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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저기서 행사를 진행하다 보면 가끔 “김기열씨, 왜 이렇게 웃겨요? TV에서 볼 때와는 완전히 다르네요” 하는 이야기를 듣는다. 관객의 피드백이 감사하긴 하지만 이게 칭찬인지, 아닌지 헷갈릴 때가 있다. ‘평소 내가 얼마나 안 웃기는 이미지였기에 사람들이 이렇게 반응하나?’ 하는 생각도 든다. 아마도 잘 웃기는 개그맨 옆에서 받쳐주는 역할을 하던 시간이 길어 많은 사람이 나를 그렇게 기억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개그콘서트](이하 [개콘])에는 나를 비롯한 든든한 수비 선수들이 있다. 유민상, 박성광, 송병철이 그 주인공들이다. 우리 네 명은 서로 ‘[개콘]의 책받침’ 또는 ‘[개콘]의 포백’이라 칭한다. 나는 축구로 따지면 ‘수비수’ 역할을 참 오랫동안 해왔다. 가만히 있으면 중간이나 갈 텐데 굳이 나서다 본전도 못 찾는 연기가 나의 콘셉트다. 내가 주전 수비수로 나선 코너들은 아이러니하게도 하나같이 잘됐다. 덕분에 지금도 여전히 ‘수비 개그’ 하면 ‘김기열’이라는 명성이 [개콘] 안에서 자자하다.
가장 뚱뚱한 책받침 민상이 형은 ‘당하는 돼지’로 너무나 유명하다. 먹을 것에 대한 끝없는 집착으로 크게 혼나는 연기만큼은 그 누구도 따라올 자가 없다. 사실 민상이 형의 식탐 연기는 연기가 아니라 생활이다. 그가 무대에 핫바를 들고 등장하는 모습은 무척 자연스러워서 전혀 낯설지가 않다.
그런가 하면 성광이는 ‘바보 책받침’이다. 커다란 뿔테 안경을 끼고 항상 한발 늦은 깨달음으로 허공에 대고 화풀이를 하는 모습에서 그런 별명이 나왔다. 그의 특징은 전혀 과하지 않은 절제된 샤우팅.
‘잘생긴 책받침’ 병철이 형은 준수한 외모를 전혀 활용하지 않는다는 확고한 방침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인지 데뷔 때부터 지금까지 줄곧 책받침 외길 인생을 걷고 있다. 최근엔 ‘편하게 있어’ 코너에서 ‘똥 마려운 강아지처럼 쩔쩔매는 연기’를 펼치는 중이다.
골대 앞에 서 있기만 해도 저절로 골이 들어가는 오나미 같은 피지컬이 훌륭한 공격수를 돕는 것이 우리의 주된 임무다. 우리처럼 든든한 수비수가 되기 위해서는 나름대로 지켜야 할 두 가지 수칙이 있다.
첫째, 욕심내지 않는다. 불필요한 대사나 애드리브 따위는 코너가 궤도에 오르기 전까지 절대 자제해야 한다. 단, 중간중간에 추임새 정도는 넣을 수 있다. 과한 욕심은 자칫 코너 전체를 무너뜨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둘째, 질투하지 않는다. 코너가 잘되면 옆에 있는 공격수는 뜨게 마련이다. 그에겐 자연스럽게 각종 행사나 광고계의 러브콜이 쏟아진다. 옆에 있던 수비수 입장에선 속에서 열불이 난다. 하지만 겉으로는 절대 내색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네가 잘돼 나는 정말 좋아!”라는 마인드로 팀워크를 해치지 않아야 한다.
책받침 넷이 모여 코너를 짜도 재미있겠단 생각이 들어 다른 책받침들에게 제안했다. “우리 넷이 코너 짜면 재밌을 것 같지 않아? 어때?” 나의 물음에 껄껄 웃으며 성광이가 대답한다. “근데 누가 웃길 거야?”
우리는 결국 긴 침묵 속에 헤어졌다. 언젠가는 넷이 함께 코너를 할 수 있는 날이 올 거라 믿는다. 장담하건대 그때 우리 넷을 책받침으로 쓰는 공격수는 자동으로 호날두나 메시가 되는 거다.
첫댓글 와우.
그래도 저는 오도시를 많이 치는 개그맨이 되고싶네요ㅠㅜ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