 “이렇게 앉아만 있겠느냐” 하시며 강현실, 이요한 2인을 대구로 전도 보내셨다. 9월 17일에는 “내가 서울로 전도를 가야지” 하시며 떠나셨고 1954년 4월 14일에는 수경이도 협조하기 위해 상경하였다. 그러니 부산에는 남자라고는 나뿐이었다.
19 하도 딱해서 나도 서울로 가겠다고 했으나 오지 말고 부산에 있으라는 명령이셨다. 그 후 나는 대지공원의 판자집을 사서 교회를 운영했다. 얼마 후 최선길씨가 수경동 집을 팔고 떠나버려 원필씨가 쫓겨나니 교회 근처에 방을 얻어 주었다. 20 1953년 12월 24일에는 유효원씨를 비롯한 4인이 입교하여 통일교회의 중심인물이 되었다. 1954년 4월 14일에는 영도 신선동 1가 4번지로 이사한 후 5월 1일에 세계기독교통일신령협회가 창설되어 최초로 부산 교회장에 임명되었다.
21 서울에 유효원, 대구에 이요한, 부산에 이봉운의 3교회장이 임명되었다. 55년에는 7.4사건으로 3개 교회 합해 200여 명이 10월 4일까지 큰 수난을 당했으나 1인의 낙오자도 없이 잘 견디었다.
22 1956년 선생님 탄신일에는 탄신 기념 전국 제3차 원리 시험에 합격하여 선생님 친필의 수료증을 수여받았다. 그리고 동시에 1953년 4월 14일에 입교한 나와 1953년 12월 24일 입교한 김관성씨, 1954년 1월에 입교한 송도욱씨의 3인을 통일교회 초대 3장로로 임명하셨다.
23 1957년 3월 20일까지 부산교회를 책임진 동안 정말 말 못 할 고난을 많이 겪었다. 제일 어려운 것은 생활고와 원필씨 보호였다. 연보는 전연 없었으니 내 집 생활이 곧 교회 생활이었다.
24 나이 어린 무경이가 음식점의 젓가락을 만들고, 주경이는 수예와 재봉을 하고 부인은 시장에 제품을 팔았다. 또 그때는 특별 신앙자(계시 받고 영통하는 자)만이 모였으니, 저마다 잘나서 말썽이 많았다. 당시의 많은 사연을 어찌 다 기록하랴.
25 내가 제주도에서 3년 동안 어떤 고통이라도 이길 수 있는 수련을 하였기로 참았지, 당장 천당이라도 귀찮은 일들이 많았다. 하나님만 믿고 닦은 신앙으로 웃으면서 견디었다. 자화자찬이나 5년 동안 내가 아니었다면 부산을 누가 지켰으랴 하는 생각도 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