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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반도 출신의 미국 예술가. 20세기를 대표한 세계적인 예술가 중 한명이였다. 특히 비디오 아트의 선구자로 꼽힌다. 텔레비전과 기술적 매체를 예술 작품에 통합하여 현대 예술의 발전에 기여한 인물로 인식되고 있다.
특유의 파격적인 예술 세계관으로 유명하며, 볼프 포스텔과 더불어 20세기 비디오 아트의 세계를 개척한 세계적인 예술가이지만, 비디오 아트 대가 이전 시절에는 전위예술 퍼포먼스 아티스트이기도 했다. 한국을 포함해 전 세계 방방곡곡을 돌아다녔으며, 플렉서스 멤버로 퍼포먼스 예술에서도 한 축을 담당했다.
2. 일생
백남준은 초기에는 음악가로 활동하다가 1956년 독일으로 이주하여 예술 활동을 시작했다. 1960년대 후반에 비디오 아트의 개척자로 떠올랐으며, 텔레비전을 예술의 매체로 활용한 작업들을 선보였다. 그의 대표작 중 하나는 "TV Buddha"라고, 부처상이 텔레비전 화면을 보고 있는 형상으로, 기존의 전통과 현대 기술을 결합한 것이 특징이다.
2.1. 유소년기
백남준은 600년 전통 종로 육의전 집안의 후손으로 태어났다. 당대 조선 직물업계의 큰 손이자 대한민국 최초의 재벌 태창그룹 총수 백낙승의 아들로 99칸 집에 피아노, 전축은 물론 당시 서울에 딱 2대 밖에 없었던 캐딜락도 있었고, 광복 전에 유치원(애국유치원)에 다녔으며 한국 전쟁의 그 아비규환 속에서도 파인애플을 먹을 정도의 부잣집이었다. 그의 어머니는 '돈은 물 쓰듯 쓰는 거다'라고 했다고 한다. 그의 조부 백윤수는 청나라 비단을 독점 판매했던 거부로, 종로5가와 동대문시장 일대의 포목상 절반이 그의 것이었고, 국상 때 만조백관의 상복과 제복을 일체 도맡았을 정도로 섬유업계의 막강한 실력자였다. 후에 그는 직물, 대부업, 제약회사 등을 세웠고, 재산은 한성은행 자본금의 3배에 달했다.
백남준은 당시 상류층만 다니던 수송국민학교와 경기공립중학교를 다녔는데, 광복 전 그 시절에 학교에는 수영장과 영사기가 있어서, 당시 학부모였던 대한극장 사장이 학교에서 직접 영화를 상영하기도 했다고 한다. 또한 경기중학교 음악교사로, 후에 이대 음대학장을 지냈던 신재덕에게 피아노를, 작곡가 이건우에게 작곡을 배웠다.
그가 음악을 배우고자 한 계기는 어린 시절 접한 아놀드 쇤베르크다. 부유했던 덕분에 당시로서는 최신 전위음악을 들을 수 있었다는 글을 쓴 적이 있다. 이때부터 그는 일반적인 클래식 음악보다는 음악 자체의 틀을 깨는 새로운 음악에 관심이 있었다. 훗날 음악을 전공하면서도 행위음악을 작곡하고, 퍼포먼스에 집중하는 모습을 보인다.
1949년에는 이승만 대통령의 부탁으로 무기구입을 위해 홍콩으로 갔다는 설이 있는 부친 백낙승의 통역으로 따라가 홍콩의 로이덴 스쿨로 전학한다. 백남준은 이때 영어와 중국어를 배우게 된다.
2.2. 행위예술가로
한국 전쟁이 발발하자 여권과 일본 비자가 있었던 백남준은 도쿄로 넘어가서 도쿄대학 미학/미술사학과를 졸업하였다. 그리고 대학원을 당시 현대음악의 메카 독일 뮌헨 대학교로 진학하여 철학 석사와 음악학 석사를 취득했는데 이 때까지만 해도 현대음악 쪽에 더 관심이 많았던 것 같다. 이 때 같이 독일에서 활동하고 있었던 윤이상과 친분을 쌓기도 했다. 공교롭게도 이 둘은 훗날 김민기 이전의 독일 괴테메달을 수여한 유이한 인물이 된다. 그런데 독일에 있을 때쯤 존 케이지나 조지 마치우나스 등의 영향을 받아 행위예술을 접한 뒤, 행위예술가로 변신하게 된다. 머리카락에 먹을 묻혀 선을 그리는 것도 사실 백남준이 했던 퍼포먼스다. 이후 플럭서스의 일원이 되고, 미국 뉴욕과 독일을 오가면서 활동하기 시작한다.
사실 백남준이 1964년 미국 뉴욕에 도착했지만, 아무도 알아 주지 않았었다. 무대에서 바이올린이나 피아노 같은 악기를 때려 부수거나 넥타이를 자르는 행위예술을 하기도 했다. 1967년에 백남준이 누드인 첼리스트 샬롯 무어먼과 공연하다가 샬롯이 경찰에 체포당하면서 논란을 일으킨 사건은 유명하다. 그 결과 백남준은 미국 예술계에서 제대로 된 예술도 못하고 기행을 일삼는 사람, B급 예술가 정도로 치부되었다.
다만 B급 예술가라는 것은, 당시의 미술계의 흐름을 파악하지 못한 언급일 수도 있다. 당시 60년대에서 70년대에는 서서히 퍼포먼스 예술이 주목받기 시작한 시기였고, 물론, 현대에는 현대미술하면 알 수 없는 무용과 행위들을 떠올리곤 하지만, 이전 예술은 단순히 회화아니면 조각 정도로, 이루어지는 오브제 중심적인 예술이었다. 때문에, 당연히 그림이나 조각 같은 오브제 없이 예술가의 행위 자체와 관람객이 느껴야하는 '경험' 위주의 예술은 매우 비주류라고 할 수 있으나, 개척기이자 태동기였다. 예술의 범위가 확장되는 시기였다고 생각하면 쉽다.
후에 퍼포먼스예술은 80년대 이후 대중예술에서도 독특한 무대연출(패션쇼, 콘서트, 오케스트라 등)로 발전하여 많은 대중들에게 사랑받는다. 제대로 된 무대연출을 할 줄 아는 아티스트가 많은 관심과 사랑을 받는다는 것을 안다면, 퍼포먼스예술이 현대예술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얼마나 큰지 알 수 있다. 그리고 지금도 이것은 종합예술의 영역으로 다루어지고 있다.
그는 행위음악을 작곡하기도 했다.
백남준의 퍼포먼스는 음악에 그치지 않는다. 그는 80년대부터 과학기술에도 관심이 많았다. TV로 작업을 하다 보니 자연스러운 이끌림인데 급기야는 로봇을 만든다. 이 로봇의 이름은 K-456으로 똥도 싸고, 말도 한다. 그는 이 로봇의 최후를 연출했는데 뉴욕 한복판에서 같이 산책을 하다가 교통사고가 난다. 21세기 최초의 참사라고 명명하였다. 최초의 로봇 교통사고다.
2.3. 결혼
오노 요코 때문에 잠깐 존 레논과 약간의 교분이 있었다고 한다. 백남준은 그 당시 그녀에게 호감을 갖고 있었으나 요코는 존을 선택해 그와 결혼했고, 백남준은 꽤 충격 받았던 듯. 존 케이지 등과도 교분이 있었으며 비디오 아트 예술가 이전에는 피아노 행위예술가로도 알려진 바 있다. 무엇보다 연주하다가 도끼로 피아노를 부숴버리던 짓도 곧잘 했었다.
▲ 뉴욕 웨스트베스 작업실에서의 백남준과 구보타 시게코
1977년 자신과 같이 행위예술 작업을 했던 구보타 시게코(久保田成子,1937.8.2 ~ 2015.7.23)와 결혼했다. 구보타 시게코는 처음 봤을 때부터 그에게 매료되어 자신의 남자로 만들겠다고 결심했다고 한다. 구보타 시게코는 백남준을 만나기 전부터 알고 있었다. 1963년 일본 요미우리 신문에 유럽에서 활동하는 한국인 전위예술가로 소개한 기사를 본 것이다. 1년 후 백남준은 일본으로 퍼포먼스를 하러 갔다. 구보타 시게코는 이 퍼포먼스를 보러 갔고, 그때 백남준이 보여준 퍼포먼스는 신고 있던 구두에 막걸리를 부어 마시고, 붓 대신 머리를 이용해 거침없이 선을 그리는 것이었다. 엉망이 된 몰골로 퍼포먼스를 마치고 무대에서 내려온 백남준을 호감을 표했다고 한다. 그 모습이 아주 섹시했다고.
구보타 시게코는 괜히 그 공연을 보러 간 것은 아니다. 그녀도 역시 전위예술, 음악을 하고 있었는데 피아노를 연주하며 전위성을 찾는 정도였다. 그러던 차에 피아노를 도끼로 깨부수는 사람을 알게 되었으니 충격이 클 수밖에 없다.
결국 결혼. 이혼녀인 구보타 시게코가 자궁암으로 불임 진단을 받고 엄청난 수술비에 모든 것을 포기하고 돌아가려는데, 백남준이 본인 명의의 의료보험 혜택을 활용하자며 먼저 청혼을 하고 결혼 후에도 구보타 시게코의 불임 진단과 의료보험과 관련해서는 주변 친구들에게 전혀 입밖으로 이야기를 꺼내지 않는 등의 모습을 보면, 백남준의 구보타 시게코에 대한 배려도 상당했음을 알 수 있으며, 구보타 시게코 역시 이런 백남준의 배려와 사랑에 사후에도 그를 아끼는 마음에서 백남준과의 삶을 회고하는 책 "나의 사랑, 백남준"을 출간하기도 했다. 다만 양자격인 백남준의 조카와 사이가 좋지 않아 서로 갈등을 빚어서 이미지 하락을 겪기도 했다. 이후 암 투병중이던 구보타 시게코는 2015년 7월 23일 만 77세로 작고했다.
“나의 사랑, 백남준”에는 재미있는 일화가 많이 나온다. 그 중 하나가 뉴욕에 살며 돈이 없었는데 한국의 백남준 형님이 1만 달러를 보내줬다고 한다. 아버지의 유산으로, 마지막으로 보내주는 돈이었다. 그런데 백남준은 그 돈으로 생계를 꾸릴 생각이 없었고, 컬러 텔레비전과 골동품이나 사다가 대뜸 불상을 하나 구입했다. 구보타 시게코는 이를 보며 어이가 없었다. 이렇게 돈을 다 탕진했는데 전시는 하고 싶어했다. 당시 ‘하늘을 나는 물고기’ 전시를 하고 싶었는데 돈이 없어 못하고, 사뒀던 불상과 TV로 ‘TV부처’를 만들어 전시한다. 그리고 이 작품이 뉴욕 미술계에서 초대박을 친다. 동양의 오래되고 고고한 상징과 서양의 최첨단 기술이 마주보며 정면으로 충돌하는 이미지가 큰 감흥을 준 것이다. 결과는 좋았지만 백남준은 기본적으로 경제관념이 아주 부족했다고 한다. 부유한 집안에서 자란 만큼 돈을 어떻게 써야 잘 쓰는지, 어떻게 관리해야 하는지 몰랐던 것이다. 그는 사업가 아버지의 길을 전혀 따르지 않고 음악과 미학에 관심이 깊었다. 다른 일화가 하나 있는데 어쩌다 구보타 시게코가 돈이 생겨서 백남준에게 용돈으로 아껴쓰라며 줬는데 저녁이 되자 돈이 하나도 없다 했다고 한다. 어디에 썼냐고 물으니 받은 즉시 나가서 비싼 치즈케이크를 먹느라 거기에 다 썼다고 답했다.
2.4. 비디오 아트
B급 예술가로 치부당하는 와중에도 백남준의 인지도는 꾸준히 쌓여가고 있었고, 기괴한 퍼포먼스를 하며 조금씩 시도했었던 비디오 아트는 점점 백남준의 예술 세계 전면에 등장하게 된다. 백남준을 자세히 모르는 사람들은 그냥 비디오 아트의 창시자로만 알고 있는데, 그렇게 틀린 말은 아니다. 1974년부터 비디오 아트 설치 작업을 선보였으며, 영상이 지상파 TV에 방영되는 등 점점 유명해지고 예전과 다르게 높은 평가를 받는다. 결국 1982년 휘트니 미술관에서 백남준 회고전이 전시되었고, 뉴욕 뿐만이 아닌 미국 예술계에 큰 인지도를 얻게 된다. 이때부터 백남준은 바쁘게 활동하였다. 1979년부터 1996년까지 17년 간 독일 뒤셀도르프 미술대학 조각과 교수로 있었는데, 뉴욕에서 작품활동하느라 바빠서 학생들을 자주 보지 못해 미안해 했다고 한다.
Nam June Paik - Global Groove, 1973
위 작품은 1973년 백남준이 선보인 Global Groove라는 세계 최초의 뮤직비디오중 하나이다. 당시에는 영상을 편집할 수 있는 장비가 없었는데, 신디사이저라는 영상편집장비를 일본기술자와 함께 직접 만들어서 그 장비를 이용해 만든 작품이다.
The Allen Ginsberg Project - Good Morning, Mr Orwell! (Complete Video)
1984년 새해 벽두에 전세계 동시송출된 <굿 모닝 미스터 오웰>의 풀 버전 영상. 세계 최초의 인공위성 생중계 쇼 프로그램인데다 더불어 뉴욕, 샌프란시스코, 파리의 다원생중계였다! 훗날 이 작업은 인공위성 예술의 대표적 사례로 불리게 된다. 연출은 영화 더티 댄싱과 시스터 액트 감독으로 유명한 에밀 아돌리노가 맡았는데, 그는 더티 댄싱 감독 이전에 아카데미상다큐멘터리 부문을 받은 적이 있을 정도로 이쪽 작업에도 능했다. 다만 한국에서는 (편성표상은 1월1일)1월 2일 새벽 1시에 KBS1에서 방송했는데(위 영상이 KBS의 중계 버전이다.) 수파(자막)와 더빙이 들어간 것으로 보아 영미권과 달리 KBS에서 미리 소스를 받아 작업한 것으로 보인다.
현대음악가의 전설로 남은 존 케이지가 나오는가 하면, 프랑스가 낳은 세계적 배우 이브 몽땅이 신나게 탭댄스 추며 노래도 부르고, 현대무용의 거두이자 '뉴 댄스'의 창시자인 머스 커닝햄, 살바도르 달리까지 이곳에 등장한다. 후반부에 진지하게 첼로를 키는 장면은 압권. 전반적인 스토리는"오웰, 당신이 예측한 억압과 광기의 시대는 오지 않았고 우리는 여전히 현재를 잘 살고 있다."로 전개된다.
실제로 소설 1984에는 발달한 과학이 텔레스크린같은 것처럼 오히려 인류를 옥죄는 도구로 사용되고 있는데, 백남준은 발달한 과학을 이용해 예술의 새 지평을 연 셈. 예술의 신기원을 열면서 동시의 영미문화의 대작가를 비판(혹은 비평)하고, 아울러 현대 과학의 발전을 바라보는 시각까지 갖춘 셈인데, 이렇게 보고 위 동영상을 보면 소름이 쫙 돋는다. 오직 1984년에만 할 수 있는 예술인 셈이다.
1986년에는 <바이 바이 키플링>이라는 작품으로, 러디어드 키플링(1936년 졸로 당시 사망 50주년)의 '동양은 동양이고 서양은 서양이다. 동양과 서양은 절대로 서로 어울릴수 없다'(East is East, and West is West, and never the twain shall meet)는 말을 정면으로 반박하며, 동양과 서양의 조화를 주제로 도쿄, 뉴욕, 서울의 '서구'와 '비(非)서구'의 모습을 순서 없이 뒤죽박죽 방영하면서 동양과 서양 모두 동일한 시간축에 살고 있음을 역설하는, 동양과 서양이 서로 상대를 봤을때 신기하고 자기들 끼리는 비슷비슷해보이는 것 처럼, 제3의 생명체가 봤을떈 동양과 서양 둘은 쌍둥이처럼 같아보인다는 논리이다. 오리엔탈리즘을 철저하고 신랄하게 비판하였다. 딕 카벳과 류이치 사카모토가 출연하기도 했다. KBS1, TV아사히, WNET 의 세 방송사에서 방송되었다. PBS, NHK에서 방송되었다는 기록도 있다.
다만 <바이 바이 키플링>은 당시 한국에서 상당히 부정적인 평가를 얻었는데, '1등을 달리고 있는 일본인 마라토너의 모습'등 아시아의 문화적 선두주자는 일본이라는 암시가 포함된 장면이 제법 있었기 때문이다. 노래, 영화등 주류 일본 문화가 금지되어 있던 한국의 입장에서 이런 메세지를 유쾌하게 받아들일 수는 없었고, 언론에서는 백남준을 비난하는 목소리가 잠시 일었다. 그렇지만 올림픽을 앞두고서 결국 다시 백남준에게 손을 벌릴 수 밖에 없게 된다.
1988 서울 올림픽 1주일전, <손에 손잡고>라는 작품으로 2년전의 동양과 서양의 조화를 더 많은 참가국가로 극대화 시키며, 냉전의 시대가 끝났음과, 전세계의 조화와 공존을 담아내면서 백남준의 위성 연작 3부작의 대단원의 막이 내렸다.
한국 대중들에게 '백남준'이라는 예술가는 1984년 '굿모닝 미스터 오웰'이라는 프로그램을 통하여 비로소 한국에 알려지게 된다. 사실상 한국은 백남준에 대해서 역수입을 했다고 할 수 있는데,(...) 백남준이 일본에서 뉴욕에 가기까지는 한국에서도 무명이었고, 그가 현지에서 악평을 들을 때도, 유명해지고 세계적인 수준에 오를 때 까지도 한국에서는 잘 알려져 있지 않았다. 그래서 사실 당시까지만 해도 백남준보고 세계적인 예술가라고 해도 한국에서는 실감이 안나기 마련이었던 것이다.
그가 한국전쟁으로 인해 부랴부랴 일본으로 출국하여 독일과 미국 등 세계 여러나라를 떠돌다 34년만인 1984년에 다시 고국을 찾았을 때 한 기자가 '왜 한국 무대를 놔두고 외국 무대에서만 활동하는가?'라고 물은 적이 있다. 그는 "문화도 경제처럼 수입보다는 수출이 필요해요. 나는 한국의 문화를 수출하기 위해 세상을 떠도는 문화 상인입니다."라고 대답하기도 했다.
▲ 다다익선, 1988년작,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한국에서 백남준은 초기의 악동 행위예술가 같은 이미지는 거의 없고, 88올림픽을 기념해 만든 다다익선 같은 작품처럼 오로지 텔레비전 여러 대를 이용한 비디오 아트의 이미지만 강하게 남아있다.
흔히 비디오아트라 하면 정신사납거나 아름다운 영상물을 생각하기 마련이나 다다익선처럼 TV를 쌓아두는 비디오 설치 작업도 많이 했다. TV를 쌓아 역사 속 유명한 인물들의 이름을 가져와 그 사람들의 조각상을 만들기도 했다. 마르코 폴로, 징기스칸, 알렉산더 대왕 등이 있다. 이들의 공통점은 동서양을 가로지른 대표적인 인물이다. Television이란 말 자체가 원거리를 가로지른다는 의미가 있으니, TV에서 이들의 모습을 연상하는 것은 어떻게 보면 자연스러운 일이다.
TV부처라는 작업도 유명하다. 불상을 두고, 그 앞에 CCTV를 설치하였다. 명상하는 부처가 TV를 통해 자기 모습을 들여다 보는 굉장히 묘한 분위기의 작품이다. 다양한 배리에이션이 존재한다.
백남준의 비디오 아트는 보여지는 모습, 영상물에만 국한하지 않는다. 비디오 신디사이저라는 작업도 했는데 피아노 건반을 누르면 그에 맞춰 TV에 입력된 영상이 송출되고, 동시에 실시간으로 합성되는 장치다. 일본의 공학자 아베 슈아와 함께 만들었다. 이러한 비디오 신디사이저는 방송계에도 영향을 미쳤다.
이처럼 그의 비디오 아트는 바이바이 키플링, 굿모닝 미스터 오웰처럼 영상의 내용적인 면으로도 분석할 수 있지만 영상 작업의 구조와 형태 자체로도 분석할 수 있다.
브라운관 TV의 특성을 이용하기도 했다. 브라운관은 전자총을 쏘아 유리판에 발린 형광물질을 자극하여 영상을 보여준다. 백남준은 이를 직접 조작하여 이미지를 만들어냈는데 TV를 위한 선과 같은 작업이 있다. 또한 자석을 갖다대어 이미지를 조작하거나 심지어는 관객이 직접 자석을 가지고 움직이며 영상을 만들 수 있는 작업을 하기도 했다.
비디오 아트 작업을 하는 데 많은 TV가 필요했는데, 활동 초기엔 소니에서 출시한 제품을 쓰다가 어느 시점 이후로는 삼성전자의 협력을 받아 삼성 TV를 사용하였다.
이 때를 즈음해서 삼성 텔레비전 광고도 찍었다. 백남준의 육성을 들을 수 있다. 오리지널 서울 사투리가 정겹다.
칠성사이다 CF 1편 - "기억하는 과거"
칠성사이다 CF 2편 "창조하는 현재"
1995년 8.15 광복 50주년 기념의 일환으로 제작된 칠성사이다 CF에 출연하여 과거 칠성사이다의 CF 영상들과 시대별 영상자료들을 기반으로 자신만의 작품을 만들었다. 특히 웅장함으로 뇌리에 깊숙히 남는 1편의 BGM은 가수 김수철이 작곡을 하여 화제가 되기도 했다.
2000년 1월 1일로 넘어가던 새벽(미국 동부시간), 굿모닝 미스터 오웰 때와 마찬가지로 밀레니엄을 기념한 백남준의 작품 "호랑이는 살아있다(Tiger is Alive)"가 전 세계에 다시 한 번 위성 생방송으로 동시 송출되었다. 한국에서는 CBS와 뉴스 제휴 관계에 있는 MBC에서 중계했는데, 방송을 진행하던 손석희 앵커가 "시청자 여러분, 텔레비전이 고장난 것이 아님을 재차 말씀드립니다."라는 멘트를 여러 번 하기도 했다(...). 사실 비디오아트의 특성상 아무런 코멘트 없이 영상만 보고 있으면 "이거 TV가 고장난 것 아냐?"라고 오해하기 딱 좋은 상황이긴 했다.
2002 한일월드컵 개막식에도 "동방으로부터"라는 작품을 내놓았다.
2006년 1월 29일 미국 플로리다주 마이애미의 아파트에서 74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사망 직전까지도 왕성한 활동을 했다고 한다. 유언은 "맛있어, 맛있어"로 아내가 해준 장어 덮밥을 맛있게 먹곤 얼마 안가 눈을 감았다고 한다. 장례식은 평소 그의 기행(?)에 걸맞게, 슬픈 기운 없이 폭소 속에 이뤄졌는데, 사회자가 젊은 시절 관객들의 넥타이를 마구잡이로 잘라댔던 그의 이야기를 하자 조문객들 모두 폭소했고 그걸 그대로 재현하자는 제안에 참가자들 모두 메고 온 넥타이를 잘라 그의 관에 넣어 주고 웃으며 그와 작별했다.
그의 유해는 그가 주로 활동했던 한국, 독일, 미국에 분산되어 안치되었으며, 한국에 있는 유해는 봉은사에 안치되어 있다.
심지어는 사망 후에도 광고모델로 등장하기도 했다. 사망 2년 후인 2008년 TV 전파를 탄 KT의 'show' 브랜드 광고 중 Mr.Innovative 편은 백남준 선생의 생전 퍼포먼스를 재편집한 영상으로 이루어져 있디. 마지막에는 3D 모델링으로 재구성한 선생의 얼굴과 "쇼를 해라"라는 생전의 목소리가 나온다.
3. 평가
"백남준을 비디오아트의 창시자라고만 규정하기엔 부족함이 많다. 20세기에 이미 디지털로 연결된 세상을 내다본 선지자였으며 인공위성까지 동원할 만큼 엄청난 배포의 기획자였다. 마셜 매클루언 같은 문명비평가부터 데이비드 보위 같은 가수까지 전 세계 수많은 인사가 그의 친구였다. 백남준이 연하장을 보내는 이는 1000명이 넘었다. 그야말로 국제적인 스타였다."
미술사학자 김홍희
"백남준이 한국에서 예술을 했다면 이렇게 세계적으로 유명한 거장이 되었을까? 나는 가끔 주변 이들에게 이야기한다. 아마도 힘들었을 거라고. 아쉽게도 한국 사회는 귤을 맛있는 귤로 키우지 못하고 탱자로 만드는 경향이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가 일찍 한국을 떠난 덕분에 한국인의 원형적 심성과 내면을 가장 잘 보존한 사람이 되었다고 나는 믿는다. 그리하여 그가 만든 작품 앞에서 우리는 잃어버린 기억과 한국의 문화적 유전자를 대면하게 되는 것이다."
이어령
백남준이 높게 평가 받는 이유는 첨단기술매체와 인간이 어떻게 공존해야 할지 상상하고 이를 예술로 표현했다는 점에 있다. 당시 예술가들이 텔레비전 같은 새로운 매체에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고 이를 배척하거나 파괴하는 작업을 선보인데 반해, 백남준은 새로운 예술을 선보이기 위해 전자회로 관련 기술도 직접 공부하고 아베 슈야 같은 기술자와 협력할 정도로 적극적인 모습을 보였다. 심지어 작품 <etude 1>(1967-1968)을 만들기 위해 벨 연구소에서 포트란 언어로 코딩까지 시도했다고 한다.
백남준은 저술이나 이론 작업도 꽤 많이 했다. '전자 고속도로'를 예견한다든지, '인포 아트'에 대해 논한다든지. 인터넷과 스마트폰, 유튜브나 스트리밍이 일상화된 지금 읽어보면 당연하고 뻔하다 싶은 내용을 써놓은 경우가 많지만, 인터넷은 커녕 모든 사람이 컴퓨터를 휴대하고 다닌다는 발상 자체가 공상 과학의 영역이었던 70년대에 그런 예견을 한 것으로, 전자 고속도로의 개념을 작품화한 '전자 초고속도로' 라는 작품을 1974년도에 만들었다. 본문에 나오는 내용 중 일부를 74년도 이전에 예견했고, 93년도까지 현재 21세기의 모습을 예언했으며 전부 현실화되었다. 그 빌 게이츠도 자신의 저서에 비슷한 내용을 저술했지만, 이쪽은 95년도다. Apple의 존 스컬리가 지식 탐색기의 개념을 제안하기 시작한 것도 83년이었고 이 때도 아직 시기상조였다고 여겨졌다가 2000년대에 들어서야 제대로 구현되었다. 그의 통찰력이 대단하다고 할 수 밖에 없다.
많은 예술가들은 새로운 매체가 등장할 때 마다 민감한 반응을 보여왔는데 당시 TV는 '바보상자'로 취급하고 TV를 비롯한 미디어 컨텐츠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대부분이었으며 좋은 미래를 전망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사실상 비디오 아트 뿐 아니라 미디어 아트를 논할 때도 백남준을 빼놓고 말하는 것은 힘들 정도다. 실제로, 미디어 아트 관련 서적에 백남준은 적어도 한 구절씩은 꼭 들어가 있을 정도다.
세계 유명 미술관에서 백남준의 작품을 소장품목에 넣은 것도 전혀 신기한 일이 아니다. 해외 예술 경향을 국내에 소개하거나, 휘트니 비엔날레의 경험을 살려서 광주비엔날레 조직에 큰 도움을 주는 등 한국 미술 역사의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4. 국내 소장 미술관
2001년 백남준은 경기도와 함께 아트센터 건립을 논의해왔다. 주제는 '백남준이 오래 사는 집'으로 백남준 타계 이후 2008년 10월 경기도박물관이 위치한 경기도 용인시 상갈동 일대에 백남준 아트센터라는 이름으로 개관하였다. 주로 현대미술을 위시한, 퍼포먼스, 개념, 설치 미술이 중점적으로 전시되며, 정기적으로 행위예술 페스티벌이 열리곤 한다. 백남준 아트센터가 들어선 곳은 도립박물관과 한국민속촌, 도립국악당 등이 인접해 있어 용인시는 용인 G-뮤지엄파크(경기도박물관·백남준아트센터·경기도어린이박물관)를 구축해 문화·예술적 시너지효과를 내고 있다. 또한 용인 마북동에 있는 한국미술관은 그의 작품과 그의 아내의 작품이 자주 전시된다. 이래저래 백남준과 용인은 인연이 깊은 듯.
용인의 백남준 아트센터 외에는 다음의 기관에서 백남준 작품을 소장하고 있다. 다만 소장중이더라도 모니터가 나가서 수리중일 가능성을 배제하지는 말자. 실제로 백남준 작품은 CRT 모니터가 나가서 수장고에 끌려가거나 가림막으로 가려놓거나 아예 TV를 꺼버리는 경우가 있다.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 엄청 큰 작품을 갖고 있다. 모니터가 자그마치 1003개... 작품명은 '다다익선'. 수리할 때가 되었는데 이미 단종된 CRT를 구해서 고칠지 이참에 LCD로 바꿀지 고민하더니 최대한 CRT를 구해서 교체하고 대체 부품을 못 찾은 부분은 껍데기만 놔두고 LCD와 OLED 등 최신 디스플레이로 교체했다. CRT의 수명 문제와 부품 노후화로 화재나 폭발 등의 가능성이 있어 2018년 4월 18일 부로 가동이 중단되었으며 보수작업을 거쳐 2022년 9월 재가동을 시작했다.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지하층 통로에 설치되어 있는데 웬만한 사람들은 전시물인지 모르고 지나친다. 작품명은 <달은 가장 오래된 텔레비전이다-1965-67>
대전시립미술관: 1993년 대전 엑스포 당시 재생관에 전시되었던 비정수의 거북선이 있다. 근래까지 재생관에 방치되어 있었으나 현재 대전시립미술관으로 이동, 수리후 전시중이다.
삼성미술관 리움: 2동 1층에 <My Faust-Communication> 전시중. 도슨트가 투어 중에 설명해주는 작품에 포함되어 있다.
부산시립미술관: 1층 로비의 <덕수궁> 외에 4점 보유.
삼성화재교통박물관: 야외 전시장에 <20세기를 위한 32대의 자동차 - 1997>가 전시되어 있다.
서울시립미술관: 1층 로비에 <서울 랩소디> 전시 중. '굿모닝 미스터 오웰', '바이바이 키플링', '서울 판타지아', '네 마음 속의 서울' 등 영상이 담겨있다. 이 중 2대의 모니터에서는 꽤 야한 누드가 나온다.
세종문화회관: 대극장 로비에 <호랑이는 살아 있다> 영구설치.
수원역 AK프라자: 6층 문화센터 입구에 전시 중. 2003년 수원역 민자역사(개관 당시 애경백화점) 준공 당시부터 2층 로비에 있었던 작품이지만 AK프라자 측이 매각을 시도한 적이 있어서 논란이 되었던 작품이다.
우리들병원: 병원로비에 <안심낙관> 작품이 전시중이다.
창원 성산아트홀 전시관 로비 : <창원의 봄> 상시 전시 중. 현재 작동하고 있지는 않다.
포스코: 서울시 강남구 테헤란로 포스코 센터 1층 입구에 <철이철철> 이라는 작품을 전시중이다.
한국산업은행: 여의도 영업부 로비에 1점. 산은본점 내부에서는 사진촬영이 불가능하니 눈으로만 보자. 다이렉트 계좌개설 핑계삼아 가보자.
하나금융투자 여의도 본점: 1층 후문 쪽에 <하나 로보트, 2001>, <초고속 경제, 2001>, <시집온 부처, 2001>, 총 세 점이 전시되어 있다. 사진촬영과 출입이 자유롭다.
한양대학교 백남학술정보관(중앙도서관): 로비에 <TV 첼로>라는 작품이 전시되어 있다. 출입통제 및 사진촬영 금지조치는 이뤄지지 않고 있지만, 로비 앞 출입게이트에 있는 경비가 해당 작품을 감시하고 있다.
효성그룹 본사(공덕동): 1층 로비에 <백제무령왕>, <FAUST> 2점의 작품이 전시되어 있다.
SK증권 여의도점: 1층 로비에 <개선장군>이 전시되어 있다.
본태박물관 : 제주의 본태박물관 4점 소장. 그 외 백남준의 드로잉작업 등도 전시중이다. <금붕어를 위한 소나티네>, <TV첼로>, <나는 결코 비트겐슈타인을 읽지 않는다.>, <Rondo in RGB>
메종글래드 제주: 1층 로비에 <벤자민 프랭클린>이 전시되어 있다.
에코랜드 호텔: G층 갤러리에 <요셉 보이스>가 전시되어 있다.
5. 해외 소장 미술관
미국 워싱턴 DC의 허쉬혼 미술관과 아메리칸 아트 미술관
예일 대학교 미술관
UC 버클리 BAMPFA 미술관
인디애나폴리스 미술관
일본 후쿠오카의 후쿠오카 미술관과 캐널시티 하카타
독일 뒤셀도르프의 노르트라인주립미술관
독일 쾰른의 루드비히박물관
호주 캔버라의 국립미술관
호주 호바트의 MONA(Museum of Old and New Art)
덴마크 코펜하겐 국립미술관
스웨덴 스톡홀름 현대미술관
영국 런던의 테이트 모던 - 테이트 모던에서는 아예 백남준의 작품만을 전시한 공간을 따로 마련해 놓았다. 현대 자동차 후원관.
하바드대학교 Fogg 미술관
6. 어록
"문화도 경제처럼 수입보다는 수출이 필요해요. 나는 한국의 문화를 수출하기 위해서 세상을 떠도는 문화 상인입니다."
— 비디오 아트의 창시자 백남준, 1984년에 "왜 한국 무대를 놔두고 외국 무대에서만 활동하는가?" 질문에서.
"인생은 싱거운 것입니다. 짭짤하고 재미있게 만들기 위해 (예술을) 하는 거지요."
"1982년에 만일 전쟁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나는 쉰 살이 될 것이다. 2032년에 내가 여전히 살아있다면 나는 백 살이 될 것이다. 3032년에 내가 여전히 살아있다면 나는 천 살이 될 것이다. 11932년에 내가 여전히 살아있다면 나는 십만 살이 될 것이다."
— 1964년, 동료 예술가 볼프 포스텔이 "정확한 자서전을 써달라"고 부탁하자 써낸 답글 중
''백남준을 비디오 아트의 창시자라고만 규정하기엔 부족함이 많다. 20세기에 이미 디지털로 연결된 세상을 내다본 선지자였으며 인공위성까지 동원할 만큼 엄청난 배포의 기획자였다. 마셜 매클루언 같은 문명비평가부터 데이비드 보위 같은 가수까지 전 세계 수많은 인사가 그의 친구였다. 백남준이 연하장을 보내는 이는 1000명이 넘었다. 그야말로 국제적인 스타였다.”
미술사학자 김홍희
"백남준이 한국에서 예술을 했다면 이렇게 세계적으로 유명한 거장이 되었을까? 나는 가끔 주변 이들에게 이야기한다. 아마도 힘들었을 거라고. 아쉽게도 한국 사회는 귤을 맛있는 귤로 키우지 못하고 탱자로 만드는 경향이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가 일찍 한국을 떠난 덕분에 한국인의 원형적 심성과 내면을 가장 잘 보존한 사람이 되었다고 나는 믿는다. 그리하여 그가 만든 작품 앞에서 우리는 잃어버린 기억과 한국의 문화적 유전자를 대면하게 되는 것이다."
백남준의 오랜 호형호제, 이어령
"그건 그렇고, 30세기에는 무슨 일이 벌어질까?"
"....선생님, 혹시 (곧 다가올) 21세기 말씀이십니까?"
"아니, 1000년 후 30세기."
1994년 미국 휘트니미술관 2인 전시를 함께한 설치미술가 강익중과 나눈 대화
백남준은 어려울 때마다 정신적으로 의지한 내 마음 속의 부처였다.
오노 요코, 백남준의 장례식 추모연설 中
나는 세계적인 예술가가 아닙니다. 세기(世紀)적인 예술가입니다.
2002년 무렵 경기문화재단에 보낸 친필 편지
7. 여담
2010년 7월 20일에 구글에서는 그의 탄생 78주년을 기념하여 로고를 특별히 제작하기도 했다.
미국의 빌 클린턴, 김대중 대통령 앞에서 실수 아닌 실수를 범한 사건이 잘 알려져 있다. 1998년 6월 김대중 대통령 방미에 맞춰져 백악관에 초대된 백남준은 빌 클린턴 대통령 면전에서 그와 악수하다가 바지가 흘러내렸다. 당시 백남준은 뇌졸중 후유증으로 지체장애인이 되어 있었고 이러한 상황에서 악수 직전에 바지가 흘러내린 것. 그것도 아무 속옷도 입지 않은 채였다. 단순한 실수였다고는 하는데 당시 상황이 상황이다보니 이 사건을 두고 많은 사람들의 의견이 분분했다고 한다. 백남준은 이에 대해서 "My pants dropped. That’s all.(바지가 흘러내렸다, 그게 다야)" 라고 말했다고. 많은 사람들은 연이은 섹스 스캔들에 시달렸던 클린턴을 '빗대어' 이 같은 '퍼포먼스'를 했다거나 'Electric hightway(전자 정보 고속도로)'라는 단어를 클린턴이 마음대로 가져다 사용했기 때문에 그랬다는 등 각종 설들이 나왔다. 이 당시 백남준이 바지를 잡고 입장하다가 놓은 점이나, 바지가 흘러내린 이후에도 백남준의 표정이 미동도 하지 않는 것을 보고 이러한 설들이 더 부추겨진 면도 있는 듯. 그러나 이미 1998년은 한 번 뇌졸중으로 쓰러진 이후이기에 표정 변화가 없는 점은 감안할 수 있다. 이 사건에 대해 그의 행위예술가적 행보를 잘 알고 있는 서양에서는 항의 내지 풍자성 행위 예술이 맞는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많다. 실제로 백남준아트센터에서는 아예 이를 포스터로 쓰며 그를 '트릭스터'로 칭하기도 했다. 기다리고 걸어오기까지 하다 하필 빌 클린턴 앞에서 했다는 것이 타이밍도 너무 절묘해서 실수가 아닐 것이라 보는 이들이 많긴 하다.
백남준 예술적 '하의 실종'
원로 코미디언 백남봉과 앞글자 두 자가 동일하고 연령대도 비슷한 데다 두 사람 모두 국내에서는 이름이 잘 알려진 관계로, 80~90년대에는 대중들이 두 사람의 이름을 은근히 헷갈리거나 백남봉이 백남준의 짝퉁 취급을 받는 경우도 많았다. 물론 2006년 백남준의 작고와 더불어 2010년 백남봉의 작고로 이런 혼란은 완전히 사그라든 듯 하다.
일본의 작곡의 신이자 YMO의 사카모토 류이치가 존경하는 인물이다. YMO의 PV를 보면 백남준의 영향을 받았다고 하는 걸 볼 수 있다.
현재도 백남준의 영향력은 미술사, 예술가, 음악가 등 다양한 예술분야에서 발휘되며, 마틴 게릭스의 Yottabyte 뮤비에서 나온 비디오 아트, 이은결의 일부 마술 트릭도 다 백남준이 개척한 장르라고 하는 걸 생각하면, 전공자가 아닌 사람한테 생소한 현대미술이라는 장르를 대중들한테 쉽게 다가갈 수 있도록 만든 사람 중 한 명임을 알 수 있다. 비디오 아트가 여기저기서 재해석되면서 의외로 대중에게 친숙해졌다.
브라운관의 수명이 다하면서 그의 대표 작품인 다다익선의 보존 문제가 불거지기도 했다.
1998년 예술계에 기여한 그 공로를 인정받아 독일 문화원에서 수여하는 괴테 메달을 수상했다. 한국계로서는 두 번째 괴테 메달 수상자이다. 첫 번째는 작곡가 윤이상.
최경한 서울여대 명예교수(서양화가)와 경기고등학교 47기 동기생이다. 고등학교 시절 미술반에서 같이 활동했다. 백남준 사후 백남준미술관 건립추진위원장을 맡았다. 고교 1년 후배인 김우중 대우그룹 전 회장과도 친분이 있었다.
백남준의 작품과 관련해서 미술평론가 손철주가 쓴 《그림, 아는 만큼 보인다》라는 책에 이런 일화가 실려 있다. 1992년 8월 한 화가가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린 백남준 회고전에 갔다가 본 광경으로, 두 여고생이 전시된 작품들 중 속을 뜯어낸 진공관식 TV 속에 촛불 하나가 켜진 〈TV 촛불〉이라는 제목의 작품 앞에서 대화를 하고 있더란다. 이 때 한 쪽 여고생이 "야, 이것도 예술이냐?"라고 묻자 옆에서 함께 구경하던 다른 여고생 曰, "아니, 예술이 아니고 기술이지. 일주일 전에 봤던 촛불이 아직 안 꺼졌잖아."
백남준 : 말馬 에서 크리스토까지라는 책이 있다. 백남준의 글을 모아 놓은 총서인데, 백남준의 생전 생각과 아이디어를 잘 볼 수 있다. 방대한 관심사와 깊은 지식, 무엇보다 이를 엮어 미래를 내다보는 통찰력이 돋보인다.
스탠드업 코미디언이자 넷플릭스 로맨틱 코미디 《우리 사이 어쩌면》 여주인공 겸 공동 작가인 앨리 웡의 전남편 저스틴 하쿠타가 백남준의 조카손주이다. 저스틴의 아버지가 백남준의 장조카 켄 하쿠타(백건)으로 하버드 비지니스 스쿨을 백남준의 도움으로 졸업하고 장난감 회사를 차리는 한편, 발명 관련 어린이 교육 프로그램의 장수 MC(Dr.Fad)였으며 아들 저스틴 역시 하버드 비지니스 스쿨에 보냈다. 하쿠타 일가는 5.16 쿠데타 때 부정축재자로 몰려 굴지의 대기업 태창방직을 통째로 뺏기고 조국에 대한 배신감을 안은 채 창씨개명했던 성씨 그대로 미국에 정착했다. 물론 해방 후 한국에 남은 백씨 일가는 복성했으며 백남준 역시 Paik으로 활동했다. 백남준의 사후 기념 사업, 유작 관리, 유산 처분을 주도한 것이 켄 하쿠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