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7권 장흥도호부 長興都護府
동쪽은 보성군(寶城郡) 경계까지 48리, 서쪽은 강진현(康津縣) 경계까지 12리, 북쪽은 나주(羅州) 경계까지 50리,
능성현(綾城縣) 경계까지 40리, 남쪽은 바다까지 15리이고, 서울과의 거리는 8백 86리다.
건치연혁 본래 백제의 오차현(烏次縣)이었는데,
신라 때에 오아(烏兒)로 고쳐 보성군(寶城郡)에 딸린 현이 되었다.
고려 때에 정안(定安)으로 고쳐 영암군(靈巖郡)에 예속시켰고, 인종(仁宗) 때에 공예태후(恭睿太后 인종왕비)
임씨(任氏)의 고향이라 하여 지금의 이름으로 고쳐 부(府)로 승격시켰다.
원종(元宗) 6년에 회주(懷州)로 고쳐 목(牧)으로 올렸으며, 충선왕(忠宣王) 2년에 다시 장흥부(長興府)로 하였다.
후에 왜구로 말미암아 임시로 내지(內地)에 옮겼다가 본조 태조 원년에 수령형(遂寧縣)의 중령산(中寧山)에 성을
쌓아 다스리는 곳으로 하였다.
태종 13년에 규례에 따라 도호부로 하였고, 이듬해 성이 좁다하여 도로 수령현의 옛 터로 다스리는 곳을 옮겼으며,
세조 때에 비로소 진(鎭)을 설치하였다.
진관 군(郡) 1 : 진도(珍島). 현 2 : 강진(康津)ㆍ해남(海南).
관원 부사ㆍ교수 : 각 1인.
군명 오차(烏次)ㆍ오아(烏兒)ㆍ정안(定安)ㆍ정주(定州)ㆍ관산(冠山)ㆍ회주(懷州).
성씨본부 임(任)ㆍ조(曺)ㆍ혜(嵇)ㆍ오(吳)ㆍ정(丁), 이(李) : 덕은(德恩)ㆍ송(宋) : 염주(鹽州)ㆍ최(崔) : 탐진(耽津)ㆍ
화순(和順)ㆍ고(高)ㆍ박(朴)ㆍ승(乘) : 모두 속. 회령 마(馬)ㆍ형(邢)ㆍ이(李) : 계(季)라고도 썼다. 주(周)ㆍ성(成).
백(白) : 직산(稷山). 수령(遂寧) 위(魏)ㆍ박(朴)ㆍ조(曺)ㆍ함(咸). 장택(長澤) 임(林)ㆍ고(高)ㆍ윤(尹)ㆍ오(吳).
선(宣) : 보성(寶城). 안양(安壤) 박(朴)ㆍ백(白). 어산(語山) 임(任). 유치(有恥) 표(表). 정화(丁火) 신(申).
풍속 옛날에 낙토(樂土)라 일컬었고, 백성은 순박하고 일은 간략하다 : 모두 이색(李穡)의 기문.
형승 땅이 큰 바다에 임하였다 : 임종선(任從善)의 기문. 삼면이 넓고 아득한 바다이다 : 최경지(崔敬止)의 시에,
"아득히 넓은 바다로 삼면이 물인데, 푸르고 두터운 땅에는 얼마나 산이 많은고." 하였다.
산천 수인산(修因山) : 부의 북쪽 10리에 있는 진산이다. 위에 돌성이 있다. 자세한 것은 강진(康津)의 고적 아래
에 보인다.
중령산(中寧山) : 부의 동쪽 5리에 있다. 장원봉(狀元峯) : 읍성(邑城)의 서쪽에 있다.
억불산(億佛山) : 부의 동쪽 7리에 있다.
천관산(天冠山) : 부의 남쪽 52리에 있다. 예전에는 천풍(天風)이라 불렀고, 혹은 지제(支提)라고도 하였는데,
몹시 높고 험하여 가끔 흰 연기와 같은 이상한 기운이 서린다.
사자산(獅子山) : 부의 동쪽 9리에 있다. 부암(婦巖) : 혹은 망부석이라도 일컫는데, 억불산 산허리에 있다.
가지산(迦智山) : 부의 북쪽 20리에 있다. 용두산(龍頭山) : 부의 북쪽 20리에 있다.
착두산(錯頭山) : 부의 동쪽 10리에 있다. 웅점(熊岾) : 착두산 동쪽 5리에 있다.
작천(鵲川) : 영암군(靈巖郡) 월출산(月出山)에서 나와 남쪽으로 흘러, 강진현의 북내상(北內廂) 서남쪽을 지나
부의 남쪽 6리에 이르러 수녕천과 합쳐 강진의 구십포(九十浦)로 들어 간다.
예양강(汭陽江) : 부의 동쪽 성문 밖에 있다. 바다 : 부의 동남쪽 16리에 있다.
수령천(遂寧川) : 예양강(汭陽江)이라고도 하는데, 가지산(迦智山)에서 나와 부의 북쪽 2리를 지나 돌아 동쪽
으로 흐르고, 또한 서남쪽으로 흘러 성암(省巖)에 이르러 강진현의 구십포와 합하여 바다로 흘러 들어간다.
죽포(竹浦)ㆍ관음방포(觀音方浦)ㆍ돈도두포(豚道頭浦) : 모두 옛 장흥에 있다.
천포(泉浦) : 부의 동쪽 40리에 있는데, 어량이 있다.
금당도(金堂島) : 둘레가 24리이다. 동도(童島) : 둘레가 2리이다.
득량도(得良島) : 둘레가 10리이다. 이상은 모두 부의 동쪽 바다 가운데에 있다.
횡간도(橫看島)ㆍ벌라도(伐羅島) : 둘레가 60리. 산이도(山伊島) : 둘레가 90리이다.
소랑도(小狼島) : 둘레가 1리이다. 대랑도(大狼島) : 둘레가 6리이다.
대화도(大花島) : 둘레가 42보이다. 대저도(大猪島) : 둘레가 3리이다.
우도(牛島) : 둘레가 4리이다. 화도(花島) : 둘레가 12리이다.
내덕도(來德島) : 둘레가 30이리고, 목장이 있다. 이상은 모두 부의 남쪽 바다 가운데에 있다.
토산 생강ㆍ옻ㆍ유자ㆍ비자ㆍ치자ㆍ석류ㆍ벌꿀ㆍ낙지ㆍ농어ㆍ물개ㆍ숭어ㆍ전복ㆍ굴ㆍ오징어ㆍ표고ㆍ
송이버섯ㆍ맛[甘蛤]ㆍ소금ㆍ우뭇가사리ㆍ참가사리ㆍ은어ㆍ홍합ㆍ미역ㆍ김ㆍ감태ㆍ매산ㆍ황각(黃角)ㆍ
오매(烏梅)ㆍ대화살(竹箭) :
부의 동쪽 정화리(丁火里) 및 부 안의 남산(南山)에서 나온다.
성곽 장녕성(長寧城) : 곧 읍성이다. 돌로 쌓았으며, 둘레가 9백 4자, 높이가 8자이며, 안에 샘이 17개, 못이 3개
가 있다. 장흥의 장(長)과 수녕의 녕(寧)의 두 글자를 따서 성의 이름을 지은 것이다. 하연(河演)의 기문에 있다.
회령포성(會寧浦城) : 돌로 쌓았으며, 둘레가 1천 9백 60자, 높이가 10자이고, 안에 샘이 1개가 있다.
관방 회령포영(會寧浦營) : 부의 남쪽 72리에 있다.
○ 수군만호(水軍萬戶) 1명.
봉수 억불산 봉수 : 동쪽으로 전일현(全日峴)에 응하고, 남쪽으로 천관산(天冠山)에 응하며, 북쪽으로 강진현의
수인산(修因山)에 응한다.
전일현(全日峴) 봉수 : 부의 동쪽 36리에 있다. 동쪽으로 보성군 정흥사(正興寺)에 응하고, 남쪽으로 천관산에
응하며, 서쪽으로 억불산에 응한다. 천관산 봉수 : 동쪽으로 전일현에 응하고, 서쪽으로 강진현의 남원포(南垣浦)
에 응하며, 북쪽으로 억불산에 응한다.
누정 청화루(淸和樓) : 객관(客館) 북쪽에 있다.
○ 임종선(任從善)의 기문에, "이 부는 처음에 정안현(定安縣)으로 천관산 아래에 있었는데,
지금 고읍(古邑)이라는 것이 곧 그것이다.
이 현 사람 중서령정안공(中署令定安公) 임원후(任元厚)의 딸이 인종(仁宗)의 왕비가 되어 아들 셋(의종(毅宗)ㆍ
명종(明宗)ㆍ신종(神宗))을 낳았으므로 승격시켜 장흥부(長興府)로 하였다.
땅이 큰 바닷가에 있으므로 자주 왜구의 해를 입어 임인년에 수령현(遂寧縣)으로 격이 내려졌는데 그것이 곧
지금의 부(府)이다. 그런데 기미년에 영일(迎日)의 정효완(鄭孝完)이 이곳 원이 되어 황폐하고 퇴락한 것을
수리하면서 객관 동쪽에 누각을 세웠는데, 공사가 끝나기 전에 경질되어 가고 동래(東萊)의 정여(鄭餘)가 교대
로 와서 이내 완성시켰다……." 하였다.
○ 허종(許琮)의 시에, "차가운 하늘에 기러기 날음을 객이 먼저 아니, 바로 시내와 산에 해가 저물려 하는
때로구나. 기쁘게 각 머리를 향하여 좋은 달을 맞이하니, 티끌 묻은 얼굴이 맑은 못에 비침을 부끄러워 하노라."
하였다.
○ 성임(成任)의 시에, "산은 지는 해를 머금고 항상 난간을 마주하고, 수풀은 흐르는 샘을 보내어 가늘게
못으로 들어가네. 고국을 떠난 한 해에 집은 먼 데 있고, 긴 하늘 만리에 새도 더디 돌아오네." 하였다.
○ 김영유(金永濡)의 시에, "물가의 푸른 숲은 숨겼다 비쳤다 하고, 성을 둘러 있는 긴 대는 푸르게 우거졌네.
앞마을엔 아득히 연무가 비끼었고, 동녘 재는 높이 솟아 해 뜨기가 더디구나." 하였다.
동정(東亭) : 예양강 동쪽 언덕에 있다. 부사 변포(卞袍)가 세웠다.
학교 향교 : 부의 남쪽 3리에 있다.
역원 벽사역(碧沙驛) : 부의 동쪽 5리에 있다. 본도에 예속된 역은 다음 9곳이다. 가신(可申)ㆍ파청(波靑)ㆍ
양강(楊江)ㆍ낙승(落昇)ㆍ진원(鎭原)ㆍ통로(通路)ㆍ녹산(綠山)ㆍ별진(別珍)ㆍ남리(南利).
○ 승(丞) 1명.
○ 이색의 시에, "바다는 벽사역에 가깝고 하늘은 황보성(皇甫城)에 열렸도다.
《시경》의 홍안(鴻鴈)편을 노래하니 길이길이 편안히 살게 되었구나." 하였다.
신증 지금 임금 15년에 승을 없애고 찰방을 두었다.
만수원(滿水院) : 부의 동쪽 25리에 있다.
장릉원(長綾院) : 부의 동쪽 60리에 있다. 서덕원(西德院) : 부의 남쪽 13리에 있다.
비자지원(榧子枝院) : 부의 북쪽 45리에 있다. 동덕원(東德院) : 부의 동쪽 40리에 있다.
성암원(省巖院) : 부의 남쪽 10리에 있다.
불우 보림사(寶林寺) : 가지산(迦智山)에 있다. 신라의 사마금영(司馬金穎)이 지은 보조선사(普照禪師)의
탑비명(塔碑銘)이 있다.
천관사(天冠寺) : 천관산에 있다.
○ 중 정명(靜明)의 기문에, "천하를 통한 일기(一氣)가 쏟아져 내와 개천이 되고, 쌓여서는 산을 이루었다.
영(嶺)의 남쪽 바닷가에 임한 땅, 옛 오아현(烏兒縣)의 경계에 천관산이 있으니, 꼬리는 궁벽한 구석에 도사리고,
머리는 큰 바다에 잠겨 일어섰다 엎드렸다 하면서 구불구불 몇 주(州)의 땅에 걸쳐 있으니 그 기운의 쌓임이
크기도 하다. 영통화상(靈通和尙)이 일찍이 꿈을 꾸었는데, 북갑(北岬)이 땅으로부터 솟아올랐다. 가지고 있던
석장(錫杖)이 날아 산꼭대기를 지나 북갑에 이르러 꽂혔다. 꿈에 석장을 세웠던 그 곳에 숲을 베고 절을 지었으
니 지금의 천관사가 바로 이것이다.
절에서 남쪽을 바라보면 바위들이 더욱 기이한데 높이 우뚝 서있는 것이 당암(幢巖)이요, 튀어나와 외로이 걸려
있는 것이 고암(鼓巖)이다. 구부리고 공손히 절하며 명령을 듣고 있는 것같은 것이 측립암(側立巖)이요, 사자가
웅크리고 앉아 울부짖는 것같은 것이 사자암이다. 층층이 쌓아 놓은 것이 마치 잔치 그릇에 음식을 쌓아 놓은 것
같은 것이 상적암(上積巖)과 하적암이요, 하늘을 찌를 듯이 공중에 홀로 솟아 있는 것이 사나암(舍那巖)이며,
우뚝하고 험한 것이 서로 끌어 안아 이즈러진 데를 보충하고 있는 것이 문수 보현암(文殊普賢巖)이다.
천관사에서 남쪽으로 5백 보를 가면 작은 암자가 낭떠러지 아래 외진 곳에 있는데, 그것을 구정암(九精庵)이라
부른다. 그 암자에서 낭떠러지를 따라 백여 보를 올라가면 돌 대(臺)가 펀펀한 것이 있으니 환희대(歡喜臺)라
한다. 그것은 올라가는 사람이 험한 길에 지친 몸을 여기에서 쉬게 되므로 즐겁고 기쁘기 때문이라 한다.
대 앞 초목이 우거진 사이에 희미한 길이 있고, 길을 따라 올라가 산마루에 이르면 사방이 틔어 바라보인다.
구름과 놀이 곱고 초목들이 빛나며, 온 산봉우리는 푸른 소라를 벌려놓은 듯, 시냇물은 흰 비단을 펼쳐놓은 듯한
것이 손바닥 위를 가리키듯 역력히 보인다. 산꼭대기에서 남쪽으로 30리쯤 되는 곳에 선암사(仙嵒寺)가 있는데,
절 북쪽에 바위들이 총총 섰으니, 이곳은 지선(地仙 지상의 신선)이 거처하던 곳으로서, 단애옹(丹崖翁)ㆍ황석공
(黃石公)과 같은 분들이다. 절의 남쪽 별봉(別峯) 꼭대기 미타암(彌陁庵) 북쪽에 신령스러운 돌이 하나 있어,
높고 크기가 거의 10척이나 되는데도 손으로 밀면 움직이니, 아아 놀랍도다. 또 포암(蒲嵒)이 그 서쪽에 있는데,
그 위에 모난 우물이 있어 깊이가 한자쯤 되며, 신령스러운 맑은 샘이 솟아 사시에 마르지 않고, 청포(靑蒲)가
두어 떨기 돌틈에 나있어 마치 무엇이 그것을 보호하고 있는 것같다. 그 외에 이상하고 기괴한 것들이 많은데,
오뚝한 것, 숙인 것, 우묵한 것, 입을 벌린 것, 우뚝 일어선 것, 숨어 엎드린 것, 울툭불툭한 것 등이 천태만상
기괴하고 이상하여 이루 다 적을 수가 없다.
어찌 조물주가 여기에 정수를 모아 놓고 바다를 한계로 하고 넘어서 달아나지 못하게 한 것이 아니겠는가.
아, 옛 사람이 몹시 산수를 사랑하여 나막신으로 올라간 이도 있고, 나귀를 거꾸로 타고 돌아온 사람도 있으며,
혹은 수일 묵으며 돌아가기를 잊어버린 이도 있고, 아주 가서 돌아오지 않은 사람도 있으니 눈으로는 산의 울툭
불툭한 것을 보고 귀로는 잔잔한 물소리를 들어 그 정서를 유쾌하게 하기에 힘쓸 뿐만이 아니라, 이 사이에 뜻을
붙여 인지(仁智)의 즐거움을 따라서 장차 그 본성을 회복하고 그 도(道)에 알맞게 하려는 것이다……." 하였다.
가지사(迦智寺) : 가지산에 있다.
○ 김극기(金克己)의 시에, "구불구불 골짜기를 건너고 숲을 뚫고, 나는 새보다 높은 만첩 봉우리에 올라간다.
범 다니는 길에는 푸른 이끼가 어울렸고, 용당(龍堂)에는 휜주름이 깊었네, 해가 더디니 섬돌에는 온갖 꽃이 웃고,
바람이 빠르니 동산에는 많은 나무들이 읊는다. 밑바닥까지 본래 한 줌 티끌도 없으니, 산 빛은 눈을 씻고 물은
마음을 깨끗이 한다." 하였다.
수정암(修精庵) : 천관산에 있다.
○ 앞사람의 시에, "여윈 몸 절에 앉아 세상 일을 잊어버리고, 몸은 한가하고 경치는 좋기가 그대 같은 이 드물
어라. 종소리 골짜기에 은은하니 미친 고래의 울음이요, 탑 그림자 하늘에 흔들리니 상서로운 기러기 날아 가네.
바람이 옥로(玉爐)를 지나니 작전(鵲篆)이 흔들리고, 비가 금소(金沼)에 뿌리니 물풀이 자라네. 도정(道情)은
오히려 도연명(陶淵明)을 사랑하여, 손을 이끌고 일을 잊은채 도리어 전송하네." 하였다.
옥룡사(玉龍寺) : 천관산에 있다.
○ 앞사람의 시에, "구름 속에 솟은 누각 우뚝하니, 한 떼가 높은 공중에 단청이 빛난다. 해와 달은 험한 산에서
낮게 보이고, 산과 시내는 지령(地靈)을 웅장하게 하네. 비가 오니 용이 바릿대에 내리고, 바람이 이니 범이 경
을 듣네. 온갖 생각이 홀연히 사라져 버리니, 덩그러니 마른나무의 형상이로구나." 하였다.
금장사(金藏寺) : 용두산에 있다.
사묘 사직단 : 부의 서쪽에 있다. 문묘 : 향교에 있다. 성황사 : 부의 남쪽 2리에 있다.
천관산 신사(神祠) : 봄 가을에 본읍에서 제사를 지낸다. 여단 : 부의 북쪽에 있다.
고적 옛 장흥[古長興] : 천관산 남쪽에 있다.
회령폐현(會寧廢縣) : 본디 백제의 마사량현(馬斯良縣)이었는데, 신라 때에 대로(代勞)로 고치고 보성군
(寶城郡)에 딸린 현이 되었고, 고려 때에 지금의 이름으로 고치고 본부에 소속시키었다. 부의 동쪽 32리에 있다.
수령폐현(遂寧廢縣) : 본래 백제의 고마미지현(古馬彌知縣)이었는데, 신라 때에 마읍(馬邑)으로 고치고 보성군
에 딸린 현이 되었으며, 고려 때에 지금의 이름으로 고치고 영암군(靈巖郡)에 소속되었다가 뒤에 와서 본부에
소속되었으며, 지금은 부의 치소가 되었다.
장택폐현(長澤廢縣) : 본디 백제의 계천현(季川縣)이었는데, 신라 때에 계수(季水)로 고치어 보성군에 딸린
현이 되었다가, 고려 때에 지금의 이름으로 고치고, 와서 소속되었다. 부의 동북쪽 41리에 있다.
황보성(皇甫城) : 중녕산(中寧山) 동쪽 5리에 있다. 흙으로 쌓았으며, 터가 남아 있다.
○ 이색의 기문에, "중령에 성을 쌓는 것은 나라의 근본을 굳게 함이다. 장흥부는 큰 바닷가에 임해 있어 초목
에는 상록수가 많으며, 예전에 낙토(樂土)라 일컬었다.
인종 왕비 공예태후(恭睿太后) 임씨(任氏)가 의종(毅宗)ㆍ명종(明宗)ㆍ신종(神宗) 세 왕을 낳았는데,
서로 이어 왕위에 올랐으므로 장흥은 옛적부터 유신(有莘)에 비하여 군에서 목으로 승격하여으니, 특별하게
표창한 것이 지극하였다. 백성은 순박하고 일은 간략하므로 명현(名賢)과 재주 있는 사대부가 공명에 별 뜻이
없고 고요히 수양하고 다스리기를 좋아하는 이가 많이 이 부를 맡게 된다.
지정(至正) 경인년 이후로 왜적들이 침입하여 밤에는 작란하다가 날이 밝으면 몰래 곧 달아나므로 나라에서
가볍게 여기고 걱정거리로 삼지 않았는데 날이 갈수록 심해져서 대낮에도 깊숙히 들어와 열흘 혹은 한 달 동안
이나 멋대로 횡행하여 바다 근처의 민가는 폐허가 되어버렸다. 조정에서 그 때마다 대장을 보내어 쫓아 버렸으
므로 조금 평정되는 했으나, 형세가 궁박해져서 백성을 딴 곳으로 옮기라는 영을 내렸으므로 장흥 백성은
철치현(鐵治縣)으로 옮겨가서 살게 된 것이 기미년이요, 보성군에 합친 것이 기사년이었다.
옛날에 제후가 나라를 잃으면 다른 제후에게 우거(寓居)함은 비록 예가 그러하다 하였으나, 그 사대부로서 늙어
고향에 은퇴한 사람, 관리로서 뜻이 있는 사람, 백성으로서 뜻이 있는 사람들은 모두 분개하여 말하기를,
'우리 부는 은띠[銀帶 정3품~종6품 벼슬] 이상의 관원이 다스리었는데, 이제 지현(支縣)의 관리에게 기탁하게
되었으니 마치 머리가 아래에 있는 것 같고, 혹이나 군더더기같이 되었으니, 어찌 심한 수치가 아니겠는가.'
하였다.
금년 봄 2월에 부사 황보공이 부임하자 부로들이 그 사연을 진정하였더니, 황보공도 옳게 여겨 안렴사 이원
(李原)에게 보고하였다. 이공도 옳다고 하여, 이웃 고을에 통첩을 내리어 장정 3백 50명을 모아서 8월 17일에
공사를 일으켜 9월 27일에 끝마쳤는데, 성의 높이가 15자, 두께가 6자, 둘레가 1천 5백 자이다.
동ㆍ서 두 문이 자물쇠가 이미 굳고, 경비하는 자의 바라치는 소리가 그치지 않았다. 낮에는 동ㆍ서문을 활짝
열어 놓아 나무꾼이나 목동들도 편리하게, 나가서 밭갈이 하고 들어와서 쉬며, 백성들이 두려움 없이 즐겁게
처자를 기르는 기쁨을 누리고, 도망쳐 달아나는 괴로움도 없어졌으니, 사대부 및 아전과 백성들의 소망이 이제
이루어졌다. 봉역을 굳게 지키고 부역을 바치고 여유가 있게 되었으니, 나라의 근본을 굳게 하였다고 쓰는 것
이 어찌 옳지 않으리오." 하였다.
유치향(有恥鄕) : 부의 북쪽 15리에 있다. 안양향(安壤鄕) : 안회(安懷)라고도 썼는데, 부의 동쪽 10리에 있다.
어산향(語山鄕) : 부의 남쪽 15리에 있다. 도내산향(徒內山鄕) : 부의 남쪽 35리에 있다.
아서향(阿西鄕) : 부의 서쪽 41리에 있다. 요랑소(䭜狼所) : 부의 남쪽 35리에 있다.
수태소(守太所) : 부의 동쪽 10리에 있다. 칠백유소(七百乳所) : 부의 동쪽 20리에 있다.
정산소(井山所) : 부의 동쪽 10리에 있다. 운고소(雲膏所) : 부의 북쪽 20리에 있다.
정화소(丁火所) : 부의 동쪽 5리에 있다. 창거소(昌居所) : 부의 북쪽 20리에 있다.
웅점소(熊岾所) : 부의 동쪽 15리에 있다. 가좌소(加佐所) : 부의 북쪽 30리에 있다.
거개소(居開所) : 부의 북쪽 20리에 있다. 가을평소(加乙坪所) : 부의 동쪽 31리에 있다.
향여소(香餘所) : 부의 북쪽 20리에 있다.
명환고려 한문준(韓文俊) : 부사였다. 주열(朱悅) : 고종 때에 지부사였다.
윤해(尹諧) : 지부사 였는데, 동정 전함(東征戰艦)을 감독하여 만들었다.
채홍철(蔡洪哲) : 충렬왕 때 원이 되었는데 은혜로운 정치를 하였다.
김이(金怡) : 부사로 있을 때에 합단(合丹)이 침입하였는데, 나라에서 주ㆍ현에 영을 내려 험한 곳에 의거하여
스스로 지키고, 백성들이 들에 나가 농사짓는 것을 금지하였다. 김이가 안렴사 강취(姜就)에게 말하기를,
"천병(天兵)이 이 조그마한 도적을 제압하는 것은 도마 위의 고기와 같을 뿐인데, 어찌 능히 변방의 고을까지
이를 수 있겠으며, 또한 먹는 것은 백성의 하늘이라 밭갈고 씨뿌리는 데는 때가 있는 것인데, 그 때를 잃어서
는 안 되니, 밭갈이에 나가도록 해 주소서." 하였으나, 강취가 말하기를, "만약 영을 어기었다가 견책을 받으면
어떻게 하겠는가." 하고, 허락하지 아니하였다. 김이가 물러 나와 탄식하기를, "한 농부가 농사를 짓지 않으면
천하가 굶주리는 손해를 받게 될 것이다. 영을 따라 농사를 짓지 않으면 굶어 죽는 사람이 많을 것이지만, 영
을 따르지 않고 농사를 지으면 죄를 받을 사람은 나 하나이다." 하고,
백성들로 하여금 나가서 농사를 짓게 하였다. 도적은 과연 연기(燕岐)까지와 천병에게 멸망되었다.
다른 고을은 모두 수확이 없었으나, 이 부만은 농사가 아주 잘 되었으므로 원근의 백성들이 이 고을을 의뢰하며
살았다. 벼슬이 만기가 되어 불러 들어가 내시(內侍)가 되었다.
황보덕(皇甫德) : 위를 보라.
본조 안종약(安從約) : 부사가 되었다.
신증 강삼(姜參)ㆍ김연수(金延壽) : 정치에 있어 간결하기를 힘썼다.
인물고려 임의(任懿) : 인종 때에 벼슬이 태사 중서령에 이르렀다.
임원후(任元厚) : 인종왕비 공예왕후(恭睿王后)의 아버지이며 벼슬이 태사 중서령에 이르렀으며, 시호는 문충
(文忠)이다. 임규(任奎) : 원후의 아들로 진사시에 뽑히었으며, 벼슬이 문하시랑 평장사에 이르렀다.
외척(外戚)으로서 현명함이 그보다 나은 이가 없었다. 임유(任濡) : 원후의 아들로 벼슬이 태사 문하시랑 동평
장사 태자 태사에 이르렀다. 임경숙(任景肅) : 유(濡)의 아들로 벼슬이 수태사 문하시랑에 이르렀다.
임경겸(任景謙) : 유의 아들로서 벼슬이 추밀원 태사자빈객에 이르렀다.
임익(任翊) : 경겸의 아들로서, 벼슬이 찬성사에 이르렀다.
조정통(曺精通) : 장원급제하여 벼슬이 시중에 이르렀다.
위원개(魏元凱) : 고종 무신년에 정원급제하여 벼슬이 한림에 이르렀다. 뒤에 출가하여 충지(沖止)라 이름하였고,
시호는 원감(圓鑑)이다.
위문개(魏文凱) : 원개의 아우인데 장원급제하여 벼슬이 평양군수에 이르렀다. 원개의 시가 있는데, "황금방의
으뜸을 내가 일찍이 차지하였더니, 영예로운 장원을 그대가 또한 거두었구나.천고에 드문 일, 한 집안에서 두
용두(龍頭 장원(壯元))가 났구나." 하였다.
본조 마천목(馬天牧) : 태종 때에 좌명공신(佐命功臣)이 되어 장흥군(長興君)에 봉하였다. 시호는 충정(忠靖)
이다. 김필(金㻶) : 과거하여 벼슬이 관찰사에 이르렀다.
제영 땅은 다하여 하늘이 바다에 이어 있고 : 이색(李穡)의 시에, "땅은 다하여 하늘이 바다에 이어 있고,
성은 높은데 비가 내리니 산이 어둡네. 옛부터 유락(流落)한 나그네, 몇이나 살아서 돌아왔던고." 하였다.
시냇가 곳곳에 매화가 물에 임하였고 : 이방직(李邦直)의 시에, "시냇가 곳곳에 매화가 물에 임하였고, 산밑의
집집에는 대나무가 집을 에워싸고 있네." 하였다.
대사립 띠집이 맑은 시냇가에 있다 : 앞 사람의 시에, "옛 고을에 사람이 드물어 까마귀 어지럽게 울고,
대사립 띠집이 시냇가에 있구나." 하였다.
조수(潮水)소리는 저물 녘에 성을 흔든다 : 박원형(朴元亨)의 시에,
"산 빛은 맑아 숲에 이어 있고, 조수 소리는 저물 녘에 성을 흔든다." 하였다.
높은 산은 해를 가리어 누각에 더디 오른다 : 이석형(李石亨)의 시에,
"안개 낀 숲은 바람을 끌어 길이 아득하고, 높은 산은 해를 가리어 누각에 더디 오른다." 하였다.
땅은 탁 트이어 하늘이 바다에 떴고 : 앞사람의 시에, "땅은 탁 트이어 하늘이 바다에 떴고,
산은 굽이져 물이 성을 끌어안았다." 하였다.
신증 강은 옛 성을 돈다 : 이계동(李季仝)의 시에, "산은 큰 고을을 둘러싸고, 강물은 옛 성을 돈다.
가을은 높아 날씨도 상쾌한데, 누워서 피어오르는 구름을 바라보네." 하였다.
[비고]
연혁 고종 32년에 군으로 고쳤다. 《문헌비고》
방면 부내(府內)ㆍ부동(府東) : 처음은 1리이고, 끝은 15리이다. 부서(府西) : 처음은 5리이고, 끝은 10리이다.
남면(南面) : 처음은 15리이고, 끝은 40리이다.
안량(安良) : 본래 안양향(安壤鄕) 동쪽으로 처음은 15리이고 끝은 40리이다.
고읍(古邑)ㆍ회령(會寧) : 모두 남쪽으로 처음은 40리이고, 끝은 50리이다.
대흥(大興) : 남쪽으로 처음은 50리이고, 끝은 70리이다.
천포(泉浦) : 동쪽으로 처음은 50리이고, 끝은 70리이다.
부평(富平) : 동쪽으로 처음은 40리이고, 끝은 50리이다.
웅치(熊峙) : 본래 웅점소(熊岾所) 동쪽으로 처음이 15리이고, 끝은 30리이다.
용계(龍溪) : 북쪽으로 처음은 10리이고, 끝은 20리이다. 부산(夫山) : 북쪽으로 처음은 5리이고, 끝은 15리이다.
유치(有恥) : 본래 유치향 북쪽으로 처음은 15리이고, 끝은 60리이다.
장동(長東) : 북동쪽으로 처음은 30리이고, 끝은 40리이다.
장서(長西) : 동북쪽으로 처음은 40리이고, 끝은 50리이다.
내덕도(來德島)ㆍ산일도(山日島)ㆍ평일도(平日島)ㆍ금당도(金塘島) : 위의 네 면(面)은 모두 부(府) 남쪽 바닷가
가운데에 있다.
○ 어산향(語山鄕)은 남쪽으로 15리에 있다. 도내산향(徒內山鄕)은 남쪽으로 35리에 있다.
아서향(阿西鄕)은 서쪽으로 41리에 있다.
요랑소(饒狼所)는 남쪽으로 35리에 있다. 수태소(守太所)는 동쪽으로 10리에 있다.
칠백유소(七百乳所)는 동쪽으로 20리에 있다. 정산소(井山所)는 동쪽으로 20리에 있다.
운고소(雲膏所)는 북쪽으로 20리에 있다. 정화소(丁火所)는 동쪽으로 5리에 있다.
창거소(昌居所)는 북쪽으로 20리에 있다. 가좌소(加佐所)는 북쪽으로 30리에 있다.
거개소(居開所)는 북쪽으로 20리에 있다. 갈평소(乫坪所)는 동쪽으로 30리에 있다.
향여소(香余所)북쪽으로 20리에 있다.
성지 읍성(邑城) : 장녕성(長寧城)이라고도 하며 둘레가 94척이고 동(東)ㆍ남(南)ㆍ북(北)의 3문이 있고 샘이
14개, 못이 3개 있다. 황보성(皇甫城) : 고려 말에 황보덕(皇甫德)이 쌓은 것이며 부 남쪽 30리에 있으며,
둘레는 1천 5백 척이다. 고읍성(古邑城) : 중령산(中寧山)에 있으며 태조 원년에 쌓았다.
창고 창(倉)이 2개 : 읍내에 있다. 사창(社倉) : 장택고현(張澤古縣)에 있다.
해창(海倉) : 동남쪽으로 20리에 있다. 남창.
진도 우도진(牛島津)ㆍ해창진(海倉津).
교량 행원교(杏園橋) : 북쪽으로 5리에 있다. 예양강교(汭陽江橋) : 동쪽으로 2리에 있다.
감천교(甘川橋) : 서쪽으로 5리에 있다.
목장 득량도(得良島)ㆍ내덕도(來德島)ㆍ장내곶(帳內串).
토산 뽕나무ㆍ차.
누정 규양루(葵陽樓) : 부 안에 있다.
사원 연곡서원(淵谷書院) : 숙종 무인년에 건립하고 영종 병오년에 사액하였다.
민정중(閔鼎重) : 양주(楊州) 편에 보인다.
민유중(閔維重) : 자(字)는 지숙(持叔), 호는 둔촌(屯村)이다. 정중(鼎重)의 동생이며,
벼슬은 영돈녕여양부원군(領敦寧驪陽府院君)이다.
○ 강성서원(江城書院) : 숙종 계미년에 건립하고 정종 을사년에 사액하다.
문익점(文益漸) : 단선(丹城)편에 보인다.
○ 충렬사(忠烈祠) : 숙종 계해년에 건립하고 경자년에 사액하였다.
정분(鄭苯) : 자(字)는 자외(子) 호는 애일당(愛日堂)이며, 본관은 진주(晉州)다.
단종 계유년에 사사(賜死)하였다. 벼슬은 우의정이며 시호는 충장(忠壯)이다.
정광로(鄭光露) : 분의 아들이다. 한온(韓蘊) : 자는 군수(君粹)이며 청주(淸州)사람이다. 명종(明宗)을 묘년에
본부사(本府使)로서 싸우다 죽으니, 병조 판서로 추증되었다.
정명세(鄭名世) : 자는 백시(伯時) 호는 독곡(獨谷)이다. 선조 계사년에 해미현감(海美縣監)으로 진주에서
싸우다 죽으니, 도승지로 추증되었다.
진도군 珍島郡
동쪽은 해남현 경계 벽파진(碧波津)까지 27리, 남쪽은 금갑도(金甲島)까지 30리, 서쪽은 고남도포(古南挑浦)
까지 47리, 북쪽은 대사읍곶(大沙邑串)까지 30리이고, 서울과의 거리는 1천 20리이다.
건치연혁 도의 바다 가운데에 있다. 본래 백제의 인진도군(因珍島郡)이었는데 신라 때에 지금의 이름으로
고치고 무안군(務安郡)에 딸린 현이 되었다. 고려 때는 나주(羅州)에 예속시켰고, 뒤에 현령(縣令)을 두었다.
충정왕 2년에 왜구로 말미암아 내지(內地)로 옮겼으며, 본조 태종 9년에 해남현과 합쳐 해진군(海珍郡)으로
하였다가 세종 19년에 다시 갈라서 각각 옛날대로 하였다.
관원 군수ㆍ훈도 : 각 1명
군명 인진도(因珍島)ㆍ옥주(沃州).
성씨본군 임(任)ㆍ김(金)ㆍ이(李)ㆍ한(韓)ㆍ정(鄭). 가흥(嘉興) 조(曺)ㆍ여(呂)ㆍ평(平)ㆍ유(兪)ㆍ정(丁)ㆍ
김(金) : 속(續)이다. 임회(臨淮) 배(裵)ㆍ박(朴). 의신(義新) 임(任)ㆍ김(金)ㆍ이(李)ㆍ나(羅).
풍속 백성들은 고기와 소금에 의존하고 있으며, 그다지 농사에 힘쓰지 않는다 : 이규보(李奎報)ㆍ윤승해(尹承解)
의 묘지(墓誌)에 있다.
땅이 외지고 백성이 순박하다. : 이석형(李石亨)의 시에, "땅이 외지고 백성이 순박하여, 풍속이 다스리기 쉽네."
하였다.
형승 외로운 성이 험지에 걸터앉아 있고, 집집이 벼랑에 의지하여 있다 : 김극기(金克己)의 시에, "외로운 성이
험지에 걸터앉아 산등성이를 삼키고, 집집이 벼랑에 의지하여 물결을 베개하였네." 하였다.
산천 가흥산(嘉興山) : 군의 동쪽 15리에 있다. 군의 치소(治所)가 가흥의 땅이므로 산의 이름을 그렇게 지었다.
점찰산(占察山) : 군의 동쪽 20리에 있다. 여귀산(女貴山) : 군의 남쪽 30리에 있다.
지력산(智力山) : 군의 서쪽 48리에 있다. 둘레가 75리이며 목장이 있다.
부지산(富之山) : 군의 서쪽 10리에 있다. 둘레가 32리이며 목장이 있다.
임성포(臨城浦) : 군의 동쪽 30리에 있다. 염분(鹽盆 바닷물을 끓여서 소금을 만드는 큰 가마)이 있다.
소가포(所可浦) : 군의 서쪽 15리에 있으며 염분이 있다. 대사읍곶(大沙邑串) : 군의 북쪽 41리에 있다.
사월곶(沙月串) : 군의 동쪽 30리에 있다. 요곶(蓼串) : 군의 남쪽 30리에 있다.
가서도(加西島)ㆍ골응도(鶻鷹島)ㆍ미가도(米家島)ㆍ월량도(月良島) : 모두 가흥현 바다 가운데에 있다.
양도(壤島)ㆍ파질마도(巴叱亇島) : 둘레는 30리. 모두 임회현 바다 가운데에 있다.
목지도(目只島)ㆍ가아도(加兒島)ㆍ주마도(走馬島)ㆍ학도(鶴島) : 모두 군의 서쪽 바다 가운데에 있다.
수충도(水衝島) : 군의 북쪽 바다 가운데에 있다.
감배도(甘排島) : 군의 동쪽 바다 가운데에 있다.
금도(金島)ㆍ모도(茅島) : 군의 남쪽 바다 가운데에 있다.
율도(栗島)ㆍ송도(松島)ㆍ마비리도(磨飛里島)ㆍ저도(楮島)ㆍ주질도(注叱島)ㆍ접배도(接杯島)ㆍ
석남도(石南島) : 둘레가 모두 10리. 정도(錚島)ㆍ고도(鼓島) : 모두 작은 섬이다.
노면도(蘆面島) : 둘레 15리. 평도(坪島) : 둘레 30리. 흑길도(黑吉島) : 둘레 15리. 마월도(磨月島) : 둘레 10리.
○ 이상은 모두 군의 서쪽 바다 가운데에 있다.
거추리도(巨趨里島) : 둘레 30리. 매응골도(每應骨島) : 둘레 15리. 대마월도(大磨月島) : 둘레 20리.
죽항도(竹項島) : 둘레 10리. 도거유도(道巨有島) : 둘레 20리.
○ 이상은 모두 군의 남쪽 바다 가운데에 있다.
신증 금골산(金骨山) : 군의 서쪽 20리에 있는데, 위에 굴 셋이 있다.
토산 석류ㆍ유자ㆍ낙지ㆍ왕새우ㆍ굴ㆍ홍합ㆍ황각(黃角)ㆍ김ㆍ해삼ㆍ비자ㆍ숭어ㆍ전복ㆍ감태(甘苔)ㆍ
매산(苺山)ㆍ참가사리ㆍ우뭇가사리ㆍ미역ㆍ표고ㆍ자단향(紫檀香). 대화살[竹箭] : 군의 북쪽 가흥리(加興里)
및 군의 동쪽 용장리(龍藏里)에서 나온다.
성곽 읍성(邑城) : 돌로 쌓았으며, 둘레가 3천 4백 자, 높이가 11자이다. 안에 샘이 아홉, 못이 하나가 있다.
금갑도성(金甲島城) : 돌로 쌓았으며, 둘레가 1천 1백 자이고, 높이가 8자이다. 안에 샘 하나가 있다.
남도포성(南桃浦城) : 돌로 쌓았으며, 둘레가 1천 2백 33자이고, 높이가 8자이다. 안에 샘 하나, 우물 하나가
있다.
관방 금갑도영(金甲島營) : 군의 남쪽 30리에 있다. ○ 수군만호 1명.
남도포영(南桃浦營) : 군의 서쪽 47리에 있다. ○ 수군만호 1명
봉수 점찰산(占察山) 봉수 : 남쪽으로 여귀산(女貴山)에 응하고, 북쪽으로 해남현 황원(黃原)에 응하여,
동쪽으로 같은 현의 관두산(館頭山)에 응한다.
여귀산 봉수 : 북쪽으로 점찰산에 응한다.
누정 망해루(望海樓) : 군 남문의 누각이다. 주변루(籌邊樓) : 객관 남쪽에 있다.
동백정(冬柏亭) : 군의 남쪽 15리에 있는데, 동백나무 수백 주가 있다.
벽파정(碧波亭) : 군의 동쪽 30리 나루터 어귀에 있다.
○ 이숙함(李叔瑊)의 기문에, "군수 박후생(朴厚生)군이 나를 맞이하면서 말하기를, '벽파를 지나오면서 새 누각
이 있는 것을 보았겠지요. 거기에 전에 누각이 있었지만 세월이 오래 되어 퇴락하여 거의 없어지게 되었으므로
왕인(王人)을 영송하고 위로할 곳이 없어 내가 매우 한탄하였었는데, 부임한지 수년 만에 재목을 약간 모으고
놀고 있는 백성들을 불러다가 공사에 종사케하여 한 달이 채 못되어 준공하였는데, 누각이 이루어지자 그대가
마침 왔으니, 나를 위하여 기문을 써서 길이 남기게 해 주시오.' 하였다. 내가 사양하여도 듣지 않았다.
곧 탄식하여 이르기를, '진도는 아득히 떨어져 있는 천연적인 요해지로 넓이 5, 60리 사이에 산이 높고 물이 깊
으며 땅이 또한 기름져 목장에는 말이 있어 비단 같은 말들이 들을 덮고, 귤나무가 있어 구슬같은, 나무가 숲을
이루고 있으니, 이야말로 보물의 광[藏]이요, 재물의 곳집[府]으로서 남쪽 고을의 으뜸이 되어 사신들의 행차가
끊일 사이가 없었다. 그러나 바다 조수가 섬 오랑캐와 접해 있는 요해지이면서 또 풍토가 다른 여러 고을과 같지
아니하여, 백성의 풍속이 완고하고 억세어서 군수되는 사람은 진실로 재능이 문무를 겸비하고 덕과 위엄이 함께
나타난 사람이 아니고서는 어루만지고 통솔함이 방법을 어기어 다스릴 수 없을 것인데, 하물며 재물과 인력을
운용하여 묵은 건물을 새롭게 하여서 손님을 즐겁게 하고 잔치를 베풀어 노는 곳을 만듦에 있어서이겠는가.
지금 박군이 인(印)을 차고 절월(節鉞)을 가졌는데 군중(軍中)의 경보가 없고 아전들이 두려워하고 백성들이 잘
따라서 관내가 평안하게 되었으니, 문무를 겸비하고 덕과 위엄이 나타난 사람이 아니고서야 될 수 있겠으며 또
일을 하는데에 과감하여, 황폐하고 퇴락한 것을 수리하고 새롭게 하여 올라가서 놀기에 대비하니, 그 왕명을 존중
하고 사절을 위로하는데 마음을 극진히 쓰지 않음이 없음을 알 것이니, 어찌 구구히 건물을 짓는데나 놀이터로
꾸미기에만 힘쓴 것이겠는가.' 하였다." 하였다. ○ 김신윤(金莘尹)의 시에, "아득한 마음 그지없는데, 작은 배를
일렁이며 배회하네. 비가 오니 구름이 섬을 가리고, 바람이 아니 물이 하늘에 떠있구나. 안개 먹고 사는 신선 아님
이 부끄럽더니, 견우성(牽牛星) 범하는 신선이 되었다니. 저기는 무슨 나라 어느 고을인고. 섬 밖에서는 파란 연기
피어 오르네." 하였다.
○ 고려 고조기(高兆基)의 시에, "숲 속 길을 다 지나와서, 이내 포구(浦口)에서 뱃머리를 돌리네. 물은 천리 땅을
둘러싸고, 산은 한쪽 하늘을 가로 막았다. 대낮에 외로이 뗏목을 탄 나그네는, 청운에 올랐던 신선이라네.
돌아오니 좋은 경치에 느낌도 많아, 취하여 글을 써서 읊어 강바람에 뿌린다." 하였다.
○ 채보문(蔡寶文)의 시에, "이 정자 누가 푸른 강가에 지었는고, 끝 없는 누런 갈대와 푸른 대숲이로구나.
버들 언덕에서 팽택령(彭澤令)을 반가이 만나고, 도원에서 무릉 사람을 찾누나. 희미한 바다 위의 봉래도에는,
둥그런 해와 달이 물결 사이로 들락날락, 황금 귤 두어 가지 말머리에 늘어졌으니, 지나는 이 뉘라서 원님을
가난하다 하리오." 하였다.
○ 이원(李原)의 시에, "무산(巫山)에는 한 조각 구름이 끼었는데 옛 고을은 고래바다에 임하였네. 그윽한 길은
학이 노는 물가를 둘렀는데, 지난 일 찾아보려 높은 정자에 오르니, 누워 있는 비갈(碑碣)에는 글자도 희미하여
라. 먼 물은 하늘에 닿아 푸르기만 하고, 풀밭은 땅에 가득 푸르도다. 뉘 집의 피리 소리 듣는 이의 애를 끊는고.
옛일 생각하니 눈물만 하염없이 흐르네." 하였다.
학교 향교 : 군의 북쪽 2리에 있다.
원우 녹진원(鹿津院) : 군의 북쪽 30리에 있다.
불우 죽림사(竹林寺)ㆍ봉성암(鳳城菴) : 모두 여귀산에 있다. 사나사(舍那寺) : 지력산에 있다.
사묘 사직단 : 군의 서쪽에 있다. 문묘 : 향교에 있다. 성황사 : 가흥산에 있다. 여단 : 군의 북쪽에 있다.
고적 용장성(龍藏城) : 지금의 치소 동쪽 25리에 있다. 돌로 쌓았으며, 둘레가 3만 8천 7백 41자, 높이가 5자다.
고려 원종 때에 삼별초가 모반하여 강화부(江華府)로부터 들어와 이 섬에 자리잡고 궁전(宮殿)을 크게 지었으나
김방경(金方慶)이 그것을 쳐서 평정하였는데, 이것이 그 옛터이다.
고진도성(古珍島城) : 지금의 치소 동북쪽 15리에 있다. 돌로 쌓았으며, 둘레가 3천 8백 74자, 높이가 8자이고,
안에 샘이 셋이 있다. 지금은 반쯤 허물어졌는데 정통(正統) 정사년에 해남현으로부터 본도 외이리(外耳里)로
돌아왔고, 경신년에 지금의 치소로 옮기었다. 지금까지 외이(外耳)라고 부르던 것이 새 성이다.
의신향(義新鄕) : 군의 동남쪽 15리에 있다. 가흥폐현(嘉興廢縣) : 본도 가운데인 지금의 치소 북쪽 10리 되는
곳에 있다. 본래 백제의 도산현(徒山縣)으로서 원산(猿山)이라고도 하였는데, 신라 때에 뇌산군(牢山郡)으로
고쳤다가, 고려 때에 지금의 이름으로 고치고 이곳에 소속시켰다.
임회폐현(臨淮廢縣) : 본도 가운데인 지금의 치소 남쪽 35리 되는 곳에 있다. 본래 백제의 매구리현(買仇里縣)
이었는데, 신라 때에 첨탐(瞻耽)으로 고치어 뇌산군에 딸린 현이 되었다가, 고려 때에 지금의 이름으로 고치고
이곳에 소속시켰다.
명환고려 윤승해(尹承解) : 현령이 되어 청렴하고 검소한 정치를 하였다. 위엄과 사랑이 아울러 지극하였으며,
처음에 백성들이 농사에 힘쓰지 않았으므로 승해가 권장하고 독려하여 흉년이 들어도 모자라지 않았다.
제영 부서지는 물결은 눈같이 하늘에 가득하네 : 김극기(金克己)의 시에, "넓은 들판에 처음으로 길을 찾아,
문득 맑은 강 배에 오르네. 나즈막한 산은 병풍처럼 땅을 두르고, 부서지는 물결은 눈같이 하늘에 가득하네.
깨끗한 지경은 티끌 세상 피하였고, 맑은 놀이 수선(水仙)을 압도하누나. 흥이 한창인데 붉은 해가 저무니,
외로운 섬에 밥 짓는 연기더라." 하였다.
아득한 방호(方壺)는 몇 개 주(洲)인고 : 앞 사람의 시에, "아득한 방호는 몇 개 주인고, 하늘이 선경(仙境)으로
하여금 맑고 그윽함을 차지하게 하였구나." 하였다.
[비고]
방면 군내(郡內) : 북쪽으로 처음이 10리이고, 끝이 40리이다.
고군내(古郡內) : 동쪽으로 처음이 15리이고, 끝이 30리이다. 읍내(邑內) : 끝이 10리이다.
의신(義新) : 본래는 의신향(義新鄕)이다. 동남쪽으로 처음이 10리이고, 끝이 35리이다.
임회(臨淮) : 남쪽으로 처음이 20리이고, 끝이 40리이다.
목장(牧場) : 서남쪽으로 처음이 30리이고, 끝이 50리이다.
명산(命山) : 충정왕(忠定王) 때에 왜구에게 잃었던 땅인데 교우(僑寓)의 땅은 영암(靈巖)과 나주(羅州)의 경계
를 넘어가 있다. 군과의 거리는 동북쪽으로 수륙(水陸)이 아울러 2백여 리이다.
삼촌(三寸) : 해남의 땅에 넘어가 있으며 군과의 거리는 동쪽으로 수(水)ㆍ육(陸)의 거리가 백여 리 된다.
제도(諸島) : 군의 서남쪽 대양(大洋) 가운데에 흩어져 있다.
봉수권설(權設) 상당곶(上堂串) : 남쪽으로 30리에 있다.
굴라포(屈羅浦) : 남도포진(南桃浦鎭) 남쪽으로 5리이다. 사구미(沙仇未) : 남쪽으로 40리이다.
창고 창(倉)이 둘이고 고(庫)가 셋 : 읍내에 있다. 해창(海倉) : 동쪽으로 20리에 있다.
명산창(命山倉) : 명산령에 있다. 삼촌창(三寸倉) : 삼촌면에 있다.
목장 지력산장(智力山場) : 둘레가 1백 30리이다.
○ 감목관(監牧官)이 한 사람이며 해남현(海南縣) 황원장(黃原場)으로 옮겼다.
속장(屬場) 남도포(南桃浦)ㆍ검찰산(檢察山)ㆍ부지산(富智山).
진도 벽파진(碧波津) : 동쪽으로 30리인데 고려에서는 칭하기를 대진(大津)이라 하고 해남현의 삼지원(三枝院)
을 통하는 큰 길이다. ○ 수진장(守津將)이 한 사람이다. 10리에 우수영(右水營)으로 통한다.
교량 욕실천교(浴實川橋) : 남쪽으로 2리이다. 잠실교(蠶室橋) : 북쪽으로 9리에 있다.
석교(石橋) : 북쪽으로 5리이다.
강진현 康津縣
동쪽은 장흥부 경계까지 24리, 남쪽은 바닷가까지 7리, 서쪽은 해남현 경계까지 25리,
북쪽은 영암군 경계까지 44리고, 서울과의 거리는 9백 2리이다.
건치연혁 도강현(道康縣)은 본래 백제의 도무군(道武郡)이었는데, 신라 때에 양무(陽武)로 고쳤고, 고려 때에
도강현으로 고쳐 영암군에 예속시켰으며, 명종 2년에 감무를 두었다.
탐진현(耽津縣)은 본래 백제의 동음현(冬音縣)이었는데, 신라 때에 탐진으로 고쳐 양무군(陽武郡)에 예속시켰
으며, 고려 때에는 영암군에 예속하였다가 뒤에 장흥부에 예속시켰다.
본조 태종 17년에 병마도절제사의 영(營)을 도강(道康)의 옛 치소(治所)에 옮겨 두 현을 합쳐 지금의 이름으로
고치고, 탐진을 치소로 하였다. 세종 11년에 도강의 송계(松溪)로 옮겼다가 성종 6년에 탐진의 옛 치소로 돌아
왔다.
관원 현감ㆍ훈도 : 각 1명
군명 도강(道康)ㆍ도무(道武)ㆍ양무(陽武)ㆍ금릉(金陵)ㆍ탐진(耽津)ㆍ동음(冬音)ㆍ오산(鷔山).
성씨도강(道康) 김ㆍ조(趙)ㆍ황(黃)ㆍ임(任)ㆍ표(表)ㆍ박ㆍ현(玄)ㆍ허(許). 탐진(耽津) 최(崔)ㆍ조(曺)ㆍ
유(兪)ㆍ안(安)ㆍ정(鄭)ㆍ하(河)ㆍ강(康)ㆍ박(朴) : 모두 다른 곳에서 왔다. 평덕(平德) 안(安)ㆍ박(朴).
대구(大口) 서(徐). 대곡(大谷) 조(曺). 칠양(七陽) 백(白). 영가(永可) 신(申)ㆍ김(金). 수운(水雲) 조(曺)ㆍ
오(吳)ㆍ최(崔).
산천 보은산(寶恩山) : 현의 동쪽 7리에 있는 진산이다.
월출산(月出山) : 현의 북쪽 40리. 영암과의 경계에 있다. 만덕산(萬德山) : 현의 남쪽 15리에 있다.
○ 고려의 중 혜일(慧日)의 시에, "앞 봉우리는 돌 창고[石庫] 같고, 뒷 봉우리는 연꽃 같도다." 하였다.
좌곡산(佐谷山) : 현의 서쪽 65리에 있다. 수인산(修因山) : 도강에 있다. 현에서의 거리가 동쪽으로 30리.
마점(馬岾) : 현의 북쪽 20리에 있다. 바다 : 서남쪽이 모두 바다이다.
송계(松溪) : 송계부곡에 있다. 근원은 월출산에서 나와 고현(古縣)을 지나는데, 곧 작천(鵲川)의 상류이다.
구십포(九十浦) : 현의 남쪽 6리에 있다. 근원은 월출산에서 나와 남쪽으로 흘러 현 서쪽의 물과 합쳐 구십포가
된다. 탐라(耽羅)의 사자가 신라에 조공할 때에 배를 여기에 머물렀으므로 이름을 탐진(耽津)이라 하였다.
○ 고려의 박충좌(朴忠佐)가 일찍기 승평군(昇平郡)에서 놀 때 기생 벽옥(碧玉)과 정분이 있었는데,
안렴사(按廉使)가 되자 벽옥이 이미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이 구십포에 이르러 슬퍼하면서 시를 짓기를, "구십포
에 밀물이 지려는데, 푸른 솔 붉은 나무는 지난해에 지나간 곳이로다. 지금 부질없이 깃발에 싸여 지나가는데,
누각 위에는 이 행차를 바라보는 사람 없도다." 하였다.
남원포(南垣浦) : 현의 남쪽 57리에 있다.
작천(鵲川) : 현의 북쪽 15리, 옛 도강현 땅에 있다. 자세한 것은 장흥부에 적혀 있다.
감물천(甘勿川) : 현의 남쪽 10리에 있다. 마점(馬岾)에서 나와 바다로 들어간다.
완도(莞島) : 현의 남쪽 60리 되는 바다 가운데에 있다. 둘레는 2백 90리이고 자세한 것은 해남현에 있다.
고이도(古爾道) : 둘레가 1백 5리이며 목장이 있다. 조약도(助藥島) : 둘레가 95리이며 목장이 있다.
신지도(新智島) : 둘레가 90리이며 목장이 있다. 가배도(加背島) : 둘레 30리.
소흘도(所訖道) : 둘레 20리. 다야도(多也道)ㆍ동량도(銅梁島) : 모두 둘레가 4리. 부인도(富仁島) : 둘레 5리.
은파도(恩波島) : 둘레 6리. 벽랑도(碧浪島) : 둘레 4리. 죽도(竹島) : 둘레 6리.
재마도(載馬島) : 둘레 15리. 이상 여러 섬은 모두 현의 남쪽 바다 가운데에 있다.
신증 연기산(煙氣山) : 현의 남쪽 20리에 있다. 이발산(離鉢山) : 현의 동쪽 20리에 있다.
주작산(朱雀山) : 현의 서쪽 35리에 있다. 불용산(佛湧山) : 현의 동쪽 30리에 있다. 금천(錦川)ㆍ용하지(龍下池)ㆍ
합지(蛤池) : 모두 현의 동쪽 20리에 있다.
토산 인삼ㆍ자치[紫草]ㆍ석류ㆍ유자ㆍ송이버섯ㆍ표고버섯ㆍ차ㆍ비자ㆍ감태(甘苔)ㆍ김ㆍ매산(苺山)ㆍ
황각(黃角)ㆍ은어ㆍ오징어ㆍ낙지ㆍ조개ㆍ소금ㆍ숭어ㆍ우뭇가사리ㆍ참가사리ㆍ전복ㆍ굴ㆍ홍합ㆍ안식향ㆍ
자연동(自然銅)ㆍ꿀ㆍ미역ㆍ대. 대화살 : 남쪽 바다 가운데 15리에 있는 죽도(竹島)에서 나온다.
신증 방풍(防風)ㆍ해삼ㆍ황어(黃魚).
성곽 읍성 : 돌로 쌓았으며, 둘레가 6천 8백 2자, 높이가 9자인데 안에 우물이 여덟, 못이 하나 있다.
성종 6년에 쌓았다.
관방 병마절도사영(兵馬節度使營) : 옛 도강의 작천위에 있는데 현에서 27리이고, 돌로 쌓은 성인데 둘레가
2천 8백 20자며, 군창(軍倉)이 있다. 마도영(馬度營) : 옛 탐진에 있는데, 현의 남쪽 64리에 있다.
○ 수군만호 한 사람이 있다.
신증 가리포진(加里浦鎭) : 완도에 있다. 돌로 쌓은 성인데, 둘레가 3리이다. 지금 임금 16년에 왜구의 요로
이므로 비로소 진을 설치하였다. 첨사(僉使) 한 사람을 두고 합달량(合達梁)의 수군을 아울러 관장케 한다.
봉수 좌곡산(佐谷山)봉수 : 서쪽으로 영암군의 갈두산(葛頭山)에 응한다.
수인산 봉수 : 동쪽으로 장흥부의 억불산(億佛山)에 응하고, 서쪽으로 병마 절도사영에 응한다.
남원포 봉수 : 동쪽으로 장흥부의 천관산(天冠山)에 응하고 서쪽으로 좌곡산에 응한다.
신증궁실 연희당(燕喜堂) : 병영에 있다.
○ 김종직(金宗直)의 시에, "세류영(細柳營) 안 사압당(射鴨堂)에 장군과 함께 걸상에 기대었네. 하늘 가 인일
(人日 음력 정월 초이렛날)에 안개가 짙었는데, 막 밖에 군대도 강하여라. 다만 강산이 귀한 손에게 바치는 것
사랑스럽고, 풍악소리로 하여금 이별의 시름을 자아내지 말게 하라. 내일 아침에는 또 승평군(昇平郡)으로 향
하리니, 원추리 동백꽃이 석양에 아리따우리." 하였다.
○ 남곤(南袞)의 시에, "장군의 정사(亭舍)가 천간(天慳)을 깨뜨리는 것이 마땅하니, 푸른 산과 맑은 물결이 부앙
(俯仰)하는 사이에 있구나. 이 풍경 거두어다가 기쁜 잔치에 바치니, 이제 부터 초목도 한가롭지 못하리." 하였다.
○ 또 "장군이 구마(毬馬)로 나와서 손님을 맞으니, 우선(羽扇)에 조포(雕袍)가 늦은 봄에 번쩍이누나.
한낮 봄바람에 깃발이 늘어졌고, 장막 앞에는 날쌘 기병이 구름같이 모여 있네." 하였다.
누정 청조루(聽潮樓) : 객관 남쪽에 있다. 현감 오순종(吳舜從)이 세웠다.
신증 진남루(鎭南樓) : 곧 병영의 망보는 망루이다.
학교 향교 : 현의 동쪽 2리에 있다.
역원 진원역(鎭原驛) : 옛 이름은 통곡(通谷)인데 병영의 성 밑에 있다. 통로역(通路驛) : 현의 서쪽 1리에 있다.
월남역(月南驛) : 현의 북쪽 35리에 있는데 누각이 있다. 고야현원(古也峴院) : 현의 북쪽 25리에 있다.
가정원(稼亭院) : 현의 북쪽 30리에 있다 석교원(石橋院) : 현의 서쪽 17리에 있다.
신증 금천원(錦川院) : 현의 동쪽 35리에 있다. 고알원(高謁院) : 현의 북쪽 30리에 있다.
불우 월남사(月南寺) : 월출산 남쪽에 있다. 고려의 중 진각(眞覺)이 처음 세웠으며, 이규보(李奎報)가 지은
비문이 있다. 무위사(無爲寺) : 월출산에 있다. 개운(開運) 3년에 중 도선(道詵)이 처음 세웠는데,
세월이 오래 되어 퇴락하였으므로 이제 중수하였고, 인하여 수륙사(水陸寺)로 하였다.
백련사(白蓮社) : 만덕산에 있다. 신라 때에 세우고 고려의 중 원묘(圓妙)가 중수하였고, 우리 세종 때에 중 행호
(行乎)가 다시 중수하였다. 탑과 비와 세 부도(浮屠)가 있으며, 또 만경루(萬景樓)ㆍ명원루(明遠樓)가 있다.
남쪽은 큰 바다에 임하고 온 골짜기가 모두 소나무ㆍ잣나무이고, 가는 대ㆍ왕대와 동백나무가 어울려 사시를
한결같이 푸른빛이니 참으로 절경이다.
○ 윤회(尹淮)의 기문에 "전라도 강진현 남쪽에 우뚝 솟아 맑고 빼어난 산이 바닷가에 이르러 머물렀으니,
만덕산이라 한다. 산의 남쪽에 부처의 궁전이 있어 높고 시원하게 트이어 바다를 굽어보고 있으니,
백련사가 곧 그것이다. 세상에서 전하기를 신라 때에 처음 세웠고, 고려의 원묘대사(圓妙大師)가 새로 중수하였
는데, 전해 내려와 11대의 무외대사(無畏大師) 때에 이르러서는 항상 법화도량(法華道場)이 되어 동방의 이름난
절로 일컬어졌다. 왜적이 날뛰게 되자 바다를 등진 깊은 지역이 폐허가 되어버렸으며, 절도 그 성쇠를 같이
하였다.
우리 조선에 와서는 거룩하신 임금이 서로 이어 나시니, 바다와 산이 평안하고 풍진(風塵)이 사람을 놀라게 하지
아니하였다. 이에 천태종(天台宗)의 여수 행호(行乎)대사가 이 절에서 놀다가 그 황폐한 것을 보고 석장(錫杖)을
머무르고 길이 탄식하고 발분 서원(誓願)하여, 그의 제자 신심(信諶)등에게 일러 여러 시주들에게 권유하여서,
경술년 가을에 공사를 시작하여 병진년 봄에 준공하였다. 불전과 승방 등을 거의 태평하였던 지난 날의 모습과
같이 복구하였고 불공으로 나라의 축복을 비는 행사가 옛날보다도 더 성하였다.
대사의 속성(俗姓)은 최씨(崔氏)인데, 문헌공(文獻公 최충(崔冲))의 후손이요, 황해도 해주의 사족(士族)이다.
젊은 나이에 출사하여 계행이 높이 뛰어났고, 묘법을 깨달아 불도들이 우러러보았다. 성품이 순수하고 효성이
지극하여 늙은 어머니를 섬김에 있어, 살았을 제 봉양하고 죽어서 장사지내는 데 힘써 정성을 다하였으니,
다른 불도들의 비길 바가 아니었다. 두류산(頭流山 지리산)의 금대(金臺)ㆍ안국(安國)ㆍ천관산(天冠山)의 수정
(修淨) 등은 모두 그가 새로 지은 것인데, 백련(白蓮)이 그 최후의 것이라고 한다." 하였다.
○ 중 혜일(慧日)의 시에, "대낮에 고요히 베개에 의지하고 있으니, 해어진 돗자리와 명아주 평상이로다.
대 바람이 끊임없이 불어오니, 모골이 서늘하구나. 일어나 앉아 남쪽 포구를 바라보니, 석양에 산 그림자가 길다.
잠시 저녁 종이 울리고, 불전에서는 예불하는 향냄새 흘러오네.
○ 또 "머물고 떠나감이 다만 인연에 달렸으니, 도 한 해를 이럭저럭 보내고, 작은 뜰에는 단풍 잎에 비 내리고,
고요한 방에서는 백단향(白檀香)의 연기로다. 평상이 차가와 새벽 공부 게으르고, 창은 밝은데 낮잠이 오네.
어찌 늙은 눈으로, 다시 백련사를 볼 줄 기약하였겠나." 하였다.
○ 앞사람의 만경루 시에, "백련사 경치도 좋고, 만덕산 맑기도 하여라. 문은 소나무 그늘에 고요히 닫혔는데,
객이 와서 풍경 소리 듣는구나. 돛은 바다를 따라서 가고, 새는 꽃 사이에서 지저귀네. 오래 앉아서 돌아갈 길
을 잊으니, 티끌 세상 전혀 생각 없네." 하였다.
○ 성임(成任)의 시에, "찬 바람 찬 눈속에 꽃이 피니, 절 문 동쪽에는 숲이 짙게 붉어라. 사시에 봄빛을 홀로
차지하였으니, 조물주도 여기서는 공평치 못하구나." 하였다.
○ 김뉴(金紐)의 시에, "명원루 높아 눈앞이 새로우니, 멀리 보이는 푸른 바다 티끌 없는 겨울이네. 울 옆의 긴대
바람에 소리내고, 난간 앞의 그윽한 꽃 눈속의 봄이라. 나그네 시 읊어 시편(詩篇)은 흥겨운데,
중은 다과를 내어 사람을 만류하네. 한나절 동안 놀다 돌아오니, 이로부터 구름안개 꿈속에 자주 드네." 하였다.
수인사(修仁寺) : 수인산에 있다. 금곡사(金谷寺) : 보은산에 있다.
백운사(白雲寺)ㆍ수암사(秀巖寺) : 모두 월출산에 있다. 운제사(雲際寺) : 만덕산에 있다.
사묘 사직단 : 현의 서쪽에 있다. 문묘 : 향교에 있다. 성황사 : 현의 동쪽에 있다.
호국신사(護國神祠) : 현의 남쪽 칠장리(七長里)에 있다. 세상에서 말하기를, "모시는 신은 송징(宋徵)이라."
한다. 아래의 사현(射峴)편에 보라. 여단 : 현의 북쪽에 있다.
고적 양자암(養子巖) : 월출산 동쪽에 높이 솟은 한 바위가 있는데, 그 위가 넓고 평평하다. 옛날 왜란 때에 근처
고을 백성들이 처자를 데리고 바위에 사다리를 놓고 올라가 난을 피하여, 모두 죽음을 면하였다. 그러므로 이름
을 양자암이라 하였다. 청해진(淸海鎭) : 완도(莞島) 안에 있으며, 신라 때에 설치하였다. 궁복(弓福)으로 대사
(大使)를 삼았는데, 문성왕(文聖王) 때에 궁복이 모반하여 죽음을 당하고 진은 폐지하였으며,
그곳 사람들은 벽골군(碧骨郡)으로 옮기었다. 고강진(古康津) : 송계(松溪)에 있다.
선산도(仙山島) : 현의 남쪽 바다 가운데에 있다.
○ 고려의 정언 이영(李穎)이 완도에 귀양을 왔는데, 그의 작은 아버지인 중 혜일(慧日)이 따라와서 찾아보고
곧 섬으로 들어가 절을 세우고 살았다. 그 시에 이르기를, "산의 사면이 구름 연기에 싸였는데, 솔문을 깊이 닫고
늙으막에 거처하네. 찬 바람만 처마 끝을 울릴 뿐, 암자 앞에 와서 노니는 나그네 다시 없구나. 일찍 자고 늦게
일어나 한가히 사는 낙이요, 목마르면 마시고 배고프면 먹네. 이미 성글고 게을러 남이 돌아보지 않으니,
수행은 대략 마쳤고 인연은 반이로다." 하였다. ○ 또 "이른 새벽에 한가로이 책상에 의지하니, 귀와 눈이 절로
산들 하구나. 부슬부슬 공중에 내리는 비요, 구름 밖에서 쩡쩡하는 나무꾼의 도끼 소리네. 산색을 보이려고 대
[竹]를 숙이게 하고, 약밭에 물대려고 샘을 멀리 끌고 오네. 좁은 길에 이끼도 낡았는데, 누가 와서 이 적막한
곳을 두들기려나." 하였다.
법화암(法華菴) : 완도 안에 있다. 이 절이 있는 골짜기에
전석계(全石溪)ㆍ천연대(天然臺)ㆍ상왕봉(象王峯)이 있다.
○ 중 혜일(慧日)의 전석계 시에, "온통 돌로된 시내 밑바닥, 맑게 잠긴 물상(物像) 좋기도 하여라. 봄 꽃은 빨간
비단을 씻는 듯, 가을 잎은 단사(丹砂)를 잠가 놓은 듯. 물가는 따뜻하여 고기들이 모여 놀고, 물결은 맑아서
제비가 스쳐간다. 나도 가끔 와서 세수하고 가사(袈裟)의 붉은 그림자 비쳐보네." 하였다.
○ 천연대 시에, "낡은 돌사다리에 이끼가 얼룩지니, 티끌 묻은 발자취 왕래가 끊어졌네. 추켜든 수염을 흔드는
양 소나무는 우쭐하고, 조잘거리는 물은 졸졸 흐르네. 생김새는 세층으로 나뉘었고, 그윽하고 기이함은 만 가지
로다. 자연히 귀와 눈이 맑아지니, 평생의 한가로움을 여기에 붙일까보다." 하였다.
○ 상왕봉 시에, "푸릇푸릇 나무들이 우거졌으니, 구름과 안개는 몇 해나 지냈는고.
달이 뜨니 부처의 백호(白豪 부처의 양미간의 흰털)가 밝고, 탑이 구르니 코끼리 머리가 도는구나. 시냇물은
불경을 외우는 듯, 바위의 꽃은 범연(梵筵)을 꾸몄구나. 아름다운 이름이 스스로 원묘(圓妙)라, 부질없이 전한
다고 이르지 말라." 하였다.
사현(射峴) : 완도에 있다. 전설에 이르기를, "옛날에 섬 사람으로 이름을 송징(宋徵)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무용이 당할 사람이 없고 활을 쏘면 60리 밖에까지 미치고 활시위를 끊으면 피가 나왔다고 하며, 지금도 반석
에 활의 흔적이 남아 있으므로 그 곳의 이름을 사현이라 부른다." 한다.
회선정(會仙亭) : 도강현에 있다. 김극기(金克己)의 시에, "산과 시내는 바로 그림 같고, 환영같은 누대는 귀신
의 솜씨를 빌렸는가. 타는 듯한 붉은 작약 푸른 섬돌을 밝히고, 묶은 듯한 푸른 대나무 붉은 난간을 어둡게
하네. 끊어진 구름은 홀연히 사람을 만류하는 비를 보내고, 키가 큰 나무는 멀리서 나그네에게 바람을 보내네.
이 풍경 누구를 의지하여 흥을 돋우는고, 가정(柯亭)의 기이한 대와 역양의(嶧陽) 오동이네." 하였다.
○ 채보문(蔡寶文)의 시에, "분주히 다니는 나그네 길은 예나 이제나 같고, 근심을 깨뜨리는 데에는 술이 공이
있네. 바람은 물소리를 이끌어 베갯머리에 오고, 달은 꽃 그림자를 옮기어 구슬 난간에 떠오른다. 섬돌 가의
온갖 풀은 봄빛을 다투고, 난간 밖의 쌍솔은 온종일 바람이라. 자리 위의 여러 신선은 모두 덕이 있어,
시를 읊고 노래부를 만하네." 하였다.
안우택(安祐宅) : 옛터가 읍성 남쪽에 있다.
평덕향(平德鄕) : 현의 동쪽 10리에 있다.
운수부곡(雲水部曲) : 현의 동쪽 20리에 있으며, 수운(水雲)이라고도 한다.
대구소(大口所) : 현의 동남쪽 30리에 있다. 대곡소(大谷所) : 현의 동쪽 30리에 있다.
칠양소(七陽所) : 현의 동남쪽 15리에 있다. 산계소(山計所) : 현의 북쪽 20리에 있다.
산심소(山深所) : 현의 서북쪽 35리에 있다. 종옥소(種玉所) : 현의 남쪽 50리에 있다.
구계소(舊溪所) : 현의 남쪽 37리에 있다. 부원소(富元所) : 현의 남쪽 15리에 있다.
영가부곡(永可部曲) : 현의 북쪽 15리에 있다. 송계부곡(松溪部曲) : 현의 북쪽 15리에 있다.
미포부곡(彌浦部曲) : 현의 남쪽 30리에 있다. 좌곡부곡(佐谷部曲) : 현의 서쪽 60리에 있다.
수인산성 : 돌로 쌓았으며 둘레가 3천 7백 56자, 높이가 9자이다. 고려 말에 도강ㆍ탐진ㆍ보성ㆍ장흥ㆍ영암의
백성들이 모두 여기에서 왜구를 피하였다.
명환신라 궁복(弓福) : 《당사(唐史)》에 장보고(張保皐)라 일컬었는데, 일찍이 당나라에 들어가 무령군소장
(武寧軍小將)이 되었으며, 말타기와 창쓰기를 당할 사람이 없었다. 뒤에 나라에 돌아와 왕을 뵙고 말하기를,
"중국 도처에서 우리나라 사람을 노비로 삼고 있으니, 원컨대 청해(淸海 완도)를 평정하여 도적이 우리나라
사람을 서쪽으로 납치하여 가지 못하게 하옵소서." 하였다.
왕과 모든 사람이 그로 하여금 진을 두어 지키게 하였더니, 그 뒤로 부터는 우리나라 사람을 잡아다가 파는
일이 없어졌다.
신무왕(神武王)은 그의 아버지 균정(均貞)이 김명(金明 민애왕(閔哀王))에게 피살되자, 처자와 더불어 궁복에게
가서 의탁하였다.
김명이 왕위를 빼앗자 정년(鄭年)ㆍ염장(閻長)ㆍ장변(張弁)ㆍ낙금(駱金)ㆍ장건영(張建榮)ㆍ이순행(李順行) 등
으로 하여금 군사를 거느리고 신무를 받들어 김명을 쳐서 죽이니, 궁복은 감의군사(感義軍使)가 되어 식읍(食邑)
이천호(二千戶)를 봉하였다. 뒤에 문성왕(文聖王)이 복의 딸을 맞아 둘째 왕비로 삼으려 하였으나, 여러 신하들
이 간하기를, "복은 섬 사람인데 그 딸을 어떻게 왕비로 삼을 수 있겠습니까" 하니, 왕이 그 말을 따랐다.
이에 복이 왕을 원망하여 진을 근거로 하여 배반했으나 염장에게 피살되었다.
정년(鄭年) : 정년이 잠수(潛水)를 잘하여 물속에서 50리를 가도 숨이 막히지 아니하였다. 궁복과 함께 당나라로
들어가 무령소장(武寧小將)이 되었는데, 궁복은 나이로 정년은 재주로 서로 막상막하였다. 궁복이 청해진대사
(淸海鎭大使)가 되자, 정연이 돌아와서 그를 찾았는데, 궁복과 더불어 술을 마시면서 매우 즐거워하였다.
술자리가 파하기도 전에 김명이 왕위를 빼앗었다는 소리를 듣고, 군사 5천 명을 갈라서 정년에게 주며 그의 손
을 잡고 울면서 말하기를, "자네가 아니고서는 이 화란을 평정할 수 없네." 하였다.
정년이 나라로 쳐들어와 김명을 죽이고 뒤에 궁복과 교대하여 청해진을 지키었다.
고려 박원계(朴元桂) : 수령이 되어 은혜로운 정치를 베풀었다.
민상정(閔祥正) : 문인공(文仁公) 지(漬)의 아들이다. 김유(金儒) : 김인경(金仁鏡)이 김태수(金太守)를 회고하는
시에, "감당(甘棠 팥배나무)은 바로 이것이 사람을 생각하는 나무며, 현수(峴首)는 의연히 눈물 흘리는 비석이
로다." 하였다.
인물고려 최사전(崔思全) : 탐진(耽津) 사람. 내의(內醫)가 되어 여러번 승진하여 소부소감(少府少監)에 이르
렀다. 인종 때에 이자겸(李資謙)이 군사를 일으켜 대궐을 침범했을 때, 사전이 건의하기를, "자겸은 오직 척준경
(拓俊京)을 믿고 있으니, 만약에 준경을 얻으면 자겸은 다만 한낱 범부일 뿐입니다." 하였다.
드디어 서로 더불어 계책을 결정하여 자겸을 제거하였다. 공에 의하여 병부상서로 뽑히었고, 벼슬이 개부의동
삼사수태위주국(開府儀同三司守太尉柱國)에 이르렀다. 시호는 장경(莊景)이고, 인종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최열(崔烈) : 사전의 아들이다. 사전이 일찍이 최열의 형제에게 금잔 한 벌씩을 주었는데, 사전이 죽은 뒤에 첩이
그 하나를 훔쳤다. 형 변(弁)이 노하여 채찍으로 치려 했으나 최열이 말하기를, "이 사람은 돌아가신 아버지께서
사랑하던 사람이니, 집안의 재산을 기울여서라도 도와 주어야 할 터인데, 하물며 이 물건쯤을 가지고 그럴 것이
있겠습니까. 제가 받은 것이 아직 남아 있습니다." 하고, 그 형에게 주기를 청하였다. 왕이 그 사실을 듣고 가상히
여겨, "효성이 있고 어진 사람이라 하겠다." 하고, 어필로 이름을 써주기를 효인(孝仁)이라 하였다.
조정(曺精) : 벼슬이 시중(侍中)에 이르렀다. 민간의 전설에 조정이 늙어서 집에 있을 때, 한 머리가 센 늙은이가
날마다 찾아와서 바둑을 두었는데, 그 온 곳을 물었으나 대답하지 않았다. 그 자취를 찾아 보았더니 바다로 들어
갔는데, 그는 곧 용이었다고 한다. 우리 세조 때에 이 현 사람 김극화(金克和)가 밭을 갈다가 큰 그릇을 얻어서
바치었는데, 그것은 조정이 쓰던 그릇이었다. 안우(安祐) : 공민왕 때에 홍건적이 서울을 함락시켰는데, 안우가
이방실(李芳實)ㆍ김득배(金得培)와 함께 쳐서 평정하였으므로 당시 사람들이 세 원수(元帥)라고 일컬었으며,
벼슬이 평장정사(平章政事)에 이르렀으나, 얼마 뒤 김용(金鏞)에게 피살되어, 여론이 그를 아깝게 여겼다.
최표(崔彪) : 원나라 제과(制科)에 급제하여 벼슬이 참지정사에 이르렀다.
본조
안지(安止) : 두 번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이 영중추원사에 이르렀다. 시호는 문정(文靖)이고, 문장으로 이름이
있었다.
조주(趙注) : 장원 급제하여 벼슬이 지사간(知司諫)에 이르렀다. 자세한 것은 나주(羅州) 우거(寓居) 편을 보라.
우거본조 김돈(金墩) : 자세한 것은 안동부(安東府) 인물 편에 있다.
신증효자본조 고수정(高守精) : 어머니가 죽으니, 죽을 먹고 시묘하면서 상을 마쳤다. 제찬을 몸소 장만하여
바치었으며, 남과 이야기하다가 간혹 부모의 이야기가 나오게 되면 소리내어 슬피 울지 않은 적이 없었다.
지금 임금 7년에 정문을 세워 표창하였다.
제영 황폐한 산과 물 : 중 혜일(慧日)의 시에, "황폐한 산과 물, 몇 겹이나 눈앞에 들어오나." 하였다. 몇 곡조
노젓는 소리 쓸쓸한 물가에서 들려 오네 : 앞 사람의 시에, "몇 곡조 노젓는 소리 쓸쓸한 물가에서 들려오네.
때때로 또 다시 누각에 올라 푸른 물을 굽어보노라." 하였다.
산빛은 변함없이 여전한데 : 김극기(金克己)의 시에, "이 누각이 천만 가지 경치인데, 그윽한 절경에 티끌이 깃
들이지 않았네. 산빛은 변함없이 여전한데, 풍경은 언제나 새롭게 바뀌이네. 고운 꽃은 아리따운 기생보다 낫고,
긴 대는 좋은 손님을 대하는 듯하네. 날마다 마음껏 읊조리며 완상하노니, 모든 것이 참으로 사람에게 알맞구나."
하였다.
한 구역의 소나무와 대는 성긴 연기 밖이요 : 김돈(金墩)의 시에, " 한 구역의 소나무와 대는 성긴 연기 밖이요,
십리나 펼쳐 있는 뽕과 삼밭은 가는 비 속이로구나." 하였다.
[비고]
연혁 고종 32년에 군으로 고쳤다. 《문헌비고》
고읍 도강(道康) : 북쪽으로 20리에 있으며, 본래 백제 도무(道武)였는데, 신라 경덕왕 16년에 양무군(陽武郡)
으로 고치고 영현(領縣)인 삼침연(三浸演)ㆍ안고(安固)ㆍ황원(黃原)의 탐진(耽津)은 무주(武州)에 예속시켰다.
고려 태조 23년에 도강(道康)이라 고치고 현종 9년에 영암군(靈岩郡)에 예속시키고,
명종(明宗) 2년에 감무(監務)를 두었다. 본조 태종 17년에 탐진에 합하고 강진(康津)이라 이름하였으며,
병영(兵營)을 본현의 땅에 설치하였다.
○ 읍호를 금릉(金陵)이라 하였다.
방면 현내(縣內) : 끝이 10리이다.
고읍(古邑) : 옛 송계부곡(松溪部曲)인데 북쪽으로 처음이 10리이고, 끝이 30리이다.
고군내(古郡內) : 북쪽으로 처음이 30리이고, 끝이 35리이다.
열수(列樹) : 북쪽으로 처음이 25리이고, 끝이 30리이다. 나주(羅州) : 북쪽으로 처음이 5리이고, 끝이 10리이다.
이음(梨音) : 북쪽으로 처음이 10리이고, 끝이 15리이다. 초곡(草谷) : 북쪽으로 처음이 25리이고, 끝이 35리이다.
오천(梧川) : 북쪽으로 처음이 25리이고, 끝이 40리이다. 지전(知田) : 서쪽으로 처음이 5리이고, 끝이 50리이다.
화구(火口) : 본래 대구소(大口所)인데 남쪽으로 처음이 30리, 끝이 60리이다.
칠양(七陽) : 본래는 칠양소(七陽所)이다. 남쪽으로 처음이 15리이고, 끝이 35리이다.
파지대(波之大) : 서쪽으로 처음이 7리이고, 끝이 30리이다. 보석(寶石) : 서남쪽으로 처음이 15리, 끝이 40리이다.
안주(安住) : 서북쪽으로 처음이 30리, 끝이 45리이다. 백도(白道) : 서남쪽으로 처음이 30리이고, 끝이 80리인데,
탐진(耽津)의 서쪽으로 해서 완도로 들어간다.
군영(軍營) : 남쪽으로 처음이 30리이고, 끝이 90리인데 탐진의 동쪽으로 해서 이곳 조약도(助藥島)에 들어간다.
고금도(古今島) : 완도의 동쪽 장흥(長興) 회령포(會寧浦)의 남해(南海)에 있다.
신지도(薪智島) : 고금도의 남쪽에 있다. 완도(莞島) : 남쪽으로 1백리에 있다.
청산도(靑山島) : 남쪽으로 2백리에 있다. 조약도(助藥島) : 남쪽으로 1백리. 고금도의 동쪽에 있다.
○ 평덕향(平德鄕)은 동쪽으로 10리에 있다. 운수부곡(雲水部谷)은 동쪽으로 20리에 있다. 좌곡부곡(佐谷部谷)은
남쪽으로 60리에 있다. 미포부곡(彌浦部谷)은 남쪽으로 30리에 있다. 영가부곡(永可部谷)은 북쪽으로 15리에
있다. 부원소(富元所)는 남쪽으로 15리에 있다. 구계소(舊溪所)는 남쪽으로 37리에 있다.
종옥소(種玉所)는 남쪽으로 50리에 있다. 산심소(山深所)는 서북쪽으로 35리에 있다.
소계소(小計所)는 북쪽으로 20리에 있다.
성지 읍성(邑城) : 성종(成宗) 6년에 쌓았는데 둘레가 8천 4백 2척이고, 곡성(曲城)이 8개, 성문(城門)이 4개,
우물이 8개, 못이 하나 있다.
수인산성(修因山城) : 동북쪽으로 30리에 있으며 병영(兵營) 동쪽으로 10리이다. 둘레가 3천 7백 5척이고 병영
에서부터 성의 남문에 이르기까지는 매우 좁은 길이 빙 돌아서 문 밖의 성세(城勢)가 핍박하여 두 사람이 함께
설 수 없으며, 북문은 더욱 험절하고 동문은 적을 막을 수 있는 곳으로, 문 밖에 수덕인산세(修德因山勢)가 절벽
져 있다. 서ㆍ남ㆍ북 3면은 천연적으로 험준하다. 동문은 옛성 밖에 별도로 빙둘러 개천을 만들어 쌓았다.
○ 고려 말에 도강(道康)ㆍ탐진(耽津)ㆍ보성(寶城)ㆍ장흥(長興)ㆍ영암(靈巖)의 백성이 모두 이곳에서 왜구의
침범을 피하였다.
영아 본조 태종조(太宗祖) 때에 병마도절제사영을 광주(光州)에 설치하였다가 17년에 영을 도강현(道康縣)
작천(鵲川)의 위에 이주하였다. 다시 선조 32년에 장흥으로 옮겼다가 37년에 다시 구성으로 돌아 왔다.
○ 성의 둘레는 2천 8백 20척이고 성문이 4개, 옹성(甕城)이 12개, 우물이 5개, 못이 2개이며, 진남루(鎭南樓)가
있다.○ 남쪽으로 본현까지의 거리는 27리이다.
관원 전라도 병마절도사(全羅道兵馬節都使)ㆍ중군(中軍) : 우후(虞侯)가 겸한다. 심약(審藥)이 각 한 사람이다.
아영 전영(前營)이 순천(順天), 좌영이 영봉(靈峯), 중영(中營)이 전주(全州), 우영(右營)이 나주(羅州), 후영이
여산(礪山)에 있다.
산성 입암(笠巖)ㆍ장성(長城)ㆍ금성(金城)ㆍ담양(潭陽)ㆍ적상(赤裳)ㆍ무주(茂朱)ㆍ교룡(蛟龍)ㆍ남원(南原)에
있다.
진보 가리포진(加里浦鎭) : 완도(莞島)에 있으며 현과의 거리는 1백 20리이다. 중종 17년에 왜구의 요충지에
진을 처음 설치하여 달양수진(達梁水鎭)에 합하였다.
○ 성의 둘레는 5천 3백 80척이고 곡성(曲城)이 6개이다.○ 수군첨절제사가 한 사람이다.
고금도진(古今島鎭) : 남쪽으로 90리에 있으며 일진(一津)에 넘어 들어가 있다. 선조 31년에 이순신(李舜臣)이
진을 이곳으로 옮기니, 백성들이 진에 모여 농사를 지어 드디어 큰 진이 되었다. 숙종(肅宗) 7년에 진을 설치
하였다.
○ 수군동첨절제사가 한 사람 있다.
마도진(馬島鎭) : 옛 탐진(耽鎭)의 남쪽 50리에 있으며 둘레가 8백 70척이고 곡성(曲城)이 6개 있다.
○ 수군만호(水軍萬戶)가 한 사람이다.
신지도진(新智島鎭) : 남쪽으로 1백리에 있으며 이진(二津)에 넘어 들어가 있다. 숙종 7년에 진을 설치하였다.
○ 수군만호가 한 사람 있다.
○ 청해진(淸海鎭) : 완도에 있다. 당보역간(唐寶歷間)에 당나라 사람이 신라의 변방 백성을 많이 약탈하여 노비
로 삼으니, 흥덕왕(興德王)이 장보고(長保皐)를 대사(大使)로 삼아 만명의 군사를 일으켜 청해(淸海)에서 중국
의 약탈하는 사람을 방어하였다. 문성왕(文聖王) 8년에 장보고가 원수를 갚았으나 왕은 여자를 용납하지 않았다.
마침내 이진을 근거로 하여 반란하니 13년에 진을 파하였다.
청산진(淸山鎭) : 옛날에는 별장을 설치하였다.
창고 창(倉)이 3개 : 읍내에 있다. 남창(南倉).
목장 신지도(薪智島)ㆍ고금도(古今島)ㆍ조약도(助藥島)ㆍ완도(莞島) : 이상 네 곳은 폐지하였다.
○ 단종(端宗) 원년에 계점곶(界岾串)에 토비(土肥)를 주어 풀이 잘 자라게 하여 목장을 만들었다.
목장 둘레는 90리이다.
교량 석교(石橋) : 동쪽으로 10리에 있다. 작천교(鵲川橋) : 북쪽으로 20리 병영 아래에 있다.
배전각홍교(拜箋閣虹橋) : 북쪽으로 30리에 있다.
단유 청해진(淸海鎭) : 신라 사전(祀典)에 이르기를,
"청해진은 조음도(助音島)에 있다."고 중사(中祀)에 실려 있다.
묘전 탄보묘(誕報廟) : 고금도(古今島)에 있으며 선조(宣祖) 정유년에 도독 진린(陳璘)이 건축하였고 중종(中宗)
신축년에 게액(揭額)하였다.
관우(關羽) : 경도(京都) 동묘(東廟)에 보라.
진린(陳璘) : 자는 명작(明爵), 호는 용애(龍崖)며 광동(廣東) 사람이다. 정유년에 수군도독으로서 왜구를 정벌
하였다.
등자룡(鄧子龍) : 풍성(豐城) 사람이며 무술년에 부총장(副摠壯)으로서 왜구를 정벌하다가 남해에서 전사하였
는데 그 때 나이가 70세였다. 이순신(李舜臣) : 아산(牙山) 편에 보라. 이상의 세 사람은 숙종 경인년에 별사(別祠)
에 배향하였다.
해남현 海南縣
동쪽은 강진현 경계까지 19리, 서쪽은 진도군 경계 벽파진(碧波津)까지 53리, 남쪽은 바다까지 66리,
북쪽은 영암군 경계까지 16리이고, 서울과의 거리는 1천 7리이다.
건치연혁 본래 백제의 새금현(塞琴縣)이었는데, 신라 때에 침명(浸溟) -투빈(投濱)이라고도 하였다.- 으로
고치어 양무군(陽武郡)에 딸린 현이 되었다가, 고려 때에 지금의 이름으로 고치어 영암군에 예속시켰다.
본조 태종 9년에 진도현에 합쳐 해진현(海珍縣)으로 되었으며, 12년에 고을의 치소(治所)를 영암에 딸린 현
옥산(玉山) 땅에 옮기었다가 세종 19년에 다시 가르고 현감으로 하였다.
관원 현감ㆍ훈도 : 각 1 명.
군명 새금(塞琴)ㆍ침명(浸溟)ㆍ투빈(投濱)ㆍ해진(海珍).
성씨본현 정(鄭)ㆍ윤(尹)ㆍ차(車)ㆍ김(金)ㆍ전(全)ㆍ갈(葛). 황원(黃原) 황(黃)ㆍ윤(尹). 종(宗) : 송(宋)이라고도
썼다. 갈(葛). 죽산(竹山) 윤(尹)ㆍ박(朴)ㆍ송(宋)ㆍ전(全)ㆍ문(門). 유천(杻川) 전(全). 사라(紗羅) 조(曺)ㆍ송(宋)ㆍ
윤(尹)ㆍ오(吳)ㆍ조(趙). 구량산(仇良山) 최(崔)ㆍ백(白). 진산(珍山) 최(崔)ㆍ김(金). 팔마(八馬) 문(文)ㆍ김(金).
옥천(玉泉) 김(金)ㆍ윤(尹)ㆍ신(愼)ㆍ안(安)ㆍ박(朴).
형승 물이 부상(扶桑)에 닿아 있다 : 정인지(鄭麟趾)의 시에, "물이 부상 만리의 하늘에 닿아 있다." 하였다.
산천 금강산(金剛山) : 현의 동쪽 10리에 있는 진산이다. 산에 옛 성이 있다.
달마산(達摩山) : 현의 남쪽 60리에 있다. 관자산(館子山) : 현의 서쪽 30리에 있다.
가학산(賀鶴山) : 현의 북쪽 25리에 있다.
두륜산(頭輪山) : 현의 남쪽 30리에 있다. 이 산에 오르면 제주의 한라산(漢拏山)과 서로 바라보인다.
고다산(高多山) : 현의 남쪽 40리에 있다.
관두산(館頭山) : 현의 남쪽 41리에 있다. 제주를 왕래하는 배가 이 산밑에 머무른다.
우사현(亏沙峴) : 현의 동쪽 10리에 있다. 바다 : 서쪽ㆍ남쪽이 다 바다이다.
벽파진(碧波津) : 현의 남쪽 30리, 진도군과의 경계에 있다.
대진(大津) : 현의 서쪽 1백 5리에 있다. 주량(周梁) : 현의 서쪽 75리에 있다.
별진포(別珍浦) : 현의 북쪽 25리에 있다. 삼촌포(三寸浦) : 현의 남쪽 20리, 진도군과의 경계에 있다.
우음토포(亏音吐浦) : 현의 서쪽 10리에 있다. 고어란포(古於蘭浦) : 현의 남쪽 25리에 있다. 제주에 내왕하는
배가 여기에 머무른다. 입암포(笠巖浦) : 현의 남쪽 50리에 있다. 이곳 역시 제주 배가 머무르는 곳이다.
종천포(淙川浦) : 현의 서남쪽 5리에 있다. 어성포(魚成浦) : 현의 남쪽 10리에 있다.
죽성포(竹城浦) : 현의 북쪽 30리에 있다. 포 위에 산성의 옛 터가 있는데, 전하는 말에 전세(田稅)를 거두어
들이던 곳이라 한다. 부소도(扶蘇島)ㆍ마뢰도(磨賴島) : 모두 현의 남쪽 바다 가운데 있다.
죽도(竹島) : 황원현(黃原縣)에 있다.
완도(莞島) : 현의 남쪽 40리에 있다. 둘레가 2백 90리. 곧 신라 때의 청해진(淸海鎭)인데,
그 서남쪽은 이 현에 속하고, 동북쪽은 강진현에 속한다.
토산 닥ㆍ모시ㆍ대ㆍ대화살 : 현의 남쪽 고해남리(古海南里) 및 고녹산리(古綠山里), 현의 북쪽 비곡리(比谷里
)와 읍내 죽음리(竹陰里)에서 나온다. 차ㆍ감초ㆍ석류ㆍ유자ㆍ표고버섯ㆍ해삼ㆍ김ㆍ긴맛[竹蛤]ㆍ맛[甘蛤]ㆍ
숭어ㆍ우뭇가사리ㆍ참가사리ㆍ미역ㆍ매산(莓山)ㆍ감태(甘苔)ㆍ황각(黃角)ㆍ굴ㆍ낙지ㆍ전복ㆍ홍합ㆍ오징어ㆍ
화반석(華班石) : 황원현의 매옥산(埋玉山)에서 나온다.
자연동(自然銅) : 현의 서쪽 황원리 망포(芒浦)에서 난다. 자초(紫草)ㆍ비자ㆍ감.
성곽 읍성 : 돌로 쌓았으며, 둘레가 2천 8백 57자, 높이가 15자이며, 안에 우물 열둘이 있다.
관방 우도수군절도사영(右道水軍節度使營) : 현의 서쪽 67리에 있다.
오란포영(於蘭浦營) : 현의 남쪽 34리에 있다. ○ 수군만호 1명.
봉수 황원(黃原) 봉수 : 현의 서쪽 60리에 있다. 남쪽으로 진도군 점찰산(占察山)에 응하고, 북쪽으로 무안현의
유달산(鍮達山)에 응한다. 금강산 봉수 : 남쪽으로 관두산에 응하고, 북쪽은 관문에만 보고한다.
관두산 봉수 : 서쪽으로 진도군의 점찰산에 응하고, 남쪽으로 영암군의 갈두산(葛頭山)에 응한다.
누정 정원루(靖遠樓) : 곧 성 남문의 누각이다. 성화(成化) 기축년에 현감 성중성(成重性)이 세웠으며,
성현(成俔)의 기문이 있다.
○ 성임(成任)의 시에, "성곽은 바다가 다한 곳에 평평히 임해 있는데, 풍연(風煙) 10리에 나그네가 누각에 오르네.
희미한 구름이 들을 휩싸니 산은 그림같고, 큰 물결은 하늘을 적시어 땅이 뜨는 듯하네. 반 년 동안 나그네의 수심
이 날마다 더하는데, 채찍 하나 든 행색으로 고을마다 두루 다니네. 만리 건곤을 다 둘러 보려면,
장마 걷힌 초가을까지 가야하겠네." 하였다.
망운루(望雲樓) : 객관 남쪽에 있다.
○ 고득종(高得宗)의 시에, "마음은 태양 아래에 달리니 삼산(三山)이 멀고,
눈은 하늘 가를 바라보니 오색 구름이 떠 있도다." 하였다.
신증 대평정(大平亭) : 수영(水營)에 있다.
○ 남곤(南袞)의 시에, "붉은 꽃비 내리고 녹음은 살찌는데, 태평정 위에서 가는 봄을 전송하네. 거센 바람이 물결
을 치니 조수 소리가 장엄하고, 엷은 안개 산에 자욱하니 푸른 산빛이 희미하네. 고운 돗자리에서 돌리는 술잔이
남실남실하고, 석양에 들려오는 피리소리는 끊일 듯 말 듯 하구나. 그 중에서도 풍경이 그림같은 것은,
어부네 집이 벼랑에 의지하여 물이 반 사립인 것이라네." 하였다.
학교 향교 : 현의 북쪽 3리에 있다.
역원 녹산역(綠山驛) : 현의 남쪽 5리에 있다. 남리역(南利驛) : 현의 서쪽 35리에 있다.
별진역(別珍驛) : 현의 북쪽 30리에 있다.
○ 김극기(金克己)의 시에, "풍연(風煙)을 굽어보며 술잔을 드니, 붓 끝의 조화로 교묘하게도 그려낸 듯, 서리
맞은 대가 난간을 둘러 성긴 듯 빽빽하고, 이슬 젖은 꽃잎은 섬돌 위에 피고 지는구나. 오도자(吳道子)의 그림이
공중에 의지 한 듯 산은 백번을 돌고, 촉 나라 비단을 땅에 깐 듯 물은 천구비로 굽이치네. 건(巾)을 재켜쓰고
난간에 의지하여 길게 휘파람 부니, 자리에 가득한 맑은 바람 상쾌하기도 하여라." 하였다.
만희원(萬喜院) : 현의 서쪽 12리에 있다. 적량원(赤良院) : 현의 서쪽 23리에 있다.
삼기원(三岐院) : 현의 서쪽 60리에 있다.
불우 대둔사(大芚寺) : 두륜산(頭輪山)에 있다. 절 앞에 신암(信菴)ㆍ사은(思隱)ㆍ성유(性柔) 세 중의 부도(浮屠)
가 있다. 석두암(石頭菴)ㆍ흑석사(黑石寺) : 모두 가학산(駕鶴山)에 있다. 금강사(金剛寺)ㆍ
다보사(多寶寺) : 모두 금강산에 있다.
○ 중 원감(圓鑑)의 시에, "땅은 깊숙하여 시든 풀이 아직도 너저분한데, 소나무 전나무는 싱싱하여 옥당(玉幢)
같이 푸르구나. 평상에서 바라보는 고요한 산수의 경치는 뛰어난 자취 오래고, 백년 피우는 향불은 나라를 복
되게 하리. 빈 뜰에 달빛이 가득하여 눈을 깔아 놓은 듯하고, 먼 골짜기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밤 강물에 울부짖
는다. 기운 이불 맨머리에 추워서 잠 못 이루는데, 벽 사이 남은 등잔에는 향기로운 불꽃이 하늘하늘." 하였다.
사묘 사직단 : 현의 서쪽에 있다. 문묘 : 향교에 있다. 성황사 : 현의 북쪽 3리에 있다. 여단 : 현의 북쪽에 있다.
고적 고해남(古海南) : 두륜산 남쪽에 있다. 땅이 곧 바닷가에 임했으며, 성터가 있다.
죽산(竹山)폐현 : 현의 북쪽 10리에 있다.
본래 백제의 고서이현(古西伊縣)이었는데, 신라 때에 고안현(固安縣)으로 고쳐 양무군(陽武郡)에 딸린 현이
되었으며, 동안(同安)이라고도 썼다. 고려 때에 지금의 이름으로 고쳐 영암군에 예속되었다가 본조에 이르러
본현에 내속되었다. 그곳에 옛 돌성이 있는데 둘레가 2천 6백 40자이다.
황원(黃原)폐현 : 현의 서쪽 15리에 있다. 본래 백제의 황술현(黃述縣)이었는데, 신라 때에 지금의 이름으로
고쳐 양무군에 딸린 현이 되었으며, 고려 때에는 영암군에 예속되었다가, 뒤에 본현에 내속되었다.
목장이 있다.
옥천(玉泉)폐현 : 현의 동쪽 15리에 있다. 본래 영암군 냉천부곡(冷泉部曲)이었는데, 본조 세종 30년에 본현에
내속되었다. 옥산(玉山)폐현 : 현의 남쪽 10리에 있다. 옛날의 사라향(沙羅鄕)이었는데, 고려 때에 지금의 이름
으로 고쳐 영암군에 예속되었으며, 지금은 본현의 치소(治所)로 되어 있다.
흑산(黑山) 옛성 : 현의 북쪽 30리에 있다. 돌로 쌓았으며, 둘레가 5백 80자, 높이가 7자인데 지금은 절반이
무너졌다. 진산(珍山) 옛성 : 현의 서쪽 30리에 있다. 돌로 쌓았으며, 터만 남아 있다.
녹산(綠山) 옛성 : 현의 남쪽 10리에 있다. 돌로 쌓았으며, 고녹산역(古綠山驛)의 터인데, 지금은 폐지되었다.
고다산성(高多山城) : 옛성이 있는데 둘레가 9백 13자이다.
북평향(北平鄕)ㆍ송지부곡(松旨部曲) : 모두 현의 남쪽 60리에 있다.
팔마부곡(八馬部曲) : 현의 북쪽 20리에 있다.
신갈부곡(神葛部曲) : 현의 동쪽 20리에 있다. 정통(正統) 정묘년에 영암군에서 예속되었다.
마봉소(馬峯所) : 현의 남쪽 60리에 있다.
명환본조 곽안방(郭安邦) : 현감이 있는데 은혜로운 정치를 했으므로 백성들이 지금도 그를 사모하고 있다.
신증열녀본조 석을금(石乙今) : 참봉 박성림(朴成林)의 첩인데, 젊어서 남편에게 버림을 받았으나 맹세코 다른
사람에게 가지 않았다. 어떤 중이 그를 욕보이려 했는데 벗어나지 못할 것을 알고 마침내 목매어 죽었다.
지금 임금 10년에 정문을 세워 주었다. 종이(從伊) : 젊었을 때 어떤 사람이 밤에 그 집에 들어가서 그를 욕보
이려 하므로 종이가 놀라 외치면서 도망쳐 피하였으나, 그 사람이 이미 강간하였다 하여 관청에 고소하려
하니, 종이가 울면서 말하기를, "여자가 이 세상에 나서 애매하게 피를 더럽혔다는 누명을 쓰게 된 것은 상서
롭지 않다." 하고, 마침내 목을 매어 죽었다. 지금 임금 15년에 정문을 세워주었다.
제영 뚝뚝 갈대잎에 비 떨어지고 : 김극기(金克己)의 시에, "타향에서 가을 풍경을 만나니, 쑥대같은 귀밑머리에
먼저 놀라네. 뚝뚝 갈대잎에 비 떨어지고, 솨솨 댓가지에 바람 부네. 옥주(玉麈)는 왕연(王衍)을 모시고, 금준
(金樽)으로 공융(孔融)을 마주하네. 밤새도록 마시기를 사양하지 말라, 취하고 깨는 것이 곧 궁극(窮極)과 통
하는 것이로세." 하였다.
남쪽 나라 따뜻하여 겨울에도 눈이 없구나 : 조계생(趙啓生)의 시에, "남쪽 나라 따뜻하여 겨울에도 눈이 없고,
굽이진 물가에서 소금 구우니 낮에도 연기가 이네." 하였다.
긴 길이 바다를 따라 땅이 없는 듯하네 : 이석형(李石亨)의 시에, "긴 길이 바다를 따라 땅이 없는 듯 하더니,
화려한 집이 바람에 임하였으니 별천지로구나." 하였다.
[비고]
연혁 고종 32년에 군으로 고쳤다. 《문헌비고》
방면 현일(縣一) : 읍내에 있다.
현이(縣二) : 서쪽으로 5리에 있다.
녹산(綠山) : 남쪽으로 처음이 10리, 끝이 30리이다. 현산(縣山) : 남쪽으로 30리, 끝이 50리이다.
은소(銀所) : 남쪽으로 처음이 50리, 끝이 70리이다. 화일(花一) : 남쪽으로 30리에 있다.
화이(花二) : 남쪽으로 20리에 있다. 산일(山一) : 서쪽으로 처음이 10리, 끝이 40리이다.
산이(山二) : 서쪽으로 처음이 30리, 끝이 60리이다. 황일(黃一) : 서쪽으로 40리에 있다.
황이(黃二) : 서쪽으로 70리에 있다. 비곡(比谷) : 북쪽으로 처음이 30리, 끝이 40리이다.
마포(馬浦) : 북쪽으로 처음이 10리, 끝이 30리이다. 청담(淸淡) : 북쪽으로 50리에 있다.
장동(場東) : 서쪽으로 90리에 있다. 장서(場西) : 서쪽으로 90리에 있다.
○ 팔마부곡(八馬部谷)은 북쪽으로 20리에 있다. 신조부곡(神蔦部谷)은 동쪽으로 20리에 있다.
정통(正統) 정묘년에 영암군(靈巖郡)에서 내속하였다.
마봉소(馬峯所)는 남쪽으로 60리에 있다.
성지 읍성(邑城) : 2천 8백 57척이며 옹성(甕城)이 세 개, 성문이 세 개, 우물이 12개 있고, 남문을 정원루
(靖遠樓)라고도 한다.
고해남성(古海南城) : 두륜산(頭輪山)의 남쪽에 있다. 죽산고현성(竹山古縣城) : 둘레가 2천 6백 40척이다.
흑석산고성(黑石山古城) : 북쪽으로 30리에 있으며, 둘레가 5백 80척이다.
진산성(珍山城) : 서쪽으로 20리에 있으며, 돌성의 자취가 남아 있다.
녹산성(綠山城) : 남쪽으로 10리이며, 녹산현 옛 터에 석축의 자취가 있다.
고다산고성(高多山古城) : 남쪽으로 40리에 있으며, 둘레가 9백 13척이다.
죽성포성(竹城浦城) : 북쪽으로 30리에 있으며, 포(浦) 위에 옛성이 있는데 대대로 내려오며 전세를 받아
들이던 곳이다.
금강산고성(金剛山古城) : 성터가 남아있다.
영아 우수영(右水營) : 국초(國初)에 수군을 두고 영을 설치해둔 곳은 무안(務安)의 대굴포(大掘浦)인데,
세종 22년에 본현의 황원곶(黃原串)에 옮겨 설치하였다. 본현과의 거리는 서쪽으로 70리이다.
세조(世祖) 10년에 절도사로 승격되었다. 성의 둘레는 2천 4백 48척이며, 옹성이 네 개, 연못이 하나,
우물이 2개며 태평정(太平亭)이 있고 동문 밖에는 충무공(忠武公)의 승첩비가 있다.
관원 전라우도 수군절도사(全羅右道水軍節度使)ㆍ중군(中軍) : 우후(虞侯)가 겸한다. 각 한 사람씩이다.
속읍 나주(羅州)ㆍ영암(靈巖)ㆍ진도(珍島)ㆍ영광(靈光)ㆍ해남(海南)ㆍ무안(務安)ㆍ함평(咸平).속진 법성포
(法聖浦)ㆍ군산(群山)ㆍ고군산(古群山)ㆍ위도(島)ㆍ임류도(臨溜島)ㆍ고금도(古今島)ㆍ가리포(加里浦)ㆍ
남도포(南桃浦)ㆍ금갑도(金甲島)ㆍ오란포(於蘭浦)ㆍ이진(梨津)ㆍ신지도(薪智島)ㆍ마도(馬島)ㆍ목포(木浦)ㆍ
다경포(多慶浦)ㆍ지도(智島)ㆍ임자도(荏子島)ㆍ검모포(黔毛浦)ㆍ본영(本營) 및 속읍진(屬邑鎭) 각가지의
배 1백 30척 : 진강(津舡)이 24척이다.
누정 복파관(伏波館)ㆍ망해루(望海樓).
창고 창(倉)이 5개 : 읍내에 있다. 해창(海倉) : 남쪽으로 20리에 있다.
목장 황원장(黃原場) : 현과의 거리가 90리이며, 진도감목관(珍島監牧官)을 이곳으로 옮겼다.
진도를 속장(屬場)으로 하였다.
진도 벽파진(碧波津) : 서쪽으로 60리에 있으며 진도로 통한다.
등산진(登山津) : 서북쪽으로 90리에 있으며 무안ㆍ목포진으로 통하는 수로(水路)는 20리이다.
교량 남천교(南川橋) : 현의 남문 밖에 있다. 맹진교(孟津橋) : 북쪽으로 25리에 있다.
사원 표충사(表忠祠) : 정종(正宗) 기유년에 지교(持敎)가 건축하였으며, 사(祠)에 예관을 파견하여 제사하였다.
석휴정(釋休靜)ㆍ석유정(釋惟政) : 모두 밀양편에 보인다.
38권 제주목 濟州牧
동쪽은 정의현(旌義縣) 경계까지 80리이고, 서쪽은 대정현(大靜縣) 경계까지 81리이며,
남쪽으로는 바다까지 1백 20리이고, 북쪽으로 바다까지 1리이다.
건치연혁 본래 탐라국(耽羅國)인데 혹은 탁라(乇羅)라고도 한다.
전라도 남쪽 바다 가운데에 있는데 넓이가 4백여 리이다.
처음에 양을나(良乙那)ㆍ고을나(高乙那)ㆍ부을나(夫乙那)라는 세 사람이 있어 그 땅에 나누어 살고, 그 사는 곳
을 도(都)라고 이름하였다.
신라 때에 고을나의 후손 고후(高厚)가 그 아우 두 사람과 함께 바다를 건너와서 신라에 조회하였다.
왕이 기뻐하여 고후에게 성주(星主)라 칭호하고, 그 둘째 아우는 왕자(王子)라 하고,
끝 아우는 도내(都內)라 하여 탐라(耽羅)라는 국호를 내려주었다.
《고려사 고기(高麗史古記)》에 이르기를, "처음에는 인물이 없었는데 세 신인(神人)이 땅으로부터 솟아 나왔다.
지금 진산(鎭山) 북쪽 기슭에 모흥(毛興)이라는 구멍이 있으니, 이곳이 세 신인이 나온 땅이다.
맏이는 양을나이고 다음은 고을나이고 세 번째는 부을나인데, 세 사람이 궁벽한 황무지에 돌아다니며 사냥하여
가죽으로 옷을 해입고 고기를 먹고 살았다.
하루는 보니, 붉은 진흙으로 봉한 목함(木函)이 동해 가에 떠 이르렀다. 가까이 가서 열어보니, 안에 석함(石函)이
있고 붉은 띠에 자주옷을 입은 사자(使者)가 따라왔다. 석함을 여니 푸른옷 입은 처녀 세 사람과 망아지ㆍ
송아지와 오곡의 종자 등 여러 가지가 있었다.
사자가 말하기를, '나는 일본국(日本國) 사신인데, 우리 왕이 이 세 딸을 낳고 이르기를, 「서해 가운데 있는
산에, 신의 아들 세 사람이 내려와서 나라를 열려고 하는데 배필이 없다.」 하고, 이에 신에게 명하여, 세 딸을
모시고 왔으니, 배필을 삼아 큰 업을 이루소서.' 하고, 사자는 홀연히 구름을 타고 가버렸다.
세 사람이 나이 순서대로 나누어 장가들었다. 샘물 맛이 좋고 땅이 비옥한 곳에 나가서 화살을 쏘아 땅을 정하여,
양을나가 사는 곳을 제일도(第一都)라 하고, 고을나가 사는 곳을 제이도(第二都)라 하고,
부을나가 사는 곳을 제삼도(第三都)라 하여, 비로소 오곡을 파종하고 또 망아지와 송아지를 기르니, 날마다 부유
하고 번성해졌다.
15대 손 고후(高厚)ㆍ고청(高淸) 형제 세 사람이 배를 만들어 타고 바다를 건너 탐진(耽津)에 닿았으니,
이때는 신라의 융성한 시대였다.
이때에 객성(客星)이 남방에 보였는데 태사(太史)가 아뢰기를, '다른 나라 사람이 와서 조회할 징조이다.' 하였다.
고후의 무리가 이르자 왕이 가상히 여기어 고후에게 성주(星主)란 칭호를 주었으니 객성이 동하였기 때문이었다.
왕은 고청을 자기의 가랑이 아래로 나가게 하고 사랑하기를 자기 자식같이 하여 왕자(王子)라고 일컫고 그 막내
를 도내(都內)라고 일컬었다.
고을 이름은 탐라(耽羅)라 하였으니, 처음 올 적에 탐진에 닿아서 신라에 조회하였기 때문이다.
각각 보개(寶蓋)와 옷을 주어 보냈다.
이때로부터 자손이 번성하여 신라를 공경히 섬기니, 드디어 고(高)를 성주로 삼고 양(良)을 왕자로 삼고 부(夫)를
도상(都上)으로 삼았다. 뒤에 양(良)을 고쳐 양(梁)으로 하였다." 하였다.
그 뒤에 백제에 복종하여 섬겼는데, 동성왕(東城王) 21년에 탐라가 조공을 바치지 않으므로 친히 정벌하려고
무진주(武珍州)에 이르자 그 성주가 듣고 사자를 보내어 죄를 용서하기를 비니, 이에 그만두었다.
백제가 멸망함에 미쳐 신라 문무왕(文武王) 원년에 탐라국주(耽羅國主)의 좌평(佐平) 도동음률(徒冬音律)이
와서 항복하였다.
고려 태조(太祖) 20년에 태자 말로(末老)를 보내어 조회하니, 성주 왕자의 작위를 주었다.
숙종(肅宗) 10년에 탁라(乇羅)를 고쳐 탐라군(耽羅郡)으로 만들었고, 의종(毅宗) 때에 강등하여 현령관(縣令官)
으로 삼았다. 원종(元宗) 11년에 반적(叛賊) 김통정(金通精)이 삼별초(三別抄)를 거느리고 그 땅에 들어가 웅거
하였는데, 4년에 왕이 김방경(金方慶)을 명하여 쳐서 평정하였다.
충렬왕(忠烈王) 3년에 원(元) 나라에서 말을 기르는 목장으로 만들었는데, 20년에 왕이 원 나라에 조회하고
탐라를 돌려주기를 청하니, 원 나라 승상 완택(完澤) 등이 아뢰어 황제의 뜻을 받들어 다시 우리에게 예속
시켰다.
이듬해에 제주(濟州)로 고치고 비로소 판비서성사(判祕書省事) 최서(崔瑞)를 목사(牧使)로 삼았다.
26년에 원 나라 황태후(皇太后)가 또 그 땅에 말을 방목하다가 31년에 다시 우리에게 돌려주었다.
충숙왕(忠肅王) 5년에 좀도둑 사용(士用)과 엄복(嚴卜)이 군사를 일으켜 난을 꾸미니,
그 지방 사람 문공제(文公濟)가 군사를 일으켜 모두 베고 원 나라에 보고하여 다시 관리를 두었다.
공민왕(恭愍王) 11년에 원 나라에 예속시키기를 청하니, 원 나라에서 부추(副樞) 문아단불화(文阿但不花)를
탐라만호(耽羅萬戶)로 삼았다 :
아단불화가 본국의 천한 노예 김장로(金長老)와 함께 주(州)에 이르러 만호 박도손(朴都孫)을 매질하고 바다에
던져 죽였다.
19년에 원 나라가 이 주(州)를 다시 우리나라에 예속시켰다. 이때에 원 나라 목자(牧子)들이 사나워서 여러 번
국가에서 보낸 목사와 만호를 죽이고 배반하였다. 김유(金庾)가 토벌하게 되니 목자들이 원 나라에 호소하여
만호부(萬戶府)를 두기를 청하였다.
왕이 아뢰어 우리나라에서 스스로 관리를 임명하고 목자들이 기른 말을 가려 바치기를 전례와 같이 하기를
청하니, 황제가 그대로 좇았다. 18년에 원 나라 목자 하치[哈赤]가 제 마음대로 날뛰어 관리를 살해하니,
6년 뒤에 왕이 도통사 최영(崔瑩)을 보내어 하치를 쳐서 멸하고 다시 관리를 두었는데,
본조에서 그대로 하였다. 태종(太宗) 2년에 성주(星主) 고봉례(高鳳禮)와 왕자(王子) 문충세(文忠世)의 무리가
성주 왕자의 호가 참람하다 하여 고치기를 청하니, 성주를 좌도지관(左都知管)으로 삼고 왕자를 우도지관(右都
知管)으로 삼았다.
세조(世祖) 12년에 안무사를 고쳐 병마수군절제사를 삼았다가, 뒤에 목사로 고치고 진(鎭)을 두었다.
진관(鎭管) 현(縣)이 2 : 정의(旌義)ㆍ대정(大靜).
관원 목사ㆍ판관ㆍ교수 : 각각 한 사람이다.
군명 탐라(耽羅)ㆍ탁라(乇羅)ㆍ탐모라(耽毛羅)ㆍ동영주(東瀛州).
성씨본주 고(高)ㆍ양(良) : 양(良)은 뒤에 양(梁)으로 고쳤다. 부(夫) 문(文) : 처음에 보성군(寶城郡) 복성현
(福城縣) 사람이 와서 고씨(高氏)의 사위가 되었는데 그 자손이 고씨를 이어서 왕자(王子)가 된 자가 있다.
정(鄭)ㆍ김(金)ㆍ이(李)ㆍ문(文)ㆍ안(安)ㆍ현(玄)ㆍ함(咸)ㆍ양(楊) : 모두 속현이다. 김(金)ㆍ이(李)ㆍ박(朴)ㆍ
임(林)ㆍ유(兪)ㆍ주(周)ㆍ조(趙)ㆍ송(宋)ㆍ정(鄭)ㆍ홍(洪)ㆍ서(徐)ㆍ최(崔)ㆍ오(吳)ㆍ차(車)ㆍ지(池)ㆍ한(韓)ㆍ
마(馬) : 모두 다른 곳에서 왔다.
조(趙)ㆍ이(李)ㆍ석(石)ㆍ초(肖)ㆍ강(姜)ㆍ정(鄭)ㆍ장(張)ㆍ송(宋)ㆍ주(周)ㆍ진(秦) : 원(元). 양(梁)ㆍ안(安)ㆍ
강(姜)ㆍ대(對) : 운남(雲南).
○ 명(明) 나라 초년에 운남(雲南)을 평정하고 양왕(梁王)의 가속을 옮겨 제주에 안치하였다.
풍속 백성의 풍속이 어리석고 검소하며 예절이 있다. 백성의 풍속이 어리석고 검소하며, 또 초가가 많고 빈천한
백성들은 부엌과 온돌이 없고 땅바닥에서 자고 거처한다. 남녀가 짚신 신기를 좋아하고 방아가 없으며, 오직
여자가 손으로 나무 절구에 찧는다. 등에 나무통을 짊어지고 다니고 머리에 이는 자가 없다.
잘사는 사람은 그렇지 않다. 남자나 여자나 관원을 길에서 만나면 달아나 숨고 남자는 길옆에 엎드린다.
사투리가 난삽하다 : 촌 백성의 말이 난삽하여 먼저는 높고 뒤는 낮다.
밭머리에 무덤을 만든다 : 상사를 마친 지 백일이면 복을 벗고 밭머리를 조금 파고 무덤을 만든다.
간혹 삼년상을 행하는 자도 있다. 풍속이 풍수지리와 점을 사용하지 않고 또 부처의 법도 쓰지 않는다.
음사(淫祀)를 숭상한다 : 풍속이 음사(淫祀)를 숭상하여 산과 숲, 내와 못, 높고 낮은 언덕, 나무와 돌에 모두
신의 제사를 베푼다. 매년 정월 초하루부터 보름날까지 남녀 무당이 신의 기(旗)를 함께 받들고 경을 읽고 귀신
쫓는 놀이를 하는데 징과 북이 앞에서 인도하며 동네를 나왔다 들어갔다 하면서 다투어 재물과 곡식을 내어
제사한다.
또 2월 초하룻날 귀덕(歸德) 금녕(金寧) 등지에서는 나무 장대 열둘을 세워 신을 맞아 제사한다.
애월포(涯月浦)에 사는 자는 나무 등걸 형상이 말머리 같은 것을 구해서 채색 비단으로 꾸며 말이 뛰는 놀이를
하여 신을 즐겁게 하다가 보름날이 되면 그만두는데, 그것을 연등(燃燈)이라고 한다. 이달에는 배타는 것을
금한다. 또 봄가을로 남녀가 광양당(廣壤堂)과 차귀당(遮歸堂)에 무리로 모여 술과 고기를 갖추어 신에게 제사
한다.
또 그 땅에 뱀ㆍ독사ㆍ지네가 많은데 만일 회색뱀을 보면 차귀(遮歸)의 신이라 하여 죽이지 말라고 금한다.
오래 사는 사람이 많다 : 지방 사람이 질병이 적어서 일찍 죽는 사람이 없고 나이 팔구십 세에 이르는 자가 많다.
일기가 항상 따뜻하다 : 봄 여름에는 운무가 자욱하게 끼고 가을과 겨울이 되면 갠다.
초목과 곤충이 겨울을 지나도 죽지 않으며 폭풍이 자주 인다.
산에는 사나운 짐승이 없다 : 호랑이ㆍ표범ㆍ곰ㆍ승량이ㆍ이리 등 사람을 해하는 짐승이 없고 또 여우ㆍ토끼ㆍ
부엉이ㆍ까치 등속이 없다.
그물을 쓰지 않는다 : 산과 바다가 험악하여 그물을 쓰지 못한다. 고기는 낚고 짐승은 쏜다.
조리희(照里戲) : 매년 8월 15일이면 남녀가 함께 모여 노래하고 춤추며 왼편 오른편으로 나누어 큰 동아줄의 두
끝을 잡아당겨 승부를 결단하는데 동아줄이 만일 중간에 끊어져서 두 편이 땅에 자빠지면 구경하는 사람들이
크게 웃는다.
이것을 조리(照里)의 놀이라고 한다. 이날에 또 그네 뛰는 것과 닭 잡는 놀이를 한다.
풍속이 별나고 군사는 사납고 백성은 어리석다 : 권근(權近)이 목사 이원항(李元恒)을 보내는 서(序)에, "탐라가
바다 가운데 있어 처음에 신라 때로부터 해마다 직공(職貢)을 닦아 우리의 부속국이 되었는데, 고려 때에 제주목
을 두었고, 국가에서 그대로 하여 반드시 조정 신하 중에서 문무의 재주와 지략이 있고 위엄과 은혜가 평소에
드러난 자를 뽑아서 목사를 시킨다.
그러나 바람에 돛을 달고 바다에 떠서 아득하고 멀어서 끝이 없기 때문에 수백 리 무서운 파도와 한없이 험한
것을 건너서 도착하고 보면, 풍속은 별나고 군졸은 사납고 백성은 어리석어서 기쁠 때는 사람이지만 성내면
짐승 같아서 제어하기가 어렵다." 하였다.
땅은 척박하고 백성은 가난하다 : 고려 문종(文宗) 12년에 문하성이 아뢰기를, "탐라는 땅이 척박하고 백성이
가난하여 오직 목도(木道)질로 생활을 영위한다." 하였다.
풍속이 야만스럽고 거리가 멀다 : 정이오(鄭以吾)가 박덕공(朴德恭)을 보내어 부임하는 서(序)에, "그 풍속이
야만스럽고 거리가 또 먼데다가 성주(星主)ㆍ왕자(王子)ㆍ토호(土豪)의 강한 자가 다투어 평민을 차지하고
사역(使役)을 시켜, 그것을 인록(人祿)이라 하여 백성을 학대하여 욕심을 채우니, 다스리기 어렵기로 소문이
났다." 하였다.
돌을 모아서 담을 쌓았다 : 《동문감(東文鑑)》에, "그 땅에 돌이 많고 건조하여 본래 논은없고 오직 보리ㆍ콩ㆍ
조만이 생산된다. 그 밭이 예전에는 경계의 둑이 없어서 강하고 사나운 집에서 날마다 차츰차츰 먹어 들어가므
로 백성들이 괴롭게 여겼다. 김구(金坵)가 판관이 되었을 때에 백성의 고충을 물어서 돌을 모아 담을 쌓아 경계
를 만드니, 백성들이 편리하게 여겼다." 하였다.
여자는 많고 남자는 적다 : 혼인을 구하는 자는 반드시 술과 고기를 갖춘다. 납채(納采)를 하는 자도 그렇다.
혼인날 저녁에 사위가 술과 고기를 갖추어 신부의 부모에게 뵙고 취한 뒤에야 방에 들어간다.
풍속이 소주를 많이 쓴다. 여자는 많고 남자는 적은데, 중이 모두 절 옆에 집을 짓고 처자를 기른다.
형승 북쪽으로 큰 바다를 베개 베고 남쪽으로 높은 산을 대하였다 : 고득종(高得宗)의 《홍화각기(弘化閣記)》.
집집마다 귤과 유자요 곳곳마다 준마(駿馬)로다 : 위와 같다. 바다가 아득하고 멀다 : 정이오(鄭以吾)의 서(序)에,
"본토에서 탐라를 바라보면 큰 바다 아득하고 먼 가운데에 따로 한 구역이 되어 부속국과 같다." 하였다.
치고 싸우는 것이 미치지 못하는 곳이다 : 의종(毅宗) 13년에 안무사 조동희(趙冬曦)가 들어와 뵙고 말하기를,
"탐라는 험하고 멀어서 치고 싸우는 것이 미치지 못하는 곳입니다." 하였다. 가운데는 대단히 넓다 :
《동문감》에, "남해 가운데에 있어 수로로 무려 백리나 되고 그 가운데가 대단히 넓다." 하였다.
산천 한라산(漢拏山) : 주 남쪽 20리에 있는 진산(鎭山)이다. 한라(漢拏)라고 말하는 것은 운한(雲漢 은하(銀河))
을 나인(拏引 끌어당김)할 만하기 때문이다. 혹은 두무악(頭無岳)이라 하니 봉우리마다 평평하기 때문이요,
혹은 원산(圓山)이라고 하니 높고 둥글기 때문이다. 그 산꼭대기에 큰 못이 있는데 사람이 떠들면 구름과 안개가
일어나서 지척을 분별할 수가 없다. 5월에도 눈이 있고 털옷을 입어야 한다.
○ 권근(權近)의 응제시(應制詩)에, "푸르고 푸른 한 점 한라산 멀리 넓은 물결 아득한 사이에 있다. 사람은 별을
움직이게 하면서 바다 나라에서 왔고, 말은 용종(龍種)을 낳아서 임금의 마구에 들어온다. 땅이 편벽되나 백성의
생업은 이루어지고, 바람편에 장삿배가 임의로 왕래한다. 융성한 시대에 직방씨(職方氏)주D-001가 판도(版圖)
를 닦을 때에, 이 나라가 비록 누추하기는 하나 깎을 것은 아니다." 하였다.
장올악(長兀岳) : 한라산 중턱에 있는데 주에서 36리이다. 산 위에 못이 있다. 갈악(葛岳) : 주 남쪽 17리에 있다.
다랑시악(多郞時岳) : 주 동쪽 65리에 있는데 둘레가 34리이다. 금물악(今勿岳) : 주 남쪽 17리에 있다.
저악(猪岳) : 주 동쪽 61리에 있는데 둘레가 85리이다. 장악(獐岳) : 주 동남쪽 55리에 있는데 둘레가 43리이다.
사라악(沙羅岳) : 주 동쪽 7리에 있다. 별도악(別刀岳) : 주 동쪽 17리에 있다.
원당악(元堂岳) : 주 동쪽 17리에 있다. 봉우리 위에 못이
있어 큰 가뭄에도 마르지 않고 못에는 마름과 거북ㆍ자라가 있다.
서산악(西山岳) : 주 동쪽 34리에 있다.
입산악(笠山岳) : 주 동쪽 50리에 있다. 산 위에 못이 있는데 연꽃과 순채(蓴菜)
가 난다. 도도리악(道道里岳) : 주 서쪽 13리에 있다. 수산악(水山岳) : 주 서쪽 32리에 있다.
고내악(高內岳) : 주 서쪽 57리에 있다. 곽지악(郭支岳) : 주 서쪽 45리에 있다.
피문악(皮文岳) : 주 서쪽 30리에 있다. 판을포악(板乙浦岳) : 주 서쪽 80리에 있다.
파마지악(破磨只岳) : 주 동남쪽 30리에 있는데 둘레가 18리이다.
문사내악(文士乃岳) : 주 동남쪽 30리에 있는데 둘레가 42리이다.
금물덕악(今勿德岳) : 주 서남쪽 39리에 있다. 효별악(曉別岳) : 주 서남쪽 59리에 있으며 둘레가 18리이다.
상시사리(常時舍里) : 주 서쪽 65리에 있는데 둘레가 70리이다.
흘전리(訖田里) : 주 서쪽 82리에 있는데 둘레가 15리이다.
금녕수(金寧藪) : 주 동쪽 55리에 있는데 둘레가 50여 리이다.
○ 수(藪)는 지방 말로 화(花)라 한다.
이마수(尒亇藪) : 주 동쪽 79리에 있는데 둘레가 20리이다. 말응내수(末應乃藪) : 주 서남쪽 62리에 있다.
개리사수(介里沙藪) : 주 서쪽 75리에 있는데 둘레가 50리이다.
사야수(斜野藪)ㆍ궁괘로개수(弓掛老介藪)ㆍ복현수(卜懸藪) : 모두 한라산 가운데 있다.
괴질평수(怪叱坪藪) : 주 동남쪽 23리에 있다. 말질가리수(末叱加里藪) : 주 동쪽 31리에 있다.
등어리지(等於里池) : 주 서쪽 50리에 있는데 둘레가 25리이다.
추수(楸水) : 주 서남쪽 60리에 있는데 둘레가 29리이다. 천미수(泉未水) : 둘레가 25리이다.
감물덕천(甘勿德川) : 주 서쪽 90리에 있다.
○ 이상 장올악 이하에는 모두 목장이 있다.
산저천(山底川) : 주 성 동쪽에 있다. 병문천(屛門川) : 주 성 서쪽에 있다.
별도천(別刀川) : 주 동쪽 8리에 있다.
○ 이상 세 내는 모두 가물면 마르고 비가 오면 불어난다.
대천(大川) : 주 서쪽 3리에 있다. 가물면 마르고 비가 오면 불어나는데, 물이 우묵한 곳에 이르러 저수지가 되어
그 깊이가 밑바닥이 없는데 이름을 용추(龍湫)라 한다. 비가 오지 않는 해에는 나가서 기도한다.
도근천(都近川) : 주 서쪽 18리에 있다. 일명 수정천(水精川) 또는 조공천(朝貢川)이라고도 하는데 지방 사람들
의 말이 난삽하여 도근(都近)은 곧 조공(朝貢)이란 말의 그릇된 것이다. 언덕은 높고 험하여 폭포가 수십 척을
날아 흘러 그 밑에서 땅속으로 스며들어 칠팔 리에 이르러 돌 사이로 솟아 나와 드디어 대천의 하류를 이루었는데
도근포(都近浦)라 일컫는다. 이 아래에 깊은 못이 있는데 모양이 수달 같은 동물이 잠복하고 있어 변화를 일으켜
사람의 보물을 보면 끌어당기어 못 속으로 들어간다.
○ 이상의 병문천(屛門川) 이하는 근원이 모두 한라산 북쪽에서 흘러나와 바다로 들어간다.
양쪽 언덕에 석벽이 깎은 \ 서 있고 가운데는 암석이 깔렸다.
그 근원이 혹은 잠복하고 혹은 흐르는데 도근천이 그 내 중의 큰 것이다.
두천(斗泉) : 병문천(屛門川) 서쪽 50보에 있는데 그 모양이 말[斗] 같으므로 이름지은 것이다. 세상에서 전하기
를, "이 샘물을 마시면 능히 백 보를 날 수 있었는데 호종단(胡宗旦)이 와서 그 기운을 눌렀기 때문에 마침내
없어졌다." 한다. 가물면 맑아지고 비가 오려면 금(金)기운이 물 위에 뜬다.
추자도(楸子島) : 주 북쪽 바다 가운데에 있다. 둘레가 30리이고 수참(水站)의 옛 터가 있다.
모든 제주에 가는 자가 나주(羅州)에서 떠나면 무안(務安)ㆍ대굴포(大崛浦)ㆍ영암(靈巖)ㆍ화무지와도(火無只瓦島)ㆍ
해남(海南)ㆍ오란량(於蘭梁)을 거쳐 이 섬에 이르고,
해남(海南)에서 떠나면 삼촌포(三寸浦)로 좇아 거요량(巨要梁)ㆍ삼내도(三內島)를 거치고,
강진(康津)에서 떠나면 군영포(軍營浦)로 좇아 고자황이 노슬도(高子黃伊露瑟島)ㆍ삼내도를 거치는데,
모두 삼 주야라야 이 섬에 이른다. 여기를 경유하여 사서도(斜鼠島)와 대화탈도(大火脫島)ㆍ소화탈도(小火脫島)를
지나 애월포(涯月浦)와 조천관(朝天館)에 이른다.
○ 고려 원종(元宗) 11년에 삼별초가 진도로부터 탐라에 들어와서 내외성을 쌓고 험함을 믿고 더욱 창궐하였다.
김방경(金方慶)이 몽고 흔도(忻都)와 더불어 추자도에 머물러 바람을 기다리는데, 밤중에 바람이 급하여 지향할
곳을 알지 못하였더니, 새벽에 보니 이미 탐라에 가까워졌는데 바람과 큰 파도가 세차서 오도가도 못하였다.
방경이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기를, "국가가 편안하고 위태함이 이 한 번 싸움에 달렸는데, 오늘의 일은 나에게
있지 않은가." 하니, 조금 뒤에 풍랑이 그쳐 마침내 진격하여 크게 물리쳤다.
탐라 사람들이 그 공을 생각하여 후풍도(候風島)라고 이름하였다.
신도(身島) : 곧 추자도의 주봉(主峯)이다. 청로도(淸路島)ㆍ지도도(知道島)ㆍ초란도(草蘭島)ㆍ수덕도(愁德島) :
모두 추자도 남쪽에 있다.
사여서도(斜餘鼠島)ㆍ사서도(斜鼠島) : 모두 추자도 동쪽에 있는데 두 섬에 모두 샘이 있고, 그 남쪽에는 어선이
모여든다. 대화탈도(大火脫島) : 추자도 남쪽에 있는데 돌봉우리가 삐쭉삐쭉하고 그 꼭대기에 샘이 있다.
수목은 없고 풀이 있는데 부드럽고 질겨 기구를 만들 만하다.
소화탈도(小火脫島) : 추자도 서남쪽에 있는데 석벽이 깎은 듯이 서 있고, 양 섬 사이로 두 물이 합쳐서 흘러 파도
가 높고 급하므로 배가 많이 표류하고 침몰되니, 왕래하는 사람들이 매우 괴롭게 여긴다.
우도(牛島) : 둘레가 백리 인데 주 동쪽 정의(旌義) 경계에 있다. 사람과 말[馬]이 떠들면 풍우가 일어난다.
섬의 서남쪽에 구멍이 있는데 작은 배 한 척을 용납할 만하고, 조금 나아가면 배 오륙 척을 감출 만하다.
그 위에는 큰 돌이 집 같은데, 마치 햇빛이 떠서 비치고 별들이 찬연하게 벌여 있는 것 같고 기운이 심히 차고 냉
하여 머리털이 쭈뼛한다. 세속에서는 부르기를 신룡(神龍)이 있는 곳이라 부르는데, 칠팔월 사이에는 고기잡이
배가 가지 못한다. 가면 크게 바람이 일어나고 우레가 치고 비가 쏟아져서 나무를 쓰러뜨리고 곡식을 손상시킨다.
그 위에는 닥나무가 많다.
비양도(飛揚島) : 주 서쪽 80리에 있는데 수로가 5리이다. 둘레가 10리이고 양을 기르는 목장이 있다.
재암(財巖) : 명월포(明月浦) 서쪽 5리에 있는데, 집과 같이 둥글넓적하고 그 위에는 흰모래로 깔렸고 그 밑에는
큰 구멍이 있다.
사람이 횃불을 가지고 들어가면 그 가운데가 넓어서 80보는 될 만하다. 석종유(石鐘乳)가 산출된다.
그 서북쪽에 바위 두 개가 있는데 소협재(小夾財)라 한다. 모두 석종유가 산출되고 그 가운데가 넓어서 50보쯤
된다.
명월포(明月浦) : 주 서쪽 60리에 있는데 바다 어귀에 선박을 댈 만하다.
최영(崔瑩)이 하치[哈赤]를 토벌할 때 목자(牧子) 질리필사(迭里必思)의 무리가 30여 기(騎)로 이 포구에서
막으니, 큰 군사가 일제히 나가 힘껏 쳐서 크게 물리쳤다.
판포(板浦) : 주 서쪽 95리에 있다. 북포(北浦) : 주 동쪽 45리에 있는데 염분(鹽盆)이 있다.
이포(泥浦) : 주 서쪽 9리에 있다. 도도리포(道道里浦) : 주 서쪽 10리에 있다.
귀일포(貴日浦) : 주 서쪽 27리에 있다. 고내포(高內浦) : 주 서쪽 40리에 있다.
귀덕포(歸德浦) : 주 서쪽 47리에 있다. 독포(獨浦) : 주 서쪽 61리에 있다.
배령포(杯令浦) : 주 서쪽 63리에 있다. 함덕포(咸德浦) : 주 동쪽 31리에 있다.
어등포(於等浦) : 주 동쪽 64리에 있다. 도의탄포(道衣灘浦) : 주 동쪽 72리에 있다.
토산 산도(山稻)ㆍ기장ㆍ피ㆍ조ㆍ콩ㆍ팥ㆍ모밀ㆍ보리ㆍ밀ㆍ말 : 원 나라 지원(至元) 시대에 탐라를 방성(房星)
주D-002 분야(分野)라 하여 목장을 두고 단사관(斷事官)이나 만호(萬戶)를 두어 목축을 주관하였다.
○ 정이오(鄭以吾)의 기(記)에, "말이 생육되는 것이 진(晉) 나라의 굴산(屈産)주D-003과 같아서 여러 고을과
비교할 바가 아니다." 하였다.
목장이 4군데인데, 정의(旌義)와 대정(大靜)도 같다. 소 : 검정소ㆍ누런소ㆍ얼룩소 등 여러 종류가 있는데,
뿔이 매우 아름다워 술잔을 만들 만하다.
○ 집집마다 목축하여 수백 마리로 떼를 이룬다.
궤자(麂子)ㆍ미록(麋鹿) : 이 고을에서만 생산된다. 가죽이 세밀하고 질겨 가죽신을 만들 만하다.
해달(海獺)ㆍ지달(地獺)ㆍ환(獾)ㆍ빈주(蠙珠) : 고려 충렬왕(忠烈王) 2년에 원 나라에서 임유간(林惟幹)을 보내어
탐라에서 구슬을 채취하다가 얻지 못하고, 민간이 간직하여 둔 것을 백여 개 가지고 돌아갔다.
대모(玳瑁)ㆍ자개[貝]ㆍ앵무라(鸚鵡螺) : 이상 세 물건은 모두 우도(牛島)ㆍ대정(大靜)ㆍ가파도(加波島)에서
난다.
감(柑) : 황감(黃柑)ㆍ유감(乳柑) 등 몇몇 종류가 있다.
귤(橘) : 금귤(金橘)ㆍ산귤(山橘)ㆍ동정귤(洞庭橘)ㆍ왜귤(倭橘)ㆍ청귤(靑橘)의 다섯 종류가 있는데 청귤은 열매
를 맺어 봄이 되어서야 익고 때가 지나면 다시 말랐다가 때가 이르면 다시 익는다.
유(柚)ㆍ비(榧)ㆍ치자(梔子)ㆍ밤 : 적률(赤栗) 가시율(加時栗) 두어 종류가 있다.
과실이 과원(果園)에서 나오는데 과원은 모두 담을 쌓았다. 모두 열아홉 곳인데, 대정이 여섯 곳이고 정의가
다섯 곳이다.
무환자(無患子) : 잎사귀가 창백하다. 무회목(無灰木) : 우도(牛島)에서 난다. 바다 가운데 있을 때는 부드럽고
연하여 물결을 따라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다가 물 밖에 나오면 굳고 단단하여진다.
산유자ㆍ이년목(二年木)ㆍ노목(櫨木)ㆍ두충(杜冲)ㆍ지각(枳殼)ㆍ후박(厚朴)ㆍ동실(棟實)ㆍ동근(棟根)ㆍ영릉향
(零陵香)ㆍ안식향ㆍ향부자(香附子)ㆍ청피(靑皮)ㆍ해동피(海東皮)ㆍ촉초(蜀椒)ㆍ진피(陳皮)ㆍ필징가(蓽澄茄)ㆍ
팔각(八角)ㆍ표고ㆍ목의(木衣)ㆍ석곡(石斛)ㆍ석종유(石鐘乳)ㆍ백납(白蠟)ㆍ소금ㆍ미역ㆍ우뭇가사리ㆍ게ㆍ소라ㆍ
전복ㆍ석결명(石決明)ㆍ황합(黃蛤)ㆍ해의(海衣)ㆍ오징어ㆍ도루묵ㆍ옥두어(玉頭魚)ㆍ상어ㆍ갈치ㆍ고등어ㆍ
행어(行魚)ㆍ문어.
성곽 읍성(邑城) : 돌로 쌓았는데 둘레가 4천 3백 94척이고, 높이가 11척이다. 성안에는 물이 없고 성 남쪽 큰 돌
밑에 큰 구멍이 있어 물이 솟아나오는데 이름이 가락귀(嘉樂貴)이다. 깊이가 10척 가량 된다. 흐름을 가로막아서
겹성을 쌓았는데 성 안 사람들이 길어다 마신다.
관방 조천관 방호소(朝天館防護所) : 주 동쪽 25리에 있다. 금녕포(金寧浦) 방호소 : 주 서쪽 51리에 있다.
도근천(都近川) 방호소 : 주 서쪽 17리에 있다. 애월포(涯月浦) 방호소 : 주 서쪽 42리에 있다.
명월포(明月浦) 방호소 : 주 서쪽 60리에 있다.
○ 이상 방호소에는 모두 진수(鎭戍)하는 군졸을 두어서 지킨다. 정의와 대정도 같다.
신증 돌로 성을 쌓았는데 둘레가 2천 20척이요, 높이가 8척이다. 동쪽 서쪽 남쪽에 문이 있고 성 안에 샘이 있어
냇물처럼 솟아나온다. 예전에 성이 없었는데, 정덕(正德) 경오년에 이 땅이 비양도(飛陽島)로 왜선(倭船)이 가까
이 대일 수 있는 곳이라 하여 쌓았다.
건입포 수전소(巾入浦水戰所) : 주 동북쪽 1리에 있다. 조천관포구수전소(朝天館浦口水戰所)ㆍ
금녕포구 수전소(金寧浦口水戰所) : 이상 세 곳은 좌방(左舫)에 속한다.
벌랑포 수전소(伐郞浦水戰所) : 주 서쪽 20보에 있다.
도근천포구 수전소(都近川浦口水戰所)ㆍ애월포구 수전소(涯月
浦口水戰所)ㆍ명월포구 수전소(明月浦口水戰所) : 이상 네 곳은 우방(右舫)에 속한다. 여러 곳에 모두 전선
(戰船)이 있고, 또 군사가 있어 번갈아서 나누어 지킨다. 모든 공납물과 선물(膳物)이 차례대로 바다를 건넌다.
정의와 대정도 같다.
신증 별방성(別防城) : 주 동쪽 75리에 있다. 돌로 쌓았는데 둘레가 2천 3백 90척이고 높이가 7척이다.
동쪽 북쪽에 문이 있다. 정덕(正德) 경오(庚午)에 이 땅이 우도(牛島)로 왜선이 가까이 대일 수 있는 것이라 하여
성을 쌓고 금녕 방호소(金寧防護所)를 여기에 옮기고 별방(別防)이라 이름하였다.
좌우위(左右衛) : 예전에는 객사 문밖에 있었는데 김석철(金錫哲)이 목사로 있을 때에 관덕정(觀德亭) 동쪽으로
옮겨 지었다.
봉수 사라악 봉수(沙羅岳烽燧) : 서쪽으로 도도리악(道道里岳)에 응하고 동쪽으로 별도(別刀)에 응한다.
별도 봉수 : 서쪽으로 사라악에 응하고 동쪽으로 원당악(元堂岳)에 응한다.
원당악 봉수 : 서쪽으로 별도(別刀)에 응하고 동쪽으로 입산악(笠山岳)에 응한다.
입산악 봉수 : 서쪽으로 원당악에 응하고 동쪽으로 정의(旌義) 지미산(只未山)에 응한다.
도도리악 봉수 : 동쪽으로 사라악에 응하고, 서쪽으로 수산악(水山岳)에 응한다.
수산악 봉수 : 동쪽으로 도도리악에 응하고 서쪽으로 고내악(高內岳)에 응한다.
고내악 봉수 : 동쪽으로 수산악에 응하고 서쪽으로 판을포악(板乙浦岳)에 응한다.
판을포 봉수 : 동쪽으로 고내악에 응하고, 서쪽으로 대정(大靜) 차귀악(遮歸岳)에 응한다.
궁실 홍화각(弘化閣) : 성 안에 있는데, 최해산(崔海山)이 세운 것이다. 곧 옛날 안무사의 영(營)인데 지금은
절제사
의 영청(營廳)이 되었다.
○ 고득종(高得宗)의 기(記)에, "갑인년 가을 8월에 전 공조 참판 익양(益陽) 최해산(崔海山)이 도안무사가 되어
배에서 내리자마자 우선으로 기근을 구제하는 정사를 마음에 급급하게 먹고, 슬퍼하고 불쌍히 여겨 따뜻하게
어루만지고 은혜를 내리는 한편, 원통하고 억울한 것을 다스리자 옥에는 연체된 송사가 없어졌고, 교화를 베풀자
백성이 예의를 알게 되었다. 말을 기르는 방법과 적의 침입을 막는 방비와, 학교를 일으키고 농사를 권하며, 재해
를 구제하고 환란을 불쌍히 여기는데 이르기까지 사람을 다스리는 방도를 남김없이 다하였다.
또 신을 섬기기를 정성으로 하여 마음을 재계하고 생각을 깨끗이 하였다. 다음해에 풍우가 철에 맞게 내리고
순조로워 곡식이 풍년들어 백성은 배를 두드리며 즐기고 말은 크게 번식하였으니, 우리 전하께서 어진 사람을
가리신 은혜가 깊고 또 지극하다.
공이 정사가 성취되고 인심이 화평해지자, 관청의 퇴폐하고 허물어진 것을 수축하려고, 문을 닫은 절의 재목과
기와를 가져다가 먼저 거처하는 집을 일으키니, 거문고 치는 당과 욕실ㆍ부엌ㆍ낭사의 위치가 갖추어졌다.
조금 서편으로 집 세 칸을 세워서 당을 만들고, 또 그 서쪽에 집 세 칸을 세우고 겹처마로 보충하니, 그 규모가
광대하고도 정밀하고, 그 제도가 웅장하고도 화려하였다. 그 남쪽에 반자(半刺 군의 보좌관)의 당을 세우고, 그
북쪽에는 나라에 바치는 말의 마구를 두고, 동쪽에는 창고를 두고, 서쪽에는 온돌방을 두었다.
또 그 남쪽에 따로 문루(門樓)를 지어 아래로는 드나들게 하고 위에는 종과 북을 달았고, 약(藥)창고와 기(旗)
두는 곳이 동서에 서로 대치하게 하였다. 모두 담으로 둘렀으니, 집이 도합 2백 여섯 칸인데 집들이 서로 연접
하지 않은 것은 화재를 예방하기 위한 것이다.
그 경영과 위치와 제작이 적당함을 얻은 것은 모두 공의 지시와 계획에서 나왔다.
공이 하루는 각(閣) 위에 앉아서 고을의 부로들을 소집하여 낙성을 하고 또 이름지을 것을 의논하였다.
어떤 이가 말하기를, '예전에 만경루(萬景樓)라는 이름이 있었으니, 지금 회복하는 것이 좋습니다.' 하였다.
공이 말하기를, '그렇지 않다. 내가 집을 세운 것은 놀고 구경하는 것을 위함이 아니다.
옛적 주(周) 문왕(文王) 때에 주공(周公)은 안에서 다스리고 소공(召公)은 밖에서 다스려서 교화가 사람에게
미치는 것이 바람이 움직이는 것같이 미쳐서, 당세의 사람들이 덕화에 고무되지 않음이 없었는데, 지금 성스럽고
밝으신 임금이 위에 있고 원로의 재상들이 모두 공경하고 화합하여 어진 사람을 급히 구하여 나누어 보내 밖에서
다스린다.
그러나 오히려 혜택이 미치지 못하고 정치의 교화가 흡족하지 못한 것은, 위임받은 자가 적당한 사람이 아니어서,
받들어 행하는 것이 그 도리를 다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무릇 임금의 근심을 나눈 지방관이 날마다 이 집에 올라서 편안히 놀지도 말고 욕심을 방종히 하지도 말아서,
맡은 직책을 다하기를 생각하여, 항상 왕화(王化)를 넓히고 백성의 사정을 뚫어주는 것으로 마음을 삼는다면,
주(周) 나라의 다스림을 오늘에 다시 볼 수 있고, 제주의 백성들이 마땅히 무궁하게 복을 받을 것이다.
그렇다면 어찌 홍화(弘化)라고 이 집을 이름하지 않으랴.' 하였다.
이에 듣는 자가 모두 절하고 사례하기를, '공께서 이름 지으신 것이 능히 뒤를 잇는 자로 하여금 더욱 힘쓰게
하는 점이 있고, 우리 백성들은 길이 어진 덕화를 입을 것을 더욱 보장할 수 있습니다.' 하고,
드디어 나에게 청하여 홍화각(弘化閣) 세 글자를 써서 걸었다." 하였다.
조천관(朝天館) : 세 고을을 경유하여 육지로 나가는 자는 모두 여기서 바람을 기다리고, 전라도를 경유하여 세
고을에 들어오는 자도 모두 이곳과 애월포(涯月浦)에 배를 댄다.
신증 우련당(友蓮堂) : 영문(營門) 밖에 있다. 목사 이수동(李壽童)이 성안에 우물이 없음으로 못을 파서 물을
채워 연을 심고, 그 위에 집을 지었다.
누정 관덕정(觀德亭) : 홍화각(弘化閣) 남쪽에 있다. 신숙청(辛淑晴)이 세웠고, 성화(成化) 경자년에 목사 양찬
(梁瓚)이 중수하였다.
○ 신석조(辛碩祖)의 기문에, "동지중추원사 고상공(高相公)이 내게 말하기를, '우리 고을 제주가 비록 먼 곳에
있으나 특별히 성스러운 임금의 덕화를 입어서, 가르치고 다스려서 문(文)에 대한 일이나 무(武)에 대한 방비가
모두 갖추어지지 않은 것이 없다.
안무사영(安撫使營) 남쪽에 사청(射廳) 한 구역이 있는데 사졸을 훈련하는 곳이다.
예전부터 집이 없어 보기에도 장엄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실로 추위와 더위에도 가릴 것이 없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한스럽게 여겼다. 지금 안무사 신후(辛侯)가 정사를 시작한 다음해 무진년 가을에, 일이 닦아지고 풍년이
들어 노는 목수들을 불러서 재목을 모으고 기와를 굽고, 돌을 쌓아 대(臺)를 만들고 새 정자를 그 위에 일으키고,
이름을 관덕(觀德)이라 하였다. 모두 세 칸이고, 앞 퇴를 달고 좌우에 날개를 벌려 넓게 하고 약간 단청을 가하니,
크고 넓고 선명하며 높고 화려한 것이 제도에 알맞아서 참으로 한 고을의 장관이었다.
고을 사람들이 기뻐하고 경사로 여겨 모두 사문에 의탁하여 뒤에 오는 사람에게 보이기를 원하니,
자네는 나를 위하여 그 전말을 써주게나.' 하니, 글이 졸하다고 사양할 수 없었다.
일찍이 《예기(禮記)》의 〈사의편(射義篇)〉을 보니, 이르기를, '활쏘기는 성한 덕을 보는 것이다.' 하여,
전편에 말한 것이 성인이 활쏘기에 대하여 정성을 다한 것이 지극하였다. 천하에 일이 없으면 예의(禮義)에 쓰니,
대사(大射)와 향사(鄕射)는 용의(容儀)를 익히고 기예를 보는 것이고, 천하에 일이 있으면 싸워서 이기는 데 쓰니,
가죽을 꿰뚫는 것을 주로 하여 힘을 나타내는 것은 외적을 막아 이기는 것이어서 하루도 강구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이제 바야흐로 성군이 있어 광휘를 거듭하고 은덕이 널리 퍼져 문교의 성함이 옛날을 초월하고, 사방이 편안하고
맑아 오병(五兵)주D-004을 시험하지 않는다.
그러나 편안한 때에 위태함을 잊지 않아서 더욱 무(武)를 닦아서 군졸을 훈련하고 병기를 가다듬어, 항상 적국이
문과 뜰 밖에 있는 것처럼 하여야 한다. 수령은 모두 통솔과 훈련의 직책을 띠고 있으니, 무기와 군사를 교련하여
비상사태에 대비하는 것에 생각을 쓰지 않음이 없어야 할 것이다.
하물며 제주는 예전의 탐라이다. 멀리 바다 가운데 있으니, 전쟁의 대비를 더욱 엄하게 해야 할 것이다.
신후(辛侯)가, '이 정자를 급히 지어야 한다.' 하였고, 또 하물며 관덕(觀德)으로 편액하였으니, 그 쓰는 것이 관혁
에 있지 않고 진퇴(進退)ㆍ주선(周旋)하는 즈음에 그 덕행을 살펴서 예악으로 신칙할 뿐이니, 삼대(三代)의 활쏘
는 뜻을 얻었다 하겠다.
일이 비록 마땅한 것을 얻더라도 거행하는 것이 그 시기를 얻지 못하면 보잘것없는 것이다. 지금 무예를 훈련
하는 장소를 닦지 않을 수 없는데, 풍년을 만나고 사람들은 하고자 하기 때문에 재물을 손상치 않고 백성도
해치지 않고서 전날에 없던 새 정자를 창건하고 아름다운 이름을 게시하였다.
사람으로 하여금 이름을 돌아보고 뜻을 생각하여 활쏘는 데에 뜻을 다하고 몸을 바르게 하기를 구하도록 하여,
공이 이루어지고 나라가 편안해지는 효과를 이룬다면 이 정자의 세운 것이 참으로 놀고 잔치하는 장소에 비교할
것이 아니고, 정치하는 도리에 관계되는 점이 클 것이니, 이것은 고을 사람들이 서로 경사로 여겨 기록하여 잊지
않기를 요구하는 것이다. 후의 이름은 숙청(淑晴)인데 장수의 지략이 있으므로 알려졌다." 하였다.
○ 서거정(徐居正)의 중수기에, "좌주(座主) 남원(南原) 양판상(梁判相)이 나에게 이르기를, '나의 아들 찬(瓚)이
제주 목사가 되어 관덕정(觀德亭)을 중수하였으니, 청컨대 선생은 기문을 지어서 빛나게 하라.' 하였다.
내가 생각하건대, 제주는 본래 옛날의 탁라국(乇羅國)인데, 곧 우리 동방의 구한(九韓)의 하나다.
신라 때에 비로소 와서 조회하였고, 고려 초년에 와서 항복하여 나라가 없어지고 현(縣)이 되었다.
고려 말년에 기황후(奇皇后)가 빌려 목장(牧場)을 두었는데, 명(明) 나라 때에 이르러 다시 우리나라에 예속시
켰다. 제주가 바다 가운데 있어서 땅의 넓이가 거의 5백 리나 되고 사는 백성이 팔구 천 호나 되고, 기르는 말이
또한 수만 필이나 되며, 그 산물(産物)의 풍부한 것이 다른 고을의 배나 된다.
고을이 또 일본(日本)과 서로 이웃하였으니, 방비하는 방책이 실로 복잡하고 어렵다. 조정에서 목사를 뽑으려면
매양 적합한 사람을 얻기가 어려운데, 지금 후(侯)가 그 선발함을 받아서 먼 바다 건너기를 평탄한 길과 같이
하여 이불을 가져가면서도 중얼거리는 기색이 없었으니, 후는 참 어질도다. 부임하여 부지런하고 간절히 임금의
덕을 선양하고 백성의 고통을 불쌍히 여기는 것으로 급선무를 삼아서 다스린 지 3년에 사람들이 매우 화평해
졌다.
이에 그 지방의 호족 고윤(高潤)의 무리 수십 명이 청하기를, '관덕정(觀德亭)은 고을 사람들이 활쏘는 것을 익히
는 곳인데, 여러 해가 되어서 기울고 허물어져서 활쏘기를 익힐 곳이 없으니, 매우 우리 고을의 결함입니다.'
하였다.
이에 후가 옳다 하고, 통판 하공(河公) 주(澍)와 의논하여 재목을 모으고 목수들을 불러 경영하고 구축하니,
한 달이 못 되어 완성되었다. 이에 활쏘기를 익히는 것이 장소가 있고 무비(武備)가 더욱 엄해졌으니,
공은 먼저 힘쓸 것을 아는 사람이라 하겠다.
하물며 이 정자의 지은 것이 놀고 구경하는 것을 위하여 지은 것이 아니고 본래 무예를 훈련하기 위한 것이니,
이제부터 고을 사람들이 날마다 여기에서 활 쏘는 것을 익혀, 한갓 활쏘기만이 아니라 말 타고 활 쏘는 것도
익히고, 한갓 말 타고 활 쏘는 것만 익힐 것이 아니라 그곳에서 싸우고 진치는 것을 익혀, 왜적의 변란이 있을
때에는 세 고을의 군사를 동원하여 상산(常山)주D-005의 형세를 지어서 수군ㆍ육군ㆍ보병ㆍ기병이 각각 죽을
힘을 내어 다투어 적의 머리를 베어 부모처자를 구출하고 그리하여 한 고을을 보존하고, 나라의 간성(干城)
주D-06이 되어서 공명을 죽백(竹帛)주D-07에 세우면, 어찌 다행한 일이 아니겠는가.
한갓 무비(武備)만 그렇게 할 것이 아니라, 이 고을 사람이 문장과 사업으로서도 세상에 울린 이가 고평장(高平
章) 조기(兆基)로부터 내려와서 고 선생(高先生) 득종(得宗)ㆍ좌윤(左尹) 태필(台弼) 4형제에 이르러 모두 입신
양명하여 현직을 지냈고, 다른 세 고을의 자제도 고을에 있을 때는 공물을 바치기에 부지런하고, 조정에 들어
오면 숙위(宿衛)를 조심스럽게 하여, 그 풍속의 후한 것이 바다 안의 여러 고을과 견줄 만하다.
후가 문벌의 자손으로서 무사(武事)에 익숙하고 특이한 재주가 있어, 우리 열성(列聖)의 알아줌을 만나 이내
지방관이 되어, 삼척(三陟)과 웅천(熊川)에 있을 때의 명성과 공적을 사람들이 모두 자자하게 칭송하고,
지금 또 동떨어진 곳에서 이름을 날려 그 성취한 것이 이렇게 탁월하니, 어찌 아름답지 않은가. 후의 자(字)는
여옥(如玉)인데 남원(南原)의 동생의 셋째 아들이다." 하였다.
○ 정인지(鄭麟趾)의 시에, "윤건(綸巾)과 우선(羽扇)으로 아름다운 군사를 사열하니, 몸이 장성(長城)이 되어
민정을 진무하네. 약속을 행할 때에 조주(潮洲)의 악어주D-008가 옮겨가고, 위험이 떨치는 곳에 초(楚) 나라
요기(妖氣)가 밝아진다. 일천 숲에 불을 뿜는 듯한 서리맞은 귤의 빛이요, 일만 북을 일제히 치는 듯한 바다 물결
소리로다.
뽕나무밭 밖에 아침저녁으로 밥짓는 연기, 분명히 풍년임을 말해주도다." 하였다.
신증 정원루(定遠樓) : 바로 남문 초루(譙樓)주D-009다.
학교 향교(鄕校) : 성안에 있다. 김처례(金處禮)가 지은 비문(碑文)에, "우리 태조(太祖) 원년 임신에 성균관이
이루어지고 세종(世宗) 17년 을묘에 향교가 지어졌다.
성화(成化) 병술년 봄에 완산(完山) 이유의(李由義)가 제주의 목사로 임명되어 맨 처음 문묘에 참배하고 그 집이
퇴락한 것을 애통하게 여겨 개연히 새롭게 하려 하여, 판관 장흥(長興) 이인충(李仁忠)과 의논하여, 드디어 영졸
(營卒)에게 명을 내려 순번에 따라 일에 종사하게 하고,
교수관) 문소조(文紹祖)로 하여금 감독하게 하니, 선비는 학업을 던져두고 분주하고 목공은 재주를 다하여 경영
하였다. 목사가 매번 공사의 여가에 친히 임하여 지휘하니, 이에 묘무(廟廡)와 재사(齋舍)와 문장(門墻)과 당옥
(堂屋)과 변두(籩豆)와 보궤(簠簋 제기(祭器)의 한 가지)와 궤안(几案)과 위판(位板)과, 부엌ㆍ창고ㆍ마구ㆍ변소ㆍ
뜰ㆍ도로까지 수십 일이 못 되어 빛나게 새로워졌다.
고을의 부로들과 학생ㆍ아이ㆍ어른이 듣고 보고 다투어 하례하고 학업으로 서로 권하며 또 말하기를, '목사의
공은 이 고을의 전에 없던 것이니, 어찌 돌에 새겨 후세에 보이지 않으리요.' 하고, 처례(處禮)에게 촉탁하여 명
(銘)을 짓게 하였다. 처례가 말하기를, '학교의 흥하고 폐하는 것이 정치의 성하고 쇠함에 크게 관련된다.
학교가 이미 수리되었으니, 학교의 규칙도 마땅히 새로워져야 하겠다. 스승된 자가 진실로 능히 세종(世宗)께서
특별히 내려주신 서적을 받들고 성현이 지으신 경전을 가지고서, 학생들로 하여금 입으로 외우고 마음으로 생각
하며, 아침에 배우고 저녁에 익히도록 하며, 회옹(晦翁)의 백록동(白鹿洞)주D-010 규칙을 게시하여 우러르고
사모하기를 그치지 아니하니, 목사가 중수한 아름다운 뜻을 살펴 물 뿌리고 쓸기를 싫어함이 없어서, 지(知)와
행(行)이 아울러 나아가면 성현되기를 기약할 수 있을 것이다.' 하였다.
열 집이 되는 고을에도 오히려 충신 한 사람이 있거든 세 성[三姓]이 사는 땅에 어찌 걸출한 이가 없겠는가.
집에 있어서는 자제를 교훈하여 효도를 옮겨 충성을 하게 하고, 세상에 나가서는 조정 일에 분주하여 이름을
후세에 날려, 융성한 조정에서 교화하여 성취시킨 뜻에 부응한다면 어찌 고을 사람의 다행이 아니겠는가."
하였다.
월계정사(月溪精舍) : 예전 명월현(明月縣)에 있다. 금녕정사(金寧精舍) : 예전 금녕현(金寧縣)에 있다.
주(州)에서 월계(月溪)로 서재(西齋)를 삼고 금녕(金寧)으로 동재(東齋)를 삼아 향교의 유생을 나누어 각각
사는 데서 가까운 곳에 따라 여기에서 글을 읽게 하고, 지방 사람의 학식과 인망이 있는 사람을 택하여 학장
(學長)으로 삼았다. 성안에는 또 향학당(鄕學堂)이 있다.
교량 별도교(別刀橋) : 별도천(別刀川)에 있다. 대천교(大川橋) : 대천(大川)에 있다.
석량(石梁) : 도근천(都近川)에 있다.
석교(石橋) : 함덕포(咸德浦)에 있는데 길이가 1백 10보이다. 다리 북쪽에는 해안이 벽처럼 솟아 높고 급하다.
불우 존자암(尊者庵) : 한라산 서쪽 고개에 있다. 그 골짜기에 돌이 있는데 마치 중이 도를 닦는 모양 같다.
속설에 전하기를 수행동(修行洞)이라고 한다. 월계사(月溪寺) : 독포(獨浦) 동남쪽에 있다.
수정사(水精寺) : 도근천(都近川) 서쪽 언덕에 있다.
○ 이제현(李齊賢)의 해가시(解歌詩)에, "도근천에 물 막는 둑이 무너지면, 수정사 안이 또한 바다가 되리." 하였
는데, 곧 이 절의 고사이다.
묘련사(妙蓮寺) : 주 서쪽 25리에 있다. 중 혜일(慧日)의 시에, "남해의 천기가 자주 흐리기를 좋아하는데, 오늘
저녁은 새로 개여 손의 마음을 씻는구나, 한 꿈 같은 인생은 영화와 쇠하는 것이 있으나, 중추에 달빛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멀리 아득한 데 다다르니 포구(浦口)가 넓고, 비낀 그림자가 침침하니 연기 낀 대숲의 집이
깊도다. 밤늦도록 구경하니 맑은 것이 생각에 들어와, 머리 기울이며 가느다랗게 읊조림이 나옴을 금하지 못하네."
하였다.
문수암(文殊庵) : 주 서남쪽 27리에 있다. 해륜사(海輪寺) : 일명 서자복(西資福)이다. 주 서쪽 독포(獨浦) 어귀에
있다.
만수사(萬壽寺) : 일명 동자복(東資福)이다. 건입포(巾入浦) 동쪽 언덕에 있다.
강림사(江臨寺) : 주 동쪽 함덕포(咸德浦) 어귀에 있다.
보문사(普門寺) : 거구리악(巨口里岳) 북쪽에 있다.
○ 중 혜일(慧日)의 시에, "절이 궁벽하여 거친 지경에 의지하였는데, 샘물이 단 것은 꿈 가운데 얻어진 것이다.
연장(蓮場)에 좋은 일을 만났고, 불법의 유풍을 잇는다. 풀은 서리를 맞고도 그대로 푸르고, 담쟁이는 장기(瘴氣)
로 인하여 붉지 못하네. 원통문(圓通門)은 스스로 열렸는데, 먼 기러기가 긴 하늘에서 부르짖는다." 하였다.
서천암(逝川庵) : 조공천(朝貢川) 위에 있다.
○ 중 혜일의 시에, "한라산이 높기가 몇 길인가, 절정 위에는 신비한 못물이 고였다. 나누어 나와 북으로 흘러
가서, 아래에 조공천이 되었네.
폭포가 어지러이 물방울을 뿜어, 둥근 구슬들같이 달아나네. 놀란 여울이 여러 돌에 부딪치다가, 간혹 항아리와
동이같이 파여지기도 한다. 편안히 흐르는 것이 몇 리가 되는데, 맑고 깨끗하여 푸른 하늘을 비치네.
도 닦는 사람 종해(宗海)란 이가 있어, 냇가에 암자를 세웠네. 이미 산수의 낙을 따르고, 또 향화(香火)의 인연을
부쳤네. 서늘한 가을 아름다운 달밤에, 바위를 쓸고 차 마시는 자리를 열었다. 새것을 맛보려고 대추ㆍ밤을 따고,
옛것을 얘기하여 깊고 미묘한 것을 다한다. 인하여 중니(仲尼)의 말을 생각하고, 자못 소성(小聖)의 선(禪)도
생각한다. 무생(無生)의 이치로 서천(逝川)이라 이름지어, 오래 전하기를 기약한다. 만일 드높이 깨달아 잡는
다면, 물결이 모두 옮기지 않으리라." 하였다.
소림사(小林寺) : 주 동남쪽 10리에 있다. 관음사(觀音寺) : 조천관포(朝天館浦)에 있다.
사묘 사직단(社稷壇) : 주 남쪽에 있다. 문묘(文廟) : 향교에 있다.
광양당(廣壤堂) : 주 남쪽 한라 호국신사(護國神祠)에 있다. 속설에, "전하기를 한라산신(漢拏山神)의 아우가
나서부터 성스러운 덕이 있었고, 죽어서는 신이 되었다.
고려 때에 송(宋) 나라 호종단(胡宗旦)이 와서 이 땅을 제어하고 바다에 떠서 돌아가는데, 신이 화하여 매가
되어서 돛대 머리에 날아 올랐다. 조금 있다가 북풍이 크게 불어서 종단의 배를 쳐부셔 서쪽 지경 비양도(飛揚島)
바위 사이에서 죽었다. 조정에서 그 신령스럽고 이상함을 포창하여 식읍(食邑)을 주고 광양왕(廣壤王)을 봉하고
해마다 향(香)과 폐백을 내려 제사하였고, 본조에서는 본읍으로 하여금 제사지내게 하였다." 하였다.
○ 상고하건대 호종단이 와서 고려에 벼슬이 기거사인(起居舍人)에 이르고 죽었으니, 와서 땅을 제어하다가
배가 침몰되었다 하는 말은 믿을 수 없다.
차귀사(遮歸祠) : 주 서쪽 3리에 있다. 천외사(川外祠) : 주 서쪽 70리에 있다.
초춘사(楚春祠) : 주 동쪽 70리 정의현(旌義縣) 경계에 있다. 여단(厲壇) : 주 동쪽에 있다.
성황사(城隍祠) : 주 남쪽 16리 한라산 아래에 있다.
고적 모흥혈(毛興穴) : 주 남쪽 2리에 있다. 건치연혁의 주에 자세하다.
서산(瑞山) : 고려 목종(穆宗) 5년 6월에 산이
바다 가운데에 솟아나왔는데 산에 네 구멍이 뚫리고 용암이 솟아나와 닷새 만에 그쳤는데, 그 물이 모두 엉기
어 기왓돌[瓦石]이 되었다.
10년에 상서스러운 산[瑞山]이 바다 가운데에 솟아나왔다. 태학박사 전공지(田拱之)를 보내어 가서 보았는데
사람들이 말하기를, "산이 처음 나올 때에 구름과 안개가 자욱하고 우레 소리를 내며 땅이 움직였는데,
일곱 주야 만에 비로소 개였다.
산의 높이가 백여 길이나 되고 주위가 40여 리나 되는데, 초목이 없고 연기가 그 위에 덮이고 바라보기에 석류황
(石硫黃) 연기 같아서 사람들이 두려워서 감히 가까이 가지 못하였다. 공지(拱之)가 친히 산밑에 이르러 그 모양
을 그려 바쳤다." 하니, 지금 대정현(大靜縣)에 속한다.
칠성도(七星圖) : 주 성 안에 있다. 돌로 쌓았던 옛 터가 있다. 삼성(三姓)이 처음에 나와서 삼도(三徒)를 나누어
차지하고 북두성 모양으로 대를 쌓아 나누어 웅거하고 인하여 칠성도(七星圖)라고 이름하였다.
대촌(大村) : 삼도(三徒)를 합하여 살아서 큰 마을이 되었는데, 곧 지금의 주성(州城)이다. 고을 사람들이 성 안을
대촌(大村)이라고 한다.
고령전(高齡田) : 주 동쪽 1리에 있다. 속설에 전하기를, "당(唐) 나라 배가 와서 파선한 곳이다." 한다. 지금도
밭을 가는 사람들이 혹 마노(碼𥔥) 등 보물을 파서 얻는데 당 나라 사람들이 유실한 것이라 한다.
지금 한라산 밑 바닷가에 있는 바윗돌을 보면 모두 바닷물에 깎인 곳이 있으니, 의심컨대 상고(上古)에는 모두
바다였던 것이 지금은 변하여 밭이 되었나보다.
동무소협(東巫小峽) : 고기(古記)에 이르기를, "한라산의 일명은 원산(圓山)이니, 곧 바다 가운데 있다는 원교산
(圓嶠山)이고 그 동쪽은 동무소협인데 신선이 사는 곳이다. 또 그 동북쪽에 영주산(瀛洲山)이 있으므로 세상에서
탐라를 일컬어 동영주(東瀛洲)라 한다." 하였다.
고토성(古土城) : 주 서남쪽 36리에 있는데, 둘레가 15리이다. 삼별초가 쌓은 것인데 지금은 모두 허물어졌다.
고성(古城) : 주 성 서북쪽에 고성의 남은 터가 있다. 고장성(古長城) : 바닷가에 따라 둘러 쌓았는데 둘레가 3백
여 리이다. 고려 원종(元宗) 때에 삼별초가 반란을 일으켜 진도에 웅거하니, 왕이 시랑 고여림(高汝林)의 무리를
탐라에 보내어 군사 1천을 거느리고 방비하고, 인하여 장성(長城)을 쌓았다.
항파두고성(缸波頭古城) : 주 서쪽 10리에 있다. 성 안에 샘이 있어 큰 가뭄에도 마르지 않는다. 고려 원종 12년
에 김방경(金方慶)을 보내어 삼별초를 진도에서 토벌하여 물리칠 때, 김통정(金通精)이 삼별초를 거느리고 와서
귀일촌(貴日村) 항파두리에 웅거하고 이성을 쌓아서 막았다. 방경의 무리가 나아가 쳐서 함락시키고, 천호
윤방종(尹邦賨)을 시켜 원 나라 군사 4백 명과 관군 1천 명을 거느리고 머물러 지키게 하고 돌아왔다.
애월목성(涯月木城) : 주 서쪽 42리에 있는데 곧 삼별초가 쌓은 것으로서 관군을 막던 곳이다. 지금은 반은 퇴락
하였다. 동제원(東濟院) : 주 동쪽 9리에 있다. 남은 터가 있는데 곧 이문경(李文京)이 군사를 진쳤던 곳이다.
장평(長坪) : 주 서쪽 6리에 있다. 고려 원종 때에 문행노(文幸奴)가 난을 일으켜 군사를 장평(長坪)에 주둔시켰
는데, 부사 최탁(崔托)과 성주(星主) 양호(梁浩)의 무리가 쳐서 평정하였다.
달루하치부[達魯花赤府]ㆍ군민안무사부(軍民安撫使府) : 고려 충렬왕(忠烈王) 때에 원 나라 탑라치[塔羅赤]
가 소ㆍ말ㆍ낙타ㆍ나귀ㆍ양을 싣고 와서 수산평(水山坪)에 방목하였는데 말이 번식하였다.
이 뒤에 원 나라에 달루하치[達魯花赤]와 총관부(摠官府)를 설치하고 고인단(高仁旦)을 총관으로 삼아 부의
행정을 처리하다가 조금 뒤에 파하였고, 그 뒤에 또 군민안무사부(軍民安撫使府)를 설치하고 탑치(塔赤)로
달루하치를 삼아 부의 일을 처리하다가 조금 뒤에 또 파하고, 도로 고려에 예속시켰다. 지금 주 성 북쪽 해안에
옛 관부의 남은 터가 있는데, 의심컨대 곧 그 땅인 듯하나, 상고할 수 없다.
송담천(松淡川) : 주 동쪽 13리에 있다. 이문경(李文京)이 군사를 놓아 불사르고 약탈하니, 고여림(高汝林)의
무리가 이곳에서 맞아 싸워 이기지 못하였다. 문경이 관군을 모두 죽이고 조천포(朝天浦)에 웅거하였다.
귀일촌(貴日村) : 주 서쪽 20리에 있다. 고내현(高內縣) : 주 서쪽 45리에 있다.
애월현(涯月縣) : 주 서쪽 42리에 있다.
곽지현(郭支縣) : 주 서쪽 50리에 있다.
귀덕현(歸德縣) : 주 서쪽 60리에 있다. 고려 희종(熙宗) 7년에 주의 석천촌(石
淺村)을 승격하여 귀덕현을 만들었다. 명월현(明月縣) : 주 서쪽 60리에 있다.
신촌현(新村縣) : 주 동쪽 25리에 있다.
함덕현(咸德縣) : 주 동쪽 30리에 있다. 금녕현(金寧縣) : 주 동쪽 50리에 있다.
○ 이상 각 현이 모두 직촌(直村)이 된다.
신증 시사석(矢射石) : 주 동쪽 12리에 있다. 고로들이 전하는 말에, "삼성(三姓)이 터를 정할 때에 활을 쏜 것인데,
지금도 쏜 자국이 아직 남아있다." 하였다.
명환고려 최척경(崔陟卿) : 의종(毅宗) 때에 판이부사 최윤의(崔允儀)가 척경의 맑고 곧음을 듣고 탐라령(耽羅令)
을 제수하였다. 척경이 관청에 이르러 백성에게 이익이 되는 것을 일으키고 폐단이 되는 것을 고치니, 백성들이
모두 편안히 여겼다. 그 뒤에 탐라 사람들이 현령(縣令)이 침노의 사나운 것을 괴롭게 여겨 반란을 일으켰다.
말하기를, "만일 최척경으로 현령을 삼는다면 무기를 버리겠다." 하였다. 왕이 말하기를, "이런 어진 사람이 있다
면 왜 쓰지 않으랴." 하고, 불러서 비단을 주고 곧 탐라령을 제수하였다.
탐라 사람들이 그가 온다는 말을 듣고 곧 경쾌한 배를 갖추어 맞아서 지경에 들어오자 모두 창을 던지고 나열
하여 절하면 말하기를, "공께서 오셨으니 우리들은 살았습니다." 하고, 전과 같이 편안히 살았다.
조동희(趙東曦) : 의종(毅宗) 12년에 왕명을 받들고 선유하여 안무사가 되었다.
김구(金坵) : 주의 판관이 되었다가 만기가 되자, 들어와 직한림원(直翰林院)이 되었다.
경세봉(慶世封) : 청백으로 일컬어졌다.
김지석(金之錫) : 고종(高宗) 때에 부사가 되었다. 주의 풍속에 남자가 나이 15세 이상이 되면 해마다 콩 10두
(斗)를 바치고, 아문(衙門) 아전은 해마다 말 한 필씩을 바쳐 부사와 판관이 나누어 받았다. 지석이 고을에 이르는
날에 곧 면제하였다. 정사가 맑기가 물 같으니, 백성들이 그 덕을 생각하였다. 고을 사람들이 말하기를, "앞에는
세봉(世封)이 있고 뒤에는 지석이 있다." 하였다.
최서(崔瑞) : 충렬왕(忠烈王) 때에 목사가 되었다.
이백겸(李伯謙) : 충숙왕(忠肅王) 때에 제주의 도적 괴수 사용(使用)ㆍ김성(金成) 등 무리가 흉한 도당을 불러
모아 성주(星主) 왕자(王子)를 쫓고 반란을 일으켰는데, 토벌하고자 하나 적당한 사람을 구하기 어려웠다.
적의 도당이 모두 말하기를, "만일 이백겸(李伯謙)ㆍ이영(李英)이 와서 무마한다면 우리가 어찌 감히 모반하겠
는가." 하였다. 이에 백겸과 영을 보내어 무마하니 얼마 안 되어 적이 평정되었다.
백겸이 일찍이 목사가 되었었기 때문에 백성들이 사랑하고 두려워하기를 이와 같이 하였다.
전록생(田祿生) : 충혜왕(忠惠王) 때에 과거에 올라 제주 사록(司錄)이 되었다.
이원항(李元恒) : 목사가 되었다.
윤시우(尹時遇) : 공민왕(恭愍王) 5년에 찬성사로서 도순문사가 되었다.
임희재(林熙載) : 공민왕 6년에 안무사가 되었다. 박윤청(朴允靑) : 공민왕 18년에 목사가 되었다.
조익청(曹益淸) : 안무사가 되었다. 성준덕(成俊德) : 공민왕 때에 성주 고복수(高福壽)가 반란을 일으키고,
원 나라에 예속되기를 청하니, 왕이 준덕을 목사로 삼아서 진압하였다.
임박(林樸) : 공민왕 때에 선무사(宣撫使)가 되었다. 고을에 이르자 만호(萬戶)에게 이르기를, "달달목자(達達牧
子)가 반역하기를 좋아하니 마땅히 마음을 다하여 무마하고 회유하라." 하고, 또 성주(星主) 왕자(王子)에게
이르기를, "그대들이 여러 대를 복종하여 섬겨왔고, 역대로 그대들을 대접하기를 또한 심히 두터이 하였으니,
마땅히 각각 마음을 한결같이 하여 목자(牧子)로 더불어 반란을 선동하지 말라." 하였다. 이에 성주 왕자와 군사
와 백성이 모두 꿇어 엎드려서 말하기를, "조정의 보낸 관원이 모두 임선무(林宣撫) 같다면 우리들이 어찌 반역
하는 데에 이르겠는가." 하였다.
이하생(李夏生) : 공민왕 때에 안무사가 되었다. 본조 최해산(崔海山) : 홍화각(弘化閣) 기문에 자세하다.
오식(吳湜) : 정의(旌義) 연혁에 자세하다. 신숙청(辛淑晴) : 관덕정(觀德亭) 기문에 자세하다.
기건(奇虔) : 성품이 고집이 있고 청렴하고 근신하여 일찍이 안무사가 되었을 때에, 고을에서 복어가 나는데
그것을 바다에서 따려면 백성이 심히 고통스럽게 여겼다. 기건이 말하기를, "백성이 고통을 받는 것이 이와 같은
데 내가 차마 먹겠는가." 하고 드디어 먹지 않으니, 사람들이 따라서 먹지 않고, 모두 그 청렴한 것을 탄복하였다.
이유의(李由義)ㆍ문여량(文汝良) : 모두 목사가 되었다. 이약동(李約東) : 목사가 되어 대체를 알았다. 지금까지
칭송한다.
이종윤(李從允) : 목사가 되어 정사가 맑고 간이함을 숭상하였다. 아전이 사랑하고 백성이 기뻐하여 임기가 다
되자 글을 올려 유임시켜 주기를 청하였다. 마침내 관에서 죽으니, 사람들이 매우 애석하게 여겼다.
신증 민휘(閔暉)ㆍ김률(金硉)ㆍ방유녕(方有寧) : 모두 목사가 되었는데, 다같이 청렴하고 간이하다고 일컬어졌다.
인물신라 고후(高厚)ㆍ고청(高淸) : 연혁에 나왔다.
고려 고유(高維) : 정종(靖宗) 때에 과거를 보아 이작정(李作挺)의 방(榜) 제삼인(第三人)에 급제하여 벼슬이
우복야에 이르렀다. 고씨(高氏)가 조정에 벼슬한 것이 유(維)로부터 시작하였다.
고조기(高兆基) : 유의 아들이다.
처음 이름은 당유(唐愈)인데 성품이 개결하고 서적을 널리 보았다. 예종(睿宗) 때에 과거에 올라 나가서 남방
고을에 수령이 되었는데 청백하게 행정하였다. 벼슬이 정당문학 참지정사에 이르고 중서시랑평장사에 승진
하였다.
고적(高適) : 조기(兆基)의 손자인데 본주의 유총관이 되었다.
본조 고득종(高得宗) : 과거에 올라 벼슬이 한성부윤(漢城府尹)에 이르렀다.
○ 정이오(鄭以吾)가 지은 성주(星主) 고씨(高氏) 가전(家傳)에, "고려 태조가 삼한을 통일한 처음에,
성주 고자견(高自堅)과 왕자 양구미(梁具美)가 역대로 한번 조회하여 뵈였고, 조정에 벼슬하여 크게 나타난 자는
없었다. 고유(高維)가 비로소 빈공(賓貢)으로 정왕(靖王) 을유년에 첫째로 남성(南省)주D-011에 합격하고, 이듬
해 병술년에 이작정(李作挺)의 방 가운데의 셋째가 되어 벼슬이 우복야에 이르렀다.
아들 조기(兆基)는 처음 이름은 당유(唐愈)인데 예왕(睿王) 정해년에 한즉유(韓卽由)의 방에 과거하여 벼슬이
평장이부사(平章吏部事)에 이르렀다. 아들은 정익(廷益)인데 정익의 아들 적(適)이 조기의 시집(詩集)의 서문에
쓰기를, "아들 정호(廷琥)는 관직이 삼품(三品)에 그쳤는데, 그 아우 성명(誠明)과 함께 모두 일찍 죽었고,
오직 정익만이 원왕(元王) 계사년에 물러가기를 청하여 고향으로 돌아왔다." 하였는데, 선유 최해(崔瀣)가 동인문
(東人文)에 주를 내기를, "조기가 아들이 없고 세 딸만 있다." 하였으니, 이는 알지 못한 것이다.
고적(高適)은 원왕 신유년에 과거하여 곧 금규(金閨)주D-012에 들어갔었는데, 근친(覲親)으로 인하여 고향에
돌아왔다가, 원왕 8년에 이르러 신의군(神義軍) 삼별초가 반란하여 탐라에 들어오니, 국가에서 군사를 보내어
쳐서 다 죽이고 고적(高適)을 유총관(留摠官)으로 삼아서 특별히 명하여 남은 백성을 안무하게 하였다.
무인년 여름에 조정에 들어오니, 왕이 친히 금패(金牌)를 주었다. 대를 이어 드디어 현달한 5세손 인탄(仁坦)은
작위를 이어받았고 아들 고석(高碩)은 서도부천호(西道副千戶)가 되었고, 석의 아들 순량(順良)이 성주의 지위
를 이어받아 아우 순원(順元)이 이었고, 아들 호조전서(戶曹典書) 신걸(臣傑)이 이었고, 신걸의 아들이 넷인데,
인봉(仁鳳)ㆍ의봉(義鳳)ㆍ예봉(禮鳳)ㆍ지봉(智鳳)이다. 지봉은 곧 득종의 아버지이다.
고태필(高台弼) : 득종(得宗)의 아들인데 과거에 올라 벼슬이 개성부유수(開城府留守)에 이르고, 아우 태정
(台鼎)은 기묘년 과거에 장원하여 벼슬이 봉상시정(奉常侍正)에 이르렀다.
신증효자본조 김평(金枰) : 고을 아전이다. 어머니가 종기를 앓아서 기절하자 두 번이나 정강이 살을 베어 피를
내어 술에 타서 드렸는데 병이 드디어 나았다. 사실이 조정에 들리자 정문을 내렸다.
제영 본토의 성(姓)은 성주(星主)를 높인다 : 이첨(李詹)의 시에, "본토의 성은 성주(星主)를 높이고, 산 이름은
한라(漢拏)라고 부른다." 하였다.
깊은 겨울의 귤과 유자는 서리를 맞아 지붕에 매달렸도다 : 정이오(鄭以吾)의 시에, "깊은 겨울의 귤과 유자는
서리를 맞아 지붕에 매달렸고, 몇 곳의 갈대밭 사이로 달이 배에 가득하구나." 하였다.
땅이 궁벽하니 노는 사람이 적다 : 중 혜일(慧日)의 시에, "매화 언덕에 바야흐로 섣달이 늦었는데, 서리가 내린
나뭇가지에 홀연히 봄이 피어난다. 차가운 향기가 비록 사랑스러우나, 땅이 궁벽하니 놀러오는 사람이 적구나."
하였다.
악와(渥洼)의 용종(龍種)은 기린(麒麟)을 낳는다 : 권우(權遇)의 시에, "동정(洞庭)의 천향(天香)은 감귤(柑橘)이
있고, 악와(渥洼)의 용종은 기린을 낳는다." 하였다.
만 필이나 되는 준마는 한가하게 들에 놓았다 : 이흥문(李興文)의 시에, "만 필의 준마는 한가하게 들에 놓았고,
천 주의 귤과 유자는 교묘하게 가을을 단장하였다." 하였다.
향기가 발에 스며드니 귤이 있는 것을 알겠다 : 이유의(李由義)의 시에, "향기가 발에 스며드니 귤이 있는 것을
알겠고, 바람이 빈 집에 불어오니 가을 기운이 나는 것을 깨닫겠다." 하였다.
도근천(都近川)이 살쪘으니 조수가 긴 밤이다 : 민수(閔粹)의 시에, "도근천이 살쪘으니 조수가 긴 밤이요,
한라산이 야위었으니 잎사귀가 시드는 가을이로다." 하였다.
돌담과 판잣집은 백성 사는 곳이 궁벽하다 : 전 사람의 시에, "물 나라의 갈대는 운몽(雲夢)주D-013의 저녁이요,
산성의 귤과 유자는 동정(洞庭)주D-14의 가을이로다. 돌담과 판잣집은 백성 사는 곳에 궁벽하고, 다른 옷과 다른
말 소리는 손된 사람의 근심이로다." 하였다.
땅은 유기(幽冀) 같아서 말이 좋은 것이 많다 : 이승소(李承召)의 시에, "풍속은 주진(朱陳)주D-015 같아서 백성
이 부리기가 쉽고, 땅은 유기(幽冀)주D-16 같아서 말이 좋은 것이 많다, 뽕나무와 삼밭에 비가 족하니 집집마다
기뻐하고, 귤과 유자에 서리가 무르익으니 나무 향기로다." 하였다.
구름이 봉도(蓬島)주D-17에 열리니 오잠(鰲岑)주D-18이 가깝도다 : 서거정(徐居正)의 시에, "눈이 꽃 사이에
가득한데 푸른 새가 울고, 서리가 울타리가에 깊었으니 누른 감자(柑子)가 익었도다.
구름이 봉도에 열리니 오잠이 가깝고, 해가 부상(扶桑)에 나오며 바다 기운 휩싸네." 하였다.
향기로운 감자(柑子)는 한(漢) 나라 포도(葡萄)보다 더 좋다 : 앞사람의 시에, "땅이 선도(仙島)에 연하였으니 사람
살기가 좋고, 공(貢) 바치는 것이 조정에 들어가니 산물이 풍부하도다. 이름난 기마(驥馬)는 이미 대원(大宛)주D-
19의 요뇨(騕褭)주D-20보다 낫고, 향기로운 감자(柑子)는 한(漢) 나라 포도주D-21보다 더 좋다." 하였다.
[비고]
연혁 예종 원년에 목사를 다시 두었으며, 후에 또 방어사를 겸하게 하였다. 인조 20년에 방어사를 없앴다가 후에
겸하게 하였다.
읍호 영주(瀛州).
관원 목사 : 제주진(濟州鎭)의 병마수군절제사와 방어사를 겸한다. 판관 : 제주진의 병마수군절제도위와 교수ㆍ
감목관을 겸한다. 각각 한 사람씩이다. 역학이원(譯學二員) : 한학(漢學)ㆍ왜학(倭學) 심약(審藥)ㆍ검률(檢律)은
각각 한 사람씩이다.
방면 동도(東道)ㆍ서도(西道) : 도약정(都約正)ㆍ약정(約正)ㆍ직월(直月)을 동서도(東西道)에 각각 세 사람씩
배치하였다.
이십칠면(二十七面) : 면마다 권농(勸農)ㆍ이정(里正)을 각각 한 사람씩 두었으며, 리(里)마다 좌주(座主)ㆍ
좌상(座上)ㆍ소무(所務)를 각각 한 사람씩 두었다.
성지 고성(古城) : 제주성 서북쪽에 있으며 옛 터가 남아 있다.
고토성(古土城) : 서남쪽으로 36리에 있으며 둘레는 15리이고 삼별초가 쌓았다.
항파두고성(缸波頭古城) : 서쪽으로 20리에 있으며 가운데 커다란 샘물이 있다. 삼별초가 이 성을 근거지로 삼고
항거하니, 김방경(金方慶)이 공격하여 정벌하였는데, 원(元) 나라 병사 4백 명과 더불어 진에서 1천여 일 동안
머물다가 돌아갔다.
고장성(古長城) : 바다에 연하여 둥그렇게 쌓였으며 길이는 모두 3백여 리이다. 삼별초의 반란군이 근거지로
삼았으며 왕이 파견한 시랑 고여림(高汝霖) 등이 진도에서 이곳으로 와서 탐라의 반란군 1천여 명에 대비하여
긴 성을 쌓았다.
○ 제주는 동서가 2백 리이고 남북이 1백 20리이다. 섬은 모두 석벽으로 둘러싸였으며 바다에는 뾰쪽한 바위들
이 깔려 있어 배가 정박할 수 없다. 근래에 오직 어천포(於川浦) 입구에 석보(石堡)를 설치하여 방어에 대비
하였다.
영아 방영(防營) : 연혁(沿革)에 보인다. 병마수군 방어사 : 목사가 겸하였다. 중군(中軍) : 판관이 겸하였다.
봉수 시리(時里)ㆍ도내악(道內岳)ㆍ왕가(往可)ㆍ사라(紗羅)ㆍ서산(西山).
창고 창(倉)은 2개 있고 고(庫)는 8개 있다 : 모두 성안에 있다. 동별창(東別倉) : 별방소(別防所)에 있다.
서별창(西別倉) : 명월포(明月浦)에 보인다.
목장 장올악(長兀岳)으로부터 감은덕악(感恩德岳)까지 모두 6곳이 있고, 또 우둔(牛屯)ㆍ산둔(山屯)ㆍ
을병별둔(乙丙別屯)ㆍ청마별둔(淸馬別屯)ㆍ양잔고유저권(羊棧羔囿猪圈)이 있다 : 본주 사람으로서 감목관이
한 사람 있는데, 본주 사람만으로 차출한다.
본래 원 나라 때의 동서합적(東西哈赤)이었는데 후에 동서아막(東西阿幕)으로 되었다.
○ 충렬왕 3년에 원 나라에서 목장을 만들어 단사관(斷事官)을 보내거나 혹은 만호를 두어 목축을 주관하게
하였다.
교량 감덕포석교(感德浦石橋) : 길이가 1백 10보이고 다리의 북쪽은 바다에 연하였는데 높고 준험한 절벽이다.
가락교(嘉樂橋) : 동문 안에 있다. 화북천교.누정 망경루(望京樓).
단유 한라산단(漢拏山壇) : 본조 숙종조에 처음으로 제사하였다.
광양단(廣壤壇) : 남쪽으로 3리에 있는데 한라의 호국신단(護國神壇)이다. 고려 때 광양(廣壤)이라 하였고 3년이
지난 후에 향축(香祝)을 내려 제사토록 하였다. 본조에서도 본읍으로 하여금 제사를 드리게 하였다.
풍운뢰우단(風雲雷雨壇) : 서쪽으로 3리에 있으며 옛날에는 있었는데 중간에 폐하였다가, 본조 숙종 기해년에
다시 설치하였다.
사원 삼성사(三姓祠) : 영종 계미년에 건립하였으며 성종 갑인년에 사액하였다.
양을나(良乙那)ㆍ고을나(高乙那)ㆍ부을나(夫乙那).
○ 귤림서원(橘林書院) : 선조 무인년에 건립하였으며 숙종 임술년에 사액하였다.
김정(金淨)ㆍ송린수(宋麟壽) : 모두 청주(淸州)에 보인다.
김상헌(金尙憲) : 태묘에 보인다. 정온(鄭蘊) : 광주(廣州)에 보인다. 송시열(宋時烈) : 문묘에 보인다.
이약동(李約東) : 자는 춘보(春甫)이고 호는 노촌(老村)이며 본관은 벽진(碧珍)이다. 벼슬은 지중추였으며 시호
는 평정(平靖)이다. 이회(李檜) : 자는 자방(子方)이고 본관은 연안(延安)이며 벼슬은 목사였다.
○ 위의 두 사람은 현종 기유년에 별사(別祠)에 배향하였다.
[주 D-001] 직방씨(職方氏) : 직방씨는 벼슬 이름인데 천하의 지도를 맡고 사방 직장의 직공(職貢)을 주관한다.
[주 D-002] 방성(房星) : 방성은 이십팔 수(宿)의 하나인데 거마(車馬)를 맡은 별이다.
[주 D-003] 굴산(屈産) : 《좌전(左傳)》과 《곡량전(穀梁傳)》 주에는, 굴(屈)은 고을 이름이요, 산(産)은 말을
산출하는 것이라 하였고, 《공양전(公羊傳)》 주에는 굴산(屈産)은 땅 이름인데 명마를 산출하는 땅이라 하였다.
[주 D-004] 오병(五兵) : 과(戈)·수(殳)·극(戟)·추모(酋矛)·이모(夷矛) 다섯 가지 무기를 말한다.
[주 D-005] 상산(常山) : 회계(會稽)의 상산에 뱀이 있는데, 머리를 치면 꼬리가 이르고 꼬리를 치면 머리가
이르고 허리를 치면 머리와 꼬리가 함께 이른다. 예전의 진세(陳勢)에 많이 모방하였다.
[주 D-06] 간성(干城) : 밖을 막고 안을 호위하는 것을 말함. 시경에 공후간성(公侯干城)이라는 말이 있다.
[주 D-07] 죽백(竹帛) : 예전에 문자를 기록하는 데에 대나무와 나무로 만든 죽간과 목간을 사용하였는데,
진(秦) 나라 때에 백(帛)으로 대신하였다.
[주 D-008] 조주(潮洲)의 악어 : 한유(韓愈)가 조주 자사(潮州刺史)로 있을 때에 축악어문(逐鱷魚文)를 지어서
제사하였는데 악어가 물러갔다.
[주 D-009] 초루(譙樓) : 이른바 고루(鼓樓)라는 것인데 문 위에 높은 다락을 지어서 먼 곳을 바라보는 것.
[주 D-010] 백록동(白鹿洞) : 백록동은 강서(江西) 여산(廬山) 오로봉(五老峯) 밑에 있다.
송 나라 초년에 서원(書院)을 두었다가 폐지하였는데, 주자(朱子)가 지남강군사(知南康軍事)로 있을 때에 중건
하고 여기에서 강학하였다.
[주 D-011] 남성(南省) : 상서성(尙書省)을 남성이라 한다.
[주 D-012] 금규(金閨) : 금규(金閨)는 곧 금마문(金馬門)이다. 한 무제(漢武帝) 때에 학사(學士)로 하여금
금마문에서 조서를 기다리게 하였다.
[주 D-013] 운몽(雲夢) : 운몽은 소택(沼澤) 이름인데 호북성(湖北省) 안륙현(安陸縣) 남쪽에 있다.
[주 D-14] 동정(洞庭) : 동정은 동정호(洞庭湖)를 말함인데 귤 이름에 동정귤(洞庭橘)이 있다.
[주 D-015] 주진(朱陳) : 서주(徐州) 고풍현(古豐縣) 어떤 마을에 주씨(朱氏)·진씨(陳氏) 두 성만 살아서 대대로
혼인을 하기 때문에 그 마을을 주진촌(朱陳村)이라고 하였다.
[주 D-16] 유기(幽冀) : 유주(幽州)·기주(冀州)는 좋은 말이 많이 산출되는 땅임.
[주 D-17] 봉도(蓬島) : 봉도는 곧 봉래산인데 삼신산의 하나로 발해 가운데에 있다 한다.
[주 D-18] 오잠(鰲岑) : 오잠은 오배삼산(鼇背三山)을 말함. 발해 동쪽에 산이 있어 물결에 따라 왕래하므로 큰
자라 열다섯 마리를 시켜 산을 이고 있게 하였다 한다.
[주 D-19] 대원(大宛) : 대원(大宛)은 예전 나라 이름인데 지금 중앙 아시아에 있는 땅이다.
[주 D-20] 요뇨(騕褭) : 요뇨는 예전 신기한 말의 이름인데 주둥이는 금빛이 나고 몸둥이는 붉으며
날마다 1만 8천 리를 행한다 하였다.
[주 D-21] 포도 : 한(漢) 나라 때에도 이미 포도주가 있었는데, 역시 서역에서 전래한 것이다.
정의현 旌義縣
동쪽으로 제주 경계까지 26리, 북쪽으로 제주 경계까지 20리, 서쪽으로 대정현(大靜縣) 경계까지 37리,
남쪽으로 바다까지 7리이다.
건치연혁 본래 제주(濟州) 동도(東道)인데 본조 태종(太宗) 16년에 제주 안무사 오식(吳湜)의 건의에 따라서
한라산 남쪽 넓이 90여 리의 땅을 쪼개어 동쪽은 정의(旌義)를 삼고 서쪽은 대정(大靜)을 삼아 모두 현감을
두었다.
관원 현감(縣監)ㆍ훈도(訓導) : 각각 한 사람이다.
성씨 제주와 같다.
풍속 제주와 같다.
토산 제주와 같다.
산천 한라산 : 현 서쪽 20리에 있다. 영주산(瀛洲山) : 속칭 영지(瀛旨)인데 현 북쪽 4리에 있다.
산 북쪽은 곧 정의(旌義) 금녕(金寧) 등이다. 고기(古記)에 이르기를, "정의(旌義)ㆍ금녕(金寧)ㆍ함덕(咸德)에
신선(神仙)이 많다." 하였고 세상에서 또 전하기를, "이 산이 곧 바다 위 삼선산(三仙山)의 하나이다." 한다.
지말산(只末山) : 현 동쪽 35리에 있다. 말산(末山) : 현 동쪽 27리에 있다. 수산(水山) : 현 동쪽 24리에 있다.
달산(達山) : 현 남쪽 9리에 있다. 토산(兎山) : 현 남쪽 17리에 있다.
지세지(地稅旨) : 현 서쪽 90리에 있는데, 둘레가 29리이다.
광분평(廣分坪) : 현 서쪽 89리에 있는데 둘레가 23리이다. 포악(蒲岳) : 현 서쪽 40리에 있다. 둘레가 30리이다.
운지악(雲之岳) : 현 서쪽 32리에 있다. 둘레가 4리이다.
화등지(火等枝) : 동쪽 둘레는 8리이고 남쪽 둘레는 25리이다.
수망(水望) : 현 서쪽 30리에 있다. 둘레가 19리이다. 안좌악(安佐岳) : 현 서쪽 15리에 있다. 둘레가 27리이다.
수악(水岳) : 현 서쪽 45리에 있다. 봉우리 위에 용추(龍湫)가 있는데 깊이를 헤아릴 수 없다.
가물 때에 기우제를 지내면 영험이 있다.
삼매양악(三每陽岳) : 현 서쪽 30리에 있다. 악(岳)의 가운데가 트이고 넓어서 수전(水田) 수십 경(頃)이 있다.
이름이 대지(大池)이다.
월라산악(月羅山岳) : 현 서쪽 50리에 있다.
대교수(大橋藪) : 현 동쪽 17리에 있다. 대수(大藪) : 현 남쪽 4리에 있다. 수성악(水城岳) : 현 북쪽 32리에 있다.
산꼭대기에 모인 돌이 성과 같고 가운데는 큰 못이 있다.
성판악(城板岳) : 현 서쪽 50리에 있는데 석벽이 성 쌓는 널판 같기 때문에 이름지은 것이다.
왕동(往洞) : 현 서쪽 10리에 있다. 둘레가 20리이다.
방암(方巖) : 한라산 절정 사람의 발자국이 이르지 않는 곳에 있는데, 그 모양이 모나고 반듯하여 사람이 파서
만든 것 같다. 그 밑에는 사초(莎草)가 길을 이루어 향긋한 바람이 산에 가득하고, 황홀하게 관현의 소리가 들리
는데 어디서 들려오는지 알 수 없다. 세상에서 전하기를, "신선이 항상 노는 곳이다." 한다.
응암산(鷹巖山) : 현 남쪽 20리에 있다.
석적(石積) : 현 동남쪽 5리에 있다. 둘레가 29리이다. 감보지(甘甫旨) : 현 동쪽 14리에 있다. 둘레가 28리이다.
모골(毛骨) : 현 동쪽 10리에 있다. 둘레가 25리이다.
대지(大池) : 현 동쪽 15리에 있다. 둘레가 23리인데, 못에 순채와 마름이 있다.
뇌개(雷介) : 현 동쪽 20리에 있다. 둘레가 25리이다.
성산(城山) : 현 동쪽 25리에 있는데 둘레가 10리이다. 뻗쳐 큰 바다 가운데로 들어간 것이 5리 가량 되는데
형세가 개미허리 같다. 석벽이 깎은 듯이 병풍같이 둘러서 있는데 높이가 천여 길이나 된다. 돌을 파서 길을
만든 연후에야 오를 수 있다. 그 꼭대기는 평평하고 넓어서 2백여 보나 되는데, 잡초가 숲을 이루어 성안에 사는
것 같으므로 이름지었다. 그 밑에는 땅이 넓기가 10리 가량이나 된다.
개내지(箇乃池) : 현 동쪽 15리에 있다. 둘레가 25리이다. 유지포(酉只浦) : 현 동쪽 20리에 있다. 둘레가 25리
이다.
한좌보산(閑佐甫山) : 현 북쪽 7리에 있다. 둘레가 31리이다.
독달악(禿達岳) : 현 동쪽 20리에 있다. 둘레가 25리이다.
○ 지세지(地稅旨)로부터 이하는 모두 목장이다. 여질결천(餘叱結川) : 현 서쪽 18리에 있다.
개로천(介老川) : 현 동쪽 성밑에 있는데 남쪽으로 흘러 바다에 들어간다.
화등지천(火等枝川) : 현 서쪽 30리에 있다. 영천천(靈泉川) : 현 서쪽 52리에 있다.
호촌천(狐村川) : 현 서쪽 55리에 있다.
홍로천(洪爐川) : 현 서쪽 65리에 있다. 세속에서 전하기를, "탐라에서 원 나라에 조회할 때에 바람을 기다리던
곳이다." 한다.
○ 화등지천 이하는 그 근원이 모두 한라산에서 나와서 혹은 땅 가운데 잠복하고 혹은 돌 사이에 흘러 나와서
양쪽 언덕의 석벽이 몹시 험악하고, 낭떠러지고 가운데는 바윗돌이 깔려 있다. 남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
영천ㆍ호촌ㆍ홍로는 그 중에서 큰 것이다.
지귀도(知歸島) : 호촌리(狐村里)에 있다. 삼도(森島) : 높고 험하여 사람의 발자국이 통하지 않는다.
의탈도(衣脫島)ㆍ두락도(豆落島)ㆍ범도(柉島) : 이상 섬은 모두 홍로현(洪爐縣)에 있다.
정모연(正毛淵) : 현 서쪽 64리에 있다. 못이 깊어서 밭에 물을 대는 것이 대단히 많다.
조연(藻淵) : 현 서쪽 70리에 있다. 못에 마름과 수초가 많기 때문에 이름지은 것이다. 또 게도 있다.
성곽 읍성(邑城) : 돌로 쌓았는데, 둘레가 2천 9백 86척이고 높이가 24척이다.
○ 배추(裵樞)의 기문에, "백성의 편리를 들어주는 자와 백성의 마음을 원대한 계책으로 운용하는 자는 만세의
공을 세우는 것이다. 만일 편안한 데 있으면서 미천한 백성의 근심을 구휼하지 않고, 작게 하여 오래고 긴 꾀를
계획하지 않으면 백성의 근심과 탄식은 풀리지 못하고 성대한 공은 이르지 못할 것이다.
전라 한 도의 토지의 넓은 것과 인물의 많은 것이 제주(濟州)가 그 반을 차지하는데, 이것은 곧 예전 탐라국이다.
한라산이 가운데에 웅거하여 제주는 산 북쪽에 있다. 산의 동쪽 서쪽이 모두 90리 거리이고 산의 남쪽은 또 더
멀어서 백성이 왕래하려면 반드시 이틀 밤을 자야 하고 관청에서 공문을 보내면 며칠 후에야 이른다.
또 한 관리의 귀와 눈으로 항간의 폐단을 두루 살피기란 이것 역시 어려운 일이다. 그러므로 지난날에 학성(鶴
城) 오식(吳湜)공이 와서 제주를 안무할 때에 사정을 갖추어 조정에 급히 알리매 정리하여 셋으로 만들어서
서쪽에는 대정(大靜)을 두고 동쪽에는 정의(旌義)를 세웠다. 정의의 고을 생긴 것이 동쪽 끝 사람 없는 지경에
위치해서 산 남쪽까지가 팔구십 리도 내려가지 않고 가장 가까운 곳이 토산(免山)ㆍ진사(晉舍)인데, 역시 거의
30리가 되니 오상(吳相)이 절충하여 아뢰어 올린 뜻에는 어그러진다.
지금 도안무사 정상국(鄭相國) 간(幹)이 순시하여 진사(晉舍)에 이르러 말하기를, '여기에 현을 세우는 것이
마땅하다.' 하였다. 태수(太守) 송섬(宋暹)이 백성들에게 물어보니 백성들이 모두 기뻐서 좇았다. 이에 임금께
알려 병부의 공문에 의하여 세 고을 백성을 역사시키고, 주목(州牧)의 판관 최치렴(崔致廉)에게 명하여 감독
하게 하였다.
최공이 후하고 박한 것을 헤아리고 높고 낮은 것을 따져 인부 쓰는 것을 계산하고, 일의 기한을 헤아려 엄하게
명령을 시행하고 부지런하게 일을 보았다. 궁가(弓家)를 높이고 삼문(三門)을 세우니, 성터는 2천 5백 20척이고
높이는 13척이다. 계묘년 정월 9일에 시작하여 13일에 끝났으니 공정이 매우 신속하였다.
정 상국(鄭相國)이 와서 그 완성된 것을 보는데 나도 또한 따라 보았다. 낙성할 즈음에 내게 명하기를, '그 전말
을 기록하여 후대에 남기라.' 하여, 감히 졸함으로 사양하지 못하였다." 하였다.
대수산 방호소성(大水山防護所城) : 돌로 쌓았는데 둘레가 1천 2백 64척이고 높이가 26척이다.
서귀포 방호소성(西歸浦防護所城) : 돌로 쌓았는데 둘레가 1백 61척이고 높이가 5척이다.
관방 대수산 방호소(大水山防護所) : 현 동쪽 25리에 있다.
서귀포 방호소(西歸浦防護所) : 현 서쪽 71리에 있다.
오소포 방호소(吾召浦防護所) : 현 동쪽 43리에 있다.
오소포 수전소(吾召浦水戰所)ㆍ서귀포 수전소(西歸浦水戰所).봉수 남산(南山) 봉수 : 동쪽으로 오음사지악
(吾音沙只岳)에 응하고 서쪽으로 토산(免山)에 응한다.
오음사지악 봉수 : 현 동쪽 10리에 있다. 여을온(餘乙溫)에 응한다. 여을온 봉수 : 소수산(小水山)에 응한다.
소수산 봉수 : 현 동쪽 17리에 있다. 지말산(只末山)에 응한다. 지말산 봉수 : 제주 도의탄(道衣灘)에 응한다.
달산(達山) 봉수 : 토산에 응한다. 토산 봉수 : 전월론(餞月論)에 응한다. 전월론 봉수 : 호아촌(狐兒村)에 응한다.
호아촌 봉수 : 옛 호아현에 있다. 삼매양(三每陽)에 응한다.
삼매양 봉수 : 현 서쪽 80리에 있다. 대정현 거옥악(居玉岳)에 응한다.
누정 신루(新樓) : 곧 성의 문루이다. 영천관(靈泉館) : 영천천(靈泉川) 서쪽 언덕에 있어 영천사(靈泉寺)와 동쪽
서쪽으로 서로 마주하였다.
학교 향교(鄕校) : 현의 성 안에 있다.
교량 호촌교(狐村橋) : 호촌천(狐村川)에 있다.
불우 영천사 : 영천천 동쪽 언덕에 있다. 성불암(成佛庵) : 성불악(成佛岳)에 있다.
사묘 사직단 : 현 서쪽에 있다. 문묘 : 향교에 있다. 성황사 : 현 북쪽 3리에 있다. 여단(厲壇) : 현 북쪽에 있다.
고적 고정의현(古旌義縣) : 현 동쪽 27리에 있다. 원 나라 목자(牧子) 합적(哈赤)이 본주 만호를 여기에서 죽였다.
오식(吳湜)이 세 고을로 나눌 때에 인하여 현을 두었는데, 땅이 우도(牛島)에 가까워서 새벽과 밤에 고각(鼓角)
소리가 들리고 큰 바람이 여러 번 불어서 곡식이 흉년들고, 또 왜적이 번갈아 침노하므로 우리 세종(世宗) 5년에
안무사 정간(鄭幹)이 건의하여 현을 진사성(晉舍城)에 옮겼으니, 곧 지금의 읍내이다.
토산현(免山縣) : 현 남쪽 15리에 있다.
호아현(狐兒縣) : 현 서쪽 50리에 있다. 홍로현(洪爐縣) : 현 서쪽 61리에 있다.
○ 이상이 함께 직촌(直村)이 된다.
고성(古城) : 옛 정의현에 있다. 곧 오식이 현을 나눌 때에 쌓은 것인데 지금도 완전하고 단단하다.
수산평(水山坪) : 수산(水山) 서남쪽에 있다. 고려 충렬왕(忠烈王) 때에 원 나라 탑라적(塔羅赤)의 무리가 와서 소ㆍ
말ㆍ낙타ㆍ나귀ㆍ양을 이 들에 방목하였다.
열녀고려 정씨(鄭氏) : 직원(職員) 석나리보개(石那里甫介)의 아내이다. 합적(哈赤)의 난에 그의 남편이 죽었는데,
정씨는 젊고 아들이 없고 얼굴이 아름다웠다. 안무사 군관이 강제로 장가들려 하니, 정씨가 죽기로 맹서하여 칼을
끌어 스스로 목찌르려 하므로 마침내 장가들지 못하였으며, 늙도록 시집가지 않았다. 일이 알려져 정려하였다.
[비고]
연혁 세종 5년에 치소(治所)를 진사성(晉舍城)으로 옮겼다 : 옛 정의는 지금의 치소로부터 동쪽으로 27리에 있다.
고종 32년에 군(郡)으로 고쳤다. 《문헌비고》
방면 오면(五面) : 면마다 약정(約正)ㆍ직월(直月)ㆍ포도장(捕盜將)을 각각 한 사람씩 두었다.
성지 고 선의성 : 동쪽으로 25리에 있다. 태종 16년에 안무사 오식이 쌓았다.
○ 원 나라 목자 합적이 제주 만호를 이곳에서 죽였다.
창고 읍창(邑倉). 서별창(西別倉) : 서귀진(西歸鎭)에 있다.
목장 삼소(三所)ㆍ양잔(羊棧).
대정현 大靜縣
동쪽으로 정의현 경계까지 57리이고, 남쪽으로 바다까지 10리이고, 서쪽으로 제주 경계까지 37리이고,
북쪽으로 제주 경계까지 32리이다.
건치연혁 본래 제주 서도(西道)인데 태종(太宗) 16년에 비로소 현감을 두었다.
관원 현감ㆍ훈도 : 각각 한 사람이다.
성씨 제주와 같다.
풍속 제주와 같다.
토산 제주와 같다.
산천 한라산 : 현 동북쪽 40리에 있는 진산이다. 굴산(屈山) : 현 동쪽 25리에 있는데 99의 동리가 있다.
송악산(松岳山) : 현 남쪽 15리에 있는데, 세속 이름은 저별리(貯別利)이다. 산의 동쪽ㆍ서쪽ㆍ남쪽은 바다에
닿아서 석벽이 둘러서 있고 산꼭대기에 못이 있는데 직경이 백여 보나 된다.
모슬악(毛瑟岳) : 현 서남쪽 6리에 있다. 차귀악(遮歸岳) : 현 서쪽 26리에 있다.
산방산(山房山) : 현 동쪽 10리에 있는데 둘레가 9리이다. 세속에서 말하기를, "한라산의 한 봉우리가 쓰러져서
여기에 서있다." 한다. 그 남쪽 비탈에 큰 돌구멍이 있는데 물이 돌 위로부터 방울방울 떨어져서 샘이 되었다.
어떤 중이 굴 가운데에 집을 짓고 살아서 이름을 굴암(窟庵)이라 하였다.
김자상(金自詳)의 기문에 이른바 돌기와가 저절로 덮어서 장마비가 새지 못하고, 돌자리가 저절로 깔리어 들불
이 태우지 못하고, 돌벽이 저절로 서서 미친 바람이 흔들지 못하고, 돌우물이 저절로 솟아서 관물이 더럽히지
못한다는 것이 이것이다.
파고산(把古山) : 현 서쪽 5리에 있는데 둘레가 5리이다.
마라도(麽羅島) : 현 남쪽 25리에 있는데 둘레가 5리이다.
죽도(竹島) : 현 서쪽 26리에 있는데, 사면이 모두 석벽이다. 동남쪽에 배 대는 곳이 있으므로 왜적이 여기에
여러 번 들어와 침노하였다.
관도(貫島) : 현 동남쪽 15리에 있는데 둘레가 5리이다.
돌이 있어 남북으로 대치하여 있고 그 동쪽에 또 큰 돌이 있어 우뚝 서서 구멍이 성문과 같으므로 이름지은
것이다.
가파도(加波島) : 현 남쪽에 있다. 고도수(古道水)ㆍ시수(顋水) : 현 서북쪽 15리에 있는데 둘레가 31리이다.
모동(毛洞) : 현 서쪽 10리에 있는데 둘레가 50리이다. 병악(竝岳) : 현 동북쪽 25리에 있는데 둘레가 39리이다.
두 산이 나란히 섰으므로 이름지은 것이다. 고근산(孤根山) : 현 동쪽 57리 정의현 경계에 있다.
산꼭대기에 곧장 뚫린 큰 구멍이 있어 깊이를 알 수 없다. 둘레가 17리이다.
○ 이상 가파도 이하는 모두 목장이다.
차귀포(遮歸浦) : 현 서쪽 27리에 있다. 모슬포(毛瑟浦) : 모슬악(毛瑟岳) 동남쪽에 있다.
서림포(西林浦) : 현 서쪽 12리에 있는데 원 나라에 조회할 때에 바람을 기다리던 곳이다.
와포(瓦浦) : 현 서쪽 30리에 있다.
범질포(犯叱浦) : 현 서쪽 32리에 있다. 예래포(猊來浦) : 옛 예래현(猊來縣)에 있다.
색달천(塞達川) : 현 동쪽 35리에 있다. 감산천(甘山川) : 현 동쪽 15리에 있다.
가내대천(加內大川)ㆍ가내소천(家內小川) : 모두 현 동쪽 50여 리에 있다.
○ 색달천으로부터 이하는 그 근원이 모두 한라산에서 나온다. 두 언덕에 석벽이 깎아지른 듯하고 가운데는
암석이 깔리고 물결의 형세가 곧장 내려와 남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
성곽 읍성(邑城) : 돌로 쌓았는데 둘레가 2천 6백 47척이고 높이가 28척이다.
○ 하담(河澹)의 기문에, "무술년 여름 5월에 일이 있어서 이 현에 오니, 현의 원 유군(兪君) 신(信)이 술을 내어
위로하며 말하기를, '그대가 이 현이 설치된 까닭을 아는가. 지금 인녕부윤(仁寧府伊) 오식(吳湜)공이 이 섬을
안무할 때에 산 남쪽의 길이 멀어 도적의 방비가 소략하고, 풍속이 거의 고쳐졌으나 아직 다 되지 못하고,
목축이 번성한 것 같으나 증가되지 못함을 염려하여, 마땅히 여러 고을로 나누어 감수(監守)를 두어야 한다는
것으로 자세히 조정에 알렸다. 임금이 깊이 옳게 여겨, 곧 명하여 병부를 나누었다.
내가 처음 이르러서 가시덩굴을 헤치고 촌집에 우거하였는데 두어 달 만에 오상(吳相)이 소환되고 지금의 안무사
분성(盆城) 이간(李暕)이 뒤를 이어 이르렀다. 통첩하기를, 「성곽은 단단히 하지 않을 수 없다.」 하고, 이에 한두
부로와 더불어 이 언덕을 두루 순시하여 흙을 헤아리고 땅을 정하니, 장정들이 자식처럼 와서 공사에 참가하여 한
달도 못 되어 성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처음 시작할 때를 당하여 경영이 정밀하지 못한 것이 한이다.' 하였다.
그 말을 듣고 나서 술잔을 들고 사방을 바라보니 성지(城池)가 견고하고 관부(官府)가 완비되고 백성은 기뻐하는
빛이 있고 아전은 공경스런 모양이 있었다. 아, 성군의 덕화를 입음이 이와 같이 빠르도다. 지난날의 풀밭이 오늘
에는 동네가 되었고, 지난날 어리석고 어둡던 것이 오늘날엔 예법에 맞는 풍속이 되었다.
고려 말기에, 다스리고 어거하는 것이 방향이 없었고 거둬들이는 것이 한이 없었으며, 또 우리 민족이 아닌 종족
이 섞여서 갑인의 변란을 불러서, 무기는 바다를 덮고 시체는 땅을 뒤덮었으니, 말하면 목이 메인다.
바야흐로 이제 밝으신 성상께서 위에 있어 교화가 행하고 풍속이 바뀌어져, 집집마다 순박한 풍도를 회복하고
사람마다 충효의 뜻을 품었다. 하물며 탐라(耽羅)는 신자(神子)의 후손이며, 신라로부터 지금까지 국가를 순수
하게 섬김에 있어서랴.
옛적에 제 환공(齊桓公)이 초구(楚丘)에 성을 쌓자 공자께서 아름답게 여겼으니, 그대의 쌓은 성을 훗날의 역사
가가 또한 마땅히 《춘추》의 쓴 것과 같이 할 것이다. 의(義)로써 백성을 부렸으니 또 무슨 한함이 있으리요.
유군(兪君)이 잔을 씻어 다시 술을 부어 서로 주고받아 취하는 것도 알지 못하면서 써서 기(記)를 삼는다."
하였다.
차귀 방호소성(遮歸防護所城) : 돌로 쌓았는데 둘레가 1천 4백 66척이고 높이가 33척이다.
관방 차귀 방호소(遮歸防護所) : 현 서쪽 25리에 있다. 동해(東海) 방호소 현 동쪽 57리에 있다.
신증 현 동쪽 45리에 있는데 돌로 쌓았다. 둘레가 5백 척이고 높이가 8척이고, 성 안에 샘이 있다.
정덕(正德) 경오년에 가내(加內) 관방(關防)을 여기에 옮겼다.
색포 방호소(塞浦防護所) : 현 동쪽 58리에 있다.
모슬포(毛瑟浦) 방호소 : 현 남쪽 10리에 있다. 범질포 방호소(犯叱浦防護所) : 현 남쪽 30리에 있다.
모슬포 중수전소(中水戰所)ㆍ색포 동수전소(塞浦東水戰所)ㆍ범질포 서수전소(犯叱浦西水戰所).
봉수 송악(松岳) 봉수 : 현 남쪽 15리에 있다. 서쪽으로 모슬포악(毛瑟浦岳)에 응하고 동쪽으로 굴산(屈山)에
응한다. 모슬악 봉수 : 현 서남쪽 5리에 있다. 차귀악(遮歸岳)에 응한다.
차귀악 봉수 : 현 서쪽 26리에 있다. 제주 판포악(板浦岳)에 응한다.
굴산 봉수 : 현 동쪽 25리에 있다. 거옥악(居玉岳)에 응한다.
거옥악 봉수 : 현 동쪽 45리에 있다. 정의현 삼매양(三每陽)에 응한다.
누정 청풍루(淸風樓) : 객관 동쪽에 있다.
학교 향교 : 형 성 가운데 있다.
신증 지금은 옮겨서 동문 밖에 있다.
교량 감산교(甘山橋) : 감산천(甘山川)에 있다. 색달교(塞達橋) : 색달천(塞達川)에 있다.
목교(木橋) : 대소가내천(大小加內川)에 있다.
불우 법화사(法華寺) : 현 동쪽 45리에 있다.
○ 중 혜일(慧日)의 시에, "법화암 가에 풍경이 그윽하니, 대를 끌고 솔을 휘두르며 홀로 스스로 노니네.
만일 세상 사이에 항상 머무는 모양을 묻는다면, 배꽃은 어지럽게 떨어지고 물은 달아나 흐른다." 하였다.
사묘 사직단 : 현 서쪽에 있다. 문묘 : 향교에 있다. 성황사 : 한 이름은 차귀당(遮歸堂)이다.
풍속이 뱀과 귀신에 제사한다. 집ㆍ벽ㆍ들보ㆍ주추에 여러 뱀이 덩어리로 뭉치는데 제사할 때에 나타나지 않는
것으로 상서를 삼는다.
차귀(遮歸)의 글자는 곧 사귀(蛇鬼) 글자가 잘못된 것이다. 현 서쪽 26리에 있다.
여단(厲壇) : 현 북쪽에 있다.
고적 : 예래현(猊來縣) : 현 동쪽 25리에 있다.
○ 지금은 직촌(直村)이다.
[비고]
연혁 고종 32년에 군으로 고쳤다. 《문헌비고》
고읍 산방(山房) : 동쪽으로 10리에 있다. 차귀(遮歸) : 서쪽으로 25리에 있으며 예래ㆍ산방ㆍ서귀 세 현은 고려
충렬왕 26년에 설치하였다.
방면 삼면(三面) : 면마다 약정(約正)ㆍ직월(直月)ㆍ포도장(捕盜將)을 각각 한 사람씩 두었다.
성지 예래현성(猊來縣城) : 둘레가 4백 98척이다.
창고 읍창(邑倉)ㆍ고(庫)가 하나 있다.
목장 일소(一所)ㆍ양잔(羊棧)ㆍ고둔(羔屯).
교량 한달천교(寒達川橋)ㆍ목교(木橋) : 2개가 있는데 크고 적은 가내천(加內川)에 있다.
39권 남원도호부 南原都護府
동쪽은 운봉현(雲峯縣) 경계까지 30리, 남쪽은 순천부 경계까지 67리, 곡성현 경계까지 33리, 서쪽은 순창군
경계까지 37리, 옥과현 경계까지 62리, 북쪽은 임실현 경계까지 43리, 장수현(長水縣) 경계까지 70리며 서울
까지는 6백 55리이다.
건치연혁 본래 백제의 고룡군(古龍郡)이다. 후한(後漢) 건안(建安) 중에는 대방군(帶方郡)이 되었고,
조위(曹魏) 시대에는 남대방군(南帶方郡)이 되었다. 뒤에 당 고종(唐高宗)이 소정방(蘇定方)을 파견하여 백제
를 멸하고 유인궤(劉仁軌)에 조서하여 대방주 자사(帶方州刺史)를 겸임하도록 하였다.
조금 뒤에 신라의 문무왕(文武王)이 그 땅을 합병하였고, 신문왕(神文王) 4년에는 소경(小京)을 두었다.
경덕왕(景德王)은 지금의 이름으로 고치고 여전히 소경이라 하였다.
고려 태조(太祖) 23년에 부(府)로 고쳤고, 충선왕(忠宣王) 2년에 다시 대방으로 삼았다가 뒤에 남원군(南原郡)
으로 고쳤다. 공민왕(恭愍王) 9년에 다시 부로 승격시켰는데, 본조 태종 13년에 준례에 따라 도호부(都護府)로
고치고, 세조 때에 처음으로 진(鎭)을 두었다.
속현 유곡 부곡(楡谷部曲) : 부의 남쪽 69리에 있다. 본래 백제의 구차례현(仇次禮縣)인데 신라 때에 구례(求禮)
라 개명하여 곡성군(谷城郡)에 예속시켰다. 고려 초기에 남원에 내속시켰고, 인종 21년에는 감무(監務)를
두었다.
본래 태종 13년에 준례에 따라 현감(縣監)으로 고쳤는데, 현재 주상 5년에 현의 백성 중에 배목인(裵目仁)ㆍ
문빈(文彬) 등이 참언(讖言)을 조작하고 무리들을 끌어모아 반역을 꾀하였다가 복주(伏誅)된 일이 있었기 때문에
현(縣)을 폐하여 부곡(部曲)으로 삼았다가 다시 내속시켰다.
진관 도호부(都護府) 하나 : 담양(潭陽). 군 하나 : 순창(淳昌). 현 아홉 : 임실(任實)ㆍ무주(茂朱)ㆍ곡성(谷城)ㆍ
진안(鎭安)ㆍ용담(龍潭)ㆍ옥과(玉果)ㆍ운봉(雲峯)ㆍ창평(昌平)ㆍ장수(長水).
관원 부사(府使)ㆍ판관(判官)ㆍ교수(敎授) : 각 1명.
군명 대방(帶方)ㆍ고룡(古龍)ㆍ용성(龍城).
성씨본부 양(梁)ㆍ정(鄭)ㆍ진(晉)ㆍ양(楊)ㆍ견(甄)ㆍ황보(皇甫)ㆍ이(李)ㆍ윤(尹)ㆍ황(黃)ㆍ염(廉)ㆍ배(裵)ㆍ
류(柳). 고(高)ㆍ전(全)ㆍ임(林)ㆍ안(安)ㆍ지(池)ㆍ이(李)ㆍ송(宋)ㆍ조(曹)ㆍ최(崔) : 모두 외부에서 온 성씨이다.
거령(居寧) 백(白)ㆍ황(黃)ㆍ한(韓)ㆍ이(李)ㆍ장(張). 유곡(楡谷) 장(張)ㆍ도(陶)ㆍ손(孫)ㆍ전(全)ㆍ임(任)ㆍ
진(陳). 박(朴) : 속(續). 황(黃) : 의창(義昌). 서(徐)ㆍ양(梁) : 모두 외부에서 온 성씨이다. 남전(南田) 임(林).
방광(放光) 유(劉). 사등촌(沙等村) 임(任). 정(鄭) : 이 지역의 성씨이다.
풍속 땅은 넓고, 사람들은 사납다 : 이규보(李奎報)의 기(記)에, "땅은 넓고, 사람들은 사나워서 반역과 속임이
벌떼처럼 일어난다." 하였다.
향음(鄕飮)과 사례(射禮)를 행한다 : 이 고장 사람들은 봄이 오면 용담이나 율림(栗林)에 모여 향음과 사례를
행한다.
형승 동쪽에는 지리산(智異山)이 가로막고 있고, 서쪽에는 중진(中津)을 띠었다 : 《부지(府志)》에, "동쪽에는
지리산이 가로막고 있고 서쪽에는 중진이 띠를 두른 것처럼 흐르고 있으며, 사람과 물산이 많아 남방의 하나의
큰 도회가 되었다." 하였다.
남방에 있어 오른팔 역할을 하는 중요한 지방이다 : 이규보의 송(頌)에, "대방(帶方)은 오래된 고을이니, 남방의
오른팔이다." 하였다.
옥야백리천부지지(沃野百里天府之地) : 황수신(黃守身)의 〈광한루기(廣寒樓記)〉에, "남원(南原)은 옛이름이
대방(帶方)인데 산천이 수려하고 기름진 들판이 백 리에 뻗쳐 있으니 실로 천연의 부고이다." 하였다.
산천 백공산(百工山) : 부의 동쪽 8리에 있다. 지리산 : 부의 동쪽 60리에 있다. 산세가 높고 웅대하여 수백 리에
웅거하였으니, 여진 백두산의 산맥이 뻗어내려 여기에 이른 것이다. 그리하여 두류(頭流)라고도 부른다.
혹은 백두산의 맥은 바다에 이르러 그치는데 이곳에서 잠시 정류(停留)하였다 하여 유(流) 자는 유(留) 자로
쓰는 것이 옳다고도 한다. 또 지리(地理)라고 이름하고 또 방장(方丈)이라고도 하였으니,
두보(杜甫) 시의 '방장 삼한 외(方丈三韓外)'의 주(註)와 《통감집람(通鑑輯覽)》에서 "방장이 대방군(帶方郡)의
남쪽에 있다." 한 것이 이곳이다.
신라는 이것으로 남악(南岳)을 삼아 중사(中祀)에 올렸다. 고려와 본조에서도 모두 이에 따랐다.
산을 둘러싼 고을 십 주(州)가 있는데, 북쪽은 함양(咸陽)이요, 동남쪽은 진주(晉州)요, 서쪽에는 남원이 자리
잡고 있다.
그 기이한 봉우리와 깎아지른 듯한 절벽은 이루 헤아릴 수 없는데, 동쪽의 천왕봉(天王峯)과 서쪽의 반야봉
(般若峯)이 가장 높으니 산기슭에 혹 구름끼고 비가 오며 천둥치고 번개가 요란해도 그 위 산봉우리는 청명
하다.
해마다 가을 하늘이 높으면 새매가 북쪽에서 몰려드는데 열군(列郡)의 사람들이 다투어 그물을 쳐서 잡는다.
전하는 이야기에 태을(太乙 북극신(北極神))이 그 위에 거하니 많은 신선들이 모이는 곳이며, 용상(龍象)이
거하는 곳이라고도 한다.
○ 양성지(梁誠之)의 시에, "지리산은 창창(蒼蒼)하게 반공(半空)에 솟아 있으니 천암만학(千巖萬壑)에 물방울
이 뿌리도다. 골짜기의 청학(靑鶴)이 어찌하여 마땅히 절의 종소리를 듣지 않는가 하고 조롱하리라." 하였다.
보련산(寶連山) : 부의 서쪽 40리에 있다.
교룡산(蛟龍山) : 부의 서쪽 7리에 있는데 북쪽에는 밀덕봉(密德峯)과 복덕봉(福德峯)이 하늘을 받치고 높이
솟아 있다.
장법산(長法山) : 부의 동쪽 7리에 있다. 견수산(犬首山) : 부의 남쪽 45리에 있다.
오산(鼇山) : 유곡(楡谷) 남쪽 15리에 있다. 꼭대기에는 바위가 하나 있고 바위에는 빈 틈이 있는데 그 깊이를
헤아릴 수 없이 깊다. 전하는 말에, 중 도선(道詵)이 이 산에 살면서 천하의 지리(地理)를 그렸다고 한다.
봉성산(鳳城山) : 유곡(楡谷) 서쪽 1리에 있다. 숙성현(宿星峴) : 부의 동남쪽 30리에 있다.
비홍현(飛鴻峴) : 부의 서쪽 25리에 있다. 율림(栗林) : 광한루(廣寒樓)의 남쪽에 있다.
○ 강희맹(姜希孟)의 시에, "일말(一抹)의 가을빛이 나무 끝에 닿아서, 담황색(淡黃色)과 천록색(淺綠色)이 가만
히 서로 떠오르네. 바람이 금위(金蝟)에 불어오니 규란(虯卵)이 터져 나오고, 아이들은 짝지어 좋은 놀이 하도다."
하였다.
동장수(東帳藪) : 부의 동쪽 7리에 있다.
○ 앞사람의 시에, "물 유유히 흐르고 모래 사장 길게 뻗친 곳에 버들 그림자가 깔렸는데 사는 사람들 모두 그윽
한 거처를 얻었구나. 꽃은 지고 방초는 무성하여 봄이 저물었는데, 천고의 풍류는 회계산(會稽山 중국 절강성
(浙江省) 소흥(紹興))에 접했구나." 하였다.
창활수(昌活藪) : 부의 남쪽 30리에 있다.
○ 앞사람의 시에, "바람에 나부끼는 표기[風帘 주막(酒幕)을 표시하는 기(旗)]는 희미하게 무성한 수풀과 격해
있고, 허물어진 역원(驛院)은 황량한데 깊은 산 속에 한 줄기 오솔길. 해는 지고 소와 양은 먼 길을 돌아오는데
반륜(半輪)같은 저녁해가 푸른 산봉우리에 걸려있네." 하였다.
순자진(鶉子津) : 진안현(鎭安縣) 중대산(中臺山)과 태인현(泰仁縣) 운주산(雲住山)의 물리 합쳐 흘러,
부의 서남쪽 40리에 이르러 순자진이 되었는데 곡성현(谷城縣)에 들어가서는 압록진(鴨綠津)이 된다.
원천(源川) : 원천 부곡(源川部曲)에 있다. 지리산에서 근원하여 부의 동쪽 선원사(禪院寺) 앞에 이르러서 요천
(蓼川)과 합류하여 남쪽으로 흘러간다.
두가천(豆可川) : 부의 남쪽 60리에 있으니, 즉 순자진의 하류가 된다. 본조(本朝)의 마천목(馬天牧)이 물을
막아 어량(魚梁)을 만들었는데, 그 후에 본부(本府)에서 이것을 고쳤다.
대모천(大母泉) : 부의 남쪽 4리에 있다.
○ 강희맹(姜希孟)의 시에, "한 구멍 맑고 맑은 돌 밑의 샘이 대모(大母)라 이름 전하기 몇 천 년인고.
자손[雲仍]이 다 변하고 남은 은택만 머무르니, 젖같은 샘물이 6월 여름 날씨에 맑고도 달더라." 하였다.
거령천(居寧川) : 거령현(居寧縣)의 개현(介縣)에서 나와서 오수역(獒樹驛)동남에 이르러 임실현의 평당원천
(坪堂院川)과 합하여 남쪽으로 흘러 순창군 적성진(赤城津)으로 들어간다.
요천(蓼川) : 부의 동남쪽 1리에 있는데 시내 가운데에 바위가 있어 그 모양이 소와 같으므로 우암(牛巖)이라
한다.
○ 강희맹의 시에, "한 줄기 긴 시내가 고진(古津)에 접했으니, 바람이 압록(鴨綠)을 흔들어 고기비늘 같은 물결을
이루었네. 외로운 배가 여뀌꽃 언덕에 숨었다 비쳤다 하니, 그림 속에 분명히 사람이 있는 것 같도다." 하였다.
축천(丑川) : 축(丑)은 혹 축(畜)으로도 쓴다. 부의 동북방에 시냇물이 들이치므로 마을을 설치할 때에 술자(術者)
의 말을 따라서 쇠로 소를 만들어 기세를 누르도록 하였다. 이 때문에 축천이라 부르게 되었는데 그 소는 지금도
남아있다.
연탄(淵灘) : 부의 서남쪽 60리에 있으니 즉 순창군 저탄(猪灘)의 하류로서 순자진(鶉子津)으로 들어간다.
구연(九淵) : 유곡(楡谷) 동남쪽 10리에 있는데 연못 위에는 천척이나 되는 높은 바위가 비스듬히 누워 있어 병풍
처럼 보인다.
압록진(鴨綠津) : 유곡에서 29리, 곡성현(谷城縣)의 경계에 있다.
잔수진(潺水津) : 유곡 남쪽 12리, 순천부(順天府)의 경계상에 있다.
용왕연(龍王淵) : 유곡 동쪽 30리, 진주(晉州) 화개현(花開縣)의 경계에 있으니 바로 잔수진 하류에 해당한다.
광양현(光陽縣) 부분에 상세히 나와 있다. 신증 용연(龍淵) : 부의 남쪽 45리에 있다. 수원(水源)은 지리산에서
나온다.
토산 벌꿀ㆍ호도ㆍ오미자ㆍ감ㆍ닥나무ㆍ생강ㆍ표고버섯ㆍ송이버섯ㆍ석류ㆍ석이버섯ㆍ치자ㆍ죽전ㆍ잣ㆍ
백화사(白花蛇)ㆍ복령ㆍ지황(地黃)ㆍ영양뿔ㆍ은어ㆍ게.
성곽 읍성(邑城) : 돌로 쌓았다. 둘레는 8천 1백 99자, 높이 13자. 안에 우물과 샘이 71개 있다.
교룡산성(蛟龍山城) : 돌로 쌓았다. 둘레는 5천 7백 17자, 높이 10자, 안에는 99개의 우물과 작은 시내 하나가
있고, 또 군창(軍倉)이 있다.
○ 강희맹의 시에, "교룡산성이 백운 간에 솟았으니, 한 줄기 길이 겨우 꾸불꾸불 통하였네.
마치 이 한 고을의 절험(絶險)을 자랑하는 듯, 위급한 시절이면 여기 의지하여 오랑캐를 막아 내도다." 하였다.
○ 양성지(梁誠之)의 시에, "고을이 호남 산수간(山水間)에 자리하니, 산성은 우뚝 솟고 길은 꾸불꾸불,
대방(帶方)은 스스로 웅장한 번지(藩地)를 이루었으니, 팔방의 오랑캐를 공액(控扼)하고 제압하네." 하였다.
누정 광한루(廣寒樓) : 황수신(黃守身)의 기문에, "부의 남쪽 2리쯤 되는 곳에 지세가 높고 평평하며 넓게 트여
있는데 거기에 작은 누각이 있으니, 그 이름이 광통루(廣通樓)이다.
세월이 오래되어 퇴락하니 갑인년에 부사 민공(閔恭)이 다시 새 누각을 세웠고, 정사년에 유지례(柳之禮)가
이어 단청을 더하였다. 갑자년에 정승인 하동부원군(河東府院君) 정인지가 광한루로 이름을 고쳤다.
아, 호남의 경치 좋은 곳으로 우리 고을보다 나은 곳이 없고, 내 고장 경치 좋은 곳 중에 광한루보다 나은 곳이
없다." 하였다.
○ 강희맹의 시에, "남방의 이름난 광한루에 6월에 올라오니 가을처럼 서늘하네. 달그림자 홀연히 비치니 하늘
이 가깝고, 붉은 난간 굽은 곳에 견우성이 지나가네." 하였다.
○ 이석형(李石亨)의 시에, "방장산(方丈山) 앞에 백척누각, 푸른 산머리에 붉은 사다리가 높이 걸렸네.
물은 들판에 연하여 이내와 햇빛이 섞였고, 구름 걷힌 먼 산봉우리엔 비 기운이 걷히었네.
물가에 임하니 천상에 앉은 듯, 바람 앞에 서니 달 가운데서 노는 듯, 인간에 절로 달세계[淸虛府]가 있는데,
하필 구구하게 세상 밖에서 구하리오." 하였다.
○ 성임(成任)의 시에, "상쾌한 기운이 물가 누각에 스며드니, 요천(蓼川) 머리에 광한(廣寒)의 선경(仙境)이
펼쳐지도다. 남쪽 언덕에 바람이 일어나니 더위가 멀어졌고, 서산에 주렴 걷히니 저녁 비가 그쳤네. 달은 때마침
맑은 밤에 둥근데, 은하수 다리에서 누가 옛사람을 이어서 놀꼬. 하늘빛은 상하에 명경처럼 밝으니,
몸이 청허부(淸虛府)에 바로 드달리네." 하였다.
신증 허침(許琛)의 시에, "저녁에 풍류 잡히고 그림같은 누각에 오르니, 옥봉(玉峯)으로 지는 해가 성 머리에
걸렸구나. 시정(詩情)이 바다처럼 일렁거리니 봄이 정함이 없고, 검기(劍氣)가 하늘에 떠서 밤에도 걷히지를
아니하네. 눈처럼 춤추니 패옥을 던지며 가고, 물결을 도리어 밟고 가니 구슬을 희롱하며 노는도다.
인간에 또한 청허부가 있으니, 좋은 놀이를 세상 밖에서 구하지 말지어다." 하였다.
연국루(戀國樓) : 객관(客館)의 서쪽에 있는데 일명 죽루(竹樓)라고도 한다.
○ 김극기의 시에, "구름을 뚫은 푸른 대가 요란하게 비녀을 뽑은 듯, 홀연히 높은 루에 올라 바로 아래를 굽어
봤네. 우로(雨露)가 비록 처음에 죽순을 무성케 하였으나, 얼음과 서리도 끝내 요림(瑤林)을 욕되게 하지 못하
였네. 깊숙한 뿌리가 돌을 피하는 모양이 푸른 용이 숨은 듯하고, 맑은 피리소리는 바람을 맞아 푸른 봉황이
우는 듯하도다. 어떻게 하면 장안의 고관들이 그대처럼 굳은 절개에 곧은 마음 가질 수 있을까." 하였다.
○ 윤향(尹向)의 시에, "한가한 날 백 자나 되는 누각에 오르니, 누각 지은 사람은 정오두(鄭遨頭)라네.
산은 지리산(智異山)에 연하여 천봉(千峯)이 빼어나고 물은 태량(苔梁)에서 합하여 한 줄기로 흐르도다.
주포(周浦)에는 구름이 비꼈으매 석양이 밝고, 교잠(蛟岑)에는 나뭇잎이 떨어지니 가을 기운 움직였네.
어디에서 부는 장적(長笛) 소리인가, 홀로 난간에 기대니 천리만리로 뻗친 근심일세." 하였다.
축천정(丑川亭) : 축천(丑川)의 서쪽 언덕에 있다.
○ 서거정(徐居正)의 시에, "벼랑에 의지한 절벽 그림 병풍 되었는데, 그 가운데에 높은 누각 있으니 돌로 축대
를 만들었네. 만고(萬古) 세월 흐르는 시냇물 소리 그칠 줄을 모르고, 백 년 산색(山色)은 우뚝하게 둔덕이
되었네. 쇠로 만든 소는 소울음 소리내며 어느 날이나 일어날까, 황학(黃鶴)을 탄 손님 오늘 아침에 올 듯하
구나. 여기가 대방(帶方)의 아름다운 곳인데, 풍류 제영(題詠)함에 재주없음이 부끄럽네." 하였다.
봉서루(鳳棲樓) : 유곡(楡谷) 객관(客館)의 동쪽에 있다. 현감(縣監) 오치선(吳致善)이 세운 것인데 지금은 황폐
하였다. 김작(金綽)의 기문에 이르기를, "고을의 지세가 나르는 봉황의 형국이라 이것을 따서 이름을 붙인 것이다."
하였다.
○ 노숙동(盧叔仝)의 시에, "봉성산(鳳城山) 아래 봉서루, 바람이 서늘하여 여름도 가을인 양하여라." 하였다.
사영루(四詠樓) : 객관의 동쪽에 있다. 부사 이문병(李文炳)과 판관 이적(李績)이 세웠다.
휼민관(恤民舘) : 즉 객관을 말한다. 부사 이문병과 판관 이적이 세웠다.
신증 허침의 시에, "은혜를 펴니 곳곳이 봄과 같다 세 사람의 연이어 꽃다운 이름 후세에 빼어났네.
성상의 은혜 감격하여 일신을 능히 보국(報國)하였고, 희끗희끗 양쪽 귀밑털 나니, 백성을 위해 근심함일세.
큰 고을 뛰어난 정사 대개 백성을 중히 여기니, 호협한 풍속이 점차 순화되어 가네. 나라를 요리할 수완이니 닭을
잡는 사람 노릇 오래하지 마소." 하였다.
봉서헌(鳳棲軒) : 유곡 부곡(楡谷部曲)에 있다.
현감 최지성(崔智成)이 세웠다. 신증 월인헌(月印憲) : 광한루의 동쪽에 있다.
학교 향교(鄕校) : 부 치소(治所)의 동쪽 5리에 있다.
역원 오수역(獒樹驛) : 부의 북쪽 40리에 있다.
○ 본도의 찰방(察訪)이 관할하는 속역(屬驛) 11개소로서 창활(昌活)ㆍ동도(東道)ㆍ응령(應嶺)ㆍ인월(引月)ㆍ
잔수(潺水)ㆍ지신(知申)ㆍ양률(良栗)ㆍ낙수(洛水)ㆍ덕양(德陽)ㆍ익신(益申)ㆍ섬거(蟾居) 등이 있다.
○ 찰방 한 사람이 임명된다.
○ 김개인(金蓋仁)은 거령현(居寧縣) 사람인데 집에서 기르는 개를 몹시 사랑하였다. 하루는 개인이 출행하는데
개가 따라 왔다. 개인이 술에 취하여 길가에서 잠이 들었는데 들불이 일어나 사방에서 타들어오니, 개가 가까이
있는 내에 뛰어들어가 몸에 물을 적셔 와서는 개인이 잠들고 있는 주위를 뒹굴어 풀에 물기를 뿌렸다.
이 행동을 반복하여서 불은 껐으나 개는 기진하여 죽고 말았다. 개인이 술깬 뒤에 개의 모습을 보고 노래를 지어
슬픔을 표하고 봉분을 만들어 묻어 주고 지팡이를 꽂아 표시를 하였더니, 그 지팡이가 잎이 피는 나무가 되었다.
이로 인하여 그 지명을 오수(獒樹)라 하였으니 악부(樂府) 중에 〈견분곡(犬墳曲)〉은 바로 이것을 읊은 것이다.
○ 이규보의 시에, "낮에 오원(烏原)을 출발하여 오수에서 잠시 머물렀다. 한가로운 사슴은 깊은 풀숲에 잠들고,
깊은 숲 속에 사는 새도 얕은 도랑에서 목욕하네. 산은 그림 같은 풍경 눈에 담뿍 보여주고, 바람이 부니 가을
바람 옷깃에 살랑거리네. 다시금 대방 땅을 밟으니 하늘은 나에게 마음껏 경치를 즐기라고 하는구나." 하였다.
동도역(東道驛) : 부의 동쪽 7리에 있다. 응령역(應嶺驛) : 부의 동쪽 20리에 있다.
창활역(昌活驛) : 창활수(昌活藪)의 남쪽에 있다.
잔수역(潺水驛) : 잔수진(潺水津) 언덕에 있다. 안신원(安信院) : 부의 동쪽 30리에 있다.
호산원(虎山院) : 부의 동쪽 10리에 있다. 금천원(金川院) : 부의 동쪽 50리에 있다.
신원(新院) : 부의 서쪽 15리에 있다. 비홍원(飛鴻院) : 비홍현(飛鴻峴) 아래에 있다.
서림원(西林院) : 부의 서쪽 30리에 있다. 순자원(鶉子院) : 순자진(鶉子津) 언덕 위에 있다.
다시천원(多時川院) : 부의 서쪽 50리에 있다. 운제원(雲梯院) : 부의 남쪽 30리에 있다.
천원(遷院) : 부의 남쪽 5리에 있다. 축천원(丑川院) : 부의 북쪽 10리에 있다.
홍화원(弘化院) : 부의 북쪽 10리에 있다. 율두천원(栗頭川院) : 부의 북쪽 30리에 있다.
원천원(源川院) : 원천의 언덕에 있다. 잔수원(潺水院) : 잔수진의 언덕에 있다.
교량 금석교(金石橋) : 부의 서남쪽 4리에 있다.
○ 강희맹의 시에, "분류(奔流) 흐르는 강 양쪽 언덕에 긴 다리가 걸려있고, 수면에는 침침(沈沈)하게 그림자
흔들리네. 천 자나 되는 무지개 다리는 허리와 등이 넓으니, 느릿느릿 돌아가는 길이 멀다고 느껴지지 않네."
하였다.
불우 만복사(萬福寺) : 기린산(麒麟山) 동쪽에 5층의 불전(佛典)이 있고 서쪽에 2층의 불전이 있는데 그 안에는
길이 35자의 동불(銅佛)이 있다. 고려 문종(文宗) 때 창건한 것이다.
○ 강희맹의 시에, "소나무와 계수나무 짙은 그늘 고을을 둘러싸고, 절에서 들려오는 종과 풍경 소리 달빛 속에
가득하도다. 으름덩굴과 칡덩굴 덮인 오솔길은 인간에게 부귀를 묻지 않네." 하였다.
선원사(禪院寺) : 백공산(百工山)에 있다. 파근사(波根寺) : 지리산에 있다.
용천사(龍泉寺) : 교룡산(蛟龍山)에 있다. 승련사(勝蓮寺) : 만행산(萬行山)에 있다.
○ 이색(李穡)의 기문에, "남원부의 산수가 좋은 것은 많은 사람들이 일컫는 바이다. 중들이 그 사이에 절을 지어
대개 경치가 뛰어난 곳을 차지하였는데 승련사는 그중에서도 으뜸이다. 강호문(康好文)이 나에게 이와 같이
말하고, 또 주지인 대선사(大禪寺) 각운(覺雲)이 글로써 그 시말을 기록하여 주기를 청하였다.
내가 좋은 산수에 대해서는 매양 가서 놀지 못함을 한스럽게 여기고, 그곳에 내 이름을 걸어 두는 것이 실로 내
소원이었으며, 각운선사의 훌륭함은 내 또한 오래전부터 흠모하던 터이라, 기꺼이 서술한다.
절은 부중(府中)에서 동북편으로 30리 거리에 있고, 옛이름은 금강사(金剛寺)였는데 어느 때에 창건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홍혜국사(弘慧國師)이며 휘(諱)를 중긍(中亘)이라 하는 분이 원당(願堂)에 있다가 늙어서 물러나와
이곳에 살았는데, 지붕이 낮고 누추하여 증축하여 확장하려 하였으나 이루지 못하였다. 그가 죽고나서 대선사
졸암(拙菴), 이름을 연온(衍昷)이라 하는 분이 조계(曹溪)의 장로로서 홍혜(弘慧)의 문도들에게 추앙을 받으니
모두 계권(契券)을 만들어 주며 졸암으로 하여금 주관하게 하였다. 졸암이 곧 설계하고 비용을 헤아리고,
시주를 모으는 것은 종한(宗閑)이라는 분이 주관하였다. 그 편액을 승련사(勝蓮寺)라 고치고 공사는 을축년에
시작하여 신축년 봄에 마쳤다.
불전(佛殿)ㆍ승무(僧廡)ㆍ선당(膳堂)ㆍ선실(禪室)ㆍ객실(客室)ㆍ곳간ㆍ부엌 등 칸수를 계산하면 모두 1백 11칸
이며, 불전 기구와 일상의 도구가 하나도 완비되지 않음이 없으니, 이는 다 졸암의 바랑에서 나온 것과 종한의
힘으로 인하여 이룩된 것이다.
무량수불(無量壽佛)의 상(像)을 불전 중앙에 모셨는데, 이는 졸암이 전적으로 마련한 것이요, 대장경을 새겨서
전 좌우에 쌓아 놓은 것은 고을 사람이 다같이 낸 시주로 한 것이다. 노비 몇 명을 희사하였으니 이는 바로 졸암
이 부모에게서 물려받은 것이다. 무술년 가을에 그가 죽게 될 적에, 친족으로는 조카가 되고 법통으로는 후계자
가 되는 각운선사에게 절 살림을 부탁하였다. 바깥 담이 아직 없어서 각운선사가 쌓으니 계묘년 여름에 절의
공사가 끝이 났다.
내 생각에 불도들은 그 거처를 분수에 넘치게 할 뿐 아니라, 그 후계자에게 전해 줄 것을 도모하는 것이 상례이다.
지금 금강(金剛)과 승련(勝蓮) 두 이름의 뜻이 어떤 것은 장중하고 어떤 것은 가벼우니 반드시 전자를 취하고
후자를 버리는도다. 그러나 졸암이 기어이 그 현판을 고친 것은 승련사가 나로부터 시작하여 내가 1대가 되고
다시 전하여 2대가 되어서 백천 대까지 변함이 없을 것을 보인 것이니, 그 뜻이 심원하다고 하겠다.
그가 각운선사에게 전한 것은 친족관계와 법통으로 하였으니 또한 혐의가 없다고 말할 수 있다.
다만 각운선사가 사람을 얻어 전함을 또한 그 스승과 같이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내가 두려워하는 것은 오래
전해질수록 그 뜻을 보전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부터 다시 백천 대를 지나서 승련사(勝蓮寺)의 경내가 가시밭이 되지 않으면 족하고 친족으로 대를
잇든 법통으로 대를 잇든 내가 감히 알 바가 아니다. 졸암의 성은 유(柳)씨요, 문정공(文正公) 경(璥)의 증손이며,
감찰대부(監察大夫) 정(靖)의 동복동생으로서 판밀직사사(判密直司事) 이존비(李尊庇) 공의 외손이다.
학수사선(學首四選)에 참여하여 시험에 응시하여 갑과(甲科)에 합격하였으며 명산에 두루 주석하여 불도의 명성
이 높았다. 각운선사는 졸암의 조카로 학문이 깊고 행실이 고상하며 필법이 일세에 절묘하니, 사람들이, '청출
어람(靑出於藍 스승보다 낫다는 뜻)이라.' 하였다." 한다.
개량사(開良寺) : 견수산(犬首山)에 있는데 지금은 황폐하였다. 연관사(煙觀寺) : 지리산에 있다.
보현사(寶賢寺) : 마행산(馬行山)에 있다. 용담사(龍潭寺) : 장벌산(長伐山)에 있었는데 지금은 폐하였다.
○ 강희맹의 시에, "여의주 물고 있는 용공(龍公)이 잠들어 돌아오지 아니하니, 음침한 집문은 잠긴 지 오래로다.
못가 절에서 독경 소리 오래전에 폐하니, 오직 물결에 석대(石臺)만이 비추노나." 하였다.
화엄사(華嚴寺) : 지리산 산록에 있다. 승려 연기(煙氣)는 어느 시대 사람인지 알 수 없으나 이 절을 지었다.
그중에는 불전이 하나 있는데 네 벽에 흙을 바르지 아니한 청벽(靑壁)으로 그 위에 화엄경을 새겼는데, 세월이
오래되니 벽이 무너지고 문자는 희미해져 읽을 수가 없다. 석상(石像)이 있는데 어머니를 이고 서 있다.
세속에서 이르기를, "연기와 그 어머니가 화신(化身)한 곳이라." 한다. 절 앞에는 큰 시내가 있고,
동편의 일류봉(日留峯) 서편에 월류봉(月留峯)이 있다.
연곡사(鷰谷寺) : 지리산에 있다. 고려의 학사(學士) 왕융(王融)이 지은 현각선사비(玄覺禪師碑)가 있다.
사묘 사직단(社稷壇) : 부의 서쪽에 있다. 문묘(文廟) : 향교에 있다.
지리산신사(智異山神祠) : 부의 남쪽 64리 되는 소아리(小兒里)에 있다.
성황사(城隍寺) : 부의 서쪽 5리에 있다. 여단(厲壇) : 부의 북쪽에 있다.
덕음당사(德陰堂祠) : 덕성향(德城鄕)에 있다.
고적 거령 폐현(居寧廢縣) : 거(居) 자는 거(巨)로도 쓴다.
본래 백제의 거사물현(居斯勿縣)인데 신라 때에 청웅현(靑雄縣)이라 고치고 임실군(任實郡)의 영현(領縣)이
되었으며 고려 때에 지금의 이름으로 고치고 내속시켰다. 영성(寧城)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리우는데,
부의 동북쪽 50리에 있다.
유인궤성(劉仁軌城) : 즉 지금 부의 치소(治所)이니 둘레가 몇 리나 되는데 옛 터가 있다.
○ 강희맹의 시에, "마른 우물이 황량하게 저녁 연기에 잠겼고, 유공(劉公)의 사업은 이야기로 전해오네.
대당(大唐)이 먼 나라 포용할 계책은 구상하지 않고, 부질없이 고성(孤城)을 쌓아 뒷날의 웃음거리 되었네."
하였다.
유곡성(楡谷城) : 돌로 쌓았으며 둘레는 4천 6백 81자, 높이 13자, 안에 우물이 9개소, 그리고 군창(軍倉)이
있다.
정전유기(井田遺基) : 당 나라 유인궤가 자사 겸 도독(刺史兼都督)으로 읍내에 정전법(井田法)을 써서 9개
구역으로 구획하였는데 지금도 그 터가 남아있다.
금안 부곡(金岸部曲) : 부의 서쪽 30리에 있다. 원천 부곡(源川部曲) : 부의 동쪽 20리에 있다.
산동 부곡(山東部曲) : 부의 남쪽 45리에 있다. 고정 부곡(古丁部曲) : 부의 북쪽 40리에 있다.
덕성향(德城鄕) : 부의 동쪽 7리에 있다. 도지향(道知鄕) : 부의 서남쪽 5리, 속칭 돈다산(敦多山)이라 부른다.
수도향(守道鄕) : 부의 동쪽 5리, 지금은 말이지(末伊旨)라고 부른다.
남안향(南安鄕) : 부의 남쪽 2리, 지금은 야정지(野井池)라고 부른다.
경도향(京徒鄕) : 부의 북쪽 60리, 지금은 백야곡(白也谷)이라 부른다. 보유향(寶有鄕) : 부의 서쪽 60리에 있다.
거리향(居利鄕) : 거령현(居寧縣)의 동남쪽, 지금은 성여이(城餘伊)라고 부른다.
백파향(白波鄕) : 부의 동쪽 20리에 있다. 아인향(牙仁鄕) : 부의 북쪽 40리에 있다.
미아향(未牙鄕) : 부의 동쪽 9리에 있다. 성화점소(省火帖所) : 부의 남쪽 50리. 두가소(豆加所) : 부의 남쪽 60리.
웅음소(熊陰所) : 부의 남쪽 50리. 용봉소(龍鳳所) : 부의 동쪽 20리. 신내동소(申內洞所) : 부의 남쪽 17리.
기오천소(岐於淺所) : 부의 남쪽 30리. 양천소(陽川所) : 부의 남쪽 8리. 금성소(金城所) : 부의 동쪽 15리.
석주진(石柱鎭) : 유곡(楡谷) 동쪽 15리, 남북쪽에 모두 큰 산이 있는데 그 가운데 큰 강이 흐른다.
고려 말기에 진(鎭)을 설치하고 왜적을 막았다. 지금은 옛터만 남아있다.
사등촌 부곡(沙等村部曲) : 혹은 사도(沙圖)라고도 하는데, 유곡 동쪽 5리에 있다.
남전소(南田所) : 유곡 북쪽 6리에 있다. 방광소(放光所) : 유곡 북쪽 10리에 있다.
토지처(吐旨處) : 유곡 동쪽 10리에 있다.
명환신라 김흔(金昕) : 헌덕왕(憲德王)이 사람을 당(唐) 나라에 보내려 하는데 적당한 사람이 없었다.
혹자가 김흔을 천거하였는데 그는 태종(太宗)의 후예로 정신이 빼어나고 도량이 넓어서 뽑힐 만하였다.
드디어 입조(入朝)하여 숙위하도록 하였던바, 세밑에 돌아오니 왕은 그가 사신의 직책을 잘 수행했다 하여
남원 태수(南原太守)를 제수하였다.
윤흥(允興) : 신라인 귀금(貴金)은 옥보고(玉寶高)의 가야금을 전수받고 지리산에 입산하여 나오지 않았다.
신라의 왕은 금도(琴道)가 끊어질까 걱정되어 윤흥에게 이르기를, "방편을 써서 그 금술을 터득하게 하라." 하고,
곧 남원 공사(南原公事)에 임명하였다. 윤흥이 도임하여 안장(安長)과 청장(淸長) 두 사람을 산 중에 보내 배우
도록 하여 귀금은 가르쳐 주긴 하였으나 깊은 묘리(妙理)는 전해 주지 않았다. 윤흥이 그 부인과 함께 찾아가
말하기를, "우리 왕께서 나를 남원에 보낸 것은 딴 이유가 없고 선생의 재주를 세상에 전하도록 하고자 한 것인
데, 지금까지 3년이 되었으나 선생께서는 감추시고 전해 주지 않으니 내가 무엇으로 복명하겠습니까." 하고,
윤흥은 술을 받들고 부인은 잔을 잡고 무릎 꿇어 예를 드리니, 귀금이 그제야 표풍(飄風) 등 세 곡을 전해
주었다.
고려 한문준(韓文俊) : 인종(仁宗) 때에 부사(副使)가 되었다.
이보림(李寶林) : 충혜왕(忠惠王) 때 지부사(知府事)로 새로이 제용재(濟用財)를 두어 비용으로 지출하고 횡령
하는 것이 없었다.
○ 이색(李穡)의 기(記)에 대략 이르기를, "국자학유(國子學諭) 양이시(楊以時) 군은 남원 사람인데, 솔직하고
성실하여 말이 미더웠다. 하루는 내게 와서 말하기를, '우리 사또의 어진 정사는 사람에게 깊은 감화를 주어서
금석에 새기지 않아도 남아있겠지만, 오직 그가 설치한 제용재(渧用財)는 쉽게 무너질까 두렵습니다.
진실로 뒤의 사람으로 하여금 두려워하고 경계할 줄 알게 하지 않으면, 영구히 폐단이 없으리라고 보장하지 못
하므로, 선생께서 글을 지어 주소서.' 하였다.
내가 양군(楊君)의 말을 따라 그 일을 상고하여 보니, 양군이 말하기를, '매양 사자(使者)가 와서 부세 바치기를
독촉할 때 우리 지현(支縣)에서 미처 바치지 못하면, 대충하는 까닭으로 혹 파산하는 일도 있었는데,
우리 부사가 그런 것을 알고, '백성을 학대함이 이보다 더할 수 있으리요'라고 말하고는, 밀린 세금을 거둬모아
베 약간을 얻었고, 또 안렴사(安廉使)에게 아뢰니, 가상히 여겨 무명을 내서 보조하였고, 또 노비문제로 다투어
관아에 송사하면, 이긴 사람에게는 종 한 명당 무명 한 필씩을 받아들이는데, 우리 부사가 판결을 잘하므로
들어오는 것이 더욱 많아져서 총합 무명 6백 50필을 얻었습니다. 향교(鄕校)와 삼반(三班)에서 각 한 사람씩
뽑아서 이를 맡게 하고, 지현에서 급할 때에는 네 사람이 부관(府官)에게 아뢰어 내어 주게 하고 이자는 받지
않으며, 부의 아전들을 경계하여 감히 다른 용도로 쓰지 못하도록 영구히 법으로 만들었습니다.
우리 고을이 비록 산 중에 있으나 손님이 끊임없이 왕래하여 접대비용을 거둬들이므로 백성들이 매우 괴로워
합니다. 우리 사또가 그것을 알고, 백성을 학대함이
다시 이보다 더 하리오 라고 말하고, 또 재(財)를 설치할 의향으로 안렴사에게 아뢰어 무명과 조미(糶米) 약간을
얻었습니다. 그리고 옛날에 둔전(屯田)을 두었는데 방자한 아전들이 농간을 부리므로 우리 사또께서 친히 그
일을 맡아 거둬들여 아전들이 감히 속이지 못하게 하니 총계 쌀 2백 석, 콩 1백 50석이 되었습니다.
법을 만들어 나누어주고 거둬들이어 본전은 두고 이자를 쓰게 하며, 또 새로 개간한 땅에서 72석을 거둬들여서
손님을 대접하고 또 일용가구까지 완비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것을 통틀어서 제용재(濟用財)라 이름하니,
이에 백성들에게 횡포하게 거두는 것이 없고, 지현에서는 떳떳한 부세를 지켜서 이익을 보게 하고 손해를 없게
하였습니다.' 하였다." 한다.
윤위(尹威) : 신종(神宗) 때의 사업(司業)으로 염찰사(廉察使)가 되어 오니, 한 지방이 경외 하였다.
부의 경내에 도적이 있어 무리들을 불러모아 산에 진을 치고 있었다. 윤위가 혼자 말을 타고 들어가 화복(禍福)
을 들어 타이르니, 적이 감격하여 눈물 흘리며 명령에 복종하였다. 이에 괴수만을 죽이고 나머지는 모두 용서해
주니 경내가 편안해졌다. 이세화(李世華) : 태수로서 그 치적이 가장 뛰어났다.
정국검(鄭國儉) : 지부사(知府事)가 되어 하루는 속읍(屬邑)에서 행춘(行春 태수(太守)가 봄에 속읍에 다니며
농상(農桑)을 권장하는 일)할 때, 원천동(源川洞)을 지나게 되었는데 송림(松林)이 있는 좌우 벽 위에 중 정사
(正思)가 한 절구를 크게 써놓기를, "고불(古佛) 바위 앞을 흐르는 물이 슬피 울고 다시 오열한다.
아마도 인간세계에 내려와 영영 운산(雲山)과 헤어지게 된 것을 슬퍼하는가." 하였다.
다음날 노유(老儒) 양적중(梁積中)과 말을 나란히 타고 찾아가서 산수의 벗을 맺었다. 뒤에 매양 인물을 논하게
되면, 반드시 정사를 중 가운데 용이라고 칭찬하였다.
주열(朱悅) : 고종(高宗) 때 판관(判官)이었다.
본조 김희(金熙) : 부사로서 백성 보살피기를 자식과 같이하고, 송사를 물흐르듯 처결하니, 부사로 있는 몇 해
동안에 한 고을이 편안하게 되었다. 얼마 후에 병으로 순직하니, 읍인들이 매년 기일이면 잊지 않고 제사를
올린다.
최덕지(崔德之)ㆍ이효공(李孝恭) : 둘 다 부사로 있었다.
신증 정회(鄭淮) : 부사로서 은혜와 위엄을 동시에 폈다.
안구(安覯) : 부사.
인물고려 이능간(李凌幹) : 거령(居寧) 사람이다. 충선왕(忠宣王)이 자신의 사랑하는 여자를 그에게 주었는데,
능간은 별실에다 따로 두고 감히 가까이 하지 못하였다. 왕은 그를 의로운 사람이라 하였다.
또 왕을 따라 원(元) 나라에 있을 때 왕이 토번(吐蕃) 땅에 귀양을 갔는데 능간이 금품을 품고 역리(驛吏)에게
몰래 주어 왕께 드리도록 하였으므로 왕과 종신(從臣)이 곤란을 면하였다.
왕이 승하하자 관을 모시고 귀국하는데 울부짖으며 멀리서 오느라고 애썼고 고생스런 일을 끝까지 다하였다.
원 나라에서 본국을 중국의 성(省)으로 만들고자 했는데, 능간이 황제에게 주청하여 그 의논이 결국 중지되도록
하였다. 벼슬은 문하시중(門下侍中)까지 지냈다.
양서린(梁瑞麟) : 부의 아전이다. 왜구가 갑자기 쳐들어오자 부사 이종(李悰)이 난을 피하여 가다가 말이 넘어
졌는데, 서린이 자기가 탄 말을 바꾸어 타게 하고 자기가 대신 죽음을 당했다. 이 일이 알려져서 뒤에 정문을
세웠다.
본조 양성지(梁誠之) : 과거에 급제하여 좌리공신(佐理功臣)에 들고, 남원군(南原君)에 봉작되었다.
문명(文名)이 있었다.
양순석(梁順石) :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은 충청도 관찰사(忠淸道觀察使)를 지냈다.
신증 윤효손(尹孝孫) :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은 참찬(參贊)에 이르고, 효행이 있었다. 시호는 문효(文孝),
아들 지형(止衡)도 과거에 급제하여 관찰사까지 지냈다.
우거본조 유규(柳規) : 유언(柳漹) 이하 몇 대가 여기서 살았는데 다 현달(顯達)하였다.
효자고려 양천룡(梁天龍) : 연이어 부모의 상을 당했는데 묘막에서 6년을 지냈다. 이 일이 알려져 마을에 정문을
세웠다. 손순흥(孫順興) : 성종(成宗) 9년에 조서를 내려 이르기를, "구례(求禮) 사람 손순흥은 그 어머니가 죽자
화상을 그려 놓고 제사를 받들며 사흘에 한 번 묘지에 찾아가 공양[饗]하기를 살았을 때와 같이 하였으니,
벼슬을 주어서 효도를 표창하려 하노라." 하였다
고려 유익경(柳益涇) : 어머니 현씨(玄氏)가 병에 걸리자 익경은 어머니의 똥을 맛보고 사생(死生) 여부를 가늠
했다. 이 일이 왕께 보고 되니 동부록사(東部錄事)에 배수하였다.
조한(趙漢) : 구례현(求禮縣) 사람으로 아버지가 죽자 흙을 져다가 봉분을 만들고, 흐느껴 울기를 3년, 채소
반찬에 물만 마시고 동구 밖에 나가지 아니했다. 일이 왕께 알려지니 마을에 정려문을 세웠다.
임옥산(林玉山) : 부모를 지극한 효성으로 섬겨 어머니의 병에 똥을 맛보아 살아날지를 가늠하였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에는 상과 장례를 한결같이 가례(家禮)에 따라 하였고, 3년상을 지낸 뒤에도 조석 삭망을 폐하지
아니했다. 그 일이 성종(成宗) 때에 알려져서 정려문을 세우고 특별히 선전관(宣傳官)을 제수하였다.
열녀백제 지리산녀(智異山女) : 구례현의 여자이다. 자색이 아름답고 지리산 아래에서 살았으나 역사서에는 그
이름이 전하지 않는다. 집이 가난하였으나 부도(婦道)를 다하였다. 백제의 왕이 그녀가 아름답다는 소문을 듣고
궁중으로 들이려 하였으나 한사코 따르지 아니했다.
고려 이씨(李氏) : 생원 양중수(梁仲粹)의 처다. 왜적이 범하려 하였으나 이씨가 항거하여 마침내 적에게 해를
당하였다. 이 일이 알려지니 정문을 세웠다.
본조 김씨(金氏) : 호장(戶長) 양전(梁田)의 처이며 나이 20세에 남편이 죽자 피눈물을 삼년간이나 흘렸다.
부모가 그의 의지를 꺾고자 했으나 김씨는 따르지 않고, 소복을 입고 고기를 먹지 않았으며, 친히 삭망 제사를
행하다가 죽었다.
강씨(姜氏) : 최자강(崔自江)의 처이며 남편이 죽자 강씨는 남편의 시체를 안고 7일간이나 음식을 먹지 않다가
죽었다. 일이 알려져서 정려문을 세웠다.
임씨(林氏) : 구례현 사람으로 왕정(王淨)의 처이다. 왕정이 병이 나자, 극진히 치료하고 다짐하기를, "만일 꺼려
하지 아니한다면 나는 꼭 여묘(廬墓)하리라." 하더니, 왕정이 죽은 뒤 임씨는 71세에 장례와 제례를 가례대로
하고,여묘를 3년동안 하면서 늘 절일(節日)을 만나면 반드시 자손들을 데리고 친히 무덤에 올랐는데 90세가
되어도 조금도 쇠하지 않았다.
제영 낙잔홍엽노청산(落殘紅葉露靑山) : 김극기의 시에, "습하고 더운 남방에 유람하매 더위에 시달리더니,
홀연 서풍을 만나니 얼굴빛이 즉시 펴지네. 바람에 흰 연기 일어나서 푸른 들을 감싸고, 단풍잎 모두 지니 청산
이 드러났네." 하였다.
탐상풍연폐식면(貪賞風煙廢食眠) : 앞사람의 시에, "흥에 겨워 눈이 머리에 가득한[盈 백발(白髮)] 것도 모르고,
풍광에 취하여 먹고 자는 일조차 잊었네. 도연명(陶淵明) 살던 골목의 버들은 여름빛이 푸른 장막에 짙었고,
육씨(陸氏) 못 속의 연은 홍방(紅房 연꽃)이 가을에 벌어지네. 미친 듯이 부르는 노래에 어찌 장단을 분간하며,
한껏 마시는 술에 어찌 청주와 탁주를 분간하리오. 멀리 바라보매 끝간 데가 어딘지 알 수 없으니,
물빛과 산그림자가 멀리 하늘과 닿았네." 하였다.
봉강요접견훤국(封疆遙接甄萱國) : 정귀진(鄭龜晉)의 시에, "경계는 멀리 견훤국에 접하였고, 풍월(風月)은 방장
산(方丈山)과 이어졌네." 하였다.
지령인걸천년색(地靈人傑千年色) : 권진(權軫)의 시에, "땅이 영험하고 인물이 걸출한 천년의 고을이요, 호랑이
가 웅크리고 용이 서린 만고(萬古)의 산이로다." 하였다.
준령동분삼도경(峻嶺東分三道境) : 안극인(安克仁)의 시에, "준령은 동으로 세 도의 경계를 나누고,
서울은 북으로 몇 주의 산으로 막혀 있는가." 하였다.
용성원수추운외(龍城遠岫秋雲外) : 안숭효(安崇孝)의 시에, "교룡산성(蛟龍山城)에서 멀리 보이는 멧부리 가을
구름 밖에 보이고, 만복사(萬福寺)의 맑은 종소리 저녁노을 사이에서 울리도다." 하였다.
녹도홍거십리향(綠稻紅蕖十里香) : 김극기(金克己)의 〈구례현(求禮縣)〉 시에, "저녁비 부슬부슬 홀연 서늘한
기운을 보내고, 시내 빛과 산 색은 점점 창망(滄茫)하여라.
강남(江南)의 빼어난 경치 실로 그림 같은데, 푸른 벼 붉은 연꽃 십 리에 향기롭네." 하였다.
소계단정횡청천(小溪短艇橫淸淺) : 백분화(白賁華)의 〈구례현〉시에, "아침에 백계산(白鷄山) 아래 길을 떠나서
저녁에 찬수역(鑽燧驛) 동편 마을에 머무네. 작은 시내 조그만 나룻배는 맑고 얕은 물을 가로지르고 해지자 외로
운 마을은 어둠에 싸였구나. 절벽 위에 흩어진 구름은 은궐(銀闕 백은으로 지은 궁성의 문)이 솟아나는 듯,
먼 산에 타는 불은 장대한 화성(火城)이로다. 밤 깊어 곤한 잠자리 꿈을 깨니 벽을 등지고 희미한 등불이 침상
위를 비추네." 하였다. 찬수(鑽燧)는 잔수(潺水)의 잘못이다.
숭악춘한설만산(嵩岳春寒雪滿山) : 정창손(鄭昌孫)의 시에, "환해(宦海 벼슬길)에 부침(浮沈)하니 가는 곳마다
어렵다가, 남쪽에 와서 잠시나마 마음의 위안을 얻었네. 창에 밤이 고요한데 바람은 대를 울리고, 숭악(崇岳)은
봄에도 차가워 눈이 산에 가득하네. 나그네 몸은 푸른 산 속에 노닐고, 어버이 생각하는 꿈 흰구름 사이에 둘렀네.
괴로운 인생 벼슬에 얽매여 물외(物外)에 한가로이 소요하지 못하는 것이 한스럽구나." 하였다.
[비고]
연혁 조선 고종 32년에 군(郡)으로 고쳤다. 《文獻備考》
영종(英宗) 15년 일신현(一新縣)으로 강등시켰다가 26년 다시 승격시켰으며, 헌종(憲宗) 10년 현(縣)으로 강등
시켰다가 철종(哲宗) 4년 다시 승격시켰다.
방면 통한(通漢) : 읍 안이다. 장흥(長興) : 처음이 1리이고, 끝이 3리이다.
만복(萬福) : 서쪽으로 처음이 2리이고, 끝이 5리이다. 백파(白波) : 동쪽으로 처음이 10리이고, 끝이 20리이다.
주촌(朱村) : 동쪽으로 처음이 7리이고, 끝이 20리이다.
내산동(內山洞) : 동쪽으로 처음이 30리이고, 끝이 40리이다.
외산동(外山洞) : 동쪽으로 처음이 40리이고, 끝이 50리이다.
소의(所義) : 동쪽이 처음으로 50리이고, 끝이 60리이다. 중방(中方) : 위와 같다.
흑성(黑城) : 남쪽으로 처음이 15리이고, 끝이 25리이다. 주포(周浦) : 남쪽으로 처음이 15리이고, 끝이 25리이다.
송내(松內) : 위와 같다. 수지(水旨) : 남쪽으로 처음이 15리이고, 끝이 40리이다.
두동(豆洞) : 남쪽으로 처음이 25리이고, 끝이 30리이다. 금안(金岸) : 남쪽으로 처음이 40리이고, 끝이 50리이다.
대곡(大谷) : 두동(豆洞)에서와 같다. 초랑(草郞) : 서남쪽으로 처음이 40리이고, 끝이 50리이다.
원천(源川) : 동쪽으로 처음이 15리이고, 끝이 50리이다.
기지(機池) : 서남쪽으로 처음이 20리이고, 끝이 30리이다. 생오대(生烏代) : 초랑(草郞)에서와 같다.
자성(者省) : 서쪽으로 처음이 20리이고, 끝이 30리이다. 이언(伊彦) : 서쪽으로 처음이 10리이고, 끝이 20리이다.
적과(迪果) : 북쪽으로 처음이 20리이고, 끝이 30리이다. 고절(高節) : 위와 같다.
고달(古達) : 남쪽으로 처음이 40리이고, 끝이 60리이다.
덕고개(德古介) : 북쪽으로 처음이 40리이고, 끝이 50리이다.
돌고개(乭古介) : 위와 같다. 지사(只沙) : 북쪽으로 처음이 50리이고, 끝이 70리이다.
말천(末川) : 북쪽으로 처음이 40리이고, 끝이 60리이다.
갈치(葛峙) : 동북쪽으로 처음이 10리이고, 끝이 15리이다.
보현(普賢) : 동북쪽으로 처음이 30리이고, 끝이 50리이다.
시라산(時羅山) : 서쪽으로 처음이 10리이고, 끝이 20리이다.
산동(山東) : 동북쪽으로 처음이 30리이고, 끝이 40리이다.
둔덕(屯德) : 서쪽으로 처음이 20리이고, 끝이 40리이다.
영계(靈溪) : 서쪽으로 처음이 30리이고, 끝이 40리이다.
사동(蛇洞) : 서북쪽으로 처음이 20리이고, 끝이 30리이다.
성남(城南) : 서북쪽으로 처음이 30리이고, 끝이 40리이다.
오지(吾枝) : 서북쪽으로 처음이 50리이고, 끝이 60리이다.
견소곡(見所谷) : 서쪽 처음이 40리이고, 끝이 60리이다. 아산(阿山) : 처음이 40리이고, 끝이 50리이다.
왕지전(王之田) : 처음이 10리이고, 끝이 20리이다. 매안(梅岸) : 처음이 10리이고, 끝이 20리이다.
내진전(內眞田) : 북쪽으로 처음이 50리이고, 끝이 70리이다.
외진전(外眞田) : 북쪽으로 처음이 70리이고, 끝이 90리
이다. 상번암(上磻巖) : 동북쪽으로 처음이 90리이고, 끝이 1백 리이다.
하번암(下蟠巖) : 동북쪽으로 처음이 10리이고,
끝이 50리이다. 서봉(棲鳳)ㆍ백암(白巖).
창고 읍창(邑倉)ㆍ지혜창(紙惠倉)ㆍ진휼창(賑恤倉) : 성부(城府)는 성내(城內)에 있다. 동창(東倉) : 40리에 있다.
서창(西倉) : 40리에 있다. 구남창(舊南倉) : 40리에 있다. 신남창(新南倉) : 40리에 있다. 구북창(舊北倉) : 30리에
있다. 신북창(新北倉) : 40리에 있다. 산창(山倉) : 교룡산성(蛟龍山城)에 있다.
진도 순자진(鶉子津) : 일명 중진(中津)이라고도 하는데, 남쪽으로 30리이고, 곡성 대로(谷城大路)로 통한다.
적성진(赤城津) : 서쪽으로 30리이고, 순창 대로(淳昌大路)로 통한다.
교량 금석교(金石橋) : 서쪽으로 5리이다. 용두정교(龍頭亭橋) : 서쪽으로 10리이다.
양수정교(兩水亭橋) : 남쪽으로 5리이다. 갈어구교(乫魚口橋) : 동쪽으로 10리이다.
금천교(金川橋) : 동쪽으로 50리이다. 율천교(栗川橋) : 북쪽으로 30리이다. 월천교(月川橋) : 남쪽으로 30리이다.
오작교(烏鵲橋)ㆍ승차교(乘槎橋) : 모두 광한루(廣寒樓) 앞에 있다.
토산 밤ㆍ칠ㆍ차, 매 : 두 종인데, 지리산에서 난다.
누정 용두정(龍頭亭) : 서쪽으로 10리에 있고, 기암(奇巖)이 촉립(矗立)한 모양이 마치 용머리와 같다.
묘전 탄보묘(誕報廟) : 서문(西門) 밖에 있으며, 선조 기해년에 총병(摠兵) 유건(劉健)이 세웠고, 정종 신축년에
현액(懸額)을 내렸다. 관우(關羽) : 경도(京都)의 동묘를 보라. 이신방(李新芳) : 총부중군(摠府中軍)이다.
장표(蔣表) : 총부천총(摠府千摠)이다. 모승선(毛承先) : 총부천부(摠府千夫)이다. 위 세 사람은 정유 왜란
(丁酉倭亂) 때에 나가 싸워 본부에서 전사하였다. 숙종 병신년에 세 장수를 함께 배향(配享)하였다.
사원 영천 서원(寧川書院) : 광해군 기미년에 세웠으며, 숙종 병인년에 현액을 내렸다.
안처순(安處順) : 자는 순지(順之), 호는 사제(思齊)이고, 순흥(順興) 사람이다. 벼슬은 봉상 판관(奉常判官)이다.
정환(丁煥) : 자는 용회(用晦), 호는 회산(檜山)이며, 창원(昌原) 사람이다. 벼슬은 경상도사(慶尙都事)이다.
정황(丁熿) : 자는 계회(季晦), 호는 유헌(游軒)이며, 정환(丁煥)의 아우이다. 명종 경신년에 귀양가서 죽었고,
벼슬은 사인(舍人)으로 예조 판서(禮曹判書)에 중직하였으며, 시호는 충간(忠簡)이다.
이대유(李大甹) : 자는 경인(景引), 호는 활계(活溪)이며, 경주(慶州) 사람이다. 벼슬은 형조 좌랑이다.
○ 노봉 서원(露峯書院) : 인조 기축년에 세웠으며, 숙종 정축년에 현액을 내렸다.
김인후(金麟厚) : 문묘(文廟)를 보라.
홍순복(洪順福) : 자는 자유(子裕) 호는 고암(顧庵)이며, 남양(南陽) 사람이다. 중종 경진년에 사화를 입었다.
최상중(崔尙重) : 자는 여후(汝厚), 호는 미선재(未船齋)이며, 삭녕(朔寧) 사람이다. 벼슬은 사간(司諫)인데,
대사헌(大司憲)으로 중직되었다.
오정길(吳廷吉) : 자는 형보(亨甫), 호는 해서(海西)이며, 해주 사람이다. 벼슬은 교서 정자(敎書正字)이다.
최온(崔薀) : 자는 휘숙(輝叔), 호는 폄재(砭齋)이며, 최상중의 아들이다. 벼슬은 동부승지(同副承旨)이다.
최휘지(崔徽之) : 자는 자금(子琴), 호는 오주(鰲州)이며, 최온의 조카이다. 벼슬은 익위(翊衛)이다.
충렬사(忠烈詞) : 광해군 임자년에 세웠으며 효종 계사년에 현액을 내렸다.
이복남(李福南) : 우계(羽溪) 사람으로 벼슬은 전라 병사(全羅兵使)로서 좌찬성(左贊成)에 중직되고, 시호는
충장(忠壯)이다.
정기원(鄭期遠) : 자는 사중(士重), 호는 견산(見山)이며, 동래(東萊) 사람이다. 양원(楊元)의 접반사로 난군(亂軍)
한테 죽임을 당하였으며, 벼슬은 우부승지(右府承旨)인데 좌찬성내성군(左贊成萊城君)으로 중직되었다.
신호(申浩) : 자는 언원(彦源)이며 평산(平山) 사람이다. 벼슬은 장흥 부사(長興府使)이며, 형조 판서(刑曹判書)로
증직되고 시호는 무장(武莊)이다.
이덕회(李德恢) : 자는 경렬(景烈)이며 용인(龍仁) 사람이다.
이원춘(李元春) : 벼슬은 본부판관(本府判官)이며, 형조 참의로 증직되었다. 벼슬은 구례 현감이며 병조 참의로
증직되었다.
오흥업(吳興業) : 군향유사(軍餉有司)였다. 이상의 사람들은 선조 정유년에 본부에서 전사하였다.
○ 민충사(愍忠詞) : 효종 기축년에 세웠고, 계사년에 현액을 내렸다.
황진(黃進) : 진주(晉州)를 보라. 고득재(高得齎) : 무과(武科)의 의병장(義兵將)이며, 선조 계사년에 진주에서
전사하였다. 벼슬은 평창 군수(平昌郡守)이며, 한성우윤(漢城右尹)을 내렸다.
안영(安瑛) : 광주(光州)를 보라.
담양도호부 潭陽都護府
동쪽은 순창군(淳昌郡) 경계까지 20리, 옥과현(玉果縣) 경계까지 30리, 남쪽은 창평현(昌平縣) 경계까지 20리,
서쪽은 창평현(昌平縣) 경계까지 14리, 북쪽은 장성현(長城縣) 경계까지 20리이며, 서울과의 거리가 7백 13리
이다.
건치연혁 본래 백제의 추자혜군(秋子兮郡)을 신라 때에 추성군으로 고쳤고, 고려 성종(成宗) 14년에는 담주도
단련사(潭州都團練使)를 두었고, 뒤에 지금의 이름으로 고쳐 나주(羅州)에 부속시켰다가 명종(明宗) 2년에
감무(監務)를 두었고, 공양왕(恭讓王) 3년에 율원(栗原)을 겸하여 다스리게 하고,
본래 태조(太祖) 4년에 국사(國師) 조구(祖丘)의 고향이라 하여 군(郡)으로 승격시켰고,
공정왕(恭靖王 정종)이 즉위하던 해에 중궁 김씨의 외향(外鄕)이라 하여 부(府)로 승격시켰으며
태종(太宗) 13년에 준례에 따라 도호부가 되었다.
관원 부사(府使)ㆍ교수(敎授) : 각 1명.
군명 추자혜(秋子兮) ㆍ추성(秋成)ㆍ담주(潭州).
성씨본부 이(李)ㆍ전(全)ㆍ국(鞠)ㆍ박(朴)ㆍ현(玄)ㆍ김(金) : 내(來). 원율(原栗) 박(朴)ㆍ이(李)ㆍ문(文)ㆍ
배(裵)ㆍ오(吳). 정석(貞石) 김(金).
산천 추월산(秋月山) : 부의 동북쪽 20리에 있는 진산(鎭山)이다. 석벽(石壁)이 깎아세운 듯 사방으로 둘렀는데
마치 성과 같다. 둘레가 9천 18자요, 서북방으로만 보행자가 통행할 수 있는데, 그 가운데 시내가 둘러 흐르고
또 13개소의
샘이 있다. 금성산(金城山) : 부의 북쪽 15리에 있다. 남산(南山) : 부의 남쪽 3리에 있다.
원율천(原栗川) : 부의 북쪽 1리에 있으니, 용연(龍淵)에서 나와 부(府)를 싸고 북으로 흐르다가, 서쪽으로
창평현(昌平縣)의 죽록천(竹綠川)과 합하여 광산(光山)의 혈포(穴浦)로 들어간다.
용연(龍淵) : 추월산(秋月山) 동쪽에 있는데, 사단(祠壇)이 있어 매년 춘추로 용(龍)에게 제사를 드린다.
날이 가물면 기우제를 지낸다. 차면지(遮面池) : 부의 남쪽 20리에 있다.
토산 석류ㆍ호도ㆍ감ㆍ대. 시누대 : 점이산(點爾山)ㆍ광동(廣洞)ㆍ추라산(推羅山) 등지에서 난다. 차ㆍ매실ㆍ
칠ㆍ모시ㆍ닥나무ㆍ복령(茯苓).
누정 축요루(祝堯樓) : 객관(客館) 동쪽에 있다.
학교 향교(鄕校) : 부의 북쪽 2리에 있다.
역원 덕기역(德奇驛) : 부의 동쪽 10리에 있다. 서원(西院) : 부의 서쪽 2리에 있다.
오례원(五禮院) : 부의 동쪽 30리에 있다.
연덕원(延德院) : 부의 동쪽 15리에 있다.
불우 용천사(龍泉寺)ㆍ연동사(煙洞寺) : 모두 추월산(秋月山)에 있다.
사묘 사직단(社稷壇) : 부의 서쪽에 있다. 문묘(文廟) : 향교에 있다.
성황사(城隍祠) : 부의 북쪽 3리에 있다. 금성산 신사(金城山神祠)ㆍ여단(厲壇) : 부의 북쪽에 있다.
고적 원율 폐현(原栗廢縣) : 부의 동쪽 15리에 있는데, 본래 백제의 율지현(栗支縣)이다. 신라 때에 율원(栗原)
으로 고치고 추성군(秋成郡)의 영현(領縣)으로 하였는데, 고려 때에 지금의 이름으로 고쳤다.
용연분소(龍淵噴所) : 추월산 동쪽에 두 개의 석담(石潭)이 있는데, 아래에 큰 바위가 있고 물이 바위 구멍에서
나와 흘러서 공중에 뿌리듯이 내려와서 큰 못이 되니 이것을 용연분소라고 한다. 전하는 이야기로,
암혈은 용이 뚫은 것으로 용이 지나간 꾸불꾸불한 자취가 지금도 바위 표면에 남아 있다.
옛적에 안렴사가 그 못에 가서 용의 모양 보기를 청했던바, 용이 그 머리를 내밀자 안렴사와 기관(記官)이 용의
눈을 보고 놀라 죽었다고 한다. 그 아래에 안렴사와 기관의 묘가 있다.
소년암(少年巖) : 연동사(煙洞寺) 옆에 있다.
○ 고려인 이영간(李靈幹)이 어려서 연동사(煙洞寺)에서 공부를 하였는데, 하루는 영간이 혼자 나가서 서쪽
산령(山嶺)에 올라 한 동자와 바위 위에 같이 앉아 장기를 두었다. 그런데 큰 호랑이가 바위 가에 엎드려 있는
것이었다.
영간이 조용히 장기를 그만두고 돌아와 그 일을 모두 말하였다. 중이 기이하게 여기고 가서 보니 동자와 호랑이
는 간 곳이 없고 다만 바위 위에 장기판이 있고 바위 아래는 호랑이 발자취만이 남겨져 있었다. 이로 인해서 그
바위를 소년암(少年巖)이라 하는데, 지금까지 장마비를 겪으면서도 이끼가 끼지 않고 그 자리는 완연히 어제
일처럼 남아있다.
또 전하는 이야기에, 영간이 그곳에서 공부할 때 중이 술을 빚어 두면 술이 익자 꼭 훔쳐 마시는 자가 있었다.
중이 영간을 의심하여 매질을 여러 번 하였다. 영간이 몰래 살펴보니 늙은 삵쾡이가 와서 마시는 것이었다.
영간이 이를 잡아 죽이려 하니 삵이 사람의 말을 하며 말하기를, "그대가 만약 나를 따라오면 평생 이용할 기묘
한 술수를 얻으리라." 하는 것이었다. 때마침 푸른 옷을 입은 동자가 책 한 권을 던져 주거늘 영간이 삵쾡이를
놓아주고 그 책을 가져와서 마침내 비술(祕術)에 통하게 되었다. 그가 조정에서 한 일 중에는 이상한 일이
많았다.
정석 부곡(貞石部曲) : 부의 동쪽 25리에 있다. 금성산 고성(金城山古城) : 돌로 쌓았는데, 둘레는 1천 8백 4자,
안에는 시내가 하나 있고 9개소의 샘이 있다.
명환본조 남계당(南季堂) : 정사는 청렴하고 간결하게 하였다. 가물었는데 성의껏 구제하여 한 고을이 전부
살아났다. 일이 왕께 알려지니 교서를 내려 포상하고 훌륭하게 여겼다.
곽은(郭垠) : 부역을 가볍게 하고 세금을 가볍게 하여 읍인들이 사랑하고 받들었다. 갑자가 관아에서 죽게 되니
사람들이 비통하여 술과 고기를 끊고 서로 조상하였다. 지금껏 그 은혜를 잊지 못해서 기일이면 제사를 올린다.
인물고려 이영간(李靈幹) : 문종(文宗) 때 사람. 벼슬은 참지정사(叅知政事)에 이르다.
이성(李晟) : 과거에 급제하여 수원사록(水原司錄)이 되었다. 임기가 찬 뒤에는 일가가 죽계(竹溪)의 촌사(村舍)
에 돌아갔고 벼슬을 구하지 않았다. 59세에 좌사보(左司補)를 배수하고 서성(西省)에 입직하면서 시를 짓기를,
"약체(藥砌)의 청풍은 이 늙은이를 조롱하고 죽계의 명월은 나의 정을 유인하네. 어제 저녁 이미 전원에 돌아갈
생각을 결정하였으니, 강남에 눈이 다 녹을 제 필마로 돌아가리라." 하였다.
다음날로 벼슬을 버리고 고향에 돌아가니 일시의 명유(名儒)들이 술상을 차려 전별하였다. 뒤에 여러 번 벼슬을
옮겨 민부전서(民部典書)가 되었다. 사람됨이 학문에 힘써 게으르지 않으매 따라서 배우는 사람이 매우 많았다.
당시 사람들이 오경사(五經笥)라 일컬었다.
전록생(田祿生) : 자는 맹경(孟耕). 충혜왕(忠惠王) 때 과거에 급제하였고, 공민왕(恭愍王) 때에 기거사인(起居
舍人)에 배수하고 여러 번 천거되어 정당문학 문하평리(政黨文學門下評理)를 지냈다.
신우(辛禑) 초에 간관(諫官) 이첨(李詹) 등과 같이 이인임(李仁任)을 죽이기를 요청하다가 곤장을 맞고 유배길
에 죽었다.
우거고려 강호문(康好文) : 자는 자야(子野), 호는 매계(梅溪). 벼슬은 판전교시사(判田校寺事)에 이르다,
효자고려 김기(金頎) :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어머니를 지극한 효성으로 섬겼다. 어머니가 돌아간 뒤에 애훼
(哀毁)하여 거의 본성을 잃을 지경에 이르렀다. 3년간 여묘하고, 다시 아버지를 위하여 3년을 더 지냈다.
벼슬은 장흥 부사(長興府使)까지 지냈다.
전근(全謹) : 9세에 아버지를 잃고 슬퍼하기를 예의 정도를 벗어났고, 어머니를 섬김에 있어 그 뜻에 조금도
어김이 없었다.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불교의 법을 쓰지 않고 하나같이 주문공(朱文公)의 가례에 따랐으며,
아버지 선영 아래에 장사지내고 3년 간 여묘하였다. 그리고 아버지를 위하여 다시 3년상을 지냈다.
벼슬은 소윤(小尹)에 이르렀다.
본조 송시흥(宋時興) : 3살에 아버지가 죽고 어머니를 효성으로 모셨다.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여묘 3년을
마치고, 자신의 나이가 어려 아버지의 상을 입지 못한 일이 한이 되어 아버지 묘에서 다시 3년을 지냈다.
신증 채안택(蔡安澤) : 아버지가 돌아가시니 자신이 돌을 져서 봉분을 짓고 여막에 거하기 3년, 자신이 음식을
만들어 상식과 제사에 정성을 다하였다. 일이 알려져 마을에 정려문을 세웠다.
권복(權福) : 효성으로 아버지를 섬겼고 일찍 작고한 어머니를 추모하여 사실(祠室)을 짓고 조석으로 제를
지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니 묘에서 떠나지 아니하고 3년 상 마칠 때까지 죽을 먹고 뒤에도 삭망 상식을
그치지 않았다. 금상(今上) 23년에 정려문을 세웠다.
열녀본조 우씨(禹氏) : 김유정(金惟貞)의 처. 나이 20세에 김씨에게 시집와서 4년 만에 남편이 죽었는데, 상을
입고 시어머니 전씨(田氏)를 지극한 효도로 섬겼다. 한번은 집에서 밤에 불이 났는데 시어머니 전씨는 병으로
일어나지도 못하니 우씨는 불을 무릅쓰고 시어머니를 업고 나왔다. 남편의 상이 끝나자 부모가 그의 뜻을 꺾고
자 하니 우씨가 말하기를, "내 두 자식이 있으니 먹여 살려야 하겠고, 더구나 남편이 죽을 때 노모를 부양토록
부탁하여 내 허락하였으니, 사람이 되어 신의가 없다면 장차 무슨 면목으로 세상에 서리오," 하고, 죽기로 맹서
하니 부모도 강권하지 못하였다. 시어머니가 죽자 애호하고 장사와 제사를 예에 따라 지냈다.
제영 격계기저유인가(隔溪機杼有人家) : 강호문(康好文)의 시에, "사람을 보내고 맞는 관로(官路)는 시내 옆
으로 나있는데, 고을은 피폐하고 인민은 쇠잔하며 부역은 많도다. 싸늘한 비와 거친 연기 속에 몇 가호의 집이
희미한데, 시내 건너 베짜는 북소리 나니 사람 사는 집이 있도다." 하였다.
전천창록범화류(前川漲綠泛花流) : 김길통(金吉通)의 시에, "먼 곳 산 구멍의 푸른 기운이 문을 밀치고 들어
오는데, 앞 내에 많아진 푸른 물은 꽃을 띄우고 흐르더라." 하였다.
[비고]
연혁 영종(英宗) 4년 현(縣)으로 강등되었다 : 역적(逆賊) 미귀(美龜)가 태어난 읍이기 때문이다.
14년에 다시 승격되었으며, 38년에 현으로 강등되었고, 47년에 다시 승격되었다.
고종 32년에 군으로 고쳤다. 《文獻備考》
방면 동변(東邊)ㆍ서변(西邊) : 모두 부내(府內)이다.
고지산(古之山) : 동쪽으로 처음이 5리이고, 끝이 20리이다.
정석(貞石) : 동쪽으로 처음이 20리이고, 끝이 30리이며, 옛날 정석 부곡(貞石部曲)이 있다.
어이동(魚伊洞) : 동쪽으로 처음이 5리이고, 끝이 15리이다.
갈마곡(乫亇谷) : 남쪽으로 처음이 15리이고, 끝이 20리
이다. 대곡(大谷) : 남쪽으로 처음이 20리이고, 끝이 30리이다.
두모곡(豆毛谷) : 서쪽으로 처음이 5리이고, 끝이 20
리이다. 우치(牛峙) : 서쪽으로 처음이 15리이고, 끝이 20리이다.
산막곡(山幕谷) : 서북쪽으로 처음이 10리이고,
끝이 40리이다. 천인곡(千人谷) : 북쪽으로 처음이 10리이고, 끝이 20리이다.
목산(木山) : 서쪽으로 처음이 5리이고,
끝이 40리이다. 답곡(畓谷) : 남쪽으로 처음이 5리이고, 끝이 15리이다.
천동(泉洞) : 북쪽으로 처음이 5리이고, 끝이 10리이다.
용천(龍泉) : 북쪽으로 처음이 20리이고, 끝이 40리이다.
성지 금성산성(金城山城) : 북쪽으로 20리이며, 옛날 돌로 쌓은 성이 있다. 선조(宣祖) 30년 개축하였고, 언덕을
연하여 성을 쌓았다. 효종(孝宗) 4년 중수(重修)하였는데, 내성의 둘레가 6백 10보이고, 외성의 둘레가 4천 9백
4보이며, 미성(尾城)이 72, 호지(壕池)가 5, 우물 29개가 동문과 남문 안팎에 있고, 내성 남문은 서북으로 두 문
이요, 동ㆍ서ㆍ남의 세 문은 적의 침입을 받을 만한 곳이 된다.
담양(潭陽) 윗쪽으로 길이 산등성으로 났는데, 한 길[一線]이 1백 번 굽이돌고 돌기를 6, 7리나 해서 비로소
남문에 도달하게 되고, 남문 밖 양쪽 곁은 모두 절벽이다.
동문 밖 6ㆍ70보에 돌이 있는데, 비스듬하게 서서 성문을 엿보니, 서문 양쪽 곁에는 산이 모두 절벽이요,
동북 정남에는 1천 길이나 벽같이 섰고, 성의 모양이 기장(奇壯)하고 멀리 툭 트여 사방이 높고 가운데는 움푹
들어가고 밖에는 준봉(峻峯)이 없어서 성문을 엿보기가 어렵다. 사면으로는 선로(線路)가 줄로 깔렸으니 참으로
형세가 있는 땅이다.
노적봉(露積峯)과 금성사(金城寺)가 있고, 서문 밖에는 귀암사(龜巖寺)가 있다,
○ 속읍(屬邑)에는 담양(潭陽)ㆍ순창(淳昌)ㆍ옥과(玉果)ㆍ창평(昌平)ㆍ창륙(倉六)이 있다.
○ 수성장(守城將)은 본 부사(本府使)가 겸한다. 별장(別將)이 1명이요, 승성(僧城)이 1명 있다.
추월산 석벽(秋月山石壁) : 석벽이 깎은 듯하게 서있고, 사방 둘레가 성 둘레와 같은데 9천 자이며, 그 서북은
보행자만 지나갈 수 있는 정도이고, 가운데는 개울이 둘러있으며, 또 샘이 13군데나 있다.
창고 창(倉)이 다섯 : 모두 읍내에 있다. 외창(外倉) : 남쪽으로 30리이며, 답곡(沓谷)에 있다. 산성창(山城昌).
교량 금강교(錦江橋) : 동쪽으로 10리에 있다. 대천교(大川橋) : 서쪽으로 10리에 있다.
대교(大橋) : 남쪽으로 20리에 있다.
사원 의암 서원(義巖書院) : 선조(宣祖) 정미년에 세웠으며, 현종(顯宗) 기유년에 현액을 내렸다.
유희춘(柳希春) : 자는 인충(仁冲) 호는 미암(眉巖)이며, 선산(善山) 사람이다.
벼슬은 행 대사헌(行大司憲)이고, 좌찬성(左贊成)을 증직하였으며, 시호는 문절(文節)이다.
순창군 順昌郡
동쪽은 남원부(南原府) 경계까지 23리, 남쪽은 옥과현(玉果縣) 경계까지 18리,
서쪽은 담양부(潭陽府) 경계까지 19리,
정읍현(井邑縣) 경계까지 69리, 북쪽은 임실현(任實縣) 경계까지 25리, 태인현(泰仁縣) 경계까지 43리이며,
서울과의 거리가 6백 70리이다.
건치연혁 본래 백제의 도실군(道實郡)을 신라 때에 순화군(淳化郡)으로 고치고, 고려에 와서 지금의 이름으로
고쳐 현(縣)으로 삼고 남원부에 부속시켰는데, 명종(明宗) 5년에 감무(監務)를 두었고,
충숙왕(忠肅王) 원년에 승 국통(僧國統) 정오(丁午)의 고향이라 하여 군(郡)으로 승격시켰고 본조에서도 그대로
따랐다.
관원 군수(郡守)ㆍ훈도(訓導) : 각 1명.
군명 도실(道實)ㆍ오산(烏山)ㆍ옥천(玉川)ㆍ순화(淳化).
성씨본군 설(薛)ㆍ염(廉)ㆍ임(林)ㆍ조(趙)ㆍ호(扈) : 옹(邕)으로 쓰기도 한다. 김(金) : 속성 복흥(福興) 임(林)ㆍ
조(趙). 적성(赤城) 송(宋)ㆍ이(李)ㆍ정(程)ㆍ황(黃)ㆍ현(玄). 유등(柳等) 정(程)ㆍ이(李)ㆍ송(宋).
감물토(甘物土) 최(崔). 치등(置等) 이(李)ㆍ정(井)ㆍ임(林)ㆍ백(白)ㆍ경(景)ㆍ김(金).
형승 오산중치작수동회(鰲山中峙鵲水東回) : 안지(安止)의 시에, "오산은 중앙에 우뚝 솟아 지령(地靈)을 모으고,
작수는 동으로 돌아 흐르고 논두렁이 평평하다." 하였다.
산고세유(山高勢幽) : 유관(柳觀)의 시에, "땅이 궁벽하여 주민이 적고, 산은 높아 읍의 형세는 그윽하도다."
하였다.
호남의 승지(勝地)이다 : 서거정의 〈귀래정기(歸來亭記)〉에 나옴.
산천 추산(追山) : 군의 북방 3리에 있다.
회문산(回文山)으로부터 구불구불 남쪽으로 달려와서 군의 북쪽에 와서 다시 솟아오른 진산(鎭山)이다.
회문산 : 군의 북방 32리에 있다. 환도산(環刀山) : 군의 동쪽 6리에 있다.
오산(鰲山) : 군의 서쪽 2리에 있으니, 즉 추산(追山)의 서쪽 줄기이다. 산 남쪽에 바위가 있는데 모양이 큰
자라와 같다하여 오산이라 부른다.
서룡산(瑞龍山) : 군의 동쪽 25리에 있다. 광덕산(廣德山) : 군의 서쪽 30리에 있다.
적성산(赤城山) : 적성현(赤城縣)에 있다. 봉우리 셋이 솟아 있는데, 절벽이 천 길이나 되며 중봉(中峯) 위에는
작은 암자가 있다.
작천(鵲川) : 광덕산(廣德山)에서 나와 군의 서쪽 5리에 이르러 작천이 되고, 3리 지경에 와서는 경천(鏡川)이
되며, 객관 남쪽에 와서는 대교천(大橋川)이 되고, 옥과(玉果)에 와서는 방제천(方梯川)이 되어 동쪽으로 흘러
남원부에 들어와서 연탄(淵灘)이 되었다.
적성진(赤城津) : 즉 임실현(任實縣) 오원천(烏源川)의 하류가 된다. 일명 화연(花淵)이라고도 하는데,
적성산(赤城山) 아래에 있기 때문에 붙인 이름이다. 그 깊이를 헤아릴 수 없는데 세속에서 전하기를, 신령스런
것이 있다고 하며, 날이 가물면 기우제를 지낸다.
○ 이규보의 시에, "가랑잎 같은 작은 배가 취옹(醉翁)을 태우니, 석양의 행색(行色)이 병풍 그림이로다.
평소 화산이 좋다고 들었더니, 구름 낀 봉우리 이 벽공(碧空)에 점점이 찍힌 것을 바라보기만 하네." 하였다.
저탄(猪灘) : 군의 동쪽 20리에 있다. 즉 적성진(赤城津)의 하류인데 다시 동으로 흘러 남원부의 연탄이 되는데,
고깃살[魚梁]이 있다.
애곡지(艾谷池) : 감물토소(甘勿吐所)에 있다. 신증 이천(伊川) : 군의 동쪽 10리에 있다. 적성수(赤城水)와 합하여
남원부의 연탄으로 들어간다.
토산 은어ㆍ벌꿀ㆍ닥나무ㆍ울금(鬱金)ㆍ대ㆍ복령ㆍ차ㆍ백화사(白花蛇)ㆍ자연동(自然洞).
성곽 대모 산성(大母山城) : 군의 서쪽 4리에 있는데, 석축으로 둘레는 7백 80자 높이 26자, 그 안에 샘이 하나
못이 하나, 그리고 군창(軍倉)이 있다.
누정 관정루(觀政樓) : 객관의 남쪽에 있다.
○ 최항(崔恒)의 시에, "주렴(珠簾)을 높이 걷고 돌아온 가을 맞이하니, 그림같은 물과 산이 눈 안에 들어오네.
태수의 맑은 정치를 무엇에다 비길꼬. 누 앞에 시냇물이 푸르게 흐르도다." 하였다.
북루(北樓) : 객관의 후원에 있다.
○ 이색(李穡)의 기(記)에, "누에 누기(樓記)가 있는 것은 마땅한 일이다. 누를 짓는데 있어서는 그 공을 나타
내고, 누의 이름에 있어서는 그 의의를 밝히는 것이니, 이것을 버리고 억지로 말을 만든다는 것은 곤란하다.
순창 자사(淳昌刺史) 남후(南侯)가 정치를 잘하여 그 여가에 새로 객관의 뒤에 누를 짓고 강호문(康好文)군이
남후의 부탁으로 나에게 누기 써 주기를 매우 간절히 요청하였으나, 누의 규모와 지세 그리고 공역이 얼마 들고
시일이 얼마나 걸렸는지는 나에게 일러주지 않았고, 또한 누의 이름의 뜻을 풀어 쓸 만한 것도 없다.
기문을 청하는 그 뜻을 보건대, 다만 뒷사람들로 하여금 이 누가 남후에게서 처음 시작된 것을 알게 하고자 할
뿐이요, 다른 것은 급한 것이 아니었다.
순창에는 옛날부터 군의 객관이 있어 여기에서 손님을 대접하여 온 것이 몇 백 년이 되었는지 알 수 없는데,
이 누가 이제 처음 생겼다. 남후는 자기보다 앞 세대의 것으로 이은 것이 아니고 자기의 마음에 홀로 단안을
내려 몇 백 년 동안 없었던 명승을 이룩하게 되었다. 높은 곳에 자리잡고 멀리까지 바라볼 수 있으니 우뚝 솟은
것이 한 고을의 장관이라, 그 백성을 즐겁게 하고 나아가서 오는 손님에게까지 미치게 하니 그 어찌 우연한 일
이라 하리오. 내가 또 생각할 때 그 휘비조혁(翬飛鳥革 새가 날개를 펴고 나는 것같이 집이 아름답고 훌륭한 것
을 말한다.)의 높은 것이 모두 옛날 초목이 우거졌던 곳인데, 그 아름다운 것을 완성시켜 온전히 즐기게 한 것은
남후의 공이다.
먼 훗날 바람치고 비가 스며들어 누각이 피폐해지고 빈터만 남아 있게 되면, 슬픈 감정을 일으켜 길이 탄식할 자
과연 어떤 사람이며, 서로 이어서 이 땅에 백성이 되고 이 땅에 관리가 되어 능히 남후의 마음을 본받아 무너지면
고치고 헐어지면 수리하며 빈터만 남는 일이 없게 할 사람이 또한 어떤 사람이 될 것인지 알 수가 없도다.
그러나 대체로 그 이루어 놓은 공을 누리는 사람은 반드시 그 처음에 시작한 사람을 생각하기 마련이니,
뒷날 이 누에 오르는 자는 반드시 남후가 지은 것이라 말할 것이다. 따라서 그의 사람됨을 논의하게 되면 남후의
이름은 이로 말미암아 더욱 잘 전하여 질 것이 아니겠는가. 남후의 이름은 징(徵)이요, 정사에 자질이 있고 온아
하여 예절을 지키며 나와는 집안끼리 교분이 있으므로 그 어려움을 사양하지 않고 굳이 이 글을 적었노라."
하였다.
○ 허주(許周)의 시에, "만리(萬里) 타향에서 돌아가기를 생각하는 손이 낙엽지는 가을에 몹시 놀라네. 달은 밝고
은하수가 먼데, 구름 걷히고 화성(火星)이 흐르네. 나무가 빽빽하니 마을의 모양은 오래되었고, 산이 깊으니 물색
(物色)도 그윽하구나. 어찌 하면 깃발을 돌리어 갈고, 홀로 망경루(望京樓)에 기대였다네." 하였다.
신증 이승소(李承召)의 시에, "충신(忠信)한 고을 예로부터 이름있으니 송사하는 동헌 뜰에 사람이 없고, 푸른
이끼만 끼었도다. 누를 지으니 백성들과 즐거움을 같이 하고, 정사 간이(簡易)하고 사람들 화목하니 물과 같이
맑도다. 천리의 물과 산은 승경(勝景)이 많고 일헌(一軒)의 풍월(風月) 태평성세 이루네. 은근히 남유객(南遊客)
에게 말하노니 곳곳에서 현가성(絃歌聲)을 들어보라." 하였다.
귀래정(歸來亭) : 군의 남쪽 3리에 있다.
○ 서거정의 기에, "신후(申侯) 자집(子楫)은 고 상국 고령 문충공(高嶺文忠公 신숙주(申叔舟))의 막내 동생이다.
일찍 과거에 급제하여 고위 현관(顯官)을 지내어 성명(聲名)이 자자하였다. 문충공(文忠公)이 국정을 맡았을 제,
후는 뛰어난 자질을 가지고 있어 조정의 물론(物論)이 그에게로 돌아감이 많았으나,
후의 성품은 충담(沖澹)하여 벼슬을 좋아하지 아니하였다. 후는 순창군(淳昌郡)에 별장을 가지고 있었다.
순창은 호남의 승지로서 산수의 즐거움이 있으니, 토전(土田)은 기름지고 새와 고기가 많으므로 후가 날마다
돌아갈 생각을 가지고 있었으나 문충공의 우애가 지극하여 조석으로 상종하게 되매 결행하지 못한 지가 몇 년이
었다. 후의 전원에 돌아가고자 하는 생각이 매우 간절하여, 하루는 병을 칭탁하고 물러나기를 고하고서 이후로
나가지 않은지가 7, 8년이 되었으매 종족들이 나가기를 권하여도 따르지 아니하니 문충공으로서도 어찌 할 수가
없었다.
내 일찍 들으니, 순창의 남쪽에 있는 산들은 중첩하고 산세는 매우 기위(寄偉)하여 꿈틀꿈틀 하고 낮게 돌아서
혹은 용이 나는 것 같기도 하고 범이 뛰는 것 같기도 하며, 혹은 굽히고 혹은 일어나며 혹은 내려앉아 동봉(東峯)
이 되었는데 봉우리의 꼭대기는 땅이 아주 평탄한지라 후가 여기에 서너 칸을 지으니, 정자의 좌우에 만죽(萬竹)
단란(檀欒)이 울창하여 사시절 어느 때나, 바람이 부나 비가 오나, 달이 뜨나 눈이 오나, 모두 아름다워서 그 아름
다운 경치가 하나둘로 말할 수 없다.
그 가운데 화초를 심으니, 홍백색(紅白色) 주자색(朱紫色)이 서로 이어 피고 져 더위나 추위에 끊임이 없도다.
정자에 올라 멀리 바라보면, 남원의 보련산(寶蓮山)과 곡성의 동지악(動地岳)의 푸른 것이 연이어 높이 솟아
서로 마주 읍하는 것 같고 그 외에 층층한 봉우리와 첩첩한 산줄기, 긴 수림과 무성한 산록은 연기와 구름이 아련
한 가운데 기이한 경치를 가져다가 모두 좌석 아래 와서 제공하고, 물은 그 근원이 적성(磧城)의 북쪽에서 발하여
남쪽으로 꺾여 꾸불꾸불 흘러 두 산협 사이로 나오고 다시 합쳐 동쪽으로 흐른다. 광덕산(廣德山)의 산과 물은
용이 서린 듯 뱀이 또아리를 튼 듯이 봉우리 아래로 감고 돌아 적수(磧水)와 합하니, 그 물이 맑고 깨끗하여 희롱
할 만하고 거울삼아 비칠 수도 있고, 촌락과 들판은 백 리가 시원스레 보이는데, 누런 밭둑과 푸른 논이 멀리 가까
이 아련히 보이고, 밭가는 자ㆍ소먹이는 자ㆍ나무하는 자ㆍ물고기 잡는 자ㆍ사냥하는 자들이 서로 노래로 화답
하며, 행락객ㆍ나그네ㆍ소와 말이 끊임없이 오고가는 것을 또한 앉아서 구경할 수가 있다.
후가 날마다 건(巾)을 쓰고 짚신을 신고 그 가운데서 읊조리어, 그 즐거움이 유유작작 하였다. 때로는 개를 끌고
매를 팔뚝에 얹고서 여우와 토끼를 잡기도 하고, 물에 가선 고기 잡으며, 산에 가선 나물캐고, 죽순과 순채를 철
따라 먹으며, 국화를 보내고 매화를 맞으니 강촌 사시의 경개가 무궁하여 후의 즐거움도 무궁하였다.
근래 문충공의 병이 심해져 후가 올라와 서로 만나보게 되니 진신(搢紳) 사대부들이 입을 모아 후의 재능을
가지고 천거하니 성상께서도 그의 재능을 중하게 여겨 전주 부윤(全州府尹)을 제수하여 보냈다.
전주에서 순창까지는 하룻길이다. 후는 정사의 여가에 남여(藍輿)를 타고 왕복한 것이 여러 번 있었으니, 후의
정자에 대한 흥취는 옛날과 다름이 없었다. 금년 봄에 임기가 끝나 서울로 불려가 첨지중추가 되니 후의 몸은
비록 서울에 있으나, 그의 마음은 늘 정자에 왕래하는 것이었다. 하루는 후가 나와 더불어 정자의 승경에 관
해서 이야기 하던 차에 누의 이름과 기문을 짓도록 요청하는 것이었다. 나 서거정이 '귀래(歸來)'라 이름짓기를
청하고 그 설명을 다음과 같이 풀이하였다.
〈귀거래(歸去來)〉는 진(晉) 나라의 은사 도잠(陶潛)의 사(辭)이다. 옛사람들은 해석하기를, '그 관(官)을 돌려
주고 직(職)을 떠나서 자기 집으로 돌아온다는 뜻이다.' 하였다. 대저 고인 가운데 진퇴의 바른 것을 얻은 사람은
도잠이 제일이다.
후세에 뜻이 있는 선비라면 누구나 어려서 배우고, 장성해서는 시행하며, 늙어서 온전히 하기를 바라지 않으리오.
그러나 일단 공명이 그 마음을 더럽히고 처자가 그 욕심에 누가 되어 마땅히 벼슬을 버리고 돌아가야 할 때에
돌아가지 못하는 이가 거의 대부분이다. 그리하여 임하(林下)에 사람이 없다는 비난이 나오게 되는 것이다.
내 또 듣기에, 옛날의 군자는 벼슬하여 일정한 녹이 있고 나와서는 일정한 업(業)이 있기 때문에 그 진퇴에 충분
한 여유가 있었다. 그런데 오늘의 벼슬하는 이들은 대개 벼슬로서 안살림을 꾸리므로 달리 일정한 업이 없어 일
단 그 봉급을 잃게 되면 갈 곳이 없어지므로 배회하고 돌아보아 자리를 탐하고 국록을 도둑질한다는 비방을
부르게 되니, 참으로 애석한 일이다.
아, 비록 내가 돌아갈 데가 없다하더라도 돌아갈 만한 때 돌아가지 못함은 실로 떳떳할 수 없거늘, 하물며 돌아갈
곳이 있는데도 돌아가야 할 때에 돌아가지 아니하는 사람이야 다시 말해 무엇하겠는가.
이제 후의 별장에는 전원도 충분하고 부리는 사람도 충분하여 무릇 제사지내는 일, 손님 접대하는 일, 노인을
봉양하고 어린이를 양육하는 일, 그리고 관혼경조(冠婚慶吊)에 필요한 물품을 밖에서 구하지 않고도 넉넉하다.
전에 후는 공명이 한창일 때도 이곳에 돌아와 몇 년간 자득하였는데, 지금은 비록 다시금 조정에 나서서 고관이
되어 청색(淸色), 자색(紫色)의 인끈을 띠고 있지만 훗날 공을 이루고 이름을 낸 뒤 용퇴하게 되면 이 귀래정이
아니고 어디 가리오. 그러니 귀래라 이름해도 괜찮치 않은가. 내가 탐욕에 끌려 지금껏 쉴 줄 모르고 머리카락이
듬성듬성한데, 후를 보고서야 전원에 돌아가는 고상한 취미를 고인에게서 얻어, 훗날 돌아갈 뜻을 이루어 유종의
미를 다할 것을 생각하니, 어찌 심히 부끄럽지 아니하랴. 내 만일 벼슬을 사퇴하여 한가함을 얻어서 후를 따라
이 정자에 오게 된다면, 반드시 귀래(歸來)의 사를 읊조리고 지족(止足)을 노래하여 나의 설명을 마치리라."
하였다.
신증 성현의 시에, "돌아가리, 돌아가리, 뽕나무 가래나무 이미 오래되었고, 전원은 황폐하였네.
도연명(陶淵明)은 일찍이 시골 처사 되어 향리의 소인배에게 허리 굽힘 부끄러워 하였네. 심양강(潯陽江 심양(
潯陽)은 도연명의 고향) 머리는 참으로 깊숙한 곳인데, 한 칸의 달팽이 같은 집이 머리를 디밀 만하구나.
삼경(三徑)의 솔과 대는 푸르름을 어지러이 펼치고, 동쪽 울타리의 국화는 누렇게 비로소 탐스러워졌네.
거문고에 줄이 없어도 마음이 절로 즐겁고, 갈포(葛布) 두건으로 술을 거르며 술병을 열도다.
산하가 모두 유기노(劉奇奴 유유(劉裕)의 어릴적 이름)에 속하였네. 그는 홀로 오류(五柳)에 기대어 서리같은
흰 수염을 꼬았네. 자양(紫陽 주자(朱子)의 별호)의 의필(義筆)에 빛나고 소생하게 하였으니 천년의 맑은 바람이
경박한 사람을 돈후하게 만들었네.
지금 성군의 교화가 당우(唐虞 요(堯) 임금과순(舜) 임금))를 능가하니 기룡(夔龍) 같은 신하가 벼슬길에 붙어
있네. 그대의 뛰어난 재주는 문무를 겸했는데, 급한 흐름에서 용퇴하다니 그 아니 어리석은가.
그대가 말했던가, 벼슬길 고통스럽고 기구하여 잰걸음 치다가 그 몸을 상한 자 몇 사람인고. 평생에 본래 성품이
강호에 있으니 지금 아니 가면 장차 어찌 한단 말인가. 보련산(寶連山)은 높아 푸르고 울창하며,
적성(赤城)의 물은 합하여 맑기가 젖빛 같네. 도구(菟裘 고향 별장)의 승지는 기뻐 거할 만하니 헌면(軒冕)을
버리기를 진흙같이 하도다.
천 휴(畦 논 50묘(畝)가 1휴(畦))의 논에는 벼가 익어 누런 구름이 펼쳐졌고, 만 그루의 배와 대추나무 붉은 끈에
꿰어진 구슬이로다. 사방 이웃이 말술로써 서로 노래 부르고 전옹(田翁)과 야로(野老)들은 자리를 함께 하였네.
흔연히 양(壤 흙으로 만든 악기의 일종)을 치며 강구(康衢 요(堯) 임금 때 그의 덕을 노래한 동요)를 노래하니 그
시절이 태평하여 세금을 거두러 떠들며 다니는 것을 보지 못하였네. 이 즐거움을 끝내 지켜 변함없기 바라노니,
알지 못할게라, 연명도 이 즐거움이 있었던지를.
가을바람 소소히 황려(黃藘) 위에 부리니, 귀흥(歸興)은 홀연히 강동(江東)의 농어(장한(張翰)의 강동 농어 고사))
를 생각하네. 갈림길에 이르러 소매를 부여잡고 이별곡을 부르니, 친구가 술잔을 기울이며 서로 와서 붙드네.
아직 술을 사랑하여 머뭇거리니, 종남산(終南山)이 솜털같은 구름 사이에 외롭구나.
의연히 꿈길은 서울에 가 있는데 때로는 돌아와 지방관을 하였네. 그대를 보내고 붕새가 남쪽으로 날아가려는
뜻을 앙모하며, 시를 완성하고 한번 웃으며 부질없이 길게 탄식을 하노라." 하였다.
○ 강희맹의 시에, "돌아와서 하는 일은 무엇인고, 전원의 세 길이 거칠어 있구나. 봄이 오면 솔과 국화를 돌보고,
손이 오면 술잔을 기울이네. 샘물 줄기는 졸졸 흐르고, 꽃가지는 세세한 향기를 풍기네. 마음에 맡겨 스스로 즐기
거니, 헌상(軒裳 고관의 수레와 관복)을 반드시 사모할 것 없어라.
○ 돌아와서 하는 일은 무엇인고, 유거(幽居)의 긴 여름날이 맑구나. 죽림 깊은 곳에 사슴을 보겠고, 마을 언덕
멀리 꾀꼬리 소리 듣겠네. 집 짓는 제비가 쌍쌍이 바삐 날아 다니는데, 강에 뜬 갈매기 저마다 가볍구나.
마음에 맡겨 스스로 즐기거니, 어찌 헛된 이름에 얽매이랴.
○ 돌아와서 하는 일 무엇인고, 들판에 기운 드높구나. 날 저물어 기러기는 바닷가를 날고, 한 마리 두루미는
수풀 언덕에 있도다. 솥이 매끄러우니 순채나물 삶음이요, 밥상이 향기로우니 게와 새우 나눔일세.
마음에 맡겨 스스로 즐기니, 흥이 다시 도도하여라.
○ 돌아와 하는 일 무엇인고, 겨울 기운 처음으로 엉키었도다. 토끼는 추워 굴 속에 숨고, 고기는 얼음 아래
숨었네. 마른 가지는 봄에 다시 무성해질 것을 노리고, 관솔은 밤에 등불이 되었네. 마음에 맡겨 스스로 즐기거니,
농사일은 모두 다 끝이 났도다.
○ 돌아와 하는 일 무엇인고, 천석(泉石)을 즐기는 고질병 된 것이 기이하네. 강물은 멀리 넓은 들을 내닫고,
산은 위태롭게 작은 정자를 끼고 있네. 대가 있는 뜰은 고요하기만 한데, 꽃을 사랑해 자리 다시 옮기노라.
마음에 맡겨 스스로 즐기거니, 어찌하여 세상과 서로 배치되랴.
○ 돌아와서 하는 일이 무엇인고, 고향에 좋은 자리 얻어서 노네. 산은 푸른데 흰 물이 더 있고, 봄은 따스한데
또 서늘한 가을이 있네. 이미 평생의 일을 결단했거니, 어찌 일찍이 만호후(萬戶侯)를 바랐던가.
마음에 맡겨 스스로 즐기나니, 득의한 마음 또한 휴휴(休休 너그러운 모양)하여라." 하였다.
신증 취홍정(翠紅亭) : 관정루(觀政樓) 남쪽에 있는데, 연못과 대밭이 있다.
온진정(蘊眞亭) : 이천(伊川)의 언덕 위에 있는데, 신제(申濟) 공의 별장이 있다.
학교 향교(鄕校) : 처음에 군의 서쪽 2리에 있었는데, 군수 김수광(金秀光)이 군의 북쪽 2리에 옮겨서 지었다.
이숙함(李叔瑊)의 기(記)가 있다
역원 창신역(昌新驛) : 군의 동쪽 5리에 있다. 동원(東院) : 군의 동쪽 3리에 있다.
적성원(赤城院) : 적성현(赤城縣)에 있다. 우현원(牛峴院) : 군의 남쪽 25리에 있다.
마월원(磨月院) : 군의 서쪽 22리에 있다. 노현원(蘆峴院) : 군의 북쪽 27리에 있다.
서원(西院) : 군의 서쪽 3리에 있다.
신증교량 대석교(大石橋) : 객관의 남쪽에 있다.
불우 취암사(鷲巖寺)ㆍ서룡사(瑞龍寺)ㆍ만일사(萬日寺)ㆍ불암사(佛巖寺)ㆍ향덕사(香德寺)ㆍ망일산(望日寺)ㆍ
망월사(望月寺) : 모두 사룡산(瑞龍山)에 있다. 복천사(福川寺) : 광덕산(廣德山)에 있다.
사묘 사직단(社稷壇) : 군의 서쪽에 있다. 문묘(文廟) : 향교에 있다. 성황사(城隍寺) : 객관의 서쪽에 있다.
여단(厲壇) : 군의 북쪽에 있다.
고적 복흥폐현(福興廢縣) : 군의 서쪽 30리에 있다.
적성폐현(赤城廢縣) : 군의 동쪽 15리에 있다. 적(赤)은 혹 적(磧)으로도 적고, 또 적(硳)으로도 쓴다.
본래 백제의 역평현(礫坪縣)인데 신라 때에 지금의 이름으로 고쳐 순화군(淳化郡)의 영현(領縣)으로 하였고,
고려 초에 남원부(南原府)에 귀속시켰다가 뒤에 다시 이곳에 내속시켰다. 치등소(置等所) : 군의 서쪽 30리에
있다.
고도암소(高刀嵓所) : 군의 동쪽 24리에 있다. 유등소(柳等所) : 군의 동쪽 15리에 있다.
감물토소(甘勿吐所) : 군의 동쪽 10리에 있다.
명환고려 이무방(李茂方) : 공민왕(恭愍王) 초에 지군(知郡)이 되었다.
한 사람이 토산물을 구하매 무방(茂方)이 차고 있던 붓집과 띠를 풀어주고 아전에게 이르기를,
"친구가 개인적으로 요구하는 것을 공물에서 줄 수 없으니 이것으로 그가 구하는 것을 바꾸어서 주도록 하라."
하니, 청을 했던 사람이 부끄러워 가버렸다.
인물고려 설공검(薛公儉) :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 설신(薛愼)의 아들이다.
설신의 어머니 조씨(趙氏)는 네 번 임신하여 아들 여덟을 낳았다. 그중 셋이 과거에 급제하여 국대 부인(國大夫
人)을 봉하였는데 설신은 그 아들 중에 하나이다.
공검은 고려 고종(高宗) 때 급제하여 벼슬이 참리(參理)에 이르렀다. 나이가 많아 물러나기를 청하매 중찬(中贊)
을 가하여 치사(致仕)하게 하였다. 시호는 문량(文良)이요, 충렬왕(忠烈王)의 묘정에 배향(配享)되었다.
공검은 청렴하고 정직하여 사물을 대함에 있어서 공손히 하고 몸가짐에 있어서는 검소하게 하였으니,
조관(朝官) 6품 이상의 사람으로 친상을 당하면 본래 서로 알지 못하는 사이라도 반드시 소복하고 가서 조상하
였고, 누구나 찾아 뵙는 사람이 있으면 귀천을 가리지 않고 신을 거꾸로 끌며 급히 나가 맞이하곤 하였다.
일찍이 병으로 눕자 채홍철(蔡洪哲)이 왕진을 하였는데 무명 이불과 왕골 자리가 쓸쓸하기 마치 중의 거처와 같
은 것을 보고 나와서 탄식하는 말하기를, "우리가 공을 우러러 뵈는 것은 마치 땅강아지가 황학을 보는 것과 같다."
하였다.
조렴(趙廉) : 충숙왕(忠肅王) 때 과거에 급제하였고 또 원(元) 나라의 제과(制科)에도 합격하여 요양등로총관지
부사(遼陽等路摠管知府事)를 배수하였다. 일찍이 중원(中原)의 사대부들과 경의(經義)를 강명(講明)하였고 후
에 좌사의대부(左司議大夫)를 배수하였고, 여러 관직을 거쳐 밀직부사(密直副使)를 지냈다.
조원길(趙元吉) : 벼슬이 중대광 옥천군(重大匡玉川君)에 이르렀다.
효자본조 조유(趙瑜) : 조원길의 아들로 어려서 어머니를 잃고 3년간 여묘살이를 하였는데, 예를 준수하여 부족
한 점이 없었다. 아버지 상을 당하여 몸소 흙을 져서 어머니의 산소를 옮겨 합장하였고, 묘막에서 3년을 지냈
으며 3년 상을 마친 다음에 어머니를 위하여 다시 3년을 더 지냈다. 정려문을 세웠다.
제영 첨봉위사면(尖峯圍四面) : 남재(南在)의 시에, "뾰족한 봉우리가 사면을 에워싸고, 한 줄기 물이 동쪽으로
흐른다." 하였다.
추산의구치(追山依舊峙) : 장윤화의 시에, "연속된 산은 옛과 다름없이 솟아있고, 유리알같은 물은 오늘도 흐르네."
하였다.
객로당산곽(客路當山郭) : 유영(柳潁)의 시에, "길손이 가는 길은 산곽에 임했는데, 계절은 보리가을이 되었더라."
하였다.
임허견벽류(林虛見碧流) : 김희선(金希善)의 시에, "수림이 비니 푸른 물 보고, 처마가 허하니 밝은 달을 맞네."
하였다.
운이곡자유(雲移谷自幽) : 최문리(崔文理)의 시에, "바람이 살며시 부니 대나무가 비로소 빽빽하고, 구름이 옮겨
가니 골짜기는 절로 깊어 보이더라." 하였다.
[비고]
방면 좌부(左部) : 동쪽으로 끝이 7리이다. 우부(右部) : 서쪽으로 끝이 10리이다.
유등(柳等) : 고류등소(古柳等所)의
동쪽이며, 처음이 6리, 끝이 30리이다. 적성(赤城) : 본래 고현(古縣)이며, 처음이 15리, 끝이 30리이다.
목과(木瓜) : 남쪽으로 처음이 10리, 끝이 30리이다. 금동(金洞) : 남쪽으로 처음이 15리, 끝이 30리이다.
품곡(品谷) : 남쪽으로 처음이 10리, 끝이 25리이다. 덕진(德進) : 남쪽으로 처음이 10리, 끝이 20리이다.
팔등(八等) : 서쪽으로 처음이 10리, 끝이 15리이다.
상치등(上置等) : 본치등소(本置等所)의 서쪽으로부터 처음이
30리, 끝이 60리이다. 하치등(下置等) : 서쪽으로 처음이 50리, 끝이 90리이다.
복흥(福興) : 서쪽으로 처음이 50리, 끝이 80리이다. 오산(鰲山) : 동남쪽으로 처음이 7리, 끝이 20리이다.
무림(茂林) : 서북쪽으로 처음이 25리, 끝이 40리이다. 하동(河東) : 동쪽으로 처음이 30리, 끝이 50리이다.
귀암(龜巖) : 북쪽으로 처음이 25리, 끝이 50리이다. 인화(仁化) : 북쪽으로 처음이 15리, 끝이 30리이다.
호계(虎溪) : 북쪽으로 처음이 10리, 끝이 25리이다. ○고력암소(高力巖所)의 동쪽으로 24리,
감물토소(甘勿吐所)의 동쪽으로 10리이다.
성지 고성(古城) : 할미성(割尾城)이라고도 한다. 서쪽으로 4리에 있으며, 둘레가 7백 80척이고, 셈이 하나, 못이
하나 있다.
고성(古城) : 옥출산(玉出山)에 있으며, 흙으로 쌓았던 옛터가 있다.
고성(古城) : 성산(城山)이라고도 하는데 북쪽으로 24리에 있으며 옛터가 있다.
노현성(蘆峴城) : 북쪽으로 30리에 있으며 옛날 방위하던 곳이다.
창고 창(倉)이 다섯 : 군(郡) 안에 있다. 성창(城倉) : 서쪽으로 30리 떨어진 담양(潭陽) 금성산성(金城山城)에
있다. 사창(社倉) : 서쪽으로 50리 가니, 상치등 서쪽에 있다.
진도 적성진(赤城進) : 동쪽으로 20리에 있으며 남원(南原)ㆍ대천(大川)과 통한다
교량 대교(大橋) : 읍내에 있으며 돌로 만들었다. 작천교(鵲川橋) : 남쪽으로 2리에 있다.
동안교(東岸橋) : 동쪽으로 3리에 있다. 송정자(松亭子) : 북쪽으로 5리에 있다.
누교(樓橋) : 북쪽으로 10리에 있다. 진자교(榛子橋) : 남쪽으로 10리에 있다.
풍경교(風景橋) : 동쪽으로 15리에 있다.
토산 뽕ㆍ칠.
누정 수옥루(漱玉樓)ㆍ만록정(萬錄亭)ㆍ귀미정(歸米亭) : 남쪽으로 3리에 있다.
용담현 龍潭縣
동쪽으로 금산군(錦山郡) 경계까지 29리, 북으로 금산군(錦山郡) 경계까지 22리, 남으로 장수현(長水縣)
경계까지 46리,
진안현(鎭安縣) 경계까지 31리, 서쪽으로 고산현(高山縣) 경계까지 36리, 서울로부터 5백 57리 떨어져 있다.
건치연혁 본래는 백제의 물거현(勿居縣)이다. 신라의 경덕왕(景德王)이 청거(淸渠)라 개명하여 진례현(進禮縣)
에 예속시켰는데, 고려 충선왕(忠宣王) 5년에 지금의 이름으로 고쳐 현령을 두었고 본조에서도 이에 따랐다.
관원 현령ㆍ훈도(訓導) : 각 1명.
군명 물거(勿居)ㆍ옥천(玉川)ㆍ청거(淸渠).
성씨본현 고(高)ㆍ문(文)ㆍ가(賈)ㆍ염(廉)ㆍ림(林)ㆍ임(任). 동향(銅鄕) 가(賈).
풍속 박이소문(朴而少文) : 윤소종(尹紹宗)의 시서(詩序)에, "용담의 백성들은 소박하고 꾸밈이 적다." 하였다.
형승 지벽천심(地僻天深) : 〈주기(州記)〉에, "땅은 궁벽하고 하늘은 깊으며, 바위는 기이하고 나무는 오래되
었다. 구름다리가 산에 걸리고 돌길은 시내에 연해 있다. 동구 문은 깊숙하며, 백성은 드문드문 산다." 하였다.
만중창벽(萬重蒼壁) : 윤소종의 시에, "폭이 좁은 곳에 맑은 물이 여러 겹 푸른 절벽에서 흐른다." 하였다.
산천 주줄산(珠崒山) : 현의 서쪽 30리에 있다. 구봉산(九峯山) : 현의 서쪽 20리에 있다.
고산(鼓山) : 현의 동쪽 30리에 있다. 용강산(龍岡山) :현의 북쪽 3리에 있는데, 진산(鎭山)이다.
마산담(馬山潭) : 현의 동쪽 12리에 있다.
〈주기(州記)〉에, "현의 동남쪽 두 물이 서로 모이는 사이에 용담(龍潭)이 있어 현의 이름으로 취한 것이다."
하였으니, 바로 이것이다.
수성천(壽成川) : 객관 남쪽에 있으니 주줄산에서 나와 달계천(達溪川)으로 들어간다.
달계천 : 현의 동쪽 12리에 있는데, 금산군(錦山郡) 덕유산(德裕山)에서 나와 무주현(茂朱縣) 소이진(召爾津)
으로 들어간다.
토산 벌꿀ㆍ송이버섯ㆍ칠ㆍ닥나무ㆍ감ㆍ석이버섯.
신증궁실 수옥헌(漱玉軒) : 객관(客館) 서쪽에 있다.
누정 이요정(二樂亭) : 현의 북쪽 64보 지점에 있다. 산봉우리가 우뚝하고 계류(溪流)가 둘려 있다.
소나무 수백 그루가 있는데 현령 조정(趙鼎)이 작은 정자를 짓고 이름을 이요(二樂)라 하였다.
학교 향교(鄕校) : 현의 북쪽 2리에 있다. 고려 공양왕(恭讓王) 때 현령 최자비(崔自卑)가 중건하였다.
윤소종(尹紹宗)의 시에, "삼가 우리 조종(祖宗)을 생각하니, 문을 숭상하기 한ㆍ당(漢唐)을 능가하였네.
대학과 향교에 현가(絃歌) 소리 양양했도다. 빛나도다, 30 대 임금이여, 영재들이 명당(明堂)을 지키었도다.
아, 현릉(玄陵 공민왕) 말년에 여러 소인배들이 일어나 종묘의 제사가 중간에 끊겼네. 바른 도가 잡초 덤풀에
버려지니 팔도의 문선묘(文宣廟 공자의 묘)에서 나무하며 양을 쳤다네. 그러다가 성인이 나와 다시 일으키니,
선생은 봉새인 양 높이 올랐네. 그의 다스림이 백 리 안 백성에게 미치니, 이에 기강이 바로잡혔네.
청거(淸渠)에는 근래 학교가 없더니,
용두강(龍頭岡)에 새로이 향교를 세웠네. 공재(工材)를 백성들에게 부담시키지 아니했으나 경영한 그 공은
한량없도다. 지금부터 호걸들을 길러낸다면, 영원토록 우리 왕을 보좌하리라. 누가 능히 덕망있는 정치를 비
(碑)에 새겨서 끝없이 방명(芳名)이 전하도록 할 것인가." 하였다.
이색(李穡)의 시에, " 성도(聖道)와 왕화(王化)가 원근에 고루 퍼지니, 학사(學舍)는 천산(天山) 만산(萬山) 중에
있도다. 묻노니, 독서의 목적은 무엇인고, 효제(孝悌)ㆍ충신(忠信) 바로 이것이로다." 하였다.
역원 달계역(達溪驛) : 달계의 북쪽에 있다. 이전원(里田院) : 현의 남쪽 35리에 있다.
구라원(仇羅院) : 현의 동쪽 30리에 있다. 대벌원(大伐院) : 현의 서쪽 40리에 있다.
송현원(松峴院) : 현의 북쪽 26리에 있다. 이상 세 원은 지금에는 폐하였다.
교량 죽천교(竹川橋) : 달계에 있다. 정자천교(亭子川橋) : 현의 남쪽 15리에 있다.
대천교(大川橋) : 현의 동쪽 10리에 있다.
불우 숭암사(崇巖寺) : 구봉산(九峯山)에 있다. 안장사(安長寺)ㆍ
미적사(米積寺) : 두 산은 다 주줄산(珠崒山)에 있다.
사직단(社稷壇) : 현의 서쪽 3리에 있다. 문묘(文廟) : 향교에 있다.
성황사(城隍祠) : 현의 북쪽 2리에 있다.ㆍ
웅진명소사(熊津溟所祠) : 마산담(馬山潭) 위에 있는데 춘추로 제를 올린다.
여단(厲壇) : 현의 북쪽에 있다.
고적 동향소(銅鄕所) : 현의 동남쪽 35리에 있다.
주줄산사단(珠崒山祠壇) : 현의 서쪽 35리에 있는데 유지(遺址)가 있다.
석잔(石棧) : 현의 동북 2리에 있다, 고려 말엽에 왜구가 진포(鎭浦)에 쳐들어와 주군(州郡)을 약탈하였다.
현령 피원량(皮元亮)이 염군리(廉君利)ㆍ고윤덕(高允德) 등과 꾀하고, 현의 남쪽에 목책을 박고 돌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여섯 곳에 돌을 쌓아 놓고서 왜적이 쳐들어오는 것을 기다려 돌을 내려뜨려 적을 분쇄하고자
하였다. 적이 이 쪽에 방비가 튼튼한 것을 엿보고 감히 접근하지 못하고 드디어 물러가 버리니, 온 경내가 무사
하였다.
옛 산성 : 현의 동쪽 13리에 있다. 석축으로, 둘레가 1천 2백 11자인데, 지금은 폐하였다.
명환고려 김봉린(金鳳麟) : 공민왕 때 최영(崔瑩)에게 명하여 6도를 순찰하게 하였다. 그가 지나가는 곳에 번진
(藩鎭)의 목사 수령들이 겁을 내 당황하고 어찌할 바를 모르는데, 몽린이 홀로 태연하게 응대하여 넘기니,
온 도내 사람들이 칭찬하였다. 당시의 모든 지방관은 대개 일 년에 두세 번 갈리고 1년을 머무는 자도 없었는데
봉린은 4년간 갈리지 않았으니, 용담(龍潭) 사람들이 그 은혜를 입었다.
피원량(皮元亮) : 고적 석잔(石棧)에 보라. 본조 최유종(崔有悰)ㆍ최사유(崔士柔).
인물고려 고여경(高餘慶) : 벼슬이 삼중대광(三中大匡)에 이르다.
고천백(高天伯) : 벼슬이 판삼재(判三宰)에 이르다.
제영 지벽수운향(地僻水雲鄕) : 김극기(金克己)의 시에, "하늘이 높고 서리 이슬의 계절이요, 땅이 궁벽하니
물과 구름의 고을이로다." 하였다.
석전추선유(石田秋鮮有) : 윤소종(尹紹宗)의 시에, "풀밭에 추수가 적으니, 도토리 먹고 농부들 항상 어렵게
산다." 하였다.
고저석경진계사(高低石逕趁溪斜) : 노숙동(盧叔仝)의 시에, 고읍(古邑)이 쓸쓸히 푸른 노을에 잠겼는데 높고
낮은 돌길이 시냇가에 비껴 있다." 하였다.
교련횡간곡(橋憐橫澗曲) : 성임(成任)의 시에, "다리는 시내 굽이에 비낀 것이 어여쁘고, 집은 수풀 사이에 있는
것이 사랑스럽다. 궁벽한 곳에 와서 노는 것이 좋을 따름이니, 지나온 길이 험하였음을 탄식하지 말라." 하였다.
[비고]
연혁 인조(仁祖) 24년에 현감(縣監)으로 강등하였다가 효종(孝宗) 7년에 다시 현령(縣令)으로 하였다.
방면 읍내(邑內)ㆍ동일(東一) : 끝이 20리이다. 동이(東二) : 끝이 40리이다. 남일(南一) : 끝이 30리이다.
남이(南二) : 끝이 40리이다. 서면(西面) : 끝이 40리이다. 북일(北一) : 끝이 40리이다.
북이(北二) : 끝이 30리이다
○ 동향(銅鄕)을 동남쪽으로 35리이다.
성지 고성(古城) : 동쪽으로 13리의 산 위이며, 둘레가 1천 2백 11척이다.
석잔고책(石棧古柵) : 동북쪽으로 3리에 있다. 고려 신우(辛禑) 때 왜인이 영포(嶺浦)에서 주군을 침략하므로,
현령 피원량(皮元亮)이 목책을 박고 현의 남쪽 여섯 곳에서 돌사다리를 만들어 돌을 높이 쌓아 놓고 왜적이 오면
돌을 밑으로 떨어뜨려 쳐부수려고 하니, 적이 그것을 알고 감히 접근하지 못하고 드디어 물러갔다.
창고 창(倉) : 읍내(邑內)에 있다. 외창(外倉). 토산 뽕.
누정 대선루(待仙樓)ㆍ태고정(太古亭) : 봉우리가 빼어나고 시내가 둘러 있으며, 송백(松柏)이 울창하다.
단유 웅진명소단(雄津溟所壇) : 마산담(馬山壇)에 있으며, 봄 가을에 본읍(本邑)에서 제사지낸다.
사원 삼천 서원(三千書院) : 현종 정미년에 세우고 숙종 을미년에 사액하였다.
안자ㆍ정백자(程伯子)ㆍ정숙자(程叔子)ㆍ주자 : 문묘 조에 있다. 제갈량(諸葛亮) : 남양(南陽) 조에 있다.
창평현 昌平縣
동쪽은 옥과현(玉果縣) 경계까지 25리, 담양부(潭陽府) 경계까지 11리, 북쪽은 담양부(潭陽府) 경계까지 11리,
남쪽은 동복현(同福縣) 경계까지 34리, 서쪽으로 광산현(光山縣) 경계까지 11리이며,
서울에서는 7백 52리 떨어져 있다.
건치연혁 본래는 백제의 굴지현(屈支縣)이다. 신라 때 기양현(祈陽縣)으로 고쳐 무주(武州)에 부속시켰고,
고려 때에는 지금의 이름으로 고치어 : 일명 명평(鳴平). 나주(羅州)에 부속시켰다.
전하는 이야기에, 현의 아전 탁자보(卓自寶)가 남적(南賊)을 막은 공이 있어 현령으로 승진되었다.
공양왕(恭讓王) 3년에 장평갑향 권농사(長平甲鄕 勸農使)를 겸하게 되었고, 본조에서도 이에 따랐다.
성종(成宗) 5년 현인(縣人) 강구연(姜九淵)이 현령 전순도(全順道)를 능욕한 일로 광주에 예속시켰다가 10년
만에 다시 전대로 하였다.
관원 현령(縣令)ㆍ훈도(訓導) : 각 1명.
군명 굴지(屈支)ㆍ기양(祈陽)ㆍ명양(鳴陽)ㆍ명평(鳴平).
성씨본현 안(安)ㆍ조(曹)ㆍ신(辛)ㆍ정(丁)ㆍ김(金)ㆍ탁(卓)ㆍ전(全)ㆍ성(成). 이(李)ㆍ함(咸)ㆍ정(鄭) : 모두
내(來).
장평(長平) 신(辛)ㆍ김(金)ㆍ유(柳) : 유는 박(朴)이라고도 한다. 현(玄)ㆍ원(元). 갑향(甲鄕) 진(陳)ㆍ승(昇).
산천 고산(高山) : 현의 동쪽 5리에 있다. 진산(鎭山)이다. 무등산(無等山) : 현의 남쪽 15리에 있다.
광산(光山) 조에 자세히 나온다.
진압산(鎭壓山) : 현의 동쪽 5리에 있다. 반룡산(盤龍山) : 현의 동쪽 15리에 있다.
몽선산(夢仙山) : 현의 서쪽 30리에 있다.
용구산(龍龜山) : 현의 북쪽 5리에 있다. 목맥산(木麥山) : 현의 북쪽 5리에 있다.
고산천 : 고산(高山)에서 나왔다. 현의 북쪽 3리에 있다.
죽록천(竹錄川) : 무등산에서 나와 용담대(龍潭臺) 아래를 지나 북쪽으로 흘러 고산천(高山川)과 합하여
담양부의 원율천(原栗川)으로 들어간다.
신증 경지(境地) : 현의 서쪽 5리에 있다.
토산 대ㆍ감ㆍ석류ㆍ대추. 철 : 철은 무등산에서 나온다. 칠ㆍ자연동(自然銅).
누정 용담대(龍潭臺) : 현의 남쪽 1리에 있다. 산록에 기암이 있는데 높이가 백 자나 된다. 남쪽으로는 서석
(瑞石)이 바라보이고, 아래로는 맑은 못이 있다. 이름을 용담대라 하는데 그 옆에 승사(僧舍)가 있었다.
강호문(康好文)의 시에, "고찰(古刹)에 사는 중이 없고 문전에 지나는 손이 적도다. 대(臺)가 높으매 봄 기운이
빠르고 시내 가까워 저녁에 시원한 기운이 많다. 옛 섬돌에는 이끼가 끼었고, 음침한 회랑에는 칡넝쿨이 걸렸도다.
다시 와서 노니 무엇을 얻었는가, 시구를 짓노라고 애써 읊조린다." 하였다.
소루(小樓) : 객관(客館)의 동쪽에 있다. 구관(舊館)이 낮고 좁아, 현령 배계후가 이를 철거하고 새로 이 누각을
짓고 또 대문 밖에 적은 대사(臺榭)를 지었다.
학교 향교(鄕校) : 현의 북쪽 5리에 있다.
불우 삼지천원(三之川院) : 현의 동쪽 14리에 있다. 선화원(宣化院) : 현의 서쪽 10리에 있다.
불우 서봉사(瑞峯寺) : 무등산에 있다. 고산사(高山寺) : 진압산(鎭壓山)에 있다.
월령사(月影寺) : 반룡산(盤龍山)에 있다. 사원사(上院寺) : 몽선산(夢仙山)에 있다.
사묘 사직단(社稷壇) : 현의 서쪽에 있다. 문묘(文廟) : 향교에 있다. 성황사(城隍祠) : 현의 남쪽 3리에 있다.
여단(厲壇) : 현의 북쪽에 있다.
고적 장평 부곡(長平部曲) : 현의 북쪽 30리에 있다.
갑향(甲鄕) : 현의 북쪽 30리에 있다. 고려 때에 나주(羅州)에 이속(移屬)시켰다가 다시 광주(光州)에 부속시켰고,
공양왕(恭讓王) 3년에 다시 내속시켰다.
효자본조 안정명(安正命) : 현감 안기(安起)의 아들이다. 아버지가 죽고 묘막에서 살기를 3년, 채소와 과일을
먹지 않았다. 어머니가 병으로 고생하자 그 대변을 맛보아 생사를 가늠하였다. 사람들이 그의 효도를 칭송
하였다.
제영 처처호산상엽적(處處好山霜葉赤) : 성임(成任)의 시에, "곳곳의 좋은 산엔 단풍잎이 붉고,
집집의 쭉쭉 뻗은 대엔 저녁 바람이 맑도다." 하였다.
[비고]
연혁 정종(正宗) 17년에 반룡산 아래로 옮겨 다스렸다 : 옛 읍은 고산 동쪽으로 5리에 있다.
고종 32년에 군으로 고쳤다. 《文獻備考》
방면 고현내(古縣內) : 서쪽으로 10리이다. 동서 : 처음은 5리, 끝은 20리이다.
내남(內南) : 처음은 5리, 끝은 20리이다.
외남 : 끝이 30리이다. 서면 : 끝이 15리이다. 북면 : 끝이 10리이다.
장남(長男) : 북쪽으로 처음은 20리이고, 끝은 30리이다. 장북 : 북쪽으로 처음은 30리이고, 끝은 40리인데 위
두 면은 고장평부곡(古長平部曲)이다.
갑향(甲鄕) : 북쪽으로 처음은 20리이고, 끝은 50리인데, 옛 갑향은 고려 때 나주에 이속하였다가 광주로
옮겼는데, 공양왕 3년에 다시 내속하였다.
창고 읍창(邑倉)ㆍ외창(外倉) : 북쪽으로 30리이다. 성창(城倉) : 북쪽으로 50리인데, 금성 산성(金城山城)이다.
토산 닥나무ㆍ뽕나무.
누정 식영정(息影亭) : 남쪽으로 25리이다.
사원 송강 서원(松江書院) : 숙종 갑술년에 건립하고 병술년에 사액하였다. 정철(鄭徹) : 영일(迎日)에 보인다.
임실현 任實縣
동으로 남원부(南原府) 경계까지 21리, 남으로 남원부 경계까지 23리, 서쪽으로 순창군(淳昌郡) 경계까지 57리,
태인현(泰仁縣) 경계까지 65리, 북으로 전주부(全州府) 경계까지 24리,
진안현(鎭安縣) 경계까지 25리, 서울로부터는 5백 82리이다.
건치연혁 본래는 백제의 임실군(任實郡)이다. 신라 때는 이에 따랐고, 고려 때는 남원부(南原府)에 속하였다가
고려 명종(明宗) 2년에 감무(監務)를 두었고, 본조에서는 태종(太宗) 13년에 준례에 따라 현감(縣監)을 삼았다.
관원 현감(縣監)ㆍ훈도(訓導) : 각 1명.
군명 운수(雲水).
성씨본현 문(文)ㆍ전(全)ㆍ백(白)ㆍ진(陳)ㆍ임(任)ㆍ차(車). 구고(九臯) 신(申)ㆍ황(黃)ㆍ호(扈)ㆍ임(林)ㆍ전(田).
취인(醉人) 신(申).
형승 여러 산이 줄지어 있고, 물 한 줄기 빙 돌아 흐른다 : 정인지(鄭麟趾)의 시.
봉만만첩(峯巒萬疊) : 정창손(鄭昌孫)의 시에, "사방으로 돌아보매 봉만이 만첩 병풍일세." 하였다.
산천 용요산(龍繞山) : 일명 사요산(蛇繞山)이라고도 하는데, 현의 북쪽 5리에 있는 진산(鎭山)이다.
고달산(高達山) : 현의 동북쪽 15리에 있다. 또 진안현(鎭安縣)에 보라.
두만산(斗滿山) : 현의 서쪽 11리에 있다.
회문산(回文山) : 현의 서쪽 50리에 있다. 또 순창군(淳昌郡)에 보라. 영취산(靈鷲山) : 현의 서쪽 30리에 있다.
사현(沙峴) : 구고현(九皐縣)에 있다. 본현(本縣)으로부터는 20리이다.
두만천(斗滿川) : 두만산에서 나와 객관 남쪽을 지나 다시 돌아서 동쪽으로 흘러 오원천(烏原川)으로 흘러
들어간다.
구고천(九臯川) : 사현(沙縣) 남쪽으로 흘러 갈담역(葛覃驛)을 지나서 순창군 적성진(赤城津)의 상류로 들어
간다.
오원천(烏原川) : 진안현의 중대산(中臺山)ㆍ마이산(馬耳山) 등의 물이 오원역(烏原驛)의 동쪽에서 합하여 현의
북쪽 15리를 지나 다시 돌아 서쪽으로 흘러 순창군의 적성진이 된다.
평당원천(坪堂院川) : 현의 남쪽 15리에 있다. 현의 동쪽 대용점(代用岾)에서 나와 서쪽으로 흘러 남원(南原)
오수역(獒樹驛)의 남쪽에 이르러 거령천(居寧川)과 합한다.
토산 도루묵ㆍ벌꿀ㆍ자초(紫草)ㆍ생강ㆍ모시ㆍ닥나무ㆍ백화사(白花蛇)ㆍ지황(地黃)ㆍ울금(鬱金)ㆍ칠ㆍ
석이버섯.
학교 향교(鄕校) : 현의 서쪽 1리에 있다.
역원 갈담역(葛覃驛) : 현의 서쪽 40리에 있다.
○ 이규보(李奎報)의 시에 "석양에 돌아가는 깃발 나무 그늘 가운데 남쪽으로 건너오니, 산천이 모두 한 모양
이로세. 늘어진 버들은 사람을 근심하게 하여 가는 곳마다 푸르고, 깊숙한 골짜기의 꽃은 주인이 없는데 누구를
위해 붉었는고. 우정(郵程)은 경유하는 손을 두루 겪었고 야성(野性)은 누가 방달(放達)한 노옹(老翁) 같을까.
분주히 역마 타고 달리는 모양을 하지 않고, 옷을 벗고 한가로이 마루에 가득한 바람에 누웠네." 하였다.
○ 김극기(金克己)의 시에, "십 리의 시내와 산이 한 눈 안에 있으니, 유람객의 흥취는 고금이 한가지로세.
서리 맞은 대가 난간을 스쳐 푸르고, 여름 꽃송이는 뜰에 펄럭이며 붉고나. 비단 자리에서 다시 누가 주객(酒客)
을 맞아줄 것인가, 사롱(紗籠)에는 스스로 시를 쓴 첨지가 생각나네. 마루에 기대서서 우두커니 돌아갈 것을
잊으니 무성한 나무에 매미소리가 저녁 바람에 들리네." 하였다.
○ 설장수(偰長壽)의 시에, "지세가 그윽하고 수림은 깊은데, 새 소리 명랑하고 푸른 시내에 봄이 깊어 칡덩굴이
뻗치었네. 우연히 산가(山家)를 향하여 말의 먹이를 구하러 가니 백발 역리(驛吏)의 말 소리 알아들을 수 없구나."
하였다.
중 선단(選坦)의 시에, "진흙 길을 무릅쓰고 파리한 말로 산성(山城)을 지났네.
차가운 등불 심지를 돋우며 빗소리를 듣도다. 올해가 다 가는데도 객로(客路)는 글칠 줄을 모르니, 명년엔 어느
곳에서 신정(新正)을 맞을 것인가." 하였다.
오원역(烏原驛) : 현의 북쪽 20리에 있다.
○ 김극기(金克己)의 시에, "필마로 유유히 갈림길을 지나니, 누런 국화와 붉은 단풍이 사랑스런 때로다.
가을빛은 괴롭게 나그네의 흥을 일으키니 머리 가득히 흰 머리털이 덮었네." 하였다.
동우원(東隅院) : 현의 동쪽 5리에 있다.
만세원(萬歲院) : 현의 남쪽 20리에 있다. 구고원(九臯院) : 구고현(九臯縣)에 있다.
중지원(中止院) : 현의 서쪽 60리에 있다. 운암원(雲巖院) : 현의 서쪽 65리에 있다.
신간원(申幹院) : 현의 북쪽 25리에 있다.
불우 백련사(白蓮寺)ㆍ선압사(仙押寺)ㆍ원적사(元寂寺) : 모두 영취산(靈鷲山)에 있다.
사묘 사직단(社稷壇) : 현의 서쪽 2리에 있다. 문묘(文廟) : 향교에 있다. 성황사(城隍祠) : 현의 북쪽 5리에 있다.
여단(厲壇) : 현의 북쪽에 있다.
고적 구고폐현(九臯廢縣) : 현의 서쪽 20리에 있다. 본래는 백제의 돌평현(堗坪縣)이었다.
돌(堗)은 누(淚)로 적은 곳도 있다. 신라 시대에 지금의 이름으로 고쳤고, 순화군(淳化郡)의 영현(領縣)이 되었다.
고려 초기에는 남원부(南原府)에 예속되었다가 공민왕(恭愍王) 3년에 현 사람 원사(元使) 임몽고불화(林蒙古不
花)가 국가에 공을 세워 군으로 승격되었다. 본조 태조(太祖) 3년에 내속시켰다.
취인 부곡(醉仁部曲) : 현의 서쪽 10리에 있다.
신증효자본조 박번(朴藩) : 생원(生員)이다. 성품이 지극히 효성스러워 아버지가 병으로 오리를 먹고자 하매,
물가에 가서 구하며 가슴을 치고 통곡한바, 홀연 죽은 오리가 물 위에 떠올라 이것을 가져가 먹도록 하였다.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3년간 여묘하였다. 금상(今上) 11년에 정문을 세웠다.
제영 전옹산보방유계(田翁散步傍幽溪) : 김극기(金克己)의 시에, "촌 늙은이 그윽한 시냇가에 산보하는데,
백발에는 쑥대 비녀 손에는 명아주 지팡이로세. 해는 지는데 읊조리니 누가 짝하리, 원숭이의 맑은 소리와 새들
의 슬픈 지저귐이로다." 하였다.
노목황진협고계(老木荒榛夾古溪) : 김약수(金若水)의 시에, "노목과 황량한 개암나무 시내를 끼고 있고, 집집
마다 소채와 명아주로도 배를 채우지 못하네. 산새들은 백성을 근심하는 나의 뜻을 알지 못하고 수풀 사이에
여유롭게 지저귀도다." 하였다.
소슬추풍동객정(蕭瑟秋風動客情) : 정인지(鄭麟趾)의 시에, "소슬한 추풍은 객정을 흔드는데, 동헌은 이 날에
더욱 차구나. 오경 외로운 베개에 촌 닭 울음이 들리고 만리 장공에는 변방 기러기 나네. 쉬지 않는 광음은 물처럼
흐르고 유유한 뜻은 시절을 느껴 일어나누나. 슬프구나, 가을 기운 부(賦)를 지을 만하니 부질없이 이소경(離騷經)
을 보고 초성(楚聲 초 나라의 노래)을 배우네."
수가리락담연생(數家籬落淡煙生) : 신숙주(申叔舟)의 시에, "말을 타고 유유히 가니 만 리의 정이요. 저녁에
외로운 객관에 드니, 온 집이 맑구나. 뜰 앞에 작약(芍藥)은 붉은 꽃이 시들려는 듯, 담장 밖 멧부리는 푸르게 멀리
연하였네. 10묘(畝)의 볏모에 흐르는 물이 어둡고 몇 집 되는 마을에는 엷은 연기 일어나네. 객창(客窓)이 적막
한데 오직 달빛만이 밝고, 꿈을 깨니 못 개구리 한바탕 노랫소리로구나." 하였다.
근장수록다교목(近牆嫩綠多喬木) : 성임(成任)의 시에, "높은 마루에서 서성대니 뜻은 유쾌한데 옷깃은 점차로
서늘해 옴을 느끼겠네. 흐르는 물이 금현(琴鉉)처럼 울리는 소리를 듣고 원산(遠山)이 그림의 병풍처럼 비껴있는
것을 보겠네. 봄은 낙화가 나는 곳을 따라 지고, 바람은 가랑비 지나는 데를 좇아 부는구나. 담 가에는 연녹색
교목이 많으니, 아름다운 꾀꼬리의 우는 소리 들리네." 하였다.
호벽산배달입(戶碧山排闥入) : 정창손(鄭昌孫)의 시에, "태평한 시절 만나 임금의 은혜 입어 남쪽에서 노니
승경(勝景)이 매우 맑구나. 새로 핀 연잎이 비를 머금으니 푸른 돈 [靑錢]같이 축축하고, 노수(老樹)에 바람부니
푸른 일산 비끼었네. 문에 마주한 푸른 산은 문턱을 밀치고 들어오고 뜰에 찬 방초는 섬돌 위에서 돋아나네.
객창(客窓)에서 사향(思鄕)의 꿈에 놀라 깨서 홀로 난간에 의지하여 새 소리를 듣노라." 하였다.
역수의희홍엽난(驛樹依稀紅葉亂) : 서거정(徐居正)의 시에, "가을 바람이 환유(宦遊)하는 사람에게 불어주니,
만리 호남(湖南)에 호수가 맑구나. 역수는 희미하고 단풍잎은 어지럽고 고향은 아득한데 흰구름에 비꼈어라.
흐르는 세월은 나를 뒤로 하고 당당히 지나가고, 흰머리는 사람을 깔보고 자꾸자꾸 생기누가. 홀로 객관 마루에
앉아 잠깐 조는데, 홀연히 모점(茅店)의 한낮 닭 울음이 들리네." 하였다
신증 벽옥지함허각정(碧玉池涵虛閣靜) : 이숙함(李叔瑊)의 시에, "남쪽 천리길 놀기에 지쳤는데, 짧은 갈옷은
서풍에 서늘한 기운 견디지 못하네. 벽옥같은 못엔 고요히 빈 누각의 그림자만 잠겼는데, 취병(翠屛)같은 산이
반이나 처마에 비껴들었네. 멀리 수림에 흰 기운 일어남은 마을의 연기가 흩어짐이요, 홀로 조그만 난간에 의지
하여 아직도 감회가 있는데, 실컷 울던 소쩍새 울음 그쳤다 또 들리네." 하였다.
[비고]
연혁 본래 백제의 잉힐(仍肹)이다.
고종 32년에 군으로 고쳤다. 《文獻備考》
방면 현내(縣內)ㆍ대곡(大谷) : 동쪽으로 처음이 5리, 끝이 10리이다.
덕치(德峙) : 서남쪽으로 처음이 35리 끝이 60
리이다. 상동(上東) : 처음이 7리, 끝이 30리이다. 하동(下東) : 처음이 10리, 끝이 20리이다.
이인(里人) : 남쪽으로 처음이 5리, 끝이 20리이다. 옥전(玉田) : 남쪽으로 처음이 10리, 끝이 25리이다.
구고(九臯) : 서쪽으로 처음이 20리, 끝이 30리이다. 상신덕(上新德) : 서쪽으로 처음이 15리, 끝이 35리이다.
하신덕(下新德) : 서쪽으로 처음이 30리, 끝이 50리이다. 상운(上雲) : 서쪽으로 처음이 20리, 끝이 35리이다.
하운(下雲) : 서쪽으로 처음이 30리, 끝이 60리이다. 신안(新安) : 서쪽으로 처음이 5리, 끝이 15리이다.
강진(江津) : 서쪽으로 처음이 30리, 끝이 50리이다. 상북(上北) : 처음이 5리, 끝이 20리이다.
하북(下北) : 처음이 20리, 끝이 40리이다. 신평(新坪) : 북쪽으로 처음이 15리, 끝이 30리이다.
○ 취인 부곡(醉人部曲)은 서쪽으로 10리이다.
성지 고성(古城) : 용협(龍俠) 산상부(山上府)에 있으며, 흙으로 쌓았던 옛 터가 있다.
창고 창(倉)과 고(庫)가 둘 : 읍내에 있다. 서창(西倉) : 서쪽 30리에 있다. 북창(北倉) : 북쪽으로 30리에 있다.
외산창(外山倉) : 북쪽으로 1백 10리, 전주(全州) 성봉산성(成鳳山城)에 있다.
역참 갈담역(葛覃驛) : 서남쪽으로 40리에 있다. 오원역(烏原驛) : 북쪽으로 20리에 있다.
교량 오원교(烏原橋)ㆍ갈담교(葛覃橋)ㆍ운암(雲巖) : 겨울에는 다리[橋]를 놓고, 여름에는 외나무다리 [杠]를
놓는다. 광제교(廣濟橋) : 남쪽으로 1리에 있다.
토산 감ㆍ배ㆍ밤ㆍ은행ㆍ모과ㆍ호두ㆍ닥나무.
누정 봉황루(鳳凰樓)ㆍ벽운루(碧雲樓) : 현 안에 있다.
무주현 茂朱縣
동으로 경상도 지례현(知禮縣) 경계까지 49리, 남으로 경상도 거창군(居昌郡) 경계까지 62 리,
금산군(錦山郡) 경계까지 38리, 서쪽으로 금산군(錦山郡) 경계까지 13리,
북으로 충청도 옥천군(沃川郡) 경계까지 10리, 서울로부터 4백 88리 떨어진 곳이다.
건치연혁 무풍현(茂豐縣)은 본래 신라의 무산현(茂山縣)이었다. 경덕왕(景德王)이 무풍을 고쳐 개령군(開寧郡)
의 영현(領縣)으로 삼았고, 고려 초에는 진례현(進禮縣)에 예속시키었다가 명종(明宗) 6년에 감무(監務)를
두었다.
주계현(朱溪縣)은 본래 백제의 적천현(赤川縣)이었는데, 신라 때 단천연(丹川縣)으로 고치어 진례군(進禮郡)에
부속시켰다. 고려에 와서 주계(朱溪)로 고치고 계속 진례군에 딸려 있었는데, 명종 6년에 무풍 감무가 겸임하
도록 하였다. 공양왕 3년에 무풍현에 병합하였고, 본조 태종(太宗) 14년 지금의 이름으로 고쳐 현감(縣監)을
삼고 주계를 치소(治所)로 하였다.
관원 현감ㆍ훈도(訓導) : 각 1명.
군명 무산 ㆍ무풍 ㆍ주계ㆍ적천(赤川)ㆍ단천(丹川).
성씨무풍 주(朱)ㆍ황(黃)ㆍ하(河)ㆍ전(田)ㆍ심(沈)ㆍ박(朴). 주계(朱溪) 주(朱)ㆍ양(梁)ㆍ박(朴)ㆍ하(河)ㆍ
호(扈)ㆍ
최(崔)ㆍ강(姜)ㆍ손(孫)ㆍ이(李)ㆍ한(韓).
풍속 수장상률(收藏橡栗) : 정인지(鄭麟趾)의 시에, "민업(民業)이 황량하기 해를 거듭하니,
상수리와 밤을 저장하여 양식을 삼네." 하였다.
형승 만학천봉(萬壑千峯) : 허주(許周)의 시에, "만학천봉(萬壑千峯)에 자색안개가 깊다." 하였다.
산옹천회(山擁川回) : 유빈(柳濱)의 시에, "산이 둘러싸고 물이 돌아흐르니 마을이 깊숙하다." 하였다.
산천 노산(爐山) : 현의 북쪽 1리에 있는 진산(鎭山)이다. 대덕산(大德山) : 무풍(茂豐) 남쪽 7리에 있다.
백운산(白雲山) : 무풍 북쪽 15리에 있다.
상산(裳山) : 현의 남쪽 15리에 있다. 속칭 상성산(裳城山)이라 하는데 사면에 절벽이 층층이 있어 잘라 놓은
것이 마치 사람의 치마와 같으므로 이름하였다. 옛사람이 험준한 데 의지하여 성을 쌓았는데 올라 갈 수 있는
길이 오직 둘뿐이다. 그 가운데는 평탄하고 넓은 시내가 네 곳에서 나오니 실로 하늘이 낸 요험지(要險地)이다.
옛날 거란병과 왜구가 침략할 때 근방 수십 군의 백성이 모두 이 곳에 의지하여 보전하였다.
고려의 도통사(都統使) 최영(崔塋)이 이 곳에 산성을 세우고 창고를 지어 뜻밖의 난리에 대비하도록 요청하였다.
본조 세종(世宗) 때 체찰사(體察使) 최윤덕(崔潤德)이 행차하여 이곳에 이르렀는데, 마침 구름과 안개 때문에
사방이 어두워서 두루 볼 수가 없어서 성을 쌓고 창고를 두는 것이 적합하지 않다고 생각하므로 일이 중지되고
말았다.
미마산(彌磨山) : 현의 남쪽 35리에 있다.
안련암(按廉巖) : 상산 꼭대기에 있다. 그 길이는 여러 길이 되므로 그 위에 수십 명이 앉을 만하다.
동으로는 가야산(伽耶山)을 바라보며 남으로는 지리산(智異山)을 바라보며 서쪽으로는 큰 바다를 바라보며
북으로는 화악(華岳)을 바라볼 수 있다. 옛날 거란병이 쳐들어왔을 때 삼도의 안렴사(安廉使)가 이곳으로 피난
을 왔기 때문에 일반 사람들이 이 이름을 붙인 것이다.
적천(赤川) : 대덕산(大德山)에서 나와 객관(客舘) 앞을 지나 금산군(錦山郡) 경내로 흘러간다.
소이진(召爾津) : 현의 서쪽 14리에 있다. 금산군 경내로 흘러간다.
토산 철 : 대덕산에서 생산된다. 송이버섯ㆍ석이버섯ㆍ벌꿀ㆍ인삼ㆍ닥나무ㆍ해송자(海松子)ㆍ오미자.
신증궁실 동헌(東軒) : 유호인(兪好仁)의 시에, "구름과 노을이 천고(千古)에 아름다운 현(縣), 상자(桑柘 뽕나무
와 산뽕나무) 온 고을에 펼쳐있네. 경치가 뛰어나니 시 짓기도 특히 좋고, 일신이 한가하니 꿈도 또한 맑구나.
계절 따라 변화하는 경치를 보겠고, 순박한 인심이 기쁘고나. 읊는 소리 청산 밖에 끊어지니 세 세자[三竿]
남은 낙조가 밝고나." 하였다.
누정 한풍루(寒風樓) : 객관의 앞에 있다.
○ 성임(成任)의 시에, " 말 한필 탄 행색(行色)이 시내 다리를 지나는데, 그림 그린 기둥과 층층한 난간은 기세도
높구나. 궁벽한 수림에 새소리는 시끄럽다가 조용해졌는데, 살랑살랑 부는 바람에 물에 비친 그림자 멈추었다가
또 흔들리네. 처마 앞에 오동잎은 쟁반처럼 넓적하네. 둑 위의 버들은 눈처럼 흩날리네. 눈에 가득한 청산(靑山)
을 어찌 가히 저버리겠는가. 흥겨워 노래 읊조리며 붓을 휘두르네." 하였다.
신증 유순(柳洵)의 시에, "시냇물은 맑고 얕아 장교(長橋)를 비치는데 다리 위에 누각은 높기가 백 척은 되겠구나.
산 그림자는 구름 그림자를 따라 구르고 물결 빛은 햇빛과 함께 흔들리네. 뜰 가득히 풀빛이 깔렸는데, 양쪽 언덕
에 버들개지 솜털이 아직 날지를 않누나. 저녁이 되도록 난간에 의지하니 누구와 짝을 할꼬. 세 잔 술의 힘을
빌어서 억지로 붓을 휘둘렀네. " 하였다.
학교 향교 : 현 동쪽 3리에 있다. 신증 지금은 옮기어 현 북쪽 3리에 있다.
역원 소천역(所川驛) : 현의 동쪽 45리에 있다. 무제원(茂梯院) : 현의 동쪽 64리에 있다.
승장원(勝長院) : 현의 동쪽 35리에 있다. 소이원(召爾院) : 현의 서쪽 14리에 있는데 망풍루(望風樓)가 있다.
교량 남교(南橋) : 적천(赤川) 위에 있다.
불우 고경사(高境寺) : 상산(裳山) 서동(西洞)에 있다. 불두사(佛頭寺) : 백운산에 있다.
사묘 사직단(社稷壇) : 현의 서쪽 1리에 있다. 문묘(文廟) : 향교에 있다. 성황사(城隍祠) : 현의 남쪽 4리이다.
여단(厲壇) : 현의 북쪽에 있다.
고적 고무풍(古茂豐) : 지금의 치소(治所) 동쪽 60리에 있다. 옛 성이 있고 석축으로 되었는데, 그 둘레는 5백 31
자이고 높이는 5자이며, 군창(軍倉)이 있다.
상산 고성(裳山古城) : 석축이고, 둘레는 1만 6천 9백 20자, 높이 7자였는데, 지금은 허물어졌다.
명환본조 이최(李凗)ㆍ이계수(李桂遂)ㆍ이언(李偃).
열녀본조 양씨(梁氏) : 구길생(具吉生)의 처. 길생이 죽자 초빈을 하고는 조석으로 친히 상식을 올리고 가슴을
두드리며 울었다. 하루는 아침 상식 후에 때가 지나도 돌아오지 않아 부모가 괴상히 여기고 찾아 보니 그는 초빈
을 열고 관을 안고 통곡하는지라, 부모가 부축하여 돌아오는데, 불어난 집 앞 시냇물에 양씨가 뛰어들어 빠졌다.
그 오빠가 구해 냈으나 몇 달 뒤 침방 속에서 자살하였다. 부모가 불쌍하게 여겨 그 남편과 합장하였고 향리에서
탄복하는 바가 되었다.
제영 홀득임천승(忽得林泉勝) : 허주(許周)의 시에, "홀연히 임천의 승경을 얻으니, 진세의 마음 모두 잊겠네."
하였다.
지유계산속현다(只有溪山屬縣多) : 정이오(鄭以吾)의 시에, "송곳 꽂을 만한 땅이라도 모두 공후가(公侯家)에
딸렸구나. 오직 시내와 산만이 현에 속하는구나. 어린 아이들은 나라 일을 알지 못하고 높은 산에 올라 나무꾼의
노래를 서로 주고 받누나." 하였다.
동활지초평(洞豁地初平) : 권진(權軫)의 시에, "험한 길 행하여 끝나려는 곳에 골짜기가 트이고 땅이 비로소
평평하여라." 하였다.
견폐계명별유천(犬吠鷄鳴別有天) : 성임(成任)의 시에, "산이 첩첩하여 길이 없는가 했더니,
개 짓고 닭 우는 곳에 별천지가 있더라." 하였다. 반은 산 벼랑에 있고 반은 물가에 있도다 : 김담(金淡)의 시에,
"반은 산 벼랑에 있고 반은 물가에 있으니, 사립문 달린 모옥(茅屋)에서 한해 한해를 보내도다." 하였다.
[비고]
연혁 조선 현종(顯宗) 15년 금산군(錦山郡)의 안성(安城)ㆍ횡천(橫川)을 분할하여 두 면을 도호부에 예속시켰다.
고종 32년에 군으로 고쳤다. 《文獻備考》
관원 도호부사(都護府使) 1명 : 남원진관병마 동첨절제사(南原鎭管兵馬 同僉節制使)와 적상산성 수성장토포사
(赤裳山城守城將討捕使)를 겸직한다.
방면 부내(府內)ㆍ신동(身東) : 동쪽으로 처음이 10리이고, 끝이 40리이다.
서면(西面) : 처음이 5리이고, 끝이 10리이다. 북면(北面) : 처음이 10리이고, 끝이 20리이다.
유야(柳野) : 동남쪽으로 처음이 30리이고, 끝이 40리이다.
일안(一安) : 남쪽으로 처음이 40리이고 끝이 50리이다. 이안(二安) : 남쪽으로 처음이 30리이고, 끝이 40리이다.
상기 두 면은 안성(安城) 소속인데, 그 소속이 나눠졌다.
횡천(橫川) : 동남쪽으로 처음이 30리이고, 끝이 70리인데, 본래 횡천(橫川) 소속이다.
상곡(裳谷) : 남쪽으로 처음이 10리이고, 끝이 30리이다.
풍동(豐東) : 동쪽으로 처음이 60리이고, 끝이 80리이다. 풍남(豐南) : 남쪽으로 처음이 40리이고. 끝이 60리이다.
풍서(豐西) : 동쪽으로 처음이 40리이고, 끝이 50리이다. 위에 적은 세 면은 무풍(茂豐)의 옛날 현이다.
성지 적상 산성(赤裳山城) : 남쪽으로 15리이며, 옛날 석성(石城)의 유지(遺址)가 있다.
인조(仁祖) 17년 순검사(巡檢使) 박황(朴潢)의 말을 따라 수축하였는데, 둘레가 4천 9백 28 보이고, 외면이 석벽
(石壁)과 같으며 상지(裳池)가 4개, 샘(井)이 23곳, 호령(湖嶺)이 3으로 길의 교소(交素)라 일컫고, 준험하기가
요충(要衝)을 이루었다. 인조(仁祖) 19년에 선원각(璿源閣)을 세우고, 광해주(光海主) 6년 사고(史庫)를 세웠으며
산성사(山城寺)ㆍ호국사(護國寺)ㆍ고경사(高境寺)가 있다.
○ 수성장(守城將)은 본부사(本府使)가 겸하며 사고(史庫)에 참봉(參奉) 2명과 총진(摠振) 1명을 더 두었다.
무풍고현성(茂豐古縣城) : 둘레가 5백 31자이다.
창고 읍창(邑倉) : 부내(府內)이다. 성창(城倉) : 산성(山城)이다. 서창(西倉) : 서남(西南)으로 20리이다.
북창(北倉) : 북쪽으로 5리이다. 무풍창(茂豐倉) : 동쪽으로 60리이다. 안성창(安城倉) : 남쪽으로 40리이다.
진보 소이진(召爾津) : 서쪽으로 14리 금산(錦山) 경계인데, 금산대로(錦山大路)로 통한다.
○ 나루 하류에는 15개의 여울이 있는데, 모두 급한 물살이 험하게 돌고돌아 굽이치고, 끊어진 언덕이 있으며,
궁벽하고 우뚝하여서 기괴한 형상을 다 말할 수 없다.
교량 남교(南橋) : 적천(赤川) 위에 있다. 대천교(大川橋) : 적천(赤川) 위에 있다.
토산 칠ㆍ뽕나무.
누정 한풍루(寒風樓)ㆍ환격정(喚毄亭) : 모두 적천(赤川) 가에 있다.
단유 동로악(冬老岳) : 신라에 사전(祀典)이라고 말하나 상세하지 않다.
동로악은 진례군(進禮郡) 단천현(丹川縣)에 있는데, 명산으로 소사(小祀)에 들어 있다.
곡성현 谷城縣
동으로 남원부 경계까지 30리, 북으로 남원부 경계까지 12리, 남으로 순천부(順天府) 경계까지 71리,
서쪽으로 옥과현(玉果縣) 경계까지 26리, 서울로부터는 6백 92리이다.
건치연혁 본래는 백제의 욕내군(欲乃郡)이다. 신라 시대에 지금의 이름으로 고쳤고,
고려 초에는 승평군(昇平郡)에 속하였다가 위에 나주(羅州)에 속하였다. 명종(明宗) 2년에 감무를 두었고
본조에서 현감으로 고쳤다.
관원 현감(縣監)ㆍ훈도(訓導) : 각 1명.
군명 욕내(欲乃)ㆍ욕천(浴川).
성씨본현 신(申)ㆍ임(林)ㆍ여(呂)ㆍ오(吳)ㆍ박(朴)ㆍ이(李). 율곡(栗谷) 하(河).
산천 동락산(動樂山) : 현의 서북쪽 4리에 있는 진산(鎭山)이다. 옥과현(玉果縣) 부분에도 나온다.
동리산(桐裏山) : 현의 동쪽 40리에 있다.
천덕산(天德山) : 현의 남쪽 45리에 있다. 순자진(鶉子津) : 현의 북쪽 12리에 있다.
남원부(南原府) 편에 자세하다. 압록진(鴨綠津) : 현의 동쪽 남원부(南原府) 유곡(楡谷)의 경계에 있다.
대황천(大荒川) : 현의 동쪽 45리, 즉 순천부(順天府) 낙수진(洛水津)의 하류로서 압록진(鴨綠津)으로 흘러
들어 간다.
토산 닥나무ㆍ대ㆍ도루묵[銀口魚]ㆍ감ㆍ송이버섯ㆍ자기ㆍ벌꿀ㆍ복령(茯苓)ㆍ울금(鬱金)ㆍ백화사(白花蛇).
누정 월화루(月華樓) : 객관(客館) 북쪽에 있다. 신증 유순(柳洵)의 시에, "나무 그늘이 얽혀 있으니 달빛이 잘
보이지 않고 바람이 높은 누에 스쳐 지나니 네 자리가 다 좋구나. 만학(萬壑)에 뜨는 산바람은 아침 비 개인
후가 좋고 처마에 떨치는 산색은 석양 때가 좋도다. 경치에 유련(留蓮)함에는 술이 있어야 하고, 심정을 도야
(陶冶)함에는 시가 가장 좋도다. 가소롭다 일행이 꺼려해서 몇 번이나 좋은 기회 놓쳤는가." 하였다.
학교 향교(鄕校) : 현의 서쪽 4리에 있다.
역원 지신역(知申驛) : 현의 남쪽 6리에 있다. 자비원(慈悲院) :현의 남쪽 55리에 있다.
관음원(觀音院) :현의 서쪽 5리에 있다. 순자원(鶉子院) : 순자진(鶉子津) 언덕에 있다.
압록원(鴨綠院) : 압록진(鴨綠津)의 언덕에 있다. 삼기원(三岐院) : 현의 서쪽 25리에 있다.
불우 미륵사(彌勒寺)ㆍ만운사(萬雲寺) : 둘 다 천덕산(天德山)에 있다. 태안사(泰安寺) : 동리산(桐裏山)에 있다.
성불사(成佛寺)ㆍ신덕사(申德寺) : 둘 다 동락산(動樂山)에 있다.
사묘 사직단 : 현의 서쪽에 있다. 문묘 : 향교에 있다. 성황사 : 현 남쪽 4리에 있다. 여단 : 현의 북쪽 15리에 있다.
고적 율곡 부곡(栗谷部曲) : 현의 서쪽 15리에 있다.
인물고려 신숭겸(申崇謙) : 춘천(春川) 편에 상세하다. 세간에 전하기를, "신숭겸은 죽어서 현의 성황신(城隍神)
이 되었다." 한다.
우거본조 마천목(馬天牧) : 태종(太宗)조의 좌명공신(佐命功臣), 장흥부원군(長興府院君)으로 봉하였고, 시호는
충정(忠靖)이다.
제영 명수진외경(冥搜塵外境) : 김극기(金克己)의 시에, "팽택(彭澤)에 행장을 푸니, 기쁘게 도령(陶令)을 만났
도다. 햇빛 쪼이니, 화기가 따뜻하고, 바람이 급히 푸니 대[竹]소리가 차고나. 버들 언덕에 꾀꼬리가 울고,
연꽃 못에는 백로가 한가롭다. 티끌 세상 밖의 경치를 깊이 찾으니 한번 웃으며 낯을 펴도다." 하였다.
[비고]
연혁 선조(宣祖) 30년에 남원(南原)에 합하였다 : 왜구의 침략에 고을이 피폐해졌다.
광해주(光海主) 원년에 다시 설치하였다.
고종 32년에 군으로 고쳤다. 《文獻備考》
방면 도상(道上) : 끝이 10리이다. 예산(曳山) : 남쪽으로 처음이 5리, 끝이 10리다.
죽곡(竹谷) : 남쪽으로 처음이 10리, 끝이 30리이다. 목사동(木寺洞) : 남쪽으로 처음이 50리, 끝이 60리이다.
우곡(牛谷) : 남쪽으로 처음이 5리, 끝이 15리이다. 오지(梧枝) : 동남쪽으로 처음이 10리, 끝이 30리이다.
삼기(三岐) : 서남쪽으로 처음이 15리, 끝이 25리이다. 석곡(石谷) : 서남쪽으로 처음이 40리, 끝이 60리이다.
○ 율곡 부곡(栗谷部曲)은 서쪽으로 15리이다.
성지 고성(古城) : 동쪽으로 5리에 있다. 당산루(堂山櫐) : 남쪽으로 4리에 있으며, 선조 30년에 쌓았다.
명나라 장수가 머물러 진을 치던 곳에는 두 보루가 있다.
창고 읍창(邑倉) : 읍내에 있다. 외창(外倉) : 남쪽으로 45리에 있다.
진도 대황진(大荒津) : 남쪽으로 45리에 있다. 압록진(鴨綠津) : 동남쪽으로 30리에 있으며, 구례(求禮)와의
경계인 큰 길에 있다.
순자진(鶉子津) : 중진(中津)이라고도 하며, 북쪽으로 10리, 남원(南原)과의 경계의 큰 길에 있다.
대황진ㆍ순자진에는 겨울이면 다리를 놓는다.
교량 묘천교(猫川橋) : 동쪽으로 10리에 있다. 용계교(龍界橋) : 서남쪽으로 30리에 있다.
토산 칠ㆍ뽕ㆍ석류.
사원 덕양사(德陽祠) : 선조 을축년에 세웠고, 숙종 을해년 사액(賜額)하였다.
신숭겸(申崇謙) : 마전(麻田) 편에 있다. 본래 곡성(谷城)에서 태어났다.
진안현 鎭安縣
동으로 장수현(長水縣) 경계까지 28리, 남으로 임실현(任實縣) 경계까지 49리, 서쪽으로 전주부(全州府) 경계
까지 35리, 북으로 용담현(龍潭縣) 경계까지 23리, 서울로부터는 5백 82리다.
건치연혁 본래는 백제의 난진아현(難珍阿縣) : 일명 월량(月良)이었다.
신라 시대에 지금의 이름으로 고쳐 장계군(長溪郡)의 영현으로 하였고,
고려 초기에는 전주에 속하였다가 뒤에 감무를 두었다.
공양왕(恭讓王) 3년에는 마령현(馬靈縣)을 겸임하게 하였고, 본조 태종(太宗) 13년에 현감(縣監)으로 고쳤으며,
계속 장계군에 예속시켰다.
관원 현감(縣監)ㆍ훈도(訓導) : 각 1명.
군도 난진아(難珍阿)ㆍ월랑(越浪) : 월량(月良)이라는 말이 바뀌어서 월랑(越浪)이 되었다.
성씨본현 이(李)ㆍ백(白)ㆍ전(全)ㆍ한(韓)ㆍ김(金)ㆍ최(崔)ㆍ유(庾) : 모두 속성(續姓)이다.
마령(馬靈) 한(韓)ㆍ전(全)ㆍ송(宋)ㆍ가(價)ㆍ이(李)ㆍ김(金)ㆍ장(張).
풍속 기민질야(其民質野) : 이규보(李奎報)의 기문에, "마령(馬靈)은 진안(鎭安) 산곡(山谷) 사이의 고읍이다.
백성은 소박하고 얼굴은 큰 원숭이 같고 음식은 날 것을 먹는 야만인의 풍이 있다.
꾸짖고 나무라면 놀란 사슴모양으로 달아나 버린다." 하였다.
산천 부귀산(富貴山) : 현의 북쪽 5리에 있는 진산(鎭山)이다. 고달산(高達山) : 현의 서남쪽 30리에 있다.
마이산(馬耳山) : 현의 남쪽 7리에 돌산이 하나 있는데 봉우리 두 개가 높이 솟아 있기 때문에 용출봉(湧出峯)
이라 이름하였다. 높이 솟은 봉우리 중에서 동쪽을 아버지, 서쪽을 어머니라 하는데, 서로 마주 대하고 있는 것
이 마치 깎아서 만든 것 같다. 그 높이는 천 길쯤 되고 꼭대기에는 수목이 울창하고 사면이 준절(峻絶)하여 사람
들이 오를 수 없고 오직 모봉(母峯)의 북쪽 언덕으로만 오를 수가 있다. 전하는 이야기에, 동봉(東峯) 위에는
작은 못이 있고, 서봉(西峯)의 정상은 평평하고, 샘이 있어서 적병을 피할 수 있고, 날이 가물어 비를 빌면 감응
이 있다고 한다. 신라 시대에는 서다산(西多山)이라고 불렀는데 소사(小祀)에 올렸다.
본조 태종(太宗)이 남행(南幸)하여 산 아래에 이르러서 관원을 보내어 제사를 드리고 그 모양이 말의 귀와 같다
하여 마이산(馬耳山)이라는 이름을 내려 주었다.
신증 김종직(金宗直)의 시에, "기이한 봉우리가 하늘 밖에서 떨어지니, 쌍으로 쭈삣한 것이 말의 귀와 같고나.
높이는 몇 천 길인지 연기와 안개 속에 우뚝하도다. 우연히 임금의 행차하심을 입어 아름다운 이름이 만년에 전
하네. 중원(中原)에도 또한 이런 이름이 있으니 이름과 실제 모습이 서로 비슷하도다. 천지 조화의 공교함은
끝이 없으니, 길이 천지가 혼돈했던 처음 일을 생각하도다. 내 이곳에 가을비 내린 뒤에 오니, 푸른 빛과 붉은
빛이 비단처럼 뒤섞였네. 멀리 바라보노라고 고개를 돌리지 아니하니 문은 밤새도록 열어 둔대로다.
어떻게 해서 신선의 녹옥장(綠玉杖)을 얻어 높은 데에 올라가 다니면서 진흙먼지같은 이 세상을 벗어나 쇄석암
(碎石庵)에서 묵고 봉우리 꼭대기에 올라 샘물을 손으로 마시며 선동(仙童)과 서로 상의하여 방촌(方寸) 숟갈의
약을 먹을꼬." 하였다.
조위(曹偉)의 시에, "우뚝 솟은 두 귀가 마이봉(馬耳峯)인데, 구름 끝에 벽부용(碧芙蓉)을 받쳐 내었네.
어떻게 하여 하늘 뚫는 날개를 얻어 봉우리 끝까지 날아 올라 가슴을 한번 씻어낼꼬. 말 위에는 시를 지으며 술
기운을 약간 띠고나서, 하늘 끝 멀리 벽옥잠(碧玉簪)을 바라보겠네. 객로(客路)에 오른 사람 중에 몇 사람이나
그 절정에 올랐을꼬. 하늘에 기댄 검극(劍戟)이 뾰족하게 연람(煙嵐) 가운데서 솟아나왔도다.
산색이 가을 하늘에 비치니 비에 씻기고 서리에 갈려도 만고에 새롭도다. 평생에 보지 못했던 것 처음 보았으니
그림으로 그려 북쪽으로 오는 사람들에게 자랑하리라." 하였다. 김수동(金壽童)의 시에, "마이 쌍봉(雙峯)이
공중에 꽂혔는데 구름 열리니 우뚝하게 가을 얼굴 드러냈네. 듣기에 절정에 신령스러운 연못이 있다고 하던데
어떻게 고각(鼓角) 소리로 늙은 용을 시험할꼬." 하였다. 성수산(聖壽山) : 현의 남쪽 50리에 있다.
중대산(中臺山) : 마령현(馬靈縣)에 있다. 웅령(熊嶺) : 현의 서쪽 37리, 전주(全州)의 경계에 있다.
동천(東川) : 현의 동쪽 1리에 있다.
물의 발원지는 마이산 동봉(東峯)에서 나와 용담현(龍潭縣)의 마산담(馬山潭)으로 들어간다.
서천(西川) : 현의 서쪽 13리에 있는데, 물의 발원지는 마이산 서봉(西峯)에서 나와 임실현(任實縣)의 오원천
(烏原川)으로 들어간다. 신증 증연(甑淵) : 마령(馬靈)의 동쪽에 있는데, 큰 구멍이 뚫려 산정(山頂)과 서로
통한다. 사람이 돌을 굴리면 곧바로 못 속으로 떨어진다. 수증기가 늘 서려서 마치 물을 끓이면 증기가 올라
가는 것 같아서 이렇게 이름지은 것이다.
토산 벌꿀ㆍ석이버섯ㆍ송이버섯ㆍ자초(紫草)ㆍ칠ㆍ닥나무.
누정 하추정(夏秋頂) : 현의 동쪽 5리에 있다. 그 정자 아래로는 시냇물이 흘러 비록 한 여름 더위라 하더라도
서늘한 기운이 가을과 같이 서늘하므로 하추정(夏秋亭)이라고 이름을 지었다.
○ 안침(安琛)의 시에, "봄에는 꽃이 물 위에 뜨는 것이 사랑스럽고, 겨울이면 눈이 산 위에 덮이는 것이 어여
쁘도다. 한 정자가 사계절에 모두 어울리니, 어찌 여름과 가을만 그치리요." 하였다.
○ 남곤(南袞)의 시에, "난간에 의지하면 항상 물에 임하고, 창문을 열면 바로 산이 있도다.
붉은 산 언덕과 녹림 속의 시냇물, 그림 폭 사이에 어울리도다." 하였다.
학교 향교(鄕校) : 현의 북쪽 3리에 있다.
역원 단령역(丹嶺驛) : 현의 남쪽 5리에 있다. 동원(東院) : 현의 동쪽 1리에 있다.
율현원(栗峴院) : 현의 동쪽 29리에
있다. 초천원(草川院) : 현의 동쪽 17리에 있다. 남원(南院) : 현의 남쪽 1리에 있다.
요광원(要光院) : 현의 서쪽 32리에 있다. 좌산원(左山院) : 현의 남쪽 53리에 있다. 영천원(穎川院)ㆍ
삼기원(三岐院) : 둘 다 마령현(馬靈縣)에 있다. 강유원(康乳院) : 현의 북쪽 25리에 있다.
불우 상원사(上院寺)ㆍ혈암사(穴巖寺)ㆍ쇄암사(碎巖寺) : 모두 마이산(馬耳山)에 있다.
중대사(中臺寺) : 성수산(聖壽山)에 있다.
사묘 사직단(社稷壇) : 현의 서쪽 4리에 있다. 문묘(文廟) : 향교에 있다.
성황사(城隍祠) : 현의 남쪽 5리에 있다. 여단(厲壇) : 현의 북쪽에 있다.
고적 마령 폐현(馬靈廢縣) : 현의 남쪽 30리에 있다. 본래 백제의 마돌현(馬突縣)인데, 일명 마진(馬珍), 일명
마등량(馬等良)이라고도 한다. 신라 시대에 지금의 이름으로 고쳐 임실군(任實郡)의 영현(領縣)으로 삼았는데,
고려 초기에는 전주(全州)에 속하였고, 뒤에는 진안(鎭安) 감무가 겸임하게 하였으며, 본조 태종(太宗) 13년에
그대로 그곳에 속하게 하였는데 별호는 영천군(穎川郡)이라 한다.
강주소(剛珠所) : 마령현에 있다.
우거 이유의(李由義):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이 목사에 이르렀다.
[비고]
연혁 고종 32년에 군으로 고쳤다. 《文獻備考》
방면 읍내(邑內)ㆍ읍하 (邑下) : 끝이 10리다. 마령(馬靈) : 처음이 15리, 끝이 30리다.
탄전(呑田) : 남쪽으로 처음이 10리, 끝이 30리이다. 상도(上道) : 바로 읍내이며, 끝이 30리다.
일동(一東) : 처음이 15리 끝이 30리다. 이동(二東) : 처음이 30리, 끝이 40리다.
두미(斗尾) : 남쪽으로 처음이 10리, 끝이 20리다. 흥면(興面) : 동쪽으로 처음이 10리, 끝이 20리다.
일서(一西) : 처음이 30리, 끝이 40리다. 이서(二西) : 처음이 40리, 끝이 50리다.
일북(一北) : 처음이 7리, 끝이 20리다. 이북(二北) : 서북쪽으로 처음이 20리, 끝이 40리다.
삼북(三北): 서쪽으로 30리다. ○ 강수소(剛洙所)는 마령에 있다.
창고 창(倉)이 둘 : 읍내(邑內)에 있다. 외창(外倉) : 서남쪽으로 30리에 있다.
동창(東倉)ㆍ성창 (城倉) : 함봉산성(咸鳳山城)에 있다.
토산 모시ㆍ뽕ㆍ감.
누정 우화정(羽化亭) : 현의 남쪽에 있다. 진남루(鎭南樓) : 현 안에 있다.
단유 마이산단(馬耳山壇) : 신라 사전(祀典)에, "서다산(西多山)이 백해군(伯海郡)에 있는데, 고을의 명산이지만
소사(小祀)에 들었다." 하였다. 고려에서도 그대로 따랐다. 본조에서는 태종(太宗) 13년에 남행(南幸)하였을 때
이 산 밑으로 가게 되었는데, 관원을 보내어 제사하고, 마이산이라 이름을 내려주었다.
지금도 본읍에서 봄ㆍ가을에 제사지낸다.
옥과현 玉果縣
동으로는 남원부(南原府) 경계까지 20리, 남으로 동복현(同福縣) 경계까지 26리, 곡성현 경계까지 21리,
서쪽으로 담양부의 경계까지 11리, 북으로 순창군 경계까지 11리, 서울과의 거리는 7백 12리다.
건치연혁 본래는 백제의 과지현(果支縣) : 일명 과혜현(果兮縣)이라고도 한다. 신라 시대에 지금의 이름으로
고쳐 추성군(秋成郡)의 영현(領縣)으로 하였고 고려 초기에는 보성군(寶城郡)에 속하였고,
명종(明宗) 2년에 감무(監務)를 두었으며 본조에 와서 현감(縣監)으로 개정하였다.
관원 현감ㆍ훈도(訓導) : 각 1명.
군명 과지(果支)ㆍ설산(雪山).
성씨 본현 김(金)ㆍ조(趙)ㆍ송(宋)ㆍ황(黃)ㆍ문(文)ㆍ전(全)ㆍ박(朴) : 밀양 흥복(興福) 문(文). 금산(金山)
문(文)ㆍ황(黃).
산천 설산(雪山) : 현의 서북쪽 13리에 있는 진산(鎭山)이다. 성덕산(聖德山) : 현의 남방 31리에 있다.
안산(鷃山) : 현의 동방 15리에 있다. 동락산(動樂山) : 현의 동방 25리에 있다.
방제천(方梯川) : 현의 동쪽 22리에 있다. 즉 순창군(淳昌郡) 적성진(赤城津)의 하류로서 동류하여 남원부
(南原府)의 순자진(鶉子津)이 된다.
선각천(仙脚川) : 현의 동방 3리, 성덕산(聖德山)에서 나와 방제천(方梯川)으로 들어간다.
토산 닥나무ㆍ감ㆍ송이버섯ㆍ도루묵[銵口魚].
누정 의운루(倚雲樓) : 객관의 동쪽에 있다. 성임(成任)의 시에, "누에 오르니 경치가 한없는데, 봄이 다 되매
홀로 머리를 긁적이네. 빈 편상엔 소나무가 빗소리로 울고, 먼 촌락엔 보리 가을이로세. 관산(關山)에서 북쪽
바라보기에 내 신세를 동으로 흐르는 물에 부쳤다. 낮과 밤으로 시름 많은 구름이 합하니, 돌아가고픈 마음 거둘
수가 없도다." 하였다.
남루(南樓) : 객관(客舘)의 남쪽에 있다. 현감 방옥정(房玉精)이 세웠다.
영귀정(詠歸亭) : 현의 동쪽 2리에 있다. 현감 최형한(崔亨漢)이 세웠다.
학교 향교(鄕校) : 현의 북쪽 3리에 있다.
역원 대부역(大富驛) : 현의 동쪽 6리에 있다. 노다원(老多院) : 현의 남쪽 25리에 있다.
사기원(四岐院) : 현의 동쪽 5리에 있다. 연덕원(延德院) : 현의 서쪽 10리에 있다.
불우 금당사(金堂寺)ㆍ나암사(蘿巖寺) : 둘 다 설산(雪山)에 있다.
금강사(金剛寺)ㆍ관음사(觀音寺) : 모두 성덕산(聖德山)에 있다.
사묘 사직단(社稷壇) : 현의 서쪽에 있다. 문묘(文廟) : 향교에 있다.
성황사(城隍祠) : 현의 동쪽 5리에 있다. 여단(厲壇) : 현의 북방에 있다.
고적 금산 부곡(金山部曲) : 현의 동쪽 22리에 있다. 흥복향(興福鄕) : 현의 남방 15리에 있다.
이인향(利仁鄕) : 현의 동쪽 17리에 있다. 안곡소(鷃谷所) : 안산(鷃山) 아래에 있다.
인물고려 조통(趙通) : 체격이 크고 훌륭하며, 경사백가(經史百家)에 통달하지 아니한 것이 없었다. 진사(進士)
에 뽑혔고 여러 번 추천되어 고공랑중(考功郞中) 태자문학(太子文學)을 지냈다. 봉사하여 금(金) 나라에 갔었
는데, 마침 요구하고 힐문하는 일이 있어 3년을 머물렀다. 금인(金人)이 그 재주를 사랑하고 그 절개를 가상히
여겨 돌아가서 그 일을 알리도록 하였다. 오래지 않아 서경 유수사(西京留守事)로 나갔다.
관대하고 어질며 공검(恭儉)하여 신의(信義)로서 사람을 대하였다. 벼슬이 한림학사 지제고(翰林學士知制誥)에
이르렀다.
이인로(李仁老)가 통(通)이라 호를 부르고 산수우(山水友)로 삼았다. 증시(贈詩) 하기를, "도주공(陶朱公)이 월
(越) 나라의 재상이 되었으나 한 척의 조각배로 바다에 떴고, 사안석(謝安石)이 진(晉) 나라 조정에 있었으나
청산(靑山)의 달을 완상하였네. 지금 나와 그대가 있으니, 어찌 벼슬을 중히 여기리오. 동해의 금을 흩어 버리고
서산(西山)에 고사리를 캐세." 하였다.
[비고]
연혁 고종 32년에 군으로 고쳤다. 《文獻備考》
방면 현내(縣內)ㆍ임평(林坪) : 동쪽으로 처음은 10리, 끝은 30리이다.
겸방(兼房) : 남쪽으로 처음은 15리, 끝은 20리이다. 지좌곡(只佐谷) : 남쪽으로 처음은 10리, 끝은 20리이다.
입석(立石) : 남쪽으로 처음은 5리, 끝은 30리이다. 수화곡(水火谷) : 북쪽으로 처음은 8리, 끝은 15리이다.
○ 흥복향(興福鄕)은 남쪽 15리고, 이인향(利仁鄕)은 동쪽으로 17리며,
금산 부곡(金山部曲)은 동쪽으로 22리이고, 안곡소(鷃谷所)는 안산(鷃山) 밑에 있다.
성지 고성(古城) : 설산(雪山) 동남쪽의 석벽(石壁)과 마주 바라보고 있으며 가운데 입을 딱 벌리고 있는 것은
마치 문과 같고, 그 위 둘레에는 성이 있는데 1천 6백 60척이며 못이 세 개 있다.
창고 창(倉)이 셋 : 읍내(邑內)이다. 상창(山倉) : 금성산성(金城山城)이다.
토산 대ㆍ뽕나무ㆍ칠.
누정 부혜루(敷惠樓) ㆍ환경루(環鏡樓)ㆍ청수관(淸水觀).
운봉현 雲峯縣
동으로 경상도 함양군(咸陽郡) 경계까지 20리, 서쪽으로 남원부(南原府) 경계까지 7리,
남으로 남원부 경계까지 62리, 북으로 남원부 경계까지 9리, 서울과의 거리가 6백 97리이다.
건치연혁 본래 신라의 무산현(毋山縣)이다 : 일명 경덕(景德). 아영성(阿英城)ㆍ아막성(阿莫城)이라고도 한다.
뒤에 지금의 이름으로 고쳐 천령군(天嶺郡)에 예속시켰다. 고려 때에는 남원부에 속하였고,
공양왕(恭讓王) 3년에는 아용곡 권농병마사(阿容谷勸農兵馬使)를 겸하게 되었다.
본조 태조(太祖) 원년에 감무(監務)를 두었고 뒤에 준례에 따라 현감(縣監)으로 고쳤다.
관원 현감ㆍ훈도(訓導) : 각 1명.
군명 무산(毋山)ㆍ아영(阿英)ㆍ아막(阿莫)ㆍ운성(雲城)ㆍ경덕(景德).
성씨본현 박(朴)ㆍ문(文)ㆍ정(鄭)ㆍ전(田)ㆍ신(辛). 아요곡(阿要谷) 문(文)ㆍ유(劉)ㆍ김(金).
풍속 십실민순(十室民淳) : 원효연(元孝然)의 시에, "민가가 적고 백성은 순박하니, 태고풍(太古風)이다." 하였다.
형승 산연지리지접함양(山連智異地接咸陽) : 이안우(李安愚)의 시에, "산은 지리산에 연하여 봉우리가 뛰어나고,
땅은 함양에 접하여 수목이 조밀하다." 하였다.
산천 지리산 : 현의 남쪽 60리에 있다. 황산(荒山) : 현의 동쪽 16리에 있다.
정산(鼎山) : 바로 황산의 동북쪽 산록(山麓)이다. 본조 태조(太祖)가 왜적을 무찌른 곳이다.
인월역(引月驛) 편에 자세하다. 여원현(女院峴) : 현의 서쪽 7리, 남원부(南原府) 경계상에 있다.
팔량현(八良峴) : 황산(荒山)의 동쪽 5리에 있다. 바로 경상도 함양군(咸陽郡)의 경계다. 신라와 백제 시대로부터
요해(要害)로 불려온다. 인월(引月)의 적이 또한 이 고개를 넘었다.
우현(牛峴) : 현의 북쪽 8리에 있다. 산 위에는 옛날 돌성의 터가 남아 있다. 기현(箕峴) : 현의 북쪽 20리에 있다.
저연(猪淵) : 지리산 반야봉(般若峯) 아래에 있다. 즉 동천(東川)의 상류이다. 동천(東川) : 현의 동쪽 1리에 있다.
인월역(引月驛)을 지나면 함양군의 임천(瀶川)이 된다.
토산 꿀ㆍ오미자ㆍ인삼ㆍ잣ㆍ송이버섯ㆍ석이버섯ㆍ감ㆍ자초[紫草].
학교 향교(鄕校) : 현의 북방 2리에 있다.
역원 인월역 : 현의 동쪽 16리에 있다. 이규보(李奎報)의 시에, "장마가 처음 개이매 풀색이 새로우니, 높고 낮은
언덕의 빛깔이 용의 비늘처럼 엇갈렸네, 일만 오천 보(步)가 부단히 근심되고 본래 동서남북 사람이네.
양류(楊柳)는 맞고 보내는데 익숙하여 사양하지 않되, 산은 왕래 빈번함을 응당 괴이해 하리로다. 눈앞의 풍경을
부디 기억하라 다음날 돌아보면 곧바로 아뢰리라." 하였다. 신우(辛禑) 때는 왜구(倭寇)가 함양(咸陽)을 도륙하고,
또 남원산성(南原山城)을 치고는 물러나 운봉현(雲峯縣)을 불질렀다. 인월역(引月驛)에 주둔하고서 장차 북상
(北上)하겠다고 소리치매 온 나라가 소란스러워졌다.
태조(太祖)가 변안렬(邊安烈)과 더불어 남원(南原)에 이르니, 배극렴(裵克廉) 등이 길에 나와 배알하고 기쁘고
좋아하지 아니하는 사람이 없었다. 태조가 이른 아침을 기하여 적과 싸우려 하니, 여러 장수들이 모두 말하기를,
"적은 험한 곳에 의지하고 있으니, 그들이 나오기를 기다려 싸우는 것만 못할 것이라." 하였다.
태조가 이르기를, "나라를 위해 군사를 일으켰으니, 적을 만나지 못할까 두려워 하는 것인데 이제 적을 보고서도
치지 아니한다면 되겠느냐." 하고, 밝은 아침에 군사들에게 맹세하고 동으로 운봉(雲峯)을 넘어 적과 수십 리를
두고 대치하게 되었다.
황산(荒山) 서북쪽에 이르러 정산(鼎山)의 봉우리에 오르는데, 길 오른편에 험한 길이 있었다.
태조가 이미 험지에 들었는데, 적이 날카로운 창을 가지고 튀어 나왔다. 태조가 50 여 발을 쏘아 적의 면상(面上)
에 적중시키니, 활을 당기기만 하면 죽지 않는 놈이 없었다. 적이 험한 산에 의지하고 스스로 굳게 지키매,
태조는 사졸(士卒)을 지휘하여 요해지(要害地)에 나누어 의거하니, 적은 죽을 힘을 다하여 대항하였다.
태조는 다시 소라를 불어 군대를 정돈하고 개미처럼 붙어 올라가니, 적은 태조를 여러 겹으로 에워쌌다.
태조가 그 자리에서 여덟 놈의 적을 죽여 없애니 적이 감히 앞으로 나오지 못하였다. 태조가 하늘의 해를 가리켜
맹세하고 좌우에게 이르기를, "겁이 나는 자는 물러가라. 나는 적에게 죽을 터이다." 하니, 장사들이 감동되어
용기 백배하였다.
적장 중에 나이 겨우 십오륙 세 되고 이름을 아지발도(阿只拔都)라 하는 자가 있었는데, 태조는 그가 용맹스럽고
날랜 것을 아껴서 사로잡으려고 하니, 이두란(李豆蘭)은 말하기를, "죽이지 아니하면 반드시 사람을 상해할 것이
라." 하였다.
태조가 아지발도의 투구를 쏘아 맞히니 투구가 떨어졌고, 이에 두란(豆蘭)이 재빨리 사살하니, 이에 적은 기세가
꺾였다. 태조가 선두에 서서 돌격하여 크게 격파하니, 시냇물이 붉은 핏물이 되었다.
처음에 적의 수는 아군의 10배나 되었는데 겨우 70여 명이 지리산으로 도망하였다. 태조가 개선하여 돌아오매
판삼사(判三司) 최영(崔瑩)은 백관을 인솔하고 산대(山臺) 잡희(雜戱)를 배설하여 천수사(天壽寺) 앞에서 맞이
하였다.
최영은 태조의 손을 잡고 눈물을 흘리며, "공이여, 공이여, 삼한(三韓)을 다시 살림이 이번 이 승전에 있으니,
공이 아니었으면 나라가 어찌 되었으리오." 하였다.
이색(李穡)이 시를 지어 축하하기를, "적을 소멸함이 참으로 썩은 나무 꺾기와 같이 하였으니, 삼한의 즐거운
기운이 여러 공(公)에게 속했도다. 충성은 백일(白日)에 빛나니, 하늘이 안개를 거두었고 위엄이 동방에 떨쳤으니,
바다에 파도가 잠잠하누나.
나가 맞이하는 빛나는 잔치에는 무열(武烈)을 노래하고 능연(凌煙) 고각(高閣)에는 영웅의 얼굴을 그리리라.
병든 나머지 교외에 나가 맞이하지는 못하니, 앉아서 새로운 시를 읊어 높은 공을 칭송하네." 하였다.
윤소종(尹紹宗)의 시에, "왜구가 발동한 지 30년, 인월(引月)의 일전(一戰)에서 한단(邯鄲 꿈속의 일)의 싸움처럼
전멸을 시켰네. 장군은 급히 창 들고 철마(鐵馬)에 뛰어 오르니, 황금 갑옷이 석양 빛에 반짝이네.
기운은 산을 뽑을 만하고 담력은 말[斗]만큼이나 크도다. 나라에 바친 일신은 기러기 털처럼 가볍게 여기니,
구구한 관악(管樂)을 어찌 족히 비기리오. 복건으로 집에 돌아와 주자(朱子)와 정자(程子)를 스승하리,
주자 정자의 학문으로 이윤(伊尹)과 주공(周公) 되어 만세에 태평을 열어주소." 하였다.
여원(女院) : 여원현(女院峴)의 아래에 있다.
중흥원(中興院) : 현의 동쪽 7리에 있다. 대공원(大功院) : 현의 동쪽 15리에 있다.
불우 원수사(源水寺) : 지리산에 있다. 백장사(百丈寺) : 수청산(水淸山)에 있다. 장계사(長溪寺) : 지리산에 있다.
사묘 사직단(社稷壇) : 현의 서쪽에 있다. 문묘(文廟) : 향교에 있다. 성황사(城隍祠) : 현의 동쪽 2리에 있다.
여단 : 현의 북쪽에 있다.
고적 아요곡 부곡(阿要谷部曲) : 현의 북쪽 15리에 있다.
실상사(實相寺) : 옛터가 원수사(源水寺)의 남쪽 5리에 있는데, 고려의 중 수철보월(秀徹寶月)의 탑이 있다.
인물본조 박신(朴信) :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이 의정부 찬성사(議政府贊成事)에 이르고, 시호는 혜숙(惠肅).
박종우(朴從愚) : 박신의 아들, 태종(太宗)의 딸에게 장가들었다.
세조(世祖) 조에 정난공신(靖難功臣)이 되고 운성부원군(雲城府院郡)에 봉하였고 시호는 성렬(成烈)이다.
제영 황산일전천년조(荒山一戰千年祚) : 정인지(鄭麟趾)의 시에, "황산의 한 싸움이 천년의 국운을 열었네.
악부 장가(樂府長歌)에 만고의 풍을 길이 노래하도다." 하였다.
운심부단사시우(雲深不斷四時雨) : 이석형(李石亨)의 시에, "구름이 깊어 비는 사시 그침이 없고,
골짜기는 깊숙하매, 일만 구멍에서 바람이 길이 불도다." 하였다.
동부심심세경통(洞府深深細徑通) : 서거정(徐居正)의 시에, "두류산(頭流山 지리산을 말함)의 경색은 푸른
하늘로 솟았는데, 동부는 깊고 깊은데, 가느다란 길이 통하였네. 요사한 왜적과 십년 전쟁을 치른 후에 신기한
전공을 소담(笑談) 중에 세웠네. 사시의 운기(雲氣)는 비가 되고 만 골짜기서 나는 가을 소리는 바람이 되었네.
어느 날에나 산꼭대기에 기어 올라가 처음 해뜰 제 파도가 붉은 것을 내려다 볼 수 있을거나." 하였다.
[비고]
연혁 선조(宣祖) 33년에 남원(南原)에 합하였다 : 왜구가 이곳을 쳐서 우리 군사가 패하였기 때문이다.
광해주(光害主) 3년에 다시 설치하였다.
고종 32년에 군으로 고쳤다. 《文獻備考》
방면 읍내(邑內) : 끝이 10리이다. 동면(東面) : 처음이 10리, 끝이 20리이다. 서면(西面) : 끝이 10리이다.
남면(南面) : 처음이 8리, 끝이 20리이다. 북상(北上) : 처음이 10리, 끝이 20리이다.
북하(北下) : 처음이 20리, 끝이 30리이다. 산내(山內) : 남쪽으로 처음이 20리, 끝이 50리이다.
○ 아요곡 부곡(阿要谷部曲)의 북쪽으로 15리에 마천소(馬川所)가 있다.
성지 고성(古城) : 북쪽으로 2리인 소산(小山)의 위에 있으며, 복성산(福成山)에는 흙으로 쌓았던 옛터가 있다.
우현고성(牛峴古城) : 고개 위에 옛터가 있다. 팔량관(八良關) : 신라ㆍ백제 때부터 성을 쌓고 지켰으며, 지금도
옛터가 있다.
영아 좌영(左營) : 인조(仁祖) 때에 남원(南原)에 설치하였다가 숙종(肅宗) 34년에 본현(本縣)에 옮겼다.
○ 좌영장(左營將)은 본래 현감이 겸임한다.
○ 동오(東五)는 속읍(屬邑)이다. 운봉(雲峯)ㆍ남원(南原)ㆍ곡성(谷城)ㆍ장수(長水)ㆍ창평(昌平)ㆍ옥과(玉果)ㆍ
구례(求禮)는 토포(討捕)를 겸한다. 토포의 속읍은 담양(潭陽)ㆍ순창(淳昌)이다.
창고 읍창(邑倉) : 읍내에 있다. 북창(北倉) : 북쪽으로 20리에 있다.
토산 닥나무ㆍ칠ㆍ밤.
장수현 長水縣
동쪽으로 경상도 안음현(安陰縣) 경계까지 50리, 남으로 남원부(南原府) 경계까지 20리,
서쪽으로 남원부 경계까지 32리, 진안현(鎭安縣) 경계까지 32리,
북으로 용담현(龍潭縣) 경계까지 47리, 서울로부터는 6백 68리 떨어져 있다.
건치연혁 본래는 백제의 우평현(雨坪縣)인데 신라 시대에는 고택(高澤)이라 하여 장계군(長溪郡)에 속하였고,
고려에 와서 지금의 이름으로 고치고 남원부(南原府)에 속하였다가 공양왕(恭讓王) 3년에는 장계(長溪)를 겸임
하였다. 본조 태조(太祖) 원년에 다시 나누어 장수현으로 하고, 장계 감무(監務)를 겸하도록 하였고,
태종(太宗) 14년에 예에 따라 현감(縣監)으로 고쳤다.
속현 장계현(長溪縣) : 현의 북쪽 30리에 있다. 본래는 백제의 백해군(伯海郡), 해(海)는 혹 이(伊)로 쓰기도
한다. 신라 때에 벽계군(壁溪郡)으로 고쳤고, 고려에서는 지금의 이름으로 고쳤으며, 남원부에 속하였다가 뒤에
장수현(長水縣)에 속하였고, 별호를 장세(長世)라고 하였다.
관현 현감(縣監)ㆍ훈도(訓導) : 각 1명.
군명 우평(雨坪)ㆍ장천(長川)ㆍ고택(高澤).
성씨본현 이(李)ㆍ오(吳)ㆍ정(井)ㆍ고(高)ㆍ임(林)ㆍ설(薛)ㆍ조(趙)ㆍ황(黃) : 모두 속(續). 장계(長溪) 백(白)ㆍ
배(裵)ㆍ유(柳)ㆍ오(吳)ㆍ현(玄)ㆍ김(金)ㆍ속(續). 양악(陽岳) 이(李)ㆍ최(崔). 이방(梨方) 배(裵). 복흥(福興).
임(林)ㆍ예(芮)ㆍ조(趙)ㆍ이(李)ㆍ염(廉)ㆍ경(景)ㆍ호(扈).
산천 영취산(靈鷲山) : 현의 동쪽 10리에 있는 진산(鎭山)이다. 덕유산(德裕山) :현의 북쪽 50리에 있다.
성적산(聖迹山) : 일명 성수(聖壽), 현의 서남방 15리에 있다. 백화산(白華山) : 장계현(長溪縣)에 있다.
육십현(六十峴) : 현의 북쪽 40리, 경상도 안음현(安陰縣)의 경계에 있다. 신라 시대로부터 요해지(要害地)로서
행인이 이곳에 이르면 늘 도적에게 약탈을 당하므로 반드시 60명이 되어야만 지나가곤 했다.
이것이 이름이 되었다.
수분현(水分峴) : 현의 남쪽 25리에 있다. 골짜기의 물이 한 줄기는 남원(南原)으로 향하고 한 줄기는 본현으로
들어와 남천(南川)이 되었다. 이것 때문에 붙인 이름이다. 남천(南川) : 현의 남쪽 20리에 있다.
호천(狐川) : 현의 북쪽 45리 지점에 있다. 남천(南川)과 백화산의 물이 합류하여 호천(狐川)이 되고, 북으로
흘러 용담현(龍潭縣) 경계로 흘러간다.
토산 오미자ㆍ인삼ㆍ자초(紫草). 석이버섯ㆍ벌꿀ㆍ감.
누정 연사루(戀思樓) : 객관(客舘)의 남쪽에 있다. 성화(成化) 갑오년에 현감 김수강(金壽康)이 세운 것인데,
연궐사친(戀闕思親 임금을 그리워하고 어버이를 사모함)의 뜻을 따서 이름을 붙였다.
강희맹(姜希孟)의 시에, "그대는 보지 못하였는가, 왕중선(王仲宣 왕찬(王粲)의 자)이 세상을 근심하는 걱정을
면하지 못하여 홀로 읊조리며 먼 곳을 생각하여 등루부(登樓賦)를 지었다네, 또 보지 못했는가 적회영(狄懷英
적인걸(狄仁傑)의 자)은 어버이를 그리워하나 돌아갈 길 없어 구름을 바라보며 먼 고을에 머물러 있음을 한탄
하였다네.
인생이 벼슬길에 나가는 일이 실로 그릇된 것이니 충과 효를 겸전하기 끝내 어려운 일이로세.
그대는 지방관에 임명받고 나오니 부모와 임금생각 새 근심이 얽혔도다. 장안의 임금 계신 곳을 보니 오운(五雲)
이 잔뜩 끼었고 부모 계신 이향(異鄕) 옛 동산이 아련히 생각난다. 일편단심(一片丹心) 본시 지녔으니, 눈에선 두
줄기 눈물이 흐르네.
누각(樓閣)이 이루워지니 우뚝 솟아 두우성(斗牛星)에 닿고 눈은 천리에 극(極)했는데 몸만 헛되이 머물렀네.
일신을 직무에 바쳐 왕의 덕화를 이어 받드니, 백성을 대하기 자식과 같고, 아전을 대하기 원수처럼 하였네.
임금과 어버이에 보은하고 또 무엇을 구하겠느냐. 연사(戀思)란 이름을 따라 뜻을 강구하면 어찌 연사하지 않을
수 있으랴. 마음속에 부끄러움을 남기지 말고, 명(名)과 실(實)이 어긋남이 없도록 해야 하네,
나 또한 인끈을 풀고 잠시 한가로움을 얻었도다. 가을 서리 봄이슬, 광음은 빨리도 가누나.
우연히 남방을 원유(遠遊)하였는데 두류(頭流)의 뛰어난 경개를 다 볼 수가 없고나.
누 앞의 꽃과 대는 봄의 부드러움을 희롱하고, 누아래 긴 시내는 맑기가 기름같네,
그대와 서로 술을 나누지 못하여 유감이라. 소나무와 계수나무의 가을을 기다려 다시 오겠네." 하였다.
신증 응벽정(凝碧亭) : 객관(客官)의 남쪽에 있는데, 그 아래에 연못[蓮塘]이 있다.
학교 향교(鄕校) : 현의 북쪽 3리에 있다.
원유 득방원(得方院) : 현의 서쪽 3리에 있다. 수분원(水分院) : 현의 남쪽 18리에 있다.
덕안원(德安院) : 현의 북쪽 31리에 있다. 홍복원(洪福院) : 현의 동쪽 35리에 있다.
양선원(陽善院) : 현의 북쪽 62리에 있다. 석북원(席北院) : 현의 북쪽 50리에 있다.
불우 운점사(雲岾寺) : 성적산(聖迹山)에 있다. 신라 진평왕(眞平王)이 중수하였으니 승(僧) 원효(元曉)의 도량
이었다. 남북쪽에 만향점(萬香岾)이 있는데 원효와 의상(義湘)이 이곳에서 강법(講法)하였다.
이상한 향기가 풍겨 붙인 이름이다.
본조 세종(世宗)조에 중 성주(省珠)가 다시 중수하였다.
석천사(釋天寺) : 영취산(靈鷲山)에 있다.
김극기(金克己)의 시에, "구름머리에 절간은 높은 산봉우리를 차지하였는데, 비탈을 오르고 낭떠러지를 올라
찾아왔네. 바위의 대[竹]는 바람에 기대어 푸른 옥을 두드리고, 시내 소나무는 달과 어울려 황금빛을 부시네
[碎].
향로 연기 뿜어 엉키어 안개가 되고, 용(龍) 바릿대는 침을 흘려 흩어져서 임우(霖雨)가 되었네.
한밤중에 홀연히 꿈에서 깨니, 돌 끝에 떨어지는 물소리는 손끝의 거문고인양 울리네." 하였다.
정토사(淨土寺) : 덕유산(德裕山)에 있다. 장안사(長安寺) : 영취산(靈鷲山)에 있다.
팔공암(八功庵) : 성적산(聖迹山)에 있다. 의상(義湘)이 중건하였다.
사묘 사직단(社稷壇) : 현의 서북 4리에 있다. 문묘(文廟) : 향교에 있다.
성황사(城隍祠) : 현의 남쪽 3리에 있다. 여단(厲壇) : 현의 북쪽에 있다.
고적 고장수(古長水) : 지금의 치소 서쪽 7리에 있다. 양악소(陽岳所) : 현의 북쪽 60리에 있다.
이방소(梨方所) : 현의 북쪽 30리에 있다. 천잠소(天蠶所) : 현의 북쪽 15리에 있다.
복흥소(福興所)ㆍ성적산성(聖迹山城) : 석축으로 주위는 9백 70자, 높이 10자, 지금은 반이나 무너져 있다.
명관본조 최덕지(崔德之)ㆍ황육(黃陸) : 둘 다 청렴하고 간결하게 정치를 잘 했다.
인물고려 이임간(李林幹) : 벼슬은 정승에 이르고, 장천군(長天君)에 봉함.
본조 황희(黃喜) : 초명(初名)은 수로(壽老) 후에 희(喜)로 고쳤다. 자는 구부(懼夫), 호는 방촌(尨村)이다.
고려 신창(辛昌) 때에 급제하여 본조에 와서 네 임금을 섬기어 벼슬이 영의정에 이르고, 연로 걸퇴하여 나이
90에 죽었다. 의정부에 24년 근무 중 조종에서 이룩한 법도를 준수하고 분잡한 것은 좋아하지 않았다.
일 처리는 이치에 따르고, 규모가 원대하므로, 세종(世宗)이 아끼고 의지하기를 더욱 중히하여 비록 중궐 내부
의 비밀이라 하여도 반드시 그를 불러서 상의하고, 한마디로 결정을 하되 물러나서는 상과 의논한 일을 한번도
말하는 일이 없었기 때문에 그 일은 끝내 알려지지 않았다. 논자(論者)들이 칭하기를, "우리 조정에 어진 재상
으로는 틀림없이 공이 제일이니 훈업과 덕량이 북송(北宋)의 왕문정(王文正 왕증(王曾))과 한충헌(韓忠獻 한기
(韓琦))에 비할 만하다." 하였다. 시호는 익성(翼成), 세종(世宗)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황치신(黃致身) : 황희(黃喜)의 아들.
태종(太宗)이 그의 뜻과 학문을 듣고 동(董)이라 이름을 주고, 공안부 부승(恭安府副丞) 벼슬을 주었다.
뒤에 그 이름이 형제들의 이름과 맞지 않으므로 지금의 이름으로 고쳐주었다. 벼슬은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에 이르고 88세에 죽으니 시호는 호안(胡安)이다. 그 아들이 효도로 섬겼고 벼슬은 동지중추(同知中樞)를
지냈다.
황수신(黃守身) : 치신의 동생. 세조조의 좌익공신(佐翼功臣)이요, 벼슬은 영의정을 지냈다. 시호는 열성(烈成).
신증본조 양근(梁根) : 나이 13살에 아버지가 악질(惡疾)에 걸렸는데, 손가락을 잘라 약에 타서 드리니 병이
나았다. 일이 알려져 정문을 세웠다.
장영손(張永孫) :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여묘 3년에 소금과 간장을 먹지 않고 제찬(祭饌)을 갖추어 조석으로 곡
하며 상식을 올렸다. 그 일이 알려져 정문을 세웠다.
김경손(金敬孫) : 어려서부터 어버이를 효성으로 섬겼다. 집이 가난하여 남에게 빌려서 맛있는 음식을 마련하
였고,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슬퍼하기를 예의 정도를 넘었다. 어머니가 8년 동안 병을 앓는데 약을 다리면 먼저
맛을 보았고, 돌아가신 뒤에는 죽을 쑤어 먹으며 묘막에서 지냈는데 한 번도 집에 들르지 않았으니 그때 나이가
70여 세였다. 금상 23년에 정문을 세웠다.
제영 서리 맞은 누런 잎은 말안장에 가득하네 : 윤여형(尹汝衡)의 시에, "산 길에 가을바람 새벽의 찬 기운을
빚어내고, 서리맞은 누런 잎사귀는 말안장에 가득하네." 하였다.
벼와 삼은 여름맞아 갈고 심도다 : 정인지(鄭麟趾)의 시에, "벼와 삼을 여름 만나 갈고 심는데, 초목은 가을도
되기 전에 이미 처량하도다." 하였다.
신증 구름은 물빛을 옹호하여 봄에 담담하도다 : 허침(許琛)의 시에, "벼슬길에 노는 심서(心緖) 반이나 꺾이었
는데, 지난 일을 생각하니 망연히 꿈이 희미하도다. 비단 휘장에는 금비취(金翡翠)를 수 놓지 못한 것 한스럽고
술통에는 옥동서(玉東西)를 자주 가늠질 하네. 구름은 물빛을 옹호하여 봄에 담담(澹澹)하고,
이슬은 꽃에 맺혀 새벽이 차갑다.
오봉(鰲峯)의 청릉피(淸綾皮)는 잘 있느냐, 몇 번이나 바람결에 옛 보금자리를 생각하였던고." 하였다.
[비고]
연혁 고종 32년에 군으로 고쳤다. 《文獻備考》
고읍 장계(長溪) : 북쪽으로 30리에 있다. 본래 백제의 백해군이었으며, 신라 경덕왕 16년에 벽명군(壁溟郡)
으로 고쳤다. 영현(領縣)이 둘이니 고택(高澤)ㆍ진안(鎭安)이며, 전주에 예속되었다.
고려 태조 23년에 장계로 고쳤다가 현종(顯宗) 9년에 남원에 예속시키고, 공양왕(恭讓王) 3년에 감무겸임장수
(監務兼任長水)를 설치했다.
본조에서는 태조 원년에 나누어서 장수현(長水縣)에 내속(來屬)시켰다.
방면 읍내(邑內) : 끝이 10리이다. 신남(身南) : 남쪽으로 처음이 5리, 끝이 30리이다.
신서(身西) : 서쪽으로 처음이
20리, 끝이 30리이다. 신북(身北) : 북쪽으로 처음이 10리, 끝이 30리이다.
수내(水內) : 본읍에서 끝이 15리이다.
임현내(任縣內) : 북쪽으로 처음이 30리, 끝이 40리이다. 임남(任南) : 북쪽으로 처음이 15리, 끝이 35리이다.
임북(任北) : 북쪽으로 처음이 40리, 끝이 60리이며, 우삼면(右三面)은 장택(長澤)의 고현(古縣)이다.
양악소(陽岳所)는 북쪽으로 60리이고, 천잠소(天蠶所)는 북쪽으로 15리이다.
○ 이방소(梨方所)는 북쪽으로 30리, 복흥소(福興所)는 서쪽으로 20리이다.
성지 고성(古城) : 성수산(聖壽山)에 있으며, 둘레가 9백 70척이다. 식천고성(食川古城)ㆍ침치 고성(砧峙古城).
창고 읍창(邑倉) : 읍내에 있다. 서창(西倉) : 본읍에서 30리인 신서면(身西面)에 있다.
계창(溪倉) : 본읍에서 30리인
임현(任縣) 안에 있다. 북창(北倉) : 본읍에서 20리인 신북면(身北面)에 있다.
교량 비전교(碑前橋) : 서남쪽으로 1리에 있다. 송탄교(松灘橋) : 서북쪽으로 30리에 있다.
원월장(院越牆) : 남쪽으로 4리에 있다. 홍복교(洪福橋) : 북쪽으로 30리에 있다.
완경교(翫景橋) : 북쪽으로 50리에 있다. 대평교(大坪橋) : 북쪽으로 30리에 있다.
토산 닥나무ㆍ뽕.
누정 응벽정(凝碧亭) : 읍내(邑內)에 있다. 청심정(淸心亭) : 북쪽으로 20리에 있다.
40권 순천도호부 順天都護府
동쪽은 광양현(光陽縣) 경계까지 15리요, 북쪽은 같은 현 경계까지 25리요, 남원부(南原府) 경계까지 60리요,
곡성현(谷城縣) 경계까지 36리이고, 남쪽은 바닷가까지 35리요, 서쪽은 낙안군(樂安郡) 경계까지 31리요,
동복현(同福縣) 경계까지 83리이고, 서울과의 거리가 8백 34리이다.
건치연혁 본래 백제 감평군(欿平郡)이다 : 감(欿)은 사(沙)라고도 하고 또 무(武)라고도 한다.
신라 때에 승평군(昇平郡)으로 고쳤고, 고려 성종(成宗) 14년에 승주연해군절도사(昇州兗海軍節度使)로 하였다 :
일명 승화(昇化)라고도 한다.
정종(靖宗) 2년에 다시 승평군을 만들었고,
충선왕(忠宣王) 원년에 높여서 승주목(昇州牧)을 두었다. 2년에 지금 이름으로 고치고 낮춰 부(府)를 삼았으며
본조에서도 그대로 했다. 태종(太宗) 13년에 도호부(都護府)를 삼았고, 세조조(世祖朝) 때 처음으로 진(鎭)을
두었다.
진관 군(郡)이 둘 : 낙안(樂安)ㆍ보성(寶成). 신증 낙안은 낮추어 현을 삼았다. 현(縣)이 다섯 : 광양(光陽)ㆍ
흥양(興陽)ㆍ능성(綾城)ㆍ동복(同福)ㆍ화순(化順). 신증 낙안ㆍ구례(求禮).
관원 부사(府使)ㆍ교수(敎授) : 각 1명.
군평 감평(欿平)ㆍ승평(昇平)ㆍ승주(昇州)ㆍ평양(平陽)ㆍ승화(昇化).
성씨본부 장(張)ㆍ전(全)ㆍ강(康)ㆍ도(陶). 박(朴)ㆍ김(金)ㆍ신(辛)ㆍ임(林)ㆍ황(黃)ㆍ임(任)ㆍ여(呂)ㆍ차(車)ㆍ
이(李) : 모두 속. 임(林) : 다른 곳에서 왔다. 부유(富有) 현(玄)ㆍ김(金)ㆍ심(沈)ㆍ이(李). 임(林)ㆍ박(朴)ㆍ
고(高) : 모두 다른 곳에서 왔다. 돌산(突山) 정(鄭)ㆍ윤(尹)ㆍ정(丁)ㆍ석(石)ㆍ노(盧). 여수(麗水) 김(金)ㆍ박(朴)ㆍ
신(辛)ㆍ임(林)ㆍ백(白)ㆍ도(陶)ㆍ김(金) : 모두 내(來). 삼일포(三日浦) 박(朴)ㆍ전(田). 강(康) : 경주(慶州).
이(李) : 광산(光山). 진례(進禮) 김(金)ㆍ전(田)ㆍ박(朴)ㆍ신(申). 별량(別良) 박(朴)ㆍ도(陶)ㆍ황(黃). 상이사
(上伊沙) 박(朴)ㆍ임(任)ㆍ여(呂). 적량(赤良) 현(玄)ㆍ정(鄭)ㆍ박(朴)ㆍ신(辛). 율촌(栗村) 김(金)ㆍ강(康)ㆍ
박(朴)ㆍ차(車). 소라(召羅) 조(曺)ㆍ박(朴)ㆍ신(辛)ㆍ전(田)ㆍ백(白). 하이사(下伊沙) 임(林). 죽청(竹靑) 도(陶).
두잉(豆仍) 박(朴)ㆍ신(辛). 두평(豆平) 임(任)ㆍ여(呂). 송림(松林) 백(白)ㆍ임(林). 정방(正方) 전(全)ㆍ박(朴)ㆍ
김(金). 가음(嘉音) 조(曺)ㆍ백(白)ㆍ박(朴)ㆍ신(辛) : 이평(梨坪)도 같다.
풍속 풍성하고 화려한 것을 숭상한다 : 지지(地志).
형승 소강남(小江南) : 산과 물이 기이하고 고와 세상에서 소강남(小江南)이라고 일컬는다.
한 면은 바다에 접했고 삼면은 산으로 이어졌다 : 김길통(金吉通)의 시에, "한 면은 바다에 접하니 바닷물 소리
가깝고, 삼면이 산에 연했으니 푸른빛 깊네." 하였다.
땅이 남명(南溟)에 다했다 : 조매(趙枚)의 시. 남쪽으로 큰 바다에 연했
으므로 곧 해적들이 왕래하던 길목이다 : 남수문(南秀文)의 기(記).
산천 인제산(麟蹄山) : 부의 남쪽 4리에 있는 진산(鎭山)이다. 일명 건달산(建達山)이라 하며 옛 성터가 있다.
조계산(曺溪山) : 부의 서쪽 80리에 있다.
계족산(鷄足山) : 부의 북쪽 45리에 있다. 난봉산(鸞鳳山) : 부의 서쪽 4리에 있는데 옛 성터가 있다.
원산(圓山) : 부의 북쪽 6리에 있으며, 삼봉(三峯)이 있다.
모후산(母后山) : 부유현(富有縣)에 있다. 또 동복현(同福縣)편 에도 보인다.
송광산(松廣山) : 부유현(富有縣) 서쪽에 있다. 진례산(進禮山) : 부의 동쪽 73리에 있다.
해룡산(海龍山) : 부의 남쪽 10리에 있다. 구현(鳩峴) : 부의 북쪽 30리에 있다.
미초률령(未草栗嶺) : 부의 북쪽 40리에 있는데 지형이 험한 요새지(要塞地)이다.
바다 : 부의 동남쪽 10리에 있다.
백야곶(白也串) : 부의 동쪽 60리에 있으니 둘레가 1백 15리인데 목장(牧場)이 있다.
낙수진(洛水津) : 부의 서쪽 70리에 있다.
잔수진(潺水津) : 부의 북쪽 60리 남원부(南原府) 유곡(楡谷) 경계에 있는데 요새지(要塞地)이다. 압록진(鴨綠津)
에서 동쪽으로 흘러 섬진강(蟾津江)으로 들어간다.
광탄(廣灘) : 근원이 둘 있으니 하나는 미초률령(未草栗嶺)에서 나오고, 하나는 구현(鳩峴)에서 나와 원산(圓山)
북쪽에서 합하고, 부의 동쪽 1리에 이르러 옥천(玉川)과 합하여 동쪽으로 흘러 용두포(龍頭浦)가 되었다.
옥천(玉川) : 성 남쪽 문 밖에 있으니 난봉산(鸞鳳山) 서쪽에서 나온다. 이사천(伊沙川) : 부의 서쪽 10리에 있다.
조계산(曹溪山) 동쪽으로 나와서 낙안군(樂安郡) 화현(火峴) 물과 합해서 동쪽으로 흐르다가 용두포(龍豆浦)로
들어간다.
내례포(內禮浦) : 부의 동쪽 49리에 있다.
성생포(成生浦) : 부의 동쪽 45리에 있으니 어량(魚梁)과 염전[鹽盆]이 있다.
굴포(掘浦) : 부의 동쪽 70리에 있으니 어량이 있다.
용두포(龍豆浦) : 부의 동쪽 20리에 있으니 어량이 있다.
동산포(東山浦) : 부의 동쪽 25리에 있으니 어량과 염전이 있다.
만흥포(萬興浦)ㆍ기질을포(其叱乙浦)ㆍ탄잠포(呑潛浦)ㆍ성창포(城倉浦)ㆍ
조음포(助音浦) : 모두 부의 동쪽 60리에
있다. 마두포(馬頭浦) : 부의 동쪽 30리에 있고 어량이 있다.
용문포(龍門浦) : 부의 동쪽 55리에 있다. 며포(㫆浦) : 부의 동쪽 61리에 있다.
복포(伏浦) : 부의 동쪽 45리에 있다. 사안포(沙岸浦) : 부의 동쪽 30리에 있다.
장성포(長省浦) : 부의 동쪽 60리에 있으니 고려 때 왜인(倭人)이 침입해서 여기에 이르자, 유탁(柳濯)이 군사를
거느리고 나가 치니 적들이 쳐다만 보다가 그대로 군사를 이끌고 돌아갔다. 이에 군사들이 크게 기뻐하며 노래
를 지었다.
유포(柳浦) : 부의 동쪽 30리에 있다.
돌산도(突山島) : 부의 동쪽 1백 17리 되는 바다 가운데에 있으니 둘레가 1백 35리이고 목장(牧場)이 있다.
수태도(愁太島) : 돌산도(突山島) 서쪽에 있으니 둘레가 2백 리이다. 송도(松島) : 수태도 동쪽에 있다.
백야도(白也島) : 부의 남쪽 바다 가운데에 있으니 둘레가 20리이다.
제리도(齊里島) : 백야곶(白也串) 동쪽에 있다.
개도(蓋島) : 제리도(齊里島) 동쪽에 있으니 둘레가 20리이다.
대니지도(大你只島) : 개도 남쪽에 있으니 둘레가 1백 50리이다.
소니지도(小你只島) : 대니지도(大你只島) 서쪽에 있으니 둘레가 1백 리이다. 금주도(金珠島)ㆍ
운입이도(雲入伊島) : 모두 부의 남쪽에 있으니 둘레가 1백 50리이다.
제참도(除參島) : 운입이도 북쪽에 있으니 둘레가 1백 리이다. 대경도(大京島)ㆍ
소경도(小京島) : 모두 며포(㫆浦) 남쪽에 있다.
다리도(多里島) : 소경도(小京島) 동쪽에 있으니 둘레가 1백 5리이다.
대내발도(大乃發島) : 다리도(多里島) 남쪽에 있으니 둘레가 1백 리이다.
소내발도(小乃發島) : 대내발도 동쪽에 있다.
대횡간도(大橫看島)ㆍ소횡간도(小橫看島)ㆍ금오도(金鼇島) : 둘레가 2백 리이니 모두 소내발도 남쪽 30리에
있다.
아마도(阿磨島) : 금오도(金鼇島) 서쪽에 있으니 둘레가 1백 리이다.
감물도(甘勿島)ㆍ안록도(安鹿島) : 모두 돌산현(突山縣)에 있다.
이로도(伊老島) : 백야곶(白也串) 서쪽에 있다. 소도(蔬島)ㆍ갈도(葛島) : 모두 복포(伏浦) 동남쪽에 있다.
가을두말소도(加乙頭末小島) : 복포(伏浦) 남쪽에 있다. 다로도(多老島) : 복포(伏浦) 북쪽에 있다.
대가씨도(大加氏島)ㆍ소가씨도(小加氏島) : 모두 미포(彌浦) 남쪽에 있다.
미각도(彌角島)ㆍ장고도(長鼓島) : 모두 며포(㫆浦) 서쪽에 있다. 대가장도(大加藏島)ㆍ소가장도(少加藏島)ㆍ
녹도(鹿島)ㆍ우도(牛島) : 모두 며포 동쪽에 있다. 장좌도(長左島)ㆍ
소리도(所里島) : 모두 미포(彌浦) 동남쪽에 있다.
둔도(芚島) : 백야곶(白也串) 서쪽에 있다. 저도(猪島) : 백야곶(白也串) 북쪽에 있다.
묘도(猫島) : 부의 동쪽에 있으니 둘레가 60리요, 목장(牧場)이 있다.
○ 정이오(鄭以吾)의 시에, "내 고향 어디 있는가, 구름과 물결 너머 아득해 알 수가 없네. 하늘과 땅 쳐다보고
굽어보니 넓기도 하다. 백년 동안 기쁘고 슬픈 것 반반일세. 나루터에 봄 물결은 넓고, 배 창에 저넉 달은 느리게
떠오른다. 남아로 태어나 나라를 도울진대, 어찌 반드시 태평한 때만 만나겠는가." 하였다.
하우산도(下亏山島) : 동산포(東山浦) 동쪽에 있다. 상우산도(上亏山島) : 동산포(東山浦) 북쪽에 있다.
말개도(末介島) : 며포(㫆浦) 북쪽에 있다.
사안도(沙岸島)ㆍ섭도(攝島)ㆍ궁도(弓島) : 모두 사안포(沙岸浦) 동쪽에 있다.
우아리도(亏兒里島) : 사안포 서쪽에 있다. 벌탕도(伐蕩島) : 사안포 서북쪽에 있다.
눌도(訥島)ㆍ외도(外島) : 모두 마두포(馬頭浦) 동쪽에 있다.
토산 조기ㆍ숭어ㆍ농어ㆍ오징어ㆍ문어ㆍ병어ㆍ낙지ㆍ전복ㆍ도루묵ㆍ굴ㆍ대하ㆍ홍합ㆍ자하ㆍ게ㆍ해삼ㆍ
미역ㆍ김ㆍ모시ㆍ자기ㆍ유자ㆍ대나무ㆍ죽전(竹箭) : 묘산도(卯山島)와 시중당(侍中堂)ㆍ상이사리(上伊沙里)ㆍ
하이사리(下伊沙里) 등지에서 난다. 치자ㆍ매실ㆍ생강ㆍ표고ㆍ송이버섯. 차 : 조계산(曺溪山)에서 난다.
○ 이제현(李齊賢)의 사송광승기다(謝松廣僧寄茶) 시에, "갑자기 문 두드리고 대소쿠리 보내는데 놀랐더니,
향기롭고 신선한 것 얻으니 옥고(玉胯)보다 낫다. 향기 맑으니 일찍 한식전 봄에 딴 것이요,
빛이 고우니 아직도 숲 아래 이슬 머금은 듯. 돌 솥에 솔바람 소리 울고, 사기 사발에 젖같은 방울 떠오른다.
산곡(山谷 송나라 문장 황산곡(黃山谷))의 운룡(雲龍 차 이름)을 기록한 것 용납하랴.
설당(雪堂)주D-001의 월토(月兎 차 이름)가 부끄러움을 깨닫노라." 하였다.
성곽 읍성(邑城) : 돌로 쌓았는데 둘레가 3천 3백 83척이요, 높이가 15척이며 안에 못 4개와 우물 4개가 있다.
수군절도사영성(水軍節度使營城) : 부의 동쪽 80리에 있다. 돌로 쌓았는데 둘레가 3천 3백 65척이요, 높이가
13척이다.
돌산포성(突山浦城) : 돌로 쌓았는데 둘레가 2천 3백 13척이요, 높이가 13척이다.
관방 좌도 수군절도사영(左道水軍節度使營) : 내례포(內禮浦)에 있으니 옛적엔 만호(萬戶)가 있었는데,
성종(成宗) 11년에 만호를 없애고 절도사영(節度使營)을 두었다.
돌산포영(突山浦營) : 부의 동쪽 79리에 있다.
수군만호(水軍萬戶) 한 명이 있다. 신증 금상(今上) 18년에 만호를 없애고 권관(權管)을 두어 본부(本部)의
진군(鎭軍)을 나누어 지키게 했다.
여수석보(麗水石堡) : 둘레가 1천 4백 79척이요, 높이가 10척이며 안에 우물 세 개가 있다.
절도사(節度使)가 군사를 나누어 지켰다. 신증 가정(嘉靖) 임오년에 이를 없애고 돌산포(突山浦)로 옮겼다.
신증 방답진(防踏鎭) : 부의 동쪽 1백 70리에 있으니 금상(今上) 18년에 적이 다니는 길이요,
긴요한 곳이라 해서 진(鎭)을 두고 첨사(僉使) 1명을 두었다.
장군도성(將軍島城) : 좌수영(左水營) 앞 2리에 있으니 수사(水使) 이량(李良)이 쌓았다.
봉수 돌산도 봉수(突山島烽燧) : 서쪽으로 백야곶(白也串)에 응하고 북쪽으로 진례산(進禮山)에 응한다.
백야곶 봉수(白也串烽燧) : 부의 동쪽 1백 리에 있으니 서쪽으로 흥양(興陽) 팔전산(八巓山)의 봉수와 응하고
동쪽으로 돌산도(突山島)의 봉수와 응한다.
진례산 봉수(進禮山烽燧) : 남쪽으로 돌산도 봉수에 응하고 북쪽으로 광양(光陽) 건대산(件臺山) 봉수에 응한다.
성황당산 봉수(城隍堂山烽燧) : 부의 동쪽 10리에 있으니 동쪽으로 광양 건대산 봉수와 응하고 서쪽으로는 다만
관문(官門)에 보고한다.
궁실 객관(客館) : 정통(正統) 2년에 부사(府使) 박환(朴煥)이 세웠다.
○ 남수문(南秀文)의 기(記)에, "객관 집을 짓는 것이 비록 왕정(王政)과는 관계가 없는 것 같으나, 그래도 세상
의 흥하고 쇠하는 것은 볼 수가 있다. 고려 말년에 정치는 잘못되고 나라는 위태로와 왜구 침입이 극렬하여 깊이
쳐들어와서 경기(京畿)에까지 이르니, 바다에 연한 수천 리 땅이 버려져 적의 소굴이 되었는데, 순천(順天)이
화를 가장 참혹하게 당해서 빈터만 남고 들에는 쑥대만 우거졌으니, 가위 한심한 일이었다.
성조(聖朝 이씨 조선)가 일어나자 문화가 밝고 무력에 위엄이 있어 섬 오랑캐가 공물(貢物)을 바쳐 화친하니,
변방 백성들이 베개를 높이 베고 생업을 즐길 수 있었다. 이에 이 부(府)도 충실하여져서 폐허는 성과 해자가
되고 쑥대밭이 변하여 동네[閭井]가 되어, 인구의 많음과 물산(物産)의 풍부함이 남쪽 고을에서 제일이
되었다.
또 우리 후(侯)같은 어진 태수(太守)를 얻어서 백성들을 애무하고 보호하는 여가에 또 부지런하게 황폐해졌던
것을 다시 일으키는 데 마음을 써서 백성들을 번거롭게 하지 않고도 공관(公館)을 새롭게 하여, 보고 구경하기에
웅장하게 하기를 이와 같이 하였으니, 저 고려 말년의 판탕(板蕩)하였던 때와 비교하면 어떻다 하겠는가.
내 여기에서 더욱 국가의 승평(昇平)한 혜택이 깊은 것을 느꼈노라. 나는 사관(史官 역사를 기록하는 관원)이라
후의 이번 일이 실상 세상 형편에 관계되는 터인즉 감히 즐겨 쓰지 않을 수 있으리요. 후의 이름은 환(煥)이니
정유년에 무과에 장원하고, 정사의 재주가 있어 가는 곳마다 성적과 명예가 뚜렷이 나타났으며 뜻이 커서 공명
(功名)을 스스로 기약했다." 하였다.
누정 선화루(宣化樓) : 객관(客館) 동쪽에 있다.
○ 성임(成任)의 시에, "절(節)을 잡고 와서 바다 위의 구역을 순회할 적에 때때로 가장 높은 누각 바람 난간에
의지했네. 산이 비 지나간 뒤에 푸르기가 소라[螺]빛이요, 물이 성 남쪽을 둘렀으니 푸른 옥이 흐르는 듯.
천리 길손의 근심은 풀 자라듯이 자라나고 백년 인간사는 구름처럼 부질없네. 문서 더미속에 얼굴빛 늙어지니,
허연 수염 쓸쓸하게 또 가을이 왔네." 하였다. 만월정(滿月亭) : 여수현(麗水縣) 남쪽 장성포(長省浦) 조그만 섬
위에 있으니, 남쪽으로 큰 바다에 임해 있다.
학교 향교 : 부의 동쪽 7리에 있다. 신증 지금은 성 서쪽 3리에 옮겨져 있다.
역원 양률역(良栗驛) : 부의 남쪽 4리에 있다.
덕양역(德陽驛) : 부의 동쪽 63리에 있다. 낙수역(洛水驛) : 부의 서쪽 73리에 있다.
○ 석선탄(釋禪坦)의 시에, "강 위의 봄빛 날마다 돌아가라 재촉하니, 가는 버들에 남은 햇빛 붙들어 매기 어려
워라. 다정한 나비들은 꽃 사이로 날고, 뜻이 있는 원앙새는 물을 차면서 나르네." 하였다.
연지원(蓮池院) : 부의 북쪽 5리에 있다. 건천원(乾川院) : 부의 북쪽 15리에 있다.
심원(深院) : 부의 북쪽 30리에 있다. 신점원(薪岾院) : 부의 북쪽 50리에 있다.
잔수진원(潺水津院) : 잔수진(潺水津) 언덕에 있다. 고양원(高陽院) : 부의 서쪽 50리에 있다.
신당원(神堂院) : 부의 서쪽 65리에 있다. 광천원(廣川院) : 부의 서쪽 75리에 있다.
이제원(梨濟院) : 부의 서쪽 85리에 있다. 남원(南院) : 부의 남쪽 5리에 있다.
동백원(冬栢院) : 부의 남쪽 30리에 있다. 구음곡원(仇音谷院) : 부의 남쪽 35리에 있다.
동원(東院) : 부의 동쪽 5리에 있다. 성생원(成生院) : 부의 동쪽 40리에 있다.
무상원(無常院) : 부의 동쪽 65리에 있다. 내례원(內禮院) : 부의 동쪽 87리에 있다.
불우 정혜사(定慧寺) : 계족산(鷄足山)에 있으니 절에 부처의 치사리가 있다.
○ 고려 중 충지(冲止)는 본래 장원(壯元) 위원개(魏元凱)이다. 여러 요직을 거친 뒤에 중이 되어 이름을 원감
(圓鑑)이라 하고 이 절에서 살았다. 일찍이 어떤 시에, "누가 알리, 계족산 속 늙은이가 예전에 용두(龍頭 장원
(壯元)) 모임에 상빈(上賓)이던 것을." 하였다. 또 이르기를, "물병과 바릿대 들고 처음 이 봉우리에 와서 머물
렀더니, 쇠하고 병든 지금에는 이미 놀기에도 지쳤네. 돌에 떨어지는 빠른 냇물 옥을 부수듯이 맑은 소리 나고,
구름 속 층층 산은 차갑게 가을을 일으키네. 올라와 노는 흥이 천 바위 위에 뜨는 달을 보며 일어나고 늙어
돌아온 즐거움이 일만 구렁 흐르는 물에 넘치네. 적막한 산집에 소유하는 것 없으니, 손이 오면 오직 작은 마루
그윽한 곳에서 대접하네." 하였다.
그가 죽자 문한학사(文翰學士) 승지(承旨) 김훤(金晅)이 임금의 명령으로 그 비명(碑銘)을 지었다.
대광사(大光寺) : 모후산(母后山)에 있다.
○ 김극기(金克己)의 시에, "붉은 햇빛 고개로 나오자 숲 속 안개 걷혔는데, 발길따라 그윽한 곳 찾으니 앉아서
세상일 잊었네. 무질서한 돌 천 덩어리에 구름 물결이 튀고, 한줄기 폭포수에 옥 무지개 날아오른다.
숲 사이 비 지나가니 꽃은 머리 무거워 처지고, 시내 밑에 바람 돌아오니, 버들은 힘없이 바람따라 흔들린다.
스스로 우습다. 내 속된 발길 깨끗한 이곳을 더럽히니, 일천 바위 일만 개울 반드시 서로 기롱하고 있으리."
하였다.
송광사(松廣寺) : 일명 대길상(大吉祥)이니 조계산(曺溪山)에 있다.
○ 고려 중 충활(沖奯)이 처음에 남성아원(南省亞元)주D-002으로서 몸을 빼어 송광사에 가서 중이 되어 도를
닦았다. 최이(崔怡)가 지주사(知奏事)가 되었을 제 편지를 써서 차(茶)와 향과 능엄경(楞嚴經)을 보냈다.
사자(使者)가 돌아갈 제 편지 답장을 써 달라 하니, 대사는 말하기를, "내 이미 세상과 인연을 끊었는데 무엇
하러 편지를 내왕한단 말인가." 했다.
그러자 사자는 억지로 재촉하고 또 시를 지어 주니, 대사는 곧 여기에 차운(次韻)하기를, "수척한 학은 고요히
소나무 위 달빛 속에 앉았고, 한가한 구름은 가볍게 고개 위의 바람을 따라 흘러가네. 이 가운데 이 면목(面目)
천리가 같으리니, 어찌 다시 새로이 말을 만들어 통하리." 하고, 끝내 편지 답장을 하지 않았다.
그 뒤에 나옹(懶翁) 역시 이 절에 있었고 의발(衣鉢)을 무학(無學)에게 전했다.
○ 이색(李穡)의 시에, "높고 높은 수선사(修禪社) 멀리 송광산(松廣山)에 있네. 현판을 대길상(大吉祥)이라
썼는데 용이 대들보 사이에 기어다는 듯. 임천(臨川)이 헌 붓을 잡으니, 조과(琱戈)가 빛이 차갑네. 연경(燕京)이
눈 안에 있으니, 돌에 새긴 것 응당 닳지 않았으리. 큰 공적 비할 데 없으니, 아름다운 이름 무궁한 데까지 드리
우리." 하였다.
신증 이색의 〈침계루(枕溪樓)〉시에, "구름 헤치고 한 번 침계루에 오르니, 문득 인간 만사를 잊는 듯하네.
한나절 올라갔다 바로 돌아가니, 내일 아침 말에 오르면서 다시 고개 돌이키리." 하였다.
○ 동부(洞府)가 깊고 깊어 세상 티끌 멀리 했는데 산 중은 일 없어 도를 이야기할 줄 아네. 훗날 복지(福地)를
어느 곳에서 찾을꼬, 흰 돌 맑은 시내 자주 꿈속에 들어오리." 하였다. 선암사(仙巖寺) : 조계산에 있다.
○ 김극기(金克己)의 시에, "적적한 산 속 절이요, 쓸쓸한 숲 아래의 중일세. 마음속 티끌은 모두 씻어 없앴고,
지혜의 물[智水]은 맑기도 하네. 8천 성인(聖人)에게 예배하고 담담한 사귐은 삼요(三要)의 벗일세.
내 와서 뜨거운 번뇌[熱惱] 식히니, 마치 옥병속 얼음 대한 듯하네." 하였다.
사묘 사직단 : 현의 서쪽에 있다. 문묘 : 향교에 있다. 성황사 : 진례산(進禮山)에 있다. 여단 : 현의 북쪽에 있다.
해룡산사(海龍山祠) : 인물(人物) 편 아래에 보인다.
고적 팔마비(八馬碑) : 부사(府使) 최석(崔碩)이 임기가 차서 비서랑(秘書郞)으로 들어갔다. 부의 고사(故事)에,
"태수(太守)가 바뀌어 돌아가면, 반드시 말 8필을 주었다. 최석이 돌아갈 제 고을 사람들이 말을 주면서, '이 중
에서 좋은 말을 고르라.' 하였다. 최석은 웃으면서 말하기를, '말이 서울에 가면 족할 뿐이지 무얼 고른단 말인가.'
하고, 집에 돌아와서는 그 말을 도로 돌려보냈다. 이에 고을 사람들이 이것을 받지 않으니, 최석은 말하기를,
'내가 너의 고을에 있을 때에 말이 새끼를 낳은 것까지 데려왔으니, 이것은 내가 욕심이 있은 것이라.' 하고,
그 새끼까지 돌려보내니, 이런 뒤로부터는 말을 주는 폐단이 없어졌다. 고을 사람들이 그 덕을 칭송하여 비석을
세우고 팔마비라 이름했다. 세월이 오래 되어 비석이 땅에 넘어지니,
뒤에 최원우(崔元祐)가 다시 세우고 시 짓기를, '승평(昇平)에 오고가느라 계절이 바뀌었는데, 보내고 맞노라
농사 짓는 시기 뺏은 것 부끄러워라. 뒤에 전할 덕이 없다고 말하지 말라, 다시 최군(崔君)의 팔마비를 일으켜
세웠노라.' 했다." 하였다.
여수 폐현(麗水廢縣) : 부의 동쪽 60리에 있으니, 본래 백제 원촌현(猿村縣)이던 것을 신라 때에 해읍현(海邑縣)
으로 고치고 내속시켰다.
고려에서 지금 이름으로 고치고 충정왕(忠定王) 10년에 현령(縣令)을 두었으며, 본조(本朝) 태조(太祖) 5년에
도로 내속시켰다. 돌산 폐현(突山廢縣) : 본래 백제 돌산현(突山縣)이던 것을 신라 때에 여산(廬山)으로 고쳐
내속시켰다가, 고려에서 다시 옛이름으로 회복했으니, 곧 돌산조(突山鳥)이다.
부유 폐현(富有廢縣) : 부의 북쪽 60리에 있으니, 본래 백제의 둔지현(遁支縣)이던 것을 신라 때에 지금 이름
으로 고쳐서 곡성군(谷城郡) 영현(領縣)으로 삼았고, 고려 초년에 내속시켰다.
해룡창(海龍倉) : 해룡산(海龍山)에 토성(土城) 옛터가 있는데, 세상에서 전하기를 세금을 받아서 바다로 운반
하던 곳이라 한다.
연자루(燕子樓) : 옛날에는 성 남쪽 옥천(玉川) 위에 있었으며 물에 걸쳐 다리를 놓았는데 지금은 누는 없어지고
다리만 남아 있어, 지금까지 연자루라고 일컫는다.
○ 옛날에 태수(太守) 손억(孫億)이 관기(官妓) 호호(好好)를 사랑했는데 뒤에 안부(按部 관찰사)가 되어 다시
가 본즉, 호호는 이미 늙어 있었다. 통판(通判) 장일(張鎰)이 시 짓기를, "서리와 달 처량한 연자루(燕子樓),
낭관(郞官) 한 번 가자 꿈만 유유하였네. 당시에 같은 자리 앉았던 손을 늙었다고 혐의하지 마소. 누 위의 가인
(佳人)도 역시 머리가 세었네." 하였다.
○ 서거정(徐居正)의 시에, "작아령(鵲兒嶺) 밖에 한 오수(獒樹)주D-003가 있고 연자루 앞에 팔마비(八馬碑)가
있네. 백발이 된 손랑(孫郞)을 그대는 웃지 말라.
두목지(杜牧之)도 일찍이 자지(子枝) 시주D-04를 지었다네." 하였다.
○ 옛사람의 시에, "누 밖에는 해마다 제비가 날아드는데, 누 안에는 호호(好好)가 이미 늙었네. 풍류 즐기던
인물들 이제는 어디 있는가, 한 곡조 비파(琵琶) 소리에 해는 반이나 저물었네." 하였다.
송림 부곡(松林部曲) : 부의 남쪽 25리에 있다. 하이사 부곡(下伊沙部曲) : 부의 남쪽 15리에 있다.
이촌 부곡(梨村部曲) : 부의 서쪽 70리에 있다. 죽청 부곡(竹靑部曲) : 부의 북쪽 20리에 있다.
적량 부곡(赤良部曲) : 삼일포(三日浦) 동쪽에 있다. 율촌 부곡(栗村部曲) : 부의 동쪽 30리에 있다.
별량 부곡(別良部曲) : 부의 남쪽 30리에 있다. 가음 부곡(嘉音部曲) : 부의 서쪽 90리에 있다.
진례 부곡(進禮部曲) : 여수현 동쪽 25리에 있다. 소라 부곡(召羅部曲) : 부의 동쪽 30리에 있다.
삼일포향(三日浦鄕) : 여수현(麗水縣) 북쪽에 있다. 정방향(正方鄕) : 부의 북쪽 70리에 있다.
상이사소(上伊沙所) : 부의 서쪽 20리에 있다. 두잉지소(豆仍只所) : 부의 남쪽 60리에 있다.
월곡소(月谷所) : 부유현(富有縣) 동쪽에 있다.
두평소(豆坪所)ㆍ조해소(調海所)ㆍ조수조(調水調) : 모두 여수현(麗水縣)에 있다.
명관고려 장일(張鎰) : 고종조(高宗朝) 때 판관(判官)이 되었는데 정사를 잘하기로 이름이 났다.
주열(朱悅) : 부사(府使)가 되었다. 능성(綾城) 인물(人物)편 아래에 자세하다.
최석(崔碩) : 충렬왕조(忠烈王朝)에 부사가 되었다.
인물후백제 김총(金摠) : 견훤(甄萱)에게 벼슬하여 인가 별감(引駕別監)에 이르렀고 죽어서는 부의 성황신
(城隍神)이 되었다. 고려 박영규(朴英規) : 후백제(後百濟)의 임금 견훤의 사위이다. 견훤의 아들 신검(神劍)이
견훤을 금산사(金山寺)에 가두자 견훤은 도망해서 금성(錦城)으로 달아나니, 태조(太祖)는 그를 맞아 높여서
상보(尙父)로 삼았다. 이에 영규는 가만히 그의 아내에게 말하기를, "열녀(烈女)는 두 남편을 다시 섬기지 않고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 법이라." 하고, 드디어 사람을 보내 태조에게 고하기를, "왕께서 만일 의기(義旗)
를 드시면, 청하건대 내응(內應)을 하겠습니다." 하였다. 태조가 크게 기뻐하여 그 사자(使者)에게 후히 물건을
주어 돌려보냈다. 그 뒤에 신검을 베자 태조는 영규에게 이르기를, "임금이 이미 나라를 잃었는데 경의 내외가
홀로 그 아비주D-005에게 정성을 다하고 겸하여 아름다운 공을 내게로 돌려보냈으니, 그 의리를 잊을 수 없도
다." 하고, 인하여 좌승(左丞) 벼슬을 주고 그의 두 아들도 벼슬을 시켰다.
죽어서 해룡산신(海龍山神)이 되었다. 박란봉(朴蘭鳳) : 죽어서 인제산신(麟蹄山神)이 되었다.
박천상(朴天祥) : 난봉의 자손으로 무예가 있어 공민왕(恭愍王)을 섬겨 평양부원군(平陽府院君)에 봉했다.
본조 박석명(朴錫命) : 천상의 손자다. 문예로 이름났었다. 태종조(太宗朝) 때 좌명공신(佐命功臣)으로서 지신사
(知申事)로 가장 오래 있었다. 평양부원군(平陽府院君)에 봉해졌고, 시호는 문숙(文肅)이다.
김승주(金承霔) : 무예로써 평양부원군에 봉해졌으며 시호는 양경(襄景)이다.
박중선(朴仲善) : 석명(錫名)의 손자이다. 무과(武科)에 장원으로 뽑혀 적개좌리공신(敵愾佐理功臣)에 참예했
으며 벼슬이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에 이르렀고 평양군(平陽君)에 봉해졌다.
신증 박원종(朴元宗) : 중선의 아들이다. 무과에 뽑혀 일찍이 높은 벼슬에 올랐다.
연산(燕山) 말년에 성희안(成希顔)ㆍ유순정(柳順汀)과 함께 계책을 세워 나라를 바로잡으니 책훈(策勳)되어
평성부원군(平城府院君)에 봉해졌고 벼슬이 영의정에 이르렀다. 시호는 무열(武烈)이다.
신증열녀본조 동질금(同叱今) : 정병(正兵) 오계손(吳戒孫)의 아내이다. 남편이 죽고 거상을 마치자 어느
사람이 장가들려 하니 목매어 죽었다. 금상(今上) 13년에 정문을 세웠다.
제영 마갈세심황소합(馬碣歲深荒蘇合) : 노숙동(盧叔仝)의 시에, "세월이 오래니 팔마비에 거친 이끼 끼었고,
연자루(燕子樓) 다리에 물결 출렁이니 떨어진 꽃 흐르네." 하였다.
산광당호열인심(山光當戶悅人心) : 성임(成任)의 시에, "꽃 그림자 발에 가득하니 손의 시름 없애주고, 산 빛
문에 들어오니 사람의 마음 즐겁게 하네." 하였다.
시월산다난만홍(十月山茶爛熳紅) : 김계희(金係熙)의 시. 청천곤곤포성류(淸川袞袞抱城流) : 김영유(金永濡)의
시에, "긴 대는 흐느적 거리며 주막을 싸고 빽빽하고, 맑은 내 졸졸 성을 안고 흐르네. 각(角) 부는 소리 멀리
주수소리와 합쳐 웅장하고, 물안개 기운 까마득히 바다 기운을 연해 뜨네." 하였다.
[비고]
연혁 고종 32년에 군으로 고쳤다. 《文獻備考》
효종조(孝宗朝)에 현(縣)으로 강등하였다가 이어 다시 승격시켰다.
정종(正宗) 10년에 현으로 강등하였다가 그 이듬해에 다시 승격시켰다.
방면 해촌(海村) : 동쪽으로 처음은 10리, 끝은 20리이다. 소안(蘇安) : 부(府)의 동쪽으로 끝이 20리이다.
장평(長平) : 서쪽으로 끝이 10리이다. 도리(道理) : 남쪽으로 처음은 5리, 끝은 15리이다.
상사(上沙) : 서쪽으로 처음이 15리, 끝은 30리인데 본래 상이사소(上伊沙所)이다.
하사(下沙) : 서남쪽으로 처음은 15리, 끝은 20리인데, 본래 하이사소(下伊沙所)이다.
황전(黃田) : 북쪽으로 처음은 25리, 끝은 40리이다. 쌍암(雙巖) : 북쪽으로 처음은 30리, 끝은 60리이다.
월등(月燈) : 북쪽으로 처음은 40리, 끝은 60리이다.
별량(別良) : 서남쪽으로 처음은 20리, 끝은 40리인데, 본래 별량 부곡(別良部曲)이다.
용두(龍頭) : 남쪽으로 처음은 15리, 끝은 40리이다.
소라포(召羅浦) : 동남쪽으로 처음과 끝이 30리인데, 본래 소라포 부곡(召羅浦部曲)이다.
삼일포(三日浦) : 동남쪽으로 처음은 50리, 끝은 80리인데, 본래 삼일포향(三日浦鄕)이다.
여수(麗水) : 동남쪽으로 처음은 60리, 끝은 1백 리인데, 본래 여수현(麗水縣)이다.
율촌(栗村) : 동남쪽으로 처음은 40리, 끝은 70리인데, 본래 율촌부(栗村部) 부곡이다.
서면(西面) : 서북쪽으로 처음은 10리, 끝은 30리이다.
가암면(佳巖面) : 서북쪽으로 처음은 60리, 끝은 90리이다.
송광(松廣) : 서쪽으로 처음은 60리, 끝은 1백 리이다.
○ 진례 부곡(進禮部曲)은 여수 동쪽으로 25리이다. 가음 부곡(嘉音部曲)은 서쪽으로 90리이고, 송림 부곡
(松林部曲)은 서쪽으로 25리이며, 이촌 부곡(梨村部曲)은 서쪽으로 70리이고, 죽청 부곡(竹靑部曲)은 북쪽으로
20리이다. 적량 부곡(赤良部曲)은 삼일포(三日浦)의 동쪽이다.
정방향(正方鄕)은 북쪽으로 70리고, 두잉지소(豆仍只所)는 남쪽으로 60리이며, 월곡소부(月谷所富)는 현의
동쪽이다. 두평소(豆坪所)ㆍ조해소(調海所)ㆍ조수소(調水所) 위의 세 소(所)는 모두 여수현(麗水縣)이다.
성지 읍성(邑城) : 둘레는 3천 3백 83척이고, 문은 4개 우물이 4개 못이 둘이다.
인제산 고성(麟蹄山古城)ㆍ난봉산 고성(鸞鳳山古城) : 모두 옛터가 있다.
해룡창 고성(海龍倉古城) : 흙으로 쌓은 옛터가 있다.
장군 도성(將軍島城) : 성종(成宗) 갑인년에 수사(水使) 이량(李良)이 쌓았다.
영이 좌수영(左水營) : 동남쪽으로 80리이다. 성종(成宗) 11년에 수군절도영(水軍節度營)을 내례포(內禮浦)에
설치하였다.
○ 성 둘레는 3천 3백 36척이고, 옹성(瓮城 성을 다시 한번 두른 성)이 아홉, 문이 4개, 우물이 7개, 못[池]이
하나, 창(倉)이 10개, 고(庫)가 3개이다. 관원 전라좌도 수군절도사(全羅左道水軍節度使). 중군(中軍) :
즉 수군우후(水軍虞侯)이다. 각 1명. 속읍 순천(順天)ㆍ장흥(長興)ㆍ찰안(察安)ㆍ흥양(興陽)ㆍ광양(光陽)ㆍ
보성(寶城). 속진 방답사(防踏蛇)ㆍ잔여도(淺呂島)ㆍ녹도(鹿島)ㆍ발포(鉢浦)ㆍ회령포(會寧浦)ㆍ고돌산(古突山).
누정 완경루(㣪輕樓)ㆍ망해루(望海樓)ㆍ포하정(抱河亭)ㆍ대변정(待變亭)ㆍ고소대(姑蘇臺)ㆍ진남관(鎭南館).
본영(本營)과 속읍(屬邑)은 진(鎭)에 속해 있는데, 각기 전선(戰船) 80 척이 있다.
○ 전영(前營) : 인조조에 설치하였다.
○ 전영장(前營將)이 1명이다. 철종(哲宗) 갑인년에 본부사(本府使)로 하여금 겸임하게 하였다.
○ 속읍은 순천ㆍ장흥ㆍ낙안(樂安)ㆍ보성ㆍ진도(珍島)ㆍ강진(康津)ㆍ동복(同福)ㆍ흥양ㆍ광양ㆍ해남(海南)이다.
진보 방답진(防踏鎭) : 돌산도(突山島) 가운데 있으며, 거리는 남쪽으로 1백 20리이고, 수영(水營) 동남쪽으로
40리이다. 중종 18년에 요충지(要衝地)로서 진(鎭)을 설치하고 성을 쌓았는데, 창고가 20개이고 수군동첨절사
(水軍同僉節使)가 1명이다.
고돌산보(古突山堡) : 동남쪽으로 75리이다. 성종(成宗) 19년에 진을 설치하고 성을 쌓았는데,
둘레는 2천 3백 13척이다. 중종 18년에 만호를 혁파하고 권영(權營)을 설치한 후에 별장(別將)을 없앴다.
수군별장(水軍別將) 1명이 있다.
혁폐 내례포진(內禮浦鎭) : 성종(成宗) 11년에 만호를 혁파하고 좌수영(左水營)을 설치하였다.
여수보(麗水堡) : 여수고현(麗水古縣)에 있으며 성의 둘레는 1천 4백 79척이고 우물이 3개이다.
중종 17년에 혁파하여 돌산보(突山堡)에 합하였다.
창고 창(倉)이 7개 : 부내(府內)이다. 북창(北倉) : 북쪽으로 40리이다. 해창(海倉)ㆍ
외창(外倉) : 모두 남쪽으로 20리이다. 석보창(石堡倉) : 여수고현(麗水古縣)이다.
제민창(濟民倉) : 영종(英宗) 계미년에 아홉 읍에 속하여 설치하였는데 지금은 없어졌다.
목장 곡화장(曲華場) : 남쪽으로 80리이다. 감목관(監木官)이 1명이다. 돌산도장(突山島場)ㆍ묘도장(猫島場).
진도 잔수진(潺水津) : 북쪽으로 60리이며, 구례(求禮)의 경계이고 압록진(鴨綠津)의 하류이며, 요해처이다.
낙수진(洛水津) : 서북쪽으로 70리이며 정자천(亭子川)의 하류이다.
교량 연자교(燕子橋) : 남문(南門) 밖이다. 우선교(噢仙橋) : 동문 밖이다. 월등교(月燈橋) : 북쪽으로 40리이다.
광청교(廣淸橋) : 서쪽으로 80리이다. 이사천교(伊沙川橋) : 서남쪽으로 15리이다.
동상포교(東床浦橋) : 동남쪽으로 40리이다.
토산 닥나무ㆍ뽕ㆍ옻칠ㆍ유자ㆍ석류ㆍ매실ㆍ개암ㆍ치자.
누정 관풍루(觀風樓)ㆍ망경루(望京樓)ㆍ주변루(籌邊樓) : 모두 읍내이다.
연자루(燕子樓) : 옥천(玉川) 가에 있다. 우선정(噢仙亭) : 동쪽으로 20리이다.
만월정(滿月亭) : 여수(麗水) 옛 현의 남쪽이다.
사원 옥천서원(玉川書院) : 명종 갑자년에 건립하고 인조 무신년에 사액하다.
김굉필(金宏弼) : 문묘(文廟)편에 보라. ○ 충민사(忠愍祠) : 선조 경자년에 건립하고 동년(同年)에 사액하였다.
이순신(李舜臣) : 아산(牙山) 편에 보라.
이억기(李億祺) : 전주(全州) 사람이다. 선조 정유년에 전라우수사(全羅右水使)로 전사하였으며 병조 판서
(兵曹判書)를 추증하였다.
안홍국(安弘國) : 순흥(順興) 사람이며 정유연에 보성 군수(寶城郡守)로서 전사하였는데 좌찬성(左贊成)을 추증
하였고 시호는 충현(忠顯)이다.
○ 정충사(旌忠祠) : 숙종 갑자년에 건립하였으며 병인년에 사액하였다. 장윤(張潤) : 진주편에 보인다.
[주 D-001] 설당(雪堂) : 소동파(蘇東波)를 말하는데 그가 황주(黃州)에 귀양가 있을 때 조그마한 집을 짓고
벽에 설경을 그려 붙였으므로 설당이라고 하였다.
[주 D-002] 남성아원(南省亞元) : 남성(南省)은 예조(禮曹)를 말하는 것이고, 아원(亞元)은 과거에 두 번째로
합격하였다는 말이다.
[주 D-003] 오수(獒樹) : 남원(南原)에서 주인에게 충성을 다하다가 죽은 개를 파묻고 그 무덤에 나무를 심고
그것을 오수라 한다 하였는데, 여기에 나온 것은 알 수 없다. 서거정이 잘못 알고 쓴 듯하다.
[주 D-04] 자지(子枝) 시 : 당 나라 두목(杜牧)이 어린 소녀가 지극히 미인인 것을 보고 너무 어렸으므로 후일
다시 찾기로 약속하였는데, 어떻게 하다가 10년이 지나 찾았더니, 이미 시집가서 아이가 둘이나 되었다.
그래서 푸른 잎새가 그늘을 이루었고 열매가 가지에 가득하다[綠葉成陰子滿枝]라는 시를 짓고 돌아갔다고 한다.
[주 D-005] 그 아비 : 박영규(朴英規)는 견훤의 사위였으므로 그와 같이 말하였다.
낙안군 樂安郡
동쪽은 순천부(順天府) 경계까지 14리이고, 북쪽은 같은 부 경계까지 23리이며, 남쪽은 흥양현(興陽縣) 경계
까지 25리이고, 서쪽은 보성군(寶城郡) 경계까지 25리이며, 서울과의 거리가 8백 98리이다.
건치연혁 본래 백제 분차군(分嵯郡) : 분사(分沙)라고도 한다. 신라 때에 고쳐서 분령군(分嶺郡)을 삼았고.
고려에서는 지금 이름 : 양악(陽岳)이라고도 한다. 으로 고쳐서 나주(羅州)에 소속시켰다.
명종(明宗) 2년에 감무(監務)를 두었다가 뒤에 다시 군(郡)으로 삼았는데, 본조에 와서도 그대로 했다.
관원 군수ㆍ훈도 : 각 1명. 신증 금상(今上) 10년에 군 사람 중에 제 어미를 죽인 자가 있어서 낮추어
현(縣)을 삼았다.
관원 현령(縣令) : 1명.
군명 분차(分嵯)ㆍ분사(分沙)ㆍ부사(浮槎)ㆍ분령(分嶺)ㆍ낙천(洛川)ㆍ양악(陽岳).
성씨본군 박(朴)ㆍ오(吳)ㆍ영(寧)ㆍ이(李)ㆍ김(金)ㆍ임(任) : 속(屬). 군지(軍知) 백(白) : 속(屬).
품어(品魚) 오(吳) : 속(屬). 가용(加用) 김(金). 이(李) : 속(屬).
형승 동쪽으로 개운산(開雲山)을 바라보고 서쪽으로 금오산(金鰲山)이 군이 끝나는 곳까지 있다 :
이석형(李石亨)의 기(記).
○ 금오산은 능성현(綾城縣)에 보인다. 큰 멧부리는 북쪽을 누르고 푸른 바다는 남쪽을 연했다 :
손순효(孫舜孝)의 기(記).
산천 금전산(金錢山) : 군의 북쪽 1리에 있는 진산(鎭山)이다. 개운산(開雲山) : 군의 동쪽 10리에 있다.
금화산(金華山) : 군의 서쪽 10리에 있으니 일명 존자산(尊者山)이다.
멸악산(滅惡山) : 군의 동쪽 5리에 있으니 남쪽에 화현(火峴)이 있다.
서천(西川) : 군의 서쪽 5리에 있으니 금전산 서쪽에서 나와서 남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
동천(東川) : 금전산에서 나와서 동쪽으로 군의 동쪽 4리를 거쳐 개운산에 이르러 서쪽으로 서천과 합친다.
바다 : 군의 남쪽 15리에 있다. 장암포(場巖浦) : 군의 남쪽 30리에 있으니 어량과 염전[鹽盆]이 있다.
장도(獐島) : 둘레가 23리이다. 지주도(蜘蛛島) : 둘레가 13리이니 소를 치는 목장이 있다.
여음주도(女音朱島) : 크고 작은 두 섬이 있으니 큰 섬은 둘레가 10리이고 작은 섬은 둘레가 5리이다.
장고도(長鼓島) : 둘레가 1리이다. 해도(蟹島) : 둘레가 5리이다. 가차라도(加次羅島) : 둘레가 1리이다.
남매우도(娚妹友島) : 둘레가 1백 17보이다. 응도(鷹島) : 둘레가 1백 50리이다.
귀사라도(歸沙羅島) : 둘레가 2리이다. 월음도(月音島) : 둘레가 2리이다.
이화주지도(伊火走只島) : 둘레가 3리이다. 말을구지도(末乙仇之島) : 둘레가 3리이다.
말개도(末介島) : 둘레가 1백 40보이다. 이상 여러 섬들은 모두 군의 남쪽 바다에 있다.
토산 숭어ㆍ민어ㆍ병어ㆍ오징어ㆍ낙지ㆍ부레ㆍ굴ㆍ대하(大蝦)ㆍ표고ㆍ송이ㆍ유자ㆍ석류ㆍ감ㆍ대나무.
죽전(竹箭) : 군의 서쪽 옥산(玉山)과 군 남쪽 제원동(濟院洞) 군지리(軍知里) 등지에서 난다. 치자ㆍ닥ㆍ차ㆍ
꿀ㆍ백화사(白花蛇)ㆍ복령(茯苓).
성곽 읍성(邑城) : 돌로 쌓았으니 둘레가 1천 5백 92척이요, 높이가 8척이며 샘 2개와 못 2개가 있다.
봉수 개운산 봉수(開雲山烽燧) : 남쪽으로 흥양현(興陽縣) 팔전산(八殿山)에 응한다.
궁실 객관(客館) : 경태(景泰) 원년에 군수 이인(李茵)이 세웠다.
○ 이석형(李石亨)의 기(記)에, "낙안(樂安)은 큰 고을이다. 동쪽으로 개운산(開雲山)을 바라보고 서쪽으로
금오산(金鰲山이 군의 끝까지 가며 남쪽으로 큰 바다에 임해 있고 북쪽으로는 금전산(金錢山)을 웅거하고 있다.
땅은 넓고 백성이 많이 살며 한 지방이 평평하게 뻗쳐 있어 남방의 형승지(形勝地)로는 이곳이 제일이다.
전에 왜적이 침입하여 백성들이 모두 달아나자 기름진 땅이 쑥대밭이 되었다.
땅을 잃게 되고 왜적의 침입은 더욱 심하여 장차 회복하기에도 겨를이 없었거늘 어찌 공관(公館)이 있을 수 있었
겠는가. 그 뒤 얼마 안 되어 비록 그 땅은 도로 찾았으나 백성은 아직도 모여들지 않았다.
고을 사람으로 절제사(節制使)가 된 김윤길(金贇吉)이 부민(部民)들을 거느리고 토성(土城)을 쌓았고,
군수 신원절(愼原節)이 옛터에 의거하여 관사를 지었으나, 그때는 초창기여서 규모가 좁고 누추했는데 이젠
세월이 오래되고 보니 무너진 것이 더욱 많았다. 경오년에 하빈(河濱) 이인(李茵)공이 군에 군수로 왔는데 정사
가 잘 다스려지고 송사가 간략해서 백 가지 폐했던 것이 모두 일어났다. 그 이듬해에 무리를 모아 묻고 의논하여
옛 제도를 더하고 새롭게 하며 재목을 구하고 기와를 구워 이에 공관을 짓는데 세로 몇 칸이고 가로 몇 칸이어서
화려하지 않고 누추하지 않아 사신을 접대하고 교령(敎令)을 시행하며 아전과 백성들의 모이는 것이 모두 여기
에서 할 수 있으니 모두 서로 경사롭게 여겼다." 하였다.
신증 허종(許琮)의 시에, "맑은 가을 경치 날마다 새로우니, 강호(江湖)에 한가한 몸이 되었으면 하네.
사업은 능히 만년을 전하지 못하나마 문장은 다만 삼신(三辰)을 움직이리.
당년 관해(關海)에 아기(牙旗) 세운 손은 옛날 승명전(承明殿)에서 조서(詔書) 초잡던 신하일세. 혜강(嵆康 삼국
시대 위(魏) 나라 사람으로 죽림 칠현의 한 사람)이 백안(白眼)이 많다고 따지 말라. 예로부터 세상엔 거짓이 참
으로 행세한다네." 하였다.
누정 빙허루(憑虛樓) : 객관 동쪽에 있다.
○ 손순효(孫舜孝)의 기에, "성화(成化) 4년 무자년에 내 친구 이군이 와서 이 고을을 다스렸다.
그 이듬해에 폐단은 없어지고 정사는 잘 처리되어 백성들이 기꺼이 부역하려 하였다. 이 고을에 누대가 없어
내왕하는 사신을 위로할 데가 없는지라, 이에 누 4칸을 동헌(東軒) 모퉁이에 세웠는데 사치하지 않고 누추하지도
않다. 나에게 부탁하여 이름을 짓고 또 기를 쓰라 하니, 이에 이름을 빙허라 하였다. 대개 누는 사람과 비교해 말
하면 곧 마음이니, 누는 몸의 거처하는 곳이요, 마음은 몸의 주인이다.
누가 비었으면 능히 만 가지 경치를 용납할 것이요, 마음이 비었으면 능히 여러 가지 선한 것을 용납할 것이다.
옛사람의 시에, '마음이 대[竹]와 함께 비었다.
' 하였는데, 나도 또한 이르기를, '마음이 누와 함께 비었다.' 하노라. 물건은 비록 다를지라도 그 뜻은 한 가지
이다. 이 누에 앉으면 큰 멧부리는 북쪽을 누르고 푸른 바다는 남쪽에 면해 있고, 무성한 숲과 쭉쭉 뻗은 대가
좌우로 서로 푸르르며 이내 낀 멧부리와 안개 어린 섬이 멀고 가깝게 서로 바라다 보여, 봄이면 화창하고, 가을
이면 맑고, 여름에는 비오는 경치 좋고 겨울이면 눈오는 경치 좋다.
한두 사람 뜻맞는 사람과 더불어 함께 누 위에 앉아 옛일과 지금일을 얘기하고 웃으면서 건곤을 쳐다보기도 하고
굽어보기도 할 제, 밝은 달은 하늘 복판에 이르고 맑은 바람이 물 위에 불 제, 아희를 불러 술을 내오라 해서 달을
향해 묻고, 휘파람 불면 호호(浩浩)하고 양양(洋洋)해서 마치 허공에 의지하고 바람을 타 티끌 밖에 떠서 노는 것
같으니, 저 부귀가 나를 괴롭게 하는 것이나 빈천이 나를 궁하게 하는 것이나, 옳으니 그르니 헐뜯고 칭찬하는 것
이 또 제 어찌 내 가슴속에 끼어들리오.
그러나 한갓 빈 것이 한결같을 줄만 알고 그 마땅히 비어야 하는 것과 마땅히 비지 말아야 할 것을 알지 못하면
옳지 못하다. 대개 비었으면서 찬 것처럼 하면 이는 스스로 찬[自滿]것이요, 비어서 남에게 받으면 이는 낮으면
서도 남이 넘지 못할 것이니, 맹자(孟子)의 이른바 천지 사이에 가득찼다는 말과 자사(子思)의 이른바 높다랗게
하늘에 닿았다는 것이 모두 똑같이 빈 데에서 오는 것이니라.
주인이 말하기를, '옳다.' 하므로 이에 여기에 쓰노라." 하였다.
신증 쌍청루(雙淸樓) : 곧 성 남쪽 문에 있는 누이다.
학교 향교 : 군의 북쪽 1리에 있다. 신증 지금은 현의 동쪽 2리에 옮겨져 있다.
역원 낙승역(洛昇驛) : 군의 서쪽 9리에 있다. 사근관원(沙斤館院) : 군의 동쪽 12리에 있다.
옥산원(玉山院) : 군의 남쪽 5리에 있다. 유둔원(油芚院) : 군의 남쪽 18리에 있다.
신장원(新場院) : 군의 서쪽 11리에 있다. 요광원(要光院) : 군의 북쪽 19리에 있다.
신증 좌슬현원(左瑟峴院) : 현의 서쪽 18리에 있다.
불우 동화사(桐華寺) : 개운산(開雲山)에 있다. 금둔사(金芚寺) : 금전산(金錢山)에 있다.
징광사(澄光寺) : 금화산(金華山)에 있다.
○ 김돈중(金敦中)의 시에, "우연히 산 가 절에 이르니, 향 연기 속에 한 방이 열렸네. 숲이 깊으니 오직 대와
잣나무요, 지경 고요하니 티끌과 먼지 끊어졌네. 속인(俗人)의 귀로 중의 말 듣고 근심어린 창자에 술잔 들어
가네. 산뜻하게 맑고 상쾌한데 하물며 밝은 달빛 비쳐옴이랴." 하였다.
○ 김극기(金克己)의 시에 "절은 높고 높은데 서 있으니, 어느 해에 경치 골라 지었던가. 깊이 가니 기이한 지경
끝까지 가고, 깨끗이 앉았으니 번거로운 마음 씻어지네. 좋은 차[荈]는 눈[雪]이 찻잔에 번득이고 맛난 술은
안개가 잔에 어리네. 맑은 바람 옥병(玉柄)주D-001을 따라서 삽삽(颯颯)하게 사람에게 스치네." 했다.
사묘 사직단 : 군의 서쪽에 있다. 문묘 : 향교에 있다. 성황사 : 군의 남쪽 15리에 있다. 여단 : 군의 북쪽에 있다.
고적 군지 부곡(軍知部曲) : 군의 남쪽 25리에 있다. 가용소(加用所) : 군의 남쪽 23리에 있다.
품어소(品魚所) : 군의 동쪽 29리에 있다. 초천소(草川所) : 군의 동쪽 50리에 있다.
개령소(開寧所) : 군의 동쪽 10리에 있다.
명환본조 권극지(權克知)ㆍ하숙산(河叔山) : 군수가 되어 맑고 절개 있고 굳세고 과감한 것으로 몸가짐을 삼았
으니 아전들은 두려워하고 백성들은 사랑했다.
인물고려 김주(金湊) : 과거에 급제하여 공민왕(恭愍王) 때에 성균 직강(成均直講)을 거쳐 벼슬이 문하평리
(門下評理) 겸 대사헌(大司憲)에 이르렀다. 김수(金隨) : 문예로 뛰어났고 낙천군(洛川君)에 봉해졌다.
본조 김윤길(金贇吉) : 재력(材力)이 사람 중에 뛰어나 병졸에서 일어나 여러 벼슬을 거쳐 수군절도사(水軍節
度使)에 이르렀으며 왜군과 여러 번 싸워 이겨서 벼슬이 검교정승(檢校政丞)에 이르렀다. 시호는 양혜(襄惠)
이다.
제영 현고다기경(縣古多奇境) : 김극기(金克己)의 시에, "고을이 오래되어 기이한 지경 많으니, 강과 산이 사방
으로 연했네. 갈매기 있는 곳 가에 깊고 얕은 물이요, 기러기 옆에 길고 짧은 연기로세. 이슬 풀 푸른 빛이 처음
물들고, 서리맞은 숲 붉게 불타는 듯. 간 곳마다 석양 경치 볼 만하니, 일찍이 몇 사람이나 이걸 곱게 여겼던가."
했다.
[비고]
연혁 선조 8년에 다시 승격하였다.
방면 읍내(邑內) : 끝이 10리이다. 동서(東西) : 처음은 3리, 끝은 15리이다.
초천(草川) : 동쪽으로 처음은 10리이고, 끝은 20리이다. 고읍(古邑) : 서쪽으로 10리이다.
남상(南上) : 서남쪽으로 30리이다. 남하(南下) : 남쪽으로 20리이다. 서면(西面) : 20리이다.
○ 군지부곡(軍知部曲)은 당(唐)이 백제를 멸한 후 설치하였으며 군지(軍支)는 풍주(豐州) 영현으로 하였는데
남쪽으로 25리이다. 가용소(加用所)는 남쪽으로 33리이다. 품어소(品魚所)는 동쪽으로 29리이다.
단천소(單川所)는 동쪽으로 15리인데 지금은 면이 되었다. 개령소(開寧所)는 동쪽으로 10리이다.
창고 읍창(邑倉) : 읍내(邑內)이다. 해창(海倉)ㆍ선소창(船所倉) : 모두 군의 남쪽 해변이다.
목장 장도(獐島) : 말[馬]을 기른다. 지주도(蜘蛛島) : 소[牛]를 기른다.
교량 석교(石橋) : 동문(東門) 밖이다. 단교(斷橋) : 옛 읍면(邑面)이다. 선근교(善根橋) : 남쪽 아랫면이다.
토산 옻나무ㆍ뽕나무ㆍ유자ㆍ매실ㆍ호도.
[주 D-001] 옥병(玉柄) : 예전 진(晉) 나라 사람들은 손에 불자(拂子)를 들고 그것을 휘두르며 얘기하였는데,
그 불자를 지극히 사치하게 자루를 옥으로 만들었다. 여기서도 옥으로 만든 불자를 말한다.
보성군 寶城郡
동쪽은 낙안군 경계까지 43리이고, 남쪽은 흥양현(興陽縣) 경계까지 43리이며,
서쪽은 장흥부(長興府) 경계까지 18리이고, 북쪽은 능성현(綾城縣) 경계까지 24리,
동복현(同福縣) 경계까지 52리이니, 서울과의 거리는 8백 28리이다.
건치연혁 본래 백제(百濟) 복홀군(伏忽郡)이던 것을 신라(新羅) 때에 지금 이름으로 고쳤으며 고려 성종(成宗)
15년에 패주 자사(貝州刺史)로 고쳤다. 뒤에 다시 보성군(寶城郡)으로 삼고 본조에서는 그대로 했다.
권원 군수ㆍ훈도 : 각 1명.
군명 복홀(伏忽)ㆍ산양(山陽)ㆍ패주(貝州).
성씨본군 박(朴)ㆍ오(吳)ㆍ강(康)ㆍ선(宣)ㆍ화(和). 지(智) : 제천(堤川). 조양(兆陽) 소(蘇)ㆍ유(庾)ㆍ임(林)ㆍ
전(全). 복성(福城) 문(文)ㆍ노(盧)ㆍ임(林). 국(鞠) : 혹은 도(陶), 또는 혁(革)이라고 한다. 장(章). 며력(㫆力)
이(李). 야촌(也村) 표(表). 사어(沙於) 오(吳)ㆍ신(申).
산천 덕산(德山) : 군의 북쪽 5리에 있는 진산(鎭山)이다. 복치산(伏雉山) : 군의 북쪽 25리에 있다.
가야산(伽倻山) : 군의 동북쪽 13리에 있다. 중봉산(中峯山) : 군의 동북쪽 30리에 있다.
중조산(中條山) : 군의 동쪽 28리에 있다. 주월산(舟越山) : 군의 동쪽 17리에 있다.
존자산(尊者山) : 군의 동쪽 28리에 있다. 몽중산(夢中山) : 군의 남쪽 10리 장흥부(長興府) 경계에 있다.
오봉산(五峯山) : 군의 남쪽 30리에 있다.
정자천(亭子川) : 군의 북쪽 8리에 있으니, 일명은 죽천(竹川)으로서 장흥부(長興府) 사자산(獅子山)에서
나와서 동북쪽으로 흐르다가 순천부(順天府) 낙수진(洛水津)이 되었다.
바다 : 조양현(兆陽縣)에 있다. 조양포(兆陽浦)ㆍ용두포(龍頭浦) : 모두 군의 동쪽 20리에 있다.
토도(兎島) : 군의 동쪽 40리에 있다.
토산 감[柿]ㆍ비자(榧子)ㆍ매산(莓山)ㆍ차ㆍ모시ㆍ닥[楮]ㆍ왕골풀ㆍ유자ㆍ오징어ㆍ숭어ㆍ병어ㆍ낙지ㆍ
준치ㆍ석굴ㆍ대하(大蝦)ㆍ표고ㆍ송이ㆍ수포석(水泡石)ㆍ대나무.
죽전(竹箭) : 군의 동쪽 초라산(草羅山)과 천동산(泉洞山)ㆍ조양(兆陽)ㆍ당산(堂山) 등에서 난다.
미역ㆍ감태ㆍ복쟁이ㆍ홍합ㆍ감합(甘蛤)ㆍ토굴ㆍ김ㆍ석류(石榴). 신증 보개어(寶開魚) : 왜진(倭津)에서 난다.
숫돌[礪石] : 군의 동쪽 빙천(氷川)에서 난다.
성곽 읍성(邑城) : 돌로 쌓았는데 둘레가 2천 9백 53척이요, 높이가 9척이며 그 안에 샘 4개와 못 2개가 있다.
조양현성(兆陽縣城) : 돌로 쌓았는데 둘레가 2천 2백 55척이요 높이가 7척인데 그 안에 우물 2개가 있고 군창
(軍倉)이 있다.
봉수 정흥사동봉 봉수(正興寺東峯烽燧) : 군의 남쪽 10리에 있으니 서쪽으로 장흥부(長興府) 전일현(全日峴)에
응하고 동쪽으로 흥양현(興陽縣) 장기산(帳機山) 북쪽에 응해서 다만 관문(官門)에 보고하기만 한다.
누정 열선루(列仙樓) : 객관(客館) 북쪽 옛 취음정(翠蔭亭)에 있으니 군수 신경(申經)이 다시 짓고 지금 이름으로
고쳤다. 신증 향사대(鄕射臺) : 군의 남쪽 2리에 있다.
학교 향교 : 군의 동쪽 1리에 있다.
역원 파청역(波靑驛) : 군의 동쪽 20리에 있다. 가신역(可申驛) : 군의 서쪽 12리에 있다.
사결원(沙結院) : 군의 동쪽 5리에 있다. 적현원(赤峴院) : 군의 동쪽 25리에 있다.
사지원(斜只院) : 군의 동쪽 45리에 있다. 여하현원(余下峴院) : 군의 동쪽 45리에 있다.
가신원(可申院) : 가신역(可申驛) 곁에 있다. 정자천원(亭子川院) : 군의 북쪽 7리에 있다.
수다원(水多院) : 군의 북쪽 17리에 있다. 초점원(草岾院) : 군의 동쪽 40리에 있다.
불우 대원사(大元寺) : 중봉산(中峯山)에 있다. 고려 중 원오(圓悟)의 부도(浮屠)가 있고 또 황희(黃喜)의 영당
(影堂)이 있다.
신흥사(神興寺) : 복치산(伏雉山)에 있다. 정흥사(正興寺) : 가야산(伽倻山)에 있다.
오봉사(五峯寺)ㆍ개흥사(開興寺) : 모두 오봉산(五峯山)에 있다. 봉갑사(鳳岬寺) : 중봉산(中峯山)에 있다.
일월사(日月寺) : 존자산(尊子山)에 있다.
사묘 사직단 : 군의 서쪽에 있다. 문묘 : 향교에 있다. 성황사 : 군의 서쪽 3리에 있다. 여단 : 군의 북쪽에 있다.
고적 조양 폐현(兆陽廢縣) : 군의 동쪽 30리에 있으니 본래 백제 때 동로현(冬老縣)이던 것을 신라 때에 지금
이름으로 고쳐서 분령군(分嶺郡)의 영현(領縣)으로 삼았고, 고려 때에 이에 속하였다.
본조 태조(太祖) 4년에 고흥현(高興縣)에 부쳤다가 세종(世宗) 23년에 다시 내속했다.
복성 폐현(福城廢縣) : 군의 북쪽 30리에 있으니, 본래 백제 파부리군(波夫里郡)이던 것을 신라 때에 부리(富里)
로 고쳐서 능성군(綾城郡) 영현(領縣)을 삼았더니 고려에 와서 지금 이름으로 고치고 이에 속했다.
중흥루(重興樓) : 옛터가 성 동쪽 1리에 있다. 야촌 부곡(也村部曲) : 군의 남쪽 10리에 있다.
사오향(沙於鄕) : 군의 남쪽 6리에 있다. 가연향(加淵鄕) : 군의 서쪽 7리에 있다.
적촌향(狄村鄕) : 군의 남쪽 20리에 있다. 며력소(㫆力所) : 군의 북쪽 15리에 있다.
포곡소(蒲谷所) : 군의 남쪽 20리에 있다. 금곡소(金谷所) : 군의 동쪽 10리에 있다.
군지역(軍知驛) : 군의 북쪽 30리에 있다. 민지역(民知驛) : 옛터가 군의 남쪽 5리에 있다.
명환고려 함유일(咸有一) : 인종조(仁宗朝) 때 나와서 군수가 되었는데 청렴하고 부지런해서 잘 다스린다는
소문이 있었다.
박원계(朴元桂)본조 김유양(金有讓)ㆍ이호성(李好誠) : 맑고 간결했다.
정식(鄭軾) : 청렴하고 곧으며 가혹하게 다스리지 않았다.
신증 조충손(趙衷孫) : 청렴하고 근신하며 학교를 일으켰다. 이효독(李孝篤).
인물고려 선윤지(宣允祉) : 군이 왜구의 침입을 받아 옮겨서 내지(內地)로 가서 살자 윤지가 안렴사가 되어
백성을 위로하고 재물을 모아 군 사람들을 안정시키니 지금까지 이를 칭찬한다.
본조 오몽을(吳蒙乙) : 고려 말년에 과거에 뽑혀 본조의 개국공신(開國功臣)이 되었고 벼슬이 이품(二品)에 이르
렀다. 선형(宣炯) : 무예(武藝)에 통달했고 또 시에 능했다. 세조조(世祖朝) 때 적개공신(敵愾功臣)으로서 유성군
(楡城君)에 봉해졌다. 오자경(吳子慶) :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세조조(世祖朝)의 적개공신이 되었고 보산군
(寶山君)에 봉해졌다.
제영 객정두절천봉외(客程斗折千峯外) : 김극기(金克己)의 시에, "푸른 옥병 속에 세월 한가로운데, 노는 사람
여기 이르러 돌아갈 줄 몰라라. 나그네의 길 일천 봉우리 밖에 굽어지고, 손님 맞는 집 한 물 건너편에 날아갈 듯
서있구나. 푸르고 부드러운 버들 둑에는 바람이 산들 불고, 붉어 놀란 꽃동산엔 비가 아롱지네. 흥이 깊어 다시금
아름다운 경치를 탐내어, 글 읊으며 주루(朱樓)에 의지해 다시 자세히 보네." 하였다.
사면 들에 곡식과 뽕나무 풍성해라 : 정곤(鄭坤)의 시. 뽕나무와 삼 10리 들에 구름과 연기 어둡고,
복숭아꽃 오얏꽃 일천 마을에 비와 이슬 무르익었네." 하였다.
[비고]
방면 용문(龍門) : 끝은 5리이다. 북내(北內) : 동쪽으로 처음은 25리이고, 끝은 30리이다.
무오(無於) : 동쪽으로 처음은 15리이고, 끝은 30리이다. 송곡(松谷) : 남쪽으로 처음은 10리이고, 끝은 20리이다.
여동(蘆洞) : 서쪽으로 처음은 10리이고, 끝은 20리이다. 옥암(玉巖) : 서쪽으로 처음은 5리이고, 끝은 20리이다.
대곡(大谷) : 동쪽으로 처음은 30리이고, 끝은 40리이다. 도촌(道村) : 남쪽으로 처음은 25리이고, 끝은 50리이다.
묘내(廟內) : 북쪽으로 처음은 20리이고, 끝은 50리이다. 대여(代如) : 북쪽으로 처음은 40리이고, 끝은 50리이다.
표오(標於) : 동북쪽으로 처음은 5리이고, 끝은 10리이다. 미륵(彌勒) : 북쪽으로 처음은 5리이고, 끝은 20리이다.
문전(文田) : 적전(樍田)이라고도 하며, 북쪽으로 처음이 40리이고, 끝은 60리이다. 백야(白也)
○ 사오향(沙於鄕)은 남쪽으로 6리에 있다. 가연향(加淵鄕)은 서쪽으로 7리에 있다.
추촌향(秋村鄕)은 남쪽으로 20리에 있다. 미륵소(彌勒所)는 북쪽으로 15리에 있다. 지금은 면(面)으로 되었다.
포곡소(浦谷所)는 남쪽으로 20리에 있다. 금곡소(金谷所)는 동쪽으로 10리에 있다.
야촌 부곡(也村部曲)은 남쪽으로 10리에 있다.
창고 읍창ㆍ죽림창(竹林倉) : 북쪽에 있다. 사창(社倉) : 동쪽에 있다. 북창(北倉) : 갈내면(楬內面)에 있다.
해창(海倉)ㆍ강소창(舡所倉) : 모두 동남쪽 바닷가에 있다.
교량 동원교(東院橋)ㆍ정자천교(亭子川橋).
사원 용산서원(龍山書院) : 선조 정미년에 세우고 숙종 정해년에 사액하였다.
박광제(朴光劑) : 자는 현재(顯哉)이고, 호는 죽천(竹川)이며, 진원(珍原) 사람이다. 벼슬은 군자감(軍資監)을
지냈으며, 좌승지(左承旨)에 증직되었다. 대계서원(大溪書院)
○ 효종 정유연에 세웠다가 숙종 갑신년에 사액하였다.
안방준(安邦俊) : 자는 사언(士彦)이며, 호는 은봉(隱峯)이니, 죽산(竹山) 사람이다.
벼슬은 공조 참의(工曹參議)를 지냈으며, 이조 참판에 증직되었다.
정충사(旌忠祠) : 숙종 정사년에 세웠다가 경오년에 사액하였다. 안홍국(安弘國) : 순천(順天)에 보인다.
오충사(五忠祠) : 순조 경인년에 사액하였다. 선윤지(宣允祉) : 안렴사(安廉使)이다.
선형(宣炯) : 공신(功臣) 유성군(楡城君)이다. 선거이(宣居怡) : 병사(兵使)이다.
선세강(宣世綱) : 안동 영장(營將)이다. 선약해(宣若海) : 수사(水使)이다.
능성현 綾城縣
동쪽으로 보성군 경계까지 46리, 남쪽으로 장흥부 경계까지 44리, 서쪽으로 남평현(南平縣) 경계까지 17리,
북쪽으로 화순현 경계까지 12리이고 서울과의 거리는 7백 58리이다.
건치연혁 본래 백제 이릉부리군(尒陵夫里郡) : 혹은 죽수부리(竹樹夫里) 또는 인부리(仁夫里)라 한다.
이던 것을 신라에서 지금 이름으로 고쳤고 고려 초년에 나주에 소속시켰었다. 인종 21년에 현령을 두었고
본조 태종 16년에 화순현을 합쳐서 순성현(順城縣)으로 고쳤다가 얼마 안되어 각각 복구시켰다.
관원 현령ㆍ훈도 : 각 1명.
궁실 연주(連珠)ㆍ이릉(尒陵)ㆍ죽수(竹樹).
성씨본현 구(具)ㆍ정ㆍ문ㆍ채ㆍ주ㆍ강 : 진주. 김 : 내(來).
산천 운산(雲山) : 현의 남쪽 1리에 있으니 진산(鎭山)이다. 연주산(連珠山) : 현의 동쪽 1리에 있다.
금오산(金鰲山) : 현의 동쪽 7리에 있으니 돌 성의 옛터가 있다. 중조산(中條山) : 현의 남쪽 57리에 잇다.
석천산(石泉山) : 현의 북쪽 15리에 있다. 천불산(千佛山) : 현의 서쪽 25리에 있다.
왜성산(倭城山) : 현의 남쪽 15리에 있다. 옛 성터가 있는데 왜적을 막기 위해서 쌓았기 때문에 이렇게 이름지은
것이다.
여점(呂岾) : 현의 동쪽 63리 보성군 경계가 있다.
차의천(車衣川) : 현의 북쪽 5리에 있으니, 여점(呂岾)에서 나와서 북쪽으로 흘러 나주 광탄(廣灘)으로 들어간다.
토산 석류ㆍ자기(磁器)ㆍ감ㆍ꿀ㆍ대나무ㆍ죽전 : 현의 북쪽 마산(馬山)에서 남. 차ㆍ송이버섯ㆍ
표고 신증 지황ㆍ천남성(天南星)ㆍ맥문동(麥門冬).
누정 봉서루(鳳棲樓) : 객관(客館) 동쪽에 있다.
○ 성임(成任)의 시에, "날마다 달려 잠시도 한가하지 못한데, 여기 오르니 다시 한 번 근심스런 안색 풀리네.
마을이 바다에 가까우니 봄이 항상 빨리 오고, 소나무와 대가 처마에 닿으니 여름에도 춥네. 발을 걷으니 산빛이
그림기둥에 스며들고 해가 비끼니 꽃 그림자는 새긴 난간에 올라오네, 손되어 무한히 집을 생각하는 마음,
글귀를 가지고 억지로 스스로 위안하네." 하였다.
○ 정창손(鄭昌孫)의 시에, "유람하는 데 지쳐서 잠시도 한가로이 머무를 곳 없더니 홀로 높은 루에 올라 한 번
얼굴을 펴네. 땅이 바다에 가까우니 봄빛 빨리 오고 산은 지리산에 연했으니 새벽 빛이 차네. 연못은 대 그림자
잠그고 꽃 뜰에 침노하고, 바람은 연꽃 향기 이끌어다가 약 난간[藥欄]에 보내네. 눈에 가득한 기이한 경치 시
읊고 휘파람부는데 이바지하니 손되어 시름짓는 마음 비로서 풀리네." 하였다.
신증 영벽정(映碧亭) : 연주산(演珠山) 밑에 있다.
○ 김종직(金宗直)의 시에, "연주산(連珠山) 위에 달은 소반 같은데, 초목에 바람이 불지 않고 이슬 차네.
천 뭉치 솜 같은 구름 모두 없어지려 하고 한 무더기 공문서(公文書) 볼 필요없네. 시절은 다시 중추(中秋) 아름
다운 것을 깨닫겠는데, 손의 회포 누가 오늘 밤 위안 될 줄 알았으리. 갈길은 또 서쪽 바다 따라 돌아가니,
손가락 끝으로 장차 게[蟹] 배꼽이나 쪼개리라." 하였다. 청흥정(淸興亭) : 현의 북쪽 3리에 있다.
○ 안침(安琛)의 시에, "능성(綾城) 천고(千古) 땅에, 소쇄한 한 정자 새로워라. 다릿가의 흰 돌이 사랑스럽고,
난간 밖 푸른 대가 어여뻐라. 강이 맑아 물고기 헤일 만하고, 뜰이 고요하니 새와 서로 친하네.
일어나서 홍진(紅塵)을 향해 가니, 도로 바쁜 사람 되네." 하였다.
학교 향교 : 현의 서쪽 2리에 있다.
역원 인물역(仁物驛) : 현의 남쪽 25리에 있다.
이야원(李陽院) : 현의 남쪽 40리에 있다. 여점원(呂岾院) : 현의 동쪽 60리에 있다.
부락암원(浮落巖院) : 현의 서쪽 15리에 있다. 대림원(大林院) : 현의 북쪽 30리에 있으며 누가 있다.
불우 쌍봉사(雙峯寺) : 중조산(中條山)에 있다.
○ 김극기(金克己)의 시에, "단청한 집이 붉고 푸른 숲 사이에 서로 비치니, 지경의 한가한 모습 속된 안목으로
예전에 보지 못하던 것일세. 학은 푸른 고공에 날아서 지둔(支遁 남북조 시대의 중)을 하직하고, 물고기 금빛
못에 놀면서 혜관(惠寬 혜시(惠施))에게 감사하네. 어지러운 봉우리는 옥잠같이 난간에 이르러 빼어났고 놀란
여울은 구슬패물처럼 뜰에 떨어지는 소리로세. 말하다가 갑자기 조계(曹溪) 물을 보니, 일만 길 하늘에 연해
노한 물결 일어나네."주D-001 하였다.
운주사(雲住寺) : 천불산(千佛山)에 있으니 좌우의 산등성이에 있는 석불(石佛)과 석탑(石塔)이 각각 1천 개이다.
또 석실(石室) 둘이 있어 석불(石佛)과 서로 등지고 앉았다. 개천사(開天寺) : 천불산(千佛山)에 있다.
인량사(人良寺) : 연주산(連珠山)에 있다. 석천사(石泉寺) : 석천산(石泉山)에 있다.
사묘 사직단 : 현의 서쪽에 있다. 문묘 : 향교에 있다. 성황사 : 현의 서쪽 5리에 있다. 여단 : 현의 북쪽에 있다.
고적 품평소(品平所) : 현의 남쪽 30리에 있다.
인물고려 주열(朱悅) : 어버지 여경(餘慶)이 현리(縣吏)로서 은사과(恩賜科)에 올랐다. 고종(高宗) 때에 과거에
뽑혀 남원사록(南原司錄)이 되고, 나주(羅州)ㆍ정주(靜州) 두 고을과 승평(昇平)ㆍ장흥(長興) 두 부(府)를 나가
다스려 모두 좋은 성적을 냈다. 원종(元宗) 때에 충청(忠淸)ㆍ경상(慶尙)ㆍ전라(全羅)를 연달아 나가 안렴사가
되어 위명(威名)을 날로 떨치니 사람들이 모두 두려워하고 공경했다. 벼슬이 지도첨의부사(知都僉議府事)에
이르고 시호는 문절(文節)이다. 성품이 활달하고 가산(家産) 늘리는 것을 일삼지 않아 비록 높은 벼슬에 이르러
서도 자기 몸을 한사(寒士)와 같이 가졌다. 사신이 되어 사방에 다녔어도 공정하고 청렴함이 한결같고 문장이
풍부하고 필법(筆法)이 또한 기이했다.
구예(具藝) :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이 면성부원군(沔城府院君)에 이르렀다.
본조 구치관(具致寬) : 구예(具藝)의 후손. 과거에 올라 세조(世祖) 때 좌익공신(佐翼功臣)에 뽑히고 능성부원군
(綾城府院君)에 봉해졌으며 벼슬이 영의정에 이르렀다. 성품이 바르고 엄하며 맑고 근신하여 산업(産業)을
일삼지 않고 나가면 장수가 되고 들어와서는 정승노릇을 하기 무릇 10여 년이었다. 시호는 충렬(忠烈)이다.
제영 가경옹금당(佳景擁金塘) : 김극기(金克己)의 시에, "곱고 고운 이슬 꽃 누에 엉키고, 연기 낀 풀 무성하고
푸르더라. 아름다운 경치 금당(金塘)을 감싸고 굽어보니 맑은 흥취 넉넉하네. 어떤 사람이 와서 시를 써 놓았나
또한 운치 영중(郢中)주D-002 곡조를 이루었네. 주옥같은 글귀에 화답하자니 녹록(碌碌)한 재주 부끄럽네."
하였다.
동학청유경물신(洞壑淸幽景物新) : 정창손(鄭昌孫)의 시에, "동학이 맑고 그윽하여 경치 새로우니 산에 가득한
솔과 대 사계절이 봄일세. 한 구역 연화(煙火) 참으로 선경(仙景)이니 아마도 이 도원(桃源)에 숨어 사는 사람
인가." 하였다.
[비고]
연혁 선조 27년에 다시 화순을 내합하였으며 광해주 3년에 나누었다. 인조 10년에는 인헌왕후 구씨(具氏)의
고향이라고 하여 능주목으로 승격하였다.
방면 주내(州內) : 끝이 5리이다. 금오(金鰲) : 동쪽으로 끝은 40리이다. 운룡(雲龍) : 동쪽으로 끝은 35리이다.
인물(人物) : 동남쪽으로 끝은 50리이다. 쌍봉(雙峯) : 동남쪽으로 끝은 55리이다.
웅남(熊南) : 서남쪽으로 끝은 50리이다. 석정(石亭) : 남쪽으로 끝은 25리이다.
개천(開天) : 남쪽으로 끝은 30리이다. 천태(天台) : 서남쪽으로 끝은 35리이다.
호암(虎巖) : 서쪽으로 끝은 40리이다. 망해(望海) : 서쪽으로 끝은 15리이다.
북면(北面) : 끝은 15리이다. ○ 품평소(品平所)는 남쪽으로 30리이다.
성지 금오산 고성 : 돌로 쌓은 옛터가 있다.
고성(古城) : 서쪽으로 3리이며 흙으로 쌓은 옛터가 있다.
고성(古城) : 남쪽으로 15리이며 고려 때에 왜적을 방어하기 위하여 쌓았으므로 이름이 왜성(倭城)이며 돌로
쌓은 옛터가 있다.
창고 읍창(邑倉)ㆍ동창 : 동남쪽으로 20리이며, 인물면에 있다. 서창 : 서쪽으로 30리이며 천태면에 있다.
교량 대교(大橋) : 북쪽으로 5리이다. 둔전교(屯田橋) : 동쪽으로 5리이다. 입교(笠橋) : 남쪽으로 20리이다.
토산 닥나무ㆍ뽕나무ㆍ옻나무.
사원 죽수 서원(竹樹書院) : 선조 경오년에 건립하고 같은 해에 사액하였다.
조광조 : 문묘 편을 보라.
양팽손(梁彭孫) : 자는 대춘(大春)이며, 호는 학포(學圃)이다. 제주 사람이고 벼슬은 교리(郊理)인데, 이조 판서
에 추증되었다. 포충사(褒忠詞) : 광해주 기유년에 건립하였고, 같은 해에 사액하였다.
최경회(崔慶會) : 진주(晉州) 편을 보라. 조현(曺顯) : 자는 희경(希慶)이고 호는 월헌(月軒)인데 능성인이다.
명종 을묘년에 달양권관으로서 절변산(節邊山)에서 순직하였는데 병조 참의에 추증되었다.
[주 D-001] 말하다가 갑자기 조계(曹溪) 물을 보니, 일만 길 하늘에 연해 노한 물결 일어나네." : 선교(禪敎)의
조계종(曹溪宗)을 말하는데 계(溪)라는 글자가 있으므로 그 교의 법리(法理)를 물에 비유하였다.
[주 D-002] 영중(郢中) : 영(郢)은 땅 이름이다. 어떤 사람이 영에서 노래를 부르는데 처음에는 평범한 유행곡을
불렀더니 같이 따라서 노래하는 사람이 수백 명이었으나 양춘백설(陽春白雪)이라는 격조 높은 노래를 불렀더니
아무도 따라 부르지 못하였다 한다. 그래서 격조 높은 노래를 영중곡(郢中曲)이라 한다.
광양현 光陽縣
동쪽은 경상도 진주 경계까지 58리, 남쪽은 바닷가까지 6리, 서쪽은 순천부(順天府) 경계까지 13리,
북쪽은 같은 부 경계까지 8리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8백 70리이다.
건치연혁 본래 백제 마로현(馬老縣)이던 것을 신라 때에 희양(晞陽)으로 고쳐서 승평군(昇平郡)에 부쳤고
고려에서 지금 이름으로 고쳐서 그대로 소속시켰다가 뒤에 감무(監務)를 두었으며 본조 태종 13년에 예에
의해 현감(縣監)으로 고쳤다.
관원 현감ㆍ훈도 : 각 1명.
군명 마로(馬老)ㆍ희양(晞陽).
성씨본현 김(金)ㆍ서(徐)ㆍ정(鄭)ㆍ전(田)ㆍ이(李)ㆍ유(柳)ㆍ강(康)ㆍ신(辛)ㆍ박(朴)ㆍ황보(皇甫).
아마대(阿磨代) 김ㆍ차(車)ㆍ최(崔). 본정(本井) 차(車)ㆍ최. 골약(骨若) 차ㆍ김 : 속(續).
형승 땅이 남쪽 바다에 닿았다 : 신영손(辛永孫)의 시.
산천 백계산(白鷄山) : 현의 북쪽 20리에 있는 진산(鎭山)이다. 산정상에 바위가 있고 바위 밑에 샘이 있으며 샘
밑에서 흰 구름이 때로 일어난다. 무릇 빌기만 하면 문득 영험이 있고 재계(齋戒)하는 것을 성실히 하지 않으면
샘이 마른다. 증산(甑山) : 현의 동쪽 30리에 있다.
가요산(歌謠山) : 증산(甑山) 남쪽 5리에 있다.
업굴산(業窟山) : 백계산(白鷄山)의 동쪽 지맥(支脈)이다. 바다 : 현의 남쪽 6리에 있다.
섬진(蟾津) : 남원부(南原府) 잔수진(潺水津)이 남쪽으로 흘러 진주(晉州) 화개현(花開縣)에 이르러 서쪽으로는
용왕연(龍王淵)이 되었는데 조수가 들어온다. 또 현의 남쪽 59리에 이르러 섬진(蟾津)이 되었는데 그 동쪽 언덕
이 곧 진주(晉州) 악양현(岳陽縣) 경계이다.
동남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가는데 고려 때에 이 물이 거꾸로 흐르는 삼대강(三大江)의 하나라 했다.
남포(南浦) : 현의 남쪽 2리에 있으니 어량이 있다. 골약포(骨若浦) : 골약소(骨若所)에 있다.
섬거포(蟾居浦) : 현의 동쪽 40리에 있다. 차의포(車衣浦) : 차의소(車衣所)에 있다.
거을망포(巨乙亡浦) : 현의 동쪽 59리에 있다. 보살포(菩薩浦)ㆍ천포(穿浦) : 모두 현의 동쪽 59리에 있다.
굴회도(掘會島)ㆍ전경도(田耕島)ㆍ송도(松島)ㆍ외도(外島) : 이상 섬은 모두 현의 남쪽 바다 가운데 있다.
거차도(居次島)ㆍ길도도(吉道島)ㆍ부용도(芙蓉島)ㆍ우도(牛島)ㆍ아지도(阿只島)ㆍ대안도(大安島)ㆍ아을대도
(阿乙代島)ㆍ말응우리도(末應于里島)ㆍ대소치도(大所致島)ㆍ중소치도ㆍ소소치도 :
이상 섬은 모두 현의 동쪽 바다 가운데 있다.
신증 동천(東川) : 현의 동쪽 5리에 있다. 서천(西川) : 현의 서쪽 4리에 있으니 근원이 모두 백계산(白鷄山)에서
나온다.
토산 은구어ㆍ오징어ㆍ조기ㆍ숭어ㆍ농어ㆍ병어ㆍ준치ㆍ낙지ㆍ왕새우ㆍ홍합ㆍ전복ㆍ미역ㆍ파래ㆍ김ㆍ생강ㆍ
석이버섯ㆍ꿀ㆍ표고ㆍ송이ㆍ차ㆍ감ㆍ닥ㆍ석류ㆍ유자ㆍ대나무ㆍ죽전(竹箭) : 섬거역(蟾居驛) 계곡산(戒谷山)
등에서 난다. 철(鐵) : 현의 동쪽 10리 목곡(木谷)에서 난다. 칠(漆)ㆍ울금(鬱金)ㆍ복령.
성곽 읍성(邑城) : 돌로 쌓았는데 둘레가 9백 74척이요 높이가 13척이며, 안에 우물 5개와 못 1개가 있다.
봉수 건대산(件臺山) 봉수 : 현의 동쪽 18리에 있으니 남쪽으로 순천부(順天府) 진례산(進禮山)에 응하고 서쪽
으로 같은 부 성황당산에 응한다.
누정 주변루(籌邊樓) : 현 성 남쪽 문루(門樓)이다. 옛날에는 망해루(望海樓)라고 하던 것을 영락(永樂) 무술
(戊戌)에 지금 이름으로 고쳤다. 권가루(勸稼樓) : 현의 남쪽 3리에 있다. 운주루(運籌樓) : 객관(客館) 동쪽에
있다.
○ 윤향(尹向)의 시에, "순유(巡遊)하다가 월(鉞)주D-001을 옛 성루(城樓)에 세워두니, 사업한 것 만리후(萬里侯)
라 칭하기 부끄러워라. 밭두렁에 있는 보리와 벼 풍년든 것을 알겠고, 발[簾]에 가득한 바람과 비는 잘못 가을
인가 놀라네. 여러 봉우리는 서쪽으로 구름 열린 밖에서 바라다 보이고, 큰 바다는 남쪽으로 땅이 다한 곳에서
보겠네. 날이 저물어 어둑어둑 연기와 안개 합하여 장안이 보이지 않으니 홀로 시름겹네." 하였다.
신증 암연정(巖淵亭) : 현의 동쪽 5리에 있다.
학교 향교 : 현의 북쪽 5리에 있다.
역원 익신역(益申驛) : 현의 동쪽 7리에 있다. 섬거역(蟾居驛) : 섬거포(蟾居浦) 위에 있다.
아마대원(阿磨代院) : 아臀대 부곡(阿磨代部曲)에 있다. 섬진원(蟾津院) : 섬진(蟾津) 언덕에 있다.
지장원(地藏院) : 현의 남쪽 3리에 있다.
불우 옥룡사(玉龍寺) : 백계산(白鷄山)에 있으니 당(唐) 나라 함통(咸通) 5년에 도선(道詵)이 세웠다.
○ 최유청(崔惟淸)이 지은 비문에, "사(師)의 휘(諱)는 도선이요, 속성(俗性)은 김씨이니 신라 영암(靈巖) 사람
이다. 그 세계(世系)의 부조(父祖)는 역사에 전하지 않는데 어떤 이는 태종대왕(太宗大王)의 서손(庶孫)이라고
한다. 어머니 강(姜)씨가 꿈에 누가 구슬 한 알을 주면서 먹으라고 하더니 드디어 태기가 있어, 달이 차자 훈채
와 비린 음식을 먹지 않고 오직 불경을 외우고 염불(念佛)하는 것으로 일을 삼았다. 아기를 낳자 보통 아이와
다르더니 나이 15세에 이르자 총명하며 숙성했고 기예(技藝)에 통했다.
드디어 머리를 깎고 월산(月山) 화엄사(華嚴寺)에 놀았는데, 여러 해가 되지 않아 문수(文殊)의 신묘한 지혜와
보현(普賢)의 현문(玄門)을 모두 빠짐없이 터득하니 학도(學徒)들이 모두 신총(神聰)이라고 여겼다.
문성왕(文聖王) 8년에 이르러 나이 20세가 되자 갑자기 혼자 생각하기를, '대장부가 마땅히 법을 떠나서 정(靜)
해야지 어찌 융통성 없이 문자 사이에서 머문단 말인가.' 하였다. 이때 혜철(惠徹)은 서당지장(西堂智藏)에게
법통(法統)을 전해 받아서 동리산(桐裏山)에 법석(法席)을 열었다. 사(師)는 이에 선문(禪門)에 들어가 제자가
되기를 청해서 이른바 설(說)함이 없는 설법(說法)과 법이 없는 법을 허심(虛心)으로 받고 투철히 깨달았다.
나이 23세에 천도사(穿道寺)에서 구족계(具足戒)를 받았고 이미 불법의 깊은 뜻을 통달하자, 다니는데 일정한
곳이 없이 구름과 안개를 밟고 자연에 임하여 그윽한 곳을 찾고 경치를 따라 다니며 게으르거나 쉬지 않았다.
운봉산(雲峯山) 아래에 동굴을 뚫고 좌선(坐禪)하기도 하고 혹은 태백암(太伯巖) 앞에 초막을 짓고 여름을 지내
기도 하여 도행(道行)의 감동되는 바에 신령스러운 기적이 자못 많았다. 희양현(曦陽縣) 백계산(白鷄山)에 옛 절
이 있으니 옥룡사(玉龍寺)이다. 사(師)는 전국을 돌아다니다가 여기에 이르러서 그윽한 경치를 사랑하여 당우
(堂宇)를 수리하고 깨끗이 개축하여 일생을 마치려는 뜻이 있어서 좌선(坐禪)하여 말을 잊은지 35년이었다.
헌강왕(獻康王)이 그 높은 덕을 공경하여 사신을 보내 맞아다가 궁중에 머물게 하였으나 얼마 되지 않아 서울에
있는 것을 즐거워하지 않고 돌아갈 것을 간청하여 본사(本寺)로 돌아갔다. 갑자기 하루는 제자를 불러 말하기를,
'내 장차 가리로다. 대개 인연이 있으면 왔다가 인연이 다하면 가는 것은 이치에 떳떳함이니 무엇을 슬퍼하리오.'
하고, 말을 마치자 입적(入寂)하니 때는 대당(大唐) 광화(光化) 원년 3월 17일이요 나이는 72세였다." 하였다.
또 김정언(金廷彦)이 지은 중 이엄(理嚴)의 비문이 있다.
송천사(松川寺)ㆍ운암사(雲巖寺) : 모두 백계산(白鷄山)에 있다.
사묘 사직단 : 현의 서쪽에 있다. 문묘 : 향교에 있다. 성황사 : 현 성 동쪽에 있다. 여단 : 현의 북쪽에 있다.
고적 아마대 부곡(阿磨代部曲) : 현의 동쪽 25리에 있다. 사오곡 부곡(沙於谷部曲) : 현의 동쪽 10리에 있다.
율곡 부곡(栗谷部曲) : 현의 동쪽 5리에 있다. 본정향(本井鄕) : 현의 동쪽 10리에 있다.
골약리 부곡(骨若里部曲) : 현의 동쪽 27리에 있다. 대곡소(大谷所) : 현의 동쪽 15리에 있다.
옥곡소(玉谷所) : 현의 동쪽 30리에 있다. 공촌소(孔村所)ㆍ다사천소(多沙川所) : 현의 동쪽 65리에 있다.
문현소(蚊峴所) : 현의 동쪽 60리에 있다. 공을도소(孔乙道所)ㆍ차의포소(車衣浦所) : 현의 동쪽 46리에 있다.
구량포소(仇良浦所) : 현의 동쪽 45리에 있다.
명환고려 윤택(尹澤) : 충정왕(忠定王) 초년에 나주 목사(羅州牧使)에서 강등되어 감무(監務)가 되었다.
일찍이 시에 이르기를, "온종일 군재(君齋)에 아무 일도 없으니, 망건 바람으로 이따금 다시 계당(谿堂)을 구경
하네." 하였다. 조정에 들어가서 밀직제학(密直提學)이 되었다.
인물고려 김황원(金黃元) : 선종조(宣宗朝) 때 사람. 어려서 과거에 합격하여 힘써 고문(古文)을 배워 해동(海東)
제일이란 이름을 들었다. 맑고 정직하며 권세에 아부하지 않았다. 이월(李軏)과 같이 한림(翰林)에 있으면서
문장으로서 이름이 나서 세상에서 김이(金李)라고 일컬었다. 뽑혀서 우습유 지제고(右拾遺知制誥)가 되고
나가서 경산(京山)의 수령이 되었다. 뒤에 예부시랑 국자좨주 한림학사 첨서 추밀원사(禮部侍郞國子祭酒翰林學
士簽書樞密院事)를 지냈다. 김약온(金若溫) : 힘써 배우고 과거에 올라 벼슬이 수사공 상주국(守司空上柱國)에
이르렀다. 성품이 공손하고 검소하며 청렴하고 고요하여 일찍이 자기의 부귀로서 사람에게 교만하게 굴지 않았
다. 그때 이자겸(李資謙)이 국구(國舅)로서 국가의 권력을 차지하니 선비들 중에 이로운 것을 좋아하는 자들이
다투어 그에게 붙었다. 그러나 약온(若溫)은 자겸(資謙)과 더불어 사촌형제가 되면서도 서론 가까이 하지 않았
으니 사람들이 그의 올바른 것을 지키는 것을 훌륭하게 여겼다.
이무방(李茂方) : 공민왕(恭愍王) 때에 밀직학사(密直學士)가 되었는데 임금은 무방(茂方)이 청빈(淸貧)하다
해서 쌀 50석을 주었으나 무방은 말하기를, "대신으로서 이유없이 받을 수가 없다." 하여 사양했다.
정당문학(政堂文學)을 배수했을 때 임금이 매양 말하기를, "정당(政黨)이 국가만 알고 자기집은 잊어버리며
권세를 두려워하지 않으니 비록 옛사람이라도 이보다 더할 수 없다." 하였다. 신우(辛禑)가 왕위에 오르자 무방
으로서 스승을 삼았다. 공민왕(恭愍王)이 기르던 비둘기가 궁중에 있어 우(禑)는 이것을 항상 좋아 했다.
무방이 서경(書經) 여오(旅獒) 편을 진강(進講)하다가 말하기를, "비둘기도 진기한 새이니 원컨대 기르지 마시
옵소서." 하니, 우는 명하여 비둘기를 내보냈다. 본조(本朝)에 들어와서 광양부원군(光陽府院君)이 되고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제영 우과서산상기신(雨過西山爽氣新) : 김극기(金克己)의 시에, 비가 서산을 지나니 서늘한 기운 새롭고, 서리
맞은 단풍, 이슬맞은 국화, 다시 봄이 돌아온 듯, 가을바람이 싸늘하여 이불과 베개 찬데,
푸른 숲 붉은 치마 점점 가까워질 것같네." 하였다.
지진창명근(地盡滄溟近) : 윤향(尹向)의 시에, "옛 성첩(城堞)이 산기슭에 의지했으니 동쪽과 서쪽 두 물이 나뉘
었네. 숲 속에 돌아오는 지친 새 어여쁘고, 멧부리에서 나오는 한조각 구름 사랑스러워. 육지 끝나니 바다 가깝고
하늘이 개었는데도 안개 어두워. 임금 계신 곳 점점 멀어지니, 돌아갈 꿈 다시 아득해라." 하였다.
연촌다록죽(煙村多綠竹) : 정인지(鄭麟趾)의 시에, "한해가 도중에 저무니 산천이 말 위에서 나뉘네. 연기 낀 마을
에 푸른 대 많고 가을 들에 누런 구름 누런 곡식 자욱하네. 술잔 잡으니 마음 오히려 장해지고, 글을 보니 눈이
어두워지려 하네. 난간에 의지하여 때로 혼자 서 있으니, 귀밑의 털 희어지는 것 탄식하네." 하였다.
염조어가접해방(鹽竈漁家接海傍) : 최수(崔修)의 시에, "어두운 안개 자욱한 옛 싸움터에 지금 요순(堯舜) 시절
맞아 한낮이로세. 변방 봉화(烽火) 일지 않아 백성들 편안히 자니, 소금 가마 어촌의 민가 바다에 접해 있네."
하였다.
바다가 어두우니 물은 구름에 연했네 : 이발(李潑)의 시에, "하늘이 개니 산은 달을 토하고, 바다가 어두위 물이
구름에 연했네." 하였다.
[비고]
연혁 선조(宣祖) 31년에 합하였다가 얼마 후에 다시 세웠다.
고종 32년에 군으로 고쳤다. 《文獻備考》
방면 우장(牛莊) : 동쪽으로 3리에 있다. 칠성(七星) : 서쪽으로 3리에 있다.
사라곡(沙羅谷) : 본래 사오곡(沙於谷). 부곡(部谷)은 동쪽으로 10리이고, 끝이 20리이다.
골약(骨若) : 본래 골약리(骨若里). 부곡은 동쪽으로 처음이 15리이고 끝이 30리이다.
월포(月浦) : 동쪽으로 처음은 50리이고, 끝은 60리이다. 진상(津上) : 동쪽으로 처음은 35리이고, 끝은 20리
이다.
진하(津下) : 동쪽으로 처음은 45리이고, 끝은 60리이다.
옥곡(玉谷) : 본래 옥곡소(玉谷所). 동쪽으로 처음은 25리이고, 끝은 35리이다.
미내(彌內) : 북쪽으로 처음은 5리이고, 끝은 30리이다. 인덕(仁德) : 남쪽으로 처음은 1리이고, 끝은 30리이다.
옥룡(玉龍) : 북쪽으로 처음은 5리이고, 끝은 30리이다.
다압(多鴨) : 동북쪽으로 처음은 50리이고, 끝은 90리이다.
○ 본래 정향(井鄕) 동쪽으로 10리에 있다. 아마대(阿磨代) 부곡은 동쪽으로 25리에 있다.
율곡(栗谷) 부곡은 동쪽으로 5리에 있다. 대곡소(大谷所)는 동쪽으로 15리에 있다.
다사촌소(多沙村所)는 동쪽으로 65리에 있다.
성현소(城峴所) 동쪽으로 60리에 있다. 차의포소(車衣浦所)는 동쪽으로 60리에 있다.
궤량포소(机良浦所)는 동쪽으로 45리에 있다. 공촌소(孔村所)ㆍ공을도소(孔乙道所).
성지 읍성(邑城) : 둘레는 9백 85보이며, 옹성(甕城)이 5개가 있고, 치성(雉城)이 4개가 있으며, 5개의 못[池]과
2개의 우물이 있다. 마로 고성(馬老古城) : 동쪽으로 7리이며, 둘레는 6백 리이다.
중흥산 고성(中興山古城) : 북쪽으로 10리에 있다. 불암산 고성(佛巖山古城) : 동쪽으로 50리에 있다.
진보 섬진보(蟾津堡) : 동쪽으로 60리에 있고, 섬진강의 입구에 있다.
○ 별장(別將)이 한 사람이다. 통제영의 관할지역이다.
창고 창(倉) 3 : 읍내에 있다. 외창(外倉) : 동쪽으로 40리에 있다. 강소창(舡所倉) : 현 동쪽으로 50리에 있다.
진보 섬진(蟾津) : 현 동쪽으로 60리에 있다. 즉, 하동 두치진(河東豆治津)이다.
토산 뽕나무ㆍ차ㆍ소금.
[주 D-001] 월(鉞) : 월(鉞)은 왕명을 받들고 나간 관리에게 임금이 하사한 큰 도끼이다.
구례현 求禮縣
동쪽으로 경상도(慶尙道) 진주(晉州) 경계까지 20리이고, 남쪽으로 순천부(順天府) 경계까지 9리이며,
서쪽으로 남원부(南原府) 경계까지 29리이고, 북쪽으로 같은 부 경계까지 9리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7백 80리
이다.
건치연혁 본래 백제 구차례현(仇次禮縣)이던 것을 신라에서 지금 이름으로 고쳐서 곡성군(谷城郡)에 소속
시켰고 고려 초년에 남원부에 붙였다. 인종(仁宗) 21년에 감무(監務)를 두었고,
본조 태종(太宗) 13년에 예에 의하여 현감(縣監)으로 고쳤다.
연산(燕山) 5년에 고을 사람 배목인(裵目仁)ㆍ문빈(文彬) 등이 참언(讖言)을 만들어 역모를 꾀하다가 죽음을
당하니 폐해서 부곡(部曲)을 삼아 남원(南原)에 소속시켰더니 금상(今上) 2년에 다시 현(縣)을 만들었다.
관원 현감ㆍ훈도 : 각 1명.
군면 구차례(仇次禮)ㆍ봉성(鳳城).
성씨본현 장(張)ㆍ도(陶)ㆍ손(孫)ㆍ전(全)ㆍ임(任)ㆍ진(陳). 박(朴) : 속(續). 황(黃) : 의창(義昌). 서(徐)ㆍ
양(梁) : 모두 다른 곳에서 왔다. 남전(南田) 임(林). 방광(放光) 유(劉). 사등촌(沙等村) 임(任). 정(鄭) : 속(續).
산천 지리산(智異山) : 현의 동쪽 8리에 있는 진산(鎭山) 이다. 남원부(南原部)편에 자세하다.
오산(鰲山) : 현의 남쪽 15리에 있다. 산 정상에 바위 하나가 있고 바위에 빈틈이 있는데 그 깊이를 헤아릴 수
없다. 세상에 전하기를, "중 도선(道詵)이 예전에 이 산에 살면서 천하의 지리(地理)를 그렸다." 한다.
봉성산(鳳城山) : 현의 서쪽 1리에 있다. 구연(九淵) : 현의 동남쪽 10리에 있다. 못 위에 1천 척이나 되는 험한
바위가 있는데 이것이 마치 병풍처럼 둘러있다.
압록진(鴨綠津) : 현의 서쪽 29리 곡성현(谷城縣) 경계에 있다.
잔수진(潺水津) : 현의 남쪽 9리 순천부(順天府) 경계에 있다.
용왕연(龍王淵) : 현의 동쪽 30리 진주(晉州) 화개현(花開縣) 경계에 있으니 곧 잔수진 하류이다.
광양현(光陽縣) 편에 자세하다.
토산 닥ㆍ치자ㆍ죽전(竹箭)ㆍ도루묵ㆍ송이버섯ㆍ석류ㆍ감ㆍ표고버섯ㆍ꿀ㆍ잣ㆍ호도ㆍ백화사(白花蛇)ㆍ
복령(茯笭)ㆍ지황(地黃)ㆍ영양각(羚羊角)ㆍ오미자ㆍ석이버섯.
성곽 읍성(邑城) : 돌로 쌓았는데 둘레가 4천 4백 81척이요, 높이가 13척이며 그 안에 우물과 샘이 9개가 있다.
누정 봉서루(鳳栖樓) : 객관(客館) 동쪽에 있으니 현감(縣監) 오치선(吳致善)이 세웠다.
○ 김작(金綽)의 기(記)에, "대개 이 고을이 나는 봉의 형국이므로 이렇게 이름지었다." 한다.
○ 노숙동(盧叔仝)의 시에, "봉성산(鳳城山) 밑 봉서루에 바람과 날씨 서늘하고 맑아 여름 또한 가을일세." 했다.
학교 향교 : 현의 서쪽 2리에 있다.
역원 잔수역(潺水驛) : 잔수진 언덕에 있다. 잔수원(潺水院) : 역시 잔수진 언덕에 있다.
불우 화엄사(華嚴寺) : 지리산 기슭에 있다. 중 연기(煙氣)는 어느 때 사람인지 알 수 없는데 이 절을 세웠다 한다.
절 속에는 한 전(殿)이 있는데 네 벽(壁)을 흙으로 바르지 않고 모두 청벽(靑壁)을 만들어서 그 위에 화엄경
(華嚴經)을 새겼으나 여러 해가 되어 벽이 무너지고 글자가 지워져서 읽을 수가 없다. 석상(石像)이 있어 어머니
를 이고 섰는데 이것을 속담에 말하기를, "연기(煙氣)와 그 어머니가 화신(化身)한 곳이라." 한다.
절 앞에 큰 시내가 있고 동쪽에는 일류봉(日留峯), 서쪽에는 월류봉(月留峯)이 있다.
연곡사(鷰谷寺) : 지리산에 있다. 고려 때 학사(學士) 왕융(王融)이 지은 현각선사(玄覺禪師)의 비문이 있다.
사묘 사직단 : 현의 서쪽에 있다. 문묘 : 향교에 있다. 성황사 : 현의 북쪽 2리에 있다. 여단 : 현의 북쪽에 있다.
고적 석주진(石柱鎭) : 현의 동쪽 15리에 있다. 남쪽과 북쪽이 모두 큰 산이고 가운데에 큰 강이 있다.
고려 말년에 진(鎭)을 두고 왜를 막던 곳이나 지금은 다만 옛 터만 있다.
사등촌 부곡(沙等村部曲) : 혹은 사도(沙圖)라 하는데 현의 동쪽 5리에 있다.
유곡 부곡(楡谷部曲) : 현의 서쪽 15리에 있다. 남전소(南田所) : 현의 북쪽 6리에 있다.
방광소(放光所) : 현의 북쪽 10리에 있다. 토지처(吐旨處) : 현의 동쪽 10리에 있다.
효자고려 손순흥(孫順興) : 성종(成宗) 9년에 조서(詔書)를 내리기를, "구례(求禮) 백성 손순흥(孫順興)이 그의
어머니가 죽자 어머니의 모양을 그려 제사를 받들고 3일에 한 번씩 분묘에 찾아가서 제사지내어 살아있을 때와
다름없이 하므로 벼슬을 주게 하여 그의 효성을 찬양하라." 하였다.
본조 조한(趙漢) : 아버지가 죽자 흙을 져다가 무덤을 만들고 울면서 3년 동안 나물만 먹고 물만 마시며 동구밖
에 나가지 않으니 이 일이 조정에 알려져 정문을 세웠다.
열녀백제 지리산녀(智異山女) : 여자가 자색(姿色)이 있었고 지리산 밑에서 살았는데 그의 이름은 전하지 않는다.
집이 가난하였으나 부도(婦道)를 다했다. 백제왕이 그 아름답다는 말을 듣고 맞으려 했으나 여자가 죽음을 맹세
코 따르지 않았다.
본조 임씨(林氏) : 왕정(王淨)의 아내이다. 정이 병에 걸리니 힘을 다하여 치료하면서 약속하기를, "설사 죽더라도
나는 마땅히 여묘살이를 하겠다." 하였다. 정이 죽자 임씨(林氏)는 나이 71세로서 장사와 제사를 예법대로 지내고
3년 동안 여묘살이를 했다. 매양 절일(節日)을 만나면 반드시 자식들을 데리고 몸소 무덤에 올라가 90세에 이르
도록 그치지 않았다.
계수(桂樹) : 고진석(高震碩)의 아내이다. 남편이 죄를 짓고 멀리 귀양가다가 도중에 죽으니 계수는 다니면서
빌어먹었다. 시부모가 그의 궁함을 불쌍하게 여겨 딴 데로 시집보내려 하자 목매어 죽으려 하니 시부모가 놀라서
그만두었다. 이 일이 조정에 알려져서 정문을 세웠다.
제영 봉무천단산족족(鳳舞天端山簇簇) : 김극기(金克己)의 시에, "봉이 하늘 끝에서 춤추고 산은 올망졸망하고
땅에 뱀이 서린 듯 물이 망망해라." 하였다.
녹도홍거십리향(綠稻紅蕖十里香) : 앞 사람의 시에, "저물녁에 부슬부슬 내리는 비 문득 서늘함을 보내니,
시내빛 산빛 점점 아득하여 가네. 강남의 좋은 경치 참으로 그림 같은데, 푸른 벼 붉은 연꽃 10리에 향기로워라."
했다.
소계단정횡청천(小溪短艇橫淸淺) : 백비화(白賁華)의 시에, "아침에 백계산 아래 길로 나와서 저녁에는 찬수역
(鑽燧驛) 동쪽 마을에 들었노라. 조그만 개울에 작은 배 맑고 얕은 물을 가로지르고 해지는 외딴 마을은 멀고
아득한 데로 들어가네. 절벽을 어지러이 둘러싼 구름은 은 궁궐이 솟는 듯, 먼 산은 미친듯이 불붙는 화성(火城)
이라네. 밤이 깊어 곤하게 누웠다가 처음 꿈에 놀라 깨니 벽을 등진 쇠잔한 등불 반쯤 침상에 비치고 있네."
하였다. 찬수(鑽燧)는 즉 잔수(潺水)이다.
[비고]
연혁 고종 32년에 군으로 고쳤다. 《文獻備考》
방면 읍내(邑內) : 끝이 5리이다. 마산(馬山) : 동쪽으로 처음은 5리이고, 끝은 20리이다.
계치(界峙) : 남쪽으로 처음은 5리이고, 끝은 30리이다.
토음(吐音) : 본래 토음허(吐音虛)인데, 동쪽으로 처음은 10리이고, 끝은 40리이다.
양전(良田) : 동남쪽으로 처음은 30리이고, 끝은 40리이다. 용천(龍泉) : 북쪽으로 처음은 5리이고, 끝은 10리
이다.
방광(放光) : 본래 방광소(放光所)인데 북쪽으로 처음은 5리, 끝은 15리이다.
문척(文尺) : 남쪽으로 처음은 7리이고, 끝은 15리이다. ○ 유곡 부곡(楡谷部曲)은 서쪽으로 15리에 있다.
사등촌(沙等村) 부곡은 동쪽으로 5리에 있고, 남전소(南田所)는 북쪽으로 6리에 있다.
성지 읍성(邑城) : 둘레가 4천 6백 8십 1척이며, 아홉 개의 우물이 있다.
마봉고성(馬峯古城) : 북쪽으로는 5리에 있으며, 그 성터에는 기와 조각이 쌓여 있다.
석주관(石柱關) : 동쪽으로 25리에 있으며, 좌우로 산세가 험하고, 강변에 길이 있는데, 사람과 말이 가까스로
지난다. 북쪽에는 커다란 협곡이 있고, 그 안에 수십 리의 긴 강이 있다. 고려(高麗) 말기에 왜구를 막기 위하여
강의 남북쪽 산에 성을 쌓았는데 지금은 없어지고, 성터만 남아 있다.
여기에서 호남(湖南)ㆍ영남(嶺南)으로 나누어 진다.
창고 읍창(邑倉). 해창(海倉) : 동쪽으로 30리에 있다.
역참(驛站) 잔수역(潺水驛) : 옛이름은 찬수(鑽燧)이며, 거수진(涺水津) 언덕에 있다.
진도 잔수진(潺水津) : 남쪽으로 10리에 있으며, 순천(順天) 대로(大路)와 통하는 요해(要害)처이다.
압록진(鴨綠津) : 서쪽으로 29리이며, 곡성(谷城)과 통한다.
교량 수각교(水閣橋) : 남쪽으로 3리에 있다. 술초교(戌草橋) : 북쪽으로 2리에 있다.
소아천교(所兒川橋) : 북쪽으로 3리에 있다. 연곡교(鷰谷橋) : 동쪽으로 30리에 있다.
흥양현 興陽縣
동쪽으로는 사도진(蛇渡津)까지 43리이고 서쪽으로는 보성군 경계까지 78리에 이르고 남쪽으로 발포(鉢浦)까지
40리이고 북쪽으로 낙안군(樂安郡) 경계까지 82리에 이르고, 서울과의 거리는 9백 34리이다.
건치연혁 본래 장흥부(長興府) 고이 부곡(高伊部曲) : 고이는 방언(方言)으로 고양이[猫]다.
고려 충렬왕(忠烈王) 11년에 이곳 사람 유비(柳庇) : 뒤에 청신(淸臣)이라고 이름을 고쳤다. 가 통역(通譯)으로
원(元)에 가서 공이 있었기 때문에 고흥(高興)으로 이름을 고치고 현(縣)으로 승격시키고 감무(監務)를 두었다.
본조 태조(太祖) 4년에 왜인의 침입으로 인하여 관청을 이사하여 보성군(寶城郡) 조양현(兆陽縣)땅에 붙어살게
하고 6년에 진(鎭)을 두고 병마사(兵馬使)로 현의 일을 겸하게 했다. 세종(世宗) 5년에 첨절제사(僉節制使)로
고치고 23년 또 장흥부(長興府) 두원현(荳原縣) 땅으로 옮기고 보성군의 남양현(南陽峴)을 떼어서 합치고 인하
여 지금 이름으로 고치고 현감(縣監)으로 하였다.
관원 현감ㆍ훈도 : 각 1명.
군명 고이(高伊)ㆍ고흥(高興)ㆍ고양(高陽).
성씨본현 유(柳)ㆍ신(申). 한(韓) : 속(續). 도화(道化) 오(吳)ㆍ신(申) : 풍안(豐安)도 같다. 도양(道陽) 신(申).
남양(南陽) 송(宋)ㆍ이(李)ㆍ변(邊)ㆍ김(金). 태강(泰江) 조(曺)ㆍ한(韓)ㆍ정(鄭)ㆍ정(丁)ㆍ임(任). 두원(荳原)
오(吳)ㆍ허(許)ㆍ유(庾)ㆍ신(申)ㆍ종(鍾)ㆍ노(盧) : 서경(西京). 박(朴) : 보성(寶城). 이(李) : 남양(南陽).
정(丁) : 내(來). 서천(紓川) 변(邊). 가을평(加乙平) 신(申). 총곡(葱谷) 전(全). 고다산(古多山) 손(孫).
산천 소이산(所伊山) : 현의 북쪽 3리에 있는 진산(鎭山)이다. 팔전산(八顚山) : 현의 동쪽 30리에 있다.
천등산(天燈山) : 현의 남쪽 20리에 있다. 장기산(張機山) : 현의 서쪽 30리에 있다.
마북산(馬北山) : 현의 동쪽 30리에 있다. 유주산(楡朱山) : 현의 남쪽 40리에 있다.
조계산(曹溪山) : 현의 남쪽 5리에 있다. 바다 : 현의 동쪽 10리, 서쪽 8리, 남쪽 54리에 있다.
입포(入浦) : 현의 북쪽 60리에 있으니 일명은 탄포(炭浦)이다. 여회포(礜會浦) : 현의 북쪽 15리에 있다.
장선포(長先浦) : 현의 북쪽 80리에 있다. 구포(狗浦) : 현의 서쪽 30리에 있다.
고읍포(古邑浦) : 현의 남쪽 15리에 있다. 우포(又浦) : 현의 남쪽 15리에 있다.
오질마도(吾叱亇島) : 현의 남쪽 20리에 있다. 조수가 빠지면 육지에 연결된다. 둘레가 10리이다.
고도(姑島) : 현의 서쪽 30리에 있다.
절이도(折尒島) : 현의 남쪽 30리에 있으니, 둘레가 1백 리요, 목장(牧場)이 있다.
외나로도(外羅老島) : 둘레가 85리이다. 내라로도(內羅老島) : 둘레가 60리이다.
계이도(界尒島) : 둘레가 20리이다.
○ 상 여러 섬은 모두 현의 동쪽 바다 가운데에 있다.
우도(牛島) : 둘레가 45리이다. 박길도(朴吉島) : 둘레가 50리이다.
춘자도(春子島) : 이상의 섬은 모두 현의 북쪽 바다에 있다.
신증 봉황산(鳳凰山) : 현의 남쪽 3리에 있다. 오모산(吾母山) : 현의 서쪽 8리에 있다.
운암산(雲巖山) : 현의 북쪽 15리에 있다. 지리산(地利山) : 현의 북쪽 70리에 있다.
첨산(尖山) : 현의 북쪽 75리에 있다. 종침강(鍾沈江) : 근원이 오모산(吾母山)에서 나온다.
토산 오징어ㆍ숭어ㆍ병어ㆍ낙지ㆍ해삼ㆍ왕새우ㆍ굴ㆍ전복ㆍ감합ㆍ홍합ㆍ강요주(江瑤柱)ㆍ유자ㆍ비자
(榧子)ㆍ표고ㆍ송이ㆍ김ㆍ미역ㆍ차ㆍ죽전(竹箭)ㆍ매산(莓山)ㆍ감태(甘苔)ㆍ황각(黃角)ㆍ자연동(自然銅).
신증 방풍(防風)ㆍ사향(麝香).
성곽 읍성(邑城) : 돌로 쌓았는데 둘레가 1천 5백 20척이요, 높이가 15척이다.
남양현 산성(南陽縣山城) : 돌로 쌓았는데 둘레가 1천 1백 6척이요, 높이가 10척이며, 군창(軍倉)이 있다.
관방 사도진(蛇渡鎭) : 현의 동쪽 43리에 있으며 좌도수군첨절제사(左道水軍僉節制使)의 영(營)이 있다.
관할하는 곳은 회령포(會寧浦)ㆍ달량(達梁)ㆍ여도(呂島)ㆍ마도(馬島)ㆍ녹도(鹿島)ㆍ발포(鉢浦)ㆍ돌산포
(突山浦)이다. ○ 수군첨절제사(水軍僉節制使) 한 사람이 있다.
녹도영(鹿島營) : 현의 서쪽 45리에 있으니 둘레가 30리다. 수군만호(水軍萬戶) 한 사람.
여도영(呂島營) : 현의 북쪽 59리에 있다. ○ 수군만호(水軍萬戶) 한 사람.
발포영(鉢浦營) : 현의 남쪽 40리에 있다. ○ 수군만호(水軍萬戶) 한 사람.
신증 율현보성(栗峴堡城) : 현의 남쪽 15리에 있다. 돌로 쌓았는데 둘레가 5백 35척이요, 높이가 7척이다.
절도사(節度使)가 권관(權管)을 보내어 군사를 나누어 지키게 했다.
백석포장성(白石浦長城) : 현의 남쪽 20리에 있음. 돌로 쌓았는데 길이가 1천 6백11척이요, 높이가 6척이다.
풍안평장성(豐安坪長城) : 현의 남쪽 22리에 있고 돌로 쌓았다. 길이가 2천4백 척이고, 높이가 6척이다.
이상 두 성은 가정(嘉靖) 계미년에 순찰사(巡察使) 고형산(高荊山)이 적이 다니는 중요한 길이라 하여 조정에
보고하고 쌓은 것이다.
봉수 팔전산 봉수(八巓山烽燧) : 동쪽으로 순천부(順天府) 백야관(白也串)에 응하고 남쪽으로 마북산(馬北山)에
응한다.
천등산 봉수(天燈山烽燧) : 남쪽으로 유주산(楡朱山)에 응하고 동쪽으로 마북산(馬北山)에 응하고 서쪽으로
장기산(帳機山)에 응한다.
장기산 봉수 : 서쪽으로 보성군(寶城郡) 정흥사(正興寺)에 응하고 북쪽으로 수덕산(愁德山)에 응한다.
수덕산 봉수 : 현의 서쪽 5리에 있으니 남쪽으로 장기산에 응하고 동쪽으로 천등산(天燈山)에 응하며 서쪽으로는
다만 관문(官門)에 보고했다.
마북산 봉수 : 동쪽으로 팔전산(八巓山)에 응하고 남쪽으로 유주산(楡朱山)에 응하며 서쪽으로 천등산에 응한다.
유주산 봉수 : 동쪽으로 마북산에 응하고 서쪽으로 천등산에 응한다.
신증 사화랑 봉수(沙火郞烽燧) : 서쪽으로 녹도(鹿島)에 응하고 동쪽으로 발포(鉢浦)에 응한다.
묵지두 봉수(墨之頭烽燧) : 서쪽으로 사화랑(沙火郞)에 응하고 동쪽으로 가화(加禾)에 응한다.
다고두 봉수(多古頭烽燧) : 서쪽으로 묵지두(墨之頭)에 응하고 동쪽으로 가화(加禾)에 응한다.
가화봉수(加禾烽燧) : 서쪽으로 다고두(多古頭)에 응하고 동쪽으로 가내포(加乃浦)에 응한다.
가내포 봉수(加乃浦烽燧) : 서쪽으로 가화(加禾)에 응하고 동쪽으로 소포(召浦)에 응한다.
소포 봉수(召浦烽燧) : 서쪽으로 가내포에 응하고 동쪽으로 사도(沙渡)에 응하고 북쪽으로 여도(呂島)에 응한다.
누정 운승루(運勝樓) : 객관(客館) 남쪽에 있으니 현감(縣監) 홍익생(洪益生)이 세웠다.
○ 안숭선(安崇善)의 기(記)에, "정통(正統) 10년에 내 사신의 임무를 받들고, 남쪽 고을에 가다가 흥양(興陽)
지경에 들어가니 넓은 바닷가에 땅이 있어 살찌고 기름지다. 그러나 두 개천이 군의 치소(治所) 가운데로 종횡
으로 흘러서 해마다 여름철이 되어 장마물이 넘쳐 백성들은 수해를 당하여 모두 흩어져 떠도니,
온 고을이 괴로워하였다. 이에 내가 성 서쪽에 터를 잡아 치소를 옮겨주어서 수해의 근심을 면하게 하니 백성들
이 모두 기뻐했다.
치소 남쪽에 또 새로 세운 누가 있는데 그 굉장하고 화려함이 호남 여러 고을에서 이보다 나은 것이 없다.
이에 운승(運勝)이라 이름지으니, 이는 대개 장막속에서 꾀를 내어 천리 밖의 승리를 결정짓는다는 뜻에서 취한
것이다." 하였다.
신증 해운정(海雲亭) : 객관(客館) 동쪽에 있다.
학교 향교 : 현의 서쪽 2리에 있다.
역원 양강역(陽江驛) : 현의 북쪽 50리에 있다. 복제원(卜梯院) : 현의 북쪽 30리에 있다.
탄포원(炭浦院) : 현의 북쪽 60리에 있다. 금모연원(今毛淵院) : 현의 북쪽 15리에 있다.
신증 송현원(松峴院) : 현의 북쪽 5리에 있다. 연방원(蓮坊院) : 현의 북쪽 7리에 있다.
신증교량 홍석교(虹石橋) : 현의 북쪽 30리에 있다.
불우 불대사(佛臺寺) : 조계산(曺溪山)에 있다. 보현사(普賢寺)ㆍ불개사(佛蓋寺) : 모두 팔전산(八巓山)에 있다.
○ 고려 이익배(李益培)가 지은 중 원오(圓悟)의 비가 있다.
사묘 사직단 : 현의 서쪽에 있다. 문묘 : 향교에 있다. 성황사 : 현의 서쪽 2리에 있다. 여단 : 현의 북쪽에 있다.
고적 남양 폐현(南陽廢縣) : 현의 북쪽 50리에 잇다. 본래 백제 조조 례현(助助禮縣)이던 것을 신라에서 충렬
(忠烈)이라 고쳐서 분령군(分嶺郡)의 속현(屬縣)을 삼았고 고려에서 지금 이름으로 고쳐서 보성군(寶城君)에
소속시켰으며 우리 세종(世宗) 23년에 와서 이곳에 붙였다.
태강 폐현(泰江廢縣) : 현의 북쪽 70리에 있다.
본래 백제 비사현(比史縣)이던 것을 신라에서 백주(柏舟)로 고쳐서 분령군(分嶺郡) 속현(屬縣)으로 삼았고,
고려에서 지금 이름으로 고쳐서 보성군(寶城郡)에 붙였으며, 우리 세종조(世宗朝) 때 와서 이곳에 붙였다.
풍안 폐현(豐安廢縣) : 현의 남쪽 25리에 있다. 본래 보성군 식촌 부곡(食村部曲)이던 것을 충선왕(忠宣王) 2년에
원 나라 조정에 들어간 환자(宦子) 이대순(李大順)의 청으로 지금 이름으로 고치고 승격시켜 현(縣)을 삼았으며
세종조(世宗朝) 때 와서 이곳에 붙였다.
도화 폐현(道化廢縣) : 현의 동쪽 30리에 있다. 본래 보성군 타주 부곡(他州部曲)이던 것을 선종(宣宗) 5년에
지금 이름으로 고치고 승격시켜 현(縣)을 삼았으며 세종조(世宗朝) 때 와서 이곳에 붙였다.
두원 폐현(荳原廢縣) : 현의 서쪽 15리에 있다.
본래 백제 두힐현(豆肹縣)이던 것을 신라에서 강원(薑原)으로 고쳐 분령군(分嶺郡)의 영현(領縣)으로 삼았다.
고려에서 지금 이름으로 고쳐 보성군에 소속시켰고 인종(仁宗) 21년에 감무를 두었다.
뒤에 장흥부(長興府)에 소속시켰고 세종조(世宗朝) 때 와서 이 지역에 붙였다.
도양 폐현(道陽廢縣) : 현의 서쪽 30리에 있다. 본래 장흥부 도량도 부곡(道良道部曲)이던 것을 뒤에 지금 이름
으로 고쳤다. 세종조(世宗朝) 때 와서 이곳에 소속시켰고 목장을 만들어 목책을 세우고 그 위에 흙을 발랐으니
둘레가 83보이다.
고흥 폐현(高興廢縣) : 이는 곧 고이 부곡[猫部曲]이니 현의 동쪽 15리에 있다. 고려 때에 고이 부곡 사람이
조정에 벼슬하면 나라가 망한다는 참설이 있었다. 유비(柳庇)가 고이 부곡 아전으로서 높은 벼슬에 올라 충숙왕
(忠肅王)을 따라 원(元) 나라에 가서 심왕(瀋王) 고(暠)가 왕위를 엿보는 것을 보고 드디어 조유(曺頔)와 함께 왕
을 배반하고 고에게 붙어 여러 가지로 흉계를 꾸몄다. 또 오잠(吳潛)과 더불어 도성(都省)에 글을 올려 고려를
중국의 성(省)으로 만들어 내지(內地)와 같이 하기를 청했다.
고다산 부곡(古多山部曲) : 현의 북쪽 35리에 있다.
서천 부곡(舒川部曲) : 현의 동쪽 30리에 있다. 본래 보성에 소속되었는데 우리 세조(世祖) 23년에 와서 이 지역
에 붙였다.
총곡 부곡(蔥谷部曲)ㆍ가을평향(加乙坪鄕)ㆍ신통소(神筒所)ㆍ작도소(酢桃所) : 모두 남양(南陽)에 있다.
인물고려 유탁(柳濯) : 유청신(柳淸臣)의 손자. 홍건적의 난리에 공민왕을 따라서 남쪽으로 갔다. 옛 서울을
회복하는데 공이 제 1위여서 벼슬이 문하시중(門下侍中)에 이르렀다. 임금이 노국공주(魯國公主)의 영전(影殿)
을 짓기 시작하여 크게 역사를 일으켰으나 수년이 되어도 완성하지 못했다.
탁(濯)은 극진히 말하고 곧게 간해서 이 공사를 중지하라 하니 임금은 크게 노했다. 뒤에 신돈(辛旽)을 죽일 적
에 임금은 예전의 감정으로써 탁도 함께 죽였다. 시호는 충정(忠靖)이다.
본조 이서원(李舒原) : 벼슬이 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에 이르렀다. 이은(李垠) : 서원(舒原)의 아들이다.
홍무(洪武) 무진과(戊辰科)에 장원으로 합격하여 벼슬이 대사헌에 이르렀다.
이언(李堰) : 경상도 선산부(善山府) 편에 자세하다.
제영 만호취연간석비(萬戶炊煙間夕霏) : 안숭선(安崇善)의 시에, "꽃잎은 바람 따라 동산 가득 날고, 어린 제비
쌍쌍이 연못에 날개 치고 오르네. 태평한 어진 정치 어디서 보나, 집집마다 밥짓는 연기 저녁노을 사이로 흩어
지네." 하였다.
송도권지천산동(松濤捲地千山動) : 박원형(朴元亨)의 시에, "솔바람 땅을 휩쓰니 온 산이 요동치고, 장마비 서늘
함을 나누어서 한 난간이 맑도다." 하였다.
경도면면설분비(鯨濤面面雪紛霏) : 성임(成任)의 시에, "객사(客舍)에 일 없이 술잔 돌리며 시편(詩篇) 쓰노라
붓을 휘둘러 벼루에 의지했네. 읊다가 한번 바라보니 고래등 같은 파도 면면이 눈같이 물방울 흩뿌리네." 하였다.
[비고]
연혁 금상(今上) 10년에 군(郡)으로 승격시켰다.
고종 32년에 군으로 고쳤다. 《文獻備考》
방면 읍내(邑內) : 끝이 7리이다. 고읍(古邑) : 서쪽으로 끝이 20리이다.
점암(占巖) : 동쪽으로 처음이 20리이고, 끝은 50리이다.
포두(浦頭) : 동쪽으로 처음이 10리이고, 끝은 40리이다. 남서(南西) : 북쪽으로 처음이 50리이고, 끝은 70리이다.
태강(泰江)ㆍ태서(泰西)ㆍ(泰東) : 모두 북쪽으로 처음이 60리이고, 끝이 70리이다.
남양(南陽) : 북쪽으로 처음이 35리이고, 끝은 50리이다. 두원(荳原) : 서쪽으로 처음이 10리이고, 끝은 40리이다.
도화(道化)ㆍ남면(南面) : 모두 남쪽으로 처음이 30리이고, 끝이 40리이다.
도양(道陽) : 서남쪽으로 처음이 20리이고, 끝이 40리이다.
○ 고다산 부곡(古多山部曲)은 북쪽으로 35리에 있고, 서천 부곡(舒川部曲)은 동쪽으로 30리에 있다. 본래 보성
(寶城)에 속했다가 세종 23년에 내속되었다.
갈평향(乫坪鄕)ㆍ총곡 부곡(蔥曲部曲)ㆍ작도소(酢桃所). 위 세 고을은 본래 남양(南陽)에 속하였다.
신개소(神箇所).
성지 백석포 장성(白石浦長城) : 길이는 1천 6백 11척이다.
풍안평장성(豐安坪長城) : 길이는 4백 척이며, 위의 두 성은 중종(中宗) 18년에 순찰사 고형산(高荊山)이 적을
막는 요해(要害)지로 여겨서 쌓았다.
진보 사도진(蛇渡鎭) : 동쪽으로 40리에 있고, 성 둘레는 1천 6백 척이다.
수군창(水軍倉) 절제사(節制使)는 한 사람이다.
녹도진(鹿島鎭) : 서남쪽으로 40리에 있고, 성 둘레는 1천 4백 척이며, 수군만호(水軍萬戶) 한 사람이 있다.
여도진(呂島鎭) : 동북쪽으로 50리에 있고, 성 둘레는 1천 1백 척이다. 수군만호 한 사람이 있다.
발포진(鉢浦鎭) : 남쪽으로 40리이고, 성 둘레는 1천 2백 척이다. 수군만호는 한 사람이다.
창고 창(倉) 2개, 고(庫) 3개 : 모두 읍내에 있다. 송창(松倉) : 북쪽으로 70리에 있고, 갯가에 있다.
해창(海倉) : 동쪽으로 15리에 있고 갯가에 있다. 강소창(舡所倉) : 남쪽으로 40리에 있다.
목장 도양장(道陽場) : 서남쪽으로 40리에 있고, 감목관(監牧官)은 한 사람이다.
속장 소록도장(小鹿島場)ㆍ절배도장(折島場)ㆍ시산도장(時山島場)ㆍ나로도장(羅老島場).
사원 쌍충사(雙忠祠) : 선조(宣祖) 정해년(丁亥年)에 세웠다가 숙종 계해년(癸亥年)에 사액하였다.
이대원(李大源) : 자는 호연(浩然)이고, 본관은 함평(咸平)이다. 선조 정해년에 녹도 만호(鹿島萬戶) 전변(戰兦)
이 되고, 벼슬은 전라 수사(全羅水使)이며, 병조 참판(兵曹參判)에 증직되었다.
정운(鄭運) : 영암편에 나온다.
동복현 同福縣
동쪽은 순천부(順天府) 경계까지 16리이고, 서쪽은 창평현(昌平縣) 경계까지 20리이며,
남쪽은 화순현(和順縣) 경계까지 24리에 이르고, 북쪽은 옥과현(玉果縣) 경계까지 38리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7백 75리이다.
건치연혁 본래 백제 두부지현(豆夫只縣)이던 것을 신라 때에 지금 이름으로 고쳐서 곡성군(谷城郡)
영현(領縣)으로 삼았다. 고려 초년에 보성군(寶城郡)에 붙였다가 뒤에 중 조염(祖琰)의 고향이라고 높여서
감무(監務)를 삼았다. 본조 태조(太祖) 3년에 화순 감무(和順監務)를 겸했고,
태종(太宗) 5년에 이 현을 화순에 합치고 복순(福順)이라고 고쳤으며, 16년에 각각 복구해서 예에 의하여
현감(縣監)으로 하였다.
관원 현감ㆍ훈도 : 각 1명.
군명 두부지(豆夫只)ㆍ구성(龜城)ㆍ옹성(甕城)ㆍ복천(福川)ㆍ나복(蘿葍) :
목은집(牧隱集) 왕의 편지 찬[上札贊]한 것에 나온다.
성씨본현(本縣) 오(吳)ㆍ성(成)ㆍ박(朴)ㆍ선(宣)ㆍ화(和)ㆍ지(池). 김(金) : 속(續).
산천 모후산(母后山) : 현의 동쪽 10리에 있는 진산(鎭山)이다.
백야산(白也山) : 현의 동북쪽 20리에 있다. 서석산(瑞石山) : 현의 서쪽 25리에 있으니 광산(光山) 편에 자세하다.
옹성산(瓮城山) : 현의 북쪽 15리에 있다. 산에 세 개의 바위가 있어 모양이 독과 같이 우뚝 서 있기 때문에 이렇게
이름지었다.
우자령(亏刺嶺) : 현의 동쪽 20리 순천부(順天府) 경계에 있다. 송현(松峴) : 현의 북쪽 30리에 있다.
저점(猪岾) : 현의 남쪽 35리에 있다. 이리왈령(伊离曰嶺) : 현의 남쪽 30리 보성군(寶城郡) 경계에 있다.
도마현(刀磨峴) : 현의 남쪽 25리에 있다. 경산(景山) : 현의 서쪽 15리에 있으며 화순(和順)편에도 나온다.
구봉산(九峯山) : 현의 남쪽 18리에 있다.
달천(達川) : 무등산(無等山)에서 나와서 현의 서남쪽 9리에 이르러 달천(達川)이 되고 남쪽으로 흘러 보성군에
이르러 죽천(竹川)이 되었다.
용안연(龍眼淵) : 현의 남쪽 20리에 있으니 곧 달천(達川) 하류이다.
검천(檢川) : 모후산(母后山)에서 나와 현의 남쪽 5리에 이르러서 달천으로 들어간다.
와지천(瓦旨川) : 송현(松峴)에서 나와 현의 북쪽 15리에 이르러 달천으로 들어간다.
영신천(靈神川) : 현의 서쪽 25리에 있으니 서석산(瑞石山)에서 나와서 달천으로 들어간다.
배존천(裵存川) : 현의 북쪽 50리에 있으니 백야산(白也山)에서 나와서 와지천(瓦旨川)으로 들어간다.
구점천(鳩岾川) : 현의 서쪽 25리에 있으니 서석산에서 나와서 와지천으로 들어간다.
가을탄(加乙灘) : 현의 남쪽 35리에 있으니 저점(猪岾)에서 나와서 용안연(龍眼淵)으로 들어간다.
토산 대나무ㆍ닥[楮]ㆍ감ㆍ은어ㆍ칠(漆)ㆍ꿀ㆍ차ㆍ울금(鬱金). 철(鐵) : 무등산(無等山) 밑에서 난다. 표고ㆍ
생강.
누정 응취루(凝翠樓) : 객관(客館) 남쪽에 있다.
○ 성화(成化) 갑오년에 현감 유의(柳誼)가 세웠다.
송정(松亭) : 현의 남쪽 7리에 있으니 아래로 달천에 임해 있다.
신증 취승정(聚勝亭) : 현의 서쪽 5리에 있다.
학교 향교 : 현의 서쪽 4리에 있다.
역원 검부역(黔富驛) : 현의 동쪽 5리에 있다. 남비원(攪轡院) : 현의 북쪽 40리에 있었는데 지금은 없어졌다.
방석원(方席院) : 현의 서쪽 20리에 있다. 남덕원(南德院) : 현의 동쪽 5리에 있다.
사평원(沙坪院) : 현의 남쪽 25리에 있다. 여점원(餘岾院) : 현의 북쪽 48리에 있다.
불우 유마사(維摩寺) : 모후산(母后山)에 있다. 영봉사(靈鳳寺) : 구봉산(九峯山)에 있다.
혈암사(穴庵寺) : 옹성산(甕城山)에 있다. 안심사(安心寺) : 서석산(瑞石山)에 있다.
사묘 사직단 : 현의 서쪽에 있다. 문묘 : 향교에 있다. 성황사 : 현의 북쪽 15리에 있다. 여단 : 현의 북쪽에 있다.
고적 석등(石燈) : 김상보(金尙保)의 기(記)에, "옛날 현리(縣吏) 오대승(吳大陞)이 관도(官道) 남쪽에 석등(石燈)
48개를 만들어 밤마다 불을 켜놓고 하늘에 절하더니 그 내외(內外)의 자손들이 모두 출세하고 계속하여 재상에
올랐다. 내가 그 말을 듣고 드디어 가서 보니 그 석등(石燈)이 아직도 남아 있다.
그러나 세월이 오래 되어 풀 속에 묻혀 있기에 곧 사람을 시켜 이것을 수리하고 대(臺)를 쌓아 오씨(吳氏) 선세
(先世)의 사적을 표했다." 하였다.
수촌 폐현(水村廢縣) : 현의 북쪽 20리에 있다. 압곡 폐현(鴨谷廢縣) : 현의 북쪽 25리에 있다.
와촌소(瓦村所) : 현의 북쪽 20리에 있다. 옹성산성(甕城山城) : 돌로 쌓았는데 둘레가 3천 8백 74척이요, 성 위에
백여 자가 되는 석대가 있다. 그 위에 또 돌기둥과 돌난간이 있는데 사람들이 말하기를, "이것은 나한전(羅漢殿)의
옛터라." 한다.
제영 천연적으로 험한 곳이라 예부터 성을 만들지 않았네[天險由來不設城] : 성임(成任)의 시이다.
[비고]
연혁 효종(孝宗) 6년에 화순(和順)에 합하였다 : 연전패(延殿牌)가 불에 탔기 때문이다. 현종(顯宗) 5년에 다시
세웠다 : 수촌(水村) 오른쪽에 있는 읍터는 북쪽으로 20리이고,
압곡(鴨谷) 오른쪽에 있는 읍터는 북쪽으로 25리에 있다.
고종 32년에 군으로 고쳤다. 《文獻備考》
방면 읍내(邑內) : 사방으로 10리이다. 내남(內南) : 처음은 10리이고, 끝은 20리이다.
외남(外南) : 서남쪽으로 처음은 20리이고, 끝은 30리이다. 내서(內西) : 처음은 10리이고, 끝은 20리이다.
외서(外西) : 서북쪽으로 처음은 20리이고, 끝은 30리이다.
내북(內北) : 동북쪽으로 처음은 20리이고, 끝은 30리이다. 외북(外北) : 북쪽으로 끝은 40리이다.
○ 와촌소(瓦村所) 북쪽으로 20리이다.
성지 옹성(甕城) : 북쪽으로 10리이고, 둘레는 3천 8백 74척이며 돌길은 사람이 걸어다닐 수 있을 정도의 넓이다.
길이 언덕 아래로 났는데, 사람이 성산(城山)에 올라서 굽어보면 성 밖으로 10여 보(步)이다. 뾰죽한 봉우리가
서로 그 사이에 사잇길이 있는데, 사람은 올라설 수가 없다. 남쪽으로부터 서쪽으로 뻗어 있고, 동쪽으로부터
북쪽에 이르기까지 모두 돌로된 절벽이어서 1만 길의 높은 곳을 쌓았는데, 그 가운데 일곱 개의 우물과 한 줄기
시내가 있고 남쪽으로는 두 개의 문이 있어서, 잡아온 도적을 바치는 곳이다. 황진(黃進)의 말무덤이 높다랗게
솟아 동북면 한 모퉁이를 끊고, 거기에 쌓아서 내성(內城)을 삼았다.
창고 읍창(邑倉)ㆍ외창(外倉) : 북쪽으로 40리에 있다.
토산 뽕나무ㆍ밤ㆍ호도.
누정 물염정(勿染亭) : 북쪽으로 30리에 있다. 창랑정(滄浪亭) : 북쪽으로 10리에 있다.
적벽정(赤壁亭) : 옹서(甕城) 서쪽 언덕에 있다. 환학정(喚鶴亭) : 적벽정 서쪽에 있다.
강선대(降仙臺) : 적벽의 북쪽 언덕에 있다.
사원 도원서원(道源書院) : 현종 경술년에 세웠다가 숙종 정묘년에 사액하였다.
최산두(崔山斗) : 자는 경앙(景仰)이고, 호는 헌재(軒齋)이며, 광양(光陽) 사람이다. 중종 기묘년에 본 현에 귀양
왔다가 무술년에 졸하였는데 벼슬은 사인(舍人)이다.
임억령(林億齡) : 자는 대춘(大椿)이고 호는 석천(石川)이며, 본관은 선산(善山)이다. 벼슬은 강원 감사(江原監司)
이다. 정구(鄭逑) : 충주(忠州) 편에 보인다. 안방준(安邦俊) : 보성 편에 나온다.
화순현 和順縣
동으로는 동복현(同福縣) 경계까지 28리이고, 서쪽으로 남평현(南平縣) 경계까지 21리이며, 남쪽으로 능성현
(綾城縣) 경계까지 12리이고, 북쪽으로 광산현(光山縣) 경계까지 9리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8백 28리이다.
건치연혁 본래 백제 잉리아현(仍利阿縣)이던 것을 신라가 여미(汝湄) 또는 여빈(汝濱)이라고도 한다. 로 고쳐서
능성현(綾城縣)의 영현(領縣)으로 만들었다. 고려 때에 지금 이름으로 고치고 나주(羅州)에 소속시켰다가 뒤에
다시 능성현에 소속시켰으며 공양왕(恭讓王) 2년에 감무(監務)를 두고 남평현감을 겸임시켰다.
본조 태조(太祖) 3년에 이것을 쪼개서 두 현(縣)을 만들어 이에 동복 감무(同福監務)가 와서 겸임하게 했다.
태종(太宗) 5년에 동복(同福)을 없애고 본현(本縣)에 합쳐 소속시키고 화순 감무(和順監務)라고 일컬었고,
7년에 복순(福順)으로 고치고 16년에 다시 동복을 쪼개서 본현을 능성에 합쳐 소속시켜 순성(順城)이라고
일컬었으며, 18년에 각각 복구시키고 예에 의하여 현감으로 하였다.
관원 현감ㆍ훈도 : 각 1명.
군명 잉리아(仍利阿)ㆍ여미(汝湄)ㆍ해빈(海濱)ㆍ오성(烏城)ㆍ산양(山陽).
성씨본현 배(裵)ㆍ최(崔)ㆍ오(吳)ㆍ윤(尹)ㆍ하(河). 박(朴) : 순천(順天). 김(金) : 진주(晉州)ㆍ무진(茂珍).
산천 나한산(羅漢山) : 현의 북쪽 6리에 있으니 진산(鎭山)이다.
서석산(瑞石山) : 현의 북쪽 15리에 있다. 광산(光山) 편에 자세히 나온다.
천운산(天雲山) : 현의 동쪽 25리에 있다. 대암산(大巖山) : 현의 동쪽 15리에 있다.
오성산(吳城山) : 현의 동쪽 8리에 있다. 옛 성이 있는데 삼면이 모두 석벽(石壁)이고 산 동쪽에 땅이 있으니 이
곳을 옥동(玉洞)이라 한다.
경산(景山) : 현의 동쪽 20리에 있는데 동복현(同福縣)과 경계이다.
산산(蒜山) : 객관(客館) 남쪽 2리에 있다. 산 네 모퉁이에 우물 10개가 있는데 모두 맑고 시원하다.
다화산(茶花山) : 현의 동쪽 5리에 있다.
흑토점(黑土岾) : 현의 동쪽 25리에 있다. 그곳 흙이 검기때문에 이렇게 이름지었다.
각암산(角巖山) : 현의 서쪽 15리에 있다. 서암(西巖) : 현의 동쪽 15리에 있다.
냉천(冷川)이 그 아래로 거쳐 내려간다.
냉천 : 현의 북쪽 10리에 있다. 서석산(瑞石山)에서 나와 남평 성탄(南平城灘)으로 들어간다.
십천(十川) : 현의 동쪽 20리에 있는데, 천운산(天雲山)에서 나와 냉천으로 들어간다.
삼천(三川) : 현의 남쪽 5리에 있으니 냉천 하류이다.
벌고천(伐古川) : 현의 서쪽 5리에 있으니 서석산에서 나와서 삼천으로 들어간다.
토산 석류ㆍ감ㆍ대나무ㆍ꿀. 철(鐵) : 냉천에서 난다. 차ㆍ송이.
누정 척서루(滌暑樓) : 객관 북쪽에 있다. 아풍정(迓風亭) : 객관 남쪽에 있다.
학교 향교 : 현의 북쪽 2리에 있다.
역원 가림역(加林驛) : 현의 남쪽 12리에 있다. 신원(新院) : 현의 동쪽에 있다.
내화원(乃火院) : 현의 서쪽 21리에 있다. 고자원(古者院) : 현의 북쪽 5리에 있다.
불우 만연사(萬淵寺)ㆍ연혈사(燕穴寺) : 모두 나한산(羅漢山)에 있다. 청공사(靑空寺) : 서석산에 있다.
운계사(雲溪寺) : 천운산(天雲山)에 있다. 장불사(長佛寺) : 서석산에 있다.
규봉사(圭峯寺) : 무등산에 있다. 대(臺)가 있으니 은신대(隱身臺)라고 한다. 세간에서 전하기를, "도선(道詵)이
이 대(臺)에 앉아서 송광산(松廣山) 산세를 보아 이 절을 지었다." 한다.
○ 권극화(權克和)의 기(記)에, "광산(光山)의 진산(鎭山)을 무등산이라 하고 혹은 서석산이라고도 하는데 그
형세가 웅장하여 다른 여러 산에 비길 바가 아니다. 산 동쪽에 암자가 있어 이를 규암(圭庵)이라 하고 그 곁에
서석(瑞石)이 빽빽이 서 있는데 우러러 보는 모양, 굽어 보는 모양, 누운 모양, 일어난 모양이 있고 또 모여 있는
모양과 외따로 섰는 모양이 있는데 높이가 수백 척이나 되고 사면이 옥을 깎은 듯하다. 서석(瑞石)이니 규봉
(圭峯)이니 한 것은 뜻이 대개 이것을 취한 것이리라. 물이 잔잔하게 돌 눈에서 흘러 나와 가뭄이 들어도 마르지
않는다. 옛날 의상대사(義湘大師)가 이를 보고 기이하게 여겨 비로소 정사(精舍)를 세웠고, 후에 보조(普照)와
진각(眞覺)이 정신을 수양하여 도를 얻어서 그 꽃다운 자취가 아직도 남아 있다.
삼존석(三尊石)과 십이대(十二臺)를 보면 대개 그 모습을 상상할 수 있다.
○ 김극기(金克己)의 시에, "괴상한 모양 무엇이라 이름하기 어려운데, 올라와 보니 세상이 눈 아래 있네.
돌 모양은 비단을 잘라 만든 것 같고, 산 형세는 옥을 깎아 이룬 것 같네. 좋은 곳에 오니 세속의 더러움 끊었고,
그윽이 사니 도정(道情)이 더하네. 어찌 세상 일 버리고, 여기 부좌(趺坐)하여 무생불법(無生佛法)을 배우지 않
으리오.
○ 신령스런 산 실상이 이름과 어울리니, 절정(絶頂)은 구름과 함께 평평하네. 어지럽게 솟은 돌은 누가 채찍질해
갈꼬,주D-001 기이한 언덕 절로 깎여 이루어졌네. 백암(柏庵)에서 처음 도(道)를 물었고, 연사(蓮社 절)에 오래
정을 기울였네. 한 그루 용화수(龍華樹) 아래서 서로 만나기를 후생(後生)에 약속하세." 하였다.
금석암(錦石庵) : 옛사람의 시에, "지경 궁벽하여 사람의 자취 끊어졌는데, 숲과 멧부리 천만 겹이네. 오솔길은
계곡에 내린 비에 씻기고, 문은 구름이 고개를 감싸며 봉했네. 도인(道人)은 본래 관계함이 없어,
자금(柴金) 얼굴에 길이 절하네." 하였다.
사묘 사직단 : 현의 서쪽에 있다. 문묘 : 향교에 있다. 성황사 : 오성산(吳城山)에 있다. 여단 : 현의 북쪽에 있다.
인물본조 최선복(崔善復) : 세종조(世宗朝)에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이 경주 부윤(慶州府尹)에 이르렀다.
최사로(崔士老) :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이 성균대사성(成均大司成)에 이르렀다. 아들 한정(漢禎)은 과거에 급제
하여 벼슬이 이조 참의(吏曹參議)에 이르렀다.
신증 최한원(崔漢源) : 최선복의 아들. 성품이 청렴 근신하고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이 관찰사(觀察使)에 이르
렀다.
효자본조 양리가(良里加) : 호장(戶長) 김인(金仁)의 딸이다. 인(仁)이 낫기 어려운 병에 걸리자 양리가는 손가락
을 끊어 약을 만들어 먹이니 아버지의 병이 곧 나았다. 조정에서 알고 정문을 세웠다.
신증제영 속성박략종래후(俗成朴略從來厚) : 허종(許琮)의 시에, "한 줄기 연기 날리는 마을에 엉성한 울타리가
연이어 있는데, 곳곳의 꽃 숲에 콩새가 우네. 어스름 저녁 동네길에 소 한 마리 지나가고 강가에 구름이 일어 비
가 오려나 제비가 낮게 나네. 기풍이 소박하고 간략하니 옛부터 인정이 후했고, 산은 순수한 정기를 품고 잘 드러
내지 않네. 안타깝다, 일 많은 인생 백 년이여. 월(越) 나라 새도 응당 고향 그리워 남쪽을 향하여 앉겠지." 하였다.
[비고]
연혁 선조(宣祖) 27년에 다시 능성(凌城)에 합하였다가 광해주(光海主) 3년에 다시 세웠다.
효종(孝宗) 6년에 동복(同福)에 내속되었다가, 현종(縣宗) 5년에 나누었다.
고종 32년에 군으로 고쳤다. 《文獻備考》
방면 읍내(邑內) : 끝은 10리이다. 동면(東面) : 처음은 10리이고, 끝은 30리이다.
서면(西面) : 처음은 5리이고, 끝은 20리이다. 남면(南面) : 처음은 10리이고, 끝은 10리이다.
성지 오성(烏城) : 동쪽으로 8리이며, 유오성(楡烏城)에 옛 성터가 남아 있다.
동쪽으로는 3리가 모두 석벽산이고, 옥동(玉洞)이 있다.
토산 칠ㆍ저ㆍ뽕나무.
[주 D-001] 어지럽게 솟은 돌은 누가 채찍질해 갈꼬, : 진(晉) 나라에서 만리장성을 쌓는데 돌을 져 날라서 쌓을
자리에 얹어놓았다는 전설을 여기에 응용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