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유치 초등부 친구들 너무 감사하고 저희가 매주마다 이렇게 사진을 찍어 이렇게 올리잖아요. 구도는 늘 똑같아요. 저쪽이나 이쪽에 이렇게 가장 이렇게 잘 나와서 제가 이제 크로즈업한 사진을 잘 안 찍어요. 왜냐하면 아직 우리 표정이 약간 그거 썩은 미소 있죠. 썩소 아직 그 표정이 좀 있어서 그래요.
근데 오늘 유치초등부 선생님들의 얼굴은 되게 밝아서 한편으로는 되게 감사하기도 했어요. 우리가 찬양도 많이 좋아지지만 찬양은 우리의 내면도 더 밝아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오늘은 성령의 9번째 열매 절제입니다. 절제 이 절제는 9가지 열매 중에 가장 마지막에 나와 있어요. 단어상의 배치로는 배치상으로는 가장 마지막이지만 이 절제라는 이 성령의 성품은 나머지 8가지의 성품을 둘러싸는 기능을 해요. 그러니까 절제가 있어야 사랑도 그리고 화평도 그다음 제 충성도 이렇게 양질의 것이 되는 거죠. 좋은 것이 되는 거예요. 사랑도 절제가 될 때 진짜 사랑이 되고 절제가 되지 않으면 위험한 사랑이 되는 거예요.
실제로 절제하지 못해서 위험한 사랑에 많이 빠지잖아요. 그러니까 사랑이라는 것은 꼭 절제라는 이 성령의 성품이 하나로 이렇게 둘러싸여질 때 온전한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랑의 모습이 되는 것입니다.
성령의 9가지 열매 중에 올해 참음도 절제와는 비슷한 항목이에요. 그래서 성령의 9가지 열매 중에 같은 성격 절제와 오래 참음이라는 이 열매가 두 가지라는 것은 우리가 꼭 성령의 열매를 대해서 배울 때도 좀 기억해야 되는 항목이에요. 왜냐하면 이게 사랑이든 뭐든 절제되지 않으면 참지 않으면 참 사랑이 되지 못하는 거예요. 사랑도 참을 수 있어야 진짜 사랑을 하게 되고 절제해야 가치 있는 사랑을 하게 된다는 거예요.
근데 오래 참음이나 절제라는 항목이 빠져버릴 때 위험한 사랑이 되는 거예요. 충성도 위험한 충성이 되고 그래서 성령의 9가지 열매를 볼 때 9가지 열매가 다 중요하지만 나머지 열매들을 묶어주고 이렇게 해주는 귀한 역할을 하는 게 오래 참음과 절제라는 성령의 열매입니다.
사랑이 사랑을 많이 안다고 해서 좋은 사랑은 아니에요. 그러니까 절제되는 사랑이 좋은 사랑인 거죠. 우리가 충성스럽게 산다고 중요한 게 아니에요. 충성이 절제되어야 그러니까 충성이 지나치면 간신히 되는 거예요. 사랑이 지나치면 폭력이 되기도 하고 중독이 되기도 하고 그래서 성령의 모든 열매는 오래 참음과 절제라는 성품에 의해서 잘 이렇게 묶여지고 연합되고 조율되어질 때 좋은 성품이 되는 겁니다.
절제를 영어로 하면 셀프 컨트롤이에요. 자신의 감정을 조절할 수 있는 것, 자신의 씀씀이나 자신의 욕구나 욕망을 조절할 수 있는 것을 절제라고 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이 조절 능력을 상실하게 되는 것이 뭔지 아세요? 중독이에요. 우리가 조절 기능을 잃어버리게 되면 다 중독에 빠지게 됩니다. 물질에 중독이 되면 물질을 조절할 능력을 상실해서 물질에 중독이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술을 컨트롤하지 못해서 알코올 중독이 되고요. 담배나 니코틴을 절제하지 못해서 니코틴 중독이 되고 마약이라는 물질을 절제하지 못해서 마약 중독이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조절하지 못하면 절제하지 못하면 중독이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조절 능력이 상실하는 것 절제 능력을 상실하는 것이 곧 중독이에요.
물질에는 앞에 중독에는 앞에 말했던 물질 중독도 있지만 행위 중독도 있어요. 행위 중독에서 행위를 조절하는 기능을 상실하게 되면 그것이 중독이 되는 거예요. 인터넷 중독 인터넷을 보고 보는 것이 절제가 안 돼요. 조절이 안 돼요. 그래서 이게 중독이라고 하는 거고 성중독도 많이 해요. 성 행위가 조절이 되지 않는 거예요. 그래서 성적인 중독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중독이라는 것은 물질이나 행위에 대한 조절 기능을 상실한 거예요.
근데 그 조절 기능을 갖게 하는 게 절제라는 성품인 거죠. 그래서 성도는 반드시 이 절제라는 성품 오래 참음이라는 성품을 성령을 통해서 가져야 돼요. 아니면 조절이 되지 않아서 과잉 공급이 돼도 문제가 되고요. 적게 공급이 돼도 문제가 되잖아요. 결핍이 일어나잖아요. 그래서 꼭 절제가 있어야 된다. 절제가 중요한 이유가 또 한 가지가 더 있는데 조절하지 못하면 결국 우리가 그것에 종이 되기 때문인 거예요.
사랑도 조절이 되어야 하고 나머지 성품들도 조절이 돼야 돼요. 조절이 못 되면 그것에 결국 우리가 종이 되고 노예가 되는 거예요. 원래 노는 사랑 하나님이 여러분과 저를 사랑의 주인으로 세우셨어요. 내 사랑이 조절되지 않으면 내가 사랑의 노예가 되는 거예요. 그래서 나를 사랑이나 이런 잘못 성품에 노래가 되지 않게 하게 하는 기능이 절제라는 성품인 거예요. 그래서 성도와 교회는 꼭 절제라는 성품을 가져야 됩니다. 절제가 돼야 주인으로 살게 됩니다.
우리 자녀들에게 절제를 가르치려면 우리가 가르치면 아이들이 잘 자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부모들이 있어요. 그래서 그냥 우리 아이가 하도록 그냥 자유롭게 두라는 거예요. 학교 가서도 그냥 우리 아이가 집에서 하던 것처럼 학교에서도 하게 해주면 안 돼요라는 거예요. 학원에 가서도 집에서 하는 것처럼 우리 아이가 그냥 하게 해주면 안 돼요라고 부모들은 해요.
왜요? 아이들을 조절하면 아이들을 조율하게 되면 아이들이 잘못된다고 생각해요. 아니요. 어려서부터 아이들에게는 절제라는 절제를 가르쳐야 돼요. 하여야 될까 하지 말아야 될 것을 분명히 가르쳐야 돼요. 가르치지 않으면 아이들은 그 절제라는 선이 없어요. 그래서 자기를 조절하지 못하게 되고 조절하지 못한 아이들은 하나님에 대해서도 범죄하기 쉽고 부모에 대해서도 범죄하기 쉽고 세상에 법을 어기기도 훨씬 쉬워요. 그래서 정말 교회가 교회로서의 기능을 한다면 아이들에게 어려서부터 성령의 성품인 절제를 꼭 가르쳐야 합니다.
우리는 자유롭게 하면 창의력이 좋아진다고 하잖아요. 틀린 말은 아니에요. 자유롭게 자라야 아이가 그늘이 없다고 생각해요. 이것도 틀린 말이 아니에요. 근데 문제는 절제가 없는 이 창의력이 심각한 부작용을 만든다는 거예요.
여러분 창의력에서 절제가 없으면 인류를 파괴하는 무기가 만들어져요. 창의력에 절제가 없어지면 인류를 파괴하는 가전제품이 만들어지고 도구들이 만들어져요. 그래서 꼭 아이들에게는 절제를 가르쳐야 돼요. 그래야 이 아이들이 파괴적인 무기를 만들지 않게 되는 거예요.
그리고 우리는 절제가 없어야 아이들이 그늘이 없게 자라야 된다고 생각하잖아요. 문제는 자기 자기는 그늘 없게 사는데 남에게 그늘을 만드는 아이가 되는 거죠. 절제가 있어야 남에게 그늘을 만들지 않아요. 그러니까 아이가 절제 기능이 없으면 자유는 자유롭게 사는데 엄마는 괴롭고 아빠는 힘들고 주변의 사람들은 고통스럽고 자기에게 그늘 없는 것이 주변에게는 고통이 되는 거예요. 그래서 어려서부터 절제를 가르쳐야 됩니다.
교회는 자유로워야 됩니다. 그러나 교회의 겉에는 절제라는 껍질로 교회가 단단히 쌓여져 있어야 돼요. 자유롭게 예배하지만 절제라는 껍질로 교회 예배를 잘 둘러싸여야 되고, 자유롭게 사역하고 교제하지만 절제라는 껍질로 잘 둘러싸져 있어야 돼요. 그래야 건강한 교회가 되고 좋은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성도의 삶도 마찬가지예요. 절제라는 껍질로 잘 둘러싸여져 있어야 돼요. 여러분이 절제하지 못하는 것으로 인해서 교회나 또 누군가는 고통스러울 수 있고 여러분이 절제하지 못한 것으로 인해서 영적인 파괴 현상이 곳곳에 일어날 수 있어요. 그래서 저는 멈출 줄 아는 사람이 정말 지혜롭고 뛰어난 사람이에요.
욕망을 멈출 줄 아는 사람, 욕심을 멈출 줄 아는 사람, 생각을 멈출 줄 아는 사람 생각이 남과 부딪히는 걸 딱 경험하죠. 그러면 생각이 딱 멈춰야 돼요. 근데 우리는 이 생각이 멈추지 못해요. 그래서 계속 싸워요. 여러분 싸우는 생각이 아무리 좋아도 좋은 생각일 수 없는 거예요. 다투는 아이디어는 아무리 좋은 아이디어도 좋은 아이디어가 될 수가 없어요. 좋은 아이디어지만 결국 공동체를 해치는 아이디어로 지금 작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모든 것에 절제라는 껍질이 잘 둘러싸여 있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아내로서 절제라는 껍질에 잘 둘러싸여져 있나요? 여러분 남편으로서 절제라는 껍질에 잘 둘러싸여져 있나요? 여러분 청년과 또 우리 어린 친구들 말 잘 알아들을지 모르겠지만 절제라는 껍질로 여러분이 잘 쌓여져 있나요?
절제라는 껍질이 없으면 그 어떤 것도 형편없는 곳으로 전락하게 돼요. 아빠의 사랑도 절제가 없으면 형편없는 것으로 전락이 되고, 부모의 헌신도 절제가 없으면 아이를 해치는 헌신이 되고요. 성도들의 열심도 절제가 없으면 교회는 그 열심 때문에 문을 닫아야 돼요. 그래서 교회는 또 개인의 삶은 반드시 절제라는 껍질로 잘 둘러써져야 됩니다.
누가 절제를 가장 어떻게 하면 절제를 절제를 잘 표현할 수 있을까 이렇게 생각하면 돼요. 멈춰야 할 때 멈출 줄 알면 여러분은 절제가 잘 되는 사람이에요. 대화하다가 딱 멈춰야 될 때를 아는 사람, 더 나가면 싸우겠구나 더 나가면 우리가 난리가 나겠구나 알고 대화를 멈추는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이고 잘 아는 사람이에요.
신앙의 모든 영역이 다 그렇습니다. 왜 하나님께서 성령의 9가지 열매를 우리에게 말씀하시면서 다 좋은 거잖아요. 굳이 오래 참음과 절제라는 때 좀 부정적인 것들을 이렇게 두셨을까요? 이 두 가지가 오래 참과 절제라는 이 성령의 성품이 나머지 7개의 성품의 가치를 잊게 만들고 또 소중하게 만들고 귀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아무쪼록 여러분과 저에게 절제라는 성품이 저는 그래서 이렇게 입을 못 멈추는 사람을 저는 되게 힘들어해요. 저도 그럴 때가 있겠지만 왜냐하면 멈추지 않는 이들로 인해서 교회나 개인의 삶이 너무 황폐돼요. 결국 본인이 나중에 황폐화돼요. 그래서 이제는 여러분과 제가 어떤 한 공동체 안에 있잖아요. 그래서 이 절제라는 항목들이 교회에서도 여러분 개인의 삶에서도 잘 작용이 돼서 우리가 하는 모든 일들이 영광스럽게 되고 가치 있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 Messenger’s Note:
“In his heart, a man plans his course, but the LORD determines his steps.” (Proverbs 16:9)
“Nevertheless, not my will but yours, be done.” (Luke 22:42)
“And when the angel stretched out his hand toward Jerusalem to destroy it, the LORD relented from the calamity and said to the angel who was working destruction among the people, ”It is enough; now stay your hand.“ And the angel of the LORD was by the threshing floor of Araunah the Jebusite.
And David built there an altar to the LORD and offered burnt offerings and peace offerings. So the LORD responded to the plea for the land, and the plague was averted from Israel.” (2 Samuel 24:16,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