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참선(參禪) / 청화 큰스님
참으로 무상(無常)하기 그지없습니다.
우리가 지금 만난 것은 금생의 인연(因緣)만으로 만난 것은 아닙니다.
석가모니 부처님이 나오시기 전부터
또는 우리 천체(天體)가 텅 빈 공(空)으로 부터서 성겁(成劫)이라,
하나의 천체가 이루어지기 이전부터서 우리는 만났던 것입니다.
불교에서 겁(劫)이란 말씀이 있습니다만,
겁 이것은 무량한 세월입니다.
우리 중생(衆生)이 수치로 해서 헤아릴 수 없는
무량한 세월 이것이 겁입니다.
겁 겁(劫)자, 이것이 겁입니다.
우리는 이와 같이 무량한 겁 전에 이미 만난 것입니다.
그렇게 만났기 때문에
석가모니 부처님 회상(會上)에서 같이 공부했고,
또한 그 뒤에도 중국(中國)에서
또는 한국(韓國)의 신라(新羅) 때 원효(元曉), 의상(義湘)
그 당시도 같이 모두 공부를 했습니다.
임란(壬亂) 때는 같이 공부도하고
왜군의 침입으로 해서 모두 의병(義兵)을
우리가 편성해서 같이 싸우고 했습니다.
그런 인연(因緣)이 우리는 분명히 있습니다.
따라서 지금 만난 것은 지금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다시 또 우리가 후생(後生)에 두고두고 같이 만나야합니다.
물론 업(業)의 경중(輕重) 따라서 업의 가볍고 무거움 따라서
그때그때 태어나는 처소(處所)는 차이가 있겠지만
다시 꼭 만나게 될 것을 저는 확신합니다.
<결정신심(決定信心)>
우리는 지금 참선(參禪)을 배우고 있습니다.
한데 참선법이 어렵고 구구해서 잘못 들으면
도리어 마음의 혼란을 일으키기 쉽습니다.
몇 시간 안 남은 동안에 여기에 오신 분들은
참선에 대한 꼭 결정적인 결정신심(決定信心)이 서야합니다.
참선 이것이 몇 번 말씀한 것처럼
우리 불교에서의 제일 수승(殊勝)한,
제일 압축된 법문(法門)일 뿐만 아니라,
인류 문화의 모든 문화유산의 총 결론가운데서
제일 수승한 제일 최고도의 수행법(修行法)입니다.
따라서 현대 지성인(知性人)들은 참선(參禪)이 무엇인가?
선(禪)이 무엇인가?
이러한 것을 모르면
인류문화의 골수(骨髓)는 모른다고 할 수가 있습니다.
그만큼 참선의 문제는 중요한 문제입니다.
이 가운데는 각기 자기 인연 따라서
화두(話頭)를 의심해서 참구(參究)하시는 분도 계시고,
또는 염불(念佛)을 하시는 분도 계시고,
주문(呪文)을 하시는 분도 계시고,
또는 이것도 저것도 아니고 그냥 망연히 지내는 분들도 계십니다.
이런 분들이 앞서 말씀한 것처럼
참선법(參禪法)을 잘못 들으면 혼란을 마음에 야기 시킵니다.
따라서 제 말씀을 잘 들으시고서
꼭 참선은 이렇게 해야 쓴다는 결정신심(決定信心)을 가지셔야 합니다.
그래야 여기오신 보람이 있습니다.
지금은 명상법(瞑想法)도 따지고 보면
선법(禪法)의 하나의 갈래입니다만
불교의 참선은 모든 명상법 가운데서 제일 수준이 높은 명상법입니다.
mind-control 이것도 역시 하나의 명상법이고,
요가법도 역시 명상법입니다.
또는 노(老)․장(莊)의 도교법도 역시 명상법입니다.
이러한 명상법이 많은 것 가운데서 불교 선법
이것은 모양은 같다하더라도
앉은 모양이나 호흡모양은 같다하더라도 마음자세에 차이가 있습니다.
도교(道敎)의 정좌법(靜坐法)이나, 요가법의 그런 모양이나,
그런 것은 마음모양이나 호흡 다스리는 법은 거의 같습니다.
다시 어려운 말로 하면은 조신법(調身法)이라.
몸을 조화시키는 법, 또는 조식법(調息法)이라,
호흡을 조화하는 법.
그런 법은 요가법이나 mind-control이나
우리 참선(參禪)하는 분이나 똑같습니다.
다만 다른 것은 마음 다스리는 조심법(調心法).
거기에 차이가 있습니다.
여러분들 가운데는 저한테 와서
‘저는 지금 관음보살(觀音菩薩)을 합니다.’
‘저는 지금 [옴마니반메훔]을 합니다.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이렇게 묻는 사람이 있습니다.
더러는 ‘저는 화두가 잘 의심이 안갑니다’ 이런 분도 계십니다.
공부는 일조일석(一朝一夕)에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누구든지 간에 역시 오르막길이 있습니다.
가파른 길이 있습니다.
올라서서 고비를 넘어서면 그때는 내리막길입니다만,
올라 갈 때는 갑갑합니다.
아무리 총명하고 공부가 잘 된 분도
역시 어떤 때는 가슴이 딱딱 막힙니다.
이러다가 내가 병신 되려나 이런 때도 있습니다.
때로는 몸이 떨어서 참 거북할 때가 있습니다.
허나 우리는 이런 때일수록
우리 자성(自性)에 대한 우리 불성(佛性)에 대한 확신을 가져야 합니다.
비록 내가 지금 아직은 미혹되어서 이렇다 하더라도
내 불성 이것은 만능(萬能)하다. 만능한지라
해가면 갈수록 차근차근 불성과 접근되어 갑니다.
접근되어 가면은 그때는 갑갑한 기도 떨어지고
차근차근 거북한 그러한 불탁이 없어집니다.
헌데 그러려면 역시 방법을 잘 알아야 합니다.
<선오후수(先悟後修) 정혜쌍수(定慧雙修)>
보조국사(普照國師) 어록에도 있고,
각 도인(道人)들이 다 일구여출(一口如出)로 말씀합니다만은
“선오후수(先悟後修) 정혜쌍수(定慧雙修)”라,
참선하신 분들은 꼭 이 두 가지 문구를 외워야 합니다.
선오후수(先悟後修)라,
먼저 선(先)자, 깨달을 오(悟)자, 뒤 후(後)자, 닦을 수(修)자.
정혜쌍수(定慧雙修)라,
정할 정(定)자, 지혜 혜(慧)자, 아울 쌍(雙)자, 닦을 수(修)자)
마음을 하나로 딱 통일시키는 그런 고요한 정(定)과
또는 영원적인 불성을 비추어 보는 혜(慧)와 아울러 가야합니다.
아울러 못 가면은 우리 마음이나
우리 몸이 조화(調和)를 못 시키기 때문에
우리가 몸에 병나는 것도 음양(陰陽)의 조화가 안 되어서 그럽니다.
음양오행(陰陽五行)의 조화가 안 되기 때문에 몸이 거북한 것입니다.
우리 마음이라는 것은 원래 지금 심리학적으로 말하면
다 아시는 바와 같이
지(知)와 정(情)과 의(意)와 이러한 요소가 있지 않습니까?
이런 요소가 있는데 지혜(智慧)로만 치우치고
또는 고요한데로만 치우고 그러면은 참선이 못됩니다.
우리 심리(心理)에 맞추어서
우리 공부하는 방법도 조화(調和)를 취해야 합니다.
그것이 소위 도인(道人)들이 말씀하신 정혜쌍수(定慧雙修)입니다.
정혜균등(定慧均等)이라,
고를 균(均)자, 무리 등(等)자 가지런히 나아가야 합니다.
그래야 선(禪)이 턱턱 안 막히면서 우리 몸도 거북하지 않습니다.
헌데 우리 사람 가운데는 십인십색이라,
각기 개성 따라서 차이가 있습니다.
지혜(智慧)가 수승한 분도 있고,
감성(感性)이 수승한 분도 있고,
또는 의욕적으로 의지(意志)가 강한 분도 있습니다.
그런데서 부처님의 또는 도인들이 참선하는 법도
그때그때 사람 따라서 말씀을 달리 했습니다.
한국(韓國)에서나 일본(日本)에서나 대만(臺灣)에서는
선(禪)이 대체로 3갈래가 있습니다.
선의 방법이 3갈래가 있습니다.
<화두(話頭)하는 선법>
한 가지는 어느 문제를 턱 주면은
그 문제를 우리가 의심(疑心)합니다.
본래 부처거니 의심에 마음을 두고서 마음만 모아지면
그때는 부처가 되어갑니다.
화두(話頭)하는 선법 가운데는 ‘이것이 무엇인가? 이뭣고?’
한문투로 말하면 “시심마(是甚麽)”
중국 송나라 속어로 말하면 ‘시삼마’, ‘이것이 무엇인가?’
이것은 ‘무엇이 무엇인가?’ 하면은,
이뭣고 선은 부처님의 정통법을 계계승승(繼繼承承)으로
쭉 이어 내려온 육조혜능(六祖慧能)스님.
육조혜능스님은 33번째 조사(祖師)입니다.
이분이 일반 대중에게 말씀했습니다.
나한테 한 물건이 있는데,
그 물건은 밝기는 해와 달보다 더 밝고, 검기는 칠흑보다 더 검고,
하늘과 땅을 딱 받치고 있습니다.
그러한 것이 내가 말하나 내가 움직이나 항시 나한테 있습니다.
나한테 항시 있는데 미처 내가 안 보입니다.
미처 거두어 얻지 못하는 그것이 무엇인가?
<有一物 上拄天下拄地 明如日黑似漆
長雎用中 動用中收不得 且道過在甚麼處>
나한테 한 물건이 있는데
그것은 행주좌와(行住坐臥)에
언제나 나한테 안 떨어지고 있는 것인데,
그것이 밝기는 해와 달보다 밝고, 검기는 칠흑보다 검고, 하니까
이것은 모든 광명과 어둠을 갖추고 있는 것입니다.
또는 천지를 다 받치고 있으니까 천지에 충만해 있습니다.
밝기도 끝도 갓도 없고 어둡기도 끝도 갓도 없고
천지에 충만한 그것이 무엇인가?
지금 사람들은 영리해서 내내야 그것은 불성(佛性) 아닙니까.
불성 외에는 천지에 충만하고, 밝기가 한도 끝도 없이 밝고,
또는 모든 것의 기능이 완비한 것은 없습니다.
이것은 분명 불성입니다.
따라서 내내야 불성이 무엇인가?
즉 그런 뜻입니다.
어떤 화두이든 간에 화두 본뜻을 보면 다
‘불성이 무엇인가?’
그것을 의심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묵조선(黙照禪)>
또 한 가지는 부처님 말씀이나 조사스님들 말씀을 들어보면
모두가 부처라 했거니 바로 보면,
이렇게 번뇌가 얽힌 나도 역시 부처고,
개미나 독사나 모두가 부처거니,
천지우주는 바로 부처 덩어리거니
새삼스럽게 의심할 필요가 무엇이 있느냐?
절로 그때는 부처가 되겠지.
흐린 탁수(濁水)를 가만두면 앙금 가라앉고서 바닥이 보이듯이
우리도 역시 원래 부처거니 산란스러운
그 마음만 쉬면 이것은 부처가 되지 않겠는가?
이렇게 화두가 없이 묵묵부답(黙黙不答)으로
그냥 가만히 무념무상(無念無想)으로 앉아있습니다.
그런 참선법이 묵조선(黙照禪)입니다.
잠잘 묵(黙)자, 배출 조(照)자
묵조선(黙照禪)과 화두선(話頭禪).
이 두 가지 선의 갈래,
이것은 중국 당나라 때부터서 굉장히 논쟁을 많이 해왔습니다.
거의 백중이라, 어디가 우세하고 어디가 힘이 부치는 것이 아니라,
사람경향 따라서 지혜(智慧)로 따지기 좋아한 분들은
화두(話頭)로 의심하는 쪽이 좋았겠지요.
허나 꼭 따지면 뭣해 잘못 따지면
괜히 마음으로 분열만 생기고 안 되겠다 이래서
적멸(寂滅)을 좋아하는 고요를 좋아하는 그런 분들은
화두를 배제를 하고 무념무상으로 하는 묵조선법을 취했다 말입니다.
우리 한국(韓國)도 우리 조계종(曹溪宗)은
화두를 취하는 선법을 주로 많이 합니다만은
원불교(圓佛敎)는 화두선을 그것을 배격합니다.
그것은 안 된다. 묵조를 해야 한다.
그 사람들은 잠자코 그냥 무념무상으로 묵조를 합니다.
아래 단전(丹田)에다가 힘을 두고서 말입니다.
대만(臺灣)이나 일본(日本) 역시
두 파의 선이 갈려가지고 똑같이 있습니다.
<염불선(念佛禪)>
헌데 이런 가운데서 또 한파가 있습니다.
또 한파 이것은 묵조하는 분이나
화두를 드는 분이나 같이 하는 선법입니다.
이것은 무엇인고하면 염불선(念佛禪)이라. 염불선입니다.
우리가 내가 생명(生命)인데 내 생명의 근원은
분명히 나보다 더 훌륭한 생명이겠구나,
천지우주(天地宇宙)가 모두 생명체인데
천지우주의 근본자리, 근본 순수한 그것,
그것은 아주 정말로 완전무결(完全無缺)한 생명(生命)이겠구나,
이와 같이해서 하나의 바싹 마른 이론이나
또는 무념무상의 멍하니 그런 것 보다는
차라리 우리가 하나의 생명으로 인격(人格)으로 구해야 되겠다.
내가 인격인데 내 근본 자성(自性)도 인격이겠지요.
천지우주를 본다 할 때 모두가 다 생동(生動)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천지우주의 근본체.
근본 순수한 하나의 기운 에너지는
역시 우리 생명이 아닐 수 없습니다.
따라서 이러한 생명체이니까 인격화시켜서,
인격화 시킬 때는 불처 불(佛)자를 붙입니다.
부처라는 이름을 붙입니다.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이나,
약사여래(藥師如來)나, 무량광불(無量光佛)이나
그와 같이 그런 모두가 다 인격화 시킬 때는
그러한 부처불(佛)자를 붙입니다.
생명이기 때문에 말입니다.
그와 같이 우리 신앙(信仰), 우리가 성취하는 목표.
우리 근본 생명을 인격화시켜서
그때는 아미타불(阿彌陀佛)이나 관음보살(觀音菩薩)이란 말입니다.
이와 같이 인격화시켜서 우리가 참구(參究)한다 말입니다.
우리가 구한다말입니다.
-淸華 大宗師 『마음의 고향』-
첫댓글 우리는 이와 같이 무량한 겁 전에 이미 만난 것입니다.~ 궁리합니다.~
佛 공부합니다 감사합니다 ()
참선(參禪) / 청화 큰스님~ 감사합니다.^
우리가 지금 만난 것은 금생의 인연(因緣)만으로 만난 것은 아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