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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데시 전투와 주평왕의 시대 사이의 400∼500년 간은 전쟁사(戰爭史)에 있어서 일종의 공백기간이다.
동양에서는 은나라 후기로부터 서주 시대까지 《사기》의 기록도 애매하고 그 양도 극히 적은 시기이며, 서양의
경우에도 기록으로서의 사료가 아주 희소한 기간이다.
역사의 암흑기라고 불린다. 이 기간에 융성했던 것은 에게해의 미케네와 크레타섬인데 미노스 문명이라고도 말해지
는 이 시기의 인간의 활동에 대하여 말해주는 것은 문자가 아니라 훗날에 발굴된 고대의 유적들이다.
문자의 기록이 별로 없는 이 시기를 뛰어넘어 기원전 8세기가 되면 동서양이 모두 약속이나 한 듯이 문자에 의한 기
록이 풍성해 진다. 그리고 기록의 수단도 서양에서는 잉크와 깃털 펜이 등장했고.
동양에서는 먹과 붓이 나타났다. 글을 쓰는 판으로는 양피와 목판, 파피루스와 죽피가 종이를 대신했다.
여러 역사가들의 노력에 힘입어 우리는 이 시대부터는 비교적 소상하게 인간의 삶과 진보, 그리고 인류의 다이나믹한
활동에 대해 알 수가 있다. 그리고 이 책의 관심분야인 전쟁과 군사에 대해서도...
이때 아시아와 유럽이 만나는 지중해의 동쪽에서는 특기할만한 두 개의 국가가 생겨났다.
하나는 아테네이고 다른 하나는 스파르타이다.
이 두 나라는 모두 전형적인 고대의 도시국가였고 그 구성원들은 혈통적으로 같은 그리스인이었다.
그러나 이 두 나라는 정체에 있어서 극단적으로 대조적인 형태를 취했고. 군사제도와 전술에 있어서도 판이하게 달
랐다. 두 나라에 공통적이었던 것은 혈통과 노예제도뿐이었다.
그리스는 민주정치를 하고 있었지만 참정권이 있는 자유민은 전 인구의 20퍼센터에 불과했다.
그리스인의 주 활동은 배를 타고 나가서 인근의 해변을 노략질하고 바르바로이(야만인)를 잡아와서 헬로트(노예)로
길들이는 일이었다.
반면에 스파르타는 사방이 다른 나라에 둘러싸인 내륙국으로 해안국경이 없었다.
자연히 노예를 잡아올 곳은 이웃한 부족들 뿐이었다.
스파르타가 그 중 제일 만만해 보였던 멧세네로 쳐들어 간 것은 주평왕이 호경에서 낙양으로 수도를 옮긴지 34년
후인 기원전 736년의 일이었다.
스파르타는 멧세네를 정복하고 원했던 노예들을 얻었지만 멧세네인들은 결코 정복자에게 복종하려 들지 않았다.
그 후 12년에 걸쳐 멧세네인들은 집요하고 끈질지게 스파르타에 저항했다.
이 저항은 무자비하게 진압되어 멧세네인들은 스파르타인들의 가축이 되는 운명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인간이라는 가축은 한번 복종을 했다 해서 마음속의 반항심까지 완전히 없어지는 동물이 아니어서 노예생
활의 단련을 통해 더 거칠어진 멧세네인들은 B.C. 650년에 다시 한번 일제히 봉기했다.
이것이 스파르타·멧세나 간의 2차 전쟁인데 이 전쟁은 무려 30년을 끌었다.
스파르타인들은 이 전쟁을 통해서 노예라는 가축의 무서움에 진저리를 쳤고, 이 전쟁은 스파르타인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즉 노예라는 가축을 부리는 사육자로서 완전무결한 자격과 능력을 갖추지 않으면 안 된다는 각성이었다.
이때부터 스파르타인들은 자신을 단순화시켰다.
즉 '인간을 부리는 자'가 된 것이었다. 이 일에 요구되는 전투능력과 잔인함, 무자비함, 용맹, 공공에 대한 봉사와 헌신
외에는 그 어떤 것에도 가치를 두지 않고 한눈도 팔지 않는 한가지 목적만을 위한 기계로 스스로를 규정짓고 단련시
키게 된 것이다.
이런 인간을 국가적으로 양성해내는 교육제도를 그들은 만들었는데 이것이 바로 '스파르타식 교육'이라는 '아고게'
이다.
고대에 있어서 노예제도는 전세계적인 문명사회의 일반적인 현상이었지만 아시아와 유럽은 약간의 차이가 있었다.
이것은 특히 군사면에서 두드러진 것이었는데, 페르시아와 중국은 노예 계층에서도 군대의 일부를 충당했다.
알렉산더의 동방 원정시 페르시아의 다리우스왕은 백만명의 대군을 동원하여 맞섰는데 이중 대부분은 노예이거나
하층민이었다.
이렇게 구성된 군대는 그 수에 비해 전력은 의외로 허약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리스와 스파르타, 훗날의 로마나 카르타고와 같은 유럽의 도시국가들은 노예계층을 국방을 위한 전력의
요소로 생각지 않았다.
병역의 의무는 소수의 자유시민에게만 지워져서 그들의 의무는 점점 과중한 것이 되었다.
스파르타는 병역을 감당하기에는 허약하게 태어난 아이들은 모두 죽였고, 전력의 유지를 위해서 여자도 남자와 똑
같은 군사훈련을 받았다.
당시 그리스 남자들은 벌거벗은 몸에 맨발로 방패와 창을 들고 전투를 했다.
스포츠라고 말해지는 각종 경기들도 나체로 했는데 여자들도 전투훈련과 경기를 할 때만큼은 남자들 앞에서 나체로
했다.
이런 '아고게'는 일곱 살 때부터 모든 국민을 대상으로 행해졌다. 그리고 그 나이부터 지기 시작한 전사의 의무는 60
세가 될 때까지 53년간 내려놓을 수 없었다.
출산은 철저하게 우수한 인종으로 공동체를 유지하는 목적에 종사되어 결혼한 부인도 남편이 쇠약해지면 남편 대신
에 건장한 남자와 동침하여 임신을 하도록 권장되었다.
남편이 병들었거나 병신인데도 그런 남편과의 사이에서만 종족의 번식행위를 하는 성관습과 결혼제도를 바보스러운
것으로 여겼다.
이와 유사한 교육제도는 훗날 오스만 터어키가 술탄의 친위부대로 양성한 '예니쎄리'와 20세기 중반에 아시아에서
생겨난 북조선인민공화국의 교육제도가 있을 뿐이다.
스파르타의 청년들은 18세가 되면 일단 소년기 교육이 끝나게 되는데 그들은 마지막 2개월 동안 야밤에 전국을 돌아
다니면서 불량하거나 탈주한 헬로트들을 찾아 죽이는 과정을 거쳤다.
스파르타에서는 특수한 재능이 있는 멧세나인들이 간혹 주인의 양해를 얻어 특수한 지위에 올랐더라도 이들에게
발각되면 죽임을 당했다.
스파르타식 교육의 효과가 전쟁이라는 특수한 무대 위에서 어떻게 진가가 드러나는 지를 잘 보여준 사건이 바로
테르모필레의 전투이다. 이 이야기는 페르샤전쟁이라는 거대한 연극의 한 막이다.
히타이트인들이 철기를 가지고 중동의 왕자로 군림하면서 이집트와 자웅을 겨룬 이후에 메소포타미아 지방은 앗시
리아 인들이 차지했다. 그러나 앗시리아인들이 중동에서 활약했던 수 백년 동안은 통일왕조의 시대가 아니라 여러
종족들이 할거하여 투쟁했던 시대였다.
이 기간 동안에는 어느 시대에 못지 않은 격렬한 전쟁이 있었을 것이 틀림없지만 그 내용을 우리는 알 수 없다.
유프라테스와 티그리스 강 사이의 비옥한 땅을 최후에 차지한 승자가 앗시리아인이었다는 정도만 확인이 가능하다.
이 앗시리아인은 전쟁의 기술보다 적에 대해 행한 잔혹한 짓이 더 많이 알려져 있다.
인류의 역사에 심심하면 등장하는 잔혹한 고문과 처형법들은 대개 기원전 6세기 이전에 앗시리아인들이 고안했던
것의 모방이다.
산 채로 가죽 벗기기, 사람의 몸에 말뚝 찔러 넣기, 사지를 절단해서 신체의 조각들을 전시해 놓기 등의 잔인한 짓을
즐겼기 때문에 이 지역에 오랜 세월 동안 터를 닦아왔던 유서 깊은 종족들인 이집트인이나 바빌로니아인들에게 혐오
의 대상이 되었다.
앗시리아의 통일왕조는 100년 정도로 막을 내리고 그 뒤를 다리우스 왕조의 페르샤제국이 잇게 되었다.
이때가 기원전 550년이니까 중국에서 공자가 태어난 1년 후의 일이었다.
아마도 이 책의 주인공인 손무도 이때 막 태어나 코흘리개였거나 동네 아이들과 뒷산에서 나무칼로 전쟁놀이를 하고
있었을 것이다.
손무가 태어날 때까지 중국에서 벌어졌던 전쟁들의 이야기는 잠시 미루어놓고, 그리스와 스파르타라는 고대의 두
군사강국과 페르샤 제국 사이의 장대한 전쟁의 이야기를 먼저 하기로 하자.
크레타섬과 펠로폰네소스 반도의 제일 남단부에서 청동기 문명을 꽃피우면서 호메로스가 노래했던 일리아드·오딧
세이의 주인공이기도 했던 미케네인들은 기원전 10세기경부터 발칸반도의 북쪽에서 남하해 온 철기문명인인 도리아
인에게 정복되었는데 이 도리아인의 남하기는 문자에 의한 역사의 기록이 전해지지 않는 암흑기이다.
발칸반도를 완전히 점령한 도리아인은 몇 세기에 걸친 침묵 끝에 마침내 그리스 문자라는 것으로 역사를 쓰기 시작
했다.
영화관의 정전으로 잠시 멈추었던 영사기가 다시 스크린을 비추기 시작하면 우리는 그것에서 아름다운 도시들을
보게 된다. 이것들을 그 주인들은 폴리스라고 불렀다.
인간이 모여 사는 도시들이었다. 발칸반도는 산이 많고 평지도 대부분 구릉지대여서 이런 폴리스들은 하나의 언덕을
중심으로 퍼져있었고 한 가운데의 언덕 위에는 신전을 세우고 성채를 둘렀다. 이것을 아크로폴리스라고 했다.
초기에 폴리스는 거주지 주위에 농장과 과수원을 가꾸어 하나 하나가 자급자족이 가능한 소국가나 마찬가지였는데,
인구가 늘어감에 따라 자체적인 농경지의 생산만으로는 지탱하기가 어려워졌다.
산이 많은 국토의 특성상 농경지를 개간하여 늘리는데는 한계가 있었다. 같은 사정에 처한 여러 폴리스가 살길을 찾
기 위해 힘을 합하게 되는데, 그 살길이란 지중해 연안을 약탈하거나 식민지를 건설하는 것이었다.
그리스 인들의 해양 식민 활동은 점차로 범위를 넓히면서 확대되어 아프리카 해안과 흑해 연안, 소아시아 일대, 남부
이탈리아와 프랑스, 그리고 에스파니아에까지 이르렀다.
그리스인들은 자기들과 말이 다른 이민족들을 '저속한 말로 지껄이는 자들'이라는 뜻으로 바르바로이라고 부르면서
자신들은 헬렌의 후손이란 뜻으로 헬레네스라고 불렀다.
그리스인들의 사업은 바르바로이를 붙잡아와서 헬로트(노예)로 길들여서 부려먹는 것이었다.
이런 헬로트들이 농장을 개간하고 과일을 심는 농원을 지중해 연안에 건설하여 그것들로부터 들어오는 식량과 부를
착취하는 것으로 아테네를 비롯한 그리스의 도시들은 살쪄갔다.
그리스인들이 이런 정복사업을 하는데 사용했던 것은 그들의 선조인 도리아인이 펠로폰네소스 반도 내에서 미케네
인을 축출하면서 발전시킨 강력한 방진(方陣) 전술과 철기 무기들이었다.
팔랑스(Palanx)라고 부르는 이 방진은 방패로 몸의 왼쪽 반을 가리는 보병들이 짧은 창을 가지고 1열을 구성하는데
서로 밀착하여 횡대를 만들기 때문에 오른쪽 사람의 방패가 자기 몸의 오른쪽 반을 지켜주었다.
그리고 맨 앞 열은 짧은 창을 내밀고 그 다음 열은 앞 열 병사의 어깨 너머로 조금 더 긴 창을 내밀며, 그 뒷 열은 더
욱 긴 창을 앞 열 병사의 어깨 너머로 내밀어 고슴도치처럼 겹겹을 구성하는 방패와 창의 성벽을 만드는 것이었다.
이런 벽을 사방으로 둘러서 네모난 진을 형성하는 것이었다.
그 사각의 진 내부에는 지휘자와 궁수들이 있어서 방진으로 접근하는 적을 사살하였다.
훗날 에파메이논다스와 알렉산더가 출현할 때까지는 이 팔랑스를 깨트린 자가 없었다.
이 여러 겹의 방패와 창을 든 인간의 성채는 발을 맞추어 천천히 이동했는데 그것을 정지시킬 수단을 가진 야만족은
없었다. 팔랑스는 오늘날의 전차군단이나 마찬가지였다.
이 방진의 위력을 앞세워 그리스인들은 이탈리아 반도의 남부에서 야만인이었던 코오네스족을 노예로 삼고 마그나
그라키아란 식민도시를 건설했으며, 역시 미개했던 시켈인을 가축으로 삼아 시칠리아에 신펠로폰네소스를 건설했다.
북부 아프리카에서는 리비아인을 쫓아내고 키레나이카 지방에 그리이스 5도시를 세웠고, 에게 해의 북쪽 지방에서
는 미개한 트라키아인을 희생시켜 칼키디케를 건설하였다. 그리스는 이집트 이상으로 활발하고 정력적인 정복자였다.
농경과 함께 시작된 전쟁은 최초에는 생존을 위해, 굶어 죽거나 얼어죽는 것과 싸우는 것의 양자택일을 강요받는 상
황에서 어쩔 수 없이 각오했던 것이었으나, 역사와 문자의 여명기에는 벌써 남을 지배하고 자신은 편하게 살며, 남
에게 노동을 강제시키고 자기와 가족들은 호강하기 위해 벌이는 대규모 사업으로 변해있었다.
그리고 이런 사업에 재능이 있는 민족들이 군국주의의 화신이 되어 세계국가를 세웠다.
이들에게 있어서 전쟁은 이미 생존을 위한 선택이 아니라 잔인한 본성에 충동된 탐욕의 추구였다.
그러나 이런 그리스의 식민지 사업은 주변의 모든 종족들에게 위기의식을 심어주어 반그리스 연대를 불러오게 된다.
그리스의 팽창력이 주변 세력의 반발력과 평형상태를 이루면서 정지하게 되었을 때 이 소강상태는 또 하나의 외력에
의해 깨어지게 된다.
바로 강력한 동방의 제국 페르시아가 출현한 것이었다.
소아시아와 메소포타미아 지방에서 앗시리아인들을 몰아내고 오리엔트 지방을 통일한 다리우스1세는 점차 서방으로
'왕의 눈과 귀'라고 이름 붙인 행정관들을 파견해서 그리스의 식민도시들을 병합해 나갔으며 터키 해안 일대는 금방
페르시아 제국의 영토로 변해 버렸다.
제일 먼저 이오니아의 여러 도시들이 넘어갔고 그리스에 압도당해 기를 펴지 못했던 페니키아인들이 해양세력이
필요한 페르시아의 후원을 받으면서 그리스를 두려워하지 않고 배를 몰고 지중해로 나왔다.
소아시아에 건설한 그리스의 식민지는 차례대로 불타고 공포에 질린 수많은 피난민들이 아테네와 시칠리아로 배를
타고 몰려들었다.
그러나 그리스의 식민도시들 중에는 페르시아에 대항해서 끈질기게 저항을 계속하는 곳도 있었고, 배후에 있는
그리스의 지원과 사주를 받아 반란을 일으키는 곳도 있었다.
다리우스 1세는 마침내 기원전 492년에 그리스를 정벌하기 위해 군대를 일으켰다.
페르시아 전쟁은 그 군사적 성격과 지리적 조건에서 꼭 천년 후에 동아시아에서 벌어진 수양제(隨煬帝)와 당태종
(唐太宗)의 고구려 원정과 아주 흡사하다.
그 전쟁의 동기뿐만이 아니라 경과와 결과까지, 그리고 그 결과에 의해 향후 진행된 역사의 방향까지도 거의 복사판
이다. 에게해 일대를 제패하면서 팽창한 그리스를 당시의 신흥 강국 고구려에 비교하면 여러 종족들의 발호로 어지
럽던 오리엔트를 통일하고 강력한 중앙집권적인 제국을 세운 페르시아는 수나라와 당나라로 비교할 수 있다.
다리우스1세는 천년 전의 수양제와 당태종이나 마찬가지였다.
페르시아가 그리스를 침공하려면 소아시아와 유럽 사이의 다다넬스 해협을 건너 발칸 반도로 진군해야 했는데 소아
시아에서 아테네까지의 거리는 산해관에서 압록강 까지의 거리와 비슷하다.
육로로 대군이 진군하자면 가장 중요한 것이 보급이었다.
당시의 도로사정을 감안한다면 대군이 먹을 식량과 마초의 운반을 육로로 한다는 것은 중국이나 페르시아와 같은
대국으로서도 쉽지 않은 일이었다.
한가지 방법이 있다면 그것은 해상 수송에 의존하는 것이었다.
중국이 한반도를 침공하려면 육군이 요동반도를 지나 압록강변으로 진격하는 동안에 수군이 황해를 건너 대동강변
까지 진출해서 보급품을 공급해야만 했다.
때문에 수당의 고구려 원정은 수군에 의한 서해의 제해권 확보가 성공의 관건이었다.
그런데 수당의 원정은 이 제해권 다툼에서 실패하여 큰 차질을 빚은 끝에 원정 자체가 실패로 끝났다.
다리우스1세의 페르시아군도 이같은 보급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수륙병진책(水陸竝進策)을 택했다.
페르시아의 육군은 다다넬스 해협을 건너 지금의 불가리아 남부 지방인 트레이시를 경유해서 마케도니아지방까지
진군해서 그 지역의 반란을 진압했다.
그러나 육로로 진격하는 페르시아군의 보급품을 싣고 해안을 따라 오던 해군이 아토스곶 앞바다에서 태풍을 만나
막심한 피해를 입고 말았다. 페르시아 육군은 오늘날의 그리이스 도시 살로니카인 펠라까지 왔다가 발길을 돌려야
했다. 보급 수단이 없는 이상 원정을 계속할 수는 없었다. 페르시아의 1차 그리스 원정은 이렇게 끝났다.
싸움에 진 것이 아니라 예기치 않은 폭풍에 의해 철군하게 된 다리우스1세는 군대를 정비하여 2년 후인 기원전 490
년에 2차 그리스 원정을 단행했다.
이때는 1차 원정의 경험을 살려 육로에 의한 고된 장거리 행군을 하지 않고 바로 해상 수송력에 의한 상륙작전을
하기로 방침을 세웠다.
이것이 역사상 최초의 상륙작전인 마라톤 전투이다. 이 전투에서 훗날 올림픽의 마라톤 종목이 있게 된다.
이 원정에서 페르시아가 상륙작전을 결심할 수 있게 된 데에는 20년 전에 아테네에서 추방된 히아스라는 자가 페르
시아에 망명해 있었는데 이 자가 상륙에 가장 적합한 지점에 대한 지리적인 정보를 다리우스1세에게 알려주었기
때문이다.
적국에 상륙작전을 하게 되면 병사들이 배에서 내려 뭍으로 올라설 때까지가 가장 취약해서 이 때 상륙지점에 방어
측의 군대가 대기하고 있으면 진형을 짜지도 못하고 대오를 정렬하지도 못한 상태에서 배와 육지 사이의 물에서
전멸 당할 위험이 컸다.
이것은 수나라나 당나라가 대군을 대동강 하류에 상륙시키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실제로 기원 후 611년에 수나라가 고구려를 침공했을 때 육군과는 별도로 내호아(來護兒)가 지휘하는 40,000명의
수나라 수군이 황해를 건너 대동강 하류를 거슬러올라가 평양성을 직접 공격했다가 고구려 군의 매복에 걸려 전멸
한 일이 있다. 그만큼 예나 지금이나 상륙작전은 위험이 크다.
그러나 다리우스1세는 600척의 3단노 전선에 15,000명의 병력과 1,500마리의 군마를 싣고 에게해를 가로질렀다.
그리스의 수도인 아테네를 공격하자면 아테네와 가장 가까운 팔레론 해안에 상륙해야 했지만 팔레론은 적전상륙을
시도하기에는 입지조건이 좋지 않아서 다리우스1세는 히아스의 건의대로 아테네에서 동북쪽 26마일 거리에 있는
마라톤이라는 해안에 상륙하기로 계획을 세웠다.
마라톤은 그리스의 아티카 지방의 해안과 에우보에아 섬이 만드는 긴 해협의 중간에 위치한 마을이었다.
마라톤에 상륙하는 페르시아군의 배후가 바로 에우보에아 섬이어서 페르시아군은 우선 이 섬에 일단의 병력을 상륙
시켜 주둔하고 있던 소수의 그리스 군을 소탕하여 배후의 안전을 확보한 뒤에 선단을 돌려 마라톤에 상륙했다.
아테네 출신인 히아스가 다리우스1세에게 상륙지로 마라톤을 추천한 것은 현명한 것이었다.
우선 상륙지점에는 해안가 뒤편에 넓은 소택지가 있어서 적이 상륙지점을 포위하거나 공격해 오기 힘든 이점이 있
었다. 즉 병력이 상륙한 해안을 소택지라는 자연적인 장애물이 성처럼 빙 둘려져서 상륙군을 보호해 주는 곳이었다.
일단 상륙해서 소택지를 빠져나가기만 하면 그 곳에는 탁 트인 마라톤 평야가 있어서 페르시아의 기병이 마음껏 활
약할 수 있었다. 만약에 아테네군이 이 마라톤으로 와주기만 하면 페르시아의 기병은 길이가 9km나 되는 마라톤
들판에서 아테네군을 짓밟을 수 있을 것으로 예상되었다.
페르시아군의 마라톤 상륙 소식이 아테네에 전해지자 아테네는 공포에 휩싸였다.
우선 스파르타로 구원군을 요청하는 사자가 떠났다. 그러나 이때 스파르타는 전쟁을 할 수 없는 아폴론신에 대한
제사 기간이었다.
이 의식은 보름달이 뜰 때까지 계속되어야 했고 결코 중도에 그만둘 수는 없는 국가지대사였다.
보름달은 6일이나 지나야 볼 수가 있었다. 스파르타의 구원군이 바로 올 수 없다는 소식을 접한 아테네에서는 화전파
가 갈리어 갑론을박이 계속되었다.
아테네는 전시에 장군들이 회의를 열어 결정하도록 되어 있었는데 이때 장군단의 임원은 10명이었고 최종 결정권은
카리마코스가 쥐고 있었다.
밀티아데스가 강경한 주전론을 폈다. "아테네를 노예로 전락시키는 것도, 아테네를 자유롭게 해서 영원히 빛나는 기
념으로 남기는 것도 오직 카리마코스 귀하의 손에 달렸다."고 그는 카리마코스의 결심을 촉구했다.
마침내 장군단회의는 마라톤 출정을 의결했고 지휘관으로는 밀티아데스가 선출되었다.
출동 가능한 병력은 1만명의 중장보병이었다. 산악국가이며 유목민이 아닌 아테네인들은 기병을 갖고 있지 않았으며
무거운 방패와 긴 창을 가지고 밀집 대형을 짜서 전진하는 것을 주특기로 하는 보병 위주의 편성이었다.
반면에 페르시아군은 중앙아시아의 스텝에서 온 기병이었다.
이 2차 페르시아전쟁은 전사상 최초의 상륙작전이었다는 것과 함께 동서양의 성격이 상이한 두 군대의 격돌이었다는
중요한 의미를 갖는 전쟁이다.
아테네군으로서는 본격적인 기병을 상대해본 적이 없었고, 페르시아군으로서도 대규모 밀집중장보병과의 전투를 경
험해 보지 못하였다.
양쪽 다 생소한 상대와의 싸움이었다. 그러나 일단 전투가 시작되면 기동성이 앞서는 페르시아의 기병이 아테네군의
양익을 포위하려 들 것은 뻔했다.
넓은 마라톤 벌판은 기병을 이용한 포위전에 적합한 땅이었다. 그래서 밀티아데스는 마라톤에 도착하자마자 군대를
아크리리키산과 코트로나 산 사이의 움푹 들어간 골짜기에 집어넣어 버렸다.
이 골짜기는 마라톤 벌판을 내려다보고 있는데다가 양옆이 산이라 측면으로 포위될 염려가 없었다.
일단 중장보병이 고지대에 올라가 포진을 하자 페르시아군으로서는 공격할 방법이 마땅치 않았다.
페르시아의 경보병으로 경사면을 기어오르면서 아테네의 중장보병을 정면으로 공격한다는 것은 자살행위였고, 기병
을 언덕 위로 돌격시킬 수도 없었다. 더구나 적의 양 측면은 산으로 보호되고 있었다. 며칠동안의 대치 상태는 마라톤
벌판에 포진한 페르시아군의 기병대가 양 군 사이의 개활지를 오고 가며 적정을 관찰하는 것으로 소일되었다.
대치가 길어지면 원정군 쪽이 초조해지는 법이다. 더구나 스파르타의 원군까지 도착하면 더욱 불리해질 수 있었다.
페르시아의 다리우스1세는 이 교착상태를 타개하기 위하여 휘하의 기병을 보내 텅 빈 아테네를 기습공격하게 했다.
밀티아데스가 거느리고 온 병력이 사실상 그리스의 전군이었으며 다리우스의 계산대로 아테네는 무방비 상태였다.
페르시아의 기병대가 아테네에 도착하면 무인지경으로 손에 넣을 수 있었다.
페르시아의 기병은 밤을 틈타 감쪽같이 아테네군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아테네의 운명은 풍전등화나 마찬가지였다.
이때 페르시아군에서 이오니아 출신의 병사가 아테네군에 투항을 해오면서 기병의 아테네 급습 사실을 알려주었다.
이 소식을 들은 밀티아데스는 첩자들을 보내 페르시아 기병의 본국 침공을 확인하게 된다.
다음날 아침 밀티아데스의 아테네군은 골짜기에서 마라톤 벌판으로 내려오며 페르시아군을 공격했다.
마라톤에서 아테네군이 페르시아의 본대를 패배시키는 것과 페르시아의 기병이 아테네를 점령하는 것과 어느 쪽이
더 빠른가 하는 시간과의 싸움이었다.
대치하고 있던 양군 중에서 어느 한쪽이 병력을 분할하여 상대의 본국을 쳐들어간 사례는 전사에서 드물지 않다.
수양제도 고구려 원정에서 요동성의 완강한 저항으로 진격이 지체되자 우문술(宇文述)에게 별동대를 지휘하여 평양
성을 급습하게 했다.
이 별동대는 평양성이 바라다보이는 곳까지 진격했지만 보급의 두절로 인해 을지문덕의 포위공격을 받고 살수에서
전멸하게 된다. 별동대의 전멸은 바로 본대의 철군으로 이어졌음은 물론이다.
비슷한 사례 중에 유명한 것으로서 일본 전국시대의 고마끼 전투가 있다.
오다 노부나가가 부하인 아케치 미쓰히데의 모반으로 혼노사에서 죽은 뒤, 노부나가의 복수전은 역시 그의 부하였던
도요또미 히데요시의 손으로 진행되었고 미쓰히데는 히데요시에 패하여 자결했다.
복수전이 끝난 후 천하는 자연히 히데요시의 것이 되어 갔는데 오다 노부나가의 다른 가신들과 아들들이 이를 두고
볼리는 없었다.
노부나가의 아들인 오다 노부까쓰와 히데요시가 싸우게 되자 오다 노부나가의 생전에 가장 강력한 동맹자였던 도꾸
가와 이에야스가 오다 노부까쓰를 편들어 히데요시에 맞섰다.
오다 노부까쓰와 히데요시간의 싸움이 히데요시와 이에야스간의 실력대결로 바뀌었고 도요또미 히데요시는 대군을
일으켜 이에야스의 본거지인 미카와·도토미 원정길에 올랐다.
이때가 마라톤 전투로부터 딱 2천년 후인 1584년의 일이었다.
도꾸가와 이에야스는 히데요시의 본거지인 오사카와 미카와 사이에 있는 요충지인 고마키 산에 올라가 성채를 구축
하고 히데요시군을 기다렸는데, 마치 아크리리키산과 코트로나산 사이의 골짜기에 들어간 아테네군처럼 쉽게 공격
할 수가 없었다.
이에야스의 병력이 약 3만, 히데요시의 원정군이 약 6만이었다. 병력수는 2배 가까웠지만 병사들의 자질이 이에야스
쪽이 뛰어났고 지형상 이점을 가지고 있어서 천재적인 군략가인 히데요시도 어쩔 수 없이 길고 지루한 대치로 맞설
수밖에 없었다.
마침내 먼저 움직이기 시작한 것은 초조해진 히데요시 쪽이었다.
히데요시는 어린 조카 히데쓰구를 총대장으로 삼고 막하 장수 이케다 소뉴를 지휘관으로 삼아 별동대 2만명으로
고마키 산을 남쪽으로 멀리 우회해서 도꾸가와의 본국인 미카와를 급습하게 했다.
만약에 이에야스가 이 사실을 알고 밀티아데스의 아테네군처럼 승부를 걸어온다면 4만명이라는 우세한 병력으로
상대하고, 이에야스가 본국을 침공하는 이케다군을 추격하면 그 뒤를 히데요시가 다시 추격하여 섬멸한다는 계획이
었다.
그러나 이케다의 별동대는 계획대로 신속하게 움직이지 못하고 우물거리다가 추격해온 이에야스군에게 포착되어
전멸 당하고 히데요시가 군대를 끌고 도착했을 때는 이케다군을 격멸한 이에야스가 군을 이끌고 고마키 산으로 다시
올라가 버린 뒤였다.
히데요시는 별동대 2만 명만 희생시키고 원상태로 되돌아간 셈이었다. 도요또미 히데요시가 직접 지휘한 전투에서
패배한 처음이자 마지막 전투가 이 고마키산의 패전이었다.
(임진왜란을 일으킨 후에 조선에서 겪은 패전들은 모두 막하 장수들이 지휘했다)
이처럼 대치하고 있는 상태에서 일부 병력을 차출하여 적의 배후를 치게 한다는 전략은 누구나 생각해 봄직 하지만
막상 실현하기는 극히 어려운 것이어서 전사에서 성공한 사례가 별로 없다.
밀키아데스는 1만 명의 중장보병을 셋으로 나누어 언덕 아래로 진군시켰다.
좌우 양쪽은 8열 횡대로 증강하고 중앙부분은 4열 횡대로 얇게 만들어 벌렸다.
그러나 언덕 아래에서 올려다보는 페르시아 군에게는 그리스 군의 중앙과 양 측익의 두께 차이가 보이지 않았다.
페르시아군은 중앙과 좌우의 구분 없이 3중으로 밀집한 대형으로 아테네군과 맞섰다.
아테네군은 중앙보다 양익이 훨씬 강했다. 중앙부가 페르시아군과 엉켜 밀려나는 동안에 양익의 아테네군은 페르시
아군의 측면을 압박하여 포위하는 형태를 만들었다.
페르시아군은 한가운데로 몰아넣어져 병사들끼리 몸을 움직이지 못할 정도로 밀착되어 맥없이 살해되었다.
오전 일찍부터 시작된 전투는 해가 중천에 이르기 전에 일방적인 살륙전으로 바뀌었고 페르시아 군은 배가 있는 해
안을 바라보고 패주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상륙할 때 상륙군을 보호해주었던 소택지가 패주하는 페르시아군의 앞을 가로막았다.
갈대가 우거진 늪지대에 몰린 페르시아군은 우왕좌왕한 끝에 늪에 빠져죽거나 아테네군의 칼에 맞아 쓰러졌다.
배에 올라타는데 성공한 페르시아군은 닻줄을 칼로 끊고 바다로 멀어져 갔다.
그렇게 도망가는 배 위에 올라탄 아테네군이 그 중에서 일곱 척을 불태웠다.
페르시아군 약 6,400명이 전사했고, 아테네군은 1,900명의 희생을 냈다.
본대가 마라톤에서 패배하고 있을 때, 페르시아의 기병대는 아테네 입구에 들이닥치고 있었다.
그러나 그때 달려온 전령은 본대의 패주 소식을 전했다.
기병대만으로 아테네로 돌입한다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었다. 그리고 기병만 가지고는 밀티아데스의 아테네군 주력이
되돌아 왔을 때 맞설 수도 없었다.
기병대는 아테네를 눈앞에 보면서 발길을 돌려야 했다.
페르시아의 2차 그리스 원정도 이렇게 실패로 끝났다.
올림픽에서 마라톤 경기의 유래가 되는 이야기는 플루타크가 저술한 《윤리론집(倫理論集)》에 나온다.
이에 따르면 에우클레스라는 그리스 시민이 완전무장을 한 채로 마라톤의 싸움터에서 쉬지 않고 산길을 달려 아테네
에 도착해서 '승리했다'고 외치고는 숨을 거두었다고 한다.
이 주인공이 페티피데스라는 사람이라는 설도 있다. 이 마라톤 전투는 인간의 전쟁사에서 양익포위라는 개념이 처음
으로 선보인 전투라는 점에서도 의의가 크다.
그 이전의 인간의 싸움이라는 것은 있는 대로 병력을 늘어 세운 후, 집단적으로 거리를 좁혀서 난투극으로 돌입하는
단순한 방식에서 탈피하지 못하고 있었다.
지략이라는 것이 개입하지 않아서 수가 많고 용감한 쪽이 이겼다.
오늘날에는 중학생이나 고등학생도 생각해낼 수 있을 일이라 해도 고대인에게는 코페르니쿠스적인 발상의 전환이
없으면 생각지 못할 일이 많았다. 중앙을 약하게 하고 양쪽 끝을 강화해서 포위한다는 극히 단순한 생각이 실현될
때까지 인간은 수천 년 동안 전쟁이라는 것을 해야만 했다.
기원전 5세기의 페르시아전쟁과 기원 후 6세기의 려수(麗隋) 전쟁을 보면 역사는 되풀이 것인지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고구려는 기원전 5세기의 아테네처럼 주변을 정복하면서 팽창해 나가던 청년 제국이었다.
아테네가 페르시아의 영향권 내에 있던 소아시아(터키) 해안의 여러 도시들을 공략한 것은 고구려가 수나라의 영역
인 요서(遼西) 지방을 넘본 것과 마찬가지였다.
페르시아 전쟁이 그랬던 것처럼 도발은 고구려 쪽이 먼저 했다. 영양왕( 陽王) 9년인 598년에 고구려는 말갈병
(靺鞨兵)을 동원하여 요서를 먼저 공격했다.
수의 문제(文帝)는 이에 격노하여 다리우스1세가 그랬던 것처럼 대군을 동원하여 고구려를 원정한다.
그러나 1차 그리스 원정 때의 페르시아군처럼 산동반도를 출발해서 고구려의 평양성을 공격하던 수군(水軍)이 태풍
을 만나 전멸하는 꼴을 보게 된다. 마라톤에서 대패했던 것처럼 육전에서도 수나라 군대는 요동벌판에서 고구려군
에게 깨졌다. 고구려 정복의 숙원은 문제의 아들 양제(陽帝)에게 물려졌다.
이와 아주 유사하게 천년 전에 1·2차 그리스 원정에 실패한 다리우스1세는 그 비원을 아들인 크세륵세스(Xerxe)에게
넘기고 기원전 486년에 사망했다. 부왕의 유지를 받든 크세륵세스는 수의 양제가 그랬던 것처럼 선왕보다 더욱 철저
하게 전쟁준비에 심혈을 기울였다.
수양제와 마찬가지로 크세륵세스 역시 부왕이 통일한 천하의 안정에도 많은 노력을 경주해야 했다.
기원전 539년에 선대인 캄비세스왕 때 굴복했던 바빌론 왕국이 기원전 482년에 일으킨 반란을 진압해야 했다.
옛 바빌로니아의 도시들은 불타고 유서 깊은 성곽들은 무너졌으며, 폭도들은 무자비하게 살해되었다.
당시에 중앙아시아에서 가장 호화스러웠다는 마독신의 신전이 폐허로 변한 것이 이때였다.
바빌론의 봉기를 잠재운 크세륵세스는 2년 후인 기원전 480년에 그리스 원정군을 일으켰다. 제3차 페르시아 전쟁이
일어난 것이다.
이번에는 1차 때와 마찬가지로 수륙병진책을 택했는데 차이점은 1차 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대군이었다는 점이다.
육군만 18만 명이었고, 동원된 전선(戰船)은 주력함이 길이가 약 50미터에, 너비가 5.5미터 정도였으며 160명이 노를
저어 움직였고 30명 내외의 전사가 승선했던 3단노의 갤리(Galley)였다.
갤리를 주축으로 한 크고 작은 전선 1,300척에 탑승한 병력은 모두 17만5천명이었다. 육지와 바다를 합해 30만 명이
넘는 대군이 기원전 5세기에 아시아에서 유럽을 향했다. 유럽이 이런 대규모 침공을 다시 받은 것은 이때로부터 2천
년이 지난 다음이었다. 1453년에 오스만터키의 술탄이 동로마를 침공하기 전에는 이것이 유일했다.
그리고 다시 5백년이 지난 후에 노르망디 상륙작전이 있게 된다.
마라톤에서 페르시아군에 대승을 거두어 전 그리스의 영웅이 된 밀티아데스는 승리를 기념하는 올리브나무 가지관을
자기가 수여받을 수 있도록 민회에 요청하였으나 아테네 시민들은 이를 거부했다.
아테네인들은 어떤 이유에서든지 한 개인에게 너무 지나친 영광이나 권위가 쏠리는 것을 탐탁하게 생각지 않았던 때
문이다. 그것이 아테네의 민주정을 지탱시킨 힘이었다. 오늘날에도 교훈이 될만한 점이다.
밀티아데스는 마라톤 승리의 다음해에 70척의 함대를 이끌고 파로스섬을 원정하다가 실패하고 부상을 입고 돌아왔다.
그는 재판에서 사형을 구형받고 결국 벌금형으로 감형되기는 하였으나 파로스섬 원정시 입은 상처가 악화되어 죽고
만다. 마라톤전투의 영웅으로서는 초라하고 불명예스러운 최후였다.
아테네의 새로운 실력자는 테미스토클레스였다. 고대 희랍사회에서 가장 뛰어난 웅변가로 알려진 그는 페르시아의
위협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해군의 건설이 절실하다고 아테네 사람들에게 호소하였다.
이것은 고구려가 중국의 침략에 맞서기 위해서는 강력한 수군으로 서해의 제해권을 유지해야 한다는 것을 알았던
것과 같다. 그
리고 다행히도 당시에 테미스토클레스는 대규모의 은광을 발견하였고, 여기서 생산된 은을 모두 군선의 건조에 쏟
아 부었다.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갤리선이 3차 페르시아 전쟁이 시작될 즈음에 약 300척 가까운 수가 되었다.
물론 크세륵세스 왕의 1,300척에 비하면 엄청난 열세였다.
페르시아의 대군은 헬레스판트(오늘날의 다다넬스 해협)를 건너 거대한 전차가 굴러가듯이 그리스의 주변 도시들을
파괴하고 불태우면서 트레이시와 마케도니아를 휩쓸며 전진했다.
그리스는 또 다시 전율했다. 아테네와 스파르타가 손을 잡고 이 공동의 위협에 대응하기로 했다.
스파르타의 왕은 레오니다스였다. 그러나 스파르타는 왕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전제국가가 아니었다.
그리고 아테네를 중심으로 하는 그리스와 스파르타의 펠로폰네수스는 평소에는 라이벌이며 숙적이었다.
스파르타의 일반 국민들은 정서적으로 아테네를 도와 전쟁을 한다는 것에 부정적이었다.
그러나 페르시아의 대군이 아테네를 정복하면 다음 차례는 스파르타가 될 것이 분명했다.
레오니다스 왕이 델포이 신전에서 신탁을 얻으니 신전의 무녀는 무시무시한 신의 예언을 노래했다.
"왕이 죽으면 스파르타가 살 것이요, 왕이 죽지 않으면 스파르타가 멸망할 것이다." 신탁을 들은 레오니다스는 자신
이 죽어 스파르타를 구해낼테니 용사들을 달라고 국민들을 설득했다.
원래 스파르타군의 용도는 국내 노예들에 대한 억제와 진압이었지 아테네처럼 해외 식민지를 개척하는 원정군이
아니었다.
스파르타군은 건국 이후 한번도 국경 밖으로 나가본 적이 없는 군대였다. 그들의 적은 자기들 발 밑에 있었지 국경
밖에 있는 것이 아니었다. 스파르타 국민들이 참전을 꺼린 이유는 군대가 외국에 나간 사이에 국내에서 노예들이
반란을 일으킬 것이 두려웠던 때문이었다. 그래서 간곡한 설득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레오니다스왕이 데리고 갈 수
있는 스파르타군은 겨우 3백명뿐이었다. 레오니다스왕은 이 정예의 용사 3백명을 인솔하여 아테네로 향했다.
테미스토클레스는 동맹군의 총대장이 되지만 실제적인 전투의 지휘는 스파르타가 맡는 것에 양해를 했다.
육군의 지휘는 레오니다스왕이, 해군의 지휘는 역시 스파르타의 유리비아데스가 맡았다. 문제는 한줌밖에 안 되는
그리스 동맹군을 가지고 페르시아의 20만 대군을 어떻게 막아낼 것인가였다.
다행히 남하하는 페르시아 군대가 반드시 통과하지 않으면 안 되는 협곡이 있었다.
뜨거운 온천수가 나오는 곳이어서 이름이 '테르모필레'였다. 왼쪽은 험준한 테살리산, 오른쪽은 깎아지른 낭떠러지의
해안이었다. 길은 외줄기 절벽을 낀 협소한 한줄기 도로뿐이었다. 우회할 길도 병력을 펼칠 공간도 없었다.
레오니다스는 스파르타군 300명과 아테네의 동맹군 7,000명을 가지고 이 곳에서 페르시아군을 기다렸다.
크세륵세스는 협곡의 입구에 도착해서 대군을 벌려놓고 동맹군에게 항복을 권유하며 5일을 기다렸다.
그리스동맹군이 출격하면 페르시아군이 쏘아대는 화살이 하늘을 가렸다. 때는 무더운 여름이었다.
탐색차 출격했다가 돌아온 장병들에게서 이 말을 들은 스파르타의 장군 데오게스는 "잘 되었군 화살이 해를 가려주
면 시원하게 싸울 수 있으니 말이야."하고 태연자약했다.
델포스 신전의 신탁을 들은 레오니다스를 따라 온 스파르타군은 이미 살 생각을 버린 사람들이었다.
자기가 죽어 스파르타를 구하겠다는 일념뿐이었다.
명랑해협에서 열두척의 판옥선으로 5백척의 왜선을 가로막고 나섰던 이순신 장군과 조선 수군의 심정이 이때의
스파르타군과 같았을 것이다.
동맹군이 항복하지 않자 6일째 되는 날부터 페르시아군의 공격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지형상 한꺼번에 많은 병력을
밀어 넣을 수가 없었다. 낭떠러지 위의 좁은 길에서 페르시아군은 그리스 동맹군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아테네군은 방패로 몸을 가리고 긴 장창을 내밀고 발소리를 착착 맞추어 전진해서 페르시아의 경보병들을 산적처럼
창에 꿰어 바다로 던져버렸다.
오른편의 바다에도 페르시아의 함대가 나타났다. 육지에서는 좁은 협곡을 이용해서 적을 막아도 해군을 이용한 적
이 협곡 뒤편에 상륙하면 그걸로 끝이었다.
그러나 이때 테미스토클레스가 선견지명으로 육성한 그리스의 함대가 바다에서 페르시아 함대를 막아섰다.
바다도 왼쪽의 육지와 오른쪽의 에우보에아 섬 사이의 좁은 수로였다.
마치 임진왜란 때 명랑해협에서처럼 페르시아 함대가 수의 이점을 누리기 어려운 바다였다.
크세륵세스는 바다에서의 결전을 명령하지 않았다. 육지의 낭떠러지에서 혈전이 되풀이되는 동안 빤히 내려다보이
는 바다에는 양국 함대가 늘어선 채 대치했다.
레오니다스의 동맹군은 바다 위에서 숨을 죽이고 바라보는 양국 해군의 눈앞에서 사투에 사투를 거듭했다.
협곡 아래의 바닷가 절벽에는 양군의 시체가 떨어져 겹겹이 쌓여갔다. 사기와 훈련, 용기와 애국심, 그리고 충성에서
동맹군이 페르시아군을 압도했다.
테르모필레의 협곡을 돌파할 가능성이 없다고 생각한 크세륵세스는 병사들을 풀어 테살리산을 넘어 우회할 수 있는
길을 찾게 했다. 테르모필레의 싸움이 시작된 지 7일째 되는 날 한 그리스 농부가 상금을 탐하여 테살리산을 넘는
산길을 가르쳐주고 말았다.
페르시아의 대군은 산을 넘어 협곡을 지키는 동맹군의 뒤로 쏟아져 내려왔다.
레오니다스는 자기가 데리고 온 3백 명의 스파르타군만을 남기고 아테네의 동맹군들을 전원 철수시켰다.
스파르타의 용사들이 물러가는 동맹군의 후위를 지키며 페르시아의 대군을 막아섰다.
산을 넘어온 페르시아군은 몇 만 명인지 수를 셀 수도 없었다. 몇 만 대 삼백의 처절한 전투가 벌어졌다.
테르모필레는 스파르타인의 무훈을 역사에 길이 남긴 기념비가 되었다.
단 한사람도 살아서 돌아갈 생각을 깨끗이 버린 3백 명은 몇 만의 적에 둘러싸인 채 피투성이가 되어 싸웠다.
인간이라기보다 아귀가 된 듯한 모습을 그들은 보였다.
창이 부러지면 칼로, 칼도 부러지면 돌을 들어 적을 쳤고, 돌마저 없으면 이빨로 물어뜯었다.
크세륵세스왕은 이 스파르타군의 분투에 큰 충격을 받게 된다. 그러나 최후의 스파르타인 전사가 대지에 쓰러져 꿈
틀거림을 멈추자 크세륵세스왕은 레오니다스왕의 시체를 찾게 하여 그 목을 벤 후에 장대에 높이 매달았다.
장대에 매달린 레오니다스왕의 머리가 내려다보는 테르모필레의 협곡길을 지나서 페르시아군은 흙먼지를 일으키며
묵묵히 진군해 갔다. 레오니다스왕의 머리를 보고 결의와 복수를 다짐하면서 그리스의 함대도 뱃머리를 돌렸다.
페르시아 전쟁이 끝난 후, 그리스 사람들은 테르모필레의 협곡에 스파르타의 3백 용사를 기념하여 큰 비를 세웠다.
그 비에는 다음과 같이 새겨져 있었다.
"길손이여, 가서 스파르타 사람들에게 전해 다오. 우리들은 조국을 지키다가 여기에 잠들었노라고."
레오니다스가 테르모필레에서 철수시킨 동맹군들은 아테네로 후퇴하여 유리비아데스가 지휘하는 그리스 동맹군의
전선(戰船)에 승선했다. 이제 믿을 것은 해군뿐이었다. 페르시아군은 거칠 것 없이 아티카 해안을 남하했다.
도미노의 카드가 연달아 쓰러지듯이 아테네의 동맹도시들은 차례차례 항복했고 주민들은 남부여대해서 산 속으로
도망쳤다. 페르시아군은 시민들이 모두 피난을 떠나 텅 빈 아테네에 입성해서 신전을 파괴하고 민가에는 불을 질렀다.
아테네와 그리스 반도의 싸울 수 있는 남자들은 이때 살라미스 섬 앞바다에 떠있던 함대에 올라 있었다.
그리스의 함대에서는 밤하늘을 빨갛게 물들이는 아테네의 불길이 보였다. 전사들은 아테네가 불타는 것을 보며 복수
를 다짐했다. 함대는 총 360척. 그 중에서 주력 전선은 200척 정도였다. 노군을 뺀 전사들의 수는 1만 명을 웃돌았다.
아테네가 불탔던 밤이 지나고 날이 밝자 그리스 함대의 눈앞에 크세륵세스의 깃발이 나타났다, 눈앞의 팔레론 해변
의 언덕은 페르시아의 대군으로 뒤덮였다.
살라미스 섬의 앞 바다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에 흰색의 거대한 천막이 세워지고 오색의 방패가 울타리를
만들었다. 크세륵세스 왕의 본영이었다.
그는 그 곳에 앉아 페르시아 함대가 그리스의 마지막 희망인 함대를 격멸하는 장면을 구경하려 했던 것이다.
대왕이 친히 굽어보는 앞으로 페르시아 함대가 위용을 드러냈다. 팔레론 해변의 페르시아군이 방패를 두들기고 창을
쳐들며 환호성을 울렸다. 그러나 육지의 페르시아군은 눈치를 채지 못했지만 페르시아 함대는 간밤의 폭풍으로 상당
한 피해를 입고 있었다.
하지만 어쨌든 1천 척에 달하는 대함대가 해변과 살라미스 섬 사이의 좁은 수로 입구로 들어섰을 때 그 모습은 장관이
었다. 수로 밖의 대해가 온통 페르시아의 군선에서 나부끼는 깃발에 뒤덮였다.
1천 척의 군선에서 일제히 노가 움직이며 물살을 밀어내고 있었다. 그리스 함대는 그 위세에 눌려 주춤주춤 물러섰다.
그러나 뒤는 살라미스 섬이었고 도망갈 퇴로는 없었다. 자그만 척후선들이 양 함대 사이에서 분주히 쏘다니고 불붙인
화살이 간간이 바다를 건너 날았다. 그러나 아직도 양함대의 거리는 멀었다.
그리스 함대의 지휘선의 선루에는 한 사나이가 올라서서 전 그리스의 전사들에게 피를 토하듯 외치고 있었다.
테미스토클레스였다. 백척간두에 선 조국을 구하기 위해 군선의 뱃머리에 올라선 자. 우리는 이런 사람의 모습을
하나 기억하고 있다. 명량해전의 이순신 장군이다.
테미스토클레스의 웅변을 받아 유리비아데스가 휘하의 지휘관들에게 노호했다. "물러서지 마라! 아테네를 불태운 자
들이다. 전사들이여 돌격하라!" 주춤거리며 물러서던 그리스 함대의 뱃머리가 페르시아 함대를 향해 충각을 세우기
시작했다.
이 팔레론 해변은 육지와 살라미스 섬의 거리가 넓은 곳이 2마일, 좁은 곳은 1마일 밖에 안 되는 수로의 형태였다.
말하자면 바다의 테르모필레였다. 페르시아 함대는 좌우로 넓게 벌려 수의 우세를 과시할 도리가 없었다.
수로로 깊이 들어올수록 배와 배 사이가 좁혀졌다.
서로의 노가 부딪혀 기동에 방해를 받을 정도였다. 사정은 아테네 함대도 마찬가지였다.
배와 배가 맞닿은 듯한 밀집 대형으로 아테네 함대는 페르시아 함대에 부딪혀갔다.
양쪽 함대가 쏘아올린 화살이 9월의 맑은 하늘에 장막을 쳤으며 북소리가 파도 소리를 잠재웠다.
배와 배의 충각이 부딪히면서 상대의 선복을 뚫고 들어갔다. 배끼리 격돌하는 충격이 가시기도 전에 '와!'하는 함성
과 함께 그리스의 전사들이 페르시아의 뱃전으로 날아들었다. 선상의 격투전이 벌어지자 우열의 차이가 드러났다.
그리스 전사들은 대부분이 자유민이며, 테르모필레에서 스파르타 3백 용사의 죽음을 지켜본 사람들이었다.
아티카의 모든 마을에서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를 알고 있었다.
아테네가 불타면서 붉게 물들였던 지난밤의 하늘을 잊을 수 없는 사람들이었다. 지금도 크세륵세스의 화려한 금색
진막의 뒤편으로는 아테네가 불타는 검은 연기가 하늘로 솟아오르고 있었다.
더 이상은 물러설 곳도, 도망쳐서 살 방도도 없었다. 그리스 전사들의 눈에는 핏발이 섰고, 검과 도끼를 든 손에는
분노의 힘줄이 꿈틀거렸다.
페르시아의 수군은 밤새도록 수로의 바깥에서 풍랑에 시달린 끝이었다.
그리고 많은 수가 페르시아의 피정복민 중에서 끌려온 자들이었다. 목숨을 걸고 싸워야 할 이유도 잘 몰랐고, 결사
적으로 지켜야 할 조국이 등 뒤에 있는 것도 아니었다.
살기등등한 그리스 전사들의 위세에 눌린 그들은 뒷걸음쳤다. 그리스 쪽은 중무장 보병들이었다.
투구와 갑옷을 걸쳤고 튼튼한 방패로 몸을 가리면서 밀고 들어갔다. 그에 반해 페르시아 병사들은 얇은 베옷 차림이
었다.
양쪽이 마주섰을 때 심리적으로 압도당하는 쪽은 페르시아 병사였다.
그리스군은 가라앉고 불타는 페르시아 군선의 갑판을 타고 넘어 정신 없이 내달렸다.
이미 지나친 그리스군의 뒤편에 남은 페르시아 군선에 남은 자들이 투항하기 시작했다. 이미 크세륵세스는 의자에
앉아있지 않았다. 창백해진 표정으로 눈 아래에서 벌어지는 믿기 어려운 광경을 바라보던 왕은 배를 버리고 육지로
도망쳐오는 병사들을 보고는 마침내 참았던 노기를 폭발시키고 말았다.
"저 놈들을 모조리 죽여라." 왕의 근위병들이 구사일생으로 살아서 육지에 올라선 도망병들을 살륙했다.
그 꼴을 본 페르시아 군은 이번에는 반대편의 살라미스섬으로 기어 올라갔다. 그러나 그곳에는 아리스티데스가 지
휘하는 그리스 군이 기다리고 있었다.
바다에 빠져 무기를 잃어버린 빈손의 페르샤 병사들이 살라미스 섬의 모래밭에서 수없이 피를 뿌리며 죽어갔다.
페르시아 함대의 총사령관은 크세륵세스의 동생인 아리아비그네스였다.
그는 일단의 부대를 살라미스섬에 상륙시켜 아리스티데스군에게 살육 당하는 우군을 구출하려 했다.
살라미스의 해안가에서 페르시아군과 그리스 군 사이에 난투가 벌어졌다.
여기서도 페르시아군은 그리스군에게 제압 당했다. 살아남은 페르시아군은 허리까지 물이 차는 바다로 몰려 들어
갔고 해안에는 그리스군의 창날이 다가왔다. 뒤를 돌아보아도 이미 구출하러 올 페르시아 군선은 가까이에 보이지
않았다. 크세륵세스의 동생인 아리아비그네스도 혼전 속에서 그리스 군에게 목숨을 잃었다.
모래밭을 넘실거리는 파도 속에 잠긴 수많은 페르시아 병사들의 시체들 속에서 누가 왕의 동생인지 알아 볼 방법
은 없었다.
아침 일찍 시작된 살라미스의 해전은 정오를 한참 넘기고도 가열함이 줄어들지 않았다.
온 바다를 가득 메우던 함성과 비명과 절규와 불타고 가라앉는 군선이 내는 소름끼치는 소음들이 잦아들기 시작한
것은 오후 3,4시를 넘기고 나서였다.
승리는 그리스군에게 돌아갔다. 군데군데 불타는 군선의 갑판과 선실 안에서, 살라미스 섬의 해변가에서 페르시아
패잔병들의 저항이 계속되기는 헸으나 이미 그것은 전투가 아니라 일방적인 학살극이었다.
보고 있던 크세륵세스1세는 거칠게 망토를 등 뒤로 휘감으며 말에 올랐다.
팔레론 바닷가를 새까맣게 뒤덮었던 페르시아군이 언덕을 넘어서 그리스 군의 시야에서 사라져갔다.
군선 위에 살아남은 그리스 전사들의 눈에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들은 이미 칼을 들고 있을 힘도 남아있지 않았다. 3차에 걸친 페르시아전쟁은 살라미스 해전을 끝으로 막을 내렸다.
바야흐로 아테네를 중심으로 한 그리스 반도에는 민주정과 과학과 철학의 꽃이 활짝 피게 된다.
찬란한 그리스 문명과 민주정은 칼로서 지키고, 피로서 쟁취한 것이었다.
크세륵세스가 살라미스 앞바다에서 말머리를 돌리고 회군한 다음 해에 중국에서는 공자가 사망한다.
크세륵세스, 레오니다스, 테미스토클레스와 노자와 공자 그리고 이 책의 주인공인 손무는 비슷한 연배로 같은 시대
를 살았던 사람들이다. 아마 살라미스 해전의 당시에 손무가 살아있었다면 할아버지였을 것이다.
《손자병법》을 크세륵세스가 읽어보았다면 그리스 원정을 했을까 하고 나는 생각해 본다.
孫子兵法 『第一篇 兵者』1
서양에서 페르시아와 아테네가 세 차례에 걸친 큰 싸움을 했던 기간은 중국에서 유명한 오월대전(吳越大戰)이 있었
던 기간과 거의 일치하고, 유가(儒家)와 도가(道家), 병가(兵家)의 시조인 공자와 노자와 손자가 노년에 접어든 시기
였다. 오나라 장수로서 손자가 일선에서 활약했던 시기는 B.C. 500년경까지이며, 다리우스1세가 제1차 그리스 원정
길에 올랐던 B.C 492년에는 막 은퇴하여 야인으로 돌아간 직후였다.
손자는 이름이 손무(孫武)이고 자는 장경(長卿)이다.
일설에 의하면 초나라의 망명객으로서 오나라의 재상직에 있었던 오자서(伍子胥)가 오나라왕 합려(閤廬)에게 천거
하여 장수로 발탁되었다고 하는데, 오왕에게 등용되기 이전의 경력이 전혀 알려져 있지 않은 사람이다.
아니 알려져 있지 않은 것이 아니라 내놓을만한 경력이나 자격이 전혀 없었던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
제나라 낙안(樂安)이 고향이라고 알려진 것과 조상이 진(陣)나라 왕족으로서 본래는 성이 규( )씨였는데, 기원전
627년에 제나라로 망명해 오면서 성을 전(田)씨로 바꾸었다는 진나라 공자(公子) 규완( 完)이 그의 선조라는 정도
가 알려진 것의 전부이다.
공자 완의 자손은 손무가 태어날 때까지 약 100년 정도 제나라에서 뿌리를 내리며 살았는데, 손무의 할아버지인 전
서(田書)가 제나라가 거( ) 땅을 정벌하는데 공을 세운 일이 있어 제경공(齊景公)이 손(孫)이라는 성을 하사하였다
고 한다.
오자서가 손무를 언제 어디서 처음 알게되었는지도 불명하다.
손무는 아마도 초나라에 대한 복수심에 불타는 오자서가 오나라 재상으로 와있는 것을 알고 찾아온 것일지도 모른다.
오자서가 이 사람을 만나보니 대단히 출중한 인물이고 병학에 막힘이 없는 사람이어서 오나라왕에게 천거를 하고 싶
은 마음이 들었을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막상 천거를 하려고 해도 내놓을만한 경력이나 이력서에 쓸 말이 없었다는 것이다.
손무는 오자서를 만나기 전에 어느 나라의 졸병 대장으로도 근무한 적이 없는 백면서생이었다.
군대를 지휘해서 싸워본 일도 없으며, 이겨서 세운 공은 더욱 있을 리가 없었다.
즉 군경력이 전혀 없는 사람을 일국의 참모총장으로 추천하는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천거하는 오자서의 입장에서도 난감한 일이었으리라고 짐작이 된다. 이런 사람을 오왕 합려가 과연 만나줄 지도
장담하기 어려웠다.
그래서 고민 끝에 오자서가 손무에게 아이디어를 낸 것이, 그의 병학을 한 권의 책으로 써서 오왕 합려가 읽어보게
하자는 것이었다.
손무 입장에서도 아무런 경력이 없는 자기를 언변만으로 막무가내로 중용해달라고 하기도 민망한 일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오왕 합려에게 자기에 대한 소개서 및 이력서를 대신할 수 있는 군사논문을 한편 올리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손자병법》이라고 후대에 알려지게 된 책이다.
다시 말하면 이 책은 손무가 오나라의 참모총장으로 취직을 하기 위해 심사를 받은 논문이다.
때문에 이 책은 마키아벨리가 교황 레오10세의 하명을 받고 지어서 올린 《로렌조 사후의 피렌체 제반사에 대한 논고》
와 마찬가지로 한사람을 위한 저작이다.
그것은 바로 오나라 왕 합려이다. 때문에 우리는 《손자병법》이라는 책을 대할 때에 이 책이 불특정 다수를 위한
저작이 아니라 오나라왕 합려라는 인사권자 한사람을 위하여 취직을 목적으로 쓴 글이라는 사실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그러니까 우리는 《손자병법》이라는 책을 오나라왕이 된 입장에서 읽을 때에 가장 올바르게 이해할 수 있다는 것
이다.
책에는 2인칭의 상대호칭이 생략되어 있지만 이 책은 화자(話者)인 손무가 상대인 오왕 합려에게 일대일의 대화식
으로 말하고 있는 내용이다.
달리 표현하면 손무가 합려라는 사람에게 강의하는 제왕학(帝王學)이며 장수학(將帥學)이고 지휘도(指揮道)이다.
이 책을 읽어본 후에 오나라 왕은 대단히 흡족했던지 오자서에게 손무를 만나보겠다고 말한다.
그리고 면접 후에 손무는 오나라의 장수로 일약 특채된다.
그 후에 손무의 처세나 행적으로 미루어 손무가 장군이라는 직업을 얻기 위해 병서를 저작한 것으로 보이지는 않고,
그의 목적은 자신이 연구하고 공부해서 세운 병학의 이론이 실전에서 들어맞는지 아닌지, 실제로 적용 가능한 것인
지 아닌지를 확인하고 싶었던 것이 아닌가 짐작된다.
그리고 그것을 자신과 세상에 실증해서 보여주고는 미련 없이 관직을 버리고 야인으로 돌아갔다.
나는 앞에서 전쟁의 시원으로부터 주평왕이 낙양으로 수도를 옮기는 때까지의 과정을 전쟁사 중심으로 설명했다.
주평왕으로부터 손무의 시대까지 중국은 춘추시대로써 몇 번의 대규모 전쟁을 겪게 되는데, 손무 이전의 시대에 벌
어졌던 고대 중국에서의 전쟁들에 대해서는 잠시 뒤에 다루기로 하고, 페르시아 전쟁까지를 더듬어 본 것을 토대로
해서 손자가 말하는 전쟁의 정의와 의미를 한번 들어보도록 하자.
《손자병법》의 『제1편 계(計)』의 내용인데, 손자가 오왕 합려에게 올린 병서는 이런 말로서 시작된다.
兵者, 國之大事. 死生之地, 存亡之道, 不可不察也. 故經之以五事 校之以七計.
병자, 국지대사, 사생지지, 존망지도, 불가불찰야. 고경지이오사 교지이칠계.
"병자는 국지대사이며, 사생지지이고, 존망지도이기 때문에 헤아려 살펴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것은 오사(五事)로써 다스리고, 칠계(七計)로써 바로잡습니다."
손자는 《손자병법》속에서 '자(者)'라는 글자를 '∼이라는 것'으로 쓰고 있다.
그래서 '병자(兵者)'라는 말을 번역할 때는 '병(兵)이라는 것은' 하고 읽어주면 된다.
예를 들어 '세자(勢者)'라고 할 때는 세력이 있는 사람, 세력을 가진 사람 등의 뜻이 아니라 '세라는 것은...'하는 설명
문의 주부이다.
같은 이유로 여기서의 병자(兵者)는 '전쟁을 하는 사람, 군대를 지휘하는 사람이란 뜻이 아니다.
많은 책에서 이 병(兵)을 '전쟁'이라고 옮기고 있으나 손자는 병(兵)을 전쟁이라는 한가지 의미로 국한하여 쓰고 있
지 않다. 손자가 말하는 병(兵)은 전쟁을 포함해서 군사나 국방, 무력에 관련된 전반적인 사항들을 하나로 뭉뚱그려
쓰는 말이다.
손자는 이런 병(兵), 즉 군사적 안건들은 나라의 큰일이고, (국가나 개인이)죽고 사는 문제이며, 존립과 멸망의 기로
이기 때문에 살펴보지 않을 수 없다고 말한다.
이때 손자가 화자(話者)라면 그의 말을 듣는 사람은 오나라 왕이다.
《손자병법》은 오왕 합려가 읽어보게 하려고 쓴 글이어서 말하는 상대가 분명하다.
그래서 이 책의 문장들은 언제나 오왕 합려라는 상대방에게 손자가 말을 하고 있다는 상황으로서 읽어주어야 한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이 첫 번째 말의 뜻은 '군사는 중요한 일이므로 이에 대해 알아야만 합니다'라고 왕에게 말하는
것이다.
춘추전국 시대의 군주들은 전쟁을 모르고서는 나라를 지킬 수 없었다.
그러나 군주에 따라서는 군사에 관심과 재능이 있는 사람도 있는 반면에 그쪽에는 관심도 재능도 흥미도 없는 경우
도 많았다.
손자가 이 책을 바친 오왕 합려는 군사와 전쟁을 좋아했고, 재능도 뛰어난 왕이었다.
손자가 굳이 오왕 합려에게 군사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라고 건의할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손자가 말하는 진의는 관심이 아니라 전문적인 연구와 공부이다. 즉 역사상 처음으로 손자는 군주에게 군사
를 하나의 학문으로 대해주기를 요청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 《손자병법》의 의의가 있다.
이 책은 인류최초의 군사학 논문이며 군사학을 알고 싶은 사람들을 위해 저술한 교과서인 것이다. 오
사(五事)와 칠계(七計)는 병학(兵學)이 하나의 전문 영역을 다루는 학문으로서의 체계를 열어 가는 첫걸음인 것이다.
경(經)이라는 글자는 '세로라는 의미인 날(씨줄 날줄)'과 '다스린다', '지나다(경과하다)' 등의 자의가 있다.
그래서 경지이오사(經之以五事)를 글자 그대로 해석하면 병(兵)이라는 것은 '오사(五事)로써 다스려야 하는 것입니다'
라는 말이 된다.
여기서 '다스린다'는 말을 현대적인 어감으로 바꾸면 '관리한다'는 말이 제일 적합할 것이다.
즉 군사(軍事)의 관리 요결이 오사이다.
좀더 쉽게 비유를 하면 병(兵)을 자동차라고 하고, 병학(兵學)을 운전기술이라고 했을 때, 자동차를 관리, 정비하는
수칙이 바로 오사(五事)이다. 군사에 관한 모든 문제를 관리하는 기준이고 지침이다.
교(校)는 교정하고 검열한다는 의미의 글자이다.
그래서 교지이칠계(校之以七計)는 '칠계로써 이를 바로잡는다'는 말이다.
위에서와 같이 병(兵)을 자동차에 비유한다면 칠계는 시동 거는 방법, 기어 넣는 방법, 깜박이 켜는 법, 핸들의 조정
과 브레이크와 악셀레이트 페달을 밟는 방법과 같은 실제적인 운전요령과 운전을 하기 전에 반드시 해야 하는 자동
차에 대한 점검, 그리고 도로와 지리 및 도로교통법에 대한 숙지 등과 같은 기본적이고 필수적인 운전자의 능력을
말한다.
운전자의 운전전(運轉前) 체크리스트와 같은 성격이다.
이 체크 리스트 중에 한가지라도 부족하거나 미숙련, 미숙지 상태라면 아직 운전을 할 준비가 안 되었다는 것과 같다.
같은 이치로 칠계가 만족스럽지 못할 때에는 전쟁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결론이 나오는 것이다.
오사와 칠계는 자동차와 운전자의 양쪽에 대한 운전전의 준비태세에 대한 가장 기본적인 체크 항목인 것이다.
미숙련 상태에서 운전자가 차를 운전하여 도로에 나가면 반드시 사고가 나듯이 오사와 칠계가 미비한 국가가 전쟁을
하면 반드시 지고 말 것은 불문가지라 하겠다.
이 오사와 칠계는 비단 전쟁과 군사만이 아니라, 정치, 정당, 사회 운동, 사업을 비롯한 인간의 모든 조직 행위에는
적용가능하고 또 적용해야만 하는 체크방법이다.
《손자병법》의 나머지 내용들은 운전자가 도로에서 운전을 할 때 겪게되는 온갖 상황에 대한 대처요령의 설명으로
보면 과히 어긋나지 않는다.
현대에 와서는 군사를 크게 군정(軍政)과 군령(軍令)으로 나누고 있다.
군정은 국방부장관의 소관 임무이며, 군령은 대통령이나 수상과 같은 군통수권자의 명령을 참모총장이 실행하는 것
이다. 손자가 제1편 시계편에서 말하는 오사와 칠계는 오늘날로 치면 군정(軍政)에 관한 설명이다.
군과 무력에 대한 전반적인 관리의 문제를 논하고 있는 장인 것이다.
그렇다면 오사(五事)와 칠계(七計)가 무엇인지 손자의 말을 계속 들어보자.
孫子兵法 『第一篇 兵者』2
而索其情. 一曰道, 二曰天, 三曰地, 四曰將, 五曰法.
이색기정. 일왈도, 이왈천, 삼왈지, 사왈장, 오왈법.
그것(五事)의 요체를 찾아서 살펴보면,
첫 번째가 도요, 두 번째가 천이요, 세 번째가 지이며, 네 번째가 장이며, 다섯 번째가 법입니다.
색(索)은 '찾을 색'이다. 정(精)이란 천하만물에 깃든 생명의 기운인데, 오사의 정(精)을 찾아보겠다는 말은 그 요체
를 집어내어 설명해 보겠다는 소리이다. 그 설명을 들어보자.
道者, 令民與上同意也, 故可與之死, 可與之生, 而民不畏危.
도자, 영민여상동의야, 고가여지사, 가여지생, 이민불외위.
도(道)라고 함은 백성이 군주와 한마음이 되는 것이며, 그리하여 가히 상하가 같이 죽고 같이 살며 백성
들이 위험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입니다.
'도자(道者)'는 말했다시피 도를 딱은 사람이나 도사가 아니라 '도라는 것은...'이다. 병(兵)을 관리하는 데 있어서
가장 먼저 해야할 1순위의 과제가 바로 정신무장이라고 손자는 주장하고 있다.
나라를 지키고자 하는 상하 전국민의 일치된 의지와 안보에 대한 각오야말로 병(兵)을 다스리는 다섯 가지 과제 중
으뜸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과연 그렇다고 인정치 않을 수 없다.
손자는 이런 정신무장의 본질을 여기서 말하고 있는데, 그것이 바로 국민과 통치자 사이의 일심과 단결이라고 손자
는 말하고 있다. 이것이 오사 중의 첫째인 도(道)이다.
과연 《손자병법》의 명성이 어디서 나온 것인지를 알 수 있다.
손자의 병학이 시대와 나라와 기술이 아무리 바뀌어도 그 적용은 변함이 없으며 그 가치 역시 조금도 줄지 않는 것
은 이와 같은 보편원칙을 말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동시에 손자의 병학은 반드시 군사와 전쟁에만 적용되는 협소한 영역에 머물지 않는다.
그것은 정치, 사업, 가사, 외교 등 인간의 모든 활동에 적용될 수 있는 일반선(一般善)으로서의 가치를 지닌다.
국민과 정치지도자 사이의 신뢰와 헌신이 어찌 군사에만 요구되는 것이겠는가. 인간의 모든 활동은 조직원과 리더의
신뢰와 애정 그리고 합심단결에 성패가 달려있다. 나머지는 모두 부차적인 문제이며, 이것이 가능하다면 해결되어지
는 문제들이다.
그러나 백가지 조건이 충족되고 천가지 여건이 유리하다 해도 이 한가지가 달성되지 않으면 아무런 소용이 없다.
그래서 손자는 이것을 도(道)라고 말하는 것이다.
작금의 대한민국은 백가지 상황이 유리하고, 천가지 환경이 기회를 만들어주는데도 이 한가지가 안되고 있다.
지도자와 국민은 전쟁 중이다. 정당과 정당, 언론과 언론, 단체와 단체, 정치인과 국민이 서로를 적으로 삼아 싸우고
있다. 한국은 일심단결이 아니라 사분오열되어 있으며, 적과 자기편의 구분을 못하고 있으며, 국민은 대통령을 믿지
않으며 대통령은 그런 국민을 상대로 전쟁을 하고 있다.
한국은 내전 중이다. 하늘이 준 황금 같은 기회가 우리 눈앞에서 사라져가고 있다.
우리는 앞에서 스파르타의 레오니다스왕과 3백 명의 용사가 싸운 테르모필레의 전투에서 가히 상하가 같이 죽고 같
이 산다는 것이 실제로 구현되는 것을 보았다. 군주와 하나된 3백 명의 군대는 페르시아의 20만 대군을 움직이지
못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오늘의 한국은 60만 대군을 가지고 몇 명의 테러리스트에 떨고 있다.
天者, 陰陽.寒暑.時制也.
천자, 음양.한서.시제야.
천(天)이라 함은, 음양과 한서와 시제입니다.
손자가 국민의 정신무장 다음으로 꼽는 것이 세 가지이다. 첫째가 음양(陰陽)이요, 둘째가 한서(寒暑)이고, 세 번째
가 시제(時制)이다.
손자 당대의 사람들이 '음양(陰陽)'이라고 말할 때의 개념은 중용(中庸)과 조화(造化)에 가깝다.
중용이란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는 것이요, 조화란 양쪽을 모두 버리지 않고 취하는 것이다.
그래서 대저 국가의 정책은 강온(强穩)이 조화를 이루어야 하고, 당근과 채찍을 같이 구사해야 하며, 코란과 칼이
양손에 쥐어져 있어야 하며, 혀가 말할 때와 주먹이 말할 때를 알아야 하며, 밀고 당기는 것이 능란해야 하며, 나아
가고 물러섬이 자재해야 한다.
자고로 강경일변도의 군사정책을 택했던 나라 치고 사직이 보존된 예가 없고, 평화만을 노래부른 국민이 그 땅과 집
을 온전히 지킨 예가 없다.
음양론에서 정의하는 음양(陰陽)의 본질은 '조화(造化)'이다.
여기서 음은 부드럽고 무르고, 조용하고, 어둡고, 차가우며, 아래를 지향하며, 평화적이고, 정지된 것인데 반하여
양은 강하고, 굳고, 시끄럽고, 밝고, 뜨거우며, 위를 지향하며, 투쟁적이고, 동적인 기운이나 형태, 또는 성향을 말
한다. 때문에 음양이라 하면 이 양자의 어느 쪽에 경도되거나 치우치지 않게 조화를 이루는 것을 말한다.
이것이 군사를 다루는 두 번째 요체인 천(天)에서 손자가 제일 먼저 말하는 것이다.
천(天)의 두 번째인 한서(寒暑)는 현대적 용어로 치환하면 기후(氣候)와 계절(季節)이다.
군사를 관리하고 군대를 양성할 때는 기후와 계절을 고려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은 극히 당연한 이야기다.
이것은 자기나라의 기후만이 아니라 장차에 싸우게될 가능성이 있는 적국의 기후와 계절까지 살펴서 준비하지 않
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손무가 합려에게 등용될 당시에 오나라의 가상적국은 초나라였다.
그런데 초나라와 오나라는 기후와 계절적 환경이 상당히 다른 두 나라이다.
그렇다면 초나라는 오나라의 기후를 고려하여 병(兵)을 관리하여야 하고, 오나라는 초나라의 기후에 맞추어 군대를
길러야 하는 것이 맞을 것이다.
초나라는 장강의 중상류 지역에 자리잡고 있었던 반면에 오나라는 양자강의 하류지역에 위치한 나라였다.
초나라는 산지와 평원이 많고 오나라는 수로가 복잡하게 얽힌데다가 늪지대가 많으며 동시에 덥고 습한 땅이었다.
이런 기후가 군대와 무기에 끼치는 영향에 대해서는 옛날에도 기록된 바가 적지 않다.
좌전(左傳) 정공 4년(B.C. 506년)의 기록에 보면, 초나라 대부 무상흑(武常黑)이 오나라와 싸우러 가는 장군 자상
(子常)에게 '오나라는 습한 지역인데 우리 전차는 모두 가죽으로 만들어져 있으니 오래 견디지 못할 것이다.
그러니 장군은 부디 속전하시라'고 조언하는 대목이 있다.
습한 나라인 오나라는 전차를 나무로 만들었지만 초나라는 가죽으로 둘렀기 때문에 습한 지역에서 오래 싸우게 되면
전차가 썩게 되지 않을까 우려하여 한 말이었다.
고려말에 최영이 요동정벌을 계획했을 때, 이성계가 이에 반대하여 올린 상소문에 보면, 여름철에는 비가 많이 오고
습기가 많아 활의 힘이 약해져서 싸우기 어렵다는 대목이 보인다.
예로부터 동북아 삼국을 말할 때 중국은 창에 능하였고, 왜인은 칼을 잘 썼다.
그러나 활에 있어서만큼은 우리 민족이 가히 독보적이었다. 그만큼 명궁이 많았기도 했지만 우선 활의 성능이 좋았다.
당나라가 신라 활을 그토록 모방하여 만들고 싶어했고 기술자들을 붙잡아다가 강제로 만들게 하기도 했지만 결국
신라활을 만들지 못했다는 기록이 있다.
그만큼 우리 군대의 강점은 활에 있었다. 그런데 여름철에는 활시위가 늘어지고 활을 겹쳐 붙인 아교가 녹아서 장마
철에는 활을 거의 쓸 수가 없게 되는 것이다.
우리 군대의 가장 우수한 무기와 강점을 발휘할 수 없는 상태에서 싸우는 것은 어리석은 거병임을 이성계는 주장한
것이다.
이밖에도 기후와 계절을 고려치 않아서 전쟁에서 패배한 기록은 수없이 많다.
임진왜란 때의 왜군도 조선의 겨울철이 어떤가를 모르고 쳐들어왔다가 평양에서 겨울을 처음 맞아보고는 위로 장수
부터 아래로 졸병까지 얼이 빠져버렸다.
한강과 대동강이 통 채로 얼어붙는 그런 겨울을 왜인들은 겪어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당시만 해도 지금의 동경 북쪽으로는 사람이 안 살았던 것이 일본이었다.
그 첫겨울의 살인적인 혹한을 당해보고는 그만 용기도 의기도 야심도 다 달아나고 그저 화의를 맺고 일본으로 돌아
갔으면 하는 생각 밖에는 못하게 된 것이다.
히데요시가 명나라를 정복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통과해야 하는 한강 이북으로부터 만주에 걸친 땅의 겨울이 어떤
것인지 알았다면 대명정벌 따위의 망상은 일찌감치 버렸을 것이다.
히데요시의 불행은 겨울같지도 않은 태평양 기후대의 일본 중남부 겨울만을 겨울로 겪어보았다는 경험의 한계에서
온 것이었다.
러시아 원정길에 올랐던 나폴레옹의 그랑드 아르메나, 쏘련을 침공한 나치독일의 기갑군 역시 기후와 계절을 고려
치 않은 무모한 원정으로 비참한 말로를 겪었던 불운한 군대였다.
손자는 자신이 오나라의 원수가 되자 자기의 이론에 충실하게 오나라 군을 개혁하여 변모시켰다.
물러나 지킬 때에는 오나라의 기후에 맞도록 무기와 장비를 갖추었고, 원정시에는 초나라의 기후에 맞도록 군장을
갖추어 싸움에 임하였다.
천(天)의 세 번째 항목인 시제(時制)를 보자. 시제란 바로 순서(順序)이며, 순서는 완급(緩急)에 따른 선후(先後)이다.
흔히들 이 대목에서 손자가 말하는 시제(時制)를 '타이밍(Timing)'이라는 협소한 개념으로 해석들을 하고 있다.
타이밍이라는 것은 어떤 일을 실행하는 시기의 선택을 말하는데, 그것을 적절하게 하기 위해서는 필히 급한 일과 덜
급한 일을 가리고, 더 중요한 일과 덜 중요한 일을 판정하여 앞세울 일과 뒷세울 일의 순서를 정하는 분별력이 요구
된다.
지금 참여정부는 600년 수도 서울의 이전을 계획하고 있는데, 이것은 군사나 안보 문제 못지 않은 국가의 대사이다.
이런 대사를 발기함에 있어 과연 조화와 질서는 차치하고, 일의 순서와 완급이라도 헤아리고 있는지를 들여다보면
실로 근심이 천근과 같다.
손자가 말하는 오사(五事) 중의 두 번째인 천(天)에 대하여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가 강(强)과 온(穩), 강(剛)과
유(柔), 진(進)과 퇴(退), 직(直)과 곡(曲)에 치우침이 없는 조화가 있어야 함이니 이를 음양(陰陽)이라 했고, 덥고
추움, 건조하고 습함, 바람과 비, 역병과 산물, 춘하추동의 계절을 고려함이니 이를 한서(寒暑)라 했으며, 선(先)과
후(後), 완(緩)과 급(急), 중(重)과 경(輕)을 헤아려 일을 행하는 때를 정하는 것을 일러 시제(時制)라 하였다.
孫子兵法 『第一篇 兵者』3
地者, 遠近.險易.廣狹.死生也.
지자, 원근.험이.광협.사생야.
지(地)라고 함은 멀고 가까움, 험하고 평탄함, 넓고 좁음, 사지인가 생지인가를 말합니다.
군사(軍事)의 세 번째 고려 요소로서 손자는 지리적 환경을 꼽고 있다. 거리가 얼마나 멀고 가까운지, 지형과 산세는
어느 정도 험하고 평탄한지, 넓은 땅인지 협소한 땅인지, 그리고 취해도 되는 땅인지, 가서는 안 되는 곳인지 등등을
고려하여 군사 정책을 수립해야 한다는 이야기다.
여기서 원근(遠近), 험이(險易), 광협(廣狹)은 이해하기 어려운 말이 아니지만 사생(死生)의 의미에 대해서는 약간의
설명이 필요한 듯 하다.
여기서의 사생은 사지(死地)와 생지(生地)를 말하는 것으로, 사지(死地)는 군사행동의 대상이 될 수 없는 지역이라고
이해하면 될 것이다.
군대를 통과시키거나, 주둔시킬 수 없는 지역을 군사(軍事)의 무대로 삼으면 참극을 피할 수 없다.
지리적 이유만으로도 이기기 힘든 땅은 고대로부터 병가(兵家)를 괴롭힌 문제였으며, 지리적 환경에 대한 무지나
대비의 소홀 때문에 비참한 파국을 맞이한 군대는 역사에 드물지 않았다.
앞에서 살펴본 페르시아 전쟁에서 다리우스 1세의 제1차 그리스 원정이 실패한 것은 페르시아 함대가 아토스곶 앞
바다의 거친 풍랑을 이겨내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당시의 전선(戰船)은 노를 저어 항해했기 때문에 언제나 육지를
바라보면서 해안을 따라 항해를 해야만 했다.
난바다로 나가는 것은 위험했다. 2차 원정 때 마라톤에서 페르시아가 패배한 것도 에게해를 바로 가로질러 마라톤에
상륙했기 때문에 동원한 군선이 대형선박에 한정되어 소수 정예의 원정군이 될 수밖에 없었고, 아테네군과의 전투
시에는 병력의 수에서 그리 우위를 점하지 못했던 때문이었다.
3차 원정에서는 1차 원정과 2차 원정의 교훈을 모두 살려서 대병력을 동원한 원정을 하게 되는데 이때는 역시 당시
의 함대에게 손자가 말하는 사지(死地)인 아토스곶 앞바다의 통과가 문제였다.
아토스곶 앞바다에는 육지에서 상당한 거리까지 해수면 아래에 위험한 암초들이 있고, 해류가 급하고 풍랑이 거칠
어서 숙련된 뱃사람들도 지나가기를 꺼리는 바다였다.
군대가 반드시 통과하지 않으면 안 되는 길목에 이러한 사지(死地)가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한 페르시아군은 함대가
풍랑에 소멸해 버리자 철군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크세륵세스의 제3차 그리스 원정 때는 이 사지(死地)에 대한 대비책을 강구하였다, 그것이 바로 크세륵세스 운하이
다. 뾰족한 칼날처럼 바다를 향해 돌출한 아토스 반도의 뿌리 쪽을 절단해서 운하를 파버린 것이었다.
페르시아 함대는 아토스 곶을 우회하지 않고 크세륵세스 운하를 통과하여 바로 그리스 해안을 따라갈 수가 있게 된
것이다.
수나라와 당나라가 중국 대륙 전체의 국력을 총동원하고도 번번이 고구려 원정에 실패한 까닭은 바로 고구려라는
나라가 너무나 먼 나라였기 때문이었다.
당나라 수도인 장안에서 중국의 동북 국경인 산해관(山海關)까지가 대충 700km이며, 거기서 고구려 수도인 평양까
지가 또한 그 정도 거리가 된다.
중국과 고구려 사이는 거리만의 문제가 아니라 그 중간에 손자가 말하는 사지(死地)가 있었다.
지금 발해만의 북쪽인 요서지역의 대소택지가 그것이다.
요동만으로 흘러드는 요하의 하류지역은 수계가 복잡하고 광대한 땅이 갈대 숲에 덮힌 습지이며 곳곳이 늪지대였다.
이 요서의 소택지를 우회하려면 그만큼 행군로와 보급로가 길어졌다.
이곳을 통과해서 요하를 건너면 바로 고구려의 변방 요새지대를 만나게 된다.
요하의 동안을 따라 요동성, 안시성, 건안성 등이 주욱 늘어서 있는 것이다. 중국의 원정군은 일단 요하를 건너게 되
면 앞은 고구려의 요새요 등뒤는 뒤돌아보기 싫은 소택지가 되는 형국이어서 단기속전으로 요새지대를 돌파하지
못하면 군대의 보급은 그야말로 지난한 문제가 될 수밖에 없었다.
때문에 고구려 원정의 승패는 사실 보급을 맡아줄 수군에 달려있었는데, 수나 당은 수군의 싸움에서 고구려에 이기
지를 못하였다.
안시성에서 패한 당태종이 본국으로 돌아갈 때에 가장 쉽고 빠른 길은 배를 타고 돌아가는 것이었다.
요하 하류 부근에서 배를 타면 발해만을 가로질러 지금의 당산이나 천진에 가는 것은 3일이 안 걸리는 뱃길이었다.
그런데도 당태종은 요동만의 제해권을 장악하지 못했기 때문에 고구려군의 추격에 쫓기면서 습하고 위험한 요서의
소택지를 3개월이 걸려 통과하는 몸서리치는 패주를 해야만 했다.
이 동안에 당태종은 건강을 완전히 잃게 되어 장안에 도착했을 때는 거의 송장에 다름없는 상태였다고 한다.
고구려 멸망 후에 나당전쟁이 벌어지게 되는데 이때도 당군은 한반도에 주둔한 군대에게 보급품을 보내지 못해서
결국 신라에 졌다고 말할 수 있다.
중국의 입장에서 보면 한반도는 바로 손자가 말하는 사지(死地)이다. 그 거리는 멀고 왕래는 고통스러운 땅이었던
것이다. 군대를 보내어 정복하더라도 유지하기 어려운 땅이었다.
그래서 나당전쟁 패배 후 천년 동안 중국의 군대가 압록강을 넘지 못하였다. 중국의 한반도 원정은 당나라로서 마
지막이었다가 지난 세기에 천년만에 이 땅에 중공군이 들어왔다.
역시 보급의 문제와 제해권의 상실로 이기지 못하고 이 땅을 떠난 것도 천년 전이나 마찬가지였다.
이러한 사지(死地)는 자연적인 것도 있으나 인공적으로 만드는 경우도 있다.
임진왜란 때 출전을 재촉하는 조정의 명령에 대하여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이 올린 장계의 내용에 '부산포는 사지
(死地)여서 진공이 어렵습니다'라고 하는 내용이 있다.
당시에 왜군은 수전에서 이순신 함대에 연전연패 당하자 관백(關伯) 히데요시의 명령으로 모든 배를 항구에 붙들어
매고 그 바깥을 판자로 둘러서 막고 육지에 포대를 설치하여 엄호하게 했으며, 어떤 경우에도 바다에 나가 싸우는
것이 금지되어 있었다.
당시의 수군은 해안을 따라 노를 저어 가다가 식사를 하거나 밤에 잠을 잘 때는 육지에 올라가야 했다.
때문에 바닷가에 면한 지원기지로부터 멀리 나갈 수가 없었다. 당일로 되돌아올 수 있는 거리 내에 아군의 지배 하에
있는 육지나 섬이 없으면 함대만으로는 힘을 쓸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당시에 경남 일대는 전부 왜군이 점령하고 있었고, 부산포에 가까운 섬들에도 왜군이 주둔하여 진채를 세우
고 있었다.
왜군이 점령하고 있는 거제도를 지나서 한참을 더 동쪽으로 들어가야 부산포이다.
부산포 부근에는 배를 댈 섬도 없고, 군사를 쉬게 할 안전한 바다도 없었다. 왜 함대가 맞서 싸우러 나와주지 않는 한
강력한 육군으로 점령되어 있으며 사방의 섬들도 적의 점령하에 있는 항구 깊숙이 함대를 끌고 돌입하는 것은 자살
행위나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이순신장군은 부산포를 사지(死地)라 하여 조정의 명령을 받들지 못한다 했던 것이다.
바다 싸움에 대해 알 리가 없는 조선 조정은 이순신을 파직하고 원균을 그 자리에 임명했는데, 원균 역시 수전에 우
둔한 사람은 아니어서 역시 진공불가를 주청하였으나 권율에게 붙들려 곤장을 맞고 어쩔 수 없이 함대를 인솔하여
사지로 향하게 된다.
이 원균의 함대를 왜 수군은 점점 더 먼 대마도 앞바다로 유인해 나갔고, 적을 쫓다가 지친 조선 수군은 뱃머리를
돌렸지만 그 어느 곳에도 닻을 내리고 쉴 곳이 없었다.
수군들이 목이 말라 죽을 지경이 되자 왜군이 점령한 거제도에 멋대로 상륙해서 물을 찾다가 도륙 당해 죽었고, 노를
너무 오래 저어 부르터진 손으로 밥을 지어먹으려고 솥을 걸다가 왜군의 총에 죄 맞아 죽었다.
상승의 조선 수군은 사지인 부산포로 들어섰다가 근처의 섬들과 육지에 사분오열 흩어져 살길을 찾다가 모조리 소멸
되어 버린 것이다.
원균의 패전은 1차적으로 수전에 무지한 조정과 휘하의 군대를 사지로 몰아넣은 권율의 무모한 지휘에 그 책임이
있다.
손자는 《손자병법》의 첫머리에 이에 대해 말하고 있다.
대저 병(兵)을 다스릴 때는, 거리가 얼마나 먼지, 지형이 얼마나 험한지, 땅이 어느 정도 넓은지, 그리고 들어가 살
곳인지 죽을 곳인지를 먼저 헤아리라고.
이순신 장군은 파직을 당하면서도 사지에는 들어서지 않았다. 언제나 자신에게는 생지이고 적에게는 사지인 곳에서
만 싸운 것이다.
그래서 이순신 장군은 생전에 패배를 몰랐다. 역사상 뛰어난 장군들 중 비참한 말로를 맞은 사람들은 대개 말년의
교만함이 사지를 두려워하지 않고 뛰어들게 만든 때문이었다.
당태종 이세민이 그러했고, 나폴레옹이 그러했고,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그러했고, 히틀러가 그러했다.
중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재상으로 꼽히는 제나라의 관중(管仲)도 산융(山戎) 정벌시 지리에 어둔 탓에 사지에 들어
섰다가 거의 죽을 위험에 빠지게 된다.
물이 없는 곳에서 전군이 목말라 죽게 되었을 때, 관중이 개미가 사는 곳에는 물이 있으니 개미집을 찾으라고 명령
하여 사막에서 물을 찾고, 길을 잃고 헤매게 되었을 때, '늙은 말은 길을 기억합니다'라고 제환공을 위로하면서 가장
나이 든 늙은 말을 앞서게 하고 그 뒤를 따라감으로써 길을 찾아나오게 되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천하의 관중도 사지에 빠졌을 때는 실로 위험했던 것이다.
孫子兵法 『第一篇 兵者』4
오사(五事)의 네 번째인 장(將)을 보자.
將者, 智.信.仁.勇.嚴也.
장자, 지.신.인.용.엄야.
장(將)이라고 함은 지식과 믿음과 인자함과 용기와 엄격함이옵니다.
'장(將)'이란 지휘와 통수의 본질이다. 손자는 제네랄쉽(Genaral ship)에 대해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손자가 여기에 열거한 다섯 가지 요소를 장수가 구비해야 할 자질로 해석하는 책들이 많은데, 오사(五事) 전체의 성
격으로 볼 때 이것은 지휘관의 자질이 아니라 지휘도의 본질에 대한 설명으로 보는 것이 더욱 타당할 것이다.
오히려 지휘관의 자질로서 다섯 가지를 설명한 것은 《오자병법(吳子兵法)》의 『논장(論將)』 편이 더 적합하다.
오자는 장수의 자질을 이(理 ; 군사지식), 비(備 ; 준비성), 과(果 ; 결단력), 계(戒 : 절제력, 자기통제력), 약(約 : 간소
화, 단순화)의 다섯 가지로 설명하였다.
손자는 지휘도의 본질을 다섯 가지로 설명하면서 그 첫 번째 항목으로 지(智)를 꼽고 있다.
이것은 군사지식을 비롯한 지휘관의 인문소양 전반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면 될 것이다.
현대적 용어로 말하면 전문직업적 능력이다. 손자는 지휘도라는 것을 인격적이고 도덕적인 가치덕목을 앞세워야 할
성격의 것이 아니라 극히 지적인 연구와 지식의 사용에 속하는 문제로 보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지(智)를 가장 앞에 세운 것이다.
손자의 병가를 제외하고는 춘추전국 시대의 제자백가의 어느 문파나 철학, 학문에도 지(智)를 으뜸 가치로 꼽는 것은
없다. 대부분의 경우에 지(智)는 가장 하위 덕목이다.
그러나 병학에 있어서 만큼은 이 지(智)가 제일 먼저 나온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손자는 군사와 전쟁을 철학적 담론이 아니라 과학이나 수학의 영역으로 보고있다는 반증이다.
기계적인 법칙의 적용이 가능한 분야로 보고 있는 것이다.
만약에 전쟁의 지휘나 장수의 직무 수행에 어떤 원칙과 법칙이 세워질 수 없는 것이었다면 손자는 지(智)를 제일 앞
에 두지는 않았을 것이다. 군의 지휘는 정확한 법칙을 숙지하고 원칙을 통찰한 기계적 원리에 의해 이루어져야 한다
는 손자의 사상이 여기에 드러나고 있는 대목이다.
군사와 전쟁은 인격적이고 도덕적인 가치덕목이 전문지식과 능력을 결코 대신해줄 수 없는 것이다.
때문에 만약에 군주가 군사에 대한 지(智)가 부족할 때는 반드시 군사(軍師)가 있어야 했다. 오늘날로 보면 참모이다.
평생동안 전쟁터를 누빈 카에사르는 이 점을 누구보다도 잘 알았던 사람이었다.
어떠한 학문적 소양과 정치적 재능과 언변과 도덕적 수양과 성격적인 강점도 전쟁터에서 전문적인 군사지식을 대신해
줄 수가 없다는 점에 대해 그는 착각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조카인 옥타비아누스를 다른 모든 면에서 뛰어나게 출중한 재목으로 알아보고 자신의 후계자로 지명하
였으나, 옥타비아누스는 군사에 대한 지(智)가 없으며, 군대 경력을 갖고있지 못함도 간과하지 않았다.
그래서 카에사르는 생전에 자신의 후계자를 위하여 탁월한 참모를 준비해 두었다, 그가 바로 아그립파이다.
아그립파가 있어서 옥타비아누스는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의 연합군을 악티움에서 쳐부수고 로마를 통일할 수
있었다. 이후에도 그는 전쟁에 관해서는 아그립파의 조언에 전적으로 의지하면서 로마를 통치했다.
옥타비아누스는 군의 지휘관으로는 이류였다.
한고조 유방이나 삼국지의 유비도 이런 유형에 들어가는 사람으로 볼 수 있다.
옥타비아누스와 마찬가지로 유방에게는 한신, 유비에게는 공명이라는 뛰어난 군사들이 그들의 부족한 군사적 지(智)
를 보완해 주었던 것이다.
한때 우리나라 정가에는 '머리는 빌릴 수 있어도 건강은 빌릴 수 없다'는 모 정치인의 어록이 유행한 적이 있었다.
군사에 있어서 최고 통수자는 지(智)를 빌릴 수 있다.
그것이 바로 손무와 한신, 공명과 같은 군사(軍師)이고, 현대에 와서는 참모들이다.
그러나 남에게서 빌릴 수 없는 것이 있다. 그것을 손자는 건강이라고 말하지는 않았다. 그것은 손자가 두 번째로 장
(將)의 덕목으로 말하는 신(信)이다.
어쩌면 손자는 이 논문을 합려에게 바치면서 '지(智)는 자기에게서 빌려가고, 당신은 나에게 신(信)을 보여 주십사'
하고 말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이 대목을 읽으면 왜 손자가 오나라 왕 합려에게 면접을 보는 날 애꿎은 궁녀를 두 사람이나 죽였는지 짐작이 된다.
손자가 오왕 합려를 처음 만나 상견례를 했던 날의 이야기는 《사기(史記)》의 『손자오기열전』이나 《오월춘추(吳
越春秋)》와 같은 사서에 실려서 전하는데, 은작산에서 발견된 죽간본 속에 이 상황에 대한 더욱 상세한 기록이 있다.
제목을 『견오왕(見吳王)』이라고 하는 것이다.
제목 그대로 손자가 오왕을 만나 면접을 본 날의 기록이다.
이 『견오왕』의 첫 구절은 합려가 이렇게 말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십삼편(十三篇) 소(所) 명도언공야(明道言功也)". 해석을 하면 "(네가 지어 올린)병서 13편을 읽어보니, 그 속에는
(네가) 도를 밝혀놓았고, 공을 말해 놓았더라."
이 말로 미루어 합려는 손자의 병서를 읽어보고 흡족했던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이어서 한번 실제로 보여줄 수 있겠느냐 하니, 손자가 '그거야 별 어려울 게 없다'고 대답한다.
이후 진행되는 이야기는 잘 알려진 것이어서 다소 진부한 감이 있지만 손자의 장(將)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일화
보다 더 나은 것은 없으므로 소개하기로 한다.
합려가 시범을 보기를 원하자 손자는 합려의 궁녀들을 뜰에 집합해서 즉석에서 조련을 시켜서 훌륭한 군대로 만들어
보이겠다고 장담을 한다.
합려는 호기심반, 기대반으로 해보라고 승낙을 했겠고, 궁녀들의 군사 훈련이라는 전대미문의 일이 오나라 궁성의
뜰에서 벌어지게 되었다. 당연히 잘 될 리가 없었겠다.
뜰에 불려나온 궁녀들은 키득거리고 손에 든 병장기로 장난치고 웃기 바빴다. 그녀들은 장난인 줄 알았지 이게 정말
실전 같은 훈련일 줄은 생각을 못한 것이다.
손자가 그녀들에게 가르치려고 한 것은 간단한 제식훈련이었다. 북을 치면 줄을 맞추어서 앞으로 나오고, 뒤로 들어
가고, 오른쪽으로 도는 정도의 초보적인 훈련이었는데, 아무리 북을 치고, 구령을 해도 궁녀들은 반장난이었고 그저
킬킬거리기만 할뿐이었다.
손자는 아주 간단한 구령을 세 번 반복해서 들려주고 다섯 번을 암송시킨 후에 하게 했고, 잘 되지 않자 다시 세 번
들려주고 다섯 번 암송하는 것을 세 번을 되풀이 해주었다.
그래도 제대로 하지 않자 손자는 지휘관으로 임명한 궁녀 둘을 끌어내어 목을 베었다.
그 궁녀 둘은 오나라왕 합려가 가장 총애하는 여자들이었다. '준비가 되거든 다시 부르시게' 하고 멀찍이 가 있던
합려가 보아하니 손자가 자기 궁녀를 둘이나 죽이려 하는지라 급히 뛰어와서 만류하자 손자가 말하기를 "저는 왕에
게서 임명된 장수요, 지금은 전쟁을 하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집니다. 장수가 전쟁터에 있을 때는 왕의 명령이라도
받아들일 수 없는 경우가 있습니다." 하고는 사정없이 두 궁녀의 목을 베어버렸다.
겁에 질린 궁녀들이 그 뒤부터는 구령 하나에 착착 맞아서 돌아갔음은 미루어 짐작할 수가 있는 바다.
원래 그렇게 어려운 동작들이 아니었을테니까. 그러나 반재미삼아 한번 보자고 했다가 자기가 가장 아끼던 궁녀 둘
을 눈앞에서 잃은 합려는 그 훈련이 그다지 재밌지 않았던 모양이었고, 내심 많이 불쾌했던 모양이다.
대충 보는 둥 마는 둥 하고는 손자를 물러가게 한 후에 한동안 다시 부르지를 않았다고 한다.
오자서가 열심히 변명을 하고 합려의 마음을 위로한 탓인지, 아니면 원래 합려가 그 정도 그릇이 큰 군주였던 탓인
지, 면접장에서 황당한 살육극을 저지르고도 손자는 결국 오나라 군대의 지휘자로 등용이 되었다.
이 사건을 찬찬히 살펴보면, 손자는 자기가 말한 장(將)의 다섯 가지 조건을 이 사건을 통하여 합려에게 전부 보여주
고 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우선 손자가 궁녀들을 뜰에 불러모은 후, 대열을 갖추고, 행진을 하고, 여러 가지 동작을 취하도록 설명하는 것들을
포함하여 병사들을 훈련시키는 방법과 요령 자체가 바로 장(將)이 가져야 할 첫 번째 자격인 지(智)다.
이것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장수로서 아무 일도 할 수가 없다.
병사들을 모아놓고도 당장에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는 것이니, 나머지 자질들을 언급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손자가 궁녀들을 훈련시킬 때, 같은 구령과 명령을 하는데 있어서 몇 번을 되풀이하더라도 결코 처음과 달라지지 않
는 것은 바로 장수의 신(信)을 보여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궁녀들이 웃고 키득거리면서 몇 번이나 명령을 무시하고 따르지 않았지만 화를 내지 않고 되풀이 설명하고 가르쳐
준 것은 바로 장수의 인(仁)을 보여준 것이다.
그런데도 궁녀들이 명령에 따르지 않았을 때, 군주가 만류를 하는데도 총애하는 궁녀를 처형하는 것이 바로 장수의
용(勇)이며, 처형 후에 제대로 된 시범을 끝내 보여준 것이 바로 장수의 엄(嚴)이라 할 수 있다.
손자는 글로 적어 올린 내용과 이론을 정확하게 실제로 보여준 것이다.
면접 날, 손자가 합려에게 보여준 것은 '대저 장수란 첫째로 군사의 실무에 밝아야 하고, 다음은 신뢰할 수 있어야 하
며, 다음은 인자함이 구비되어야 하고, 그 다음은 용기가 있어야 하며, 마지막으로 엄격함을 간직해야 하는 것입니다'
라는 것이었다.
동시에 손자는 합려에게 통수자로서의 신(信)이 있는 사람인지 보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결국 오나라 군대의 총사령관은 왕인 합려이기 때문에 신(信)은 합려에게도 요구되어야 하는 것이었다.
장수로서 권한을 준 이상 그 권한을 행사할 수 있도록 허락하는 것이 바로 군주가 장수에게 보여주어야 할 신(信)이
었다. 손자가 두 궁녀의 목을 베고도 그 시범을 무사히 끝낼 수 있었던 것은 합려의 도량과 신(信)이 부족했다면 성
사되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랬다면 합려는 손자와 같은 훌륭한 군사를 얻지 못했을 것이고, 오나라가 패자가 되지도 못했을 것이다.
오사(五事)의 마지막은 법(法)이다.
法者, 曲制.官道.主用也.
법자, 곡제.관도.주용야.
법이라는 것은 군대의 편성과 명령체계, 그리고 보급체계의 규정을 말합니다.
《손자병법》에 대한 주해서를 남긴 사람 중에는 삼국지에 나오는 유명한 조조(曹操)가 있다.
조조는 이 세 가지를 해석하기를, "곡제(曲制)란 부대의 조직과 편제단위인 부곡(部曲), 정보의 소통수단으로서 깃발
인 기치(旗幟)와 쇠와 가죽악기인 금고(金鼓)의 운영규정이다.
관도(官道)는 조정의 벼슬 체계와 식량의 수송로를 말한다. 주용(主用)은 주력부대인 주군(主軍)의 보급물자이다"라
고 하였다.
조조 이래로 학자들은 이 단어들을 해석하기를, 곡제(曲制)는 오늘날의 편제(編制)와 같은 개념으로, 관도를 명령과
지휘계통인 군령(軍令)으로, 주용(主用)은 식량을 비롯한 군수품으로 해왔다.
손자가 여기 말하는 법(法)은 오늘날로 보면 군조직법(軍組織法)에 대한 설명이다.
이것에 대해 각론으로 들어가면 조조가 주해한 것처럼, 군대를 지휘하는 각종의 명령전달수단인 깃발들과 북, 징의
사용법과 군호의 용례 등이 정리되어질 것이다.
손자가 군조직법(法)을 세 가지로 나누어 말하면서 군수물자의 조달을 넣어놓은 것은 그만큼 당시에 군을 움직일 때
에 그에 수반되는 식량과 마초를 비롯한 각종 군수품의 징발과 조달에 세세한 법령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손자 당대에는 군역은 사(士) 이상의 신분에게만 지워졌고, 피지배층은 군대로 징발되지 않았다.
이것은 전세계적으로 보편적인 현상이었다.
각종 군장 역시 출전하는 사람 각자가 갖추어서 나갔던 것이 일반적이었다.
후대에 가서 전국시대에 접어들면 국민개병제(國民皆兵制)가 일반화되어 평민들도 강제로 군인으로 징발되었고, 이
들에게 필요한 군장과 무기는 국가가 지급하게 되었다.
그러나 손자 당대까지는 귀족군이 일반적이어서 봉건제도의 계급에 따라 각 신분에 맞게 할당된 병사와 무구를 각자
의 경제력으로 갖추어서 자신의 상관인 영주의 소집에 응하였다.
식량과 마초 등의 군수물자도 각자가 할당된 양을 책임져야 했다.
그리스나 훗날의 로마군도 자기의 갑주와 방패, 창과 칼은 시민 개인이 책임지고 갖추게 되어 있었다.
그러니까 시민은 자신의 무장을 스스로 갖추고 군인으로서 복무에 응할 수 있는 사람들이었던 것이다.
손자가 말하는 주용(主用)이라는 말은 단순한 군수품에 대한 법령이라기보다는 현대적인 의미로 해석하면 전시동원
에 관한 법령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동원체계를 잘 확립해서 국가 총력전으로서 전쟁을 수행한 첫 번째 고대국가가 바로 오나라이다.
물론 그러한 법제는 손자가 세운 것이고, 그것에 힘입어 신흥국가인 오나라가 전통적인 중원의 강국인 초나라를 멸할
수 있었던 이유였다.
나중에 상세하게 그 경과를 살펴보겠지만 오초전쟁은 먼 훗날의 청일전쟁이나 러일전쟁과 유사하다.
근대적인 법체계와 군대조직을 갖춘 신흥 일본이 동서양의 대표적인 전통적 강국인 중국과 러시아를 꺾을 수 있었던
것은 고대에 오나라가 초나라를 패망시킨 것과 비견될 수 있다.
손무가 병(兵)의 책임자로 발탁된 후의 오나라는 역사상 처음으로 평민출신의 징집병으로 이루어진 대규모의 보병을
양성하고 그것으로 전차를 탄 귀족군을 무찔렀다.
그 승리는 손자가 세운 법(法)의 승리라고 할 수 있다.
잘 정비된 법이야말로 국력의 요체이자 군사력의 기초임을 실증해서 보여준 최초의 인물이 손자이며, 이 사상은 훗날
상앙이 법을 정비한 진나라가 천하를 통일하는 것에서 다시 한번 입증된다.
손자는 오사(五事)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려 말하고 있다.
凡此五者, 將莫不聞, 知之者勝, 不知者不勝.
범차오자, 장막불문, 지지자승, 부지자부승.
무릇 이 다섯 가지(오사)는 장수된 자가 (귀담아)듣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니,
(이것을)아는 자는 이길 것이고, 알지 못하는 자는 이기지 못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