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22차 정기산행(2024.8.8.목)-덕주계곡(덕주사)<충북 제천>
충주 제천 덕주 산성은 남한강 뱃길과도 통한다?
저 앞에 보이는 월악산 영봉 아래쪽으로 덕주산성이 자리 잡고 있다
덕주 산성의 북문이 이쓴 곳에서 남한강 줄기인 월악 나루터까지는 불과 3Km 정도,,,
그리고 단양 온달산성은 산을 내려오기만 하면 바로 영춘 상리 나루터다
배를 띄우기만 하면 험한 산악지역을 거치지 않고도 한강 하류지역인 한양까지
어렵지 않게 드나들 수 있는 뱃길이 트이게 되는 것이다
이런 사실을 잘 알고 있었던 삼국은
전략적으로 중요한 남한강의 요충지를 차지하기 위해 각축을 벌였을 것이고
결국 최후에는 집요하게 공격을 했던 신라가 점령을 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신라는 더욱더 굳건하게 성을 증축하고 방비하는데 심혈을 기울이지 않았을까?
통일신라 시대에는 덕주산성 성의 길이가 10Km에 달했다는 이야기는 이런 사실들을 뒷받침해주고 있다
하지만 신라 때 쌓았던 성벽은 거의 허물어지고 지금 현재는 조선시대에 쌓은 남문, 동문, 북문 등
세 개의 성문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새로 복원시킨 덕주산성 남문 - 제천시 한수면 송계리
위에 사진은 월악산 덕주산성 남문인데 저 남문의 문루는 최근에 복원한 것이다
그 옆 거뭇거뭇한 석돌은 예전부터 있었던 석돌이고 횐 빛깔을 띠고 있는 석돌과 문루는 최근에 복원한 것이다
덕주산성 안내문
제천 덕주산성(堤川 德周山城
충청북도 기념물 제36
소재지 : 제천시 한수면 송계리
이 산성은 월악산의 남쪽 기슭에 있는 상덕주사를 중심으로 하여 그 외곽을 여러 겹으로 둘러쌓은 석축산성이다.
상덕주사의 외곽을 둘러싼 상성(내성으로 제1곽), 상. 하덕주사를 감싼 중성(제2곽, 일명 동문 주변)과,
그 외곽으로 하성(제3곽)이 있으며, 송계 계곡인 월천의 남쪽을 막아 쌓은 남문과,
북쪽의 북문을 이루는 관문형식의 외곽성(제4곽)등 네 겹으로 이우러 진 매우 큰 규모의 석성이다.
고려 고종 때 몽고의 침입 시 월악대왕의 가호와 월악신사 등과 관련한 항몽 유적지이다.
조선 중종 때 내성을 축성하고, 임진왜란 때에도 역할을 하였으며, 조선말기에는 명성황후와의 관련이 있는 등
역사적인 면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하였던 대표적인 사적이다.
최근에 남문의 문루를 복원하였으며, 성벽 일부 보수하고 있다.
이 안내문에서 보면 고려 고종 때 몽고의 침입 시 몽고에 대항했던 항몽 유적지라고 한다.
고려 고종이라면 재위기간 내내 최 씨 무신권력에 위하여 왕권을 유린당했고
또 몽고의 침입으로 수도를 강화도로 천거해야 했었던 그 시대의 아주 불행한 왕 아니었던가?
당시 이곳에서도 항몽을 했다는데 그다지 큰 전과나 승전보는 없었던 듯하다.
다만 충주지방의 노약자와 여성들을 피신시키고 성을 방어하는데 그쳤고
몽고군도 죽자 사자 이 성을 공략을 하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한데 고려사의 기록에는 고려 고종 42년(1225년) 10월 몽고 장수 차라대가 이끄는
"몽고군이 대원령을 넘자 충주에서 정예군을 보내 천여 명을 죽였다"라고 서술하고 있다.
그렇다면 고려는 덕주산성에서 몽고군과 일전을 벌인 것이 아니라
월악산 덕주산성 쪽으로 진격을 하는 몽고군을 중간 협곡에서 기습하여
선봉부대의 기세를 꺾었다는 이야기가 아닌가?
개경에 있는 고려의 주력부대들도 힘 한번 못쓰고 패퇴한 막강의 몽고군이
지방 군졸들에게 당했다는 사실은 자신들에게 익숙하지 않은
너무 낯설고 험악한 산악지형이기 때문으로 추정이 된다
참고로 대원령은 하늘재의 옛 이름인데
조선시대 이전까지는 대원령, 또는 계립령으로 불려졌다고 한다
월악산 덕주산성
저 앞에 보이는 바위절벽은 송계 8경 중의 하나인 망폭대라고 하는데
망폭대는 기기묘묘한 바위절벽들이 하늘을 찌를 듯이 우뚝 솟아 있다.
망폭대 아래쪽으로는 송계계곡을 굽이도는 맑은 물이 흘러가는데
덕주산성과 마주 보고 있어 더욱 교교한 느낌을 준다
필경 천년 전에는 이 덕주의 산성이 저 바위절벽까지 이어졌지 않았을까?
이 성곽을 저 바위절벽에 붙여 놓으면 더 없는 천혜의 요새가 될 수 있었으니까,,,
월악산 덕주산성 남문 - 제천시 한수면 송계리
덕주산성 통문
최근에 복원시킨 덕주산성 문루
저 거대한 성벽들은 당시 누가 쌓았던 것이었을까?
통일신라 때는 이렇게 가파른 산등성이를 타고 축조된 성곽의 길이만 해도 근 10Km에 달했다고 한다
이런 성곽들이 월악산 정상까지 이어졌었다고 하니 당시에 이 성을 쌓기 위해 동원된 사람들은
얼마나 많았을 것이며 성을 쌓다가 부상당한 사람들 또한 얼마나 됐을까?
자진해서 성을 쌓는 일에 참여한 군사들도 있었겠지만
분명 반 강제로 동원된 백성들의 숫자 또한 상당히 많았을 것이다.
물론 이들은 적으로부터 보호해 준다는 명분이 내걸린 일이라
아무런 대가도 없이 무임금으로 동원됐을 것이며
또한 생업인 농사 일도 포기한 채 이 성을 쌓는 공사에 매달려야만 했었을 것이다
이러한 성들이 우리나라 남북한을 합쳐 3천여 개가 넘는다고 하는데 그중 2천 개는 남한에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과연 그 성들은 어떤 사람들이 동원돼서 쌓았겠는가?
물론 이 나라의 백성들이 생업을 포기한 채 동원돼서 쌓았다는 것은
애써 추리를 하지 않아도 쉽게 짐작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안양 산까치 산악회에서 복사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