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제는 말할 수 있다. - 사랑을 잃은 한 여인의 삶
이 세상에 태어난 사람치고 행복을 멀리하고 싶은 분은 없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한평생 행복의 느낌을 모르고 산 사람이 있다면 그런 분을 바라보는 마음도 착잡해질 것입니다.
저를 무척 예뻐하셨던 한 분뿐인 고모가 그런 분이셨습니다. 1914년에 강원도 인제의 부농 가정에서 위로 오빠 아래로 남동생을 두고 태어나셨습니다. 어려서 천연두로 인하여 얼굴에 흔적이 약간 남아 있었고, 당시에 여성을 하대하였던 습관을 따라 오빠와 남동생은 고등학교까지 춘천에서 공부할 수 있도록 하였지만, 고모는 학교의 문턱에도 가보지 못한 무학자였습니다.
약간 얽은 얼굴과 무학자라는 열등감은 오랜 세월 고모를 괴롭히기도 하였습니다. 19살에 홍천의 부농(富農)의 장남에게 시집을 갔습니다. 몇 년이 지나도 아이를 낳지 못하자 시어머니는 아들에게 첩을 얻어서라도 자식을 낳아야 한다고 종용하였습니다.
결국, 무뚝뚝하고 무정하기 그지없는 고모부도 등쌀에 못 이겨 첩을 얻게 되었고, 춘천에 집을 얻어 아들과 딸을 보게 되었습니다. 이로 인하여 당시 두 집 살림하게 되면 공무원을 할 수 없는 제도에 의하여 고모부는 40대에 직장을 그만두고 물려받은 농토를 소작인들에게 나눠주어 도지세를 받아 생활하였습니다.
고모는 44세가 되던 해에 4살밖에 되지 않은 저를 저의 아버지에게 부탁하여 외로움을 달래려고 데리고 가셨습니다. 11월 말의 날씨가 을씨년스럽게 추웠을 때 저는 낯설게 와 닿았던 농촌집에서 고모와 함께 잠을 자야만 했습니다. 부모 떠난 꼬맹이 마음에 복받쳐 오르는 서러움과 외로움이 서려 있었고, 고모 역시 남편을 첩에게 빼앗기고 버림받은 고독한 여인이 되어 말 없는 울음이 교차하는 밤이었습니다.
제가 다섯 살 되던 해 고모는 급성 맹장으로 면 소재지에 있는 보건소로 가기 위하여 들것에 실려 떠나게 되었습니다. 저는 고모의 슬픈 얼굴을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아픔의 그늘보다는 외로움과 사랑받지 못한 여인의 한이 서려 있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왜냐하면, 아픔의 현장에 남편이 없었고, 퇴원하고 돌아올 때까지 고모부는 전혀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사랑을 줄 줄 모르는 무정한 남편, 게다가 첩이 사는 춘천에 지내면서 어쩌다 도지세를 받거나 농토를 팔기 위하여 잠시 들려 잠만 자고 가는 남편, 그런 남편마저 잃어버린 서러운 여인은 엄마의 품을 떠난 꼬맹이와 한 이불을 덮고 자면서 알게 모르게 서로에게 위로를 받고자 껴안고 잠을 자야 했습니다.
평생을 남편에게 사랑받지 못하고 사랑을 줄 수 있는 자녀도 없이 고모는 63세에 허망한 삶을 마감하게 되었습니다. 찬 바람이 불어오는 겨울밤에 고모를 생각해 봅니다. 인생에서 최고의 가치가 있다면 사랑의 감정을 갖고 베풀며 사는 것이라 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알기에 이웃을 사랑할 수 있고 마음껏 사랑할 수 있다면 참 복 받은 사람이라 여겨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