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천 노계문학관/김숙자
영천(노계문학관,한의마을
광주이씨 시조묘,임고서원)으로
상주아동문학 기행을 가기 위해
7시30분에 신봉교회에서 출발 하기로 했다.
김재수님 박정우님 이창모님 문초록님 허창열님 김예희님 김숙자 본인 7명이 가기로 했다
5시에 일어나
회원들이 먹을
간식(귤,사과,바나나,베지밀
과자등)을 챙겨서 가다가 이창모 샘을 모시고 집합 장소로 갔다.
먼저 온 회원들과 반갑게 인사를 나누었다.
허창열님은 떡을,
김재수 고문님은
인삼 영양제를 갖고 오셨다.
우리들은 차를 타고 가면서 맛나게 먹었다.
박정우 회장님과 허창열 회원의 차로 가기로 했다.
문초록님과 나는 허창열님의 차를 탔다.
경기도에서 오신 문초록님은 잠이 부족하여
차 안에서 잠을 자기도 했다.
달리는 차창 밖에 보이는 5월의 파릇한 봄기운으로 한층 기분이 업 되었다.
풍광을 즐감하다 보니
어느덧 9시40분경에 노계 문학관에 도착 했다.
인터넷으로 본 노계 문학관이 보였다.
ㄷ자 건물의 기와집이
대궐 같이 웅장했다.
회장님 차는
하루 전에 구미 볼일로 가신 김예희 샘과 합석 하기로 해서 우리들 보다 늦었
다.
미리 예약해 놓은 영천의 허남용 해설사 샘이 우리들이 왔다는 소식을 듣고 빨리 달려 오셨다.
노계 박인로 문학관에서는
한국가사 문학의 거성
노계 선생의 생애와
문학 작품, 자연과 성ㆍ경ㆍ 충ㆍ효 사상을 알수 있었다.
선생은 1561년에 북안면 도전리에서 태어나
학문과 무예를 익히며 어린시절을 보냈다.
임진왜란(32세) 때는 의병에 참여 하여
영천성 복성 전투의 공로로
공신에 올랐다. 39세에 무과에 급제 하여 20여 년간 무인의 삶을 살았지만,
항상 학문과 글쓰기를 멈추지 않았다고 한다.송강 정철과 고산 윤선도와 함께 조선시대 3대 가사 문학가로 일컬어지고 있다.
권력의 중심에 있던 송강 정철과 고산 윤선도에 비해 노계 선생은 가사문학의 특징인 민요 율조인 3.4조 및 7.5조를 유지하며, 누구나 쉽게 따라 할 수 있는 문학 장르를 통해
안빈낙도(安貧樂道)
성경충효(誠敬忠孝) 청빈한 생활에서 오는 현실의 고단함과 전란의 아픔을 지닌 궁핍한 서민의
정서를 작품으로 담아내고 있으며 33편의 가사 문학이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 되었다고
했다.
3대 조선 문인의 나이 차이는
송강 선생은 노계 선생 보다 나이가 25살 많고 고산 선생은 26살 작다고 했다.
그리고
한음(漢陰) 이덕형(李德馨) 선생이 보내준 홍시를 먹으면서 어머니를 그리워 하며 쓴 시를 보고 가슴이 찡 해 오기도 했다.
노계선생과 셰익스피어는 나이도 3살 차이로 비슷하고 스승과 제자가 분명 하지 않았으며 작품정리를 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매우 비슷 하다 것도 적혀 있었다.
노계 선생의 문학세계는
시조67수,가사11편,한시문110수 지으셨다.
조선의 영의정이셨던 한음 이덕형 큰 아들 이여규(李如圭)선생이 상주에 목사로 오신 것도 알게 되어 감회가 새로웠다.
노계 선생이 한음 선생께 홍시를 선물 받은 것도 알게 되었고
선물 받은 홍시를 보고 어머니를 그리워 하시는 '조홍시가(早紅恃歌)' 詩를 보면서도 가슴이 뭉클 했다.
노계 문학관을 관람하고
선생의 위패가 모셔진
도계서원으로 갔다.
道溪書院은
도계마을 있어서
도계서원이라고 이름이 붙여졌다.
도계서원은 노계 선생의 후손들의 정성으로 1970년에 복원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도계서원으로 바뀌기 전에는 도계사 였다.
도계사는 노계 선생이 고향으로 돌아 온 뒤,성리학에 심취하여 시대의 아픔과 고난을 노래하고 청렴한 선비 정신을 실천 하면서 노년을 보냈으며 노계 선생이 타계한지 65년만인 숙종33년 1707년에 선생을 숭모하는 유생들의 뜻을 모아 지금의 도천1리 풍덕산 중턱에 도계사를 창건 하였는데 1868년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훼철 되었다고 한다.
훼철 이후 지어진
도계서원 옆에는 큰배롱나무가 있었고 앞에는 연못이 있었다,
공부하기 좋은 환경에 서원이 있는 듯 했다.
연못에 고기 낚는 사람도 보였다.
허창열님은 다리가
불편해서 도계서원에 들어오지 않고 연못가에서
청자빛의 큰까치봄꽃을 보고 있었다.
"이 꽃이 뭐더라"
친구인 창열이가 꽃의 이름을 물어 와서
나는 "얼른 괴불알꽃,
이름이 좀 그래서
큰까치봄꽃으로
개명했나봐.
넘 예쁘다. 우리집에도 있어.
내가 시 썼었잖아"하고 대답 했다.
아무튼 아름다운 도계서원의 주위 환경에 잠시 심취 되기도 했다.
노계 선생 생애에 대해
열정적으로 해설 해 주신 허남용 샘께 감사 했다.(경북관광해설사 5기생 나와 동기 이시다).
문학관을 관람하고 근처에 있는
도계서원을 둘러 보고 11시쯤에
싸 갖고 간 음식을
소풍 온 기분으로 맛나게 나눠 먹었다.
챙겨 올 때는 힘들었지만 잘 먹었다는 인사를 들으니 행복감에 콧노래가 나왔다.
조선 8대 명당인
광주이씨 시조묘지로 갔다
왕릉 같이 큰 묘가 보였다.
묘 뒤의 아름다운 소나무와 잘 관리 된 푸른잔디, 광장 같이 넓은 터에 자리 잡은 묘를 보고
우리들은 연신 감탄 했다.
이당 묘(이집의 아버지)와
최원도 여종,(제비인 연아) 무덤이 있었다.
이당 묘는 컸고
여종의 묘는 봉분도 낮은 작은 무덤이었다.
이당 묘 뒤에는 최원도의 어머니 영천이씨 묘도 있다.
최원도는 친구 이집의 아버지 이당이 죽자 어머니 묘 아래에 장사 지내게 했다.
최원도는 이색 문하에서 수학하고 문과에 급제하여 반대 세력 이었던 최원도는 신돈과 끈질긴 신경전 끝에 벼슬에서 물러나 고향 영천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이당의 아들 이집은
최원도의 친구인데,
1369년(공민왕17) 신돈의 전횡을 신랄하게 비판하여
신돈의 미움을 받아 생명의 위협을 받자 아버지를 업고 최원도 집으로 찾아온 것을
숨겨준 사실을 안 여종이
비밀을 지키지 못할까봐 스스로 자결을 했다는 것이다.
최원도 부부는 아무도 모르게 여종 연아를 뒷산에
묻어 주었는데, 나중에 이 사실을 알게된 이집 후손들과 최원도가 여종의 장사를 후하게 지내 주었다고 한다.
지금도 양쪽 집안 조상의 묘제 때 연아의 묘에도 함께 제사를 지내 준다고 한다.
최원도가 이집의 아버지가 죽자 무덤까지 만들어 주었다는 이당 묘는 생사를 뛰어 넘는 친구간의 참되고 아름다운 우정의 결실이라고 볼수 있었다.
가슴 훈훈한 이야기 였다.
광주이씨 시조묘지 명당 자리에서
좋은 기운을 받고
한의마을 가기로 한 장소로
갔다. 먼저 점심을 먹기 위해 큰기와집 식당을 네비로 찍어서 갔다.
한의마을 입구에 도착해서
식당을 찾았지만 보이지 않아서 전화를 하니 카페 뒷쪽으로 오라고 했다.
미리 예약한 청국장이 나왔다. 샐러드와 구수한 청국장등 여러가지 정성껏 만들어진 듯한 진수성찬 이었다.
대우 받는 듯한 기분으로 우리들은 맛나게 먹고
1시쯤에 근처에 있는 찻집으로 갔다. 20분 정도
휴식을 취한 후 한의마을을 둘러 보았다. 한옥으로 지워진 집들, 마당이 넓고
좋았다.
전시관, 한의원,족욕관도 있었다.
시간이 없어 족욕은 하지 않고
체질 검사를 하고
한의원으로 들어가서
둘러 보는데
김예희 샘은 침을 맞기도 하셨다.
임고서원에서 기다리던 전민욱 해설사가 전화가 왔다.조급한 마음에
임고서원으로 빨리 가자고 재촉을 해서
1시40분경에
圃隱 遺物館 입구에 도착 했다.
해설사 샘이 나오셔서 기다리고 계셨다.늦어서 죄송하다고 하면서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유물관으로 갔다.
로비에는
포은 정몽주 선생(1377~1392)과 임고서원에 대한 정보를 정보 검색대를
통해 알아 보고 동판으로 제작된 '선죽판'과 '화상판'의 스크래치 체험 하는 곳이 있었고
포은관에는 포은 선생의 출생부터 효행과 충절 동방이학의 조종으로 평가 받는 그의 학문과 만고의 충의지사로 추앙 받는그의 삶에 대한 이야기 고문서와 영상으로 전시 되어 있었다.
임고관에는 임고서원 전적 보물제1109호 (10종 25책)
신편음점성리군서구해6冊,회찬송악악무목왕정충록3冊,논어언해3冊,심원록6冊,고왕록2冊등
임고서원의 연혁과 영남사림(嶺南士林)의 중심지 역할을 하였던 영천의 성리학과 성리학자들을 고문서를 통해 소개하고 '성리학의 보고(報庫)' 임고서원이 축소 모형으로 전시되어 있었다.영상실은 포은선생 충효와 정신이 담긴 임고서원의 역사를 애니메이션 영상으로 보여 주었다.
유허비,생가,부래산,임고서원,전망대,도일지,부모묘소,
조옹대등
포은 선생의 발자취를 한 눈에 볼수 있게 잘 전시 되어 있었다.
전민욱 해설사 샘은
포은 정몽주 선생의 발자취, 생애,업적에 대해 해박한 지식으로 해설을 해 주셨다.
포은 정몽주 선생의 본관은 영일(迎日),자는 달가(達可),호는 포은(圃隱)이다. 영천시 임고면 우향리에서 운관(云瓘)의 아들로 태어났다.
성리학이 고려와 조선에 뿌리 내리는데 큰 역할을
하여 동방이학의 조종으로 존중 받는 학자이다.고려말 국운이 기울어 가는 고려를 버리고 새로운 나라를 세우려 한 이성계,정도전 등의 개국 세력을 상대로 고려 왕조를 지키려다 개성의 선죽교에서 이방원 일파에게 피살된 인물로
후세에 충절의 표상으로 추앙 받고 있다. 삼은(三隱)의 한 사람으로 문집 《포은집(圃隱集)이 남아 있으며, 충절의 시조《丹心歌》가 전해지고 있다고 했다.
우리들은 질문도 하면서
해설을 듣고 전시관을 나왔다. 5시쯤 상주를 향해 달려와서 저녁을 먹고 7시쯤에 즐거웠다는 인사를 나누며 헤어졌다.
가슴 설레이던 아동문학회 탐방,해설사 예약과 점심 예약,간식 준비로 좀 바쁘고 힘들었지만 몰랐던 것을 많이 알게 되어
알찬 탐방으로 뿌듯했다.
무엇보다
다리 아픈 친구 창열이가 처음으로 가보는 문학 기행이라 감회가 새롭다며 행복해 하는 모습과 해설을 들으려고
의자를 갖고 다니는 모습이 눈에 선하다.아무튼 불편한 몸으로 운전까지 해줘서 너무 고마웠다.
안전운행을 해 주신 회장님께도 고마웠다.
함께 하신 샘들께도 감사 하고
함께 하지 못한 샘들께는 죄송스럽고 아쉽기만 했다. 내년에는 한 분도 빠짐없이 동참해서 함께 배워 가며 즐감하는 시간을 가졌으면 좋겠다.
앞으로도
해마다 탐방에 참석하여 많은 지식을 쌓아
좋은글을 써야겠다고 다짐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