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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을 말씀: 누가복음 16:19-31】
19 한 부자가 있어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날마다 호화롭게 즐기더라
20 그런데 나사로라 이름하는 한 거지가 헌데 투성이로 그의 대문 앞에 버려진 채
21 그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불리려 하매 심지어 개들이 와서 그 헌데를 핥더라
22 이에 그 거지가 죽어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가고 부자도 죽어 장사되매
23 그가 음부에서 고통중에 눈을 들어 멀리 아브라함과 그의 품에 있는 나사로를 보고
24 불러 이르되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사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 내가 이 불꽃 가운데서 괴로워하나이다
25 아브라함이 이르되 얘 너는 살았을 때에 좋은 것을 받았고 나사로는 고난을 받았으니 이것을 기억하라 이제 그는 여기서 위로를 받고 너는 괴로움을 받느니라
26 그뿐 아니라 너희와 우리 사이에 큰 구렁텅이가 놓여 있어 여기서 너희에게 건너가고자 하되 갈 수 없고 거기서 우리에게 건너올 수도 없게 하였느니라
27 이르되 그러면 아버지여 구하노니 나사로를 내 아버지의 집에 보내소서
28 내 형제 다섯이 있으니 그들에게 증언하게 하여 그들로 이 고통 받는 곳에 오지 않게 하소서
29 아브라함이 이르되 그들에게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으니 그들에게 들을지니라
30 이르되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만일 죽은 자에게서 그들에게 가는 자가 있으면 회개하리이다
31 이르되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 하였다 하시니라
【말씀나눔】
요즘 들어 빈주의 격차가 더 커지고 코로나 이후로 중산층이 무너지고 있다는 경고를 듣고 있습니다.
설상가상 사회적인 약자들을 돕던단체들도 문을 닫고 있다는 것입니다.
식사를 제대로 할 수 없는 빈곤층을 위해 하루 한 끼라도 대접하자는마음으로 운영되던 천사급식소도 코로나로 인해 결국은 문을 닫고 말았습니다. 작년 구세군 자선냄비 기부금은 전년도 비해 25%정도 감소했다고 합니다. 해마다 기부 참여자가 줄고 있는데 그 이유를 분석해 보니 경제적인 여유가 없어서라는 응답이 약 60%에 달하고 기부에 대한 관심이 없다는 비중은 20% 이상으로 약 80%가 경제적인어려움으로 남을 돌아볼 여력이 없거나 관심을 둘 여유도 없는 형편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가면 갈수록 빈부의 격차는 커져만 가는데 국가에서 지원하는 사회복지 사각지대는 여전히 방치되어 있어서 송파 세 모녀 사건과 같은 일들과 고독사의 문제들이 여전히 우리 사회에서 반복되고 있습니다.
코로나 이전에는 그나마 교회에서 이러한 사각지대를 볼보는 손길들을 내밀었지만, 코로나 이후로는 교회들마저도 문을 닫을 정도로어려움이 많아서 도움의 손길들이 현저히 줄어들었습니다.
특히 요즘은 고금리 시대로 빚을 내서 투자한 소위 영끌족에게는 지옥 같은 날들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경제적인 어려움은 신앙생활에도 그대로 반영되고 있습니다. 소위 먹고살기 급급하다보니 교회에 나갈 여유가 없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내가 일을 하지 않으면 당장 내 가족의 생계가 막막하다는절박함을 내비치기도 합니다.
그래서 일까요? 경제가 어려울수록 로또 광풍이 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많은 사람들이 일확천금을 꿈꿉니다. 현실에서 아무리 열심히 벌어도 가난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생각이 돈에 더 매인 삶을 살아가게 만듭니다. 그리고 이러한 삶을 더욱 궁핍하게 만듭니다.
이러한 악순환을 끊어낼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요?
전 세계 인구의 2%밖에 안 되지만 전 세계 경제의 20%이상을 가지고 있다는 유대인들은 낭비를 죄로 여기고 절약이 몸에 배어 있습니다. 부유하다고해서 기분이 좋다고 해서 과하게 행동하지 않으며 심지어 음식을 먹더라도 과식하지 않습니다. 유대인들은 유대인은 자녀들에게 “일생에 한번 맛있는 요리를 실컷 먹고 다른 날에는 굶는 것보다는 평생 양파만 먹고 사는 게 더 낫다”라고 가르칩니다.
우리나라도 ‘분수에 맞게 살아라’는 말을 합니다. 그러나 이 말은 부유해 지면 더 많은 돈을 쓸 수 있다는 말로도 들립니다.
우리나라와 유대인의 경제 교육이 비슷한 것 같지만, 재물을 보는 기준은 완전히 다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어떤 방법이든지 자신이 가진 재물은 다 자신의 소유라고 생각하지만 유대인들은 자신이 가진 모든 재물은 하나님의 소유로여깁니다. 자신은 그저 하나님의 소유를 관리하는 청지기일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함부로 낭비하지 않습니다.
자녀에게 기술을 가르치지 않는 것은 강도로 키우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경고합니다. 그래서 일확천금을 노리고 도박을 하지도 않습니다.왜냐하면 유대인들은 돈보다는 명예를 중요하게 생각하고 이 명예는 하나님 안에서 누릴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재물의 우선순위는 하나님과 명예보다 앞설 수 없는 것입니다.
현재를 투자하여 미래를 보장받는 유대인의 경제관은 하나님 나라를 예비하는 성도들에게도 많은 메시지를 주고 있습니다.
바로 여기서 우리사회가 가지고 있는 문제들에 대한 몇 가지 해답을찾을 수 있습니다.
빈부의 격차가 심해져서 복음을 받아드릴 마음의 여유조차 없는 이 세대의 문제들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요?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는 것보다 이 땅에서 더 많은 재물을 모으고누리기를 원하는 완악한 심령들을 하나님은 어떻게 평가하실까요?
이것을 설명하기 위해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이해하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기로 결단하는 은혜가 저와 여러분에게함께 하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오늘 본문은 부자와 거지라는 소제목으로 널리 알려진 말씀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예수님이 말씀하시고자하시는 본래 의도가 아닌 다른 말씀으로 이해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심지어는 동화책처럼 가난한 자들을 선대하라는 교훈을 주는 말씀으로 이해하기도 합니다.
오늘 본문은 바로 앞 문단과 연계하여 살펴보아야 오해의 소지를 해결 할 수 있습니다.
앞 문단에 위치한 14-15까지 보면,
14 바리새인들은 돈을 좋아하는 자들이라 이 모든 것을 듣고 비웃거늘
15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사람 앞에서 스스로 옳다 하는 자들이나 너희 마음을 하나님께서 아시나니 사람 중에 높임을 받는 그것은 하나님 앞에 미움을 받는 것이니라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통해서 두 가지를 알 수 있습니다.
하나는 바리새인들이 하나님 보다 돈을 더 좋아한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하나님께 인정받는 것보다 사람들에게 높임을 받는 것을 좋아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6:5에서도,
그들은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느니라 라고 바리새인들을 평가하셨습니다.
율법에 목을 매고 살지만, 율법을 주신 하나님은 거부하는 바리새인들을 향하여 예수님께서 부자와 거지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부자와 거지 비유에서 우리가 집중해야 할 부분
첫 번째는 부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기회를 놓쳤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19절에 보면,
한 부자가 있어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날마다 호화롭게 즐기더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당시 자색 옷은 왕들이 입는 옷입니다.부자는 자색 옷과 고운 베웃을입고 호화로운 생활을 하였습니다. 이 부자는 경제적으로 상위 1%에 해당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당시 부자는 하나님의 복을 받은 사람이라고생각하였습니다. 따라서 상위 1%에 해당하는 재물을 주셨다는 것은 그만큼 책임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부자는 하나님의 뜻을 알지못했습니다. 그 재물을 주신 하나님의 의도를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지 않는 부자는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는 삶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거지 나사로는 어떤 삶을 살았습니까?
20-21절 말씀을 다시 보겠습니다.
20 그런데 나사로라 이름하는 한 거지가 헌데 투성이로 그의 대문 앞에 버려진 채
21 그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불리려 하매 심지어 개들이 와서 그 헌데를 핥더라
나사로는 부자의 집 대문 앞에 버려진 채 버려지는 음식으로 배를 채우려 했습니다.
영양이 부족하여 피부가 짓무르고 고름이 흘러 나왔습니다. 그러나 그를 돌보아 주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극심한 배고픔과 질병으로 고통 받고 있었지만 아무런 도움도 받지 못하는데 개들까지 달려들어서 나사로의 피부의 상처를 핥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자신에게 재물을 주신 이유를 알지 못한 부자는 가장 가까이에 있는 이웃인 나사로를 돌보지 않고 죽도록 방치하였습니다. 결국 거지도 부자도 죽어 장사되었습니다.
그런데 죽음 이후의 상황은 완전히 역전되었습니다.
부자는 음부로 가서 불꽃 가운데서 신음하며 고통당하고 있는데 거지 나사로는 아브라함의 품으로 들어간 것입니다.
부자는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재물을 허락하신 것은 자신의 호화로운삶을 위함이 아니라 이웃을 위해 사용해야 함을 몰랐습니다. 하나님의뜻을 모르고 말씀을 거역하는 삶을 살면서도 자신이 옳다고 생각했던부자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기회를 놓치고 말았습니다.
부자와 거지 비유에서 우리가 집중해서 살펴보아야 할 부분
두 번째는 부자는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지도 않았으며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였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고 율법을 주셨지만 그는 이 율법도 지키지 않았습니다.
부자의 이러한 행동은 바리새인들의 언행을 비유하는 것으로 오늘 본문 바로 앞 문단 16-18절에서 그 이유를 찾아 볼 수 있습니다.
16 율법과 선지자는 요한의 때까지요 그 후부터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전파되어 사람마다 그리로 침입하느니라
17 그러나 율법의 한 획이 떨어짐보다 천지가 없어짐이 쉬우리라
18 무릇 자기 아내를 버리고 다른 데 장가드는 자도 간음함이요 무릇 버림당한 여자에게 장가드는 자도 간음함이니라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이 율법을 철저히 지키는 사람들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보시기에 그들은 율법을 이용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16절과 17절은 서로 상반된 말씀처럼 보입니다.
16절은 율법의 시대가 끝났다는 뉘앙스이지만 17절은 반대로 율법이 절대로 사라지지 않는다는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뜬금없이 18절에 간음에 대한 율법을 언급하십니다.
바리새인들은 율법을 잘 알기 때문에 율법을 이용하여 자신들의 행동을합리화 하였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의 아내를 버리는 일에 율법을이용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율법에 따라 아내에게 이혼증서를 써주고아내를 버리고도 자신이 옳다고 생각했습니다. 이혼증서를 받고 이혼당한 아내는 사회적으로 버림받을 수밖에 없는 처지였습니다.
절대적인 사회적 약자인 것입니다.
율법을 준수한다고 하면서 사회적 약자들을 만들어 내고, 아내를 버리는 바리새인들은 영적으로 간음을 저지르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율법을 준수한다고 하지만 오히려 율법을 이용하여 불법을 저지르며 부를 축척하는데 온 마음을 쏟았습니다. 이렇게 재물은 그들에게 우상이되었습니다.
부자와 거지 비유에서 우리가 집중해서 살펴야 할 부분
세 번째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기회는 기한이 있고 마감시간이 지나면 다시 주어지지 않는 다는 것입니다.
나사로를 보내어 자신의 혀에 물을 묻혀달라는 요청을 거부당한 부자는 아브라함을 향하여 이렇게 간청합니다.
27 이르되 그러면 아버지여 구하노니 나사로를 내 아버지의 집에 보내소서
28 내 형제 다섯이 있으니 그들에게 증언하게 하여 그들로 이 고통 받는 곳에 오지 않게 하소서
이에 대한 아브라함의 대답은
아브라함이 이르되 그들에게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으니 그들에게 들을지니라 였습니다.
거듭된 부자의 간청에도 아브라함은 단호합니다.
‘모세와 선지자들’이라는 말씀은 율법을 지칭하는 단어입니다.
따라서 바리새인들이 그토록 좋아하는 율법을 통해서 충분히 하나님의뜻을 이해할 수 있고,구원을 받는 길을 분별하여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 올 수 있다는 것입니다.예수님께서 공생애 동안 인용하신 모든 성경 말씀이‘모세와 선지자들’을 통해 주신 말씀이었습니다.
성경은 그리스도의 오심에 대해 증거하고있으며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신 후로 성경이 예언한대로 메시야만이 할 수 있는 기적들을 보여 줌으로서 자신이 그리스도이심을 충분히 보여 주셨습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아무리 큰 기적을 보여 주더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고 여전히 표적을 요구했습니다.
이미 예수님께서 그들 앞에 수많은 기적을 보여주셨지만 여전히 그들의 마음이 완악함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거지 나사로는 무슨 이유로 아브라함의 품에 안길 수 있었을까요?
나사로가 아브라함의 품에 안기기 위해서 한 일은 없습니다.
그는 자신의 구원을 위해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것이 없었습니다.
나사로는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어서 누군가의 도움이 없이는 생존이 불가능한 상태였습니다.
이러한 상태를 영적인 상태로 전환하여 생각해본다면, 나사로는심령이 가난한 자였습니다(마5:8).
내가 나를 구원 할 수 없음을 인정하고 하나님만을 바라보는 사람입니다.
에베소서 2:8에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명확히 말씀하십니다.
나사로는 영적으로 너무나 가난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선물로 받았습니다.
나사로는 더 이상 가난하지 않습니다. 나사로가 이를 위해 한 일은 아무것도 없고 그저 아브라함의 품에 안긴 것뿐입니다.
나사로는 영적으로 부자입니다. 그래서 은혜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말씀은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이라 하십니까?
나사로처럼 영적으로 가난한 자들에게 손을 내밀어 그들을 부요케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첫 번째는 아직은 구원의 문이 열려 있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이 구원의 문이 영원토록 열려 있는 것이 아니라 제한시간이 있다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죽음을 맞이합니다. 죽은 후에는 구원의 기회를 잡을 수 없습니다. 기회가 있을 때 구원의 선물을 받아야 합니다.
두 번째, 우리는 영적으로 부자가 되었습니다.
우리가 영적으로 부요케 된 이유를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받은 것을 받기만 하면, 우리는 사해와 같이 죽음의 바다가 됩니다. 갈릴리 호수처럼 받은 것을 흘려보내야 합니다.
육신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주신 재물을 움켜쥐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재물을 이용하여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고 잃어버린 영혼을 구원하는 일에 선용되어야 합니다.
우리에게 주신 영육간의 모든 은혜를 청지기적인 사명감을 가지고 나누어야 합니다.
세 번째, 우리의 기준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야 합니다.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의 논리로 무장하여 율법을 이용하고 그것이 잘못되었다고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논리를 책망하시는 예수님을 비웃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지혜를 허락하시고 율법을 가르치도록 은혜를 부어주셨는데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기 보다는 그것을 이용하여 자신의 배를 불리는 일에 급급했습니다.
결국 하나님을 이용하여 자신의 뜻을 성취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성도는 내 뜻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사람들입니다.
성도들이 그리스도를 주라 부르는 것은 내 주인이 그리스도이심을 고백하고 선포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정말로 그리스도가 내 주인 된 삶을 살아야 합니다. 더 이상 내가 주인 된 삶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주님이 주인 된 삶의 특징은 온전히 주님을 의지한다는 것입니다.
젖먹이 어린아이가 어머니의 손길에 의지하듯이 성도들은 하나님의 손길에 의지하여야 합니다.
믿음은 이렇게 주님을 신뢰하고 주님을 의지하는 자세를 의미합니다.
우리는 간혹 강한 믿음, 더 좋은 믿음을 주세요! 라고 기도합니다.
그러나 더 강한 믿음은 없습니다.
주님을 의지하는 일에 더 강하고 약하고는 의미가 없습니다.
오히려 온전히 의지하는 가? 의심 하는가?의 차이만 있을 뿐입니다.
99%의지한다하더라도 1%의 의심이 있다면, 온전하게 의지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청지기처럼 한정된 시간이 주어져 있습니다.
또한 주님은 우리 각 사람에게 충분한 재물과 재능을 주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시간과 건강과 재물 등의 자원을 헛되이 사용하지 않고 한 영혼 구원하는 일에 제대로 사용하여야 합니다. 우리에게 주신 모든 기회와 재물과 생명까지도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위해 사용하지 않는다면, 부자와 다를 바 없는 평가를 받게될 것입니다.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은 주님의 소유임을 각성해야 합니다.
내가 주님의 소유된 백성임으로 내가 가진 것은 모두 주님의 소유가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내가 가진 것을 낭비하거나 함부로 사용하지 않고 잘 관리해야 합니다.
가장 좋은 일에 선용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실 일에 사용되어야 합니다.
그 일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일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계명을 압축하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정말 이웃을 사랑한다면 이웃이 죽음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 것을 두고 볼 수는 없습니다.
며칠 전 대전 현대 아울렛에서 화재가 발생했을 때 주위의 직원들을대피시키고 중태에 빠진 분이 있습니다. 지금은 건양대 병원 중환자실에서 사경을 헤메고 있습니다. 중환자실 앞을 지키며 아들이 깨어나기만을 기도하는 그의 노모는 평상시부터 아들의 의협심이 남달랐다고 말하였습니다. 우리 사회에는 이분 말고도 다른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 자신의 생명을 초개와 같이 내던지는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심지어 그분들 중에는 교회에 다니지 않는 분도 계십니다.
불신자도 타인을 위해 자신을 희생할 줄 아는데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성도들이 다른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는 것을 보고만 있어야 하겠습니까?
우리가 구원받기 위해서 한 일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잃어버린 영혼들이 구원을 받도록 할 수 있는 일들은 있습니다. 그것이 우리의 사명입니다.
마음이 완악하여 하나님의 복음을 받아드리지 못하는 형제자매들이 있다면 포기하지 않고 기도하는 가운데 끝까지 구원의 손길을 내밀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을 선용하여 한 생명을 살리는 일에 사용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며 그것이 생명을 위탁받은 청지기로서 우리가 행하여야 할 사명입니다.
주님 주신 모든 것을 이용하여 사명을 충실히 감당함으로서 마지막 하나님 앞에 설 때에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향하여 착하고 충성된 청지기였다고 인정해 주실 수 있도록남은 한 주간도 믿음으로나아가는 저와 여러분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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