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헤론 선교사(John W. Heron 1856~1890) |
양화진에 첫번째로 잠들다 |
“땅끝으로 가라”는 명령을 순종하기 위해서 한국땅을 밝고 한없이 울던 존 헤론(John W. Heron)은 1856년 6월 15일 영국에서 태어났다. 영국에서 목회를 하던 그의 아버지는 존이 14세때 미국 테네시 주 녹스빌로 이민 와서 정착하고 목회를 했다. 존은 1883년 개교 이래 최우수 성적이라는 영예를 안고 테네시 의과대학을 졸업했다. 테네시 의과대학에서는 존 헤론에게 모교에 남아서 교수가 되어 후배를 양성하는 길을 택하라고 끈질기게 권유해 왔다. 그 길은 장래가 보장되는 안정된 길이기도 했다. 의미 있고 보람된 일이기도 했다. 그러나 왠지 모르게 그것이 자신이 가야 할 길이 아닌 것 같았다. 존은 학교 당국과 스승의 권유를 뿌리치지 않을 수 없었다. 존은 테네시 종합대학교 의과대학을 졸업한 뒤 뉴욕종합대학교 의과대학에서 공부를 계속했다. 의사 시험 준비를 하던 중에 존은 어느 부흥회에 참석하여 성령으로 거듭나는 체험을 했다. 그는 기도하는 중에 “이제 준비가 끝났으니 땅끝으로 가라!”는 음성을 들었다. 그는 극동아시아의 한 작은 나라 코리아의 의료선교사가 될 것을 결심했다. 1884년 봄, 그는 해리어트 깁슨과 결혼식을 올리고, 미국 북장로교 선교부 선교사로 임명받아 1885년 6월 21일에 코리아에 입국하였다.
광혜원에서 선교사 한 사람이 더 늘자 화제는 더 많아지고 활기를 더했다. 조선의 역사, 정세, 풍속부터 상감의 전의(典醫)가 된 알렌의 역할에 이르기까지 이야기꽃을 피웠다. “왕이나 왕비를 진찰한 일이 있습니까?” “왕비를 진찰한 일이 있습니다. 물론 대면할 수는 없는 일이고 휘장이 무겁게 내려진 이쪽으로 내어민 왕비의 손으로 맥박을 짚어볼 수밖에 없었지요. 기이한 느낌이었지만 긴장할 대로 긴장하고 있어서 느낌이고 무엇이고 문제가 아니었어요. 왕비의 혀를 찰색해야겠는데 참으로 난감하더군요. 그 구멍으로 왕비가 내민 혀를 볼 수밖에 없었지요.” 헤론은 호기심에 빛나는 눈으로 알렌을 쳐다보고 있었다. 헤론은 알렌의 병원일을 도왔다.
여러가지 병과 갖가지 사연을 안고 오는 환자들이 병원에서 연출해 내는 일들도 또한 가지가지였다. 여자들이 병원을 찾아오는 경우는 ‘에라! 기왕 죽을 수밖에 없는 병이라면 병원에나 한 번 가보고 죽자’는 심정에서 마지막길로 알고 찾아오는 것이었다. 어느날 헤론은 눈이 둥그레져서 알렌과 언더우드가 있는 방으로 들어왔다. “참으로 이상한 일입니다. 오늘만 두 번째 그런 부인 환자들을 보는데 혹시 조선의 부녀자들에게만 있는 무슨 특별한 병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무슨 일입니까?” 헤론의 심각한 얼굴을 보고 알렌이 물었다. “혹시 두 분께선 그런 여자 환자를 못 보셨습니까? 여자의 배꼽 밑에 화상(火傷)의 흉터가 있는 것 말입니다. 오늘 온 환자는 배꼽 둘레가 화농이 되어 있었습니다.” 언더우드가 나섰다. “그 원인이 무엇일까요? 그게 무슨 특별한 병은 아닐까요?” 알렌은 그러한 환자를 다룬 일이 없는 듯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 “배꼽병이라... 혹시 피부병의 일종이 아닐까요?” “조선사람들에게 흔히 있는 피부병과는 달랐습니다. 화상 같기도 한 상처였습니다.” 헤론이 신중한 표정으로 말했다. 언더우드가 중얼거렸다. “그렇다면 여인들의 무슨 풍습과 관련이 있는 것 아닐까요? 이것은 조선 사람들에게 물어봐야 풀릴 수수께끼입니다.” 언더우드의 추측이 들어맞았다. 여인들의 배꼽 화상의 흉터는 아들을 얻겠다는 집념에서 오는 것이었다. 온제종자법(溫劑種字法)이라 하여 뜨겁게 볶은 소금을 배꼽에 얹고 그 위에 쑥찜질을 한다는 것이었다. 이 소금뜸질을 2백 번 내지 3백 번 한 끝에 합방(合邦)을 하면 아들을 낳는다는 것이었다. 헤론은 머리를 설레설레 저었다.
남한산성에서 1890년 7월의 어느날 아침, 선교사 가족들이 여름 휴가차 남한산성을 향해 떠났다. 스크랜턴 가족, 아펜젤러 가족, 언더우드 가족, 헤론 가족 등등...광나루에서 한강을 건너고, 논밭 사잇길을 지나서 산길은 굽이굽이 구부러진 길이었다. 부녀자들은 가마를 타고 갔다. 산성 가까이에 오르니 한강이 멀리 내다 보였다. 남한산성은 한맺힌 역사의 현장이다. 1624년(인조 2년)부터 축성 공사가 시작되어 2년만인 1626년(인조 4년)에 완공되었다. 1636년 12월 청태종이 십만 대군을 이끌고 심양을 떠난 지 불과 10여 일만에 서울을 위협했다. 임진왜란이 있은 지 40년, 그 상처가 채 아물기도 전에 몰아닥친 침략자의 말발굽 소리에 왕족의 일부를 강화도로 보내고 왕이 미처 뒤따르기도 전에 적군에게 길이 막혀 부득이 남한산성으로 피신했던 것이다. 인조 행렬을 따라 얼어붙은 한강을 건너온 청군은 남한산성을 포위했고, 인조는 불과 50일분의 식량밖에 없는 산성에 갇히어 45일을 버티다가, 1637년 1월 30일 산성 아래 삼전도에서 오랑캐라 깔보던 청태종 앞에 3배 9고두(세 번 무릎 꿇어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림)의 예를 행하여 무조건 항복하고 소현세자를 비롯해 척화항전을 주장한 충신들이 인질로 끌려갔던 자리이다. 성벽 둘레는 20리가 넘는다. 성 안에는 지휘관이 군대를 지휘하던 수어장대, 백제의 시조 은조왕을 모시는 숭렬전, 남한산성을 지키는 순사들이 무술을 연마하던 연무관 등이 있다. 헤론은 몇 사람 환자와의 약속과 치료중인 환자의 용태를 지켜볼 일이 있다면서 서둘러 하산 준비를 했다.
그의 나이 서른 넷이었다. 그는 병원과 남한산성을 오가는 그는 몹시 지쳐 보였다. 헤론은 닥터 스크랜턴을 따로 은밀하게 만났다. 닥터 스크랜턴은 헤론을 진찰하고 약을 지어주면서 치료를 서둘렀다. 헤론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말했다. “별로 심하지는 않습니다. 그저 이질 기운이 좀 있으니 조심을 해야겠지요. 더위를 무릅쓰고 오가다 먹은 것이 소화가 잘 안 된 것 같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헤론이 앓고 있다는 것조차 눈치채지 못 했다. 휴가를 며칠 앞당겨 끝낸 닥터 스크랜턴은 헤론을 앞세우고 서울로 돌아갔다. 헤론은 하던 일을 놓고 쓰러졌다. 동료 의사들이 정성을 다하여 돌보았다. 그러나 날이 갈수록 상태는 심각해졌다. 심상치 않은 분위기 때문에 서울로 돌아왔던 게일 목사는 덜컥 겁이 났다.“닥터 스크랜턴, 어떻게 좋은 방법이 없을까요?” “... 남한산성에 있는 부인과 아이들을 데려와야 하겠습니다.” “오, 닥터! 헤론의 나이 이제 서른 넷입니다.” “부인을 빨리 모시고 와야 합니다. 시간이 급합니다.” 게일은 눈물을 흘리면서 남한산성으로 헤론의 가족을 데리러 떠났다. 헤론의 병상을 지키고 있던 알렌도 침통해 했다. 게일이 남한산성에 도착한 때는 칠흑같은 한밤중이었다. 장대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억수 같은 빗줄기에 바람까지 몰아쳤다.
게일이 헤론의 부인 해리어트를 데리러 온 것을 보고 아무도 그 길을 만류하지 못 했다. 가마 채비를 하랴, 초롱불을 밝히랴 모두가 허둥댔으나 휘몰아치는 비바람에 초롱불은 풍전등화였다. 횃불은 단 몇 분을 견디지 못하였다. 가마채를 잡은 교구꾼들 앞에 비바람이 무섭게 휘몰아쳤다. 횃불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길은 진흙의 수렁이었다. 후미진 곳이나 계곡에 이르면 교구꾼들은 가슴까지 차는 물살을 헤치며 나아가야만 했다. 불길하고 초조하기 이를 데 없는 밤길이었다. 칠흑 같은 어두움 속에서 내려 때리는 장대비를 밤새 맞으며 눈물의 행군을 감행한 하룻밤이었다. 서울에 이르러 집에 도착한 일행은 폭풍우의 지옥을 벗어난 듯 모두 주저앉고 말았다. “최선을 다했습니다, 부인.” 닥터 스크랜턴이 해리어트 앞에 고개를 떨어뜨렸다.
그의 나이 서른 넷 헤론은 아내와 친구들을 둘러보며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한국과 한국 사람들을 더 뜨겁게 더... 더... 사랑하고 싶소.” 해리어트가 남편의 손을 잡았다. “당신은 하실 수 있어요. 하시게 돼요.” “병원에서 나하고 일하던 친구들... 나를 아는 한국의 친구들을 다 불러 주시오.” 병원의 조수들, 집인일을 돕던 사람들 모두가 헤론의 침상 가까이 몰려들었다. 헤론은 그들을 따뜻한 눈길로 둘러보았다. “나를 사랑해 주고 도와 준 친구들 감사합니다. 여러분, 예수님을 믿으십시오. 예수님은 여러분을 사랑하십니다.” 그것은 유언이라기보다 설교였다. 생명의 마지막 불꽃을 피워 외치는 복음 전파였다. 그리고 잠자듯이 눈을 감았다. 1890년 7월 26일의 일이었다. 젊은 아내와 두 딸, 그리고 그의 손을 거쳐간 많은 환자들과 지금도 그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는 많은 환자들이 있었다. 슬픔과 충격 위에 묘지가 결정되지 않는 근심이 모든 사람들을 당황하게 만들었다. 언더우드와 헤론이 성경 번역과 사전을 편찬하는 일을 하고 있는 집 한 채가 따로 있었다. 선비라고 불리는 조선인 조수들이 합숙을 하면서 일을 돕고 있었다. 언더우드는 그 집 한 쪽에다 무덤을 쓰자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하지요. 지금 사전 작업을 하고 있는 집 뒤뜰에 우선 가매장을 합시다.” “그렇게 하기로 합시다.” 선교사들이 그렇게 결정을 내렸을 때 그 집을 쓰고 있던 서생들이 약속이나 한 듯이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펄쩍 뛰며 달려들었다.
“아니 사람이 살고 있는 집 울타리 안에다 무덤을 쓰겠다구요?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한 사람이 입을 열자 모두가 한결같이 결사적으로 들고 일어났다. 선교사들은 또 숙의했다.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헤론 박사댁 뒤뜰에 무덤을 쓸 수밖에요.” 헤론이 살던 집 뒤뜰을 묘지로 정했다. 그리고 오후 3시를 장례식 시간으로 정했다. 뜨거운 여름날 오후 3시에 장례식이 시작되었다. 그런데 갑자기 천지가 무너지는 듯한 소리가 마을을 뒤흔들었다. 서생들이 울며 불며 옷을 잡아뜯고 머리를 쥐어뜯으며 몰려온 것이다. 그들은 벌벌 떨며 겁에 질려 있었다. “아니 선교사 어르신네들, 왜들 이러십니까? 기어코 집안에다 묘지를 쓰실 작정이면 온 장안이 발칵 뒤집힙니다. 아니 됩니다.” 장례식은 중단될 수밖에 없었다. 남편의 시신을 묻을 땅 한 평 없는 고통으로 헤론의 아내 해리어트는 실신한 듯 한 구석에 쓰러져 있었다.
양화진 외국인 묘지에 영혼이 떠난 헤론의 육신은 더위 앞에 무력했다. 7월의 폭염이 사정없이 썩게 하고 냄새나게 했던 것이다. “... 할 수 없습니다. 매장지가 결정될 때까지 시신을 밀봉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의사들이 일제히 달려들어 밀봉을 했다. 그리고 조정의 처분을 기다리다가 안 될 눈치면 헤론의 집 뒤뜰에 매장할 각오를 굳히고 있었다. 이 땅에서 사망한 외국인은 제물포 근처 묘지에 매장하는 것이 관례가 되어 있었다. 서울 땅에 송장을 묻는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일이었다. 제물포까지는 백여 리 길이었다. 교통수단이라고는 노새와 가마밖에 없는 형편에 시신을 메고 복더위에 백여 리 길을 걸어갈 일은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그리하여 선교사들은 미국공사의 양해를 얻어 정동 미국대사관 경내에다 임시 묘자리를 정했다. 그러자 이것 때문에 말썽이 생겼다. 선교사들은 외교 공세를 취하였다. 알렌이 조정과 미국공사관을 수없이 드나들더니 어느날 희색을 띠며 나타났다. “새로운 자리를 허락받았습니다.
설명을 듣기에 괜찮은 듯한 곳인데 우리 한 번 가보십시다.” 몇 사람이 서둘러 나섰다. 한국 조정에서 허락해 준 장소는 양화진 나룻터가 내려다 보이는 언덕 위였다. 언덕 밑으로 푸른 한강이 흐르고 강 건너편에는 모래밭이 온통 은빛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고요하고 아름다운 곳이었다. 아아, 코리아- 그리스도의 복음을 안고 와서 젊음과 땀과 눈물을 뿌리고 고귀한 목숨까지 코리아에 묻고 간 의료선교사 헤론... 제물포로도 못 가고, 그가 살던 집 뒤뜰에도 매장을 못 하고 갈팡질팡 눈물을 흘린 결과, 이렇게 주어진 곳, 이것이 양화진 외국인 묘지 역사의 첫 장이다. 코리아를 사랑하던 헤론은 푸른 한강이 내려다 보이는 양화진 언덕에 고이 잠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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