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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무지 보지 못한 일
마가복음 2:1-12 2023/10/15 성령강림 후 제20주
2:1 수 일 후에 예수께서 다시 가버나움에 들어가시니 집에 계시다는 소문이 들린지라
2:2 많은 사람이 모여서 문 앞까지도 들어설 자리가 없게 되었는데 예수께서 그들에게 도를 말씀하시더니
2:3 사람들이 한 중풍병자를 네 사람에게 메워 가지고 예수께로 올새
2:4 무리들 때문에 예수께 데려갈 수 없으므로 그 계신 곳의 지붕을 뜯어 구멍을 내고 중풍병자가 누운 상을 달아 내리니
2:5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작은 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
2:6 어떤 서기관들이 거기 앉아서 마음에 생각하기를
2:7 이 사람이 어찌 이렇게 말하는가 신성 모독이로다 오직 하나님 한 분 외에는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
2:8 그들이 속으로 이렇게 생각하는 줄을 예수께서 곧 중심에 아시고 이르시되 어찌하여 이것을 마음에 생각하느냐
2:9 중풍병자에게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걸어가라 하는 말 중에서 어느 것이 쉽겠느냐
2:10 그러나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 하시고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시되
2:11 내가 네게 이르노니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하시니
2:12 그가 일어나 곧 상을 가지고 모든 사람 앞에서 나가거늘 그들이 다 놀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이르되 우리가 이런 일을 도무지 보지 못하였다 하더라
평안의 인사를 드리겠습니다.
하나님의 은총과 평화가
우리 모두에게 그리고 우리 자녀와 이웃들에게
늘 함께 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김세환 씨가 부른 노래 가운데 이런 가사가 나옵니다.
사랑하는 마음보다 더 좋은 건 없을 걸
사랑받은 그 순간보다 흐뭇한 건 없을 걸
천만 번 더 들어도 기분 좋은 말?
'사랑해’
한번 불러 볼까요?
사랑하는 마음보다 더 좋은 건 없을 걸
사랑받는 그 순간보다 흐뭇한 건 없을 걸
사랑의 눈길보다 정다운 건 없을 걸
스쳐 닿는 그 손끝보다 짜릿한 건 없을 걸
혼자선 알 수 없는 야릇한 기쁨
천만번 더 들어도 기분 좋은 말 사랑해
사랑하는 마음보다 신나는 건 없을 걸
밀려오는 그 마음보다 포근한 건 없을 걸
사랑이란 이렇게 좋은 것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모든 사랑이 다 좋은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방향을 잘못 잡은 사랑은 그 사람을 병들게 할 뿐만 아니라 사회적으로도 아주 심각한 문제를 야기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방향을 잘못 잡은 사랑’에 대한 위험성을 이렇게 경고했습니다.
(새)딤후3:1 그대는 이것을 알아두십시오. 말세에 어려운 때가 올 것입니다.
3:2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뽐내며, 교만하며, 하나님을 모독하며, 부모에게 순종하지 아니하며, 감사할 줄 모르며, 불경스러우며,
3:3 무정하며, 원한을 풀지 아니하며, 비방하며, 절제가 없으며, 난폭하며, 선을 좋아하지 아니하며,
3:4 배신하며, 무모하며, 자만하며, 하나님보다 쾌락을 더 사랑하며,
3:5 겉으로는 경건하게 보이나, 경건함의 능력은 부인할 것입니다.
그대는 이런 사람들을 멀리하십시오.
여기에 보면, ‘방향을 잘못 잡은 그릇된 사랑’ 세 가지를 언급합니다.
(새)딤후3:2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3:4 배신하며, 무모하며, 자만하며, 하나님보다 쾌락을 더 사랑하며,
그러면 ①자기를 사랑하는 일이 왜 문제가 될까요?
이에 대한 바울의 답변은 아주 명확했습니다.
빌2:21 모두 다 자기의 일에만 관심이 있고, 그리스도 예수의 일(서로 사랑)에는 관심이 없습니다.(기 때문입니다. 아주 심각한 문제이지요.)
②돈을 사랑하는 일 역시 그릇된 사랑입니다.
왜냐하면, 돈은 사용하는 도구이지 사랑의 대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돈에 집착하고 돈을 사랑한다면, 그것은 돈이 가지고 있는 ‘유사 전능성’에 여러분들이 속고 있는 것입니다.
③쾌락을 사랑하는 일 역시 그릇된 사랑의 행동입니다.
쾌락(즐거움을 쫒는 일)
사실 그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육체의 쾌락에 빠져 그 즐거움을 주신 하나님을 잃어버린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래서 바울이 이런 경고를 한 것입니다.
하나님보다 쾌락을 더 사랑하다보면 결국에는
딤후3:5 겉으로는 경건하게 보이나, 경건함의 능력은 부인할 것입니다.
다시 말해, 경건의 모양(고상한) 껍데기만 남아 있지 실제로 살아 있어야할 경건의 능력(힘)이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방향을 잘못 잡은 그릇된 사랑’으로 말미암아 나타나게 되는 말세의 증거들이라고 사도 바울은 말합니다.
그렇다면 천만 번 더 들어도 기분 좋은 말 '사랑해’의 원형,
그 뿌리를 어디서 찾아야할까요?
좀 어려운 말인데, ‘incarnation(성육신)’에서 찾아야 합니다.
인간의 몸을 입고 위에서 아래로 내려오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그 뿌리를 찾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carnation’
어디서 많이 들어본 말이지요.
어버이날 달아 드리는 꽃말입니다.
카네이션, 향이 좋던가요?
사실 잘 모르겠지요.
서양에서는 죽은 사람의 냄새가 난다고 해서 식탁에 놓지 않는 곳이 카네이션이라고 합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부모님의 사랑을 상징하는 꽃이 된 이유는 carnation이 가진 꽃말의 뜻 ‘사랑’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사랑’이 우리 안에 들어 온 일이 일어납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인간의 몸을 입고 위에서 아래로 내려오신 것이지요.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사랑의 일에 전치사 in을 붙여 ‘incarnation’이라고 부르게 된 것입니다. ‘인간의 몸을 입고 위에서 아래로 내려온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뜻입니다. 우리말로 번역해서 짧게 ‘성육신’이라고도 부릅니다.
오늘 본문으로 돌아오겠습니다.
‘incarnation(성육신)’하신 예수님이 갈릴리 호수 북쪽 가버나움에 계실 때 있었던 일입니다.
예수님이 가버나움에 있는 어느 집에 있다는 소문이 퍼지자
정말 많은 사람들이 그 집으로 모여들게 되었습니다.
왜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게 되었을까요?
그것은 앞서 일어났던 놀라운 일들 때문이었습니다.
①(새)막1:21 그들은 가버나움으로 들어갔다. 예수께서 안식일에 곧바로 회당에 들어가서 가르치셨는데,
1:22 사람들은 그의 가르침에 놀랐다. 예수께서 율법학자들과는 달리 권위 있게 가르치셨기 때문이다.
②(새)막1:23 그 때에 (가버나움)회당에 악한 귀신 들린 사람이 하나 있었는데, 그가 큰소리로 이렇게 말하였다.
1:24 "나사렛 사람 예수님, 왜 우리를 간섭하려 하십니까? 우리를 없애려고 오셨습니까? 나는 당신이 누구인지 압니다. 하나님께서 보내신 거룩한 분입니다."
1:25 예수께서 그를 꾸짖어 말씀하셨다. "입을 다물고 이 사람에게서 나가라."
1:26 그러자 악한 귀신은 그에게 경련을 일으켜 놓고서 큰 소리를 지르며 떠나갔다.
1:27 사람들이 모두 놀라서 "이게 어찌된 일이냐? 권위 있는 새로운 가르침이다! 그가 악한 귀신들에게 명하시니, 그들도 복종하는구나!" 하면서 서로 물었다.
1:28 그리하여 예수의 소문이 곧 갈릴리 주위의 온 지역에 두루 퍼졌다.
또 이런 일도 벌어졌습니다.
③(새)막1:29 그들은 회당에서 나와서, 곧바로 야고보와 요한과 함께 시몬과 안드레의 집으로 갔다.
1:30 마침 시몬의 장모가 열병으로 누워 있었는데, 사람들은 그 사정을 예수께 말씀드렸다.
1:31 예수께서 그 여자에게 다가가셔서 그 손을 잡아 일으키시니, 열병이 떠나고, 그 여자는 그들의 시중을 들었다.
하나 더 볼까요?
④(새)막1:32 해가 져서 날이 저물 때에, 사람들이 모든 병자와 귀신 들린 사람을 예수께로 데리고 왔다.
1:33 그리고 온 동네 사람이 문 앞에 모여들었다.
1:34 그는 온갖 병에 걸린 사람들을 고쳐 주시고, 많은 귀신을 내쫓으셨다. 예수께서는 귀신들이 말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셨다. 그들이 예수가 누구인지를 알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소문을 들은 많은 가버나움 사람들이 모여 들 수밖에 없겠지요.
어찌나 많은 사람들이 모였는지 예수님이 계신 곳에 더 이상 들어설 수가 없었습니다. 그때 한 중풍 병자를 네 사람이 매워 데리고 옵니다.
하지만 들어갈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러자 이 네 사람이 해서는 안 될, 아주 과격한 행동을 합니다.
예수가 계신 곳 위의 지붕을 걷더니, 구멍을 뚫고,
마치 예수님이 육신의 몸을 입고 위에서 아래로 ‘incarnation’한 것처럼
중풍 병자를 누운 상 그대로 위에서 아래로 내린 것이었습니다.
막2:4 무리들 때문에 예수께 데려갈 수 없으므로 그 계신 곳의 지붕을 뜯어 구멍을 내고 중풍병자가 누운 상을 달아 내리니
그러자 이 낯선 광경을 지켜보신 예수님이 대뜸 이렇게 선포하십니다.
바로 이 말씀이었습니다.
막2:5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작은 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
"이 사람(히 ‘아담’ ‘벤 아담’)아! 네 죄가 용서받았다"
죄 사함, 죄의 용서
사실 이 말씀(선언)은 중풍 병자가 듣고 싶은 말이 아니었습니다.
물론 죄 용서의 선언이 나쁜 것은 아니었습니다.
언젠가는 해결해야할 문제이겠지요.
하지만 그것보다 더 시급하게 해결해야할 일이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2장 9절에 나오는 후자의 일이었습니다.
막2:9 중풍병자에게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걸어가라 하는 말 중에서 어느 것이 쉽겠느냐
그런데 이 중풍 병자의 바람과 달리
예수님이 선언하신 말씀은 ‘이 사람아!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였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왜 앞서 일어났던 일들과 다르게 말씀하셨던 것일까요?
‘죄 사함, 죄 용서의 일’이 바로 incarnation, 예수님이 육신의 몸을 입고 위(하늘)로부터 아래(이 땅)에 오신 이유였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자 이 희한한 일과 이 희한한 대화를 지켜보던 서기관이 발끈합니다.
막2:6 어떤 서기관들이 거기 앉아서 마음에 생각하기를
2:7 이 사람이 어찌 이렇게 말하는가 신성 모독이로다 오직 하나님 한 분 외에는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
어떻습니까?
‘오직 하나님 한 분 외에는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는 서기관의 주장 맞습니까, 틀립니까?
맞습니다.
율법으로는 문제될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문제는 그들의 마음과 생각이 방향을 잃어버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서기관에 눈에는 incarnation, 위로부터 아래로 육신의 몸을 입고 오신 율법의 주인 하나님이 보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속으로만 구시렁거리지요.
‘신성 모독인데...’
‘오직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죄 사할 권세가 없는데...’
그러자 우리 주님이 드디어 자신의 존재를 분명하게 밝히십니다.
막2:9 중풍병자에게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걸어가라 하는 말 중에서 어느 것이 쉽겠느냐
2:10 그러나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 하시고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시되
2:11 내가 네게 이르노니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하시니
2:12 그가 일어나 곧 상을 가지고 모든 사람 앞에서 나가거늘
그러자 이 희한한 일을 목격한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이렇게 말합니다.
그들이 다 놀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이르되 우리가 이런 일을 도무지 보지 못하였다 하더라
말씀을 마칩니다.
만일입니다.
만약, 중풍 병자에게 침상을 맨 네 사람이 없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죄 사함도, 치유함도 없었을 것입니다.
역사 속에 사라진 중중병자가 되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중풍 병자에게는 자신의 침상을 매어 준 네 사람이 있었습니다.
마치 하나님의 법궤를 맨 고자자손처럼 자신의 침상을 긍휼과 자비로 매어 준 네 사람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주님이 이 영광스러운 일의 시작을 이렇게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막2:5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작은 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무슨 말입니까?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로 똘똘 뭉친 네 사람의 믿음 속에서
오늘 설교의 제목처럼 ‘도무지 보지 못한 일’이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저는 여기서 흥분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 우리 장정교회가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로 똘똘 뭉친 네 사람이 된다면, 얼마나 놀라운 일이 벌어질까?
기도하고 싶은 분에게 기도의 친구가 되어드리고,
예배드리고 싶은 분에게 예배의 친구가 되어드린다면, 얼마나 놀라운 일이 벌어질까?
애통하는 분에게 함께 슬퍼하는 친구가 되어 주고,
의를 찾는 분에게 힘께 의를 찾아 가는 친구가 되어 준다면, 얼마나 놀라운 일이 벌어질까?
그러니 여러분
오늘 설교의 제목처럼 ‘도무지 보지 못한 일들’ 그 영광을 기대하시면서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로 똘똘 뭉친 네 사람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