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롤랑 바르트, <사랑의 단상>
롤랑 바르트의 <사랑의 단상>을 읽었다. 작가와 책 제목이야 유명해서 예전부터 알고 있었다만은, 그 외의 사전 정보는 전혀 없는 상태로 책을 읽기 시작했다. 이게 무슨 형식이지? 1. 2. 3. 순번을 붙여쓴 글 본문의 좌측에는 베르테르, 트리스탄, 보들레르, 로이스부르크 등 문학작품 속 인물 혹은 현존하였던 인물의 이름이 쭉 쓰여 있었고, 많은 인용문과 기표(記表)로 점철되어 있었다. 평소 희곡이나 실험적인 형식의 글은 잘 못 읽는 편이지만, 이 책은 맨 처음에 느꼈던 약간의 혼란을 통과하고 나자 어쩐지 잘 읽혔다.
이 책의 아리송한 형식과 내용에 대해서는 책 말미의 역자 후기를 통해 이해할 수 있었다(역자는 김희영 한국외대 불문과 명예교수). <사랑의 단상>은 롤랑 바르트가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대상으로, 파리고등실천학교에서 '연인의 담론'이라는 제목으로 하였던 강의의 결과물이라고 한다.
역자에 의하면 롤랑 바르트의 문학 세계는 "한마디로 새로운 것에 대한 끊임없는 탐색 정신으로 정의되어진다"고 하는데, 그는 하나의 사유체계를 찾으면 그에만 천착하지 않고 새로운 사유체계를 찾아나선다.
예컨대 바르트는 '아토피아(atopia)'라는 장에서, 소크라테스가 말한 '아토피아(atopia)'(분류할 수 없는; 유일무이한 독창성, 형언하기 어려운 사물 혹은 감정)를 들어 소크라테스와 니체를 함께 다룬 미셸 게랭의 저작 <니체, 영웅적인 소크라테스>를 주석으로 언급한다. 그러면서 사랑에 빠진 사람은 사랑하는 사람을 "내 욕망의 특이함에 기적적으로 부응하러 온 유일한, 독특한 이미지"로 여기게 되며, "내 타입이야", "전혀 내 타입이 아닌걸"이라고 말하기 어려운 아토피아를 포착하게 된다고 말한다. 이때 롤랑 바르트는 고대 인도 철학의 개념인 '마야(maya; 무지를 유발시키는 환영, 허위로 충만한 외관)'를 언급하면서, 무어라 특징지을 수 없는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는 그 어떤 분류나 수식어도 마야에 불과하여 무력해진다고 말한다.
이처럼 롤랑 바르트는 80개의 장에서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에서 가져온 사랑과 관련된 소재를 하나씩 다루고 있다. 특이한 점은 이것이 '사랑에 대한 담론'이 아니라 특정한 화자가 발화하는 '한 사랑하는 사람의 담론'의 독백체로 쓰여있다는 것이다. 역자에 따르면 발화 주체는 바르트 개인의 자전적 주체는 아니고 상상적 주체라고 하는데, 주제가 주제인 만큼 작가 본인이든 독자든 개인적 경험과 연결지어 생각해볼 수 밖에 없는 책이라는 생각이 든다.
80개의 단상은 저자의 표현을 빌리자면 (1) 사랑하는 사람에게 가까워지는 '밀물'의 움직임 (2) 그의 곁에 머무르며 함께 즐기는 순간 (3) 그로부터 멀어지는 '썰물'의 움직임으로 나눠볼 수 있고, 이는 무작위적인 순서로 배열되어 있다.
단상 가운데 기억에 남는 몇 가지를 소개하고 싶다. 우선 '부재(absence)'의 장에서는 역사적으로 부재의 담론은 "나돌아다니는" 남자 대신 충실하게 기다리는 여자가 담당해왔으며, 베르테르의 경우 사랑의 대상인 로테는 움직이지 않으며 사랑의 주체인 베르테르가 어느 순간 멀어진다는 점에서 사랑의 부재에 대한 고전적인 문학작품과는 문형을 달리한다고 말한다.
다음으로 '다정함(tendresse)'이라는 장의 시작과 끝에서 두 문장을 가져와본다. "사랑하는 사람은 사랑하는 이의 다정한 몸짓에 기뻐하면서도, 자신에게만 그런 특권이 주어진 것이 아니라는 걸 알고 불안해한다." "L…은 바이에른의 어느 식당에서 A…가 커틀릿을 주문하면서 식당 종업원에게 그토록 자기를 감동시켰던, 똑같은 천사 같은 눈길, 똑같은 다정한 시선을 보내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하나의 개념만을 놓고 분절적으로 생각하면서도 여러 사유체계로부터 그에 대한 생각을 묻고 싶어하는 내게 굉장히 인상적으로 다가온 책이다. 앞으로 롤랑 바르트의 책을 찾아 읽어보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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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소개
이 책의 필요성은 오늘날 사랑의 담론이 지극히 외로운 처지에 놓여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데에서 비롯되었다.
이 담론은 아마도 수많은 주제들에(그걸 누가 알 수 있단 말인가?) 의해 말해져 왔을 것이다. 그러나 어느 누구에 의해서도 보호받지는 못했다. 그것은 주변의 언어들로부터 버림받았다. 또는 무시되고, 헐뜯어지고, 웃음거리가 되어 왔다. 권력에서 단절되었을 뿐 아니라, 그 매커니즘(과학, 지식, 예술)과도 단절된 것이다.
이렇듯 하나의 담론이 모든 군생 집단 밖으로 추방당하여 스스로의 힘에 의해 비실제적인 것 안으로 표류하게 되면 , 그때 그것은 긍정의 장소가 - 비록 미미한 것이긴 하지만 - 되는 수밖에 없다. 요컨데 이 긍정은 바로 여기 시작하는 책의 주제이다.
출판사 서평
마르크스주의자, 구조주의자, 후기구조주의자, 등 '현기증나는 전이'를 통해 현대의 프랑스와 세계에 가장 활력적인 사유 체계의 개척자로 손꼽히는 롤랑 바르트의 이 〈사랑의 단상〉은 괴테를 비롯한 치열한 '사랑의 담론들'에 대한 지극한 글읽기의 산물이다.
그러나 그의 '사랑의 단상'은 '사랑의 이야기'나 '사랑의 철학'이 아니다.
뛰어난 글쓰기의 한 전범을 보여주는 바르트의 사랑의 담론 읽기는 고뇌와 기다림의 고통을 통해 욕망의 여행을 하면서 사랑과 상상계로의 회귀를 열망하는 과정에 다름 아니다.
그 과정은 '언어와 정신분석학이 우리의 모든 정서 형상에 인쇄하는 그 끔찍한 환원작업으로부터 사랑하는 사람과 말하는 사람이 마침내 승리하게 되는 소설적인 텍스트'이다. 그럼으로써 '우리 시대의 가장 위대한 신화 해독자'의 이 아름다운 산문은 사랑에서와 마찬가지로 하나의 결합에의 꿈을 실형시켜 준다.
『사랑의 단상』(Fragments d’un discours amoureux)에서 롤랑 바르트는 사랑에 대하여가 아니라, 사랑에 빠진 주체가 하는 말, 즉 그의 담화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그는 이 글을 통해 주변의 언어로부터 버림받고, 잊혀지고, 평가절하 되고, 희화화된 사랑의 담화가 복권되기를 원했다. 『사랑의 단상』은 제목이 보여주듯 조각난 담화이다. 담화의 조각화는 여러 문형들을 서로 아무런 관계성도 부여하지 않은 채, 모두 같은 수준에 유지시키고, 문형들을 분석하지 않은 상태로 놓아두기 위한 방법이다. 그러면 사랑의 담화는 편편하고 수평적인 담화가 된다. 이 담화에는 하나의 이야기로 통합하고 계층적 일관성을 부여하는‘서술적 대 타자’가 존재하지 않는다. 대신에 롤랑 바르트는 독자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상상력으로 틈들을 채우도록 초청한다. 그가 바라는 독서란 글쓰기/다시 글쓰기의 독서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텍스트의 중심부에 위치한 «사랑해»라는 문형-이 문형에 모든 사랑의 담화가 수렴된다는 가정 하에-을 택하여, 분석을 시도하고 바르트가 우리에게 맡긴 메타언어를 더하는 작업을 행하였다. 그 결과 우리는 «사랑해»에 <고백>, <선언>, <외침>의 3개의 변별적 차원이 존재한다는 것을 구분해내었다. 또한 우리는 사랑의 주체가 «사랑해»를 말할 때 역설적 상황과 맞닥뜨린다는 것을 해독해 내었다. 그리고우리는 <고백>이 베르테르의 담화, <선언>이 돈 주앙의 담화, <외침>이 완전한 결합을 꿈꾸는 자의 담화임을 보여주었다.
목차
이 책은 어떻게 만들어졌나?
"나는 빠져들어간다, 나는 쓰러진다..."
부재하는 이
"근사해!"
다루기 힘든 것
코에 난 작은 점
고뇌
사랑을 사랑하는 것
고행자
아토포스
기다림
검은 안경
"모든 안착한 사람들"
파국
래티시아
마음
"지상의 모든 쾌락"
"나는 그 사람이 아프다"
"나는 이해하고 싶다"
"어떻게 할까?"
공모
"어쩌다 손가락이 -할 때"
사건, 장애물, 난관
그 사람됨의 몸
대담
헌사
"우리는 우리 자신의 마귀다"
예속
충일
얼어붙은 세상
소설 / 드라마
살갗이 벗겨진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사랑
유령의 배
"당신의 품 안의 따사로운 평온 속에"
상상계로부터의 유형
오렌지
페이딩
잘못
"선택받은 나날들"
"난 미쳤어"
"어색한 표정"
그라디바
푸른 연미복 속의 노란 조끼
동일시의 현상
이미지
알 수 없는 것
"누구를 원해야 할 지 가르쳐 주세요"
정보 제공자
"이렇게 계속 할 수 없어요"
해결의 상념
질투
사랑해요
사랑의 우수
사랑의 편지
다변
마지막 잎새
"난 끔찍해!"
대답 없음
구름
사랑의 외설스러움
눈물의 찬가
잡담
왜?
황홀
슬퍼할까?
"그때 하늘은 얼마나 푸르렀던가?"
울림
아침의 노래
언쟁
"성직자는 한 사람도 따라가지 않았다"
기호의 불확실성
"별이 빛나건만"
자살의 상념
그대로
다정함
결합
진실
절제된 도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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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 사람이 아프다.”: 롤랑 바르트의 <사랑의 단상>에서
“나는 그 사람이 아프다.” 이 말은 내가 좋아하는 싱어송라이터 ‘애피톤 프로젝트’의 노래 제목이다. 처음에 들었을 때에는 표현이 다소 생경했지만 노래를 들을수록 그 아픔이 마음에 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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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 사람이 아프다.”: 롤랑 바르트의 <사랑의 단상>에서
“나는 그 사람이 아프다.” 이 말은 내가 좋아하는 싱어송라이터 ‘애피톤 프로젝트’의 노래 제목이다. 처음에 들었을 때에는 표현이 다소 생경했지만 노래를 들을수록 그 아픔이 마음에 와닿아 좋았다.
사랑하는 사람을 자신의 신체의 일부로 동일화함으로써 기존의 사랑의 아픔에 대한 관조적 공감을 걷어낸 일체적 연민의 표현이라 하겠다. 사랑하는 사람의 영혼의 아픔까지 온몸으로 기억해내려는 단 하나의 진실한 문장. “나는 그 사람이 아프다.” 현실에서 불가능한 이야기겠지만 그 사람의 아픔을 느낄 수 있는 것만 같았다.
롤랑 바르트(프랑스어: Roland Gérard Barthes, 1915년 11월 12일 ~ 1980년 3월 26일)는 프랑스의 철학자이자 비평가다.
“나는 그 사람이 아프다(J'ai mal à l'autre)”는 프랑스 비평가 롤랑 바르트(Roland Barthes)가 사랑하는 연인에 대한 단편적 글들을 에세이 형식으로 모아 발표한 <사랑의 단상(A Lover’s Discourse)> (1977)에서 소제목으로 사용한 문장이다. 에피톤 프로젝트의 차세정 씨가 바르트의 <사랑의 단상>을 읽었던지, 아니면 바르트와 감수성이 통했을 수도 있다.
사랑의 단상’은 20세기 프랑스를 대표하는 프랑스의 지성 롤랑 바르트가 철학과 심리학, 정신분석학을 넘나들고 문학과 예술과 인생을 아우르며 들려주는 사랑에 관한 섬세하고 고급스러운 사유이다. 이 책에서 바르트는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바탕으로 사랑하는 사람들 간의 담화를 다각도로 정리하였다. (단상 : 생각나는 대로의 단편적인 생각[5]) ‘사랑의 단상’의 원제는 ‘Fragments d’un discours amoureux’이다. 직역하면 ‘사랑 담론의 단편들’이다. 그러나 바르트가 한 인터뷰에서 밝힌 대로 이 책에서 사랑에 관한 철학적 담론이나 수필이 아닌 사랑하는 사람의 말을 글의 형식으로 만든 것이다. 그래서 영어번역 제목인 ‘연인의 담론’이 저자의 의도에 가장 가깝다는 해석도 있다. 이 글은 독자가 일반적으로 기대하는 사랑이야기와는 거리가 있다. 그렇기 때문에 책의 분류는 인문학과 정신분석학으로 되는 것이다. 이 책에서 바르트는 사랑하는 사람을 단순히 어떤 증세가 있는 환자로 환원시키기를 거부하고, 사랑이라는 지극히 비이성적이고 부조리하며 고통스러운 욕망을 발견하고 인정하는 과정을 위로하고 격려한다.(출처 위키피디아)
이 문장이 담긴 바르트의 그 챕터는 이렇게 시작한다.
“연민 COMPASSION. 사랑의 대상이 사랑의 관계와는 무관한 이런저런 이유 때문에 불행하거나 위험에 처해 있다고 느끼거나 보거나 알 때, 사랑하는 사람은 그에 대해 격렬한 연민의 감정을 느낀다.”
쇼펜하우어
그리고 바르트가 말한 것처럼, “그 사람이 느끼는 것처럼 우리가 그를 느낀다고 가정한다면—쇼펜하우어가 연민(compassion) 이라 부르는 것, 혹은 더 정확히 말한다면 고통 속에서의 결합, 고통의 일치라 할 수 있는 것”을 경험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바르트는 “사랑의 힘이 어떠하든 간에 이런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는다.”라고 말한다. 그는 “사랑하는 사람들이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는 일은 끔찍한 일이기에 나 또한 동요하며 괴로워하나, 동시에 냉담하며 젖어들지 않는다. 나의 동일시는 불완전한 것이다.“라고 결론 짓는다.
그래서 연민은 그저 연민으로 끝나고 말것이다. 그러나 사랑하는 그 사람의 영혼의 아픔마저 온몸으로 느끼고자 하는 이 신체적 비유는 탁월하다.
쥴 미쉘레와 그의 대표작
바르트 역시 “나는 그 사람이 아프다”말을 자신이 존경한 19세기 프랑스 소설가이자 역사학자인 쥘 미쉘레(Jules Michelet)의 저 유명한 “나는 프랑스가 아프다 J'ai mal à la France”라는 말에서 가져왔다. <프랑스사>와 <프랑스 혁명사>로 잘 알려진 미쉘레는 조국 프랑스를 자신의 신체로 비유하여 역사를 기록하면서 프랑스 역사의 아픔을 일체화하려한 상상력과 문학적 감수성이 풍부한 지식인이었다. 바르트는 <미쉘레Michelet>라는 책을 시작으로 프랑스 철학과 비평계의 총아로 등장한다.
바르트의 데뷰작으로 알려진 <미슐레>
바르트는 미쉘레의 조국을 연인으로 환치한 것이다. 불현듯 안중근 선생의 말이 기억난다. 안중근 의사의 일대기를 담은 영화에서 안의사는 하얼빈 거사 직전에 긴장된 표정으로 제자와의 대화에서 자신의 결행 의지를 표현한 이 말을 잊을 수 없다.
“사랑하는 사람이 아프다고 그 사람을 버릴 수 없듯이, 조국이 식민치하에 신음하고 있다고 조국을 버릴 수 없다. 조국은 연인과 같기 때문이다.” 그는 이렇게 말하고 고통과 죽음이 명백한 그 고독하고 외로운 길을 뚜벅뚜벅 걸어 간 것이다.
바르트에게도 조국 프랑스를 사랑하는 마음은 미쉘레와 같았으리라. 그러나 이 두 사람이 안의사처럼 조국과 연인을 일체화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바르트의 연인에 대한 연민은 건강하다는 사실이다. 그는 “그 사람이 아프다”라는 일심동체적 연민이 가져올 자기파괴적 위험성에 거리감을 둔다. 나는 그 사람이 이프지만 나는 살아남아야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사랑의 단상>에서 이렇게 말한다.
“그러니 조금 떨어져 있자. 거리감을 쌓는 훈련을 하자. 타자의 죽음 뒤에 홀로 살아남는 그 순간부터 모든 주체의 입에서 나오는 저 억압된 말, ‘살자(Vivons!)’라는 말을 떠오르게 하자.”-<사랑의 단상>
그렇다. ‘살자(vivions)’하며, ‘비봉’을 외쳐야 한다. 바르트는 사랑하는 사람과 더불어 연민하면서도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현실을 직시하라고 말한다. 그리하여 인간의 품격을 잃어버리지 않은 건전한 연민을 품고 끝내 살아남아야 한다고 권면한다.
“그러므로 나는 그를 '압박하지도', 정신을 잃지도 않으면서 그와 더불어 괴로워하리라. 아주 다정하면서도 통제된, 애정에 넘쳐흐르면서도 예의바른 이 처신에 우리는 '신중함/부드러움'이란 이름을 부여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어떻게 보면 연민의 '건전한' 형태이다.”-
<사랑의 단상>
신경숙의 <어디선가 나를 찾는 전화벨이 울리고>에서 윤교수는 민주화 운동을 하다가극단적 선택을 하는 제자들을 향해 이렇게 말한다. “살아 있으라. 마지막 한 모금의 숨이 남아 있는 그 순간까지이 세계 속에서 사랑하고, 투쟁하고, 분노하고, 슬퍼하며 살아 있으라.”
어느덧 세월이 많이 지나 그 민주화 운동권 세력이 정권을 잡아 졸속으로 줄지어 낸 부동산 정책에 실망한 한 시민이 급기야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 “문재인 정부 부동산 정책으로 결혼을 포기하기에 이르렀다”는 제목의 청원글을 올리고 말았다.
시월의 마지막 날에 청원을 올린 그 시민에게 “나는 그 사람이 아프다.” 라고 말한다. 아니 나는 우리 대한민국 젊음이들이 아프다. 그리고 이렇게 말하고자 한다. 살아남아야한다. 분노하고 투쟁하고 슬퍼하고 사랑하며 살아남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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