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의 수도 경주를 왜 동경이라 했을까 의미심장한 내력이 궁금했다. 향가 처용가에도 "동경 밝은 달에 밤들이 노니다가"로 나온다. 경주를 동경으로 부른 내력은 중국 대륙에 있는 신라방을 수도로 믿기 때문이다. 중국 한족 수도 중심의 사대적 생각으로 부른 동경은 절대 아니다. 김일제의 조상이 중국에서 세력을 유지하다가 열강의 힘에 밀려 동으로 온 역사와도 관련이다. 고조선 유민들이 중국에서 왕성하게 활동하던 역사 배경 때문에 신라방을 서경으로 부르지 않았다. 경주를 동경이라고 불렀다면 중국 대륙의 어느 지역에 서경이 반드시 있어야 할 일이다. 실은 서경이 아닌 신라 수도 중심이 거기였기 때문이다. 신라의 수도가 중국에 있었다는 말과 같은 뜻이다. 역사적으로 중국 대륙에 있는 신라방 사람들이 수효도 많고 더 오래전 고조선 역사를 누려왔기 때문이다.
신라방이란 말도 순수 우리말이다. 고구려 국내성을 집안이라 부른 것도 순수 우리말이다. 집안은 가정과같이 평온함의 뜻을 가진 우리 말이다. 중국 대륙에 우리 민족이 오랫동안 많이 살아왔고 경주보다 먼저 역사 속에 세력을 누렸다는 대륙 신라의 세력권 흔적이다. 동이족이란 기마민족의 힘을 길러 중국 한족에게 이겨왔던 고조선 역사의 이야기도 포함이다. 고구려 이전부터 누려왔던 고조선 유민이 대륙에 남아 옛고향으로 지켜온 역사다. 중국 한족의 역사 황하문명보다 고조선 옛터 요하문명이 1,500년 앞선 일은 발굴하는 유물로 인정된다.
신라의 문무왕도 이를 알고 김알지의 조상이 김일제라는 사실을 비문에 담게 했는지도 모른다. 김일제는 한무제에게 신임을 받아 제후 작위를 받은 인물이다. 현재도 김일제 혈족들이 모여 살고 있는 지역을 중국 대륙에서 볼 수 있다. 무덤 유적과 지역 형성 과정에도 삶의 흔적들이 많이 남아 있다. 중국 한족들은 흉노라고 주장하지만, 고조선 유민들이 주도 세력이었다. 그들은 흉노 동이족 등 호칭을 쓰지만 만리장성을 조성한 것을 보아도 기마민족의 힘에 눌려 전전긍긍한 흔적이다.
문무왕 비석에 나오는 김일제는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고조선의 후예다. 중국 대륙에서 활동한 그는 우리 민족임이 분명한 역사 기록 속 인물이다. 금석문자인 비문의 기록 내용은 종이책보다 고증 능력이 확실하고 분명하다. 중국 한족들은 흉노족이라 낮추어 호칭했지만, 고조선 유민들이 대세였다. 김일제는 반고가 지은 한나라 역사서에 흉노족 휴도왕의 태자라고 한다. 나중에 한족 토벌군의 포로가 되었으나 한무제왕 다음의 높은 직위에 올랐다. 한때 서역 지방 유럽까지 세력 확장에 한족 조상은 당해내지 못한 분노 섞인 호칭 남발인 셈이다.
최치원의 천부경을 보면 중국 대륙에서 고조선 문화를 발견했던 일이다. 최치원은 12세에 당나라 유학하여 장원급제하고 그곳에서 벼슬까지 지냈다. 신라방 지역의 역사와 사람들 삶을 경험한 인물이다. 그의 업적에 남아 있는 천부경은 단군 역사와 관련한 듯하다. 거기는 고조선의 유민들 삶의 흔적으로 남았던 최치원 경험 증거다. 천부경을 밝힌 배경에는 신라방으로 부를 만큼 신라 이전 우리 민족이 역사 속에 함께 살아온 고조선 역사 기록이다. 천부경은 단군의 고조선 겨레가 지향한 정신적인 골격인 듯하다. (글 : 박용 20240105)
@ 추고 : 중국 한족이 고조선 후예를 흉노로 명명하고 한족의 역사가들이 그렇게 만들었다. 한국의 역사가들도 흉노 호칭에 동참하는 오류를 범했다. 김씨조차 흉노 호칭이 싫어 비석이나 비문을 보호하지 않은 일 같다. 왕족을 흉노라니 하고 노여워한 모습이 보는 듯하다. 마치 중국 동북공정에 이용당하는 학자 모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