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송심씨(靑松沈氏)의 시조(始祖)는 문림랑공(文林郞公)이며 공(公)의 휘(諱)는 홍자부자(洪字孚字)이시다.
휘(諱)는 돌아가신 분의 이름을 가리키며 윗어른의 이름은 함부로 부르는 것이 아니며 부득이한 경우에는 자(字)자를 넣어서 부르는 것이 예의
로 되어 있다.
문림랑공(文林郞公)께서는 13세기 말엽 고려(高麗)25대 충렬왕(忠烈王)시대에 문림랑 벼슬에 등용되시고 그후 승진을 거듭하시어 위위시(衛尉寺)에서 승(丞)벼슬을 역임(歷任)하셨다.
문림랑(文林郞)은 종9품의 문관계급명칭이며, 위위시(衛尉寺)는 궁중(宮中)에서 의전(儀典)업무를 관장하는 관청의 명칭이고 승(丞)이란 종6품으로서 현재의 과장급에 해당하는 직책으로 볼수있다.
청기세고(靑己世稿)책자에 수록된 바에 의하면 문림랑공께서는 청기군(靑己君)에 봉군(封君)되신 것으로 나타나 있는데 이는 증손(曾孫)되는 청성백(靑城伯=諱德符)께서 우리나라에 침입(侵入)한 왜구(倭寇)를 격퇴(擊退)하는데 공훈(功勳)을 세우시고 또한 이성계(李成桂)와 함께 위화도회군(威化島回軍)후에 창왕(昌王)을 옹립하는데 공훈이 인정되어 공신(功臣)으로 추대되셨을때 봉군(封君)되신 것으로 추정된다.
그런데 문림랑께서 언제 출생(出生)하시고 어느해에 별세(別世)하셨는지 생졸연대(生卒年代)를 알수 없으며 배위(配位=夫人)의 성씨(姓氏)등이 전해지지 못하고 있는점이 매우 애석한 일이다.
청송 심씨(靑松沈氏)의 시조(始祖)이신 문림랑공(文林郞公)의
산소(山所)는 청송군 청송읍 중심지에서 3Km거리인 덕동의 보광산(普光山)에 모셔있어 보광산소라고 부르기도 한다.
보광산소의 좌향(坐向)은 신좌(辛坐=東東南向)이며 흔히 지리학설(地理學說)로는 괘등혈(掛燈穴)이라고 말하고 있다.
산소의 북쪽에서 서쪽을 향해 큰내가 흘러 내려가면서 살먹인 활모양을 이루고 있는데 수구(水口)에는 커다란 암석(岩石)이 마치 연꽃이
물위에 솟아 있는듯 아름다운 경치를 이루고 있다.
전설(傳說)에 의하면 그 옛날에는 바위형태(形態)가 아주 험악(險惡)하고 보기 흉했는데 문림랑공(文林郞公)께서 별세하시어 장례(葬禮) 모시는 전날 밤에 갑자기 천둥이 일어나고 벼락이 떨어져서 그 암석이 부서지면서 험악했던 형태가 옥순(玉筍)을 깎은듯이 아름다운 형태로
바뀌었다고 한다.
그리하여 풍수지가(風水地家)에서는 경사(慶事)로운 징조라고 말하였는데 과연 그로부터 얼마되지 않아 안효공(安孝公)께서 소헌왕후(昭憲王后)를 탄생하셨으니 이는 참으로 기이(奇異)한 일이라 아니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로부터 청송고을 사람들은 이 암석(岩石)을 가리켜 현비암(賢妃岩)이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또한 16세손인 목사공(牧使公=諱鳳輝)께서는 청송도호부사로 재임시(在任時) 보광산소의 향로석(香爐石)을 새로 설치하고 제기(祭器)를 마
련하셨으며, 목사공의 아드님 이조참판공(吏曹參判公=諱聖希)께서는 묘산기(墓山記)를 간행(刊行)하여 후세(後世)에 전하고 경상도 관찰사(觀察使)로 재임시에는 상석(床石)을 개비해 드렸다.
그리고 이조참판공의 조카인 부사공(府使公=諱公著)께서는 1803년 영천군수(永川郡守) 재임시 보광산소의 낡은 표석(標石)을 새 것으로 세워 드렸다.
문림랑공의 제향(祭享)은 계속 청송도호부사 주관하에 관청에서 관비(官費)로 마련한 제수로서 봉행되어 왔으며 제향 당일 비가 오거나 눈이
내리면 묘전(墓前)의 만세루(萬歲樓)에서 향사(享祀)를 올렸으며 홍수(洪水)로 말미암아 청송읍내(靑松邑內) 냇물을 건너지 못할 때에는 읍내에 있는 찬경루(讚慶樓)에서 망배(望拜)로 향사를 받들어 왔다.
그런데 1894년 갑오경장(甲午更張)이 일어나 사회제도(制度)가 개편된 이후에는 관비지원이 없어짐으로 청송지역에 사는 문중 가운데서 유사(有司)로 선정된 분들이 산소를 수호(守護)하고 제향을 받드는 일을 담당하였는데 이 무렵부터 연간 4차례 지내던 것을 한식과 추석 두차례만 절사를 올리게 된 것이다.
1921년에는 청송에 사는 문중들이 성금을 모아 사초(莎草)를 드리고, 비갈(碑碣)과 망주석(望柱石)을 새로 건립해 드렸으며, 최근에는 대종회(大宗會)주관하에 보광산소의 대대적인 묘역 정화 공사(墓域淨化工事)를 추진 하였다.
현재 보광산소의 제향(祭享)은 한식(寒食)과 중양절(重陽節=음 9月 9日)날에 봉향되고 있는데 이날에는 전국 각지에서 많은 후손들이 제향
에 참례하고 있어 숭조정신이 투철한 종인이 많음을 알 수 있다.
※ 註解(주해)
中 使 (중사) : 宮中에서 王命을 전달하는 사람.
戶 長 (호장) : 지방관서 守令밑에 있는 수석 아전.
均田使 (균전사) : 토지의 등급을 査定하는등 百姓의 부담을 公平
하게 책정하는 임무를 지닌 御史.
觀察使 (관찰사) : 현재의 도지사 격인 지방관서의 장
서기 1428년(世宗10年)에 창건되었으며 그 규모는 16간(間)의 목조 기와집으로 당시로서는 매우 거대한 2층 누각이다.
찬경루는 청송지방의 대표적인 고대건물(古代建物)로서 그 규모가 웅장하고 화려하여 청송지역을 방문하는 관광객의 관광명소로 손꼽히고 있다.
찬경루의 이름은 창건 이듬해에 경상도 관찰사(觀察使=현재의 道知事격)인 홍여방이 이 곳을 찾아 누각(樓閣)에 올라 문림랑공(文林郞公)이
모셔있는 보광산(普光山)을 바라보니 우람한 경관을 찬미하지 않을 수 없는 절경(絶景)이라 감탄(感歎)하고 누각의 이름을 찬경루(讚慶樓)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당초에 찬경루의 현판(懸板)은 세종대왕(世宗大王)의 셋째 왕자(王子)인 안평대군(安平大君)께서 열한살때 쓴 글씨를 양각(陽刻)으로 새겨 걸어 놓았었다.
창건된지 2백여년이 지나 찬경루가 퇴폐화 되자 서기 1687년(肅宗13年)에 당시의 청송도호부사(靑松都護府使) 이동명(李東溟)이 대대적으로 수리하여 옛모습으로 단장하였다.
그 다음해 좌의정(左議政)으로 재임중이던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선생으로 부터 중수후기(重修後記)를 지어 받아 현판(懸板)에 조각하여 누각에 게양하고 청송읍지(靑松邑誌)에 수록하여 놓았기 때문에 그 원문이 오늘까지 전하여지고 있다.
그런데 중수한지 45년만인 서기 1732년(英祖8年) 겨울에 청송고을에 불의의 화재가 발생하여 마을이 모두 연소 되었을때 찬경루도 아깝게 소실(燒失)되었으며 안평대군의 글씨로 조각된 귀중한 현판도 멸실되었다.
이때 청송도호부사 한광근(韓光近)은 귀중한 유적인 찬경루가 소실된것을 가슴 아프게 생각하고 동분서주하여 경향 각처로 부터 물심 양면의 지원을 받아 복구작업에 진력한 덕분으로 찬경루가 복원되고 민가도 복구 되었다.
찬경루의 건축양식은 조선조의 목조기와집 2층누각으로 초익공 팔작지붕이다.
찬경루를 복원한 뒤에는 당시의 명필가(名筆家)인 한석봉(韓石峯)의 글씨로 송백강릉(松栢岡陵)이라고 쓰여진 현판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그로부터 170여년이 흐르는 동안에 누각은 다시금 퇴락하였으며 특히 서기 1894년 갑오경장(甲午更張)이후에는 관(官)에서 방치한 상태였으므로 청송에 거주하던 종인(宗人) 상완(相完).상팔(相八).보래(甫來)씨 등이 주동이 되어 이대로 방관할 수 없다고 하여 전국 각지를 순회하며 뜻있는 종인들로부터 헌성금(獻誠金)을 모아 서기 1908년에 찬경루(讚慶樓)와 만세루(萬歲樓)의 중수에 착수하여 4년만에 준공(竣工)을 마친 동시에 그 소유권(所有權)도 심씨 종중으로 귀속시켰다하니 그 열과 성에 감사를 아니 할 수 없다.
그후 일제시대(日帝時代)인 1927년과 광복후(光復後)인 1967년 두차례에 걸쳐 전국 종인들의 정성어린 헌성금을 모아 다시금 보수공사를 추진하였다.
찬경루는 지방행정청으로 부터 역사적 가치가 인정되어 1984년 12월 29일 경상북도 유형문화재(有形文化財) 183호로 지정 되었으며 1988년에는 정부예산 7,600여만원의 보조를 받아 대대적인 보수공사를 하여
우람하고 아름다운 옛모습을 되찾았으며 잇달아 누각주변의 정화사업(淨化事業)도 추진중에 있다.
◎ 만세루(萬歲樓)
만세루는 청송군 청송읍 덕동 청성 심씨의 시조 문림랑공(文林郞公) 산소(山所)아래에 세워진 제각(祭閣)으로서 조선조(朝鮮朝)건축양식으로
건립된 5간(五間)겹집의 2층 누각(樓閣)이다.
만세루는 그 규모(規模)가 찬경루(讚慶樓)에 버금가는 오래된 건물로서 경상북도에서 1985년 8월 5일자로 문화재(文化財) 자료(資料) 72호로
지정되었으며 애석하게도 창건(創建)된 연대(年代)는 상세히 알지 못한다.
만세루 경내에는 보광사(普光寺)가 자리잡고 있으며 그 옆에는 시조 할아버지 산소관리를 위한 부속건물로서 추모제(追慕齊)가 건립되어 있다.
그리고 만세루의 마루 밑에는 우물이 있는데 큰 가뭄에도 마르는 적이 없으며 풍수지리설(風水地理說)에 의하면 시조 할아버지 산소가 괘등혈(掛燈穴)인 까닭에 이 우물은 등잔불에 공급(供給)하는 기름샘(油泉)의 역할을 하고 있어 청송 심씨의 시조 산소는 그야말로 분명한 명당(明
堂)자리라고 일컫고 있는 것이다.
또한 만세루에는 다음과 같은 현판시(懸板詩)가 걸려 있는데 이 시(詩)는 주부공(主簿公=諱鶴齡)께서 지으신 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