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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의 티와 나의 들보(마태복음 7장 1~5절)
여러분, “타타타”라는 말의 뜻을 아십니까? 가요제목으로도 널리 알려진 말이지요. 타타타는 ‘있는 그대로’라는 뜻의 산스크리트어입니다. 한자로 ‘진여(眞如)’ 혹은 ‘여여(如如)’라고도 합니다. 사람이나 사물을 있는 그대로 바라 보는 것입니다. 이렇고 저렇고 하는 가치평가나 판단이 개입되지 않은 순수한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말합니다. 신라 불교의 유명한 두 스님, 원효와 의상의 이야기를 여러분도 잘 아실 것입니다. 불교에 대해 더 많은 공부를 하기 위해 당나라로 길을 떠났습니다. 길을 가던 중 날이 어두워지자, 두 스님은 황폐한 무덤에서 하루 묵게 되었습니다. 잠을 자던 원효는 갈증이 너무 심해, 잠에서 깨었습니다. 물을 찾다보니 다행히도 곁에 있던 바가지에 물이 담겨있어 마셨습니다. 얼마나 목이 말랐던지 그 물이 달게 느껴질 정도였습니다. 아침에 일어나 곁을 보니 바가지는 없고 웬 해골에 시체 썩은 물이 담겨있었습니다. 간밤에 자신이 마신 그 달디 단 물이 알고 보니 바로 그 해골에 담긴 시체 썩은 물이었던 것입니다. 이 사실을 알자마자 원효는 즉시 속이 울렁거리며 구역질이 났습니다. 이때 원효는 크게 깨달은 바가 있어 이렇게 외쳤다는군요. “부처의 가르침에 ‘모든 세상이 단지 나의 마음에 달려있고(三界唯心), 모든 대상들이 단지 나의 의식에 달려있다(萬法唯識).’라고 했다. 그러기에 아름다움과 추함은 나에게 있지, 실제로 물에 있지 않다는 것을 알겠구나.”
목이 마른 것도, 목이 말라 앞뒤 안 가리고 해골에 담긴 물을 마신 것도, 그 물을 마시고 달다고 느끼며 좋아했던 것도 모두 원효의 마음이었습니다. 그 물은 원래 해골에 담겨 있는 물이었을 뿐입니다. 원효의 마음이 달다, 구역질난다하며 왔다 갔다 한 것이었지, 물도 그대로요, 해골도 그대로요, 원효도 그대로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있는 그대로’를 말하는 ‘타타타’의 의미입니다.(강신주, 『매달린 절벽에서 손을 뗄 수 있는가?』 43쪽 참고)
원시림에 사는 원주민들에게 애벌레는 아주 맛있는 음식일 뿐 아니라 단백질 공급을 위해 중요한 영양수단입니다. 그러나 우리 같은 도시민들에게 그 애벌레는 단지 징그럽고 먹을 수 없는 혐오스러운 것일 뿐입니다. 바퀴벌레 같은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태국 사람들에게 바퀴벌레는 맛있는 간식거리입니다. 그러나 우리나라 사람들에게는 쳐다보기도 싫은 끔찍한 해충에 불과합니다. 여기서 혐오스럽다거나 맛있다는 것은 태국 사람이나 원주민과 우리나라 사람들의 가치판단일 뿐입니다. 애벌레는 원래 애벌레요, 바퀴벌레는 원래 바퀴벌레일 뿐입니다. 있는 그대로보자면 혐오스럽다 맛있다는 나중 문제일 뿐입니다. 이렇게 혐오식품에 대해서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는데, 하물며 사람에 대해서는 어떻겠습니까? 우리가 다른 사람에 대해 내리는 수많은 판단이나 가치 평가, 예를 들어 밉상이다, 예쁘다, 추하다 등의 평가는 얼마나 헛되고 무의미합니까?
예수님의 “비판하지 말라”는 말씀은 이런 맥락에서 이해해야 하지 않을까요? 형제와 나 사이에 티와 들보라는 장애물들이 끼어 있습니다. 그로 인해 나 자신과 형제를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실을 주님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보지 못하느냐. 보라 네 눈 속에 들보가 있는데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하겠느냐.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
말씀을 정리해보죠. 여기서 주님은 비판하는 사람의 특징을 티와 들보라는 재미있는 비유로 풍자를 하셨습니다. 비판하는 사람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그는 형제, 즉 다른 사람의 눈 속에 있는 티를 먼저 보았다는 점입니다. 그는 형제의 눈 속의 티를 먼저 보았고, 형제의 티를 먼저 빼겠다고 했습니다. 주님께서는 비판하는 사람의 특징을 비웃으십니다. 매우 우스운 장면입니다. 자세히 살펴야 겨우 보일랑 말랑한 티를 먼저 보았고, 자신의 앞을 딱 가로막을 만큼 커다란 들보는 보지 못하고 있는 형국은 코미디의 한 장면과도 같습니다. 비판하는 사람은 먼저 다른 사람의 티를 보는 사람입니다. 그 사람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합니다. 아주 작은 티를 흠잡느라 그보다 훨씬 큰 그 사람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합니다. 아주 작은 티로 그 사람 전체를 판단합니다. 하지만 주님은 실상을 말씀하십니다.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실상은 형제의 눈에 있는 티를 제거하라가 아닙니다.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를 먼저 빼어라.’입니다. 형제의 티가 문제가 아니라, 네 눈에 있는 들보가 문제입니다. 주님의 비유를 잘 보십시오. “형제의 눈에 있는” 것은 티요, “네 눈에 있는” 것은 들보라 하십니다. 여기서 들보는 커다란 통나무 혹은 원목이고, 티는 그 나무를 자를 때 떨어지는 톱밥 정도로 이해하면 됩니다. 티는 자세히 들여다봐도 찾기 어려운 매우 작은 크기입니다. 반면에 그 원목은 찾을 필요도 없이 쉽게 눈에 띄는 엄청난 크기입니다. 자기 눈 속에 큰 통나무가 들어와 앉았는데, 다른 사람의 눈에 있는 아주 작은 조각인 티끌이 눈에 보일 리가 없다는 의미죠.
여기서 더 큰 문제는 무엇입니까? 남의 눈에 있는 잘 보이지도 않는 티끌입니까? 자신의 눈에 들어앉은 통나무입니까? 주님의 의도는 이렇습니다. 남의 잘못이 아무리 크고, 남의 허물이 아무리 대단해도, 그것을 주님은 티라고 표현하십니다. 반면에 자신의 흠은 아무리 작은 것도 남의 것에 비하면 통나무처럼 큰 것으로 알라는 것이지요. 다른 사람이 무슨 잘못을 저지르던, 그 어떤 잘못보다 더 큰 잘못은 바로 그 잘못을 판단하고 정죄하는 잘못이라는 사실입니다. 다른 이에 대한 판단이 그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보지 못하게 가로막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자세히 살펴보면,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본다.”고 하십니다. 자기 자신의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한다.”고 하십니다. 본다는 말은 그냥 보는 것을 의미합니다. ‘깨닫다’는 말은 ‘주의 깊게 관찰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티와 들보 각각의 사물의 크기를 생각하면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를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는 주님의 말씀에는 일종의 역설이 담겨 있습니다. 위에 언급한 것처럼, ‘티’는 티끌이나 먼지 같은 크기여서 자세히 들여다보지 않으면 볼 수 없습니다. 반면에 들보는 크기가 커서 일부러 관찰하지 않아도 다 보이는 큰 물체여서 애쓰지 않아도 그냥 보입니다. 그렇다면 ‘본다.’와 ‘깨닫지 못하느냐’는 동사는 위치가 바뀌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네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웬만해서는 깨닫지 못할 것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그냥 보이지 않느냐’라고 해석할 수도 있겠습니다. 일부러 애써서 자세히 관찰해도 볼 수 있을지 없을지 모를 아주 작은 다른 사람의 티는 그렇게 잘 보면서, 그냥 보아도 확실히 눈에 띄는 네 눈 속에 있는 대들보 같은 크기의 흠은 그렇게도 네 눈에 띄지 않느냐는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그냥 있는 보이는 대로 보아 넘겨야 할 다른 사람의 티는 아주 심사숙고하며 판단을 내리고, 주의 깊게 살피고 반성해야 할 자기 자신의 큰 잘못에 대해서는 그냥 있는 그대로 보아 넘긴다는 말입니다. 일반적으로는 다른 사람에게 냉혹하고 엄격한데, 자기 자신에게는 얼마나 관대합니까? 다른 이에게서는 항상 최악의 결점을 발견하고 최악의 판단을 내리면서, 자기 자신에게는 얼마나 최선의 판단을 적용합니까.
그래서 주님은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고 하셨습니다. “외식하는 자여” 먼저 남의 눈에서 티를 발견하는 이들, 즉 남을 비판하는 이들을 주님은 “외식하는 자”라고 부르십니다. 위선자라는 말이지요. 위선이라는 말에는 ‘기만’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기만이 무엇입니까? 기만은 ‘남을 그럴듯하게 속인다.’는 뜻입니다. 남에게 보기 좋게 훌륭하게 보이게 속이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을 향해 종종 ‘외식하는 자!’라고 하셨습니다. 성경은 바리새적인 태도에 대해 이렇게 기록합니다.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눅 18:9)
성전 맨 앞에 서서 기도하던 바리새인은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눅 18:11)라고. 반면에 그에게 멸시 당했던 세리는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르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13)
바리새인이 한 일은 무엇입니까? 그들은 “먼저” 다른 사람들에게서 죄를 발견했습니다. 다른 사람의 잘못, 다른 사람의 흠집을 발견하는데 선수들이 바로 바리새인들입니다. 사기꾼에게서 사기 친 죄를, 도둑질 한 자에게서는 도둑질 한 죄, 간음한 여인에게서는 간음한 죄를, 형사처럼 기가 막히게 잘 발견했습니다. 또 같은 시간 같은 장소에서 함께 기도하던 사람이 세리라는 죄인임을 단박에 알아차렸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는 자신은 그러한 죄인들과는 다른 사람임을 자랑하며 기도했습니다. 반면에 세리는 그 자리에 함께 기도하던 바리새인은 상관하지 않고 자신의 잘못에 대해서만 기도했습니다. 옆에 있는 사람이 죄인인지 아닌지 신경 쓰지 않고 오직자신의 잘못에 대해서만 그것도 가슴을 치며 한탄하며 자신의 모습을 하나님께 맡기며 기도했습니다. 자신을 ‘죄인이니 불쌍히 여겨 달라’는 간구와 함께. 세리는 먼저 자신이 죄인임을 분명히 알았습니다. 함께 있던 바리새인도 분명히 알았습니다. 그 세리가 죄인임을! 그러나 바리새인은 무엇을 못 보고 있었습니까? 바리새인은 남의 결점을 보고 그것을 죄로 정죄하는, 감히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심판의 권을 침해했다는, 즉 비판의 죄를 범하고 있다는 사실을 까맣게 모르고 있었습니다. 왜요? 남을 먼저 비판하느라!
바리새인의 위선은 두 가지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자신을 의롭다고 믿는’ 것과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행위입니다. 자신을 의롭다고 여기는 정도가 아닙니다. 자신의 의로움에 대한 확신이 있습니다. 여기서 ‘믿는다.’는 말은 확신하다, 신뢰하다, 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 말은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 할 때 그 믿음과는 다른 단어입니다. 이것은 ‘설득하다, 설득 당하다, 경청하다’ 이런 여러 가지의 의미를 갖는 단어입니다. 정리하자면 자신에게 설득당하거나, 자신을 끊임없이 설득한 결과로서 생기는 믿음입니다. 그는 자신의 말만 믿고 자신의 말만 듣습니다. 어떤 말이요? 자신이 의롭다는 자신의 말과 생각 말입니다. 그 결과로 자신에게는 매우 관대하고 호의적입니다. 그런데 자신이 의롭다고 믿는 이 믿음은 어디서 오는 걸까요? 그것은 타인들은 자신보다 의롭지 못하다는 상대적 관념에서 나옵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것입니다. ‘멸시하다’는 말은 ‘하찮게 여긴다.’는 뜻입니다. 다른 사람이 하찮게 여겨지는 이유가 뭔가요? 자신이 의롭고 자신은 그들보다 잘났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자신이 의롭고 잘났다는 생각은 타인은 하찮다는 생각에서 나옵니다. 따라서 이 둘은 항상 같이 다닙니다. ‘자신을 의롭다고 믿는’ 것과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것. 이 둘은 쌍둥이입니다.
여기서 다른 사람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게 하는 원인은 어디에 있습니까? 바로 자기 자신에게 있습니다. 자신이 옳다는 자신의 생각에 설득당한 그 믿음에 자신이 속은 것이죠. 자신에게 있는 들보를 보지 못하고, 다른 이의 티끌 같은 허물을 더 크게 본 것은 모두 자기 스스로에게 속은 상태라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자기에게 속은 상태를 “희론”이라는 용어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철학자 강신주 박사에 의하면, 우리의 판단이 잘못되는 이유는 희론에 사로잡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희론(戱論)은 희롱하는 논리라는 말입니다. 우리의 올바른 인식을 희롱하는 논리 말입니다. 나 자신은 의롭고, 그로 인해 다른 사람은 멸시하는 자세가 바로 희론입니다. 희론은 있는 그대로의 상황을 보지 못하게 우리의 마음을 왜곡시킵니다. 사람이나 사물을 왜곡해서 보게 하는 일종의 마음의 색안경과 같습니다.(강신주, 45쪽) 남에 대해서 옳다 틀리다, 좋다 나쁘다 평가와 판단을 내리는 것이 바로 희론입니다. 내 눈 속에 들어앉은 커다란 들보가 바로 희론인 것입니다. 희론에 사로잡혀 있으니 내 눈에 있는 크디큰 들보는 눈에 안 들어오고 남의 눈에 있는 좁다란 티가 들어오는 것이지요. 항상 내가 문제입니다. 다른 사람의 눈에 있는 티가 문제가 아니라, 내 눈에 있는 들보가 문제요, 그 큰 들보를 깨닫지 못하는 게 문제입니다.
한 사람의 인격적 고매함은 홀로 독야청청해서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한 사람의 인격이 훌륭하다는 것은 타인과의 관계에서 결정됩니다. 다른 이를 대하는 관대한 태도, 타인을 존중할 줄 아는 인격의 여유로움이 그 사람의 인격을 훌륭하다 평하게 합니다. 아무리 잘나고 똑똑해도 다른 사람을 판단하고 정죄하는 사람은 결코 인격적이라, 성숙한 사람이라 할 수 없습니다. 반면에 아무리 하찮고 보잘 것 없는 사람에게라도 그의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존중해주고, 그것을 일깨워주며, 상대가 누구냐 와 상관없이 상대 앞에서 겸손하게 숙일 수 있는 사람, 상대를 높일 줄 아는 사람은 존경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상대를 존중하고 나보다 낫게 여기며, 상대에게서 최선을 볼 줄 아는 사람이 사실은 진정으로 건강하고 아름다운 자존감을 갖출 수 있습니다.
위선자는 맹인 안과의사와 같습니다. 눈에서 티를 빼는 행위인 안과시술은 매우 예민하고 조심스러운 치료과정입니다. 그런데 눈이 보이지 않는 안과의사가 그 일을 잘 감당할 수 있을까요? 남을 비판하는 행위는 단지 그 사람의 사회적 위신이나, 명예나, 평판을 다루는 데 그치는 일이 아닙니다. 그것은 그의 영혼을 다루는 매우 신중하고 위험한 일입니다. 그것은 오직 우리 영혼의 의사이신 주님만이 할 수 있는 일입니다. 타인의 영혼을 다루는 일은 보다 더 중요한 어떤 일이 선행되고 완료되지 않고는 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것은 바로 자기 자신의 들보를 빼내는 일이입니다. 바둑의 원리인 위기십결 중, “공피고아(攻彼顧我)”라는 말이 있습니다. 적을 공격하기 전에 반드시 자기 자신을 살피라는 뜻입니다. 하물며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진 복잡하고 섬세한 존재인 사람을 비판하는 일을 우리는 얼마나 함부로 자기 자신을 살피는 일이 없이 하고 있나요. 남을 비판하는 일은 주님만이 하실 수 있는 만큼 우리도 주님의 마음, 주님처럼 그 마음을 갖지 못한다면 함부로 나서서는 될 일이 아닙니다. 사랑의 마음, 친구의 마음, 남의 눈에서 발견된 흠과 결점이 바로 나의 결점인 것처럼, 나 자신에게 대해서 아파하는 것처럼 하지 않고서는 해서는 안 될 일입니다.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 그러면 자신의 들보를 먼저 뺀 자들은 남을 비판하거나 정죄해도 된다는 말씀일까요? 남의 결점이나 허물을 지적해도 된다는 말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밝히 보는 눈은 어떤 눈인가요? 마태복음 6장 22절에서 우리는 “성한 눈”이 있으면 온 몸이 밝을 것이라는 사실을 배웠습니다. 여기서 “성한 눈”은 시력이 좋은 눈이 아니라, ‘관대하고 너그럽고 자비로운’ 눈이었다는 사실이 기억나십니까? 성한 눈, 즉 관대하고 너그럽고 자비로우며 사랑이 가득한 눈을 가진 사람만이 밝히 볼 수 있습니다. 바로 남의 잘못, 남의 죄, 남이 저지른 살인이나 간음이나 도적질보다도, 그들을 판단하고 정죄하여 범죄자로 규정함으로써 스스로 하나님의 자리를 넘보려는 자신의 잘못이 들보와 같이 더 큰 죄라는 사실을 밝히 보게 될 것입니다. 그 사람은 다른 사람의 허물이나 흠을 지적하고 정죄하기보다는 그것을 함께 아파하며 남의 잘못이 자신의 잘못인 것처럼 대신 끌어안는 사람입니다. 이렇게 자비로운 마음만이 살아있는 마음, 생명이 있는 마음입니다. 이것이 주님의 마음입니다.
자비라는 말을 산스크리트어로 ‘마이트리카루나’라고 합니다. ‘마이트리’는 ‘우정’을 가리키고, ‘카루나’는 ‘연민, 동정’을 의미합니다.(강신주, 299쪽) 그러니까 자비는 동등한 처지에 있는 사람에 대해 느끼는 안타까운 마음, 불쌍한 마음을 의미합니다. 높은 사람 낮은 사람, 잘난 사람 못난 사람이 아니라, 나와 동등한, 같은 처지에 있는 사람에 대해 비난이나 정죄 감보다는 연민과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갖는 것이 바로 자비입니다. 나도 언젠가 실수할 수 있고, 나도 언젠가 비참해질 수 있다는 것이지요.
남을 판단할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나님 한분뿐이십니다. 따라서 남을 판단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자리를 넘보는 죄를 범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산상설교의 결론부에서 비판하지 말라는 말씀부터 꺼내시는 이유가 여기 있는 것 아닐까요? 반면에 우리가 판단하고 정죄하기를 멈추고 사람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면서 그에게 자비롭게 대한다면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하나님을 닮는 유일한 길입니다. “너희 아버지의 자비로우심 같이 너희도 자비로운 자가 되라”(눅 6:36)
남을 판단한다는 것이 얼마나 잘못됐고 어리석은지요. 전문가들의 판단도 마찬가지입니다. 오히려 전문가들이 자신의 편견에 대한 지나친 확신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에 판단을 그르칠 때가 많습니다. 대단한 비틀즈도 첫 오디션에서 성공 가능성이 없다고 퇴짜를 맞았습니다. 유명한 팝가수인 엘비스 프레슬리도 첫 오디션에서 가수로서는 성공하기 어려우니 다른 직업을 알아보라는 핀잔을 들었습니다. <해리포터> 시리즈의 작가 조안 롤링은 자신이 쓴 그 대단한 작품인 <해리포터>가 아동물로서는 너무 길고 팔릴 가능성이 없다며 여러 군데에서 출판을 거절당했습니다.(장석주, 『인생의 한 수를 두다』 250쪽) 사람의 판단은 이렇게 대부분 잘못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타인의 흠은 그 아무리 큰 것이라도 눈에 잘 띄지도 않는 티끌과 같습니다. 하지만 나의 흠은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커다란 대들보와 같습니다. 주님이 말씀하신 이 진리를 깨닫지 못하고 남을 판단하는 마음은 죽은 마음입니다. 사람이나 동물이 죽으면 그 신체에 경직이 옵니다. 몸이 굳는 것이지요. 죽은 몸은 굳습니다. 반면에 살아있는 몸은 부드럽습니다. 마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죽은 마음은 딱딱하게 굳은 마음입니다. 죽은 마음은 굳었기 때문에 거칠고 생기가 없습니다. 살아있는 마음은 부드럽고 여유가 있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관대하고 사랑과 자비를 간직한 마음입니다. 남을 판단하기 보다는 불쌍히 여기고 이해합니다. 자비의 마음입니다. 다른 이를 안아주고 받아줍니다. 있는 그대로 바라봅니다.
남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며 자비심을 간직한다면 당신의 마음은 살아 있는 마음입니다. 반면에 누군가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지 못하고 판단하고 정죄한다면 당신의 마음은 딱딱하게 굳은 마음, 즉 죽은 마음입니다. 살아 있는 마음, 자기 자신과 다른 사람을 있는 그대로 올바로 바라보지 못하게 하는 희론에서 벗어난 마음, 자비로운 마음을 회복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