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인의 길로 이끈 상 / 이임순
이번 주말(4월 13일) 1박 2일 일정으로 초등학교 동창 모임이 있다. 해마다 서울과 시골에서 번갈아 가면서 만나는데 올해는 시골에서 할 차례다. 서울이나 그 인근에 사는 친구들이 열차로 구례구역으로 오면 시골 동무들은 임대된 버스를 타고 가서 합류한다. 다른 행사로 참석하지 못할 형편이라 잠자코 있는데 경기도에 사는 친구한테서 전화가 온다. “이번에도 책 가져올 거지. 좀 많이 가져와. 싸움 붙이지 말고.” 한다. 대답을 안 하니 “싸움 붙여 놓고 구경하면 재미있어.” 하며 웃는다.
친구들이 모일 때면 ‘광양문학’을 비롯하여 내게 있는 너댓 가지의 동인지를 꾸려서 갔다. 그중 한 권씩이라도 가져갈 수 있도록 미리 준비해 둔다. 그런데 대부분 더 갖는 바람에 동작이 느린 친구는 빈손이다. 분위기가 화기애애하다가도 책 나눌 때가 되면 욕심쟁이라고 티격태격한다. 나누어 가지자고 하면 단청을 부리며 못 들은 척도 했다.
친구에게 고향 소식과 그 밖의 책을 접할 수 있는 기회를 준 것은 그 상이 계기가 되었다. 올해 마흔여섯 살인 큰아들이 초등학교 1학년(1985년) 때였다. 편지쓰기 대회가 있는데 새마을 어머니회에 가입한 부모님은 내일까지 아무한테나 편지를 써서 내야한다고 선생님이 말씀하셨단다. 다음 날 아침밥을 먹으면서 편지를 달라고 해 밥상머리 앞에서 어머니께 썼다.
우리 어머니는 젖이 모자라 맘죽으로 칠남매를 키우셨다. 가슴에 달린 두 젖을 먹여도 힘들었는데 농사짓고 길쌈하며 밤중에 죽까지 끓여 먹이느라 얼마나 고생하셨을까? 그 고마운 마음과 감사함을 편지에 담았다.
그해 크리스마스 전날 새벽부터 눈이 왔다. 개가 낑낑거리며 짖었다. 아들이 학교에서 돌아올 시간은 아직 멀었고, 이런 날 손님으로 올 사람도 없는데 하며 현관으로 나갔다. 흰 눈 모자를 쓴 집배원이 대문을 들어섰다. 아침나절에 쓴 마당에는 발목 부위까지 눈이 쌓여 있었다. 그는 눈을 툴툴 털고 어깨에 멘 커다란 가방에서 소포를 꺼내주었다. 어리둥절한 나에게 환하게 웃으며 “체신부에서 왔는데 반가운 소식인가 봅니다.” 했다. 그러면서 이런 것을 전해주면 눈길을 걸어도 힘들지 않다며 광양에는 선생님 한 사람한테만 온 것이라 했다. 생각지도 않았던 물건을 받은 것도 어안이 벙벙한데 ‘선생님’ 이란 호칭까지 들으니 기분이 한껏 솟아올랐다. 가는 사람 뒷꼭지에 대고 감사하다는 인사를 하고 또 했다.
뛰는 가슴을 누르며 조심스레 소포를 뜯었다. 그 안에는 편지쓰기 기념 우표(한 장에 여섯 개 붙어 있음) 두 장과 엽서 묶음(10장), 앞치마, 메달, 그리고 체신부 장관의 인사말이 적힌 서한문이 있었다.
해마다 체신부(그 당시)에서 편지쓰기 대회가 있는데 그해에 입상한 것이다. 소포를 받고 나서야 이런 글쓰기가 있었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두 해가 지나고 회원 이름과 주소가 적힌 우편물이 왔다. 편지쓰기 대회에 입상한 사람들의 명단이었다. 체신부에서 그것을 장려하던 때였다. 강원도에서 제주도까지 나와 같은 해에 태어난 사람에게 편지를 썼다. 친구가 여럿 생겼다. 일주일에 대여섯 통의 소식이 왔다. 편지뿐만 아니라 매월 잡지인 샘터 크기의 ‘편지 마을’이란 책도 발행되었는데 그 속에 편지 릴레이도 있었다. 주소에 적힌 누구한테나 편지를 하면 언니, 동생, 친구가 되었다. 전국에 흩어져 있는 회원을 만날 수 있는 기회는 일 년에 한 번 편지 마을 회원 단행본출판 날이었다. 얼굴은 모르나 친구가 전국에 있으니 각 지역 소식을 다양하게 들을 수 있었다.
편지 마을 회원의 소개로 전라수필에 가입했다. 지도 교수님을 모시고 문학성 있는 글을 쓰기 위한 공부를 매월 했다. 동료들 간의 냉혹한 합평회를 내 것으로 소화 시키기 위해 발가벗고 사람 앞에 선 듯한 부끄러움을 견뎠다. 글을 쓰려고 각종 대회에 응모하여 숱하게 상을 받았다. 읽고 쓴 만큼 글도 늘었다. 점차 활동 범위도 넓어졌다. 수필계에서 이름있는 문예지에 등단(1997년)을 했다. 글이 그 작가의 얼굴이며 문학성이 없으면 작품으로의 가치도 없다 하여 지금도 부단한 노력 중이다.
작품 활동을 열심히 하다 보니 전국단위 문학모임에 가입이 되었고 각종 세미나에도 참석한다. 아는 만큼 보였고 회원 간에도 소통한다. 문학으로 맺어진 30년지기도 있고 목소리만 들어도 문우의 기분을 알 수 있는 절친도 있다.
이제 문학은 내 삶의 일부분이다. 이렇게 되기까지 시행착오를 많이 겪었다. 그럴수록 발전을 했고 뜻하지 않게 한고을의 사단법인 한국예술문화단체총연합회 회장이 되기도 했다. 그 첫걸음은 ‘편지 마을’ 입상이란 작은 상이었다. 문단의 어느 선배한테 거기서 ‘가작’ 밖에 못 받았다고 했다가 심한 꾸지람을 들었다. 오천(1985년 당시) 명이 넘는 응모자 중에서 백 명 안에 든 것도 잘한 것이라며 자부심을 가지라고 했다.
이제부터는 문학인의 긍지를 가지려고 한다. 내 이름으로 발간한 네 권의 수필집 모두 문예진흥기금을 받아 출판했다. 그리고 또 준비 중에 있다. 상! 그 무게도 중요하지만 동기부여도 그에 못지않다. 언제부터인가 편지가 이메일과 카톡으로 바꿨다. 오늘 저녁에는 오랜만에 친구에게 손편지를 쓰고 싶다.
첫댓글 대단하십니다. 열심히 노력하는 그 열정에 박수를 보냅니다.
감사합니다. 열심히 동행하겠습니다.
책을 여러 권 내신 작가이시군요. 함께 해서 영광입니다.
감사합니다. 부지런히 따라다니겠습니다.
경력이 화려하시네요.
열심히 노력해서 따라가야 할까 봐요.
아닙니다. 선생님. 그저 최선을 다했을 뿐입니다.
더 휼륭한 선생님들을 따라가야지요.
꾸준한 열정에 박수합니다.
감사합니다. 삶이 녹록치 않더이다. 믿을 수 있는 것은 오로지 노력뿐이었습니다.
아주 긴 글쓰기 경력이네요. 그래서 이렇게 좋은 글을 쓰시나 봐요
부끄럽습니다. 경력을 앞지르는 것이 노력이라는 것을 배웠습니다. 감사합니다.
부지런한 걸로는 아마도 광양 최고일 겁니다.
어찌 그 많은 일을 다 해내시는지 존경스럽습니다.
'근면상'을 드립니다.
감사하고 부끄럽습니다.
부지런함은 선생님을 따라 갈 수 없고 일은 할 수 있는 것만 즐기며 합니다. 근면상 감사합니다.
화려한 경력에 한국예술문화단체총연합회 회장이라니요. 문학이 삶의 일부분이 되었다니 얼마나 문학을 사랑하는지 느껴집니다.. 부지런함과 열정에 감탄합니다.
자랑잘한 것 같아
@과수원지기 제가 컴퓨터가 서툽니다. 이해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자랑질 한 것 같아 부끄럽습니다. 문학으로 얻은 것도 있지만 잃은 것 또한 있습니다. 그 아픔을 견디며 작품으로 환생시키기도 합니다. 무엇보다 문학으로 맺은 인연을 소중하게 생각합니다. 송항라 선생님과의 인연 또한 그렇지요. 부족한 사람을 칭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자만하지 않고 겸손하겠습니다.
늘 존경스럽게 생각합니다. 대단하시지요. 그만큼 노력 하셨군요. 저도 선생님 곁에서 열심히 배우겠습니다.
별 말씀을요. 부끄러울 따름입니다. 그저 최선을 다 했을 뿐입니다.
배우는 노력을 멈추는 순간 성장도 그치게 된다고 합니다. 노력하는 모습이 존경스럽네요.
감사합니다. 제 생활을 사랑할 따름입니다. 새로운 도전은 도 다른 나와의 만남이기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