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주시 주요명소
희방폭포
중앙선 희방사역에서 동북쪽으로 약 4km 떨어진 소백산 기슭에 자리한 희방폭포는 소백산맥의 최고 봉우리인 비로봉(1,439m)으로 올라가는 길목에 있는데, 높이28m로 내륙지방에서 가장 큰 폭포이다.
무더운 여름철, 우거지 잡목과 시원한 폭포가 어우러진 희방폭포는 일등피서지가 되고 있으며, 폭포를 위로 하고 한구비 오르면 고요한 정적 속에 희방사가 자리잡고 있다. 또한 주변에 부석사, 소수서원 등이 있어 소백산 등산길엔 꼭 거쳐 가볼만 한다.
* 희방사
희방역에서 동북쪽으로 4km나 되는 소백산기슭 해발850m 높이에 있으며, 신라 선덕여왕 12년 (643년)에 두운대사가 세웠다. 법당과 훈민정음의 원판과 월인석보 1,2권의 판목을 보존하고 있었으나 6.25전란으로 소실되었다. 그 후 1953년에 중건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으며 은은한 종소리로 유명한 희방사 동종(도 유형문화재 제226호)이 보관되어 있다. 절 입구는 자연림이 우거져 햇빛을 가리고 있다.
영주시 풍기읍 수철리
국립공원관리공단 소백산 관리사무소 054-638-6196, 6796
부석사
부석사는 신라 문무왕(文武王) 16년(676) 해동(海東) 화엄종(華嚴宗)의 종조(宗祖)인 의상대사(義湘大師)가 왕명(王命)으로 창건(創建)한 화엄종의 수사찰(首寺刹)이다. 대사가 당(唐)나라에 유학하고 있을 때 당 고종(高宗)의 신라 침략 소식을 듣고 이를 왕에게 알리고, 그가 닦은 화엄의 도리(道理)로 국론(國論)을 통일(統一)하여 내외(內外)의 시련을 극복하게 하고자 귀국하여 이절을 창건하였으며 우리나라 화엄사상(華嚴思想)의 발원지가 되었다.
부석사라 이름하게 됨은 불전 서쪽에 큰 바위가 있는데 이 바위는 아래의 바위와 서로 붙지
않고 떠 있어 뜬돌이라 한데서 연유하였다 한다. 고려시대에는 선달사(善達寺) 혹은 흥교사(興敎寺)라 불리웠다. 1916년 해체보수시 발견된 묵서명(墨書銘)에 의하면 고려(高麗)초기에 무량수전(無量壽殿) 등을 중창하였으나 공민왕 (恭愍王) 7년 (1358)적의 병화(兵火)를 당하여 우왕(禑王) 2년(1376) 무량수전이 재건되고, 우왕 3년 (1377) 조사당(祖師堂)이 재건되었다.
경내에는 신라시대 유물인 무량수전 앞 석등(국보 제17호), 석조여래좌상(보물 제220호), 삼층석탑(보물 제249호), 당간지주(보물 제255호), 석조기단 등이 있고, 고려시대유물인 무량수전(국보 제18호),조사당(국보제19호),소조여래좌상(국보제45호),조사당벽화(국보제46호),
고려각판(보물 제735호), 원융국사비 등이 있다.
특히,무량수전은 우리나라 최고(最古)의 목조 건물 중 하나이며, 조사당 벽화는 모조건물에 그려진 벽화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현재 유물관 안에 보관되어 있다.무량수전 안에 봉안된
여래좌상은 국내에 전래하는 최고의소상(塑像)이다.무량수전서쪽에 있는 우물은 의상대사의 호법룡(護法龍)이 살았다는 우물이라 전한다.
영주시 부석면 북지1리 148번지 부석사 종무소 054-633-3464
소백산
소백산은 우리민족의 영산이며 영남지방의 진산으로 알려져 있다. 태백산에서 서남으로 갈린 산맥이 구름 위에 솟아 경상도,강원도,충청도 3도와 경계를 지으면서 서남으로 구불구불 백여리를 내리 뻗어 일으킨 소백산은 영주,예천,단양,영월 네 고을의 배경이 되어 고장의 평화와 행복을 수호하며 기품있는 선비의 풍모처럼 맑고 수려한 기상의 영기 어린 성산이다.
또한 지맥의 흐름으로는 한반도의 척추부분에 해당하는 중요한 곳이기도 하다. 특히 소백산 허리를 감돌아 오르는 아흔아홉 구비의 죽령은 영남의 3대 관문중 하나로서 그 옛날 과거길에 오른 선비들의 수 많은 애환이 서려있는 곳이기도 하다.
주봉인 비로봉(1,439M)에는 천연기념물인 주목이 군락을 이루고, 나라가 어려울 때 이 고장 선비들이 한양의 궁궐을 향해 임금과 나라의 태평을 기원했다는 국망봉(1,421M)과 소백산
천문대가 있는 연화봉(1,394M), 그 옛날 산성의 흔적이 있는 도솔봉(1,315M)등 수 많은 산봉우리들이 연이어져 있다.
소백산 중턱에는 신라시대 고찰 희방사와 비로사가 있으며, 희방사 입구에 있는 영남 제일의 희방폭포(28M)가 내려치는 물줄기는 이곳을 찾는 사람들의 마음을 시원스럽게 가셔주고
있다.
특히 해마다 5월말부터 6월초 까지는 철쭉꽃의 장관과 상수리나무 숲 터널은 소백산의 아름다움을 더해 주고 있으며 년중 5개월 정도 백설로 뒤덥혀 있는 비로봉은 「한국의알프스」로 불리어져 오고 있다.
영주시 풍기읍 봉현면, 순흥면, 단산면, 부석면,
* 소백산 사무소 054-638-6196,6796 * 소백산 북부사무소 043-423-0708, 2449 * 삼가탐방지원센터 054-638-2943 * 초암지킴터 054-633-7897 * 부석주차매표소 054-631-4762 * 죽령탐방지원센터 043-422-7181 * 어의곡탐방지원센터 043-421-0708
소백산 옥녀봉 자연휴양림
소백산 옥녀봉 기슭에 조성된 옥녀봉자연휴양림은 울창한 숲속에 조성되어 산림욕을 즐기기에 그만이며 작은 오솔길이 있어 자연을 벗삼으며 산책하기에 좋다. 숙박할 수 있는 방갈로와 야영장, 취사장, 샤워장, 숲속 교실 등 시설면에서도 조금의 부족함도 없으며 주차공간도 넓어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다.
또, 자연휴양림 뒤로 명산 소백산의 수려한 풍관이 펼쳐져 경치 또한 일품이다. 옥녀봉 자연휴양림에서 여장을 풀고 소백산 등반길에 오르거나 부석사, 소수서원, 희방계곡 등 인근 명승지를 찾아 보아도 좋은 여행이 될것이다.
경북 최북단에 위치하며 낙동강의 근원을 이루고 있는 곳으로서 많은 관광 자원과 아름다운 자연경관도 잘 보존되어 있어 푸른 산,맑은 물 등으로 국민에게 휴식공간을 제공하는 가족 휴양지이다. 또한 휴양림에서 국망봉, 비로봉, 도솔봉이 한눈에 보여 소백산 철쭉제 즈음 장관을 이룬다.
영주시 봉현면 두산리 산 31번지 외 영주시청 산림녹지과 054-639-6543
소수서원
경북 영주시 풍기읍에서 부석사 쪽으로 조금 가면, 길 오른편에 소수서원이 있다. 우리 나라 최초의 사액서원이다(사액이란 임금이 현판을 하사했다는 뜻이다). 서원은 선현을 배향하고 교육하는 조선조 사립 교육기관으로 선현의 영정을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사당, 학문을 배우고 논하는 강학당, 학생들이 기숙하는 재(齋)가 기본 시설이다.
소수서원은 1543년(중종 36년) 풍기 군수였던 주세붕이 흠모하던 회헌 안향의 사당을 숙수사지에 세우면서 시작된다. 초기의 이름은 백운동 서원이었으나, 이 후 퇴계가 풍기 군수로 부임 하면서 나라의 합법적인 인정을 요청했다. 이에 명종은 친필로 쓴 소수서원(紹修書院)이란 편액을 하사했다. "이미 무너진 유학을 다시 이어 닦게 한다"란 뜻을 담고 있다.
소수서원의 뒤를 이어 곳곳에 이러한 사액서원이 세워지게 되었다. 당시 관학이 흐트러지고 성리학에 대한 사회적 분위기가 성 숙한 데다 퇴계, 율곡 같은 대학자들이 앞장선데 따른것이다. 소수서원에서는 창건 이후 350여년 동안 임진왜란 때 경상도우병사로 진주성을 사수하다 전사한 김성일, 선조때 좌의정을 지낸 정탁 등 퇴계 문하생 대부분과 유생 4,000여명이 공부했다.
이곳 사료 전시관에는 안향의 일대기를 적은 "회헌선생실기", 서원 원장 등 각 직책을 맡았던 원임들의 인사기록인 "원임제명목",수학한 유생들의 이름을 적은 "입원록", 서원 방문 인사들의 방명록인 "심원록" 등 160여 점이 전시 되고 있다.
소수서원은 처음에 입학정원이 10명이었으나 사액을 받은후 30명으로 늘었다. 입학 자격은 초시에 합격했거나 학문에 정진하는 유생들이었다. 그러나 학문에 정진하지 않고 과거에 한 눈을 팔거나 미풍양속을 어기면 퇴원당했다고 한다. 서원의 입구에 들어서면 평균 300 ~ 500년 이상된 소나무군락이 "학자수"가 되어 선비의 굳센 기상을 나타내주고 있으며, 서원앞 500년된 은행나무는 서원의 역사를 묵묵히 지켜보고 있다.
서원을 끼고 도는 죽계수는 소백산 국망봉에서 발원하여 영주의 옥토를 적셔 주는 낙동강의 원류이며, 서원 옆 죽계천변에는 경자바위와 서원 원생들이 시를 짓고, 학문을 토론하던 경렴정, 취한대가 있다. 소수서원의 출입문을 들어 서면 정면에 백운동이라는 현판이 쓰인 강학당, 왼쪽에 문성공 묘, 전사청, 그리고 강학당 바로 뒤에는 일신재와 직방재가 있으며, 우측으로 학구재와 지락재가 있다. 서원 뒤편에는 사료전시관과 충효교육관이 있다.
영주시 순흥면 내죽리 152-8
영주시 순흥문화유적권 관리사무소 054-634-3310
판타시온 워터파크
판타시온 리조트 워터파크는 2만 여명을 동시에 수용할 수 있는 규모로 43,067㎡의 부지에 총 16종의 물놀이 기구를 보유하고 있다. 국내 최대인 16종의 최식 물놀이 시설과 거친 바다를 느낄 수 있는 초대형 파도풀과 파도타기. 아마존 강를 떠올리는 급류타기, 최고의 스피드를 자랑하는 고공슬라이드가 있다.
영주시 아지동 산 6번지
02-2628-5100, 054-630-5500
선비촌
유교문화 발상의 중심지로서 옛 선비정신을 계승하고, 선현들의 학문 탐구와 전통생활 모습의 재현을 통하여 관광자원화하고, 미래지향적인 관광산업의 발전을 도모하며, 우리 전통적 고유사상과 생활상의 체험 교육장으로 활용하고자 한다.
* 부지면적 - 57,717㎡(17,460평) * 전시가옥 면적 - 2,651㎡(802평)
* 주요규모
와가 7가구, 초가 5가구, 누각 1동, 정사 2동, 정려각 2동, 성황당 1동, 곳집 1동, 원두막 1동, 저자거리 선비촌은 우리 민족의 생활철학이 담긴 선비정신을 거양하고 사라져 가는 전통문화를 재조명하여 윤리도덕의 붕괴와 인간성 상실의 사회적 괴리현상을 해소시켜 보고자 충 효의 현장에 재현하게 된 것입니다.
앞으로 소수서원과 연계되는 영주선비정신의 계승 과 이를 통한 올바른 가치관 정립 그리고 역사관 확립을 위한 산교육장으로 활용 될 것이다.
선비의 생활상을 이해하는 오감체험형전시와 참여형 이벤트, 전통문화체험의 기회가 수시로 제공되는 선비촌 의 각종 기획프로그램에서 옛 선비들의 당시 생활상을 통해 잊혀져 가는 수준높은 전통문화를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영주시 순흥면 청구1리 선비촌
영주시 문화관광과 054-639-6062
무섬 외나무다리
문수면 수도리 무섬마을은 아름다운 자연과 고가(古家)가 그대로 보존된 전통마을로서 내성천(乃城川)이 마을의 3면을 감싸 듯 흐르고 있으며, 그 가운데 섬(島)처럼 떠 있는 육지 속 섬마을이다. 30년 전만 해도 마을 사람들은 나무를 이어 다리를 놓고 내성천을 건너 뭍의 밭으로 일하러 갔으며, 장마가 지면 다리는 불어난 물에 휩쓸려 떠내려갔고, 마을사람들은 해 마다 다리를 다시 놓았다.
현재의 외나무 다리는 지난 350여년간 마을과 뭍을 이어준 유일한 통로로 길이는 약 150m이다. 1979년 현대적 교량이 설치되면서 사라지게 된 이 다리는 마을 주민과 출향민들이 힘을 모아 예전 모습으로 재현시켜 놓았다.
영주시 문수면 수도리 무섬마을
죽령
소백산맥을 넘는 죽령은 문경새재와 추풍령 등과 함께 영남의 삼관문의 하나이고, 그 중 으뜸으로 손꼽혀 왔다. 소백산 제 2연화봉과 도솔봉이 이어지는 잘록한 지점을 정상으로 해발 689m를 기록하고 있다. 삼국사기에 아달라왕(阿達羅王) 5년(158년) 3월에 열린 것으로 기록되고 있고, 동국여지승람에는 『아달라왕 5년에 죽죽(竹竹)이 죽령길을 개척하고 지쳐서 순사(殉死)했고, 고갯마루에는 죽죽을 제사하는 사당(竹竹祠)이 있다고 했다.
이처럼 유구한 역사와 온갖 애환이 굽이굽이 서려있는 죽령은 삼국시대 한동안 고구려와 신라가 대치해 불꽃튀는 격전을 펼치기도 했다. 고구려가 죽령을 차지한 것은 장수왕 때인 서기 470년경이며, 그 후 신라 진흥왕 12년(551년)에 신라에 복속되자, 영양왕 1년(590년)고구려 명장 온달(溫達)장군이 왕께 자청하여 "죽령 이북의 잃은 땅을 회복하지 못하면 돌아오지 않겠다" 등의 기록(삼국사기)과 함께, 소백산 북쪽 자락에 온달산성이 전해오고 있다.
이후에도 영남 내륙의 여러 고을이 서울 왕래를 모두 이 길을 거쳐야 해, 나라의 관리들은 물론, 온갖 물산이 보부상들의 등에 업혀 이 고갯길을 넘나들었다. 그래서 고갯길 양쪽의 단양과 청풍, 영주와 풍기 등지에는 길손들의 숙식을 위한 객점, 마방들이 들어섰고, 이들 장터는 늘 성시를 이루곤 했다는 것이다.
줄잡아 2천여년 유구한 세월에 걸쳐 영남 내륙을 잇는 동맥의 역할을 해온 이 길이 2001년 터널이 뚫리면서 이제 다시 호젓한 옛 모습을 되찾은 것 같다. 더욱이 그동안 숲 덩굴에 묻혀있던 그 옛날 오솔길을 영주시에서 옛 자취를 되살려 보존하자는 뜻에서 1999년 5월 이 길(2.5km)을 다시 뚫어, 안내판과 함께 단장을 마쳤고, 새 터널까지 열려, 시대를 달리 하는 3가지의 길 모습들이 각각 다른 모습으로 역사의 뒤안길을 장식하게 됐다. 이같은 내력을 되새기며 넘는 맑고 한적한 죽령고개는 두고두고 멋진 고갯길 드라이브코스로 남았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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