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어려서부터 노래를 좋아했다. 설거지를 하거나 청소를 하며 흥얼흥얼 노래를 하면 시간이 빨리 간다. 아무리 답답해도 노래를 부르고 나면 기분이 상쾌해진다. 슬플 때에도 큰 소리로 노래를 하면 목이 메지만 속은 후련해진다. 장소에 따라 겉으로 부를 때도 있고 속으로 부르기도 한다. 실은 속으로 부를 때가 더 많다.
결혼을 해서 얼마 되지 않아 서로가 서먹할 때이다. 불같으신 시어머니의 꾸중을 들었다. 어떻게든 분위기를 바꿔 보려고 소리 내지 않고 속으로 성가(聖歌) 한 곡을 부르고 나니 거짓말처럼 어머님의 노여움이 풀어지신 듯 했다. 그 후로 자녀들과 언짢은 일이 있을 때에 속으로 노래를 해 보는데 효과가 있었다. 그러다 보니 속으로 부르는 노래가 저절로 습관이 되었다.
새벽부터 밤중까지 내가 부르는 노래는 수없이 많다. 사람들과 일상적인 이야기를 나누면서도 머리 속에는 항상 리듬이 흐른다. 속으로 부르는 노래는 내게 있어서 기도일 수도 있고, 내 삶의 버팀목이 되기도 한다.
성당에서 일주일에 한 번 있는 합창 연습에 다녀오면 한 주간 내내 그 노래에 빠진다.어렸을 때에는 독창하기를 좋아했다. 혼자서 칭찬을 받고 스타가 되고 싶은 마음에서였다. 악보에 있는 원래의 음에 가까운 음을 절대음이라고 하는데 나는 혼자서만 절대음을 내며 뽐내고 싶었다. 절대음을 못내고 간혹 음이 틀린 소리를 들으면 신경이 날카로워졌다.
초등학교에 다닐 적에는 방송국 합창단에서 노래를 했다. 그때에도 중간에 가끔씩 나오는 독창을 무척 하고 싶어했다. 공주도 아니면서 단단히 공주병에 걸려 있었던 것이다. 5학년 때이던가. 도(道)내의 성악콩쿨대회가 열렸다. 결선까지 갔는데 남자아이와 둘이 남게 되었다. 높은 음을 잘 내던 그 아이가 노래를 부를 때 내가 떨어질 것이라는 불안감이 내 가슴을 조마조마하게 했다. 잘생긴 얼굴처럼 노래도 참 잘 했다. 그런데 뜻밖에도 대상은 내게 돌아왔다. 그때에 나는 상을 받은 기쁨보다 그 아이가 받았을 마음의 상처에 더 신경이 쓰였다. 상을 물려주고 싶었으나 어린 마음에 그러기도 싫었다.
중학교 면접시험을 보는데 특기란에 '성악'이라고 주저 없이 적어냈다. 연습을 못했으나 점수를 올리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장학생을 뽑는데 면접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노래를 해보라고 해서 처음에는 쉰소리가 났는데, 셋째마디 높은 음에 가서야 겨우 목이 트였다. 면접시험에서 떨리고 당황했던 마음은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
나이가 들면서 나에게 노래할 기회가 별로 없었다. 성악을 전공하지 않아 독창을 계속하기는 어려웠다. 자연히 쉽게 할 수 있는 합창을 하게된 것이다. 남편을 따라 미국에 갔을 때에도 그곳 Y대학 직원 합창단에 들어갔다. 지휘자는 슬라브 특유의 분위기가 있는 러시아인데 꽤 섬세했다. 발음하기가 어려웠으나 서정적인 선율에 매료되어 러시아의 노래도 몇 곡 배웠다. 음악은 국경을 넘는가 보다. 얼굴 색이 달라도 쉽게 친해질 수 있었던 것은 서로 노래를 좋아하기 때문이었다. 만일 독창을 했더라면 그들과 마음을 터놓는 친구는 되지 못했을 것이다.
합창 중간에 독창이 필요할 때가 있다. 큰 발표회 때에는 이름있는 성악가를 따로 부르지만 보통은 단원 중에서 뽑는다. 서로 뽑히려고 안달인데 은근히 내 차지가 되기를 바랐다. 가끔 그런 행운이 오기도 한다. 어떤 사람은 자신이 쏠리스트(Solist)로 뽑히지 않았다고 악보를 이마에 대고 어린아이처럼 울기도 한다.
몇 년 전 몸이 아파서 쉬다가 오랜만에 합창단에 나가던 날이다. 그 자리에 다시 앉을 수 있을 지 두렵기도 했다. 건강할 때에 부르던 노래와는 달리 착잡했다. 마침 '송년의 밤'노래여서 한 해를 보내는 마음이 겹쳐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그때에, 나의 귀에 같은 노랫말로 어우러진 다른 이들의 합창 소리가 들려왔다.
그 아픔 뒤에 내 가치관이 변한 것일까. 독창보다는 합창이 좋아지게 된 것이다. 합창 중간에 나오는 쏠리스트로 뽑히지 않아도 그후로는 담담해질 수 있었다.
잃는 것이 있으면 얻는 것도 있다. 건강을 잃고 나서 사람이 그리운 것도 알았다. 나라는 존재가 우뚝 세워진 게 아님을 그때에야 느꼈다. 나를 길러 주신 부모님, 가족, 이웃에 의해 제자리에 설 수 있음도 알게 되었다. 자신을 뽐내려고 독창을 좋아했던 마음이 부끄러워졌다. 이웃을 바라보는 눈도 달라지게 되고 그들의 아픔도 나누어 가지려 애를 썼다. 자연의 소리를 본따서 만들었을 합창을 통해 자연과도 한 몸을 이루며 살고 싶었다.
우리 조상들도 삼한시대에 여럿이 노래를 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삼국유사》의 《수로부인》편에 '중구삭금(衆口 金), 즉 여러 사람의 입은 쇠를 녹인다.'라는 말이 있다. 용에게 잡혀간 수로부인을 구하려고 노래를 지어 여러 사람이 불렀더니 용이 부인을 되돌려주었다는 이야기이다. 이렇듯이 고대의 합창은 주술적(呪術的)인 면이 있었다. 우리의 조상들도 합창을 좋아한 듯하다.
오랫동안 합창을 해오면서 그 맛을 조금은 알 듯하다. 합창은 남의 소리를 잘 들어야 한다. 아무리 혼자서 잘해도 소용이 없다. 잘 어울려야만 한다. 이는 사회나 가정 안에서 질서를 이룸과 같다. 큰 테두리 안의 조화는 아름답다. 합창은 화음으로 이루어지는 예술이다. 현대인들이 합창을 자주 하게되면 자신들의 개인주의도 바꾸어지지 않을까.
깨를 볶을 때에 물에 약간 젖어 있으면 알갱이가 튀는데 물에 젖어 있지 않아도 튀는 것이 있게 마련이다. 합창할 때에 튀는 사람을 보면 그 생각이 나서 웃음이 나온다.
음표의 피아니시모(mp.조금여리게) 부분에서도 소리의 핵은 가지고 있어야 한다. 사회나 가정에서 작은 소리에 무심하면 안되는 것과 같다. 핵을 가진 하나의 소리를 소중히 여기는 너그러움에 합창의 참멋이 있는지도 모른다.
여럿이 여린 음을 내면 여리게 느껴지고, 센음을 내면 더 세게 느껴진다. 남의 소리를 들으며 나의 소리도 병행하여 내는 인격을 지니고 싶다.
합창의 맛과 멋을 나의 생활 속에도 넣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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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하나의 인생
지난 토요일 경희대학교 크라운 홀에서 우리는 성가발표회를 가졌다. 내가 다니는 이문동 성당의 성가대에서 작년에 이어 두 번째 갖는 조촐한 음악회였다. 이 연주곡은 푸치니(Giacomo Puccini-1858∼1924)의 [글로리아 미사곡〕이다. 오페라 에드가 마농 레스꼬 토스카 투란도트 라보엠 나비부인 등 푸치니의 모든 작품에 이 미사곡의 선율과 화성이 인용된 푸치니의 데뷔작이기도 하다. 이 글로리아 미사곡은 연주회용 미사곡으로서 특별히 축제일 같은 때에 연주되었다. 푸치니는 이태리의 루까 지방에서 해마다 열리는 파올리노 성인의 축제를 위해 이 곡을 썼다. 이 곡은 장엄하면서도 꽤 까다롭다. 연전에 내가 다니던 로사리오 연합성가단에서 국내에서 처음으로 이 곡을 연주할 때에 공교롭게도 나는 무대에 설 형편이 못 되었다. 나는 예술의 전당 객석에 앉아 그 연주를 들으며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눈이 물러서 그런지 나는 미사곡을 들으며 또 눈물샘이 터졌다.
우아한 가락과 하모니 그리고 곡 전반에 흐르는 웅장한 분위기에 압도되었다. 그때에는 노래할 형편이 못 되어서 서운하던 차에 우리 성당의 손영일 신부님이 성가대에 부탁하셨고, 나도 무대에 설 기회가 생겨서 참 기뻤다.
교향악단의 전주가 끝나고 〔자비송 (Kyie)〕이 이어졌다. 우리는 흐느끼며 죄를 고백하듯 불렀다. 그리고 '하늘의 영광'을 발을 구르듯 외치며 시작되는 〔글로리아(Gloria)〕는 이 미사곡의 백미라 할만큼 곡이 길고 화려했다. 앨토 테너 베이스가 '땅에 평화'라고 가만히 노래한 후에 소프라노가 다시 '땅에 평화'라고 속삭이는 부분은 우렁찬 '하늘에 영광'과 대조적이다. 대영광송은 모든 악기와 더불어 마지막에 아멘을 외친다. 목 천장에 달라붙는 음(音)이 가쁜 숨을 내뱉게 한다. 끝으로 부른 '하느님의 어린양(Agnus Dei)'은 시름에겨운 이가 들으면 마음을 비워 평화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2부에서는 초등부와 중 고등부의 합창이 있었고 어버이와 청년이 함께 가곡 등을 불렀다. 다음주에 우리 성당을 떠나시는 신부님을 위해 '이별의 노래'가 이어졌다. 무대 천장에서 '신부님 사랑해요'라고 쓴 플래카드가 내려왔다. 신부님은 실제로 연주를 들으니 감개무량하다고 하셨다. 신부님은 몇 시간의 강의보다는 성가 한 곡을 듣는 편이 마음에 평화를 심어준다고 생각하셨을까. 점심 한 끼 제대로 못 드시고 몸이 아파도 병원에 안 가실 정도로 자신에게는 인색하면서도 두 번이나 우리에게 음악회를 하라고 그 많은 비용을 선뜻 내주셨다. 우리 성당의 건물이 낡아서 크게 수리를 한 적이 있었는데 신부님은 재료 구입에서부터 석공 목공 전공의 모든 궂은 일을 손수 맡아서 절약하셨다. 신부님의 검약한 모습을 기억하는 우리는 그래서 음악회에 든 경비가 더욱 크고 무거운 비중으로 느껴질 수밖에 없다. 신부님은 음악을 좋아해서 그 음악을 통해 젊은이들에게 꿈을 심어주시려고 그 힘든 음악회를 준비하셨던 것이다. 손신부는 자신의 방에 오르간을 두고 틈나는 대로 건반을 누를 만큼 음악을 생활화 하신 분이다. 성가대에서 오르간 반주가 틀린 음을 내면 뛰어가서 음을 바로잡기도 하는 음감이 예민한 분이다.
신부님의 예술성은 건축미술에도 뛰어난 감각을 발휘하여 성당을 보수할 때 직접 설계와 감독을 맡았다. 성당 보수 후에 과로로 인해 일년 동안 병석에 계셨는데,그 병을 회복시켰던 것은 그가 사랑하는 음악이었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신부님에게는 음악이 연인이자 친구였을 것이다. 신부님은 젊은 시절부터 여러 가지 악기를 다루셨다고 한다. 바이올린을 직접 만드시려고사제가 된 지 삼십 년이 넘도록 간직했던 나무가 있었는데 화재로 잃고 말았다며 서운해 하셨다.
손 신부의 일생을 생각하면 푸치니보다 2세기 앞섰던 비발디가 떠오른다. 사계(四季)로 유명한 이태리의 작곡가 비발디(Antonio Vivaldi-1678∼1741)는 사제였다고도 한다. 독일에까지 이름이 나서 바하가 영향을 받을 정도였던 그는 바이올린을 잘 켰다. 그것은 베네치아에 바이올린을 잘 만드는 명인(名人)이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닐까. 그가 천식을 앓으면서도 베네치아 교구내 여자 고아들을 위해 많은 곡을 썼고 고아원에 합주단을 만들어 음악지도를 했다는 것은 어느 면으로 보면 손신부님과 흡사하다.
손신부는 A. J. 크로닌의 소설 〔천국의 열쇠〕에 나오는 주인공과 같다는 생각도 든다. 중국에 선교사로 간 주인공은 작업복을 입고 손수 벽돌을 찍어 빈터에 성당을 짓고 책상도 만드는 영국인 괴짜 신부이다. 한 번은 낚시에 정신이 팔려 약속을 잊었다. 걸어서 가려면 정한 시간에 맞출 수 없어서 옷을 벗어들고 강을 가로질러 가기도 한다.
이런 신부들이야말로 인정이 점점 메말라가는 현대사회에 있어서, 푸근한 인간미가 넘치는, 언제라도 지친 우리에게 위안이 될 수 있는 사제가 아닐까.
손신부는 병약하여 자주 누워 계셨으나 곧 일어나 사방을 뒤져 일을 찾아하시는 분이다. 건강한 편은 아니지만 늘 평화로워 보였다. 그는 오페라〔춘희〕를 좋아했지만, 모임에 가면〔청포도 사랑〕도 부르고 이미자의 노래도 즐겨 불렀다. 차안에서는〔소양강 처녀〕도 크게 틀어서 카세트를 듣기도 하였다.
신부님이 좋아하던 글로리아 미사곡에서 대영광송의 주제는 '하늘의 영광, 땅에는 평화'인데 하늘의 영광을 드러내려면 땅에서 평화를 이루어야 한다. 땅에서 평화를 이루는 방법으로서 신부님은 음악을 택했다고 여겨지며 그의 삶 자체가 아름다운 음악이라고 생각된다. 아름다운 음악, 그것은 우리 인간들에게 평화로운 마음을 심어주는 것이 아니겠는가. 개인의 평화는 이웃의 평화를 가져오고 이웃의 평화는 나라의 평화를 가져오며 나라의 평화는 세계의 평화를 가져온다.
미사곡이 끝난 후에 기뻐하는 신부님의 아기 웃음 같은 인상이 오래도록 내 눈에서 지워지지 않는다. 음악처럼 생활하셨던 신부님의 모습에서 나도 내 삶 가운데 음악을 생활화 할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을 갖는다. 신부님이 인생의 의미를 음악과 봉사에 두고 평화를 이루려 했듯이 나에게 안겨오는 모든 아픔과 괴로움과 역경을 이겨내고 벗어나려면 음악을 사랑하고 그런 마음으로 사는 길이라고 생각된다.
나는 기회 있을 때마다 노래를 부른다. 가슴이 아프고 조일 때 노래를 부르면 마음이 확 뚫리는 듯 시원함을 느끼기 때문이다. 선율 속에 또 하나의 나의 인생의 길이 열리고 있는 순간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