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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경 강좌 제8강 - 무비스님
金剛般若波羅蜜經
제8강 제10분 장엄정토분 (莊嚴淨土分 第十)
佛告須菩提하사대 於意云何오 如來가 昔在燃燈佛所하야 於法에 有所得不아
불고수보리하사대 어의운하오 여래가 석재연등불소하야 어법에 유소득부아
不也니다 世尊이시여 如來가 在燃燈佛所하사 於法에 實無所得이니다
불야니다 세존이시여 여래가 석재연등불소하야 어법에 유소득부아
須菩提야 於意云何오 菩薩이 莊嚴佛土不아
수보리야 어의운하오 보살이 장엄불토부아
不也니이다 世尊이시여 何以故오 莊嚴佛土者는 卽非莊嚴일새 名莊嚴이니다
불야니다 세존이시여 何以故오 莊嚴佛土者는 卽非莊嚴일새 是名莊嚴이니다
是故로 須菩提야 諸菩薩摩訶薩이 應如是生淸淨心이니 不應住色生心하며
시고로 수보리야 제보살마하살이 응여시생청정심이니
不應住聲香味觸法生心이요 應無所住하야 而生其心이니라
須菩提야 譬如有人이 身如須彌山王하면 於意云何오 是身이 爲大不아
須菩提言하사대 甚大니이다 世尊이시여 何以故오 佛說非身이 是名大身이니다
제10, 세상을 장엄하다[莊嚴淨土分]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수보리야,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여래가 옛적에 연등(燃燈)부처님 처소에서 법(法)에 대하여 무엇을 얻은 것이 있는가?”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여래께서는 연등 부처님 처소에 계실 적에 법에 대하여 실로 얻은 것이 없습니다.”
“수보리야,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보살이 세상을 장엄(莊嚴)하는가?”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왜냐하면 보살이 세상을 장엄한다는 것은 곧 장엄이 아니며, 그 이름이 장엄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수보리야, 모든 보살마하살은 반드시 이와 같이 텅 빈[淸淨] 마음을 낼지니라.
반드시 사물에 머물지 말고 마음을 낼 것이며, 반드시 소리와 냄새와 맛과 감촉과 그 외의 어떤 것에도 머물지 말고 마음을 낼지니라.
그래서 머무는 바 없이 그 마음을 낼지니라.[應無所住而生其心]
수보리야, 비유하자면 마치 어떤 사람의 몸이 수미산만하다면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그 몸을 크다고 하겠는가?”
수보리가 사뢰었습니다.
“아주 큽니다, 세존이시여. 왜냐하면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것은 몸이 아니며, 그 이름이 큰 몸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불국토의 장엄
장엄정토(莊嚴淨土)란 ‘정토를 장엄하다’라는 뜻입니다. 정토나 불국토는 불교에서 이 세상을 지칭할 때 쓰는 말이지요. 불국토라고하든 정토라고하든 우리가 사는 이 현실, 이 세상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장엄정토란 ‘이 세상을 장엄하다’라는 뜻이 되는데 무엇으로써 세상을 장엄할 수 있을까요.
아름다운 경치, 좋은 소재로 지은 건물들, 잘 가꾼 공원 등으로 세상을 장엄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불교의 안목은 ‘사람이 세상을 장엄한다’는 것입니다. 한 집안에 훌륭한 사람이 있으면 그 집안은 빛나고 한 나라에 훌륭한 인물이 많으면 그 나라가 빛이 나며 이웃나라에서 함부로 하지 못합니다. 그러한 안목으로써 ‘보살이 세상을 장엄한다’ 는 것은 불교적인 일반 상식이며 보편화된 인식입니다. 우리 불자들은 이 점을 잘 알고 있고 상당히 중요시 합니다. 때문에 금강경에서도 장엄정토를 이야기 하면서 보살이 정토를 장엄하는 문제를 등장시킵니다. 소위 세상을 아름답게 꾸미고 세상을 평화롭게 하고 하는 주역인 보살이 어떤 관념에 떨어지거나 상을 내면서 그러한 일을 하고 있다면 불교적인 안목, 특히 금강경의 안목으로 볼 때 아주 곤란하다는 것입니다. 상이나 관념이 있다면 올바른 장엄정토가 되지 못하며, 세상에 제대로 공헌하지 못한다는 것이지요.
佛告須菩提하사대 於意云何오 如來가 昔在燃燈佛所하야 於法에 有所得不아
不也니다 世尊이시여
불고수보리하사대 어의운하오 여래가 석재연등불소하야 어법에 유소득부아
불야니다 세존이시여
보살의 장엄불토를 언급하기에 앞서 부처님은 우선 부처님 전생의 수행에 대해서 묻습니다. ‘수보리야 어떻게 생각하는가, 여래가 옛날 연등부처님 처소에 있으면서 진리의 깨달음에 대해서 얻은 바가 있는가’ 석가모니 부처님은 과거 인행시에 연등부처님이라고 하는 부처님 처소에서 수행을 잘 해서 그 연등부처님으로부터 수기를 받았습니다. 그 사실은 석가모니 부처님 전생에 대한 불교적 상식이고 아주 중요한 일입니다. 때문에 금강경의 안목으로써 부처님이 그 문제를 들고 나온 것입니다.
그런데 감히 수보리는 ‘아닙니다. 세존이시여’라고 답합니다.
스승이 제자의 깨달음에 대해서 ‘설사 깨달음의 소득을 얻었다고 하여도 그러한 관념에 사로잡혀 있다면 온전치 못하다’라고 말할 수는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제자인 수보리가 스승인 부처님의 깨달음에 대한 성취를 부정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생각하면 청천벽력 같은 이야기지요. 대단한 사건이예요. 그만큼 철저히 관념에 사로잡히지 말라는 뜻입니다. 좋은 일을 했을 때, 혹은 성공적인 삶을 살았을 때 우리가 그에 대한 관념에 사로잡혀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如來가 在燃燈佛所하사 於法에 實無所得이니다
여래가 재연등불소하사 어법에 실무소득이니다
수보리는 ‘여래께서 연등부처님의 처소에 계실 때 진리의 깨달음에 대해서 법에 대해서 실로 얻은 바가 없습니다’ 라고까지 부연설명 합니다.
제자가 법에 대한 스승의 성취까지 부정하는 이 대단한 사실에 우리가 좀더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습니다. 사소한 공로나 공헌, 자기가 행한 좋은 일에 대해서 자랑하고 싶고 생색내고 싶어서 안달을 하는 우리들은 이런 데서 큰 교훈을 얻어야 합니다.
須菩提야 於意云何오 菩薩이 莊嚴佛土不아
수보리야 어의운하오 보살이 장엄불토부아
부처님은 과거 연등부처님에게서 앞으로 성불하리라고 하는 수기를 얻은 것과, 또 자신의 깨달음까지도 제자로부터 부정을 당했습니다. 그리고 다음 수순으로 보살들이 이 세상을 장엄하는 문제를 거론합니다.
우리도 한 마을에서 누군가가 고등고시를 패스하면 현수막을 걸고 자랑합니다. 한 사람의 성공이 그가 사는 마을을 자랑스럽게 만들고 빛나게 만듭니다. 이것이 그 마을을 장엄하는 일입니다. 보살이 이 세상을 장엄하는 일은 그에 비견할 바가 아니지요. 그런데 금강경에서는 이 문제를 다시 생각해 보게 합니다. 보살이 크게 헌신하고 세상에 보탬이 되고 빛이 된다 하더라도 그에 대해서 어떤 관념이나 상에 사로잡혀있거나 생색을 낸다면 그것은 온전치 못하다는 점을 지적합니다.
‘수보리야 어떻게 생각하는가 보살이 세상을 장엄하는가’ 부처님이 물었습니다.
不也니이다 世尊이시여 何以故오 莊嚴佛土者는 卽非莊嚴일새 是名莊嚴이니다
불야니이다 세존이시여 하이고오 장엄불토자는 즉비장엄일새 시명장엄이니다
수보리는 부처님이 수기 얻는 것도 부정했는데 하물며 보살이 불토를 장엄하는 것에 대해서는 말할 필요가 없이 ‘아닙니다. 세존이시여’라고 확실하게 부정을 합니다.
금강경은 짧은 경전인데도 ‘즉비(卽非)’라고 하는 말이 스무 번 정도 나옵니다. 단어의 빈도수로 봐서도 ‘금강경은 즉비의 철학이다’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금강경을 푸는 하나의 좋은 열쇠가 됩니다.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왜냐하면 세상을 장엄한다고 하는 것은 곧 장엄이 아닐새 이 이름이 장엄일 뿐이다.[何以故莊嚴佛土者 卽非莊嚴 是名莊嚴]’
앞에서는 시명(是名)이라는 말이 생략되었는데 여기서부터는 즉비(卽非) 다음에 시명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생략이 되어도 언어구조상 뜻은 시명이라고 하는 말을 포함합니다.
‘A는 卽非A일새 是名A이다’ 라고 하는 논리구조가 계속 되지요. 이 논리는 어떤 것에도 해당이 됩니다. 예를 들어서 이름 없던 작은 마을에 고등고시를 패스한 사람이 나와서 그 마을이 어느 순간 ‘세상에 떴다’면 틀림없이 그 마을이 장엄되었습니다. 그런데 무엇이 실제로 장엄일까요. 그렇게 되기까지 우선 그 마을이 있었고, 부모가 있었고, 그 부모의 부모가 있었고, 계속해서 찾다보면 그가 혼자서 마을을 장엄했다고 할 수 없습니다. 보살이라고 하는 훌륭한 사람이 있어서 설사 세상을 빛냈다손 치더라도 그것은 결코 그 사람 개인의 일이 아니지요. 모든 사람, 모든 환경이 어우러져서 그러한 현상을 만들어 냈습니다. 이 역시 곰곰이 생각해 보면 장엄했다고 하는 그 실체를 찾을 수가 없습니다.
깊이 사유하면 그러한 사실을 명확히 알 수가 있어요. 그런데 우리는 그만 환상에 사로잡혀서 자기가 한 일에 들떠버립니다. 우쭐하거나 우월감에 빠지지요. 그런데 그 들뜸 역시 하루쯤 지나면 아무것도 아니어서 허전합니다. 모든 것은 그 이름이 그러할 뿐이지요.
이러한 문제는 상당히 중요합니다. 부처님께서 연등불에게 수기를 얻은 것도 그렇고, 보살이 세상을 아름답게 빛내는 것도 그렇습니다. 당사자가 그에 대해서 어떤 관념에 떨어져 있다면 그것은 결코 온전한 것이 아닙니다. 관념을 가지는 순간 온갖 좋지 못한 것들이 따르게 되지요.
是故로 須菩提야 諸菩薩摩訶薩이 應如是生淸淨心이니
시고로 수보리야 제보살마하살이 응여시생청정심이니
‘장엄을 했다 하더라도 결코 장엄이 아니다.’ 세상을 장엄했다, 공헌했다, 빛이 되었다 하는 에 대한 일체 관념을 버려라, 비워라, 그래서 ‘수보리야 모든 보살마하살이 응당히 꼭 이와 같이 청정한 마음을 내라’고 하였습니다.
‘청정한 마음[淸淨心]’, 중요한 말이 나왔습니다. 불교에서는 청정이라는 말을 많이 씁니다. 지저분하던 곳을 청소했을 때 아주 청정하다 깨끗하다는 표현도 씁니다만 불교에서는 그런 뜻이 거의 없습니다. 불교에서 청정은 대부분 ‘아주 뛰어나고 훌륭하다’ 아니면 ‘텅 비었다’라는 뜻으로 씁니다. 그 중에 ‘텅 비었다’는 것을 ‘청정’이라고 표현 할 때가 많습니다.
‘보살은 반드시 텅 빈 마음 내야한다’는 것은 ‘어떤 관념에도 사로잡히지 않는 자기를 완전히 비운 마음을 내야한다’는 것이지요.
不應住色生心하며 不應住聲香味觸法生心이요 應無所住하야 而生其心이니라
불응주색생심하며 불응주성향미촉법생심이요 응무소주하야 이생기심이니라
이 대목은 금강경 제2사구게입니다.
‘불응주색생심(不應住色生) 불응주성향미촉법생심(不應住聲香味觸法生心)응무소주(應無所住) 이생기심(而生其心)’ 이렇게 네 구절이기 때문에 사구게이지요.
‘어디에도 우리가 마음을 멈추고 거기에 집착을 해서는 안 된다. 응당히 어떤 사물[色]에 머물러서 마음을 내서도 안 되고 성 향 미 촉 법에 머물러서 마음을 내서도 안된다.’ 이것이 텅 빈 마음, 청정심입니다.
색성향미촉법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 안이비설신의의 대상입니다. 이것이 세계를 구성하고 있는 모든 것이지요. 불교에서는 이런 정의가 뛰어납니다. 어떤 철학 어떤 종교에도 세상을 구성하고 있는 문제에 대해서 이렇게 정확히 가닥을 쳐서 분류한 이론이 없지요.‘사물이나 소리나 향기나 맛이나 감촉이나 어떤 법에 머물러서 마음을 결코 내지마라.’
‘응당히 머무르는 바 없이 그 마음을 낼지니라.[응무소주(應無所住) 이생기심(而生其心)]’이라고 하는 말은 사찰에서도 많이 볼 수 있는 유명한 말입니다. 사찰이나 불자들의 집에 이러한 구절 하나쯤은 걸어놓을 필요가 있지요.
‘이것이다’라고 하는 고정된 관념을 고집하고 거기에 목을 매고 매달리지 말라는 것입니다. 금강경 전체와 관계없이 이 구절만 독립시켜 놓고 생각해봐도 ‘응무소주 이생기심’이라는 말에는 깊은 교훈이 있습니다.
육조혜능스님도 이 구절에서 마음이 열렸습니다. 이 구절을 처음 들을 당시 육조스님은 낫놓고 기역자도 모르는 무식한 나무꾼 총각이었습니다. 불교가 뭔지, 부처님이 세상에 계셨는지, 사찰이 있는지조차 모르고 하루하루 나무해서 시장에 팔아다가 겨우겨우 연명하는 사람이 어느날 나무를 팔러 갔다가 우연히 금강경에서 이 대목을 읽는 소리를 듣고 마음이 환희 열렸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견성인지 성불인지도 몰랐습니다. 자기가 이 구절을 듣고 마음에 어떤 깨달음이 왔는데 그것이 견성이구나 하는 것을 나중에사 알게 된 것입니다.
견성이니 성불이니 자기 성품을 본 사람이니 하는 말은 그러한 사실이 먼저 있은 후에 사람들이 그것을 설명하느라 지어낸 말이지요. 그것이 뭔지 몰라도 육조스님처럼 견성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일자무식꾼이었던 육조스님은 금강경의 이 대목을 듣고 깨달은 내용을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나의 자성이 본래 저절로 청정하다는 사실을 상상이나 했겠는가?
나의 자성이 본래로 불생불멸이라는 사실을 상상이나 했겠는가?
나의 자성이 본래 저절로 모든 것이 갖추어져있다는 사실을 상상이나 했겠는가?
내 자성이 본래로 아무런 동요가 없다는 사실을 상상이나 했겠는가?
내 자성이 능히 일체 만법을 만들어 낸다는 사실을 상상이나 했겠는가
[何期自性本自淸淨. 하기자성본자청정
何期自性本不生滅. 하기자성본생멸
何期自性本自具足. 하기자성본자구족
何期自性本無動搖. 하기자성본동요
何期自性能生萬法]?”하기자성능생법
‘내 자신이 아주 더러운 줄 알았는데 본래 아주 훌륭하고 청정한 줄을 알게 되니 신기하다, 사람은 한 순간도 그냥 있지 않고 생멸하는데 우리의 궁극적 차원은 결코 생멸하지 않는다,이 사실을 내가 어찌 상상이나 했겠는가, 엉뚱하게도 이 구절 하나를 듣고 이러한 사실까지도 알게 되었다. 나는 정말 가난하고 아무 것도 없는 백성에 불과 했는데 알고 보니 무한한 보물과 온갖 풍요로움을 내 자신 속에 다 갖추고 있었다, 이 사실을 내가 어찌 상상이나 했겠는가’
육조스님의 오도송은 이렇게 감동에 겨워서 깨달은 바를 탄복하는 내용입니다.
대한불교 조계종은 육조혜능스님이 사시던 조계산에서 그 이름을 따왔습니다. 육조스님의 영향은 우리나라 선불교에도 깊이 미칩니다. 선불교에서는 금강경을 선호하고 소의경전으로 의지하며 수행의 지침, 삶의 지침으로 삼습니다. 그 까닭이 ‘응무소주이생기심’이라고 하는 이 구절에 있습니다.
마음은 응당히 머물지 않게 되어 있습니다. 마음은 끊임없이 변화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마음에 어떤 한가지를 설정하게 되면 그것으로써 틀을 삼고 거기에 매달리게 됩니다. 결정적으로 그것에서 반드시 벗어나야 할 상황이 오면 아주 괴로워하고 갈등을 심하게 합니다. 그런데 갈등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은 본래로 머물지 않게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변화해야 살아있는 마음입니다. 죽은 마음이면 안 변할지 모르지만 살아있는 마음이라면 당연히 변해야 되는 거예요.
출가 전 육조스님은 당시 사람들이 거의 그렇듯이 충과 효가 인생의 절대적인 가치였습니다. 이것만이 전부인 줄 알았어요. 세상 살면서 부모에게 효도하고 나라에 충성하는 것은 당연지사지요. 그러나 그것만이 삶의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이 또 있는 것입니다. 육조스님처럼 오로지 홀로 되신 어머니를 부양하면서 충직하게 살았던 사람이 돌볼 사람도 없는 홀어머니를 두고 당당하게 출가할 수 있었던 것은 인생에 있어서 보다 더 위대한 가치가 있다는 것에 눈을 떴기 때문입니다. 이런 용기가 있어야 됩니다. 그렇다고 모두 다 출가를 하라는 것은 아니지만, 고정관념, 자가만의 틀, 자기가 만든 한계에 너무 그렇게 집착하고 매달리고 의리를 지킨다고 하는 것이 꼭 유익하고 좋은 일만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육조스님은 결연하게 출가를 해서, 한 어머니를 봉양하는 것보다 만천하의 어머니를 다 봉양할 수 있는 길을 택했습니다. 지금까지도 육조스님의 영향은 너무 큽니다. 대한불교 조계종은 육조스님의 덕화를 사모해서 그 이름을 조계종이라고 하고 있으며 육조스님의 법손이 된 것을 아주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육조스님께서 계셨던 조계산 남화선사는 중국 광주에서 얼마 떨어진 소관이라고 하는 작은 도시인데 거기에 한국 불자들이 수시로 드나들면서 육조스님의 덕화를 그리워하고 육조스님의 행적을 탐색합니다. 이 사실 하나를 우리들의 삶에 이끌어다 생각해 봐도 큰 교훈이 됩니다.
須菩提야 譬如有人이 身如須彌山王하면 於意云何오 是身이 爲大不아
須菩提言하사대 甚大니이다 世尊이시여 何以故오 佛說非身이 是名大身이니다
수보리야 비여유인이 신여수미산왕하면 어의운하오 시신이 위대부아
수보리언하사대 심대니이다 세존이시여 하이고오 불설비신이 시명대신이니다.
‘수보리야 비유하건데 만약에 어떤 사람이 몸뚱이가 저 수미산 만하다고 한다면 어떻게 생각하는가 그 몸이 큰가.’
수보리가 말하대 ‘매우 큽니다. 세존이시여 왜냐하면은 설사 그런 몸이 있다고 해도 부처님이 설하신 몸은 이름이 몸입니다.’
수미산처럼 큰 몸은 있을 수도 없지만 설사 오척단신의 작은 몸이라고 해도 상관없지요.
‘부처님께서 설하신 몸은 몸이 아니라 이 이름이 몸입니다’
지금까지 보았던 논리구조라면 그렇게 해석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부처님이 설하신 몸은 몸이 아닌 것이지요. 말이 수미산 같은 큰 몸이지 그런 몸이 어디 있습니까. 가짜라는 것을 아주 쉽게 생각할 수 있지요. 실재하지 않는 것을 두고 이렇게 예를 들었기 때문에 우리는 쉽게 그 큰 몸이 큰 몸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부처님이 설하신 몸은 이 이름이 몸인 것이지요.
장엄정토분에서는 부처님이 과거 연등불처소에서 수기받은 것을 부정하는 것, 보살이 세상을 아름답게 꾸미는 일과 궁극에 가서는 그 어디에도 마음이 머물러서는 안된다는 금강경제2사구게, 그를 통해 육조스님이 깨달음을 얻은 사실을 공부했습니다.
출처 : 염화실
[출처] 금강경 강좌 제8강 - 무비스님|작성자 단장중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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