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토성산의 삶과 노적성해의 삶
삶의 모든 과정이
노적성해(露積成海)가 아닐까.
우리 누구나 자신의 바다를 이루기 위해
매순산 이슬을 하나하나 쌓아가는 중이다.
(윤은주, ‘고 3딸의 노적성해’, 경남도민일보 2015. 8. 11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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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에 게재된 수필가 윤은주의
‘고 3딸의 노적성해’라는 글을 읽었습니다.
수능을 앞두고 있는 딸의 노트 표지에 적힌
‘노적성해’라는 한자성어를 보며 생각한 글입니다.
그 내용은 대략 이렇습니다.
국어와 영어 성적은 괜찮았지만,
수학 성적은 만족할 수 없었습니다.
고 3이 되면서 수학 공부에 매달렸습니다.
하루 11시간이 넘게 공부를 하기도 했습니다.
노트는 문제 풀이로 빼곡 채워졌습니다.
열권이 넘는 그의 노트 표지마다
한자성어가 빠짐없이 적혀 있었습니다.
‘노적성해(露積成海)’
이슬이 모여 바다를 이룬다는 뜻입니다.
책상을 정리하다 그 노트들을 본
딸의 엄마는 콧등이 시큰해졌습니다.
쉽게 풀리지 않는 문제를 놓고 낑낑대며
씨름을 했을 딸을 떠올렸기 때문입니다.
노트에 빼곡 적힌 문제 풀이의 흔적들이
한 방울 한 방울의 이슬로 보였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바다를 이루기 위해 쌓은 이슬 말입니다.
수필가인 엄마는 딸에게서 배웠습니다.
아침볕에 허무하게 스러지기도 하고,
풀잎에 닿기도 전에 사라지는 그 사소한 이슬이
자신의 인생이라는 바다를 이루는 것이기에
그 어떤 순간도 소홀히 할 수 없음을.
글을 읽으며 나는 생각합니다.
왜 딸은 노력을 뜻하는 수많은 사자성어 중에
‘노적성해(露積成海)’를 썼을까 의문을 품어 봅니다.
적토성산(積土成山), 우공이산(愚公移山),
수적천석(水滴穿石), 적소성대(積小成大)와 같은
사자성어들도 많이 있는 데 말입니다.
그러다 ‘이슬(露)’이라는 글자에 주목합니다.
한 줌의 흙은 눈에 보입니다.
쌓은 만큼 조금씩 높아지는 게 보입니다.
하지만 이슬은 금세 눈에서 사라집니다.
아무리 모아도 쌓이는 게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다보니 흙으로 높은 산을 만드는 것보다
이슬로 바다를 이루는 것이 더 어렵습니다.
흙으로 쌓아 산을 만드는 것은
겉으로 자신을 높고 크게 합니다.
남들도 자신을 알아볼 수 있게끔
외형을 높게 하는 노력입니다.
몸집을 크게 하는 노력입니다.
이슬을 모아 바다를 이루는 것은
안으로 자신을 깊고 넓게 합니다.
자신 스스로도 잴 수 없을 정도로
내면을 넓게 하는 노력입니다.
마음을 깊게 하는 노력입니다.
수필가의 딸이 노트에
적토성산(積土成山)이 아닌
노적성해(露積成海)를 적은 이유는
눈에 보이는 성적을 높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진짜 자신의 실력을 깊게 하기 위해서 공부한다는
뜻을 먼저 세웠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마치 율곡 이이가 공부를 하기 전에는
과거 시험에 합격하겠다는 뜻이 아닌
성인이 되겠다는 뜻을 세우라고
말한 것처럼 말입니다.
적토성산(積土成山)도 하고
노적성해(露積成海)도 하는 삶이면 좋겠습니다.
하지만 둘 중에 굳이 하나를 선택하라면,
먼저 어떤 삶을 선택하겠습니까?
겉으로 드러나는 적토성산의 삶보다
내 마음을 깊고 넒게 하는 노적성해의 삶을
먼저 선택하는 사람이 되었으면 합니다.
..................박승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