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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827. 성녀 모니카 기념일. 묵상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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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독서<여러분은 그리스도 안에서 어느 모로나 풍요로워졌습니다.>(1코린1,1-9)
1 하느님의 뜻에 따라 그리스도 예수님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은 바오로와 소스테네스 형제가 코린토에 있는 하느님의 교회에 인사합니다. 2 곧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거룩하게 되어 다른 신자들이 사는 곳이든 우리가 사는 곳이든 어디에서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받들어 부르는 모든 이들과 함께 성도로 부르심을 받은 여러분에게 인사합니다. 3 하느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은총과 평화가 여러분에게 내리기를 빕니다. 4 나는 하느님께서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여러분에게 베푸신 은총을 생각하며, 여러분을 두고 늘 나의 하느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5 여러분은 그리스도 안에서 어느 모로나 풍요로워졌습니다. 어떠한 말에서나 어떠한 지식에서나 그렇습니다. 6 그리스도에 관한 증언이 여러분 가운데에 튼튼히 자리를 잡은 것입니다. 7 그리하여 여러분은 어떠한 은사도 부족함이 없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시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8 그분께서는 또한 여러분을 끝까지 굳세게 하시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날에 흠잡을 데가 없게 해 주실 것입니다. 9 하느님은 성실하신 분이십니다. 그분께서 당신의 아드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친교를 맺도록 여러분을 불러 주셨습니다. 복음<너희도 준비하고 있어라.>(마태24,42-51)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42 “깨어 있어라. 너희의 주인이 어느 날에 올지 너희가 모르기 때문이다. 43 이것을 명심하여라. 도둑이 밤 몇 시에 올지 집주인이 알면, 깨어 있으면서 도둑이 자기 집을 뚫고 들어오도록 내버려두지 않을 것이다. 44 그러니 너희도 준비하고 있어라. 너희가 생각하지도 않은 때에 사람의 아들이 올 것이기 때문이다. 45 주인이 종에게 자기 집안 식솔들을 맡겨 그들에게 제때에 양식을 내주게 하였으면, 어떻게 하는 종이 충실하고 슬기로운 종이겠느냐? 46 행복하여라, 주인이 돌아와서 볼 때에 그렇게 일하고 있는 종! 47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주인은 자기의 모든 재산을 그에게 맡길 것이다. 48 그러나 만일 그가 못된 종이어서 마음속으로 ‘주인이 늦어지는구나.’ 하고 생각하며, 49 동료들을 때리기 시작하고 또 술꾼들과 어울려 먹고 마시면, 50 예상하지 못한 날, 짐작하지 못한 시간에 그 종의 주인이 와서, 51 그를 처단하여 위선자들과 같은 운명을 겪게 할 것이다. 거기에서 그는 울며 이를 갈 것이다.” <또는, 모니카기념일 독서(집회 26,1-4.13-16)와 복음(루카 7,11-17)을 봉독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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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827. 성녀 모니카 기념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2026.08.27 04:59
- 아전인수를 잘하는 행복한 종
“어떻게 하는 종이 충실하고 슬기로운 종이겠느냐?”
오늘 복음은 충실하고 슬기로운 종에 관한 비유인데 루카 복음에서는 종 중에서도 집사에 관한 비유입니다. 그러니까 종 중에서도 주인을 대신해 주인집의 재산과 종들을 관리하는 종입니다.
그러니까 일반 종이라면 주인에게 충실하기만 하면 되지만 관리자인 집사는 충실하기도 하고 슬기롭기도 해야 합니다. 그래서 충실하고 슬기로운 종에 관해서 복음도 얘기합니다.
먼저 충실함에 관해서 보겠습니다. 충실한 것은 말할 것도 없이 주인에게 충실한 것인데 오늘 복음을 보면 주인의 식솔들 곧 다른 종들을 잘 관리하는 것이고 그러므로 불충실한 종은 술꾼들과 어울리기만 하고 다른 종들을 폭행하는 종입니다.
효도는 부모에게 용돈과 보약을 잘해 드리는 것도 효도하는 것이겠지만 부모가 사랑하는 다른 형제들에게 잘해주는 것이 효도인 것과 같습니다.
반대로 생각해보면 잘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부모에게 제일 불효하는 것은 부모에게 용돈과 보약을 안 해 드리는 것이 아니라 형제들과의 사이가 좋지 않고 혼자서 부모의 유산을 다 차지하려는 것이잖습니까?
사랑으로 치면 부모도 사랑하고 형제도 사랑하는 것이 효도인 것과 같고, 하느님을 만유 위에 사랑할 뿐 아니라 이웃도 자신처럼 사랑하는 겁니다. 이것이 주인이신 하느님께 충실하면서도 지혜로운 종의 처신입니다.
그런데 충실하면서도 지혜로운 것을 이런 측면에서도 볼 수 있지만 저는 오늘 다른 측면에서도 보고 싶습니다.
슬기로운 종은 충실하기만 하지 않고 행복도 해야 합니다. 주인을 위해서 죽으라고 일만 하고 자기는 행복하지 않으면 미련한 것입니다.
아주 이기주의적으로 얘기하면 주인에게 충실한 것도 다 나의 행복을 위해서 그러는 것이지 그럴 수 없다면 굳이 충실할 필요 없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오늘 비유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 행복하여라, 주인이 돌아와서 볼 때에 그렇게 일하고 있는 종! 주인은 자기의 모든 재산을 그에게 맡길 것이다.”
제가 사랑 까닭에 돈을 누구에게 주거나 맡긴다면 첫째는 그 돈을 낭비하거나 허비하지 않는 사람에게, 둘째는 그 돈을 자기의 행복을 위해 쓸 줄 아는 사람에게 셋째는 그 돈을 공동선을 위해 쓸 수 있는 사람에게 주거나 맡길 것입니다.
분명 그러할 것입니다. 저는 제 알량한 사랑으로 준 돈도 낭비되는 것이 싫고 그의 행복에 꼭 이바지하기를 바라는데 사랑이 더 많으신 하느님께서는 더 그러하실 것이고, 하찮은 돈도 그리한다면 귀한 은총과 사랑은 더더욱 그리하실 겁니다.
그래서 오늘 코린토서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 안에서 어느 모로나 풍요로워졌습니다.”
우리도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풍요로워져야 합니다. 그분의 사랑이 풍요롭지 않은 게 아니지 않습니까? 넘치도록 부어 주시지 않습니까?
넘치도록 부어 주시는 사랑인데 나를 풍요롭게 하지도 못하고 넘쳐서 이웃에게 가지 않는다면 아전인수(我田引水)를 잘하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도랑의 물이 콸콸 흘러가는데 내 논에 물을 끌어들이지 않는다면 그래서 내 논도 적시지 못하고 옆 논으로 흘러넘치지도 않는다면 우리는 얼마나 불충실하고 얼마나 불행하고 어리석은 사람입니까?
어제 23장에서 율법 학자와 바리사이들에게는 그렇게 불행하다고 하신 주님께서 오늘 24장에서는 제자들에게 행복에 관해 말씀하시는데 이는 우리가 율법 학자와 바리사이와 달리 당신의 행복한 제자 되라는 뜻이겠습니다.
충실함과 슬기로움으로 아전인수를 잘하는 풍요롭고 행복한 제자들이 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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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827. 성녀 모니카 기념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오늘의 복음 말씀 묵상 ✝️
마태 24,42-51
오늘 복음의 열쇳말은 ‘깨어 있어라’입니다. 그리고 ‘충실하고 슬기로운 종’의 모습은 ‘제때에 양식을 내주며’ 깨어 주인을 기다리는 종입니다. 반대로 ‘못된 종’은 ‘주인이 늦어지는구나’ 하며 ‘깨어 있기를 포기한’ 종입니다. 결국 이 비유는 ‘끝까지 깨어 기다림’의 이야기입니다.
오늘 우리가 기리는 성녀 모니카가 바로 이 ‘충실하고 슬기로운 종’의 살아 있는 모습입니다. 그는 아들 아우구스티노를 위해 수십 년을 ‘깨어’ 기도했습니다. 아들이 이단에 빠지고 방황하는 긴 세월 동안, 그는 단 한 번도 ‘이제 너무 늦었구나, 포기하자’ 하지 않았습니다. 못된 종이 ‘주인이 늦어지는구나’ 하며 손을 놓았다면, 모니카는 ‘늦어도 반드시 오신다’ 믿으며 깨어 있었습니다.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이러한 ‘깨어 있음’이 곧 ‘사랑’이라고 봅니다. 사랑하기에 깨어 있고, 사랑하기에 ‘제때에 양식을 내주듯’ 돌봅니다. (크리소스토모 자신도 안투사라는 신심 깊은 어머니의 기도 속에 자란 사람이었습니다.) 모니카의 ‘깨어 있음’은 아들을 위해 ‘눈물의 양식’을 끊임없이 내준 어머니의 사랑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깨어 있음은 헛되지 않았습니다. “그 많은 눈물의 아들은 결코 멸망하지 않는다”는 암브로시오의 말 그대로, 아우구스티노는 회개하여 세례를 받았고, 뒷날 교회의 가장 위대한 학자가 되었습니다. 모니카의 ‘깨어 있는 사랑’이 한 영혼을, 나아가 온 교회를 살린 것입니다.
사랑·기쁨의 관점에서 보면 모니카의 눈물은 ‘기쁨의 씨앗’이었습니다. 응답이 더디다고 ‘깨어 있기’를 포기했다면, 그 기쁨의 수확도 없었을 것입니다. 사랑은 ‘끝까지 깨어 기다리는’ 데서 기쁨으로 익습니다. 오늘 우리는 조용히 묻습니다. 나는 ‘주인이 늦어지는구나’ 하며 기다림을 포기하지 않는가? 나는 한 사람을 위해 ‘깨어’ 기도하고 있는가? 나는 ‘제때에 양식을 내주듯’ 사랑으로 돌보는가? 나의 눈물은 ‘포기’가 아니라 ‘기쁨의 씨앗’인가?
주님, 모니카처럼 한 사람을 위해 ‘깨어’ 기도하게 하소서. 응답이 더뎌도 포기하지 않게 하시고, 그 눈물을 끝내 기쁨으로 거두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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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827. 성녀 모니카 기념일.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CAC 매일묵상 내면의 참된 씨앗!
CAC(Center for Action and Contemplation)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호명환 번역)
제가 스스로 만들어낸 허상은 무엇입니까? 제 안에서 덜어내고 비워내얄 할 것은 무엇입니까, 주님?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참 자아와 거짓 자아 내면의 참된 씨앗! 2026년 8월 26일 수요일
수 몽크 키드(Sue Monk Kidd)는 중년기에 접어들며 '참 자아(the true self)'라는 개념을 발견하고 깊이 성찰합니다: 하느님께서는 거듭거듭 여러분과 나를 부르시어, 마이스터 에크하르트가 '참된 씨앗'이라 부른 것을 우리 안에서 가꾸도록 이끄십니다. 영혼 속에 심겨진 그 씨앗, 곧 하느님의 모상이며 참 자아인 우리의 가장 깊은 본성을 돌보도록 부르십니다…. 우리 삶의 여정 속에서 우리는 참된 정체성을 가리는 삶의 습관들을 만들어냅니다. 어둠을 덧씌우며 여러 '거짓 자아'를 세우고, 가면무도회처럼 가면을 쓰고 살아갑니다. 이런 상태가 오래 지속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결국 참 자아의 노래가 우리를 찾아옵니다. 때로는 중년기에, 우리는 다시 '에덴 동산'으로 불려 돌아갑니다. 영혼의 일을 하도록, 하느님께서 우리를 부르십니다…. 영혼은 인정받고 돌봄을 받기를 원합니다. 참된 자아는 꽃처럼 피어나고 자라나기를 갈망합니다. 이 영적 꽃피움의 시작은, 우리가 만들어낸 거짓된 자아와 자아의 패턴을 직면하고, 내 안에 있는 참된 모습—하느님의 모상으로 창조된 본래의 자아—로 돌아가는 데 있습니다. 수 몽크 키드는 영혼의 일(work of the soul)을 조각칼로 나무를 깎아내는 기술(whittling)에 비유합니다: 영혼을 빚어가는 일은 우리의 삶을 손에 들고, 우리가 모을 수 있는 모든 사랑과 식별로써 참된 자아와 닮지 않은 부분들을 부드럽게 깎아내는 것입니다. 그러나 영적 다듬기에서는 그 조각들을 버리지 않습니다. 우리 자신 안의 그 부분들을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모아 통합함으로써 변화가 이루어집니다. 이 과정을 통해 우리는 새로운 온전함에 이르게 됩니다. 영적 다듬기는 신비와의 만남이며, 기다림이고, 내적 공간의 침묵입니다—오늘날 많은 이들이 더 이상 시간을 내지 않는 것들입니다. 솔직히 말하자면, 제가 영적 다듬기를 시작했을 때, 저는 종종 제 '나무토막'을 완강히 붙들고 있었습니다. 결국 지금 모습 그대로도 괜찮지 않은가 하는 마음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어떤 날에는 시도해 보고 싶은 마음이 일었고, 제가 어떻게 거짓된 모습으로 살아왔는지를 발견하고자 갈망하기도 했습니다…. 토머스 머튼의 글은 저에게 큰 격려가 되었습니다. 그는 영적 삶을, 거짓된 자아를 깎아내어 참 자아가 되도록 하는 과정으로 보았습니다. 그는 진정성을 향한 투쟁을 '관상적 위기'라 불렀으며, 누구도 이를 피할 수 없고 결국 모두가 이 과정을 겪게 된다고 강조했습니다. 머튼에 따르면, 우리의 실제 자아는 참된 자아와는 거리가 멀 수 있으며, 깊은 영적 정체성과 심하게 단절되어 있을 수 있습니다. 참 자아에 이르려면, 우리가 스스로 만들어낸 허상과 거짓된 자아로부터 해방되어야 합니다. [1] '나는 얼마나 참된가?' 하고 스스로에게 물었습니다. "내가 만들어낸 허상은 무엇인가? 내가 깎아내야 할 거짓된 자아는 무엇인가?" 이것이 바로 영혼을 다듬는 질문들입니다. 진지하게 받아들이면 그것은 고통스럽고 힘든 과정입니다. 머튼은 "우리는 환상을 잘 알아차리지 못합니다. 특히 우리 자신에 대해 소중히 여기는 환상일수록 더욱 그렇습니다."라고 썼습니다. Story From Our Community 젊은 시절 성령 안에서 세례를 받은 후, 관상기도는 제 삶의 버팀목이자 반석이 되었습니다. 이제 쉰여덟 살이 된 저는 시간이 흐르며 계속해서 변화하고, 새로운 의식의 지평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 Kelly L. References [1] Thomas Merton, The New Man (Farrar, Straus & Giroux, 1961), 63. [2] Thomas Merton, New Seeds of Contemplation (New Directions, 1961), 34. Sue Monk Kidd, When the Heart Waits: Spiritual Direction for Life’s Sacred Questions (HarperCollins, 2006), 47, 49–50. Image Credit and inspiration: Mick Haupt, untitled (detail), 2022, photograph. Unsplash. Click here to enlarge image. 산산이 부서진 거울은 각 조각마다 내재된 빛을 드러냅니다. 거짓 자아를 내려놓는 것은 상실이 아니라, 더 많은 빛이 스며들 수 있도록 길을 열어 주는 돌파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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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827. 성녀 모니카 기념일. 이 마르첼리노 M. 수사님. http://www.ofmkorea.org/ofmkfb/584127 2026.08.26 10:41
가난과 기도 1 하느님께서 들어오시는 거룩한 여백
“당신이 그분을 사랑할 때 당신은 정결해지고, 당신이 그분을 만질 때 당신은 더 깨끗해지며, 당신이 그분을 마음 깊이 맞아들일 때 당신 안에는 아무도 소유하지 않은 맑고 비어 있는 방 하나가 생겨납니다.” (글라라가 프라하의 아녜스에게 보낸 편지) 그 방은 세상의 소음과 욕망을 피해 숨어드는 피난처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당신의 가난한 사랑으로 들어오시는 자리이며, 내가 나 자신으로 가득 차 있지 않기에 비로소 다른 이를 받아들일 수 있고, 내가 가진 것으로 나를 증명하지 않기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선물로 바라볼 수 있는 거룩한 여백입니다.
가난은 아무것도 가지지 않은 상태가 아니라, 아무것도 자기 것이라고 움켜쥐지 않는 마음입니다. 가난은 세상의 모든 것을 버리고 황량한 들판에 홀로 서는 일이 아니라, 내가 가진 모든 것이 나에게서 시작되지 않았음을 아는 것이며, 내가 숨 쉬는 호흡과 오늘이라는 시간과 곁에 있는 사람과 내 안에 아직 남아 있는 작은 선의까지도 모두 나보다 먼저 나를 사랑하신 분에게서 왔음을 고백하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가난은 결핍의 이름이 아니라 감사의 다른 이름이고, 무력함의 표지가 아니라 은총이 흘러 들어올 수 있도록 자신을 열어 놓는 가장 깊은 자유입니다. 내가 가진 것이 나의 존재를 증명해 주는 것이 아니라, 나를 사랑하시는 하느님께서 나의 존재를 지탱하고 계심을 믿는 것이 가난입니다. 내가 무엇을 이루었기 때문에 소중한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 순간에도 여전히 하느님의 사랑 안에 머물고 있음을 받아들이는 것이 가난입니다.
어려운 시절을 함께 견딘 사람들은 압니다. 가난했던 날에는 먹을 것이 넉넉하지 않았으나 서로의 얼굴을 더 자주 바라보았고, 방은 좁았으나 마음은 서로에게 가까웠으며, 혼자서는 견디기 어려운 삶의 무게를 나누어 짊어지면서 사람들은 자신의 약함을 부끄러워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누군가의 손을 빌리지 않고는 하루를 살아갈 수 없었기에 사람들은 비로소 “나는 당신이 필요합니다.”라고 말할 수 있었고, 그 말은 가난이 사람을 낮추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를 낳고 관계를 살리며 서로를 한 몸처럼 묶어 준다는 사실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나는 당신이 필요합니다.”라는 고백은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가난하고도 가장 아름다운 기도입니다. 그 말 안에는 나는 내 생명의 근원이 아니라는 깨달음이 있고, 나 혼자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다는 오래된 교만을 내려놓는 겸손이 있으며, 다른 사람의 도움과 선의를 받아들일 줄 아는 신뢰가 있습니다. 스스로 충만하다고 믿는 사람은 팔을 벌리지 않습니다. 자기 안에 모든 답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타인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으며, 자신이 누구에게도 의존하지 않는다고 여기는 사람은 사랑을 주고받는 관계보다 지배하고 통제하는 관계를 선택합니다. 그러나 가난한 사람은 압니다. 나는 홀로 완전해질 수 없으며, 나에게 부족한 것은 누군가의 다름을 통해 채워지고, 내가 가진 것은 다시 누군가에게 흘러갈 때 비로소 선물이 된다는 사실을 압니다.
가난은 결국 내가 스스로 충만하지 않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일입니다. 그러나 이 부족함은 부끄러움이 아닙니다. 부족함은 관계를 향해 열린 문이고, 다른 사람의 선물을 받아들이는 빈자리이며, 하느님의 은총이 머물 수 있는 공간입니다. 내가 모든 것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다른 사람을 필요로 하고, 내가 모든 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말을 들으며,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없기 때문에 형제와 함께 걸어갑니다. 나의 가난이 너의 선물을 받아들이는 공간이 되고, 너의 가난이 나의 사랑을 흘려보낼 길이 될 때, 우리는 서로에게 하느님께서 오시는 자리가 됩니다. 가난은 그렇게 하느님께서 들어오시는 빈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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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827. 성녀 모니카 기념일. 이 마르첼리노 M. 수사님. http://www.ofmkorea.org/ofmkfb/584146 2026.08.27 01:21
가난과 기도 2 팔을 벌리시는 하느님과 포옹의 사랑
가난은 팔을 벌리는 일입니다. 나를 보호하기 위해 가슴 앞에 단단히 포개었던 두 팔을 천천히 펼쳐, 다른 이가 내 삶 안으로 들어올 수 있도록 자리를 내어 주는 일입니다. 팔을 벌리는 것은 내가 나 자신만으로 만족하지 않는다는 표시이며, 나와 다른 존재를 갈망한다는 몸의 기도입니다.
나는 당신을 내 방식으로 바꾸지 않겠습니다. 나는 당신을 이해한다는 이름으로 내 생각 안에 가두지 않겠습니다. 나는 당신의 신비를 남겨 두고, 당신이 나와 다르다는 사실을 존중하며, 당신이 나에게로 오는 만큼 나도 당신에게로 걸어가겠습니다. 이것이 포옹이며, 이것이 가난이며, 이것이 관계 안에서 드러나는 하느님 사랑의 형상입니다. 참된 포옹은 상대를 자기 안으로 흡수하지 않습니다. 사랑한다는 이유로 상대의 자유를 빼앗지 않고, 가까워졌다는 이유로 상대의 경계를 무너뜨리지 않으며, 하나가 되기를 원한다는 이유로 상대를 나와 똑같은 사람으로 만들지 않습니다.
포옹했던 팔은 다시 펼쳐져야 합니다. 그래야 너는 너로 남고 나는 나로 남으며, 서로 다른 두 존재가 사랑 안에서 가까워지면서도 각자의 고유함을 잃지 않을 수 있습니다. 사랑은 다름을 제거하여 하나를 만드는 일이 아니라, 서로의 다름을 존중하면서도 서로에게 자신을 내어주는 신비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이 바로 그러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시되 우리를 소유하지 않으시고, 우리를 부르시되 강제로 끌고 가지 않으시며, 당신 자신을 온전히 내어주시면서도 우리가 자유롭게 응답할 때까지 기다리십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전능함으로 우리를 굴복시키지 않으시고, 당신의 힘으로 우리의 자유를 짓밟지 않으시며, 오히려 우리를 위하여 작아지고 약해지고 가난해지십니다. 말씀 한마디로 하늘과 땅을 창조하신 분이 한 여인의 태중에 작은 생명으로 머무시고, 모든 것을 다스리시는 분이 여관의 방 한 칸조차 얻지 못한 채 구유에 누우시며, 생명의 주인이신 분이 사람들의 손에 붙잡혀 옷 벗김을 당하고 십자가 위에 아무것도 지니지 않은 채 매달리십니다.
십자가는 하느님의 가난이 가장 깊이 드러난 자리입니다. 그곳에서 하느님께서는 아무것도 움켜쥐지 않으시고, 아무것도 자신을 위하여 남겨 두지 않으시며, 당신의 몸과 피와 숨과 마지막 말씀까지 모두 내어주십니다. 십자가 위의 예수님은 무엇을 얻기 위하여 죽으신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이에게 당신 자신을 남김없이 주기 위하여 죽으셨습니다. 그분의 가난은 빈곤이 아니라 사랑의 흘러넘침이며, 그분의 무력함은 패배가 아니라 타인의 자유를 끝까지 존중하는 전능한 사랑의 모습입니다.
세상의 힘은 상대를 움직이고 굴복시키는 능력으로 드러나지만, 하느님의 힘은 자신을 내어주고 기다리며 끝까지 사랑하는 능력으로 드러납니다. 세상의 권력은 높은 자리에 올라 더 많은 것을 소유하려 하지만, 하느님의 전능은 가장 낮은 자리로 내려와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는 사랑이 됩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내어주시면서도 소멸되지 않으시고, 약함 안으로 들어가시면서도 사랑을 잃지 않으시며, 거절당하고 상처받으시면서도 다시 사랑하는 일을 멈추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십자가의 가난은 하느님 사랑의 무력함이 아니라, 세상의 어떤 폭력도 파괴할 수 없는 사랑의 강함입니다.
십자가 위에 펼쳐진 두 팔은 세상을 향한 하느님의 영원한 포옹입니다. 그 팔은 누구도 배제하지 않고, 실패한 사람도 죄인도 상처 입은 사람도 멀리 서 있는 사람도 모두 불러들입니다. 그러나 그 포옹은 강제하지 않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그저 바라보시며 기다리십니다. 마치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아기처럼, 마치 거절당할 가능성까지 받아들인 연인처럼, 당신을 받아들일 것인지 말 것인지 우리의 자유에 맡기십니다. 하느님의 이 가난 앞에서 우리는 더 이상 힘으로 사랑할 수 없습니다. 사랑은 설득하고 기다리며 곁에 머물고, 상대가 스스로 문을 열 때까지 존중하는 것임을 배웁니다. 가족과 공동체 안에서 누군가를 변화시키려는 조급함을 내려놓고, 내가 원하는 사람이 되도록 통제하려는 욕망을 버리며, 그 사람 안에서 하느님께서 일하실 자리를 남겨 둡니다.
가난한 사랑은 상대를 고치려 하기 전에 그의 아픔을 듣습니다. 충고하기 전에 곁에 앉고, 판단하기 전에 그가 걸어온 길을 헤아리며, 무엇을 해야 하는지 가르치기 전에 그의 이름을 불러 줍니다. 사랑은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없지만, 누구도 혼자 고통받지 않게 할 수 있습니다. 가난은 해결책이 없는 자리에서도 함께 머무를 수 있는 능력입니다. 말로 위로할 수 없는 슬픔 앞에서 침묵으로 곁을 지키고, 죽어 가는 사람의 손을 잡으며, 되돌릴 수 없는 상실 앞에서 섣불리 하느님의 뜻을 설명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해할 수 없는 신비를 그대로 남겨 두면서도 떠나지 않는 포옹, 그것이 가난한 사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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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827. 성녀 모니카 기념일.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숨영성 묵상글 2026.08.27. 05:50
주님께서 내미시는 손을 다정히 붙잡고 '지금'의 순간을 걸어갑시다!~~~
일본의 조동종을 시작한 선승 도겐(道元: 1200-1253) 선사는 "머리에 불이 붙은 듯이 명상하라!"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많은 시간을 과거를 돌아보거나 미래를 내다보는 데 쓰지만, 위급한 상황에서는 갑자기 우리가 무언가를 할 수 있는 유일한 자리, 곧 "지금"으로 돌아옵니다. 도겐 선사가 강조했던 수행법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지관타좌(只管打座), "오직 앉는다!"인데, 여기서 '앉는다'는 것은 단순히 육체의 '앉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정신과 영을 앉게 하는 것, 즉 오로지 지금에 머무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도 가만히 앉아서 묵상을 하다 보면 우리의 생각이 과거나 미래를 이리저리 떠돌아다니게 되는 경험을 다 해 보았을 겁니다. 몸은 가만히 있는데 생각은 가만히 있지 못하는 것이지요. 그러니 어쩌면 이 "오로지 앉는 것"은 정말로 어려운 일인지 모릅니다. 그래서 도겐 선사는 '지금 머리에 불이 붙어 있는 듯' 명상하라고 한 것입니다. 그런데 언뜻 보면 종교인들은 특히 과거와 미래에 머무는 사람들처럼 보입니다. 어느 종교든 과거를 알아 맞추고 미래를 이야기하는 사람들을 특별한 사람들로 여기지 않습니까?! 그래서 예언자가 있는 것이고요.... 하지만... 다 아시겠지만, 예언자는 본래 미래를 이야기해 주는 사람이 아니라 지금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말해 주는 사람입니다. 좀 더 정확하게 이야기하자면 지금 하느님께서 이 세상에 무엇을 말씀하시고 계신지, 그리고 우리는 그 말씀을 어떻게 받아들여 살아내야 하는지를 말해 주는 사람입니다. 지금 이 말씀을 받아들여 그 뜻을 살아내지 못하면 앞으로 어떤 일이 일어날지는 당연히 알게 되는 것이겠지요... 그래서 예언자가 미래를 이야기해 주는 사람처럼 여겨지는 것입니다. 반면에 사업을 하는 사람들은 현재에 사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들은 최신 자료와 수치를 가지고 있고,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아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사실 여기에는 두 가지 왜곡된 모습이 있습니다. 참으로 신앙적인 사람은 "지금"을 사는 사람들이고, 사업가들은 실제로 미래를 위해 사는 사람들이라는 사실입니다. 사업가들에게는 현재보다 더 중요한 것이 항상 있습니다. 그들은 늘 야망 때문에 바쁘고 서두르며 시간을 내지 못합니다. 혼인 잔치에 초대받은 사람들은 농부와 상인들이었는데, 모두 급한 일이 있어 오지 않았습니다(마태 22,5). 그러나 다른 이들, 곧 할 일이 없는 이들은 모두 왔습니다. 여기서 할 일이 없는 이들이란 잡다한 일과 생각에 빠져 있지 않은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과거에 크게 집중하지 않으십니다. 대신 루카 복음에서는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 이루어졌다!"(루카 4,21) 하고 말씀하십니다. 또 마태오 복음에서는 "내일을 걱정하지 마라. 내일 걱정은 내일이 할 것이다. 그날 고생은 그날로 충분하다."(마태 6,34)라고도 하시고, "깨어 있어라!" 하고 외치십니다. 가장 지혜로운 그리스도인들은 그분을 따라 지금 깨어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프랑스 캉브레의 대주교였던 프랑수아 페넬롱(1651-1715)은 "지혜롭고 부지런한 순례자들은 매 걸음을 살피며, 언제나 바로 앞의 길에 눈을 둔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종교인들이 신앙을 사업처럼 다루기 시작하면 점차 사업가의 마음을 갖게 됩니다. 이런 일은 갑자기 어느 순간 닥쳐오는 것이 아니라 조금씩 서서히 일어납니다. 마치 안개 낀 날 산책을 하면 옷이 서서히 젖지만 오랫동안 알아차리지 못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을 살지 않고 과거와 미래에 정신이 빠져 살아간다면 이런 일이 생기는 것이겠지요... 묵시록에서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보라, 내가 문 앞에 서서 문을 두드리고 있. 누구든지 내 목소리를 듣고 문을 열면, 나는 그의 집에 들어가 그와 함께 먹고 그도 나와 함께 먹을 것이다."(묵시 3,20). 주님께서는 매 순간의 우리 마음의 문을 두드리시며 우리가 문을 열어 당신을 맞이하기를 기다리신다는 것이지요. 우리로 하여금 당신과 함께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을 살아가도록 배려해 주시는 것입니다. '나' 혼자서가 아니라 우리의 온갖 근심 걱정을 송두리째 주님께 맡기고 당신과 더불어 주어진 지금의 이 시간을 살아가라고 당부하시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과거에 연연하지 않으십니다. 그리고 또 앞으로 어떤 일이 일어날지에 대해서도 전혀 관심을 갖지 않으십니다. 오로지 지금 당신과 함께 당신의 손을 붙잡고 이 여정을 굳건히 걸어가자고 손을 내미시는 것입니다. "주님, 오늘도 제 마음의 문을 열어 당신을 맞아들이고 당신께서 내미시는 손을 다정히 붙잡고 이 시간을 걸어가게 하소서. 제 삶의 모든 순간이 당신과 함께 걷는 순간이 되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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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로우 묵상] 서하 님 이야기 ( 2편) - - - (8/26. 23:45)
https://bbs.catholic.or.kr/bbs/bbs_view.asp?num=21&id=2136456&menu=4770 애도_연중 제21주간 수요일을 닫으며 애도_연중 제21주간 수요일을 닫으며 bbs.catholic.or.kr 서하 260826. 21:54
애도
칠이 벗겨진 자리에 화가 먼저 뛰쳐나왔네 급하게, 단호하게 무언가를 지키려는 듯
그 아래 오래 방치된 수치심 하나 웅크려 있었네 얼마나 오래 혼자 두었던가
망가진 회칠을 바 라 본 다
실패가 아니라 아파하는 자리 일그러진 나 너머에 하느님께서 아름답게 빚으신 내가 보이네
바라보며 아파하는 자리 회칠 벗겨진 그 틈으로 다시, 그분이 보이네
연중 제21주간 수요일을 닫으며... 서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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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로우 묵상] 기다림 자체가 존재의 자리_성녀 모니카 기념일을 준비하며.. https://bbs.catholic.or.kr/bbs/bbs_view.asp?num=1&id=2136457&menu=4770 [슬로우 묵상] 기다림 자체가 존재의 자리_성녀 모니카 기념일을 준비하며.. [슬로우 묵상] 기다림 자체가 존재의 자리_성녀 모니카 기념일을 준비하며.. bbs.catholic.or.kr 서하 260826. 22:31
성녀 모니카 기념일 코린토 1서 1,1-9 / 마태오 24,42-51
"행복하여라, 주인이 돌아와서 볼 때에 그렇게 일하고 있는 종!" 마태오 24,46
기다림 자체가 존재의 자리
깨어 있으라는 말은 "지금을 살라"는 뜻으로 들립니다. 복음에서 나쁜 종은 이렇게 생각합니다. "주인이 늦게 오시겠지." 그러고는 마음대로 삽니다. 그가 잘못한 건 시간을 잘못 계산한 게 아닙니다. 지금 이 순간을 소홀히 한 것이 문제입니다. 깨어 있다는 건 미래를 걱정하는 게 아닙니다. 지금, 내가 있어야 할 자리에 성실히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부족함 없는 사람
바오로 사도는 말합니다. "여러분은 어떤 은사에도 부족함이 없습니다." 아직 아무것도 이루지 않았는데도 이렇게 말합니다. 하느님께 부르심을 받았다는 사실 자체가 이미 충분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기다리는 건 뭔가 모자란 걸 채우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이미 받은 사랑에 응답하기 위해서입니다.
기다림은 두려움이 아니라 믿음
"여러분을 불러 주신 하느님은 신실하십니다." 하느님이 먼저 신실하시기 때문에, 우리가 안심하고 기다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다림은 두려움이 아니라 믿음입니다.
은총은 이미 우리 안에
은총은 멀리서 나중에 오는 것이 아니라, 이미 우리 안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그러니 깨어 있다는 건 대단한 일을 해내는 게 아니라, 내 삶을 있는 그대로 정직하게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기다림은 벌 받을까 두려워 조마조마한 시간이 아닙니다. 하느님이 약속하신 것을 향해 한 걸음씩 걸어가는 희망의 시간입니다.
기다림 그 자체를 살아낸 사람, 모니카
모니카 성녀는 아들 아우구스티노가 돌아오기를 오랫동안 기도했습니다. 결과를 보지 못한 채 흘러간 시간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그 시간을 그냥 버틴 게 아닙니다. 기다림 자체를 자신이 있어야 할 자리로 삼았습니다. 기다림은 빈 시간이 아닙니다. 그 자체가 이미 존재의 자리입니다.
성녀 모니카처럼, 우리도 오늘을 깨어 살 수 있기를 청합니다. 아리 셰퍼(1795~1858)가 그린 성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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