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임승차 / 김석수
그해 여름 너무 무더워서 아이슬란드 여행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핀란드 헬싱키에서 하룻밤 자고 저녁 비행기로 인천공항으로 가는 여정이다. 아침 일찍 호텔에서 나와 에스토니아 수도 탈린을 당일치기했다. 헬싱키 항에서 유람선으로 두 시간 정도 가면 붉은색 지붕이 있는 고딕 건물들이 많이 보인다. 시내에 들어가니 타임머신을 타고 중세로 돌아온 기분이다. 높고 기다란 성벽이 도시를 둘러싸고 중심에 그리스 정교회 교회가 있다. 좁은 골목길에 상점이 즐비하다. 기념품은 물론 양털로 만든 옷이 대부분이다. 북유럽 다른 나라보다 물가가 저렴하다. 아내는 양모로 짠 스웨터가 싸다며 한 벌 샀다. 시간이 없어서 구시가지만 보고 되돌아오는 배에 탔다.
핼싱키 유람선 선착장에서 카우파토리 거리로 나오니 번잡스럽다. 하늘색 시청사 건물 앞 시장 광장이다. 가판대에 싱싱한 채소와 과일이 가득하다. 노점 상인들은 액세서리 사라고 지나가는 사람을 붙잡는다. 주말이라 광장 옆 번화가는 시끌시끌하고 즐거움 같은 게 부글부글 거품을 내고 있다. 여기저기서 길거리 공연이 펼쳐지고 구경꾼이 많다. 날씨는 전형적인 우리나라 초가을이다. 볕은 따스하고 습기가 없다. 가끔 시원한 바람이 속살로 기어들어 와 서늘하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어린애처럼 여기저기 쏘다녔다.
내친김에 시벨리우스 공원까지 갔다. 핀란드인이 자랑스러워하는 작곡가다. 가끔 그가 작곡한 클래식 음악을 즐겨 듣는다. 시내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있다. 걸어가기에는 멀게 느껴지는 곳이다. 택시 타고 가려다 요금이 비싸서 버스로 갔다. 한적한 해안가에 오르간 모양으로 만들어진 기념비가 있다. 생각보다 썰렁했다. 문제는 그곳에서 중앙역으로 돌아오는 길에 생겼다. 버스를 잘못 타서 중간에 내려서 걸었다. 여름에 북유럽은 저녁 늦게까지 훤하다. 밤이지만 낮으로 착각하기 쉽다. 빨리 가려고 걸음을 재촉했다. 배낭을 메고 걸으니 힘들었다.
숨을 할딱거리며 공항 가는 기차표를 사려고 역으로 들어갔다. 휴가철이라 그런지 사람이 많았다. 둘러보니 빈 의자가 없다. 창구 앞에 표를 사려는 사람들이 길게 줄지어 서 있다. 시계를 보니 일정이 빠듯하다. 중앙역에서 공항까지 한 시간 정도 걸리지만 짐을 부치고 출국 수속하려면 마냥 기다릴 수 없다. 아내에게 줄 서 있으라고 하고 승강장 쪽으로 갔다. 다행히 검표원이 없었다. 먼저 승차하고 표는 차에서 사기로 했다.
배낭을 선반 위에 올려놓고 빈 좌석에 앉았다. 기차가 출발하자 젊은 남자가 내 앞에 앉았다. 승무원이 오면 표를 살 수 있을 거로 생각하고 피곤해서 눈을 감고 있으니 아이슬란드가 떠올랐다. 한여름에도 눈이 녹지 않고 얼음이 녹아내렸다. 화산 분화구에서 용암이 흘러내리고 있다. 곳곳마다 노천 온천이다. 집에서 온천물로 매일 목욕할 수 있다. 찻길 옆 들판은 검고 울퉁불퉁하다. 달나라 같다. 바닷가 산책길에 낚시하는 사람이 고등어를 줘서 민박집으로 가져와 맛있게 요리해 먹었던 생각을 하다 눈을 떴다.
기차가 출발한 지 한참 지나도 승무원이 오지 않았다. 앞에 앉아 있는 젊은이에게 어디서 왔냐고 물으니 헬싱키에 산다고 했다. 급해서 표를 사지 못하고 왔다고 하니 가끔 검표한다며 걸리면 벌금을 많이 부과한다고 했다. 차에서 표를 구매할 수 없느냐고 했더니 자기가 알기로는 팔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인터넷으로 사거나 역 자동 발매기 혹은 창구에서만 살 수 있다고 했다.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들었다. 걸리면 벌금 내고 국제 망신당하면 어쩌나. 표를 사지 못한 상황을 잘 말하면 괜찮겠지. 잘못하면 오늘 비행기를 놓칠 수 있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두근거렸다. 이 생각 저 생각으로 머리가 아파서 안절부절못했다. 아내에게 말했더니 알아서 하라고 태평했다. 해외에 나가면 내가 가이드다. 마음 편하게 여행 다닌다고 했더니 영어를 잘하지 못해서 어쩔 수 없다는 것이다. 공항까지 시간이 꽤 오래 걸린 것 같다.
도착할 때까지 승무원은 오지 않았다. 배낭을 잽싸게 내려 들쳐 메고 밖으로 나와 엘리베이터로 뛰어 올라갔다. 어릴 적에 친구들과 함께 동구 밖에서 몰래 수박 서리하고 도망쳐 나오는 느낌이다. “출구에서 표 검사하면 어떻게 할까? 뒤에서 누가 소리치며 잡으러 오지 않을까?”하는 걱정이 들기도 했다. 수하물 창구에서 짐을 부치고 입국 절차를 무사히 마쳤다. 탑승구 앞으로 가니 항공사 직원이 개찰하고 있다. 비행기로 들어가 좌석에 앉고 나서야 긴장이 풀렸다. 예전에 다른 사람이 무임승차하면 비난했던 내가 부끄러웠다.
첫댓글 아찔하셨겠어요. 저도 긴장 됐을 것 같아요, 그러고보면 배짱 좋게 무임승차하는 사람들도 대단한 사람들이네요.
네, 다른 사람 무임승차 비난하면서 내가 했으니 내로남불이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