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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를 탓하리오, 뱀사골의 찬바람(김해,창년, 마산, 함안)
차는 뱀사골 반선리로 달린다.
그토록 여순사건의 잔당들이 숨어들어 끝까지 저항하다 죽어간 현장을 보고 싶어서다.
동네 입구에 지리산 전적기념관 푯말이 좌측으로 선명하게 보이고 계곡물 흐르는 소리 요란하다.
얼마전까지는 김지회등이 죽어간 위치 표식이 있었다는데 지금은 낡아서 그랬는지 누군가 치워버렸는지 우리 눈에는 보이질 않는다.
하지만 지금은 타계 하시어 안계시는 원로목사님이시던 고 박훤순님을 따라 현장에 직접 같이 갔던 2명의 지인이 동해해 주어 찾는데는 오래걸리지 않았다.
기념관으로 진입하기전에 차에서 내려 우측으로 건물 뒤로 올라가면 바로 목전에 현장이 있었다.
지창수 상사의 명을 받던 경비사관학교 3기 동기생이던 중위 김지회 홍순석이 죽어간 곳이다.
이 현장에서 '49년4월9일 김지회가 부상으로 마지막 죽어가면서 4얼18일 지리산 전투사령관 정일권 준장은 복귀하고 3연대장 함준호 대령이 임명되고 다시 9월28일에는 김백일 대령이 잔당들을 섬멸하여 '50년 1월25일에야 지리산 지구 전투사령부가 해체 된다.
그리고 남부군 대장 이현상등 마지막 유격대들은 지리산으로 숨어들어 북한군의 6.25전쟁 남침을 기다리고...
다리를 건너 기념관에 간다.
하지만 이곳에 위령비를 추가로 세우는 과정에 웃기는 일이 불현듯 생각났다.
6.25전쟁 50주년 기념사업이 휴전 50년만인 2000년부터 시작되는데 당시에 유해발굴 사업이 주
사업이 아니고 주 사업은 주요고지 전투기념행사로 다부동 전투 안강기계전투 포항지구 전투 영덕지구 전투 한석산-매봉전투 인찬상륙작전 315고지 전투 사창리지구 전투등 주요핵심전투를 선별해서 예산을 지원하고 참전용사님 초청행사도 하고 유해발굴은 불과 1억짜리 사업으로 전체 50가지중 아래에 있는 사업이었다.
지역 사업의 일환으로 이미 세워진 전적지 인근에 위려ㅇ비를 세우는데 비문내용이 바로 '역도들의 만행으로 무고한 지역민들이 수없이 죽어갔다'고 각인 한다는 것이다.
육군에서는 입장이 미묘하여 당시 주요직위자가 가도록 되었으나 보류하고 나에게 가라는 것이다.
지역 부대에서는 연대장이 참석하는 것으로 하였다.
그런데 진작 이 지리산 공비토벌의 핵심은 백야사(백00소장이 지휘는 부대로 8사 수도사 서남사 경찰등)인데 그 수장인 백00전 총장(그 당시 전쟁기념사업 000 직분)께서 오기가 거북스럽게 되었다.
아마도 어떤 조정을 통하여 참석했으리라 본다. 난 육군본부 유해발굴임무 이었다.
우린 기념관을 보고 묵념을 올리고 노고단으로 향했다. 이곳에 오르면 드넓은 광야가 한눈에 보인다.동행한 김실장이 여기까지 왔는데 뱀사골 위로 한번 올라가 도대체 어떤 곳이기에 이곳이 공비등, 아니 빨치산의 본거지였는지 보고 가자하여 일정 구간을 올라 섰다.
때는 가을이라 감나무에 빨간 감들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고 흐르는 계곡물은 또 그얼마나 씻기어 졌는지 하얀 속살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 하나하나의 모습들이 둥글기도 하고 큰것도 작은 것도 물 흐름대로 그 계곡 언저리 여기저기에 옹기종기 짝을 지어 있는 모습이 꼭 내가 듣던 지리산 공비토벌작전에 참가한 군인의 이야기가 언듯 더 올라 마음이 애린다.
"글세 신고가 들어와 마천지서에서 차를 타고 1개소대가 먼저 출동하여 이곳에 들어오니 아무소리도 안나고 인기척이라고는 물소리밖에는 없는데 벌써 다 낌새를 알고 도망쳐버린 것 아냐?"
"아니라니까요, 내가 저 안에서 그놈들에게 어젯밤 동네에서 거둔 쌀이며 먹을 것을 지게에 지고 올라가 같이 있다가 어쩐 일인지 자기들끼리 누군거리다 어디로 가고 몇몇만 남아 밥을 지으라며 여학생들이 그 까만 교복을 입고 어디서 나타나더니 물가로 갔다나까요"
"그래, 가만 있어봐 이거 뭐야 물따라 연기가 가고 있는 것 같은데... ."
그렇다. 야전에서 생존방법의 일환이다. 연기가 오르면 위치가 탄로나 바로 식별되고 기습을 받기 때문에 마른 싸리나무 가지로 밥을 짓고 흐르는 물 옆에서 취사준비를 하면 공기의 흐름이 다른 기압골등의 영향을 크게 받지 않는다면 물따라 낮게 함께 간다고 한다.
물론 기습작전은 큰 성과는 없었지만 밥을 짓던 여학생을 포로로 잡고 하던 밥을 빼앗아 왔는데 아무리 회유하고 공갈을 쳐도 절대로 입을 열지않았다 한다.
그 다음 결과는 또 출동이 돼서 모른단다.
"그 하던 밥은 출동병력이 맛있게 먹었겠네요?", 나의 맹랑한 질문에 "무슨 소리요, 거기에 극약을 넣고 일부러 우릴 유인하러 그런 상황을 연출했다고 봐야지~!"
그래서 결국 밥은 모두 버리고 야밤에 그들을 따라 올라간 동네에 다른 사람을 찾으러 가가호호 탐문에 들어가고 마을이장을 통해 간밤의 마을 실태을 들어봤더니 해질무렵 동네를 잘 아는 유격대원 한둘이 내려와 00집 광에 숨어있다 야심한 시간에 쥐새끼같이 이집 저집을 뒤져 홀딱 가지고 총으로 압잡이를 세워 지고서 산으로 갔다는 것이다.
우리도 배가 고파왔다. 시간이 12시를 넘어서 배꼽시계가 정확하게 작동하고 있었다.
그러니 그 먹지 못하고 버린 밥이 더욱 안타깝게 느껴진다. 정말 이념사상이란 무서운 거신가... .
구례로 들어선다. 이곳에 과거 원로목사님과 와서 인상이 남았다는 고기집이란다. 길가에 꽤나 크게 자라잡고 있고 차량들이 붐비는 모습이 예사롭지 않았다.
김실장이 계속 전화를 하여 예약 주문을 한다. 하지만 시간이 어정쩡하여 우리가 이 반선리에서 달궁계곡을 지나 전라남도 전라북도 도 경계선을 넘어 성삼재를 지나 구례군 광의까지 가는 길이 2차선으로 거기에 굴곡 도로라 1시전에는 절대로 도착 못한다 한다.
그러니 종업원이 우리 몇 기다린다고 정리하고 휴식하다 저녁 준비에 들어가는 타임이 없다하니 어쩔수 없었다. 그래서 인근 길 옆의 편의점에서 빵과 음료수로 점심을 해결하기로 하고 저녁식사를 그곳에서 하기로 했다.
차는 달리어 노고단 길로 들어선다.
양양 가리피 오색천 남쪽방향에 있는 한적한 교회, 하지만 이곳이 한때는 6.25전쟁의 격전지(3사단 18연대가 '51년 3월말)로 유명한 곳이지만 지금은 그 야산 300고지군 밖에 안되는 입구에 죽은전사자의 넋을 기리는 아무런 표식은 없고 극락왕생을 바라는 사찰이 박물관겸해서 서있고 그 맞은 편으로는 교회가 있다. 바로 그 교회의 목사님이신 조목사님이 오늘은 운전 전담맨으로 함께 하고 있다.
달리는 중간지점에 하늘아래 첫동네라는 심원마을이 있다.
이곳은 해발 750여M나 되는 높은 곳에 있는 좌사리로 지금은 '17년도에 지난 5년간 생태복원작업을 위해 이곳에 인공조성된 20가옥을 주민들의 동의를 얻어 철수하여 지금은 아무도 살지않는 자연 그대로의 모습이다.
최초 1967년도 지리산국립공원 지정 당시 마을 주민 대부분이 임산물을 채취하거나 토종꿀 양봉을 생업으로 하던 산골이었다. 마을 주변에 가까운 마을이 없어서인지 아니면 깊은 계곡이 끝이 없어서인지 심원마을이라 했다니 얼마나 깊은 곳인 짐작이 간다.
이 심원마을은 노고단 임걸령재 반야봉 등에서 흘러 내리는 계곡이 발달하여 옛날 조선시대고종시대부터 약초와 한봉을 위해 한두 호씩 모인 것이란다.
하지만 전쟁을 피할 수는 없어서 그당시 모두 소개 되고 집이라고는 다 은거지를 없앤다는 이유로 다 태워버렸었다. 그러다 1967년도에 다시 들어와 짓기 시작한 것이다.
영원한 사람이 없고 영원한 동네도 없는 것이 자연사, 한때는 전국에서 유명한 자연산 약초지역으로 청정지역을 뽐내던 이곳도 반달곰의 생태계 조성과 어울려 또 너무 성업화 되어버린 주변의 환경훼손이 문제가 되어 결국 철거되었다니 아쉽기만 하다.
이유는 이곳에 최초 마을이 조성되어 들어갔을때에 계곡 주변과 요소요소에 돌무덤이 많았고 탄피나 파편류 전투화 철모등을 심심찮게 확인할 수 있었는데 그것을 알 수 있는 사람들을 찾기가 어려워 진 것이다.
그때(현충일쯤)만 되면 대한민국은 모두 충성하는 사람으로 가득찬다.
심지어 색깔있다고 의중이 가는 방송사나 정치인 교수 연예인등 너도나도 조국 대한민국을 지키는 수호신이라고 떠들어 도대체 누가 진짜이고 가짜인지 분간이 어려운 현실이다.
그래서 이런 깊은 산중에 옛날부터 오래살아온 사람은 피해의 당사자이고 또한 욕망이 순수하신 분들이라 그래도 적군이든 아군이든 사람이 죽어 있으면 돌이나 조그만 호구덩이라도 파서 묻어주고 덮어주는 배려가 있는 경우가 많다.
세태에 물들지 않아 현장을 가더라도 동해비를 달라던가 때를 쓰지않고 안타까운 마음에 함께하는데 이렇듯 아무도 없는데서 소문만 듣고 계곡 구석구석에서 유해 있는 곳을 찾는다는 것은 정말 낙동강모래사장에서 비행기에서 떨어뜨린 바늘 하나 찾는 격이다.
다시 내려와 노고단(1507m)으로 간다. 입구에서 양해를 구하고 정상까지 차량이동하여 마지막 노고단 정상에는 도보로 조금 걸어간다.
노고단 동쪽능선을 타면 삼도봉 반야봉 중봉, 다시 돌아서 삼도봉에서 화개재를 지나 토끼봉 방향으로 가면 삼각고지와 벽소령 그리고 세석평전에 이어 천왕산으로 가는 동쪽의 길고도 긴 거의 수평능선이 계속 된다. 이곳이 6.25전이나 그 이후에도 공비나 잔당들이 숨어들어와 나름의 조직을 유지하고 전쟁 종료 후에도 '55년 중간까지 살아 생존하던 곳이다.
지금이야 도로사정이 좋아서 이렇듯 왠만한 곳은 1일 생활권에 속하여 편리하지만 얼마전까지만 해도 이곳에 왔다가려면 2~3일은 걸려야 한다.
부는 바람이 왠지 서글피 느껴진다.
금수강산에 피뿌린지 벌써 70년이 되어가는데 아직 그 상처는 곳곳에 있고 의구한 산천도 폭격으로 죄다 불타버려 새로 자란 도토리 나무등 활엽수만 무성하고 소나무같은 침엽수는 보기 힘들다.
노고단이 중요한 이유는 서쪽으로 바라보이는 섬진강 너머에 바로 남서쪽으로 백운산과 형제봉이 바라보이며 광양과 순천지역으로 여순사건시 밀리던 반란군이 바로 이루트를 이용하여 움직였고 그 사이에 하동의 화개장터가 위치하여 자유롭게 전라도와 경상도가 넘나들던 곳을 감제할 수 있는 위치이면서 눈밑으로는 구례군으로 광의면 마산면 토지면이 북쪽으로는 남원시 주천과 운봉 산내면이 한눈에 내려다 보이는 지리산 서쪽의 전술적 요충지중의 요충지다
나는 박경리소설가의 "토지"라는 대작이 이곳인줄 알았는데 현장을 가보니 화개장터 밑의 하동 악양면에 최참판댁 평사리가 위치하고 있음을 알았다.
토지면과 화개면은 인접한 면으로 그 당시 조선이나 일본제국주의 식민지하에서 누구나 하나되어 조국의 독립을 위하는 그리움은 같았다고 본다. 그러므로 아마 소설의 배경이야 넓은 평야를 가지고 지주가 있고 머슴이 있고 일번군 순사에 아첨하는 인간, 참다못해 만주로 탈출하여 독립을 위해 몸바친 선열들의 혼은 하나였을 것이고 어쨋든 평사리에 가보니 촌로들 말씀이 박경리씨가 고향은 통영이지만 진주여고를 다닐땐가 이곳 평사리에 소풍인지 수학여행인지 왔었다고 한다.
소설이야 어쨋든지 반야봉에서 남쪽 능선을 바라보면 1200M고지군으로 문바우둥 왕시루봉으로 내려서 송정리에 오는데 그 우측 계곡이 바로 피아골이다
마산 오미리 구산리에서 저수지를 지나 북으로 가면 문수리가 나오고 조그만 사찰 문수사가 있다.
어느날 미명의 인원이 이곳 어딘가에 6.25전쟁당시 엄청난 인원이 죽어서 묻혀 있다고 제보가 왔다.
우리의 임무는 국군전사자나 비군인 전사자 다시말해 정부나 군 경찰에 의해서 동원된 노무자 학생등인데 성격을 알려달라고 하니 우리보고 가서 알아보라 한다.
좀 생뚱맞은 전화에 뭐라고 답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었다. " 예 알겠습니다."
그리고 현장 탐문결과 정확한 위치나 사실을 기억하는 동네분이나 절의 관계자는 없고 왕시루봉에 올라서니 긴 높은 고지 능선에 개인호가 즐비하게 있어 이유야 모르지만 전쟁은 했던지 준비를 했던지 의심은 가는 곳이었다.
마을과 절에서 탐문을 한 결과로 이곳 일대는 여순사건시 많은 인원이 이곳으로 숨어들어왔고 그러다 몰리어 민간인 희생이 많이 발생하였다고 판단 되었다.
문수리분들도 그때부터 밖으로 나가 살다 다시 들어온 것은 전쟁이후 50년 말이라 한다.
더욱이 목격된 것은 최초 전쟁 한 해 전에 반란군, 그당시는 애국시민이며 학도들이고 총을 들고 설쳐대는 인원은 민족주의자들이라 큰소리치고 산으로 올라가 진을 치고 밤이면 내려와 먹을 것 가져가고 때로는 실제 마을에서 자치회를 만들어 자기들끼리 모여 인민재판같은 것을 하는 경우도 있어 그들 세상인줄 알았단다.
그런데 얼마안가 군인과 경찰이 밀고와 함께 있던 어리둥절한 인원들은 총맞아 죽고 핵심인원들은 바로 산으로 올라가 사라져버렸단다.
따라 올라가지도 못하고 군경은 밤이면 철수하여 봉남리로 가버린단다. 그러면 언제 내려왔는지 또 그들이 이집저집을 염탐하고 다니며 식량이며 때로는 젊은 사람을 데려가기도 해서 대부분 동네를 떠나 숨어야 했다.
할아버지 숨이 차다. 할머니는 뭘라꼬 말하느냐고 빨리 집으로 들어오라 야단이었다.
또 무슨 험한 꼴을 당할라고 그러느냐며 막무가내인 할머니를 설득하기란 어려웠다.
"할머니 괜찮아요, 우리는 6.25전쟁 전사자를 찾으러 다니는 유해발굴단 입니다. 테레비에서 못 보셨어요. 방송에도 많이 나오는데 지금은 보상금도 주고 잡아가는 시대가 아니예요."
" 난 잘모르오, 그때만 생각하면 피가 솟구쳐. 우리형제 7곱중 셋이 그때 아버지와 죽었어. 뭘 알어 하라는대로 한 것 밖에는 없는데 잡아다가 싹 죽여버리고 이제서 죽고 저래서 죽고 아고 돌아가쇼 험한 소리 듣기전에... ."
우리는 돌아나오면서 죄송하다고 인사드려야 했다.
그런 곳에 오늘 다시한번 들어가 보려 문수리로 차를 올렸다.
김실장은 여자의 신분인데 나이는 40중반이지만 대한민국 근현대사에 대해 나보다 훨씬 학식이 깊었다. 다만 현장에 대한 감각은 시간과 공간면에서 나의 도움이 조금 필요로 해 공간시간여행을 계획하여 떠난 여정이다.
격동의 우리 현대사는 가장 뼈아픈 현장이 6.25전쟁 전후가 된다.
물론 그이전에 있었던 36년간의 치욕의 식민지사는 다시는 있어서는 안되는 역사의 분명한 오점이지만 내가 보는 현재의 아픔은 그보다 6.25전쟁을 전후한 좌우익의 대립에서 빚어진 제주 4.3사건과 여순사건에 이어진 지리산 공비 토벌작전 그리고 전쟁 다시 공비 토벌작전의 질곡 속에서 연좌제의 스라진 대물림이 가져온 사회적 갈등과 좌절이 지금 이순간에 뛰어나와 모두 "돌려 돌려, 모든 걸 다 돌려"로 변하는 좀더 쉽게 표현하면 보복이라면 안될까... .
역사란 이런 조각을 모아서 이어지는 공간의 기록인 것이다.
따라서 얼마나 객관적인 기록이 남겨지느냐가 사실 문제이며 그 가장 좋은 실 예가 우리는 조선시대 사색당파의 싸움, 아니 의회민주주의의 바람직한 의견충돌(?) 결과에서 빚어진 엄청난 사화로 그 조그만 조선사회가 3족을 멸하는 악순환을 거듭한 그 기록이 과연 얼마나 정확할 것인가.
과거 우리의 역사기록의 정수라하는 삼국사기 삼국유사는 또 얼마나 객관적 사실을 담았을까... .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그걸 알고 있는 세대는 잠들어가고 그러므로써 잊혀져 버리고 얼마 지나 새로운 세력이 등장하여 나에게 필요한 내용만이 진솔한 이야기인양 소설로 각색한다면 누가 그 본질을 알 수 있을까.
한 예로써 우리 삼국이 통합되는 과정에 백제의 의자왕이 삼천궁녀를 거느렸다는 그리고 낙화암에서 절개를 지키고 숨져갔다는 애절한 이야기가 진실로 되어왔고 당나라 소정방이 군대가 들어와 백제를 멸망시키고 온갖 못된 짓을 다했다는 기록은 별로 우리 알지 못한다.
과연 삼국통일이라는 최초의 대업이라는 이유로 이민족을 끌여들여 짓밟아버리고만 그 역사를 어떻게 평가해야 옳은지 지금의 잣대는 다를 것이다.
하지만 우린 그걸 정서로 배웠고 받아들였던 우둔한 주인공의 한사람이다.
그러니 그 씨앗이 알게 모르게 우리의 사상속에서 놀아나 고려시절(물론 어느시대던 다 있었지만-)홍다구일파와 몽고 다루가치에 몸팔아 출세하던 그 꼼수의 맛이 때만 되면 되살아나 세상을 흔들고 있다고 보면 과한 것일까... .
문수리를 나온 우리는 구례 경찰서로 향했다.
이미 "죽은자들의 증언"에서 밝힌 것처럼 이곳은 6.25전쟁당시 낙동강까지 밀고 내려간 북한군이 유엔군의 반격작전으로 뒤로 돌아 북으로 줄행랑 칠 당시 이곳 프락치와 북란군이 유력인사나 경찰 군인등 포로 또는 납치한 인원을 이 경찰서 유치장에 살아 있는 체로 쌓아 놓고 '50.9.15일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으로 허리가 잘린 북한군이 허겁지겁 물러 나면서 추격하던 미제25사단 병력이 이곳에 9월 20일경 도착시 기름을 붓고 불을 질러 생사람을 태워 죽이는 정말 구 독일의 히틀러가 유태인과 슬라브족등에 자행한 대학살 그 자체와 비슷한 모습 그대로였다.
우리는 "홀로코스트를 그리고 아우슈비츠 수용소'를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의 히틀러가 이그는 나치당이 독일뿐만 아니라 독일군이 점령한 전 지역에서 계획적으로 유태인 슬라브족 집시 동성애자 장애인 정치범등 1천1백만명의 민간인과 전쟁포로를 학살한 사건을 "홀로코스트"로 의미는 그리스어 h'olos(전체) + kausto's(타다)에서 유래하듯이 태워죽이는 것인데 물론 독일은 민간인 어린이 여자등 무자비하게 태워 죽이고 가스실에서 질식해 숨지고 생물학적 실험도구로 이용되어 숨지고... .
우리도 이 구례경찰서에 먼저 도착한 미제25사 정찰병이 층층이 쌓아 놓고 기름을 뿌리고 불을 질러 타 죽는 모습과 아우성 통곡소리 골이 터지는 소리 하지만 자물쇠로 잠가 버려 열 수도 없는 천인공로할 모습을 생생히 보고 기절해 버렸다는 기록이 바로 우리 민족간의 이념전쟁 아니 공산주의자들이 이 땅에서 벌인 엄연한 사실임에도 우리는 애서 숨기려하고 들어내려 하지 않는 기막힌 현실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현장에 도착하여 묵념을 올리고 그러한 기록을 찾으려 했으나 보이지 않고 이곳 경찰서장의 선행비는 엄청나게 큰 비중으로 자리를 잡고 있는 모습 속에서 진실된 역사의 기록이 이래서 얼마가 지나면 왜곡되고 지역주의나 이념적 도구의 희생으로 전혀 다른 추억만이 공간 속에서 이어진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쓸쓸히 돌아섰다.
어둠이 내리기 시작하는 '16.10월의 어느 가을날 오후는 괴로웠다.
예약된 장소로 이동하여 얼마전 박00원로 목사님이 드시던 음식을 우리는 신청하고 이런 저런 오늘 하루 일과를 되돌아 보는 시간을 가졌다.
새벽녁에 오색약수터 휴식공간에서 출발하여 강릉 군선강, 6.25전쟁 초기 전투시 북한군이 이미 동해안의 정동진과 임원진으로 해상 상륙하여 남에서 북으로 진격하는 바람에 강릉지구 북부에서 전투하던 국군 제8사단이 어이 없게도 북쪽 방향이 아닌 남쪽 방향으로 제21연대를 축차 투입하여 방어하는 최초의 장소를 보고 영덕으로 달려 오십천 변에서 영덕 강구지구 전투 현장을 보고 포항에 들려 포항여고에 들어가 당시 학도병들이 목숨 걸고 전투한 전적비 앞에 묵념하고 이곳까지 달려 왔다.
숨막히는 열전 전투지역 탐사다.
마침 준비된 음식이 나오고 배고픈 우리는 잠깐 묵념을 한 후 선착순하는 모양 주린 배를 채워나간다. 마치 몇일 굶은 모양 말도 없다. 하지만 이것은 나만의 모습이며 착각이고 동행한 김실장이며 조목사님은 이런 나를 신기한듯 바라보고 있다.
"이 과장님 이곳에 이거말고 다른 이야기는 없나요?" 김실장의 질문이다.
"선생님들 뭐하시는데 이렇게 늦게까지 식사하러 오셨습니까?" 그러고 보니 해가 긴 것도 아니였다.
벌써저녁 8시가 넘어 9시로 시침이 다가서고 있다.
식당 주인인 둥둥한 남자아저씨가 나이가 60후반이란다.
"사장님 혹시 옛날부터 이곳에 사셨나요?"
"그럼요 태어나서부터 줄곧 이곳에 살았지요."
"그럼 혹시 6.25전쟁이나 여순사건관련 공비토벌이라는 말 들어보셨나요?"
"무슨 말씀이에요, 저기 앞산 노고단에 올라가 어릴때 전쟁놀이 하는데 철모 수류탄 탄피, 심지어 해골도 가끔 보였지요. 그걸 주서다 엿바꿔 먹기도 했는데 그때만 해도 엄청 흔적이 많았지요."
우리는 혹시나 유해발굴 위한 단서를 들 수 있을까 점점 사장님의 이야기속으로 몰입해 들어가는중이다. 입에 거품이 나오도록 신나게 말씀하신다.
어디서 왔느냐는 질문에 이런 것을 들으려 다니는 사계전문가라 말하였다.
흥분된 어조로 실제 목격이나 경험은 못했지만 어릴때 소먹이나 산나물하러 아나면 땔감하러 산에 가서 본 것을 자랑하시는 말 도중에 내가 질문을 던졌다.
"그럼 이곳에 혹시나 매장된 곳이 있나요, 국군이나 경찰 아니면 노무자 학도병?"
"그런 것 지금은 못 찾아요, 더러 옛날 산 능선에 본적은 있지만 벌써 한 40년 지나버렸고 이곳은 보도연맹도 아닌데 빨갱이로 몰려 끌려나가면 안돌아와요. 그러면 죽은거요. 얼마 있으면 어디 계곡에서 죽었다고 소문이 나면 가족들이 삽괭이 들고 어두운 밤에 찾아가 컴컴한데 더듬어서 옷이나 얼굴형체보고 찾아온데요. 대부분 그렇게 찾아서 숨소리도 안나게 선영에나 다른곳에 묻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어떤 동네는 제사날이 같은 날에 열집도 되고 열다섯집도 되고... ."
엄마를 따라 나선 아들도 죽고 누나도 죽고 이유를 모르고 죽었다고 한다.
바로 문수리지역도 그런 사유의 집단 가매장지 아닐까라는 의구심을 가지고 있는 우리는 너무 시간이 지체되어 내일 다시 점심시간에 찾아와 뒷 이야기를 듣기로 하고 내산리 지리산 온천 지역으로 이동해 대중 목욕탕에서 몸을 씻었다.
여관에 여장을 푼 우리는 잠시 티 타임을 가졌다.
"아니 국군이 잘했다는 이야기나 경찰이 잘했다는 이야기는 없고 모두가 억울하게 죽었다는 이야기만 이곳에서는 들었는데 무슨 이유라도 있나요?" 김실장의 질문이다.
"아니 꼭 그렇치만은 아닌데 직접 당하지 않고 구전되는 이야기로 들은 사람은 대다수 식당 사장처럼 말하는 경우가 많아요. 하지만 연세가 지긋한 어른들은 만나면 다른 이야기도 들을 수 있을 겁니다."
사실 지역마다 조금의 특색이 있다.
단정적으로 뭐라고 "이거다" 이런 식의 대답은 할 수 없다.
분명하게 한가지는 말 할 수 있는 것은 여러 사람이 있는데서 말하는 것과 개별적으로 말할 때는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우린 이런 지역적 특색을 지역감정으로 연계하려는 일부의 감정적 판단에 항상 조심하고 고민해야 한다. 오늘도 경상도를 넘어 전라도로 와 무거운 전쟁이야기를 해야만 한다.
화개장터에서 다리를 건너면 바로 전라남도 광양시 다압면이고 구례군 간선면이다.
이곳이 그 유명한 백운산 1218m가 버티고 한재 우측으로는 도솔봉 1127m 형제봉 861m로 이어지는 호남정맥의 구간으로 백두대간(백두산에서 태백산 지리산으로 이어짐)에서 갈라진 금남호남정맥이 금강과 섬진강의 분수령으로 장수 영취산 1076m에서 시작하여 장안산 1237m 팔공산 1151m 임실 성수산 1059m 진안 마이산 667m 부귀산으로 이어진다.
호남정맥은 낙남정맥(지리산 영신봉에서 시작하여 남하하다 옥산 614m에서 동쪽으로 방향을 틀어 대곡산 여항산 744m 무학산 763m 구룡산 434m 대암산 낙동강 하구로 뻗침)과 함께 우리나라 남부해안문화권을 구획하는 의미있는 경계선이다.
정맥의 동쪽은 섬진강, 서쪽은 만경강 동진강 영산강 탐진강이며 금남호남정맥에서 갈라친후 가진 만덕산 729m 내장산 763m 추월산 729m 무등산 1187m 제암산 779m 조계산 884m 백운산 1218m 으로 달려 섬진강을 끼고 남쪽 으로 내려선다
전쟁이나 공비토벌작전의 핵은 지금 언급한 백두대간의 태백산에서 속리산 지리산으로 연결되는 허리와 그 동서쪽에서 전수 벌어진 것이며 특히 금남호남정맥과 호남정맥 낙남정맥에서 이웃사촌간에도 손가락질로 사람을 죽이던 인민재판이나 보도 연맹사건으로 죽어가는 사람이 많다
그 동쪽인 낙동정맥(태백 매봉산에서 시작하여 백병산 1259m 통고산 1076m 울진 백암산 1004m 청송 주왕산 720m 경주 단석산 829m 울산 가지산 1240m 신불산 1209m 부산 금정산 802m 백양산 다대포로 내려섬)과 낙동강을 끼고는 주로 남쪽에서는 핫바지 부대라 놀려대던 국민방위군이 강제 동원되어 들어와 기근과 전염병에 엄청 죽어나가고 태백산과 그 밑의 주요산에는 빨치산 보다는 북으로 도망가지 멋한 잔당들인 공비들이 그리고 지리산에는 공비와 빨치산이 혼합이 되어 전투를 벌이다 죽어가는 조금 성격이 다른 모습으로 구별될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은 아주 미미한 정도의 차이이고 대다수 지역은 이미 전쟁이전에 남노당의 통제를 따르는 프락치들이 세포조직으로 파고들어 못살고 못배운 그 시절의 어려운 여건을 잘 활용하여 민족주의란 가면을 쓰고 같이 나누어 먹고 재산이나 권력을 분배하다는 입맛나는 슬로건으로 민중봉기를 꿈구어 자유민주주의가 아닌 공산주의를 만들어 내려던 분자들이 산골이나 어촌에 특히 집중적으로 들어가 전쟁도 일어나지 않았어도 장백산가를 가르치고 했던 우수꽝스런 현실이 우리에게 있었기 때문에 형제지간에도 부부지간 애비와 자식간에도 사상적 이원화로 피부림을 자초한 우리다.
김실장의 요구로 나는 한가지 사실로 어려운 답을 해야했다.
2009년 7월에 우리는 지금 머물고 있는 이곳 구례 순천 광양지역에 대한 유해발굴 작전을 실시하고 순천 조곡동에서 발굴한 경찰유해 17구에 대한 영결식을 하게 된다.
전남 순천시 유족회 회원인 권00님이 우리 발굴단에 제보를 해왔다.
제보 내용이 무려 경찰 23명이 전사해서 죽도봉 근처에 매장 되어 있으니 발굴하여 DNA감식으로 유가족을 식별해 주고 현충원에 안장해 달라는 장문의 탄원서가 올라왔다.
바로 우리는 탐사팀을 이끌고 현장으로 달려갔다. "아니 23명의 경찰관이 그대로 묻혀 있어... ."00000000000000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