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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온 말씀 : 한성진 목사
말씀 : 눅 19:1-10
1. 예수께서 여리고로 들어가 지나가시더라 2. 삭개오라 이름하는 자가 있으니 세리장이요 또한 부자라 3. 그가 예수께서 어떠한 사람인가 하여 보고자 하되 키가 작고 사람이 많아 할 수 없어 4. 앞으로 달려가서 보기 위하여 돌무화과나무에 올라가니 이는 예수께서 그리로 지나가시게 됨이러라 5. 예수께서 그 곳에 이르사 쳐다 보시고 이르시되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하시니 6. 급히 내려와 즐거워하며 영접하거늘 7. 뭇 사람이 보고 수군거려 이르되 저가 죄인의 집에 유하러 들어갔도다 하더라 8. 삭개오가 서서 주께 여짜오되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 갑절이나 갚겠나이다 9.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10.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제목 : 예수를 만난 삭개오,
이 시간에 “예수를 만난 삭개오”라는 제목으로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본문의 말씀은 세리장 죄인 삭개오가 어떻게 의롭고 아름다운 구원을 받은 삭개오가 되었는지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심리학자 '조지 하버드 미드(George H. Mead)' 라고 하는 사람은 인간이 자아를 형성해 나아감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시그니피컨트 아더스(Significant Others)'라 했습니다. 즉 이 말은 ‘의미 있는 타인’이라는 말인데 사람이 어떤 사람을 만나느냐에 따라 그 사람과의 관계와 상호작용 속에서 자신의 자아를 형성해간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한평생 살아가면서 누구를 만나느냐? 하는 것이 운명을 좌우하는 중요한 것입니다. 만남이 중요한 것은 누구를 만나느냐에 따라 삶의 모습도 달라지고 행복할 수도 불행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은 물론 저 영원한 천국에 가는 것까지도 누구를 만나느냐에 관계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실존철학자 야스페르스는 "인생의 만남에 두 가지 형태가 있다. 하나는 겉 사람과 겉 사람끼리의 피상적인 만남이요. 또 하나는 인격과 인격끼리의 깊은 실존적 만남이다.” 이런 어려운 말을 드리는 것은 오늘 분문의 주인공 삭개오가 예수를 만나기 전에 만났던 수많은 피상적 만남이 얼마나 부질없는 것이었는가를 말씀드리기 위해서입니다.
예수 만나기 전에 삭개오가 만난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제일먼저
1. 아름다운 이름이었습니다.
2절 “삭개오라 이름하는 자가 있으니” 성경 기자는 삭개오를 소개하면서 그의 이름에 강조점을 둡니다. 그냥 삭개오가 아니라 삭개오라 이름하는 자라는 것입니다. 삭개오의 이름의 뜻은 무엇일까요? 살펴보면 삭개오의 이름은 참 좋은 이름입니다. '순결하다, 의롭다'는 뜻입니다. 이름도 좋아야 합니다. 전7:1에 "좋은 이름이 좋은 기름보다 낫다"고 했습니다. 지난 번 어느 살인자처럼 길에서 태어났다고 길태라고 짓는다면 어린이가 그 이름 가지고 자존감 가지고 장성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그래서 유대에서는 태어난 지 팔일 만에 할례를 베풀면서 이름을 지어준다고 합니다. 그때 위대한 신앙의 선조들의 이름을 따서 붙여주는데 그 이유는 자라면서 그 이름의 인물을 사모하고 본을 받도록 하려는 교육적인 배려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런데 삭개오는 그 이름과 정 반대의 생활을 하게 됩니다. 로마의 앞잡이가 되어 자기 백성들에게 세금이라는 명목으로 재물을 착취하는 당시의 세리, 그것도 세리 대장이 된 것입니다. 그가 세리장이요 부자였다는 것은 바로 그가 얼마나 큰 죄인이었는가를 암시해 줍니다.
그래서 아마도 사람들은 삭개오를 부를 때마다 속으로 빈정거렸을 것입니다. “네가 무엇이 순결해? 무엇이 의롭다는 말이냐? 이름만 반질해 가지고 온갖 도적질은 다하고” 좋은 이름을 만났지만 그 이름이 자기 인생을 변화시켜 주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우리에게 적용하면 성도의 이름만 가지고는 안 된다는 말씀입니다. 직분이 우리를 귀하게 해주는 것 아닙니다. 정말 하나님을 알고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의 모습이냐는 것입니다. 겉으로는 특별한 잘못은 없겠지만 마음은 삭개오와 다를 바 없는 우리의 모습이라면 이 시간 말씀을 통해 진정한 삭개오의 믿음을 사모하는 시간이 되시기 바랍니다. 똑같은 실수를 하더라도 기독교인은 사회로 타 종교인이나 교회를 다니지 않는 사람들로부터 더 심한 질책을 받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못처럼 전도를 받아 처음 교회 나왔는데 옛날 습관 행동이 일시에 변화 되는 것도 아닌데 그것을 알 리 없는 사람들은 천사라도 되어야 하는 양 공격을 하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좋게 이야기를 하면 그만큼 사회에서 기대하는 수치가 높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2. 인간의 노력도 수단과 방법도 만났습니다.
삭개오는 어떤 사람입니까? 3절에 “키가 작고” 여기 키라는 말은 원문으로 ‘헬리키아’인데 ‘나이’로도 번역되는 말입니다. 여기 나이는 어린이를 암시하는 용어입니다. 즉 삭개오의 키는 나이 어린 어린이와 같았다는 말입니다. 그 키가 1미터나 되는지 1미터 20이나 되는지 어린이처럼 작았습니다. 난장이였습니다. 키 작은 분들은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키 작은 단신의 설움이 얼마나 큰지, 단신의 핸디캡은 단신을 가진 사람만이 압니다. 그래서 키가 작은 사람은 처음부터 포기하든지 아니면 반대로 누구보다 모진 마음을 가지고 치열하게 극복하려고 애씁니다. 그래서 역사 속에 단신이었던 사람들이 위대한 일을 많이 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누구보다 모진 마음을 가지고 살아왔기 때문일 것입니다. 여기서는 물리적인 키가 작다는 의미보다는 영적으로 미성숙한 것입니다. 영적으로, 정신적으로 미성숙하면 아무리 물리적인 키가 크고, 부요하여도 항상 남과 비교하고, 그 부족한 것을 더 채우려고 발버둥치고 만족을 모르고 사는 것입니다. 지금 사회에 병폐를 보면 최고의 권력을 맛보고, 돈도 재벌 많큼 있지만 만족하지를 못하고, 텅빈 마음의 허기를 채우려다 패가망신하고, 국가망신 시키고 국민들을 좌절감으로 몰아넣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것이 남의 이야기 입니까? 바로 나의 이야기이지요. 내가 영적으로 성숙하지 못하면 나는 바로 산다고 생각하지만, 문제없다고 생각하지만 나는 그렇게 살아오지 않았다고 부르짖지만 계가 옆으로 가는 것을 자신은 모르는 것 같이 모르는 것입니다.
성경에 삭개오에 대한 자료가 많지는 않지만 성경에 알려 주는 몇 가지의 사실에서 그의 삶이 얼마나 치열한 삶이었는지 짐작 알 수 있습니다. 인간의 노력이 대단한 사람입니다. 사람의 비난도 개의치 않았던 것을 보면 이를 악물고 살아온 그의 인생이었음을 알게 됩니다. 미친 듯이 살아온 인생이었습니다. 로마에 줄을 가진 사람이었다는 것 보통 사람입니까? 인간의 노력, 사람의 방법은 다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사람의 노력 중요합니다. 노력 없는 사람이라면 별 볼일 없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노력도 한계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인간의 잠재력은 무한하다고 말하는데 잘못된 사상에 도취되어 하는 말들입니다. 그런 사람에게 너 자신을 알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우리는 그냥 긍정이 아닙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긍정입니다. 삭개오, 의지가 강한 사람입니다. 사막에 내 놓아도 살고, 나무 꼭대기에 올려놓아도 살 사람이 삭개오 입니다. 그러나 그 삶의 결론이 무엇입니까? 신분상승이었습니까? 역시 사람에게 비난 받는 죄인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의롭고 아무리 노력한다 해도 우리키가 한 자나 더 크는 것도 아니고 죄인일 뿐입니다.
마 5: 36. 네 머리로도 하지 말라 이는 네가 한 터럭도 희고 검게 할 수 없음이라 6:27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라도 더할 수 있겠느냐
렘 13: 23. 구스인이 그의 피부를, 표범이 그의 반점을 변하게 할 수 있느냐 할 수 있을진대 악에 익숙한 너희도 선을 행할 수 있으리라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사람의 노력으로도 불가능합니다.
3. 권력도 돈도 만났습니다.
2절 “삭개오라 이름 하는 자가 있으니 세리장이요 또한 부자라” 세리장의 직책은 아래 다른 세리들을 관장하거나 그들이 거둬들인 세금을 로마 정부에 직접 상납하는 역할을 담당하던 위치였습니다. 그러니까 상당히 높은 위치입니다. 특별히 여리고의 세리는 돈을 많이 버는 곳입니다. 여리고는 가이샤라 가버나움과 더불어 3대 상업 중심지로서 온갖 무역과 향료의 집산지로서 유대인만이 아니라 이방인들의 상거래로 붐비는 곳으로 징수해야 할 세금이 많았습니다. 경제적으로 번영한 도시의 세리장이 부자일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삭개오는 권력도 만나보았고 돈도 만나보았습니다. 그러나 행복을 가져다주었나요? 행복하지 않았습니다. 사람에게 버림받고 하나님께도 버림받은 것 같은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습니다. 안전하지도 않았습니다. 도적이 생명을 노리고, 또 사람들의 미움만을 사 언제 어느 때 보복할지 모르는 삶이었습니다. 사람들이 권력을 가지려고 얼마나 온갖 감언이설로 현혹시킵니까? 표를 의식하여 거짓말을 하고 심지어 종교까지 바꿉니다. 제가 천국처럼 느끼고 충격을 받은 나라의 가려진 면인데 실화를 들겠습니다. 나는 돈이 약 3 천억을 갖고 있습니다. 기라성 같은 남성들이 나의 눈길을 사모하여 줄을 서서 있습니다. 나는 매일같이 사랑한다, 좋아한다는 편지를 열혈 팬들로부터 100통 이상 받고 있습니다. 그러니 남들이 그렇게 부러워하는 돈과 명성과 사랑을 주체할 수가 없을 많 큼 갖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내 마음은 늘 텅 비어있습니다. 난 외로움에 지쳐 수면제가 아니면 밤에 잠을 이룰 수가 없다고 고백을 하였습니다. 몇 천 년 전이나 현대인이나 권력도 만나고 돈도 만났지만 행복하지 않더라는 말입니다.
마 4:4절에 "사람이 떡으로만 살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동물은 영혼이 없기에 본능을 좇아 먹고 마시는 것에 만족해 살지만 영적인 존재인 인간은 먹고 마시는 것만 가지고는 살 수가 없습니다. 내가 곡식을 많이 쌓았으니 내 영혼아 평안히 먹고 쉬자 하는 자에게 하나님은 어리석은 자라고 하셨습니다.
4. 그러한 삭개오가 예수를 만났습니다.
3-6절 “그가 예수께서 어떠한 사람인가 하여 보고자 하되 키가 작고 사람이 많아 할 수 없어 앞으로 달려가서 보기 위하여 돌 무화과나무에 올라가니 이는 예수께서 그리로 지나가시게 됨이러라 예수께서 그 곳에 이르사 쳐다보시고 이르시되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하시니 급히 내려와 즐거워하며 영접하거늘” 돌 무화과 나무는 히브리어로 쉬크마 인데 뜻은 재활 도는 갱생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삭개오를 새 사람으로 만들기 위하여 돌 무화과 나무에 올라가게 하신 것입니다.
예수 만난 삭개오는 변화되었습니다. 8절에 “삭개오가 서서 주께 여짜오되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누구의 것을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 갑절이나 갚겠나이다” 어떻게 이렇게 변화되었습니까? 들뜬 감정이 아닙니다. 기분이 아니에요. 헛된 공약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모셔드리면 이렇게 변하는 것입니다. 9절 말씀대로 구원 받는 자녀가 되었습니다. 삭개오는 나뿐면 이지만 그 당시 유명인사 임에 틀림없을 것입니다. 바리새인이 기도 할 때에 멀리서서 저 세리와 같지 않다고 기도 하는 것을 보면 사람들이 수군거리고 심한 경우 버러지같이 취급을 받아 피하고 싶은 인물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니 나무에 올라간다는 것은 눈에 쉽게 띄는 돌출 행동인데 올라가기를 망설였을지도 모릅니다. 삭개오가 예수 만나기 그리 쉬운 것은 아니었습니다. 키가 작아 보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돌 무화과나무에 올라갔습니다. 위신과 체면으로 다져진 사람이었지만 버리고 올라갔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에 참 포도나무를 심었으나, 곧, 생명과에 비유 된 포도나무를 심었으나, 선악과에 비유 된, 들 포도 열매가 맺었는데, 뽕나무(돌 무화과) 이야기는 그와 같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마음에, 참 무화과를 심었는데, 돌 무화과, 곧 뽕(거짓)이 열린 것입니다.
거짓말을 상징하는, 뽕나무에 올라간 "삭개오"이는, 키 작은 삭개오가 예수를 보아 알고자 하기위해 뽕(거짓) 나무에 올라갔다는 말입니다. 많은 군중들 틈에 낀 삭개오는 예수를 알기위해 보고자 하나, 키가 작아서 못보죠. 키가 작다는 것은, 말씀 드린 대로 영적인 키를 말 합니다, 부자에 비유 된 삭개오는, 종교적 지식은 많습니다. 그러므로 어른이지만, 키가 작습니다. 작아도, 마치 어린아이와 같이 작습니다. 그 영이 어린 아이처럼 작은 사람이라는 것은, 육신의 몸이 작다는 말이 아니라, 영의 몸이 곧 진리를 담은 마음이 작다는 말이며, 세상일로 비유하여 말 한다면, 어떤 사람이, 어떤 이성을 보았을때에, 몹시도 사랑스럽게 보인다면, 그는 사랑하는 그 마음 때문에, 사랑하는 이성앞에 자신이 몹시 작아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모든 사람들 앞에 당당하나, 그 사랑하는 사람 앞에만 서면, 왜 작아질까요? 사모하는 마음이 크면 클수록 작아지는 법입니다. 예수를 보아, 알고자 하는 마음이 큰 삭개오의 마음 그 마음 상태가 그러한 것 이라서... 삭개오 이야기는 잠시 미루고, 우리의 이야기를 한번 해 볼까요? 예수를 알고자 하여, 우리가 지난 날 동안 어디에 있었나요? 삭개오 처럼, 뽕나무 위에 올라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는 진리의 말씀을 상징합니다. 성경에서 "예수"라는, "명사"인 단어가 나오면 우리 영적인 형제들은, 진리의 말씀 이라고 봐야해요. 자존심 버리고 이렇게는 살수 없다 나도 한번 사람답게 살아보자 결심했을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삭개오를 만나주셨습니다.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믿고 주님을 사모하시기 바랍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주님을 만납니다. 주님을 사랑할 때 우리와 온전히 함께 하십니다. 더욱 주님을 사랑하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영적키가 얼마나 크십니까? 주님을 알기를 사모하시기 바랍니다. 뽕 나무에 올라간 삭개오 처럼 애쓰고 힘쓰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주님의 눈에 띄시는 주님께서 함께 하시고 집에 머무시는 영광을 맛보는 여러분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