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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 6년(1573년) 가을, 어느 날 함경도 땅 홍원에서 처음 만난 순간 두 사람은 운명적으로 엮여지게 되었다. 남자는 영암 출신으로 문관인 시인인 최경창(崔慶昌), 여자는 홍원 관아 기생인 홍랑(洪娘)이다.
그때 홍랑은 나이 열 예닐곱의 갓 피어나는 처녀 몸이었지만, 고죽(孤竹) 최경창은 그보다 17, 8살이나 많은 34살의 중년이었다. 그러나 이 두 사람의 나이차를 가볍게 뛰어넘게 해주는 것이 있었으니 바로 시(詩)와 음악이었다.
29살 때인 선조 원년(1568년)에 문과에 급제한 최경창은 당대의 문인 이율곡, 정철, 이산해, 양사언 등과 어깨를 나란히 교유하며 시와 문장으로 문명을 떨치고 있었다.
그의 청절하고 담백한 시풍은 멀리 중국에까지 알려졌을 정도였다.
危石纔敎一逕通(위석재교일경통) 큰 바위 겨우 가닥 좁은 길만 허락하고
白雲千古祕仙蹤(백운천고비선종) 흰 구름은 천년동안 신선의 종적 감추는구나.
橋南橋北無人問(교남교북무인문) 남북에 온통 귤나무 사람은 아무도 없고
落木寒流萬壑同(락목한류만학동) 나뭇잎은 떨어져 날아 온 골짜기에 가득하다
< 중국 왕사정 지북유담(池北偶談)에 수록 된 시>
최경창은 호가 고죽(孤竹)이었는데 호가 암시하는 바대로 피리의 고수였고, 홍랑 또한 거문고 연주가 최고수준의 기량이어서, 둘이 음률을 즐기며 시와 술잔을 주거니 받거니 하다 보니, 고죽은 이래저래 홍랑에게 대책 없이 빠져들고 말았다.
그럼 과연 홍랑은 어떤 기녀였던가. 야사(野史)가 전하는 바에 따르면 홍랑은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마저 열두어 살 무렵에 잃었다. 말하자면 고아가 된 것이다. 그녀를 거두어준 것은 어머니의 병을 돌봐준 마을의 의원으로, 홍랑은 그로부터 글을 배웠다. 나이가 들면서 홍랑은 시와 음률을 가까이하게 되었고 타고난 미모와 영특함으로 꽃다운 규수로 성장했다. 그러나 가난을 떨칠 수가 없어 기적에 몸을 올리고 홍원 관아에서 지냈다. 요즘 말로 하자면 엔터테이너로서의 생업을 시작한 셈이다.
최경창이 홍랑을 만난 곳은 임지인 함경도 경성으로 가던 중 하룻밤 묵었던 함경도 홍원 관아였다. 당시 경성은 함경도 북부에 웅거하던 여진족들이 자주 출몰하던 곳으로, 말하자면 최전방 지역이었다. 병마절도사가 주재하는 경성도호부에 고죽 같은 문신을 북평사(北評事)로 보내는 것은 무관 출신인 병마절도사를 보좌하기 위함이었다.
홍원 객사에서 하룻밤 사이에 운우지정(雲雨之情)을 나눈 고죽과 홍랑은 경성으로 가는 길에는 동행하지 못한다. 부임지에 가면서 댓바람에 관기를 데리고 갈 수는 없는 노릇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얼마 후 두 사람은 경성의 군막에서 다시 만난다. 우리는 여기서 홍랑의 엄청난 다릿심을 처음으로 보게 된다.
홍원과 경성은 굽이굽이 험한 산길로 이어지는 천릿길이다. 서울-부산 간 거리와 맞먹는 셈이다. 오로지 사랑하는 정인(情人)을 다시 한 번 보고 싶다는 마음에 홍랑은 남장을 한 몸으로 이 멀고도 험한 길을 한 걸음에 갔다. 천신만고 끝에 마침내 막중(幕中)에서 두 사람이 마주 섰을 때, 그 감동과 애틋함이 어땠을 것인가는 가히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하지만 이들의 사랑 꿈은 반년을 넘기지 못했다. 선조 7년(1574년)인 이듬해 봄, 고죽이 경성에 부임한 지 6개월 만에 조정의 부름을 받아 한양으로 돌아가야 했다. 경성에서 한양까지는 경흥대로를 따라가는 2천릿길이다. 홍랑은 차마 헤어지기 싫어서 배웅을 나선다.
문 밖 배웅 정도가 아니라 하루만 더 하루만 더 하고 따라 나선 길이, 천릿길 홍원을 지나고 함관령(함흥-홍원 간 고개)을 넘어 쌍성(영흥)에까지 이르렀는데, 출발지인 경성에서 무려 1,300리 길이었다. 역사상 최장의 배웅길이 아닐까 싶다.
하지만 홍랑도 여기서는 더 이상 갈 수가 없다. 가고 싶어도 못 간다. 나라에서 법으로 금지해놓은 것이다. 이른바 양계(兩界/평안도·함경도)의 금(禁)으로 두 도의 백성들은 도계를 넘어 남쪽으로 올 수 없었다. 오랑캐의 침입이 잦아 빠져나가는 인구를 그대로 방치했다가는 관북이 무인지경이 될 것을 염려한 조치였다.
단아한 필치인 홍랑 육필의 '묏버들' 원본.
홍랑이 연인 고죽을 위해 직접 붓을 들어 쓴 시조다.
두 사람은 쌍성 고갯마루에서 작별을 고했다. 때는 봄철이어서 골짜기마다 빛 고운 진달래가 무리지어 피어 있다. 이 길은 한 40년 후 백사 이항복이 '철령 높은 봉에 쉬어 넘는 저 구름아'를 읊으며 귀양을 간 길이기도 하다. 떨어지지 않는 발길을 돌려 하염없이 걷다 보니 함관령 고갯마루다. 날이 저물고 차가운 빗발까지 뿌린다.
홍랑은 발길을 멈추고 길가의 산버들을 몇 가지 꺾었다. 그리고 지필묵을 펼쳐 시조 한 수를 적어 내려갔다. 고죽은 자신의 일기에다 함관령의 일에 대해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겼다.
"나와 이별한 뒤, 홍랑이 함관령에 이르렀을 때 날이 저물고 비가 내렸다. 이곳에서 홍랑이 내게 시를 한 수 지어 보냈다".
이 시조가 바로 유명한 ‘묏 버들’ 시조다. 한국 문학사상 가장 아름다운 연시(戀詩)이다.
묏버들 갈해^ 꺾어 보내노라 님의 손대^
자시는 창 밖에 심거 두고 보소서
밤비에 새잎곳 나거든 날인가도 여기소서
(^갈해: 가려 / ^님의 손대: 님이 계신 데 / '손': 所+ㄴ.)
산에 있는 버들가지를 아름다운 것을 골라 꺾어 임에게 보내오니.
주무시는 방의 창문가에 심어두고 살펴 주십시오.
행여 밤비에 새 잎이라도 나거들랑 마치 나를 본 것처럼 여기소서.
국문학자 양주동 박사는 이 시조를 두고 우리 시조사상 최고의 걸작이라고 평했고, 작가 이태준은 “그 뜻의 그윽함과 소리의 매끄럽고도 사각거림이 묘미”라고 극찬했다. 여기에 ‘사각거림’이라고 표현한 것은 시 전편에 ‘ㄱ' 음이 반복적으로 나타나 읽는 맛을 더해주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자시는 창 밖'과 '날인가도 여기소서'에서 보듯, 고죽과 밤을 같이 지낸 홍랑의 자부심과 고죽의 정부인을 배려한 겸양, 정인인 고죽을 다그치지 않는 넓은 품은 시의 품격을 더욱 높여주고 있다.
버들가지는 옛사람들이 친구나 정인과 이별할 때 꺾어주던 정표이다. 봄에 가장 잎이 빨리 피는 버들가지처럼 빨리 돌아오라는 뜻을 담고 있다고 한다. 홍랑은 묏버들 몇 가지와 이 시조를 보자기에 정성껏 여며 인편으로 고죽에게 보냈다. 고죽은 이것을 받아들고 위와 같은 일기 기록을 남긴 외에도 홍랑의 시를 한문으로 번역한 ‘번방곡飜方曲’을 지었는데, 아래와 같다.
折楊柳寄與千里人(절류양기여천리인) 버들가지 꺾어서 먼임에게 보내오니
爲我試向庭前種(위아시향정전종) 바라건대 나를 위해 뜰 앞에 심으소서
須知一夜生新葉(수지일야신생엽) 하룻밤 지나 새잎 나면 모름지기 아오리다.
憔悴愁眉是妾身((초췌수미시첩신) 시름겨운 야윈 얼굴이 바로 제 모습임을
‘번방’이란 즉석 번역이란 뜻이다. 가람 이병기 시인은 위 두 시에 대해 다음과 같은 평을 남겼다.
“이는 그 원가(原歌)가 ‘번방곡’이란 한시보다도 낫게 되었다. 간곡하고 심절한 그 석별의 뜻이 언사에 넘친다. 종래 시가에도 증절류(贈折柳)와 같은 것이 없지 않으나, 이것은 그런 걸 그대로 답습한 것이 아니고, 새로운 한 작품이다. 우수한 것이다. 한 보배이다.”
여기서 원가는 홍랑의 묏버들 시다. 홍랑의 원시를 고죽이 번역한 시보다 높게 평가한 것이다. 이병기 시인은 홍랑의 원시를 종래 시가를 답습하지 않고 새로운 분야를 개척한 것으로 극찬하고 있다.
다음은 최경창이 홍랑의 시문 [묏버들 가려 꺾어]에 답한 증홍랑시(贈洪娘詩)이다.
相看脈脈贈幽蘭(상간맥맥증유난)서로 바라보다 난초를 드리나니
此去天涯幾日還(차거천애기일환)지금 멀리 가면 언제나 돌아오리
莫唱咸關舊時曲(막창함관구시곡)함관령의 옛 노래를 부디 부르지 마소
至今雲雨暗靑山(지금운우암청산)지금은 구름비에 청산이 어두워라.
◼사경의 고죽을 기어이 살려내다
두 사람은 그 후 한 3년간은 서로 만나지 못한 듯하다. 사랑에는 국경도 없다고 하지만, 그건 요샛말이고, 당시에는 국법으로 도계(道界)도 넘지 못하게 했다. 그런데 홍랑의 사랑은 그것마저 넘었다.
한성으로 간 뒤 시름시름 앓던 고죽이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자 홍랑은 잠시의 머뭇거림도 없이 길을 나섰다. 홍원에서 한성까지는 함관령을 넘고 나서도 천릿길이다. 이 먼 길을 홍랑은 놀라운 다릿심으로 이레 동안 밤낮으로 걸어 마침내 한양에 들어왔다. 이것도 기네스북에 오를 기록감이다.
그리고 그리운 고죽을 만났다. 실로 3년 만의 재회였다. 그러나 뼈밖에 남지 않은 고죽은 홍랑을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사경을 헤매고 있었다. 이때부터 홍랑의 눈물겨운 병수발이 시작되었다. 거의 식음을 전폐하고 잠도 자지 않는 필사의 간병이었다. 옆에서 보는 고죽의 본부인도 그 부모도 감동하지 않을 수 없는 눈물겨운 정성이었다.
그 정성이 통했는지 고죽은 이윽고 건강을 회복하여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그러나 최경창이 건강을 되찾은 기쁨도 오래 가지 못했다. 선조 9년 봄, 사헌부는 최경창의 파직을 요구하는 상소를 올렸다. 홍랑이 관기의 신분으로 지역을 이탈하여 양계의 금을 어겼다는 것이다. 더욱이 홍랑이 최경창을 찾아온 때는 명종의 비 인순왕후가 죽은 지 1년이 안된 국상기간이었다.
선조는 사실 고죽의 팬이었다. 그의 시를 무척 사랑했던 것이다. 그러나 명분을 버리면서 고죽을 감쌀 수는 없었다. 결국 최경창은 파직을 당했고, 홍랑도 다시 고죽 곁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홍랑이 떠나던 날 고죽은 이별의 시 두 편과 '번방곡'을 홍랑 손에 건네주었다. 시로 맺어졌던 두 사람이 아니었던가.
고죽이 이별 선물로 건넨 '송별'이란 제목의 칠언절구는 다음과 같다.
玉頰雙啼出鳳城 (옥협쌍제출봉성) 옥 같은 빰 두 줄기 눈물로 봉성을 지나니
曉鶯千囀爲離情 (효앵천전위이정) 새벽 꾀꼬리 천 번을 우니 이별의 정 돋운다.
羅衫寶馬河關路 (나삼보마하관로) 비단 적삼에 좋은 말 타고 떠나는 변방 길
草色迢迢送獨行 (초색초초송독행) 아련한 풀빛만 홀로 떠나는 길을 전송하는구나.
◼홍랑의 '묏버들' 시조 육필 서첩 발견
최경창은 파직당한 얼마 후 복직되어 함경도 종성 부사 등 변방의 한직으로 오래 떠돌았다. 홍랑을 한성으로 불러들일 수 없는 고죽으로서 외직을 자청한 측면도 있었다고 한다. 둘 사이에는 그 동안 연면한 교류가 이어지고 있었을 것이다.
선조 16년(1583년) 봄, 고죽은 경성절도사로 근무하다가 성균관 직강으로 발령받아 한양으로 돌아오던 중 지금의 왕십리 부근에서 객사하고 말았다. 그때 나이 겨우 마흔 다섯이었다. 멀리 함경도 홍원 땅에서 고죽의 부음을 들은 홍랑은 슬퍼할 겨를도 없이 다시 길을 나섰다.
객사를 한 만큼 무덤 돌볼 사람이 마땅히 없어 고죽이 홀로 외로이 있을 것을 생각하니 잠시도 지체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원래 시묘 살이는 움집에서 생활하며 조석으로 상식 올리기를 3년 동안 하는 것이지만, 너무나 힘들어 기한을 지키는 예가 많지 않았다. 대개는 석 달 정도 하는 것이 상례였다.
그러나 파주 한강 옆 고죽의 무덤 곁에 움집을 짓고 시작한 홍랑의 시묘 살이는 한강의 매운 바람 속에서 장장 9년이나 계속되었다. 그것은 시묘 살이라기보다 숫제 고인과의 동거였다. 세상 무엇으로부터도, 누구로부터도 방해받지 않는 홍랑은 시묘 살이를 하는 중에 혹시 불측한 일이 일어날까 하여 스스로 '용모를 흐트렸다.'고 한다. 어떤 자료에는 인두로 얼굴을 지졌다고도 하는데, 실상은 알 수 없다.
기나긴 홍랑의 시묘 살이를 마감시킨 것은 다름 아닌 임진왜란이었다. 최경창이 남긴 시 원고와 유품을 챙겨든 홍랑은 다시 함경도 홍원 땅의 고향으로 돌아갔다. 그로부터 전쟁이 끝나기까지의 7년 동안 그녀의 행적은 아무도 알 수 없다.
그러나 오늘날까지 고죽의 시와 문장이 담긴 '고죽집(孤竹集)'이 전해지게 된 것은 오로지 고죽의 유고를 생명처럼 아낀 홍랑 덕분인 것이다. 전쟁이 끝난 후 홍랑은 해주 최씨 문중을 찾아와 최경창의 유작을 전했다. 그리고 자신의 소임을 다한 듯 고죽의 무덤 앞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어, 멀고 먼 고행으로 이어졌던 고단한 삶을 마감했다. 그녀의 마지막 유언은 자기를 고죽 곁에다 묻어달라는 것이었다.
임진왜란이 1598년 11월에 끝났으니 홍랑의 기질로 보아 아마 그 이듬해 봄을 맞아 고죽에게로 떠나지 않았을까 싶다. 그렇다면 그때 홍랑의 나이 마흔 두셋 정도로 고죽이 떠난 지 16년째의 봄이다.
자신의 사랑에 모든 것을 걸고 고난과 고행으로 점철되었던 홍랑의 삶은 그렇게 마침표가 찍어졌으리라. 홍랑이 죽자 해주 최씨 문중은 그녀를 집안사람으로 받아들여 장례를 지냈다. 최씨 문중에서는 홍랑을 작은 마님이라고 불렀다 한다.
홍랑의 무덤은 최경창 부부의 합장묘 바로 아래 자리 잡게 되었다. 현재 경기도 파주시 교하읍 해주 최씨의 문중 산에 고죽의 묘소와 홍랑의 무덤이 있다. 홍랑과 고죽 사이에는 아들이 하나 있어 그 후손이 현재까지 내려오고 있음이 얼마 전에 밝혀졌다.
그리고 또 지난 2000년에는 홍랑과 고죽의 연시가 수록된 11쪽짜리 서첩이 발견됐다. 이 서첩엔 홍랑의 ‘묏버들’ 원본과, 고죽이 홍랑과 헤어지면서 써준 고죽 육필의 ‘송별’ 등 한시 두 편이 실려 있다. 단아한 글씨의 ‘묏버들’은 홍랑의 친필로 밝혀졌다.
4백 년 전의 시인이 쓴 시조 육필의 발견은 국문학사의 일대 사건이었다. 이 서첩을 보고 가람 이병기 시인이 감상기를 적어 넣은 발문도 함께 공개됐다.
고죽 최경창 부부 묘와 홍랑의 무덤(아래).
앞이 둘의 시비. 비 뒷면에는 홍랑의 '묏 버들'이 새겨져 있다.
파주 교하읍 다율리 산자락에 있다.
그 멀고 먼 길을 걸었던 홍랑의 고단한 여정은 그녀가 10년 세월을 보냈던 파주 다율리 산자락에서 마침표를 찍었지만, 그녀의 무덤자리를 찾는 후세인들의 발걸음은 아직까지도 끊어지지 않고 계속되는 모양이다.
홍랑시비도 지난 1981년 무덤을 찾아온 시인들의 손으로 세워졌다고 한다. 어느 해 여름이던가, 홍랑 묘를 찾았을 때, 보라색 무릇 꽃으로 둘러싸인 그녀의 무덤 앞에 ‘시인 홍랑지 묘’라고 새겨진 오석 빗돌이 서 있었고, 앞쪽의 아담한 시비에는 홍랑의 ‘묏 버들’과 고죽의 번방곡’이 앞뒤로 새겨져 있었다.
두 사람의 사랑은 400년도 더 지난 지금에까지 묏 버들 피는 봄을 지나 무릇 꽃 흔들리는 산자락에서 하나의 아름다운 완결미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아, 묏 버들의 새잎 돋는 봄이 오고 있다. 곧 여름도 가까우리라. 무릇 꽃 흔들리는 홍랑의 무덤에 다시 가보고 싶다.
인생을 살아가는 동안 남녀간의 인연을 맺는 연인 관계에서
타인에 대한 깊은 이해와 공감 그리고 상대를 인정((認定)하는 것이 사랑의 전체 조건이다.
허균은 최경창의 시는 편편이 깨끗하고 맑아 중국 시에 비교 해도 손색이 없다고 평 했다.
고죽(孤竹)이 여성 화자가 되어 임을 기리는 심경을 그린 시를 감상해 보자.
憶在長安日(억재장안일) 그리워요! 장안(서울)에만 있을 그 때에
新裁白紵裙(신재백저군) 하얀 모시 치말 새로 꾸며 놨건만
別來那忍着(별래나인착) 이별한 뒤 어찌 차마 입겠습니까?
歌舞不同君(가무부동군) 노래 춤을 임과 함께 할 수 없으니까요.
< 白苧辭(백저사) 하얀 모시 노래 >
최창경은 음악에도 뛰어나 피리를 잘 불었다고 하며, 영암 해변에 살 때 왜구를 만났으나 퉁소를 구슬피 불어 왜놈들을 향수에 젖게 하여 위기를 모면했다는 일화가 있다. 숙종 때 청백리에 녹선(錄選) 될 만큼 청렴 했던 최경창은, 사후에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강진의 서봉서원(瑞峯書院)에 모셔져 있으며, 최경창의 증손이 1683년 펴낸 저서 <고죽집>에는 홍랑의 시 ‘못 버들 가려 꺾어...’와 이 시를 최경창이 한역한 번방곡(飜方曲)을 비롯하여 236편의 시가 실려 있다.
최경창과 홍랑의 사랑의 배경에는 시대의 조류를 거슬러 인간을 인간으로 바라보는 눈이 있었다. 최창경은 지금까지 시풍과 다른 시 세계를 보여주었다. 신분질서가 아니라 개인과 개인에 내면세계를 중시하고 이런 시 정신은 홍랑을 관기가 아닌 한 인간으로 받아 들였고 홍랑 역시 그랬다. 세상과 타협하지 않고 고결하게 절개를 지킨 순수하고 아름다운 마음이 있었다. <KBS 한국사傳>
출처 : 인터넷 강화뉴스/이광식, KBS 한국사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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